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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교와 대통령 이승만* / 이재헌
[48호] 2011년 09월 01일 (목) 이재헌 sghead@hanmail.net

* * 이 글은 7월 18일 한국불교역사문화기념관에서 열린 조계종 제6차 종책 토론회의 발제문이다.

1. 미군정의 종교정책과 한국불교

해방 공간 한국불교의 과제는 무엇보다 식민지 체질을 극복하고 불교를 혁신하여 정체성을 회복하는 일이었다. 1945년 8월 15일 해방이 되자마자 불과 1주일 만에 구교단 집행부가 퇴진하고 새로운 집행부가 탄생하여 인수인계까지 진행하였고, 불교의 자주화와 대중화를 염원하여 각종 개혁조치를 단행하였으며, 무엇보다도 일제하 한국불교를 왜곡시킨 최대의 악법인 사찰령 폐지를 미군정에 요구하는 등 발빠른 행보를 이어갈 수 있었던 것은 불교계 전체에 자기개혁에 대한 여망이 그만큼 컸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나 이러한 의욕적인 출발에도 불구하고 별다른 성과를 거두지 못하게 된 것은 크게 두 가지 때문이라고 볼 수 있는데, 첫째는 미군정과 그를 계승한 이승만 정권의 노골적인 친기독교 정책과 그에 따른 차별대우 때문이고, 다른 하나는 불교계 자체의 내분과 갈등 때문이었다. 불교계의 해묵은 보수와 혁신의 대립은 물론, 당시의 냉전적 세계질서에 따르는 좌익과 우익의 대립이 더해졌고, 여기에 식민지 체질을 극복한다는 명분하에 친일과 항일 및 비구와 대처의 갈등까지 더해져서 매우 복잡한 양상으로 진행되기에 이르렀다.
물론 불교계의 극심한 갈등이 외부적인 요인, 즉 미군정과 이승만 정권의 차별적 종교정책에 말미암은 것만은 분명한 사실이다. 즉 표면적으로는 자유민주주의의 이상에 따라 종교 활동의 자유를 보장하는 듯하지만, 사실은 대한민국을 기독교화한다는 숨은 의도에 따라 암암리에 불교의 분열과 갈등을 조장한 측면이 있다. 그러나 이러한 차별적 종교정책에 빌미를 제공한 것은 불교계 자체의 허약한 역사인식과 종권 다툼과 같은 내부적 취약성 때문임을 부정하기 어렵다.
해방 이후 미군정과 이승만 정권이 친기독교적인 종교정책으로 대한민국을 건설하려 했던 것은 잘 알려진 일이다. 우리나라 헌법 제20조에는 “모든 국민은 종교의 자유를 가진다.”와 “국교는 인정되지 아니하며 종교와 정치는 분리된다.”는 내용이 있다. 이것은 종교의 자유와 정교분리를 천명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실제의 종교정책을 들여다보면, 사실은 정교분리라기보다 오히려 공인교(公認敎) 제도를 취하고 있다. 이러한 공인교 제도는 미군정의 기독교 우위의 종교정책에서 비롯되었고, 이승만 정권으로 이어져 기독교가 결국 한국 사회의 지배적인 종교로 자리하게 되었다.
미군정의 기독교 우위 정책은 불교의 사찰령이나 포교규칙 철폐에 대한 불교 측의 요구를 묵살한 사실과 일본 종교단체의 재산 즉 적산(敵産)의 처리 과정에서 기독교에 특혜를 준 사실 등에 잘 나타나 있다. 뿐만 아니라 1945년 크리스마스를 국경일로 지정한 점, 기독교계의 요구를 수용해 형목(刑牧)제도를 만들면서 형무소 교화사업을 전담하게 한 점, 1947년 서울중앙방송을 통하여 선교방송을 하도록 한 점, 일요일의 공휴일화를 추진한 점 등은 미군정의 기독교 편향 종교 의식을 잘 말해준다. 이것은 미군정이 자신들의 점령 목표 달성을 위해 국내 지지 세력 중에서 기독교, 특히 개신교 세력을 의도적으로 육성하였음을 의미한다. “점령 지역의 사회관계를 본국의 이해관계에 따라 재편한 후, 자신들의 전략적 목표를 수행해 줄 지원 세력을 국내 지배 세력으로 육성하여 그들에게 국가 권력을 이양하는 것”을 기본적 임무로 삼고 있던 군정이었기 때문에, 개신교가 해외의 원조와 미군정의 적극적인 후원하에 거의 유일한 공인종교로서 헤게모니를 장악하게 된 것이다. 이 과정에서 불교를 비롯한 비기독교 종교 단체들은 자연히 기독교와의 경쟁적 위치에서 점차 밀려날 수밖에 없었다. 미군정의 이러한 기독교 우위 종교정책은 이승만 정권에서 그대로 계승되었다. 기독교는 미군정과 제1공화국에서 공인교적 지위를 누렸고 그 보답으로 정권을 지원해 주었다.

