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마트한 환경, 화엄과 선의 미학과 중도

1. 변화와 변혁

인류문명의 시작 이래로 과거 수천 년에 걸친 변화보다, 1900년대의 1세기 만에 전개된 변화는 인간의 삶을 더욱더 크게 바꾸어 놓았다. 그러나 다시금 2000년 이후에 전개된 10년간의 변화는 외형적으로는 지난 1세기의 변화를 따라가지 못하지만, 정신에 던진 충격은 그 이상의 크기로 다가온다. 왜냐하면, 이제 이 세상은 스마트라는 작은 가치 속에 내장된 무한의 변화로 치닫고 있기 때문이다.
휴대전화가 우리나라에 처음 등장한 1984년만 하더라도, 그것은 서민들과는 무관한 그저 신기한 기계일 뿐이었다. 우리는 그때 86아시안게임과 88서울올림픽을 통해서 세계에 우리의 존재를 알리려는 길목에 있었다. 그리고 그 몇 년 전으로만 거슬러 올라가면, 전화 자체도 흔치 않은 시대를 살았었다.
그러나 불과 25년 정도가 흐른 오늘날, 휴대전화 가입자 수는 우리나라 전체 인구보다도 많은 5,005만 명이 넘는다. 이제 휴대전화는 문명의 한 흐름을 장악하고 있는 것이다. 그것은 잔잔하게 전개된 문화혁명이다.


2. 정(情) 많은 우리 민족과 통신의 발달

우리 민족은 정이 많다. 그로 인해 사람과의 교류를 즐기며, 홀로 있는 것을 꺼린다. 이는 집단주의 문화에서 나타나는 특징이기도 하다. 우리는 나라도 ‘우리’나라, 집도 ‘우리’ 집일 정도의 집단적인 사고를 한다. 그래서 길을 가는 사람들에 대한 칭호도 삼촌 간을 의미하는 ‘아저씨’와 ‘아주머니’이며, 음식점이나 미용실에서 일하는 분들은 모두 ‘이모’로 호칭된다. 즉, 나라 전체가 하나의 가족과 같은 의미로 구성되어 있는 것이다. 실제로 나라와 같은 경우도 우리는 국가(國家)라고 쓰며, 우주(宇宙)라는 표현도 ‘집 우(宇)’와 ‘집 주(宙)’라는 집의 의미를 가진다. 이러한 측면들은 집단주의 문화의 한 단면을 잘 나타내 준다고 하겠다.
집단주의 문화에서 개인은 언제나 단체 속에서 자신의 위치를 찾으려고 하며[서열문화], 능력보다는 관계성을 중시한다. 그로 인하여 주정(主情)적인 문화구조가 형성되게 된다. 또한 여기에는 유교문화의 혈연을 중시하는 측면 역시 일조를 했다고 하겠다.
‘정(情)’과 ‘관계성’ 중시는, 우리나라 통신시장 발달의 중요한 문화배경이 된다. 그로 인하여 유무선 전화와 인터넷의 발달은 좁은 국토임에도 불구하고, 우리나라에서는 비약적인 성과를 가져온다. 물론 여기에는 우리 민족의 ‘빨리빨리’라는 다소 성급한 심성(心性) 구조도 한몫했다고 하겠다. 즉, 우리는 잠시도 참지 못하고 상대와 즉시 교감해야 하는 것이다. 이는 휴대전화의 통화 품질과 인터넷의 속도에서 최상의 성능이 가능하게 한다.
우리나라 안에서는 체감되지 않지만, 외국에 나가 보면 우리나라 인터넷이 얼마나 빠른지 알게 된다. 선진국이라고 할지라도 외국의 유선인터넷이 우리의 무선인터넷 속도조차 따라오지 못하는 경우는 이제 그리 놀랍지도 않다.
그러나 이러한 우리 국민의 정서가 반드시 긍정적인 것으로만 작용하는 것은 아니다. 우리나라는 인터넷 환경 등에서 최첨단을 달리지만, 동시에 가계지출에서 차지하는 통신비 비중 역시 세계 최고 수준이다. 4인 기준 유무선 전화비와 인터넷 비용은 평균 20만 원 정도에 육박하며, 이는 가계운영에 심각한 부담을 주고 있다. 즉, 우리는 먹고 입어보지도 못하고, 다른 사람과의 교감을 위해서 가계지출의 상당 부분을 소모하고 있는 것이다. 덕분에 통신사들의 주가는 언제나 주식시장에서 최상위권에 위치하고 있다.


