낸시 아우어 포크 / 조은수 옮김

필자는 오랫동안 고대 인도 불교사에 나타나는 아주 기묘한 현상에 대해서 관심을 쏟아 왔다.

아프간 군대가 인도를 침략하기 시작한 1198년 당시 인도에는 비구 교단이 번성하고 있었고, 침략자들은 그 후 240년간 인도의 주요 불교 사원들을 파괴하게 된다.

그런데 그 몇 세기 전에 이미 비구니 교단은 역사가들의 시선에서 완전히 사라져 버렸다.(인도 역사 속에서 비구니 교단은 9세기경 사라졌다고 본다. 불교가 인도에서 소멸한 시기는 대략 15세기임.−옮긴이) 하지만 중국과 동아시아 지역에서는 여성 걸식자라는 뜻의 비구니 교단이 근대까지도 번성하고 있었다.

불교의 비구니 교단과 비슷한 자이나교의 교단은 그보다 일찍 성립되었으며 아직도 현대 인도의 자이나교 지역에서 번창하고 있다. 더군다나 비구니들의 존재는 약해져도 재가 여성들은 인도 불교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었다. 부유한 재가 여성 신도들의 보시행에 관한 비문 등의 기록들은 불교교단이 소멸하기 전까지도 보인다. 또한 비구니에 대한 기록이 거의 나타나지 않는 그 시점에도 금강승의 여성수행자(siddha)가 나타나고 있다.

비구니에 관한 기록은 매우 간략하여서, 왜 비구니 교단이 소멸하게 되었는지 구체적으로는 알 수가 없다. 아마도 불교계의 경제적 기반이 일반적으로 기울면서, 비구와 비구니 승단에 장기적인 영향을 주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그러나 이러한 불운은 비구니에게 먼저 다가왔고 또한 더욱 심하게 닥쳐왔다. 따라서 우리는 왜 비구승과 비구니승이 서로 다른 운명에 놓이게 되었는지에 대한 이유를 찾아보아야 할 것이다.

그 뿌리를 찾아가 본다면, 여성교단이 없어진 가장 근본적인 이유는 불교 전통이 출가 수행하고자 하는 여성들의 생각을 완전하게 긍정해 줄 수는 없었다는 점에 있을 것이다. 비구니가 됨으로써 제도적으로는 영적으로 그리고 지적으로 성장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졌지만, 그러한 성장에 당연히 수반되어야 할 학문적, 제도적 리더십의 지위는 제공되지 않았다는 것이다. 더군다나 이러한 여승들의 어려움은 전통 불교 문헌에서 나타나는 여러 이야기들이 여승들의 성취를 찬양하는 편이지만 때로는 그들을 무시하고 그리고 과소평가하고 공격하기도 하는 등 애매한 이미지를 제공함으로써 더욱 가중되었다.

“자, 이제 보이죠. 그런데 이제 없어졌어요.”
 
비구니 스님들이 사라진 수수께끼를 풀기 위해서는 인도 비구니 승단의 역사에 관련된 사실들과 그 자료들을 좀 알아볼 필요가 있다. 일반적으로 비구니의 역사는 다른 인도의 불교 집단과 마찬가지로 세 가지 시기로 나누어 볼 수 있다.

제1기는 초기 단계로, 기원전 6세기 후반 부처님의 성도에서 시작해서 불교가 전파되고 불교의 교리와 제도가 자리를 잡아가면서 아소카왕(Ashoka, B.C. 272~B.C. 236)이 후원자가 되어 불교를 인도 전역뿐 아니라 다른 나라에까지 전파하는 시기이다. 이 시기의 자료는 전적으로 구술에 의한 자료로서 이 자료들은 기억이라는 수단에 의해서 보존되다가 후대에 가서 기록되게 되었다.

이 시기의 자료에 따르면, 붓다는 그가 가르침을 펴던 초기에 여성 교단을 세웠다고 한다. 비구니 승가가 세워진 계기는 부처님이 태어날 때 그 어머니가 돌아가시면서 어려서부터 그를 길러주신 이모인 마하프라자파티(Mahaprajapati) 부인에게서 시작한다고 한다. 비구니 교단의 성립은 부처님 자신의 가르침에서 나타나는, 여성도 남성과 마찬가지로 욕망의 완전한 극복으로 특징지어지는 영적 해방의 상태를 말하는 아라한과(果)에 도달할 수 있다는 전제에서 이룩된 것이다. 초기 교단의 사정을 적은 기록을 보면 당시 비구니 교단이 번성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여러 다양한 계층의 여성들이 출가하였는데, 특히 상인 계급과 귀족 계층의 여성들이 출가하여서 비구니 교단에 근본적인 후원을 제공하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출가자들의 많은 사람들이 인생의 신고(辛苦)를 다 거친 후 비구니 교단에 귀의하고자 하는 부인들이었고, 어떤 이들은 젊은 나이에 결혼이 싫어서, 또는 자식이나 친인척의 죽음을 동기로 하여 출가하게 된 경우도 있었다. 출가의 길을 통하여 많은 여성들이 자신들이 추구하던 열반(청량함이라는 뜻)을 얻을 수 있었다. 그들의 영적인 성취를 증명하는 뛰어난 기록들이 테라와다 불교에 내려오는 게송 모음집인 《테리가타(Therigata)》 속에 잘 보존되어 있다. 《테리가타》에 보면, 많은 뛰어난 비구니들이 자신들이 새로이 얻은 영적 자유를 찬탄하고 있다.

