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소셜네트워크와 선(禪)

조승미
동국대 불교학과 강사
소셜네트워크(Social network)의 시대라고 한다. 휴대전화, 텔레비전 등의 기기가 스마트(Smart)해지고, 미디어는 대중(Mass)에서 소셜(Social)로 중심축이 전환되는 듯, 너무나도 많은 말이 곳곳에서 쏟아지고 있다. 세상 돌아가는 이야기와 그 방식이 비약적으로 복잡해진 것인데, 이 변화의 중심에 바로 소셜네트워크가 있는 것이다. 

천 년도 넘은 선불교 전통과 역사를 거론하고자 하면서, 느닷없이 소셜네트워크 이야기를 먼저 꺼내는 것이 이상하게 느껴질지 모르겠다. 오래전 이야기와 지금의 이야기는 우리의 생각 속에서 물과 기름처럼 그 경계가 분명하게 나뉘어 있는 것 같다. 더군다나 선불교 하면 고요한 산사의 맑고 깨끗한 차 한 잔의 이미지부터 떠오르니, 이 시끄럽고 번잡한 소셜네트워크가 어디 선불교와 연결될 소리이기나 한가 말이다.

그러나 선불교는 본래 고요한 것이 아니었다. 선사들은 오히려 고요함을 바라는 우리의 기대나 편안함을 추구하는 마음 바닥의 고정관념을 공격하기 위해, 우리의 생각 회로를 끊임없이 휘저어 불편하게 만들었다. 선불교를 안심(安心)법문이라고도 했지만, 선불교의 아이덴티티는 오히려 이 ‘불편함’의 경험 창출에 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소셜네트워크 시대에 살면서 겪는 시끄러움과 복잡함의 ‘불편’도 어찌 보면 기존 패러다임이 무너지면서 새로운 질서가 만들어지는 과정의 현상일지 모르겠다. 여러 분야의 전문가들은 이 새로운 관계망의 시대가 가져올 변화와 특징에 대해 많은 분석과 전망을 보고하고 있는데, 몇 가지 내용을 간추려 보면 다음과 같다.

우선, 폭발적으로 사용이 증가된 소셜네트워크 서비스(이하 SNS)를 통해서 기존 권력의 통제방식에서 벗어나고 있는 점이다. 즉 SNS 사용자들은 정보를 빠르게 전달하고 광범위하게 공유, 확산시키는데, 이것으로 인해 모든 정보가 중앙에 집중되면서 매스미디어를 통해 통제해 왔던 기존 시스템이 흔들리기 시작하였다. 또한 기존 권력은 도리어 소셜미디어의 감시를 통해 견제를 받게 되었다. 중앙관리의 단일 체제가 아니라 다중 시스템으로의 전환을 목격하고 있는 것이다.

두 번째는 유례없이 열린 구조 속에서 역할의 이분법이 파괴되고 있는 점이다. SNS는 기존의 단순한 소비자가 생산·기획 과정에 깊이 참여할 수 있게 하였다. SNS의 잠재력을 가장 먼저 수용한 분야가 마케팅 영역이었는데, 이것은 점차 여러 영역으로 확대되어 최근에는 정치에서도 이런 변화가 진행되고 있다. 예를 들면 시민들은 더 이상 정책수립에서 수동적인 통치 대상만이 아니라, 소셜미디어를 통해 직접 의견을 제시하고 여론을 형성하여 아젠다 채택에 영향력을 직접 미치기도 하는 것이다. 따라서 정보의 영역에서 더 이상 소비자와 생산자의 구분은 무의미하다고 하며, 또한 ‘SNS 혁명이 모든 경계를 허물고 있다’고 할 정도로 이런 변화의 파급력은 매우 클 것으로 전망된다.

세 번째는 개인의 힘이 그 어느 때보다 중요해진 점이다. 권력을 획득하기 위해 집단을 형성하고 이 집단을 매개로 영향력을 행사했던 방식에서, 개인들의 자발적이고 자유로운 활동 그리고 이것의 결합으로서의 ‘협업’의 방식으로 전환되면서 새로운 시스템의 원리로 대두되고 있다.

이와 같이 탈권력, 경계 해체, 개인의 힘 등을 내용으로 하는 소셜네트워크 시대의 패러다임 변화는 한편으로 선불교 본연의 파격성을 연상시킨다. 선불교는 역사적으로도 기존의 정치권력이 약화되면서 새롭게 등장한 신흥계급에서 보다 적극적으로 수용했던 배경을 갖는다. 당 말과 송나라 시대의 중국에서도 그러했으며, 한국의 고려시대, 일본의 가마쿠라시대에서도 그런 특징이 발견된다. 그리고 이것은 무엇보다도 선사상 자체에 내재된 탈권력적 성격과 연관되는 것으로 보인다. 다음의 글이 선불교의 이런 면을 잘 보여준다.