3. 온라인게임 강대국과 리니지의 모순성

우리나라의 발달한 인터넷 환경과 ‘정’과 ‘관계성’을 중시하는 문화구조는, 온라인게임의 황금기를 가져온다. 온라인게임을 장시간 하다가 사람이 죽고, 온라인게임 안의 문제가 확대되어 현실의 싸움으로까지 번지는 ‘현피(현실에서의 P.K)’라는 것은 이제 놀라운 일도 아니다.
지난 3월 프로야구 제9구단인 다이노스를 창단한 엔씨소프트는 중견 대기업조차 할 수 없는 위업을 달성하며, 명실공히 게임을 통한 대기업 입성을 천명했다. 온라인게임이라는 가상게임을 통한 재화확보로 결국 현실게임단을 창단하기에 이른 것이다. 1990년대 중반에 발생한 온라인게임 산업이 불과 15년 만에 대기업의 반열에까지 오를 정도로 발전한 것이다. 이는 엔씨소프트의 김정진 회장과 김택진 사장의 개인 재산 규모가 각각 20억 달러와 10억 달러로 내국인 중 7위와 16위를 기록하고 있는 것을 통해서도 분명해진다.
중소기업의 대기업 성장은 삼성·현대·LG 등 간판 대기업들에 의한 눈에 보이지 않는 장벽에 막혀 불가능한 것이 현실이다. 그런데 무형을 파는 게임 산업 쪽에서, 불과 15년 만에 대기업으로 성장을 이루었다는 것은 우리나라 경제발전사에서 일대 획을 긋는 사건이다.
게임 산업은 최첨단의 산업으로 변화 속도가 매우 빠르다. 그런데 이러한 빠른 변화 속에서도 1997년에 만들어진 리니지(엔씨소프트의 주력게임)가 언제나 접속자 순위 5위 안에 드는 게임이라는 것은 매우 이례적이다. 리니지는 공성전(攻城戰) 등을 통해서 게임 안에서 유저들끼리의 인간관계를 구축하도록 한 것이 특징이다. 지금도 리니지 게임의 캐릭터에게 주어지는 아이템 세트는 현찰 1억을 훨씬 넘는다. 이는 이 게임의 막대한 영향력을 방증한다고 할 수 있다.
엔씨소프트는 리니지의 아성을 이어가기 위해서 2003년 최고의 그래픽 사양 등을 갖춘 최첨단의 리니지2를 발표한다. 그러나 이 게임은 시장점유율에서 오늘날까지 리니지1의 단순한 사양의 게임을 능가하지 못하고 있다. 이는 우리에게 게임이 단순히 게임을 통해서 즐기는 것만이 아니라, 그 속에서 인간관계를 통한 교류가 주가 되고 있다는 것을 단적으로 인식게 해준다.
이와 같은 현상은 1998년에 만들어져 공전의 히트를 기록하며, 우리나라에 PC방 문화를 일으킨 스타크래프트를 통해서도 이해될 수 있는 부분이다. 스타크래프트는 하나의 완성된 게임인 동시에, 유저(게임 이용자)들에 의해서 게임이 재가공되어 창조되는 일련의 과정을 거치면서 국민게임과 같은 위상을 가지게 된다. 이 역시도 롱런할 수 있었던 것은 그러한 일련의 과정 속에 포함된 유저끼리의 ‘관계성’이었다. 즉, 리니지가 ‘장시간적인 관계성’을 확보하여 성공했다면, 스타크래프트는 ‘단시간적인 관계성’과 ‘다양성’으로 성공한 것이다. 이러한 리니지와 스타크래프트의 가장 빠른 시장변화 속의 장기적인 집권을 통해, 우리는 현대사회의 변화 속에서도 변하지 않는, 우리 민족의 특수성에 관한 이해를 도출해 보게 된다.


4. 일방통행과 쌍방향

TV의 보급은 문화적 혁명이었다. 그러나 보급단계의 TV는 한 가정에 1대라는 수신기의 한계와, 다양하지 않은 채널로 인하여 다양성을 가질 수 없었다. 집안의 식구들이 모두 모여 있는 자리에서 시청되는 방송은, 한 프로가 끝나기 전에 TV 쪽으로 나가서 채널을 변경하기 어려웠다. 그러던 것이 TV 보급 대수가 증대되고 리모컨이 일반화되면서, TV는 점차 개인화를 반영하기 시작한다. 시청자들은 자신이 보고 싶은 프로를 보면서, 동시에 기회만 있으면 리모컨을 이용해 다른 프로그램을 곁눈질한다.
오늘날 한 프로를 시작부터 끝까지 일관되게 보는 풍조는 없다. 우리는 사이사이에 다른 여러 방송들을 기웃거리며, 프로그램 안에서는 사회자가 리모컨에 손을 대지 말고[Don't Touch Remote Control] 자신의 방송만 봐 줄 것을 공공연히 요청한다. 물론 이는 케이블이나 위성방송을 통한 다양한 방송들이 포진되어 있기 때문이기도 하다.
이제 우리는 TV를 보면서도 우리의 선택을 존중받는다. 과거의 TV가 보여주려는 상대에 의해 주입되는 것이고, 우리는 이를 보거나 거부할 수밖에 없는 제한된 권리를 가졌던 것에 비하면 큰 변화라고 하겠다. 오늘날 TV는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보도록 하고자 하는 데 이르고 있고, 모든 판단은 시청자에 의해 결정된다. 즉, 시청자의 ‘주관’이라는 부분이 더 강하게 작용하고 있는 것이다. 이것은 개인화라는 사회적인 변화와 직결된다는 점에서 주목된다.
그러나 TV는 선택의 다양성으로 전개될 수는 있어도 시스템의 구조상 쌍방향을 완전히 실행시키기에는 무리가 있다. 이제 우리는 1990년대 초 귀가시계로도 불렸던 드라마 〈모래시계(SBS, 1995)〉를 보기 위해서 방송시간에 맞출 필연성은 없어졌다. 적절한 인터넷 케이블방송에 가입하기만 하면, 시간을 초월해서 거의 모든 드라마 등의 프로를 내 마음대로 볼 수 있게 되었다. 즉, TV에서 더 이상 시간의 장벽은 사라진 것이다. 또한 홈쇼핑이나 케이블방송 등에서는 인터넷과 연계된 보다 다양한 선택과 쌍방향을 지향하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모든 노력은 TV의 한계상 인간의 끊임없이 다변화하는 개인적인 욕구 표출, 즉 모두가 다른 개성의 만족에는 성공하기 어려운 한계를 내포한다.
다양성에 대한 인간의 선택, 그리고 쌍방향이라는 관점에서 TV의 한계를 극복하는 것이 바로 인터넷이다. 붓다는 “인간의 마음은 원숭이와 같아 잠시도 가만히 있지 못한다.”라고 했다. 그런데 이러한 인간은 동시에 남보다 튀어서 주목받고 싶은 욕망과 욕구로 가득 차 있다. 명품을 추구하는 심리에는 제품의 견고성이 아닌 주목받고자 하는 욕망이 잘 녹아 있다.
변화하기 쉬운 인간의 마음과 주목받고 싶은 심리구조, 그것이 보다 효율적으로 가능하도록 한 것이 바로 인터넷이다. 오늘날 젊은이들에게 인터넷이 TV 시청시간에 비해 더 많은 시간을 할애받을 수 있는 것은, 바로 이러한 인간의 보편적 심리에 인터넷이 더욱더 적합하기 때문이다.
우리나라에서 인터넷 포털로 성공한 것은 ‘다음’과 ‘네이버’, 그리고 ‘네이트’와 ‘싸이월드’가 대표적이다. 구글과 같은 다국적 기업조차 이들의 아성을 무너트리는 것에 실패하고 있다. 그런데 다음은 ‘카페’를 네이버는 ‘지식검색’, 그리고 네이트는 ‘커뮤니티’를 싸이월드는 ‘미니홈피’를 각각 무기로 하고 있다는 데, 우리는 주목할 필요가 있다. 즉, 카페라는 자신의 개성을 표출할 수 있는 공간과 지식검색이라는 쌍방향의 정보교환 공간, 그리고 네이트의 동아리와 같은 모임 공간과 싸이월드의 개인 중심의 친밀 공간은, 우리나라 사람들의 ‘정’과 ‘관계성’ 중시 코드를 정확하게 읽고 있다. 이것이 바로 이들 포털의 성공 비결이다. 즉, 대상이 바뀌어도 우리 국민의 심성구조는 동일하게 흐르고 있고, 이것을 맞추느냐 그렇지 못하느냐에 따라서 기업의 성패가 결정되는 것이다. 이들은 현재 자유토론 공간인 ‘아고라(그리스의 광장문화)’와 ‘사람 찾기’ 등을 통해서 또 다른 변별점을 구축하고 있으며, 이는 구글의 단순하고 광범위한 자료수집 기능의 점유율을 효율적으로 차단하고 있다.