제2기는 아소카왕부터 남쪽의 사타바하나(Satavahana, 기원전 55년부터 기원후 250년) 왕조와 서북쪽의 쿠샨(Kushan, 기원후 20년에서 240년) 왕조에 걸친 시기이다. 이 기간 동안 불교 교단은 인도 전역에 퍼져 있는 주된 종교 세력이었다. 이 시기에 만들어진 문헌들에서 여승들의 존재가 확인되는데 그중 가장 중요한 역사적 자료는 사원과 불상과 탑을 조성하면서 기부자들이 남긴 수많은 비문들이다. 이 자료들을 보면 비구 승단이 있던 곳 모두에서 비구니 승단도 번성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특히 남쪽 지역에서는 비구니들의 수가 많았고, 비구니 승단이 부유하였음을 알 수 있다. 그들의 이름은 비구승의 이름만큼이나 자주 발견되며 스스로가 사원을 세우는 데 많은 기부를 하였고 또한 기부를 받기도 하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인도 불교사의 제3기는 3세기 이후로서, 이때부터 비구니 승단의 운명이 기울어지게 된다. 몇 가지 자취를 추적해보면 교단 자체가 훨씬 축소되었음을 알 수 있다. 이 시기는 일반적으로 불교 교단이 전체적으로 축소되는 시기이지만, 어떤 지역과 왕국에서는 아직도 세력이 남아 있었다. 한편 이 시기는 불교사의 기록이 가장 많이 남아 있는 시기이기도 하기 때문에, 따라서 여승에 대한 자료가 많이 있을 것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겠다. 그러나 비구니들의 기록은 거의 찾아볼 수 없다. 몇 개의 비문만이 존재할 뿐이다.

비구니가 한 마지막 시주의 기록은 550년 마투라(Mathura)에서 나타나고, 몇 가지 시주의 기록을 보아 발라비(Valabhi)에 있는 불교 승원대학 근처에 작은 비구니 사원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가장 마지막 기록은 629년이다). 이 시기에 성립된 많은 유명한 철학적 문헌과 주석서들 중에서 비구니가 쓴 것은 전혀 없다. 더군다나 당시의 문학작품 속에 자주 보이는 유명 인물의 전기적 기록 속에서도 여승은 거의 등장하지 않는다. 가끔씩 비구니의 그림자를 배경 속에서만 찾을 수 있을 뿐이다.

예를 들어, 북서인도 출신의 유명한 학승이자 후대에 중국으로 간 역경승 구마라지바(Kumarajiva, 344~413)의 어머니가 비구니가 되었고, 구마라지바의 삶에 중요한 영향을 끼쳤다는 것을 알게 된다. 또한 유명한 학승인 세친(世親, Vasubandhu)도 북쪽의 수도 파트나(Patna)에서 왕실의 사람들을 가르친(기원후 455~467) 대가로 얻어진 시주를 가지고 비구니를 위한 건물을 지어주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불자 왕이었던 하르샤바르다나(Harshavardhana)의 동생이 과부가 되었는데, 왕의 재임 기간의 말년(605~647)께 왕과 같이 출가를 한 것 같다.

더군다나 인도의 후기 불교에 대해서 풍부한 자료를 제공하고 있는 중국의 구법승들조차도 비구니에 대해서는 거의 기록을 남기지 않고 있다. 북부 인도를 가로질러서 여행한(399~400) 법현(法顯) 스님은 마투라에서 본 의식의 한 장면을 설명하면서 비구니에 대해서 단 한 번 언급하고 있다. 인도에서 16년이나 살았던 현장(玄奘, 602~664) 스님도, 주요 불교 중심지를 거의 다 방문했지만, 앞에서 말한 법현이 보았다는 것과 동일한 의식과 관련하여서만 비구니에 대하여 언급하고 있을 뿐이다.

현장은 그렇지만 비구니를 보기는 하였을 것이다. 왜냐하면 28년 후에 또 다른 구법승 의정(義淨) 스님이 왔을 때 인도의 탐라립티(Tamralipti)에 머무르면서 비구니를 보았다고 하기 때문이다. 의정은 비구니들이 얼마나 엄격한 지도하에 사는지를 기록했다. 비구니는 사찰 밖에 다닐 때에는 두 명씩 짝을 지어서 다니고, 재가 신도 집을 방문할 때는 4명씩 다닌다고 하였다. 하지만 무엇보다도 그들의 빈곤함에 대해 특히 놀랐다.

인도의 비구니들은 중국 비구니와 아주 다르다. 그들은 걸식하고 탁발하면서 몹시 가난하고 소박한 생활을 영위하고 있다. 비구니 승가에 주어지는 혜택과 물품은 아주 작아서, 많은 사찰의 경우는 그들을 위한 특별한 식량 공급이 없다.

의정은 또한 인도의 비구니들이 비구들과는 아주 다르게 산다는 것도 언급하고 있다. 의정이 본 비구 스님들은 시주를 많은 받은 부유한 사원에서 살고 있었으며 그들의 삶은 가난하다든가 소박하다고 할 수 없는 것이었다. 확실히 비구니 스님들의 삶은 이전에 비해 어려워진 것이 분명하였다.

  경제가 문제였다

의정의 기록은 간단하지만 비구니 승단에 닥친 운명에 대해서 중요한 단서를 제공하고 있다. 비구승에 비하여 계속 가난한 상태에 놓여 있다는 것은 경제적 후원을 찾는 데에 문제가 있었다는 것을 말해준다. 파트나에서 비구니에 대해 세친이 보시를 했다는 기록은 아마도 파트나 지역의 비구니 승단도 같은 문제에 봉착했다는 것을 의미할 것이다.