2. 이승만의 종교관과 종교정책

이승만은 어려서부터 엄격한 유학 가문의 자손으로 한학 교육을 받으며 자라났다. 하지만 그의 모친은 독실한 불교신자로 생일날에는 절에 보내어 불공을 드리게 하였다. 그러던 그가 새로운 사상을 접하게 된 계기는 외아들을 훌륭하게 키우려는 어머니의 설득으로 1877년 서울로 이사하여 1895년 배재학당에 입학하여 신학문을 배움으로써 시작되었다. 이승만은 배재학당에서 서재필을 만남으로써 인적, 물적으로 많은 도움을 받았다. 이후 그는 아펜젤러, 헐버트, 언더우드, 게일과 같은 선교사들과 밀접한 관련을 가짐으로써 기독교로 개종하게 된다.
개종 이후 이승만은 자신의 삶을 기독교에 헌신하고자 하였다. 미국과 한국에서 기독교 교육 내지 선교활동에 종사하였는데, ‘대한 사람의 새 물줄기는 예수교회’라고 선언하고 쓰러져가는 조선의 현실 속에서 장차 한국인이 소생할 수 있는 희망의 원천은 기독교에 있다고 보았으며, 미국에서 독립운동을 하면서 장차 한국을 완전한 예수교 나라로 만들겠다는 생각을 하는 등 철저히 기독교 신앙을 가지고 나라를 건설하려 하였다. 대통령이 된 뒤에도 변함없이 서울 정동 감리교회에 출석하며 교회 활동을 중단하지 않고 독실한 신앙생활을 유지하였기에 1956년 정동감리교회는 그를 명예장로로 추대하기도 한다.
해방 후 33년 만에 귀국하여 1945년 11월에 행한 연설에서 그는 “지금 우리나라를 새로이 건설하는 데 있어서 튼튼한 반석 위에다 세우려는 것입니다. 오늘 여러분이 예물로 주신 이 성경 말씀을 토대로 해서 세우려는 것입니다. 부디 여러분께서도 하느님의 말씀으로 반석 삼아 의로운 나라를 세우기 위해 매진합시다.”라고 하였고, 1946년 3·1절 기념식에서는 “한민족이 하나님의 인도하에 영원히 자유독립의 위대한 민족으로서 정의와 평화와 협조의 복을 누리도록 노력합시다.”라고 하였으니, 한국을 기독교 국가로 만들겠다는 그의 굳은 의지를 엿볼 수 있다.
이승만은 1948년 5월 27일 국회의원 예비회의에서 임시의장으로 선출되었는데, 다음과 같은 국회의원 선서문을 통과시켰다.

본 의원은 한국 재건과 자주독립을 완수하기 위하여 헌법을 제정하고 국민정부를 수립하며 남북통일의 대업을 완성하여 국가 만년의 기초를 확립하고 국리민복을 도모하며 국제친선과 세계평화에 최대의 충성과 노력을 다할 것을 이에 하나님과 순국선열과 3천만 동포 앞에 삼가 선서함.

그리고 5월 31일에 제헌국회 개원식에 임시의장으로 추대된 이승만은 ‘대한민국 독립 민주국회 제1차 회의를 열게 된 것을 하나님께 감사해야 할 것’이라면서, 제헌국회의원이며 감리교 서부연 회장인 이윤영 목사를 단상에 불러 기도를 부탁하기도 하였다. 대한민국 국회가 목사의 기도로 시작했다는 것은 실로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여러 번 죽었던 이 몸이 하나님의 은혜와 동포의 애호로 지금까지 살아 있다가 오늘에 이와같이 영광스러운 추대를 받는 나로는 일변 감격한 마음과 일변 감당키 어려운 책임을 지고 두려운 생각을 금하기 어렵습니다…… 오늘 대통령 선서하는 이 자리에 하나님과 동포 앞에서 나의 직책을 다하기로 한층 더 결심하며 맹세합니다.