5. 완제품과 미완의 제품, 그리고 연기(緣起)

일반적으로 모든 가전제품은 특유의 기능을 내장한 채, 그 기능에 충실하다. 예컨대, 냉장고는 냉장의 기능에, TV는 수신의 기능에, 오디오는 음악재생의 기능에 충실한 것이 그것이다. 그리고 이는 제조공정 중에서 각기 다른 특별한 기능을 부여받고 있기 때문에, 정해진 용도 이외로는 활용이 불가능하다. 즉, 냉장고를 TV나 오디오의 기능으로 재가공한다는 것은 전혀 가능성이 없다는 말이다.
그런데 컴퓨터는 얘기가 다르다. 컴퓨터는 무엇으로 규정되어 있지 않은 공(空)기계이다. 그것을 어떤 프로그램으로 세팅하느냐에 따라서 동일한 컴퓨터라도 완전히 다른 가치를 생산하게 된다. 즉, 컴퓨터는 하드웨어와 소프트웨어라는 두 가지의 서로 다른 층차를 확보하고 있는, 기존의 가전제품과는 완전히 다른 방식의 제품인 것이다.
흔히 컴퓨터를 구입하면, 윈도나 매킨토시 프로그램이 깔려 있기 때문에 컴퓨터에는 응당 이러한 프로그램이 내장되어 있는 것으로 착각하기 쉽지만, 이는 컴퓨터의 본성(本性)이 아니다. 즉, 이러한 구동 프로그램은 정확하게 말해서 우리가 패키지 상품을 구입했기 때문에 따라오는 것이지, 컴퓨터의 본질에 포함된 것은 아니라는 말이다. 그래서 이러한 프로그램들은 조립 PC에는 주어지지 않으며, 단품으로도 판매되고 있는 것이다.
이렇게 놓고 본다면, 컴퓨터는 기계인 동시에 공(空)이다. 노자(老子)는 빈방은 비어 있기 때문에 그것은 때론 침실로, 또 때론 식당으로, 또 때론 강의실 등의 다양한 용도로 사용될 수 있다고 말한다. 컴퓨터는 바로 이와 같은 빈방과 같은 존재이다. 즉, 컴퓨터의 기계적인 측면은 존재하지만, 그것의 규정성은 실재하지 않는다는 말이다. 이를 붓다는 유식(唯識)에서 1수4견(一水四見; 하나의 물에 대하여, 神은 거울로 사람은 물로 餓鬼는 불로 물고기는 집으로 본다는, 인식주체가 인식대상을 결정한다는 것에 대한 비유)의 비유로 들고 있다. 하나의 물이라는 존재는 각각의 중생들의 근기에 따른 다양성을 통해 재규정된다. 이는 하나의 컴퓨터가 사용자에 따라서 각기 다른 적절성을 확보하며, 유용성을 입는 것과 일치한다.
컴퓨터는 사용자에 의해서 ‘한글’이나 ‘아크로뱃’ ‘알약’ 등의 다양한 프로그램들이 깔리면서 특수하게 재정립된다. 그리고 그 사용자에 맞는 특수한 유용성을 가지게 된다. 다른 가전기기들과 달리, 개인 컴퓨터와 같은 경우는 다른 사람이 손대는 것에 대한 저항감이 크다. 이는 자신의 개인성이 또 다른 사람에 의한 개인성으로 침해되는 경우가 빈번히 발생하기 때문이다. 그로 인하여 컴퓨터는 사용자가 여럿일 경우 한 집안에 여러 대가 존재하게 된다. 즉, 말 그대로 개인 PC인 것이다.
컴퓨터는 특별한 어떤 기능을 가지는 것은 아니지만, 모든 가능성을 포함하고 있다. 그래서 때로는 TV를 대체할 수도 있고, 또 때로는 오디오를 대체할 수도 있다. 우리는 필요에 따라 컴퓨터의 외관이 아닌 내면을 꾸민다. 그리고 자신에게 맞는 최적화를 만들어낸다.
이러한 컴퓨터의 체계는 이 세계 자체가 공(空)이면서 동시에 끊임없이 변화하는 묘용의 공간이라는 진공묘유(眞空妙有)와 닮아 있다. 공의 철학은 현상을 부정하는 것이 아니다. 이는 그 실체성만을 부정할 뿐이다. 즉, 공은 작용으로써만 실존하는 연기의 현상계를 직시한 불교적인 직관인 것이다.
이 세상의 일체는 변화 속에서 연기되고 있다. 그러한 가운데 가장 적절한 유용성, 그것이 중도(中道)이다. 컴퓨터의 하드웨어적인 부분은 생산과 더불어 죽은 존재이다. 그러나 소프트웨어는 언제나 현재 진행형의 살아 있는 존재이다. 오늘도 바이러스 프로그램은 수십 개 이상의 업데이트를 스스로 실행한다.
소프트웨어와 관련해서 인터넷에는 이런 말이 있다.

네가 필요로 하는 모든 프로그램과 정보는 이미 어느 곳에선가 유통되고 있다. 단지 네가 그것을 찾지 못하고 있을 뿐이다.