여기에서 불교 승단의 경제 구조에 대해서 한번 살펴볼 필요가 있겠다. 승단이란 유행(遊行)하는 수행자들로 이루어진 느슨한 집단에서 시작한 것이다. 초기의 비구, 비구니들은 한 도시에서 다른 도시로 옮겨 다녔기 때문에 대부분 붓다의 가르침에 귀의한 재가신도들이 제공하는 물품에 의지하여 살았다. 유행자의 삶을 취하는 것은 승단의 계율에 중요한 것이었으니, 그렇게 함으로써 출가자들이 모든 세속적인 것과 인연을 끊도록 해 주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후대에 가서 승려들이 고정된 영구적인 장소의 사원에 정착하여 생활하게 된 후에도 승단의 규칙의 중요한 부분으로서 남아서, 비구 비구니는 계속 시주에 의존하여 살았다. 재가신도들은 스님들에게 절을 지어주었고, 의복과 약간의 물건들을 제공하였으며, 매일 탁발 시에 또는 사원에 음식물을 공급함으로써 그들을 공양하였다. 어떤 부자들은 큰 시주를 하기도 하였다.

 예를 들어서 왕은 한 마을에서 거둔 세금을 자기가 좋아하는 사원으로 기부하여 계속해서 필수품들이 공급되도록 해주었다. 아직도 동남아시아의 불교국에서는 스님들의 물품은 매일 제공되거나 아니면 연중 단위로 제공된다. 특히 불교가 대중에게서 널리 지원을 받았을 때 승단 전체는 번성하였다. 예를 들어서 남쪽 지방, 성공적인 비구니 승단이 존재했던 사타바하나(또는 안드라) 왕국의 경우에서 보듯이, 후원하는 공동체가 경제적 여유가 있을 때 승단은 번성하였다.

경제 상황이 나빠지거나 대중으로부터의 지원이 다른 종교 집단과의 경쟁 속에서 줄어들 때 출가 수행자들은 곤란한 처지에 빠지게 된다. 이러한 부정적인 요인들이 3세기에 나타났고 그때부터 비구니들의 운명에 변화가 오기 시작한다. 불교 교단의 주요 후원자였던 사타바하나 왕실 사람들과 상인들은 고대 로마와의 무역이 줄어듦에 따라서 이익이 감소하게 되었고 왕국도 여럿으로 나뉘게 되었다. 더군다나 불교가 강력했던 여러 지역에서 힌두신을 섬기는 헌신운동이 일어나면서 불교에서 힌두교로 개종하는 사람들이 늘어나게 되었다.

불교의 대중적인 기반이 쇠퇴함에 따라서 다른 종류의 지원이 보다 중요하게 되었다. 왕이나 왕족들은 불교 승단 초기부터 중요한 후원자였다. 가장 유명한 예가 아마 고대 인도 최대의 왕국을 지배하던 아소카 왕일 것이다. 아소카 왕과 같은 초기의 후원자들은 적어도 불교에 대한 개인적인 신앙 때문에 후원을 하였다. 그러나 후대에 이르러 왕실의 보시 기록을 보면 많은 시주자의 이름이 힌두 이름이다. 즉 그들이 불교를 후원하는 것은 개인적인 신앙심 때문이라기보다는 자신이 얻게 될 이익 때문이었다.

당시 불교계는 학문적으로 높은 명성을 얻고 있었다. 중국에서 온 유명한 학승 현장과 같은 사람들은 공개토론 자리를 임금과 같이 나란히 걸어가기도 했다. 세친과 같은 유명한 철학자를 왕실의 교사로 모시기 위해서 왕족들은 열을 올렸다. 왕실들은 거대한 규모의 승원 대학을 세워 갔고, 그 대학들은 인도 전역에 명성을 떨쳤다. 그러나 이러한 상황에서 비구니들은 확실히 불리한 입장에 있었다. 왜냐하면 그들은 유명하지도 않았고 비구니 승단은 거기서 얻는 혜택을 누리지 못하였다. 만일 여승과 남승이 보시를 놓고 서로 경쟁을 한다면 말할 나위도 없이 남자들이 더 많은 부분을 가져갔을 것이다.

거의 동등하였다

비구니들이 낮은 위치에 처하고 덜 유명했던 것은 당시 승단의 제도적인 구조에서 기인하는 바가 크다. 그 이유를 알기 위해서는 우리의 시선을 넓은 곳으로 돌려야 할 것이다. 이제 우리가 주목하고자 하는 것은 불교의 계율에 관한 것이다. 전승되는 계율 소개 역사에 따르면, 율장이란 붓다 자신에 의해 만들어진 것이며 당시의 승가 공동체 내에서 일어나는 특정한 상황 상황에 대하여서 200여 개에 달하는 율을 만들었다고 한다. 서구의 역사가들에 의하면 불교의 율장은 아마도 200년 정도의 기간을 통하여 서서히 발전해서 기원전 350년 정도에 거의 완성되었다는 것이다. 율장은 불교 전통 속에서 가장 안정적인 요소 중의 하나가 되었다. 불교에는 여러 부파가 생겨났고, 어떤 경우는 붓다의 가르침에 대해서 여러 다른 해석들이 나타나곤 하는데도 불구하고 율장의 내용은 기본적으로 거의 변하지 않았다.