7월 24일 정부통령 취임식에서 이승만은 위와 같이 선서하여, 국가의전은 기독교식으로 치른다는 관례를 만들어 내기도 하였다.
이승만은 1949년 11월 한국을 방문한 미국 감리교 선교본부의 브럼보(T.T. Brumbaugh) 총무가 기독교에 어떤 중요성을 부여하고 있느냐고 묻자, “우리는 한국의 민주적 발전에 대한 모든 희망을 기독교운동에 기초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다른 어디에 희망을 걸 수 있겠습니까? 기독교 운동은 우리의 유일한 희망입니다.”라고 대답했다. 이승만은 반대 여론은 개의치 않고, 그의 의지에 따라 개신교를 사실상의 국가종교로 만들어갔다.
한편 해방 이후 일제하 친일 및 신사참배에 대한 청산에 실패한 한국 기독교는 여전히 친일적인 체질을 벗어나지 못하였고, 정권과의 밀착을 통해 교권을 유지해 가려고 하였다. 결국 한국교회는 이승만 정권과의 유착으로 인해 교회의 예언자적 사명을 다하지 못하였고, 이승만 정권의 장기집권과 독재정치에 대한 비판적 견제 기능을 수행하지 못했다. 이승만 정권은 반공 이데올로기로 독재정권을 유지했고, 한국교회는 그것을 신앙의 태도로 삼았다. 당시 한국교회는 이승만 정권이 반공적, 친기독교적 세력이라는 점에서 이승만 정권에 타협했다. 
이승만 정권하에서 많은 기독교인들은 신생 대한민국이 기독교 이념에 입각하여 세워질 것을 기대하여 정치에 참여하였다. 1952년 제2대 대통령 선거에서 〈기독공보〉는 이승만을 지지하고 공개적인 선거 지원을 했다. 이 신문은 “한국 기독교 연합회에서는…… 대통령으로 이승만 박사를 추대키로 만장일치로 가결하고 이 뜻을 전국에 공포하기로 결의하였다.”고 보도하면서, 그 이유에 대해 “매일 아침 5시에 예배드리고 감옥전도제, 종군목사제, 국기주목례를 제정하여 전도의 길을 열어준 신앙인이요, 과거 4년간 호교(護敎)의 도움을 입음이 컸기 때문이다”라고 하였다. 당시 한국교회는 기독교 선거운동대책 위원회까지 만들고 전국적인 선거운동을 추진하였다.
이런 현상은 각종 선거 때마다 되풀이되었는데, 당시 한국교회는 정치에 몰입해 있었고, 한국의 정치 자체를 기독교인이 장악하여 기독교화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왜냐하면 기독교 선교 활동에서 국가의 도움을 이용하고자 했기 때문이다. 이승만 정권에서 한국교회는 ‘교회 정치화’의 문제점을 여실히 보여 주었다. 기독교인들은 활발하게 정치참여를 하여 정계와 관계 등 사회 각계각층에서 큰 영향력을 행사했다. 그러나 한국교회는 이승만 정권과 유착하면서 자신의 예언자적 사명을 다하지 못했던 것이다.
한국교회 지도자들의 활발한 선거참여와 고위관료 및 정치인들과의 긴밀하고도 빈번한 교류, 그리고 기독교인들의 정치참여와 정부 고위직 분포가 넓어지면서 기독교에 대해 우호적이고 특혜적인 종교정책이 이루어졌다. 이승만 정부는 미군정의 종교정책을 그대로 계승하여 타 종교에 비해 기독교 우대 정책을 펴게 된다. 예컨대 크리스마스를 국경일로 지정한 점, 형목제도를 만들어 형무소 교화사업을 기독교에 전담시킨 일, 서울중앙방송을 통하여 선교방송을 하도록 한 점, 일요일의 공휴일화를 추진한 점 등은 미군정의 종교정책을 그대로 계승한 것이다.
그 밖에 이승만정부의 기독교 우대 정책을 살펴보면, 국기 배례를 주목례로 교체하고 국기 우상화 반대운동을 전개한 것, 군종제도를 실시하여 군선교에 힘썼던 것, 경찰선교를 실시하도록 한 것, YMCA와 같은 기독교 단체에 막대한 후원을 한 것, 그리고 1954년 기독교방송국과 1956년 극동방송국을 설립한 것 등을 예로 들 수 있다. 특히 군종들의 활약으로 인해 1950년 군종 창설 당시 5%에 불과했던 국군의 기독교인 비율이 1956년에는 15%까지 상승하게 된다. 그리하여 이승만 정권의 군종 창설은 한국기독교 역사상 가장 중요하고도 획기적인 사실로 인정되고 있으며, 불교 등 타 종교에 비해 커다란 특혜였다. 불교는 1968년에 가서야 군승제도가 시행되었다. 이와같이 미군정과 제1공화국의 기독교 우대정책으로 말미암아 해방 직후 남한 전체 인구의 2~3%에 불과했던 기독교 인구가 1960년에는 7.5%에 달하는 등 비약적인 발전을 이룩하게 된다.
이승만 대통령 통치하에서 기독교는 철저하게 정치권력에 순종하거나 무관심으로 일관하였다. 그리고 정부의 보호 아래 기독교 교회들은 마치 그들이 국가 종교인 것처럼 행세하였다. 한국 기독교는 1960~70년대 산업화 시기 동안 비약적인 발전을 하였다고 하지만, 그 기반을 확고히 다진 시기는 미군정과 제1공화국 시기였다. 헌법에 명시된 정교분리의 원칙을 무시하고 기독교를 편애하였으며 동시에 다른 종교에 대해서는 차별 대우를 하였다. 이때 기독교는 마치 국가종교인 것처럼 행동하게 됨으로써 국가와 창조적인 긴장관계를 유지할 수 없었고, 다종교 사회에서 종교 간 갈등을 증폭시켰다.
해방 직후 한국에는 불교, 천도교, 유교, 대종교, 개신교, 천주교 등 6대 종교가 있었다. 이승만 정권의 개신교 편향 정책으로 인해 다른 종교들은 커다란 피해를 입을 수밖에 없었다. 불교는 1954년 이승만의 정화유시 이후 격심한 갈등의 수렁에 빠져 사회적인 위신에 결정적인 타격을 입었고, 1956년에는 김창숙이 이끄는 유교가 분규를 겪게 된다. 민족종교인 천도교와 대종교는 교세의 급속한 약화를 겪어야 했다. 천주교 또한 이승만 정권과의 관계가 점점 악화되어 가고 있었다. 반면에 개신교는 정권의 비호와 특혜 아래 비약적인 발전을 거듭하게 되었다.