이제 무엇을 창조하고 아는 것을 통해서 지식을 독점하는 시대는 지났다. 지금의 시대는 누가 얼마나 빨리, 유효적절한 수단을 찾아가느냐의 ‘찾는 시대’이다. 컴퓨터는 바로 이러한 찾는 도구라고 할 수 있다.
컴퓨터는 다른 가전제품들의 한계를 뛰어넘는 ‘미완의 완성품’이다. 그리고 이러한 컴퓨터의 위대한 힘은 어떠한 방식으로든 완성을 지향하지 않는다는 점에 있다. 이는 변화 그 자체가 진리라는 불교의 연기설과 유사하다. 그러나 주의할 점은 컴퓨터는 미완성품이지만, 공장에서 출고되는 하드웨어는 완성품이라는 한계를 가진다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2년 정도의 주기를 가지고 컴퓨터를 바꾼다. 아니 정확하게 컴퓨터의 하드웨어적인 부분을 바꾸는 것이다. 마치 업(業)의 상속을 통해서 윤회하듯이 우리는 소프트웨어와 개인 문건의 상속 속에서 컴퓨터를 사용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컴퓨터가 소형화된 것이 바로 스마트폰이다.


6. 삼성과 애플-변화와 도전

휴대전화는 통신의 기능을 주로 한다. 그러나 현대사회의 발달은 여러 기능제품들의 필요를 산출해 내게 되고, 이로 인하여 우리는 MP3나 PMP, 디지털카메라나 내비게이션 등의 제품을 필요에 따라서 가지게 된다. 이 중 휴대전화가 가장 중요하고 필수적인 제품이기 때문에, 이러한 다양한 제품들은 휴대전화를 통해서 집결되는 양상을 보이고 있다.
가장 먼저 휴대전화가 흡수한 기능은 시계와 달력이다. 요즘 젊은이들에게서 손목시계를 가지고 다니는 사람들을 찾아보는 것은 그리 용이하지 않다. 실제로 시계를 휴대전화에만 전적으로 의지하다가 해외여행이라도 가게 되면, 죽은 손목시계에 건전지를 넣는 경험을 하는 것도 이제는 그리 어려운 체험이 아니다.
휴대전화는 이후 MP3와 DMB를 통해서 TV를 흡수한다. 그러나 이는 배터리의 빠른 소모와 작은 화면 등으로 인하여 대세가 되지 못한다. 그래서 한때 소형화로 치닫던 휴대전화시장은 대형액정으로 전환되게 되고, 눈에 보이지 않는 배터리 전쟁을 치르게 된다. 이로 인하여 오늘날 출퇴근의 지하철 속에서 휴대전화를 보고 있는 사람을 만나는 것은 익숙한 풍경이 되었다.
그러나 휴대전화는 다양한 기능들을 내장하면 할수록 보다 복잡해지고, 어려운 기능들을 첨가할 수밖에 없는 문제점을 노출한다. 그래서 보다 효율적이며 기능적인 휴대전화와 노트북의 결합을 시도하면서 등장한 것이 바로 넷북이다. 넷북은 과거 삐삐와 휴대전화의 중간단계에서 시티폰이 있었던 것과 같은 과도기적 산물이라고 할 수 있다. 즉, 시대적인 변화와 새로운 요구의 갈증을 해소하기 위한 요청적 산물인 것이다. 그러나 이는 오늘날 스마트폰과 스마트패드에 그 자리를 신속하게 내주고 있다.
 
삼성은 일본 기업들과 같은 방식으로 발전해서 일본 기업을 앞지른 우리의 대표기업이다. 일본 기업의 특징은 창조적 역량을 통해서 새로운 관점의 제품을 만든다기보다는, 기존의 제품에 디자인과 실용성을 부가하는 것에 중점이 맞추어져 있다. 삼성 역시 일본 기업들과 같은 ‘변화’를 주력으로 하는 기업이다. 디자인과 실용성을 바탕으로 하는 한발 빠른 변화는 삼성을 휴대전화 시장에서 가파른 성장세로 성공하게 한다. 그리고 삼성이 핀란드의 노키아를 제치고 휴대전화 시장의 패자가 되는 것은 시간문제로까지 인식되기에 이르렀다.
그러나 애플이 스마트폰을 등장시키면서 상황이 반전한다. 애플의 아이폰은 2007년 출시되었다. 그러나 우리나라에 아이폰이 들어온 것은 2009년이다. 통신시장이 세계 어느 나라보다도 큰 우리나라에서, 아이폰이 2년이나 늦게 출시되었다는 것은 이해되기 어렵다. 이를 사람들은 삼성과 LG와 같은 대기업이 아이폰에 맞서는 새로운 제품을 개발하기 위해서, 자신들의 텃밭인 한국 시장의 진출을 막았기 때문이라고 수군거렸다. 진위를 알 수는 없지만, 분명 아이폰의 늦은 진출은 이례적인 사건임에는 틀림이 없다.
삼성이 변화를 주로 하는 기업이라면, 애플은 다분히 창조적인 기업이다. 아이폰과 아이패드를 통해 모든 휴대용 기기들은 통폐합된다. 이는 기술의 혁신인 동시에 발상의 전환에서 기인하는 것이다.
삼성 휴대전화의 자부심은 책처럼 두툼한 사용설명서를 통해서 드러난다. 그것은 일견 기술개발자들이 그 제품을 만들어내기 위해서 얼마나 많은 노력을 했는지, 구매자를 설득하려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이는 동시에 가장 읽히지 않는 책이다. 즉, 일방적인 뽐내기식 자랑인 것이다. 이를 보완하기 위해서 삼성은 별도의 필요한 기능만 모은 간편 매뉴얼을 따로 제공하고, 음성서비스센터를 통해서 기능에 대한 설명을 부가해줬다. 즉, 삼성의 사용설명서에 내재한 문제를 삼성 역시 인지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애플의 아이폰에는 설명서가 없다. 누구나 사용할 수 있는 단순한 기능으로 간편화시키고 설명서를 아예 빼버린 것이다. 이는 ‘더하려는 방식’과 ‘빼려는 방식’에 의한 발상의 전환이다. 이를 사람들은 일본의 선불교에 관심이 있던 스티브 잡스가 선불교의 직관적 관점에 영향을 받았기 때문으로 판단한다.
스티브 잡스의 선불교적 직관은 제품을 개발하는 관점보다도, 시대적인 변화와 흐름을 읽은 바로 그 눈에 있다고 해야 할 것이다. 일본문화의 유행과 더불어 소위 ZEN[禪] 스타일이 유행한 것도 이미 상당한 시간이 경과했다. 그러나 그것이 아이폰과 같은 경제적인 일대변화를 주지는 못했다. 즉, 제품이 문제가 아니라 시대적 요청이 문제인 것이다. 스티브 잡스와 불교를 말하는 사람들은 많지만 이를 지적해내지 못하는 것은 통찰의 부족에 기인한 것으로 안타까운 일이다.
그러나 애플은 미국 기업이라는 한계를 가지고 있다는 점에 우리는 주목해야 한다. 미국이 일본에 밀리는 것은 변화이다. 애플은 소니와 더불어 디자인에 특히 집착하는 기업으로 유명하다. 그러나 미국 기업의 보수성은 하나의 완결된 디자인을 묵수(墨守)하려는 성향이 강하다. 스티브 잡스의 창조적 역량도 전통을 고수하려는 미국식 보수성에서는 벽에 부딪히게 된다.
미국과 유럽에서 자동차모델은 수십 년을 그대로 유지되는 경우가 비일비재하다. 예컨대, 폴크스바겐의 딱정벌레 디자인은 2차대전 시부터 오늘날까지도 유지되고 있다. 그러나 현대자동차에는 디자인이 없다. 여러 디자인을 제시했다가 시장에서 승리하는 디자인이 곧 현대자동차의 디자인이 되는 것이다. 이러한 현대자동차의 관점은 지극히 일본적이다. 아니 삼성과 현대는 일본의 ‘변화’라는 무기를 보다 더 빠르게 개량해서 후발로서도 성공한 세계적 기업이다.
아이폰은 계속 같은 디자인을 계승하고 있다. 이것이 스티브 잡스의 창조적 역량, 즉 도전의 최후 무덤이 될 것이다. 삼성은 스마트폰에 한한다면 애플에 밀렸다. 그러나 삼성은 아이폰의 유용성을 카피하면서 다양한 디자인의 변화를 대안으로 제시한다. 결국 시장은 다양성을 선택하게 될 것이다. 마치 미국이나 유럽기업이 일본 기업에 밀렸던 것처럼 말이다.
다만 아이폰은 애플리케이션이라는 또 다른 시장을 선점하고 있기 때문에 당분간 그 지배력은 유지될 것이다. 그러나 이 세상은 불교식으로 말한다면, 변화의 연기세상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본다면, 애플의 특정 디자인에 대한 고집은 결국 스티브 잡스의 명성과 더불어 그의 오점으로 작용하게 될 것이다.