율장은 불교의 수행생활에 전체적인 체계를 제공한다. 율장의 조목들 중 많은 것은 출가승들이 지켜야 할 네 가지 가장 중요한 도덕적 원칙, 즉 생명을 뺏지 말고, 주어지지 않는 것을 가지지 말고, 성적 관계를 맺지 말고, 나쁜 말을 하지 말라는 네 가지 기본 원칙을 확장하고 해석한 것이다. 그 외의 조목들은, 불교 수행의 중요한 부분 중의 하나인 사치에 대한 금지를 말하고 있다. 또한 율장의 어떤 조목들은 승단이 잘 운영되고 승려들이 영적인 해탈을 추구하는 데에 도움을 줄 수 있는 세부적인 조직생활의 모습을 규정하는 것이다.
대부분의 점에서 율장은 비구와 비구니에 대해 동등하게 취급한다. 사원에 정착하는 생활을 하기 전에는 비구, 비구니 모두 유행하는 삶의 형태를 취했고, 따라서 혈연관계나 가정의 일에서 놓여남으로써, 영적인 수행에 전념할 수 있게 되었다. 비구와 비구니는 똑같이 매일 탁발을 하러 나갔고, 2주일에 한 번씩 모여서 율장을 암송하였다. 더군다나 비구와 비구니는 외양도 비슷했다. 머리는 삭발하였으며, 흙 색깔로 물들인 누더기를 꿰맨 옷을 입고, 가사를 왼쪽 어깨로 둘렀다.

때때로 율장에서는 여승들을 보호하고 돕기 위한 특별조항들을 두기도 했다. 예를 들어서 비구들은 비구니들에게 바느질을 해달라든지 염색을 해달라든지 아니면 자기가 앉는 방석을 기워 달라든지 하는 행위를 할 수 없었다. 더구나 비구니들이 탁발에서 얻어온 음식이나 의복을 달라고 해서도 안 되었다. 왜냐하면, “여자들은 이런 물건들을 어렵게 구한다”라고 하는 말에서 알 수 있는 것처럼 후대 승단에서도 여성들에게는 이러한 경제적인 어려움이 새로운 일은 아니었던 것이다.

또한 비구니들은 제대로 된 교육을 받는 것이 중요하였다. 금욕생활의 규칙을 지키기 위해서 비구, 비구니들은 보통 엄격하게 분리되어서 살았다. 따라서 대부분의 경우, 비구니가 비구니를 가르쳤다. 초기에 많은 비구니들이 높은 명성을 얻기도 했다. 예를 들어서 브라만 출신인 바다 카필라니(Bhadda Kapilani)에 대해, 붓다는 자신이 가르친 내용에 대해서 잘 알고 있다고 칭찬을 하였다.

파타차라(Patacara)는 이전에 전쟁을 겪고 가족을 잃는 개인적인 불행을 겪음으로써 고(苦)의 의미에 대해서 꿰뚫어 보았다고 한다. 그럼에도 대부분의 경우 가르침의 전달은 남성들의 손에 놓여 있었다. 왜냐하면 그들은 원래 붓다와 같이 여행하였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율장에서는 비구니들이 비구니승뿐만 아니라 비구승에게서 가르침을 받을 수 있게 허용하였다. 그러나 아이러니하게도 이러한 조항은 비구니들을 위해서 특별히 제정된 것이지만 궁극적으로는 여승들에게 부정적인 영향을 끼친 요소가 되었다. 왜냐하면 원래 약속된 조건이 주어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비구승은 비구니를 가르칠 수 있었지만, 비구니는 비구를 가르칠 수 없었다. 아마도 비공식적으로는 비구니도 비구를 가르쳤을 것이다.

초기의 자료들을 보면 이러한 일도 때때로 일어났음을 알려준다. 그러나 후대의 기록들에 보면 비구가 비구니를 아차리야(acarya), 즉 자신의 영적 스승으로 언급하는 기록은 나타나지 않는다. 따라서 비구가 비구니들에게 그러려고 해서가 아닌, 율장의 바로 그 조항에 의해서 승가 공동체의 주된 교육기능을 남성들이 가지는 것이 정당화되는 것처럼 되었다.

또한 율장의 어떤 조목이 비구니 승단이 궁극적으로 쇠퇴하게 되는 역할을 하게 된다. 남자와 여자가 공통적으로 받는 계율 외에 여성들은 자기들만의 율을 지켜야 했다. 이 조목들은 여성에게만 해당되는 작은 문제들을 다루고 있다. 예를 들어서 월경을 할 때 어떻게 할지, 또는 비구니가 임신했을 때에 그 상황을 어떻게 처리할지 등의 경우이다. 다른 계율 조항들은 부처님이 여성에게 비구니 교단을 세우는 대가로 부과했다고 전해지는 여덟 가지 특별한 계인 팔경계(八敬戒)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팔경계는 여성이 영속적으로 남성에게 복속되게 하였다.

① 비록 백 세 비구니일지라도 처음으로 수계한 연소 비구를 보거든 마땅히 일어서서 맞이하고 예를 갖추어야 한다.
② 비구승이 없는 곳에서 하안거를 해서는 안 된다.
③ 비구니는 비구승에게서 보름에 한 번씩 법을 듣는다.
④ 비구니가 안거를 마치면 비구승에게 가서 보고 듣고 의심한 것을 자자(自恣)해야 한다.
⑤ 비구니는 승잔죄를 범하였으면 이부승 앞에서 참회해야 한다.
⑥ 비구니는 비구로부터 비구니계를 수계해 줄 것을 청해야 한다.
⑦ 비구를 욕하거나 꾸짖어서는 안 된다.
⑧ 비구니는 비구의 죄를 드러내거나 자백시키지 못한다.
 