3. 불교 정화와 이승만 대통령

이승만 정권기에 일어났던 불교정화는 한국불교에 빛과 그림자를 동시에 던져주고 있으며 얻은 것만큼이나 잃은 것도 많은 뼈아픈 역사였다. 교단 정화로 인해 일제하 식민지 불교의 잔재인 대처승이 배제되고 비구승 중심의 불교 전통이 회복되었다는 점은 긍정적인 성과라고 볼 수 있다. 그러나 그 이념 및 명분의 정당성에도 불구하고 진행 과정과 방법상의 문제로 인한 후유증으로 오늘날까지도 아쉬운 그림자를 길게 남기고 있다.
불교의 문제를 불교 자체의 논리로 풀지 못하고 정권의 비호 및 공권력, 사법부에 의지하려고 했던 점이 가장 큰 문제이며, 대자대비하신 부처님의 포용과 자비를 베풀지 못하고 극단적인 투쟁과 배척, 그리고 폭력으로 일관했던 점, 처음의 순수한 동기가 점차 변질되면서 결국은 종권 다툼의 양상을 띠게 된 점, 그리고 수행의 전통을 되살리자는 정화가 결과적으로는 무자격 승려의 졸속 배출로 인해 수행풍토가 와해된 점 등도 문제로 지적될 수 있다. 이렇듯 정화의 부정적인 측면만을 부각시키려는 사람들은 이를 법난, 분규, 분쟁, 폭력 등으로 부르고 있다.
정화운동의 시점에 대해서도 논란이 있지만, 가장 결정적인 촉발의 계기가 1954년 이승만의 유시였다는 점은 부정할 수 없다. 물론 해방공간에서 식민지 체질을 극복하고 불교를 혁신하기 위한 자발적인 움직임이 있었던 것은 분명하지만, 이것을 그대로 정화의 시점으로 보기에는 문제가 있다고 본다. 당시 혁신 단체의 문제의식은 대처승의 축출과 토지개혁의 수용 문제였다.
대처승의 축출을 주장했던 것은 당시 90%가 대처승인 현실에서 대처승의 존재를 완전 부정하는 것으로 현실성이 다소 떨어지는 주장이다. 미군정의 명백한 기독교 우위 정책에 대하여 불교계가 내적으로 서로 단합하고 역량을 결집하여 적극적으로 자구책을 마련해 나가야 할 시점에, 대처승은 물론 일반 신도들까지 배제하고 비구 중심의 배타적인 권한을 요구함으로써 불교계의 역량을 축소시키고, 스스로 분열과 갈등을 자초하고 있기 때문이다. 
또한 토지개혁의 문제에서 혁신 측(전국불교도총연맹)이 무상몰수 무상분배(無償沒收 無償分配)를 주장하면서, ‘사찰토지 소유반대’라는 강령, 또는 ‘사찰 토지는 국가사업에 제공하라.’ ‘승려는 생업에 종사하라.’와 같은 주장을 했던 것도 불교의 입장에서 이해가 안 되는 부분이다. 어떤 면에서는 너무나 순진하고도 나약한 현실 의식을 보여 주는 것이다. 불교가 이미 확보하고 있는 재산을 누군가 빼앗으려고 한다면 이를 거부하는 것이 당연지사일 것이다. 그런데 사찰 재원의 거의 대부분을 충당했던 토지를 스스로 내놓으라는 주장은 상식적으로 이해가 가지 않는다. 이것은 비현실적으로 순진무구한 의식구조가 아니라면, 사회주의적인 사상에 입각한 것이라고 밖에는 달리 볼 방법이 없는 것이다.