7. 스마트 세상과 화엄의 세계관

스마트는 지금까지와는 다른 세상을 연출한다. 이제 세상은 작은 것 속으로 통합되면서 집약된다.
스마트폰은 우리가 일상에서 휴대하게 되는 작은 기계들을 휴대전화를 중심으로 통합하면서 막대한 시장지배력을 행사하고 있다. 이는 여러 기기들을 가지고 다녀야 하는 복잡한 번거로움으로부터 우리를 해방시켜 준 반향과 찬사이다.
이제 변화 속에서 중요한 관건은, 여러 다양한 기기들이 각각의 기능들을 최대한 잃어버리지 않으면서 스마트폰으로 들어가는 것에 있다. 손목시계가 휴대전화로 흡수되어 사라지다시피 한 것은, 휴대전화의 시계 기능이 손목시계를 거의 완전히 대체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MP3나 PMP 역시 이러한 대세에 신속히 무너지고 있다. 디지털카메라 같은 경우는 아직 스마트폰의 기능적인 한계로 인하여 나름의 시장을 유지하고 있지만, 이 역시도 스마트폰의 기술발달로 소형시장은 조만간 완전히 무너지게 될 것이다.
스마트폰의 가장 큰 장점은 휴대의 편리성이다. 셀카를 찍기 위해서 따로 조금 더 고성능의 소형 디카를 가지고 다니기보다는, 언제나 휴대하고 있는 스마트폰이 조금은 성능에서 뒤진다고 하더라도 이쪽이 선택되는 것은 당연하다. 시장은 이렇게 소비자의 선택에 의해 빠르게 통합되면서 재편되고 있는 것이다.
스마트폰의 집약은 각 기계의 성능을 대체할 정도의 기술적인 발달에 있다. 즉, 각 기계의 특징적인 독자성을 잃지 않는 집약, 이것이 스마트폰의 발전 방향이며, 현재적인 화두이다.
독자성을 잃지 않는 통합의 전체성, 이것은 불교철학에서는 화엄에 상응하는 가치이다. 화엄은 각기 다른 차별적인 개성이 서로 상섭(相攝)되지 않으면서 전개되는 전체성이다. 즉, 불상리(不相離)한 동시에 불상잡(不相雜)의 관계가 구축되어야 하는 것이다. 스마트폰은 이런 면에서 화엄체계를 모사하고 있다고 하겠다.
또한, 손안의 작은 크기라는 제한된 한계 속에서 여러 기계가 소형화되면서 중첩되는 것이 아니라, 기능에 의한 분화와 유기적인 재정립이 가능해야 한다. 이는 화엄적으로는 육상원융(六相圓融)과 십현연기(十玄緣起)를 생각하게 한다. 즉, 일체는 서로가 서로를 포함하지만, 각기 다른 표현방식으로 현현(顯現)하여야만 하는 것이다. 바로 이러한 점이야말로 스마트폰의 하드웨어적인 화엄의 가치라고 하겠다.
다음으로 스마트폰은 노트북과 마찬가지로 하드웨어적인 부분과는 별도의 스프트웨어적인 측면을 가진다. 스마트폰은 기존의 휴대전화에서는 볼 수 없는 다양한 프로그램들을 통한 재정립의 가치를 가진다. 이는 동일한 스마트폰이라도 사용자에 따라서 천차만별의 기능을 내포하게 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즉, 종성(種姓)적인 차별은 없지만, 현상적인 차이는 엄연히 존재하게 되는 것이다(이는 法相宗의 理佛性과 行佛性의 문제를 상기시킨다).
애플리케이션이라는 추가 프로그램과 앱스토어를 통한 애플리케이션의 거래는, 스마트폰 안에 또 하나의 세상이 존재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리고 그것은 곧 시장이기도 하다. 이를 통해서 스마트폰은 다양하게 변화할 수도 있지만, 여기에는 동시에 그만큼 추가비용이 발생하게 된다.
기존의 기계들은 기계를 구입함과 더불어 추가비용의 지불은 거의 없었다. 노트북 같은 경우도 바이러스프로그램 등 추가 프로그램의 구입에 의해서 추가비용이 지불되는 경우가 있었지만, 그것은 그리 크지 않은 부분이었다. 그러나 스마트폰의 추가비용은 실로 적지 않으며, 이는 동시에 스마트폰이 다양한 변화와 인간의 개성표현 욕구를 대변해 줄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논어》에 “군자는 의(義)에 밝고, 소인은 이(利)에 밝다.”라고 했으며, 《맹자》에는 “항산(恒産)이 있어야 항심(恒心)이 있다. 항산이 없어도 항심이 있는 것은 군자뿐이다.”라고 했다. 이는 인간이 이익과 함께하는 경제적 동물이라는 것을 분명히 해준다.
그런데 애플리케이션과 앱스토어는 바로 이러한 이(利)의 문제를 충족시켜 준다는 점에서 주목된다. 즉, 스마트폰을 통해서 사용자는 자신에 맞는 특징적인 프로그램을 사용해 자신만의 개성을 표현할 수 있고, 애플리케이션의 개발자는 합리적인 이익을 취할 수가 있는 것이다.
인터넷 매장의 개설로 상인의 친절함과 상품의 만족이라는 개념은 일대 지각변동을 일으켰다. 이제 상인의 친절함은 밝은 웃음 속에 있는 것이 아니라 빠른 배송과 반품 수용에 있으며, 상품의 만족은 재구매력과 상품평을 통해서 규정 지워진다. 또한 11번가나 G마켓 등의 판매대행 사이트(오픈마켓)로 인하여, 매장과 전시가 필요 없는 무점포 소자본 창업이 가능해졌다.
이는 작은 자본으로도 성공하는 젊은 사장들을 탄생시키게 된다. 더 나아가 이제 우리는 옥션 등의 사이트를 통해서, 모두가 구매자인 동시에 판매자인 세상을 살고 있다. 그러나 이는 아직까지도 유형적 가치에 대한 판매라는 한계를 가진다. 즉, 무형의 가치를 개인이 자유롭게 사고팔 수 있는 공간은 없었던 것이다.
그러나 앱스토어는 이제 인터넷 매장을 넘어서, 작은 아이디어인 무형적인 가치를 상품화하여 그것을 자유롭게 팔 수 있는 또 다른 경제구조를 파생하고 있다. 이것을 통해서 누구라도 대중의 요구에 즉각적으로 반응할 수만 있다면, 많은 자본을 단기간에 획득할 수 있는 보다 유연한 유통의 길이 열리게 된 것이다.