이것의 효과에 대해 성급히 결론을 내릴 필요는 없다. 고대 인도에서 여성은 언제나 남성에게 복속된 존재였다. 대개 비구니 자신들은 팔경계를 억압적인 것으로 보지는 않았던 것 같지만, 첫 번째 조항에 관해서는 항의한 비구니에 대한 기록이 있다. 반면에 그들이 자신들을 열등한 존재로 생각했다는 증거도 없다. 우리가 가지고 있는 자료는 거의 없지만 그것을 통해 볼 때, 그들은 자신들을 동등하다고 생각했거나, 아니면 아예 남자와 비교하려 하지 않았던 것 같다.

이러한 추가적인 계율이 그들이 가장 중요하게 추구하였던, 수행을 해서 열반을 이루고자 하는 목표를 방해하는 것은 아니었다. 이러한 특별한 규정들이 그들에게서 마음을 닦고, 불교의 가르침에 대한 이해를 기를 기회를 박탈하는 것도 아니었다. 이런 점에서 보면 당시 시대와 문화적 맥락을 고려할 때, 여성과 관련한 율장의 접근법은 상당히 개방적이라 할 수 있다.

반면 팔경법이 가져온 손해는 보다 미묘하고 세속적인 것이었다. 이러한 차별적인 조항은, 여성이 전체 승가의 삶의 지도자가 될 수 없고, 승가의 방향을 정하는 데 분명한 목소리를 낼 수 없다는 것을 뜻한다. 특히, 스승이 한 학생의 의미와 방향을 찾도록 도와주어서 신세를 지는 것과 같은 그러한 관계를 비구는 비구니와 갖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러한 점은, 큰 승원 대학이 세워지고 왕실의 후원자들이 그런 후원을 통해 자신들의 입지를 높이려 할 때 특히 부정적으로 작용했다. 왜냐하면 이러한 조항들은 불교 승단의 비용을 부담하는 바깥세계에 대해 비구니들에 대한 부정적인 이미지를 전달하게 되었다. 왜냐하면 비구들이 더 중요하고 가치 있는 존재라고 확인해 주는 역할을 하였기 때문이다. 다시 말하면 이러한 차별적인 조항 때문에 남자가 더 보시를 많이 받고 더 좋은 건물을 얻으며, 왕실이나 또한 공공의 장소에서 활약할 더 많은 기회를 가져야 한다는 것이 암시되게 된 것이다.

한 손은 주고 다른 한 손은 빼앗는다

이러한 남성 우위의 이미지는 다른 방향으로도 강화되었는데, 왜냐면 비구니 교단의 지위를 더 잠식해 갈 여승들에 관한 애매한 기술들이 불교 문헌들에 전해졌기 때문이다. 필자가 여기서 관심을 갖는 것은 당시 승려들이 연구하고 가르치던 정교한 철학적 문헌 속에서가 아니라, 당시 유통되고 있던 이야기들 속에 여성이 어떤 식으로 그려지고 있는지에 관한 것이다.

인도의 다른 전통들과 마찬가지로, 불교는 그 근본 가치관과 인간의 삶과 운명에 대한 이해를 풍부한 이야기 전통을 통해 전달하고 있었다. 물론 불교가 살아 있는 전통이었던 당시 인도와 다른 시대나 장소에서 이들 이야기가 어떤 형태로 알려졌는지는 알 수가 없다. 왜냐하면 스토리텔링 전통이라는 것은 대부분 구술전통이며 새로운 버전의 이야기가 전해지면서 끊임없이 새로운 것이 만들어지기 때문이다. 그러나 어떤 버전들은 보존되기도 하고, 또는 여러 다른 곳으로 흩어지기도 한다.

비구니에 대한 언급은 불교 이야기 속에, 특히 불교의 형성기를 말해주는 이야기들 속에 많이 등장한다. 그러한 언급들은 두 가지 형태를 취하고 있다. 첫째, 비구니의 영적 자질과 승단 내의 역할에 대한 평가, 두 번째 그들의 활동과 영적 성취에 대한 묘사이다. 앞에서 필자가 언급한 모호성은 이 두 가지 종류의 이야기 모두에서 나타난다.

예를 들어서 하나의 전통에서는 여성에 대한 강력하고 긍정적인 이미지가 나타난다. 여성도 아라한과를 이룰 수 있다는 모티브가 자주 등장하며, 아라한과를 이룬 비구니들에 대한 묘사가 많이 발견된다. 예를 들면, 《테리가타》에 등장하는 테리들(아라한과를 이룬 여성 장로들)의 삶에 관한 이야기 같은 것이다. 그들의 이름과 이들이 어떤 일을 하였는지가, 붓다와 그를 따르는 공동체에 대한 이야기 속에서 붓다의 법문이나 제자들과의 대화 형태로 등장한다. 예를 들면, 붓다가 비구, 비구니, 재가남성, 재가여성으로 이루어진 사부대중의 제자들 중에서 가장 뛰어난 사람을 지목하는 것이 그것이다.

케마(Khema) 비구니는 지혜 제일, 난다(Nanda)는 참선 제일, 소나(Sona)는 정진이 뛰어나며, 시갈라(Sigala)의 어머니는 믿음이 좋고, 또한 담마디나(Dhammadinna) 비구니는 붓다의 가르침을 가장 잘 전달하는 교사로 언급되고 있다. 파타차라(Patacara)는 율장을 잘 알고, 키샤 고타미(Kisha Gotami)는 두타행으로, 우팔라바나(Uppalavanna)는 신통력이 뛰어나고, 사훌라(Sahula)는 천리안이 최고이며, 바다 카필라니(Bhadda Kapilani)는 숙명통이 열렸다고 하였다. 이러한 것들은 결코 변변찮은 성취가 아니다.