결국 대처승의 축출과 토지개혁의 수용은 명분에 불과하였고, 사실은 종권 획득을 위한 투쟁의 성격이 강했다고 본다. 사실 해방공간에서 보수-혁신의 대립은 1920년대의 총무원-교무원의 대립을 연상케 한다. 한때 개혁을 주장하던 인사들이 교단의 중진이 되면 종권 유지에 연연하게 되고, 또 다른 젊은이들이 그들을 보수파로 몰아 배척한다. 그리하여 그들이 종권을 잡게 되면, 얼마 안 있어 또 다른 새로운 세력에 의해 밀려 나게 된다. 노소(老少) 간의 대립은 어느 사회에서나 있는 것이지만, 자신들의 의사를 관철시키는 방법이 비불교적이고 배타적인 방법이었기 때문에 악순환이 계속되는 것은 아닐까?
결국 해방 이후 불교계 내부에서 일어났던 교단개혁의 움직임은 불교계 내외의 이런저런 이유로 인해 실패로 돌아갔고, 1954년 이승만의 유시로 인해 이른바 불교정화운동이라는 새로운 양상으로 전개되기에 이른다. 왜색불교를 타파하고 한국불교의 전통을 회복해야 한다는 숭고한 의미를 갖는 불교정화가 불교계 내부의 주체적 결단이 아니라, 이승만 대통령의 말 한마디로 촉발되었다고 하는 것은 한국불교의 권력 의존성을 그대로 말해 주는 것이라고 아니할 수 없다.
유시의 요지는 교단과 사찰은 독신 비구승이 담당하여 운영하고 대처승은 사찰 밖으로 나가라는 것이었다. 무엇보다 이것은 자유민주주의를 국시로 하는 대한민국의 대통령으로서 있을 수 없는 행동이었다. 당시 한국이 자유민주주의의 경험이 부족하여 국민의 기본권에 대한 의식이 약했다는 점을 고려한다고 하더라도, 자유민주주의의 종주국인 미국에서 오랫동안 유학과 망명생활을 했던 이승만이 ‘종교의 자유’와 ‘정교분리’라는 헌법의 정신을 무시하고 특정종교의 내부 문제에 대해 마치 제왕처럼 명령을 하달하는 식으로 개입했다는 것은 납득이 가지 않는 일이다.
불교계 내부에도 문제는 있었다. 이승만의 이러한 행태에 대해 불교는 당연히 거부의 입장을 표했어야 하지 않을까? 왜색불교를 타파하고 전통불교를 회복한다는 대의명분이 아무리 옳은 것이었다 하더라도, 그것을 추진하면서 타율적으로 공권력에 의지했을 때, 결과적으로는 더 큰 대가를 치러야 한다는 것을 깨달았어야 했다. 그것이 진정 옳은 길이었다면 이승만의 유시를 정중히 사양하고 불교 내부의 논리로, 여법하게 추진할 수 있었지 않았을까?
그리고 이승만이 여러 차례 담화문에서 언급한 ‘한국 불교의 전통 회복’에 대해서도 의문이 제기된다. 그가 알고 있는 한국 불교의 전통이란 것이 교리와 승단의 법맥 전수에 대해서는 전혀 아는 것이 없고, 그저 승려는 결혼하지 않고 수도하는 독신자 정도로 알고 있었던 듯하다. 그런 까닭에 결혼한 대처승은 왜색 불교의 화신이므로 사찰에서 축출하라는 것이었다. 그는 이렇게 말했다.

중이 처를 데리고 사는 그것이 큰 문제가 되는 것이 아니라. 문제는 우리나라 중들의 종교적 신앙 조리가 일본 중들의 그것과는 특별히 다른 것이 몇백 년 계속되어 왔다. 일본이 한국을 점령하어 한인들을 다 일본인화시키려 할 때 한국에 충성하려던 중과 교도들은 다 물러났고 일본에 충성하는 새 중들만이 사찰계를 차지하였다. 이들 친일하던 중들은 오늘에 와서는 마땅히 물러서야 할 것임은 누구나 이론을 붙일 수 없는 것이다.