지금까지 경제의 주체는 자본이었다. 그러나 이제는 생각이 곧 경제의 주체가 되는 시대가 전개되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자신에 맞는 스마트폰을 만들고, 또한 여러 애플리케이션을 통해 나에게 필요한 기능을 재조합하기 위해서 소비자는 선택의 문제에 직면하게 된다. 즉, 정당한 선택의 필연성이 제기되는 것이다.
완성된 물건을 판매하는 것이 아니라, 미완성의 물건을 구매하면서 선택의 문제는 불가피하다. 또한 이러한 경우 현명한 선택을 위해서는 보다 많은 지식과 연관된 공부 역시 필요하게 된다. 올바른 소비를 위해서 공부를 한다는 개념은 다소 생소할 수도 있다. 그러나 현대사회에서 이는 가장 절실히 요청되는 부분이다.
우리는 관계성이라는 다양한 선택 속에 놓여 있다. 그중 유효적절함을 찾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이다. 예컨대, 노트북을 구입한다고 하면, 일차적으로 가장 좋은 것은 큰 문제가 없는 한 가장 비싼 제품이다. 그러나 우리는 제한된 재화가치만을 소유하고 있기 때문에, 언제나 가장 비싸고 좋은 물건만을 살 수는 없다. 그러므로 내가 사용하기에 맞는 적절한 판단을 거친 제품을 구입해야 한다. 사용자의 용도와 패턴에 따라 때로는 배터리 시간을 중심으로 해야 할 경우도 있고, 또 때로는 그래픽카드나 화면의 크기, 또는 속도를 중심으로 해야 할 경우도 있다. 즉, 여러 가지의 다양성 속에서 나에게 맞는 것을 발견하는 것이 중요한 것이다. 이것은 올바른 선택과 관련되며, 그 배경에는 그것을 이해하는 공부가 있어야 한다.
붓다는 모든 가치가 변화하는 연기의 군상(群像)을 이야기한다. 그리고 이의 실천적인 입각점으로서 중도(中道)를 말하고 있다. 스마트폰은 그 자체에 나비효과와도 같은 관계성의 그물망, 즉 연기를 내포하고 있다. 이 중에서 중도를 선택한다는 것은 쉬운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중도란 신상품과도 같아서 존재하는 동시에 존재하지 않는 가치이기 때문이다. 신상품이란 분명 존재하는 개념이다. 그러나 신상품은 만들어져서 제품화되는 동시에 그것은 더 이상은 신상품이 아닌 그냥 상품이 된다. 이는 마치 신문이 활자화되는 동시에 현재를 담을 수 없는 것과 같다. 이러한 변화는 중도에 대한 우리의 인식을 환기시켜 준다는 점에서 분명 시사하는 바가 크다.
스마트폰을 통한 변화 중 가장 대표적인 것은 모든 사람이 어떤 장소와 시간에 구애됨이 없이 인터넷을 사용할 수 있다는 것이다. 휴대전화가 전화를 장소와 시간으로부터 해방시켰다면, 스마트폰은 인터넷을 해방시켰다.
인터넷은 존재하지 않는 동시에 강대한 영향력을 가지는 일종의 또 다른 세계이다. 마치 진제(眞諦)와 속제(俗諦)가 병행하듯이, 오늘날의 이 세계는 인터넷이라는 가상세계와 함께하고 있는 것이다.
스마트폰을 통하여 우리의 손안에는 또 다른 세계가 존재하고 있다. 그리고 그 세계는 《나니아 연대기》의 나니아(꿈과 같은 환상과 이상의 세계)처럼 순수한 동심을 필수로, 옷장을 열고 들어가는 그런 세계가 아니다. 그곳은 모든 사람에게 열려 있는, 그러면서 동시에 하나의 가치로 규정지어질 수 없는 세계인 것이다. 물론 그 세계와 연결되기 위해서는 접속 가능한 스마트폰이 있어야만 한다.
중관철학에서 말하는 진속(眞俗) 이제(二諦) 중 진제가 더 중요하다고 생각한다면, 이는 오산이다. 진제와 속제는 서로의 가치 속에서 정확하게 병진하고 있는 것이다. 이와 마찬가지로 우리는 현실과 마찬가지의 또 다른 세계를 동시에 살고 있다. 그런데 그 세계는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계에 비해서 시간과 공간의 제약으로부터 상대적으로 자유롭다.
인터넷은 지금도 정치인이나 경제인을 무릎 꿇게 할 수 있는 거대한 힘을 가지고 있다. 그런데 이러한 강대한 힘이 스마트폰 시대로 인하여 보다 더 강력해지게 된 것이다. 민중은 이제 더 이상 약자가 아니다. 교묘한 민중은 오히려 자신을 드러내지 않은 채, 드러나 있는 강자를 공격할 수 있는 충분한 여건을 확보하고 있다. 그러한 인터넷의 세계에 우리 모두는 한 발씩을 걸치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사이버상의 윤리문제 등이 끊임없이 거론되는 것이다.
하나의 세계에 걸쳐 있는 또 다른 세계. 이것이 중중무진(重重無盡)한 세계이다. 인터넷 속의 세계는 바로 이러한 중중무진의 가치를 잘 나타내준다. 그러므로 이를 화엄철학적인 관점에서 이해하는 것은 불교의 입장에서는 나름의 타당성을 가지게 된다. 그러나 화엄은 악(惡)이 없는 선(善)의 철학이다. 이것이야말로 화엄이 중세시대만을 대표할 수밖에 없었던 한계성이기도 하다.
세상이 그리 선(善)하고 정의롭지 않은 것처럼, 인터넷 세계 역시 그렇다. 이런 부분의 문제를 화엄철학은 답하지 못한다. 왜냐하면, 화엄은 붓다에 의한 이상세계일 뿐이기 때문이다. 천태사상(天台思想)에서는 이러한 문제를 극복하기 위해서, 불교의 성악설이라고도 할 수 있는 성구설(性具說)을 제시했다. 그러나 그것 역시 종교라는 이상주의에 파묻혀 현재적인 영향력을 발휘하지 못한 채 매몰되고 만다.
불교인들은 현대의 과학적 발전 혹은 세상의 변화와 불교의 관점을 연결시켜서, 불교의 정당성을 주장하려고 하는 경향이 다른 종교에 비해 강하다. 그러나 지금의 것이 불교의 특정 관점과 맞는다고 주장한다면, 그것은 동시에 미래의 변화된 가치와는 맞지 않는다는 주장도 성립시키게 된다는 점에 대해서는 간과한다. 그러므로 양자의 동이(同異)를 말할 수는 있어도 양자를 같다고 할 수는 없다.
또한 종교는 본질적으로 이상적인 가치를 내포한다. 그러므로 종교는 대안은 될 수가 있어도 그 자체가 현실이 될 수는 없는 것이다.