그리고 이러한 문헌을 통하여 여러 곳에서 발견되는 기록들은 이들 여성의 생애에 대해서 자세한 사항을 알려준다. 비구니 교단을 창시한 마하프라자파티(Mahaprajapati)의 생애는 신화적인 요소가 가미되어 전해지는데, 위대한 사람이 대부분 그러하듯 전생의 행위 덕분에 부처님의 이모가 되고 또한 비구니 교단을 세우는 위대한 역할을 띠게 되었고 마지막으로 열반에 드는 이야기로 끝맺고 있다.

비구니의 역할을 가장 긍정적으로 표현하는 이야기는, 시대와 지역을 달리하면서 여러 다른 형태가 전해져 내려오는 것을 보아 당시 아주 널리 알려져 있었을, 기지와 의지와 청정한 마음으로 마라(Mara)의 유혹을 이겨내는 열 명의 비구니들에 대한 다음과 같은 이야기들일 것이다. 여기서는 마라가 어떻게 그녀들에게 다가와서 혼란된 생각을 깨우고, 아픈 기억들과 예전의 공포 감정을 불러일으켜서 마음이 약한 사람이라면 정신적인 성취의 길을 포기하였을 뻔한 그런 이야기를 담고 있다. 그중 한 사람 소마라는 비구니가 마라가 그녀에게 손가락 두 마디만큼의 지적 능력밖에 없다고 얘기하는 것을 반박하는 그 말 속에서, 그러한 내용이 가장 뚜렷하고 강력하게 드러난다. 소마의 답변은 모든 비구니들을 위한 가르침 같이 들린다.
 
“여자의 본성이 무슨 문제가 되는가. 만일 그 마음이 잘 가다듬어져 있다면.
우리의 지혜가 올바르게 나아가고 가르침을 잘 이해한다면.
감각적 쾌락은 완전히 없어지고, 어두운 무지는 꿰뚫어졌네.
그러니 알아라, 마라여. 너는 이제 부서졌다.
만일 어떤 이가 아직도, ‘이런 점에서 나는 여자인가, 아니면 남자인가’라고 생각하고 있다면,
그 사람이 바로 마라가 다가가서 말 걸어야 할 사람이다.”

그러나 이 같은 마하프라자파티와 소마의 이야기가 가져오는 긍정적 효과만큼 그것을 상쇄시키는 비구니와 비구니의 성취를 폄하하는 다른 종류의 이야기들이 존재한다. 그중 많은 이야기는 인간 일반이 가지는 결점이나 부족함에 관한 것이지 반드시 여승들만 겨냥한 것은 아니다. 비슷한 이야기들이 비구승에 대해서도 얼마든지 등장한다. 어떤 이야기들은 약간 유머러스한 성격도 가지고 있는데, 예를 들어서 어떤 시골에서 온 비구니가 요강을 비운다고 담 밖으로 던져서 지나가던 브라만의 머리에 맞는 이야기가 그것이다. 필자가 좋아하는 이야기는 뚱뚱한 팃사(Tissa)의 이야기인데, 비구니를 옹호했던 아난다를 큰스님들보다도 더 치켜세워서, 여성을 혐오하는 마하카사파와 같은 사람이 아난다에게 분노를 표출하게 한 경우이다.

그러나 다른 편들의 이야기는 상당히 다르다. 마치 원래는 비구니들을 칭찬하기 위해서 쓰였다가 나중에 그들을 폄하하고 그들의 성취를 깔보는 내용으로 바뀐 것 같아 보이는 것도 있다. 예를 들어 비구니 교단을 창시한 마하프라자파티와 그녀를 따르는 제자들은 가르침 받은 그 첫날에 거의 깨달음을 얻을 뻔했다. 그러나 다른 비구 스님과는 달리 가르침을 알아듣지 못해서 다음날 다시 와서 가르침을 받아야 했다는 그런 이야기이다. 여기서 암시하고 있는 바는, 여성들은 좀 우둔하다는 뜻이다.

이같이 잘 못 해낸다는 식의 해석이 여러 번 나타나고 있다. 하지만 필자는 어떤 경우에 같은 이야기의 두 가지 버전, 즉 칭찬하는 얘기와 폄하하는 얘기가 함께 전해지는 것을 본 적이 있다. 이 잘 알려진 이야기 속에서는, 어떤 비구니가 부처님이 삼 개월간의 우기 안거를 끝내고 돌아오시는 것을 제일 먼저 맞으려고 하다가, 다른 여러 뛰어난 제자들이 모여 있는 것을 보고 자신의 모습을 제석천으로 바꾸었다. 한 가지 기록에서는 이 비구니가 실제로 부처님을 첫 번째로 맞는 내용이다. 즉 이 비구니는 행동을 잘한 것이다. 다른 한 가지 자료에서는 대신, 그녀가 부처님을 만났더니 부처님이 말씀하기를, 어떤 남자 수행자가 이미 영적인 눈을 가지고 부처님이 오시는 것을 먼저 보았다고 말한다. 한편 세 번째 자료에서는 부처님이 이 비구니에게, 수행하지 않고 왜 돌아다니느냐고 꾸짖는 것으로 되어 있다.