그의 논리는 비구승이냐, 대처승이냐가 문제가 아니고, 일본강점기에 친일 행각을 하였느냐, 아니냐가 문제라는 것이다. 그러면서 수차례 유시를 통하여서 대처승들은 사찰에서 떠나라고 지시하였다. 결국 그의 주장대로라면 대처승은 친일 승려라는 등식이 성립되는데, 이것은 논리적 모순이 아닐 수 없다. 이렇게 볼 때 ‘대처승은 곧 친일승려이고, 축출되어야 할 집단’이라는 논리는 이승만의 정치적인 목적에 의해 만들어진 허구적인 교조적 이념이 아니었나 하는 생각마저 든다.
어쨌든 비구승들은 이승만의 유시를 불교정화의 좋은 계기라고 생각하고 더욱더 공권력의 힘에 의지하려고 하였다. 이승만에게 이런 유시를 하도록 건의한 것도 비구승이었다고 한다. 이것은 정화의 이념적인 동기는 순수했다 하더라도 그 직접적인 계기는 종권 획득의 목적에 있었다는 점을 단적으로 보여 주는 일이라고 아니할 수 없다. 극소수에 불과했던 비구승이 절대다수를 차지하는 대처승들을 종권에서 완전히 밀어내겠다는 발상 자체가 이승만 대통령과 공권력의 배경을 믿지 않고서는 도저히 있을 수 없는 일이었던 것이다.
비구 측은 힘에 부칠 때마다 경무대를 방문하여 보다 강력한 지원을 간청하였고, 이승만은 무려 8차례나 정화유시를 발표하여 비구 측을 지원했다. 이로 인해 비구 측과 이승만 정권 사이에는 공고한 지지와 후원 관계가 형성되었다. 불교신자들은 경무대 앞에서 북진통일 지지 시위를 벌이고, 1956년에는 비구 측 대표들이 경무대를 방문하여 대통령 선거 재출마를 호소하고, 3·15 부정선거에도 조계종단이 체계적으로 동원되었다는 것이다.
비구승들은 처음에 수행공간의 확보라는 소박한 동기에서 시작하여 점차로 종권 획득이라는 걸로 변질돼 나갔는데, 그것을 가능케 한 것이 바로 이승만의 유시였다. 1949년 공포된 토지개혁으로 사찰경제가 위축되면서 당장의 식량 확보에 어려움을 겪던 수좌들은 수행공간이라도 확보하자는 절박함이 있었다. 1952년 봄 선학원 승려였던 이대의(李大義)는 당시 교정 송만암(宋蔓庵)에게 수좌 전용 사찰을 할애해 달라는 진정서를 제출하였고, 이에 대해 송만암은 독신승려 전용 수행 사찰을 제공하라는 유시를 내리게 된다. 그러나 이것이 즉시 이루어지지 않자, 수좌들은 일본강점기 이후 보수 지주들에 의한 피해의식과 연결되면서 큰 불만을 갖게 되었고, 교단에 대한 부정적인 의식과 배타적인 마음을 갖게 했던 것이다. 이런 와중에 이승만 대통령의 유시가 나오자 수행공간 확보라는 수좌들의 소박한 요구는 종권 장악이라는 커다란 목표로 바뀌게 되었다. 그들의 당시 상황이 절박했기에, 이승만 정권의 정치적인 의도나 위헌적 요소, 그리고 뒤에 따라올 불교계 내부의 후유증 같은 것들을 생각할 겨를이 없었다.
그렇다면 이승만 대통령이 위헌의 소지가 있다는 비판에도 불구하고, 불교계의 분규에 직접 개입하여 소수파에 불과했던 비구승을 지원한 이유는 무엇인가? 물론 왜색불교를 타파하고 청정 비구 중심의 한국불교 전통을 회복해야 한다는 대의명분이 있었던 것은 분명하지만, 그 이면에는 정치적인 의도가 분명히 숨어 있었다.
이승만은 오랜 망명생활 끝에 귀국하였으므로 국내에 독자적인 정치적 기반을 갖지 못했다. 그리하여 집권 기간 동안 그는 “내각 구성에 있어서 한민당(민국당) 세력의 배제, 조직력 있는 세력에 대한 경계의 원칙을 지켰다.” 그리고 종교를 자신의 권력기반을 이루는 데 이용한다. 특히 자신을 지지하는 개신교 세력을 든든한 후원자로 인식하였으며, 대한민국을 개신교공화국으로 만들려고 하였다. 정권 초기 불교계는 이승만 정부와 비교적 원만한 관계를 유지하였다. 김법린, 백성욱 등이 입각하였고, 최범술, 유성갑, 이종욱, 허영호, 박성하 등 총무원 지도자 다수가 국회의원이 되는 등 교단에 공백상태를 가져올 정도였다. 뿐만 아니라, 6·25전쟁이 발발하자 불교계는 불교구국총연맹을 결성하여 이승만을 지원하는가 하면, 1953년 6월에는 승려반공단이 중심이 되어 ‘통일 없는 휴전 반대’ 데모를 벌이기도 했다.