8. 스마트 세상과 선(禪)의 주관적 미학

애플의 디자인에서 언제나 발견되는 것은 단순함의 미학이다. 애플은 칼라에서도 역시 블랙과 화이트라는 두 종류만을 다룬다. 즉, 스티브 잡스의 정신에는 덜어냄이 있는 것이다. 《노자》에는 “배움은 할수록 늘어나지만, 도는 배울수록 줄어든다.”는 말이 있다. 이러한 면에서 본다면, 스티브 잡스는 도가(道家)적이다. 그러나 스티브 잡스가 영향을 받은 동양사상은 도가가 아닌 선(禪)이다. 기실 선(禪)이 도가의 계승자인 현학(玄學)·청담(淸談)과 불교와의 관계성 사이에서 완성된 중국사상적 가치라는 점을 고려한다면, 스티브 잡스는 선을 통해서 도가를 보았다고도 할 수 있다.
스티브 잡스는 일본 선불교와 하이쿠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일본 선불교는 주지하다시피, 조동종(曹洞宗)이다. 이는 잔잔함을 강조하는 체계로 우리의 선불교인 임제종(臨濟宗)의 활발발(活發發)한 측면과는 완연히 다르다. 애플의 디자인 철학은 이렇게 놓고 본다면, 분명 선(조동종의 묵조선)적이다.
일본적인 선시라고 할 수 있는 하이쿠와 관련해서 바쇼(芭蕉)의 〈연못〉이라는 작품이 있다. 하이쿠의 정서를 알기 위해서, 바쇼라는 승려가 읊은 〈연못〉을 적시해보면 다음과 같다.

오래된 연못 / 개구리 한 마리 / 퐁당

이 시에는 더 빼려야 뺄 수 없는 간결함이 있다.
애플은 디자인에서, 그리고 아이폰의 프로그램에서 바로 이러한 간결함에 도전했다. 그리고 그러한 간결함을, 사용자가 주체가 되어 선택할 수 있는 미학적인 관점으로 승화시키고자 하였다.
중국 당(唐)나라에서 화엄사상이 일세를 풍미하여 우리나라에도 영향을 미치게 되는 것은, 당이 여러 이민족을 통합하는 세계 제국이었고, 통일신라도 삼국을 아울러야만 하는 공통의 화두를 가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당과 통일신라의 융합정책이 결실을 맺자, 화엄이라는 세계관적 철학은 개인주의적인 관점에 자리를 내주게 된다. 그렇게 해서 완성되는 것이 바로 선(禪)이다.
선(禪)은 주관적 유심주의의 대표적인 철학이다. 선은 《육조단경》의 “바람이 움직이는가, 깃발이 움직이는가”에서 나타나는 것처럼[움직이는 깃발에 대한 혜능의 답은 ‘마음이 움직인다’는 것이었다], 마음의 철학이다. 즉, 인식 주체를 통한 해법을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선은 철학이라기보다는 미학에 가깝다.
스마트폰이 애플리케이션들을 통한 재조합의 각기 다른 새로운 규정성을 가진다는 것은, 사용자의 주관적 취미판단에 의한 것이므로 이는 다분히 선적(禪的)이다. 아니 정확하게는 미학적이라고 하겠다. 즉, 애플은 외부의 디자인과 더불어 내용적인 부분에서도 철저하게, 미학적인 접근을 하고 있는 것이다.