하지만, 뭐니 뭐니 해도 가장 부정적 영향을 준 것은 비구니를 비구에게 예속시키게 만드는 팔경계와 관련된 이야기이다. 그 이야기는 여성들의 출가에 대해 부처님이 반대했음에도 불구하고 결국은 비구니 승단이 세워졌다는 것을 의도적으로 말하고 있다. 부처님 입장을 두둔하자면 이 이야기는 아마 거짓일지도 모른다. 왜냐하면 불교문헌의 가장 고층에 속하는 문헌들에는 이런 이야기가 나오지 않기 때문이다.

어쨌든 이것은 비구니 교단이 성립될 때의 사정을 전하는 권위 있는 이야기로 사람들 사이에 회자되었고 따라서 그 주장하는 내용들은 비구니들의 노력에 긴 그림자를 드리웠을 것임에 틀림이 없다. 그 이야기는 다음과 같다. 마하프라자파티와 500명 석가족 여인들이 부처님께 가서 출가를 받아달라고 얘기했을 때, 부처님께서는 단호하게 거절하셔서 눈물을 흘리면서 돌아갔다. 그들은 집에 돌아가서 머리를 깎고 출가자의 의복을 걸치고 맨발로, 부처님과 남자 제자들을 따라 멀리까지 따라가면서 자신들의 결심을 증명해 보였다. 붓다는 그래도 다시 거절했다. 그런데 이때 아난이 여성의 편에서 중재에 나섰다.

그래서 부처님이 마침내는 마음을 돌리셨지만, 출가를 허용하는 대신에 팔경계를 그 조건으로 지킬 것을 약속하게 하였다. 더구나 이 이야기의 여러 버전들에는 특별히 심한 말이 들어 있는데, 부처님이 말하기를 자신의 가르침은 천 년간 지속될 수 있었는데 여성이 출가를 하게 되어 교단에 들어옴으로써 이제 오백 년밖에 지속하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는 내용을 포함하고 있다.

한때, 필자는 이러한 이야기들에 대해 단순히, 출가하여 독신으로 사는 남자 승려들의 여성 혐오증 때문에 [후대에 삽입된 것으로] 해석한 적이 있다. 그러나 지금 몇 년간 연구 끝에 그게 그렇게 단순한 문제는 아니라고 생각하게 되었다. 왜냐면 또 다른 그룹의 여성들인 재가 여신도들은, 일반적으로 재가자는 출가자보다도 열등하다고 여겨지는 데에도 불구하고 불교 내에서 좋게 다루어진다는 점이었다. 그들은 훨씬 더 긍적적으로 그려지고, 그들의 행동과 덕성은 거의 예외 없이 칭찬되고 있다. 재가 여성에 관한 이야기가 훨씬 더 많고, 보다 더 너그럽고 열렬하게 서술되어 있다는 점이다.

불교 이야기 속에서 가장 위대한 여주인공은 비구니 교단의 창시자인 마하프라자파티일 것이라고 생각하겠지만 실은 비구니계를 받은 적도 없는 초기 불교 공동체에 유명한 상인의 딸이자 아내인 비샤카(Vishakha)이다. 더군다나 뛰어난 비구니의 이야기에서는 그 초점이 출가 이후 보다 그전에 성취한 행동에 대한 것이 많다. 비구의 경우는 그렇지 않다. 많은 불교 이야기 속에서 비구승이 영웅으로 등장한다. 그러므로 아마 이때 불교 공동체는 비구니보다 재가 여자 신도들에 대해 더 편안했고, 아마도 비구니의 존재를 좀 낭패스러운 것으로 여겼다는 인상을 피할 수 없다.

서로 다른 사고방식이 충돌하고 있었다

재가여성이 상대적으로 강점을 가진다는 것이 이상해 보일 수 있지만 이것은 비구니의 역할을 둘러싼 모호성을 분석하는 데 중요한 단서를 제공한다. 필자의 생각으로는 불교계 내에 남녀의 차이에 대해 서로 상충하는 두 가지의 다른 생각이 존재해서, 각각에 따라 비구니와 재가여성의 역할에 대해서도 다른 함축을 가지게 되었으며, 따라서 불전 내에서 나타나는 이러한 모호한 태도는 이러한 생각의 차이를 조정하기 위한 것이었던 것 같다.

 첫 번째 입장은, 불교의 정통적 입장에 가깝고, 경전에 나타나는 입장과도 일치되는 것으로, 사람마다 다양한 차이가 있는 것과 마찬가지로, 여성과 남성은 성차가 있고 이것은 인간의 조건이기도 하다는 것이다. 또한 여러 형태의 존재들은 과거 업의 결과라는, 업의 원칙으로 설명하는 입장이다. 한편 욕망의 사슬을 부수고 영적으로 성취할 때 성차를 포함한 인간의 불완전성의 결과들은 사라진다는 관점이다.

이 말은 근본적으로, 정신적 발전 과정을 통해(출가자라는 보다 진전된 삶의 형태이다), 남녀의 차이라든가 한계는 사라진다는 것을 말한다. 불교에서 남녀 수행자가 같은 옷을 입고, 또 수행 단계에서 준수하는 계율이 동일하다는 사실 등이 바로 성적 구별이 없어지고 남녀의 차이가 하나로 수렴된다는 이상이 보여주는 증좌이다. 앞에서 본 소마 비구니가 환희에 차서 부른 노래의 근본이 되는 정신이 그것이다.

한편, 비구니를 비구보다 낮게 여기고, 비구니에 대해 불편하게 생각하는 것은, 또 다른 젠더 관념에 기반하는 것이다. 이것은 불교의 전통이라기보다 당시 불교계를 둘러싼 사회의 규준이었다. 힌두교의 다르마(dharma, 사회적 질서) 개념, 즉 모든 것을 포괄하는 질서가 있고 그 속에서 사물과 사람에게는 각각에 맞는 자리가 있다는 사고방식을 반영하는 것이다. ‘자리(slot)’라는 관념은 곧 ‘본성(nature)’을 말하며 ‘역할(role)’을 의미한다.