그러나 6·25전쟁 이후 이승만은 급작스럽게 대처승 중심의 총무원 세력을 배제하고 소수파인 비구 측으로 지지세력을 전환하였다. 그 배경으로는 대처 측 정치인사 다수가 한민당과 함께 반이승만 진영으로 합류하였고, 이승만이 3대 국회의원 선거를 준비하면서, 사사오입 개헌 파동으로 야기된 정치적 위기를 타개하기 위해 여론의 관심을 다른 곳으로 돌릴 필요가 있었기 때문이다. 특히 이승만의 대처승 축출 기도는 당시 무소속 국회의원이었던 박성하가 자유당 정권을 앞장서 비판하고 있었고, 1956년의 대통령 선거에서 대처승들의 영향력이 크게 작용할 것으로 예상되었던 점 등이 주된 원인이었다고 한다. 어쨌든 정권 유지의 필요성 때문에 국가가 불교 분쟁에 개입한 것만은 틀림없는 사실로 보인다. 1954년부터 수년간에 걸쳐 이승만 정권은 비구 측의 강력한 정치적 후원자로 비구-대처 분쟁을 자극하고 확대시켰다. 이승만 대통령은 물론 문교부 등 국가기구가 불교 분규에 깊숙이 개입하기 시작하면서 비구 측과 대처 측의 갈등을 자극하고 확대시켰던 것이다.
한편 이승만이 불교계의 왜색타파에 앞장섰던 것은 표면적인 반일주의와 반공주의를 내세우면서 사실은 정권의 지지기반이었던 친일 기독교 세력을 보호하기 위한 여론 무마용 희생양으로 불교를 이용한 측면도 있다. 이승만 정권은 1948년 국회에서 반민족행위처벌법(반민특위법)을 제정하여 정권의 역사적 정당성과 민족주의적 명분을 세운다고 했다. 그러나 1949년 채 1년도 안 되어 반민특위 활동을 비판하고 경찰을 동원하여 반민특위를 강제로 해산시켰다. 이승만 정권은 친일세력을 보호하고 두둔했으며, 친일 기독교 세력들은 반공을 내세우면서 정권을 지지하고 친근한 관계를 갖게 되었다. 해방 이후 가장 중요한 문제인 친일파 처벌 문제는 청산되지 못한 것이다. 이로써 이승만 정권의 반일주의는 오직 일본에 대한 하나의 외교상의 정략에 이용되었고, 다만 자유민주주의 체제의 수립을 표방한 반공주의만이 정권유지의 명분으로 남게 되었다. 이승만이 불교계의 분쟁에서 왜색불교를 타파한다는 명분을 들고 나온 것은 해방 이후 친일파를 정죄하지 못하고 오히려 그들을 정권의 지지기반으로 삼아 정권의 정통성이 취약하다는 국민의 비판여론을 환기시키고 호도하기 위한 고도의 정치적 계산이 깔려 있었다.
이렇듯 이승만 정권은 장기집권을 위한 전략으로 기독교 세력을 정치적 기반으로 육성했고, 다른 종교들은 많은 제재를 가하고 분열을 유도하는 등 종교집단을 적절히 활용했다. 불교에 대해 공권력을 동원하여 격심한 내분을 조장함은 물론, 유교에 대해서도 김창숙이 이끄는 유도회에 대한 분쟁을 사주하고 그 자신이 유도회 총재가 되기도 했다. 민족종교인 천도교와 대종교가 급격한 교세의 약화를 경험한 것도 이승만 정권의 감시와 통제 때문이었다.
그러나 이러한 정치적 의도에도 불구하고 이승만 정권에 그러한 빌미를 제공한 것은 불교 자체의 분열과 갈등, 그리고 무엇보다 국가권력에 의지하려고 하는 치명적 약점 때문이었음을 부인하기 어렵다. 국가 권력에 의지해서 종권을 유지하려고 하는 한국불교의 전통적 특성은 통치자의 입장에서 볼 때에 통제하고 이용하기에 용이한 집단으로 볼 수밖에 없게끔 하는 조건이다. 이승만 정권에서 비구든 대처든 할 것 없이 모두 분규의 향방에 결정적 영향을 미치는 정부의 환심을 얻기 위해 국민 여론이나 신자들의 의사와는 상관없이 충성 경쟁을 하였다.
한편 1954년 11월 이승만의 제2차 담화로 힘을 얻은 비구승들이 태고사로 진입하게 되면서 정화는 선학원을 떠나 본격적으로 전개되는데, 여기서 바로 폭력적인 수단이 등장하게 된다. 불교 정화의 유산을 내적으로 반성해 볼 때에 가장 심각한 문제 중의 하나가 바로 정화를 달성하기 위한 수단으로 폭력을 다반사로 사용해왔다는 것이다. 성냄과 분노를 삼독(三毒)의 하나로 가장 경계하며, 비폭력 평화정신을 기반으로 하는 불교에서 폭력이 비일비재하게 일어나고 있는 것을 어떻게 해석해야 할까?
이후 문교부가 개입한 가운데 여러 차례 합의를 이루어 냈고, 충분히 타협의 여지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타협을 하지 못하고 끝없는 투쟁으로 일관한 것도 과연 그것이 불법의 정신에 합당한 것인지 묻지 않을 수 없다. 심지어는 4·19 이후 사태가 불리하게 돌아가는 분위기에서 비구승들이 대법원에 난입하여 할복까지 자행하는 것은 승려의 행동으로 보기에는 다소 무리가 따른다.