9. 맺는 말

우리나라의 GNP는 2만 달러 정도에서 벌써 10년 이상을 답보상태에 있다. 그러나 2만 5천 달러 정도만 넘어서면, 곧 3만이나 3만 5천 달러는 넘어서는 것은 어렵지 않다는 통계가 있다. 즉, GNP에 있어서는 2만 달러가 거대한 장벽인 것이다.
2만 달러부터 국민들은 문화에 관심을 가지게 된다는 통계가 있고, 2만 달러 시대의 시작과 더불어 유홍준의 《나의 문화유산 답사기》(1993년 초판)는 공전의 베스트셀러를 기록하게 된다. 그리고 이러한 힘으로 유홍준은 문화재청장으로까지 발탁되기에 이른다. 《나의 문화유산 답사기》는 독자가 단순히 지식을 습득하는 것을 넘어 답사라는 보고 느낄 수 있는 길을 열었다는 점에서 분명 기념비적인 저술이다. 이전의 책들은 일방적인 정보와 전문지식의 주입을 목적으로 하는 다분히 2차원적이었다. 이에 비하여 유홍준은 ‘비전문적인 전문’을 표방했고, 이는 주5일제 등과 더불어 답사라는 3차원적인 가치 속에서 큰 반향을 일으켰다.
작년의 가장 놀라운 베스트셀러는 단연 마이클 샌델의 《정의란 무엇인가》이다. 이는 《나의 문화유산 답사기》와는 또 다른 관점의 3차원적인 책이다. 《나의 문화유산 답사기》가 육체적인 3차원을 추구했다면, 《정의란 무엇인가》는 정신적인 3차원을 지향한다. 이 책은 다양한 문제들로 점철되어 있지만, 문제에 대한 정답은 없다. 즉, 문제와 문제의 다양한 역학관계만을 인지하게 되는 독자의 인식주체만이 있을 뿐이다. 이러한 책이 장기적인 베스트셀러가 되었다는 것은 우리 사회가 2만 달러를 넘어 2만 5천 달러의 문화로 나아가고 있다는 점을 분명히 해준다. 그리고 2만 달러 이상의 시대에서 우리가 주목해야 하는 가장 중요한 가치는 ‘행복’과 ‘미학’ 그리고 ‘명상’이다.
웰빙이라는 육체적인 건강주의는 물질주의를 벗어던지지 못한 저개발적 가치이다. 이에 비해서 행복과 명상은 정신적인 가치이며 보다 고등한 정신문화이다. 그리고 이러한 가치들은 동시에 개인적이다.
행복은 결국 주관적 행복일 수밖에 없다. 명상도 결국 주관적인 평안이다. 그리고 미학 역시 주관적 심미 태도이다. 이러한 가치들에서 정해진 규정성은 없다. ‘제 눈의 안경’이라는 말처럼, 내가 좋은 것이 곧 옳은 것이라는 말이다. 앞으로의 시대는 바로 이러한 다양성과 개성, 그리고 여러 가지 가치가 공존하는 시대이다. 이를 불교적으로 바꾸어 말하자면 선(禪)의 주관적 심미세계가 펼쳐지는 세계라고 하겠다.
대만의 오경웅은 《선학(禪學)의 황금시대》라는 책을 썼지만, 그가 가리키는 당(唐)나라보다도 실제로는 이제부터가 선의 진정한 황금시대이다. 그러나 오늘날의 한국불교는 선이 꿰뚫고 있는 행복과 미학, 그리고 명상이라는 가치들에 대해서 거의 전혀라고 할 정도로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
선을 연구하는 학자들은 중국 선사들의 제도화된 틀에 갇힌 역사·고고학자들일 뿐이다. 선은 언제나 살아 있는 가치만을 말했다. 그리고 화두란 한마디로 말한다면, 비규정성인 현재 그 자체일 뿐이다. 우리가 살고 있는 오늘날은 이러한 가치가 가장 절실히 요청되는 시대에 다름 아니다.
불교인들은 아인슈타인의 상대성이론이나 스티브 잡스를 들어, 이들이 불교이론을 잘 현창(顯彰)해주고 있다고 말한다. 그러나 그것보다도 더 중요한 것은, 우리의 불교 가치에서는 왜 이러한 사람과 변화가 일어나지 않는가에 대해 주목해야 한다. 베이징아시안게임 때, 중국은 화약·나침판·인쇄술·종이의 세계 4대 발명이 모두 중국에서 일어난 것을 세계에 자랑했다. 그러나 더 중요한 것은 ‘그러한 최고의 발명을 했음에도, 오늘날 중국 인민들은 왜 그렇게 살고 있으냐’라는 것이다. 즉, 과거에 무엇을 했다는 것은 중요하지 않다. 이보다 ‘우리는 앞으로 무엇을 할 것인가’가 더 중요한 가치라는 말이다.
오늘날 우리 불교는 가장 보수적이며, 화석화된 가치로 무장된 야만의 문화일 뿐이다. 과거 한때 불교는 분명 최고의 문화였다. 티베트불교는 각고의 노력 끝에 서구에서 새로운 가치와 물결을 선도하고 있다. 그러나 우리는 아직도 깊은 잠에서 깨어나지 못한 채, 깨어났다는 또 다른 꿈만을 꾸고 있다. 2,500년 전 인류의 잠을 깨운 것은 붓다이다. 그러나 이제 불교의 잠을 깨우는 것은 붓다가 아니다. 그것은 주체적 자각이며, 비판과의 충돌인 것이다.
유교는 잠에서 깨어나지 못하고 결국 사멸하였다. 불과 100년 전만 하더라도 이 땅은 95퍼센트가 넘는 유교 인구를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오늘날 유교 인구는 0.2퍼센트도 채 되지 않는다. 이 수치는 현재 한국의 이슬람교 신도 수와 비견될 정도이다. 불교는 유교를 통해서 교훈을 얻어야 한다.
스마트 세상은 구한말 서구와 일본 세력이 조선을 휘감았던 것보다 더 거대한 쓰나미로 다가오고 있다. 이 시기 과연 불교는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 우리는 이제 스스로에게 간절히 되물어야만 할 때이다. ■

 

자현 / 강원도 월정사 교무국장. 동국대 철학과·불교학과, 동 대학원 불교학과 졸업. 성균관대 동양철학과 석사·박사, 동국대 미술사학과 박사(불교건축). 인도·중국·한국·일본 관련 논저 60여 종이 있다. 동국대·울산대·성균관대 강사를 역임했으며 현재 조계종 교육원 교수아사리를 맡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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