특정한 자리에서 태어난다는 것은 그러한 역할을 행할 자연적 역량을 갖고 태어났다는 것을 의미하고, 따라서 그런 역량이 잘 발현되도록 해야 한다. 한 개인의 다르마를 준수하지 않으면 자신과 가족 나아가서는 전체 사회에 재앙이 발생한다. 다르마의 중심 되는 이미지는 유기체의 이미지이다. 다르마 내의 여러 가지 ‘자리’는 몸의 부분에 대응하여 설명되고 있다.

여성의 ‘자리’는 아이를 잉태하는 것이다. 이것이 또한 여성의 자연스러운 능력이다. 여성은 무엇보다도 아이를 자궁 속에 담고자 하는 강력한 생식력의 창고이다. 결혼과 출산이란 여성이 생식력을 발휘하는 타당하고 효과적 방법을 대표한다. 여성은 남성에게 복속함으로써 다르마의 통제, 즉 어려서는 아버지에게, 결혼해서는 남편에게 그리고 늙어서는 아들에게 의존함으로써 여성은 언제나 남성을 따라야 한다는 다르마의 가르침이 가능해진다.

남편과 같이 살고 아이들에게 둘러싸인 여성, 그것이 여성의 타당한 위치이고 여성의 명예이다. 그 위치에서 벗어난다면 그 여자는 의심스러운 것이다. 힌두 전통이 여성 수행자에 대해 불신하는 것이 잘 기록으로 남아 있는 것처럼, 자신의 이상적 역할을 다하지 않는 여성들, 결혼하지 않았거나 아이가 없거나 또는 과부가 되는 여성들, 그들이 보통 불교에 출가하는 여성이었으니, 이들에 대한 불편함이 불교의 기록 속에 남아 있는 것이다.

불교란 깨달음의 길이지 사회적 질서를 재창조하자는 혁명적 이념은 아니었다. 불교는 힌두의 다르마의 원칙과 공존하려 하였으며, 그 원칙을 흡수하여 보통 사람들의 행동 규칙이나 사회와의 관계를 규정했다. 따라서 비구니를 비구보다 아래로 놓는 것은 아마도, 초기 불교계가 당시 인도 사회의 생활 규칙과 어긋나지 않으려고 하는 노력에서 그 역사적 시원을 찾을 수 있을 것 같다.

비구니의 문제에서도, 힌두 다르마의 가치가 불교 대중들의 관념 속에 스며들어 간 것이다. 힌두교도들이 그랬던 것과 같이, 불교도들도 아이를 잘 낳는 가정부인들을 칭송했다. 특히 신앙이 좋은 재가 여성의 경우에서는. 따라서 힌두교도들이 그랬던 것과 마찬가지로 불교도들도, 돌아다니거나 사원에 들어가 있는 여성보다는 집에 있는 여자를 더 선호했다고 생각된다. 이러한 점을 생각한다면 초기 불교에서 출가한 여성에게 대단한 관용을 보인 것이었다.

긍정적인 점을 강조해 보자

이같이 비구니에 대해 다른 쪽으로 끌어당기는 강력한 흐름이 인도 사회에 존재했던 당시 현실을 고려해 본다면, 내가 지금까지 엉뚱한 수수께끼를 들여다본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왜냐면, 비구니가 결국은 비구보다 낮은 위치에 놓이게 되었다는 것보다 오히려, 비구니들이 어찌 그리 오랫동안이나 그렇게 잘 지속되었다는 것 자체가 더 신기한 일이기 때문이다. 의정이 북인도에서 그 가난한 비구니들을 만난 시점을 생각해 보면, 비구니 교단은 당시 이미 천 년이 넘게 지속된 것이다.

더군다나 적어도 9세기까지, 그 후 2백 년은 더 존속했다. 한때 필자는 의정이 본 것이 마지막으로 비구니를 본 것이고 그들은 이후 곧 사라져서 완전히 없어졌을 것이라고 생각한 적이 있었다. 그러나 지금도 비구니의 족적을 알 수 있는 역사적 자료들을 계속 등장하고 있다. 예를 들어 나는 이 글을 끝내기 며칠 전에, 동인도의 어느 사원의 시주 기록 속에서 비구니에 대한 기록을 찾았다.

이 큰 사원에 속해 있던 비구니 사원에 하인 열 명이 배당되었다는 기록으로, 이 시주가 행해진 것은 885년이다. 따라서 비구승이 인도의 역사 속에서 완전히 사라질 때까지 비구니승들도 남아 있었을 가능성도 있는 것이다. ■

낸시 아우어 포크 nancy.falk@wmich.edu

 

조은수 / 서울대 철학과 교수(불교철학). 서울대 대학원 철학과에서 석사ㆍ박사과정 수료 후 미국 버클리대학교에서 박사학위. 미시간대학교 아시아 언어문화학과 조교수, 서울대학교 규장각 국제한국학센터 초대 소장, 유네스코 아시아 태평양지역 세계기록문화유산위원회 출판소위원회 의장 등 역임. 〈원효에 있어서 진리의 존재론적 지위〉 〈통불교 담론을 통해본 한국불교사 인식〉 등의 논문을 발표하고, John Jorgensen과 함께 《직지심경》을 영역. 본지 편집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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