4. 불교 정화의 교훈: 국가와의 관계 모색

이승만 정권의 정치적 의도하에 친기독교적 정책과 불교에 대한 통제와 분열 정책이 있었다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지만, 정화를 통해 드러난 불교 내부의 문제를 되돌아보고, 거기서 한국불교의 좌표를 설정하는 것도 중요하다. 정화는 일본식의 불교문화를 털어버리고 한국의 불교전통을 회복한다는 대의명분이 있었고, 결과적으로 비구승을 중심으로 하는 조계종단을 성립시켰다는 점에서 그 의의를 찾을 수 있다.
그러나 정화가 남긴 부정적인 유산도 만만치 않다. 모든 긍정적인 대의명분에도 불구하고, 국가권력에 의지한 종권 다툼의 성격이 강했음을 부인할 수 없다. 불교계의 일을 불교 내부의 논리로 해결하지 못하고, 언제나 공권력을 동원하여 해결하려 했다. 대통령의 계속된 유시와 국가기관의 개입은 물론, 나중에는 사법부의 재판에 의존하는 등 갈수록 공권력의 개입 정도가 심해짐으로써 불교 자주화에 심각한 문제를 야기했다.
종교는 성스러운 가르침을 믿고 실천하는 집단이지만, 세속적인 삶과 유리될 수 없기에 세속을 통치하는 국가권력과 밀접한 관계를 맺는다. 때로는 종교가 국가의 상위에 있어 성스러운 가르침으로 세속정치를 이끌어 가기도 하고, 때로는 종교가 국가권력에 종속되어 권력을 정당화해 주는 이념적 수단이 되기도 한다. 또한 종교권력과 국가권력이 대등할 때에는 서로 갈등관계에 놓이기도 한다.
역사적으로 볼 때, 종교는 세속적 권력에 초연해서 자존심을 지킬 때 오히려 존경을 받고 종교로서의 본래 기능도 유지할 수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종교가 지나치게 권력화되었을 때 종교권력이 상승되는 반면, 오히려 그것 때문에 자승자박이 되어 쇠퇴의 길을 걷는 경우가 많다. 고려 불교의 권력화와 쇠퇴의 과정이 그 좋은 예이다. 특히 오늘날과 같은 정교분리 및 다원주의 시대에 종교는 국가에 대해 불가근불가원(不可近不可遠)의 관계를 유지해야 한다. 불교의 입장에서 그것은 부처님 당시의 원시불교 정신으로 돌아가는 일이다.
따라서 불교는 원칙적으로 철저한 정교분리에 기초하여 불교권력을 추구하지 않도록 주의해야 하며, 불가피하게 세속정치와 관계를 맺을 경우에는 갈등이나 마찰을 피해야 한다. 왜냐하면 종교는 어디까지나 종교다워야 하고, 종교의 자존심을 지켜 세속정치에 대해 가르침을 주고 세속권력을 올바른 방향으로 이끌어갈 때 가장 아름다울 수 있기 때문이다.
요컨대 이번 기회에 한국 불교는 국가불교의 성격을 과감히 깨트리고, 원래의 부처님 정신으로 돌아가 종교로서의 정체성과 자존심을 회복하는 계기가 되길 바란다. 물론 당장 국가와 대립각을 세워나가자는 것은 아니다. 불교가 불교답게 새롭게 정립되어 불교가 가지고 있는 종교적 자산을 새롭게 꽃피울 수 있다면, 그것은 불교가 새로워지는 것뿐만 아니라 대한민국이 새로워지는 것이며, 국민의 영적 복지가 고양되는 일이기도 할 것이다. ■

 

이재헌 / 서울대 강사. 서울대학교 윤리교육과를 졸업하고, 한국학중앙연구원 한국학대학원에서 철학·종교를 전공으로 박사학위를 취득하였다. 한국학중앙연구원, 강남대, 한신대, 경원대 등에서 강의했고, 현재 서울대 종교학과 대학원에서 강의하고 있다. 주요 논문으로 〈근대 한국불교의 타 종교 인식〉 〈미군정의 종교정책과 불교계의 분열〉 등이 있다. 저서로 《이능화와 근대 불교학》 《금강대도 종리학 연구론》 Ⅰ·Ⅱ 《조계종사(근현대편)》(공저)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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