화두 공부는 그저 희망의 메시지를 주기보다는 딱딱하게 굳은 인식의 근거를 무너뜨린다는 점에서 보기 드문 약효를 지닌다. 종교적 카리스마나 도그마도 정치적 사회적 이념도 성인군자의 고상한 인격도 더 이상 써먹을 수 없는 폐품으로 전락시키고, 그 모든 것을 행사하는 권력에서 벗어나 자유롭고 균형잡힌 의식 상태를 지향하는 화두의 기능이 바로 그것이다.(김영욱 《화두를 만나다》)

물론, 선불교의 지향은 인용문에서도 언급된 바와 같이, 인식구조의 파격이지 사회관계구조의 파격은 아니었다. 실제로 선종 승려들이(혹은 선종 교단이) 권력의 힘에서 벗어나고자 했다기보다, 권력의 힘으로 자종자파의 권위를 확보하는 데 더 많은 관심을 기울인 면도 보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선불교의 ‘파격’ 에너지가 오직 인식 문제에만 적용되고, 현실의 변화와는 전혀 무관한 것이었다고 말할 수는 없다. 그리고 선불교의 탈권력과 경계해체, 그리고 개인 힘의 중시를 인식 영역을 넘어서 현실 역사에서 확인할 수 있는 장면은 다름 아닌 ‘여성’이었다. ‘여성’은 선불교의 본래의 파격성이 가장 효과적으로 구현된 장이었으며, 그들의 실천의지를 확인할 수 있는 시금석이었다.

선불교가 권위에 입각한 통제지향이 아니라 다양성을 가지고 서로의 꽃을 피워 냈을 때 여성 수행자들이 왕성하게 등장하였다. 그리고 선사들이 경계해체를 머릿속에서만이 아니라 바로 눈앞에서 철저하게 이루고자 했을 때, 여성 선사들이 깨달음의 노래를 부를 수 있었던 것이다. 또한 선의 황금시대는 배타적 계보주의에 갇히지 않고, 제자들이 자신의 능력을 인정받을 수 있는 자유경쟁 방식 속에서 이룩될 수 있었는데, 여성 조사는 이런 개방적인 시스템 속에서 탄생했던 것이다.

동아시아 선불교 여성을 논하면서 새로운 시대가 요구하는 패러다임 변화와 연관하여 보고자 함도 이 때문이다. 소셜네트워크가 야기하는 혁명적 변화를 경험하고 있는 현대인에게 선불교는 어떤 의미로 경험되고 있는가. 물적 기술의 변화가 인식의 변화를 이끌어 내고 있는 격변의 현실이, 인식의 변화를 삶의 변화로 확장시키는 선불교의 파격에너지와 만날 수 있을 것인가? 여기에 많은 변수가 있을 수 있지만 ‘여성’은 가장 핵심적인 키워드가 될 것이다. 선불교와 소셜네트워크, 그 연결의 접점에 ‘여성’이 있다.

2. 여성, 선불교를 말하다.

한국은 세계에서 가장 많은 여성 선 수행자가 있는 나라일 것이다. 예전에 한 학회에서 어떤 종교학자에게 이런 사실을 이야기해주었더니 매우 놀라워했다. “아니 여자들도 참선을 할 수 있나요?” 이 학자는 물론 한국인이었으며, 불교에 관한 글도 몇 편 쓰기도 했지만, 참선이 템플스테이 체험 프로그램이지, 비구니에게 심지어 일반인 여자들에게도 개방되어 있는 수행이었는지 몰랐다고 했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이 비밀도 아닌 일이 불자들 사이에서도 크게 알려지지는 않은 것 같다.

여성 불자들이 참선하는 모습의 사진이나 기사를 접한 적이 없는 것은 아니겠지만, 특별히 중요하게 인식되지 않아서인지 새삼스럽게 이 사실에 대해 놀라는 불자를 종종 보곤 한다. 하지만 놀라운 것은 끝이 아니다. 필자의 불교강의 수강생이었던 한 비구 스님이 참고문헌으로 제시된 불교여성책을 읽고 감상문을 제출했는데, “비구니들도 그렇게 열심히 참선 수행을 하는지 처음 알았다”고 고백하는 것이다.

같은 출가 수행자들 간에도 잘 알려지지 않은, 불자들도 크게 주목하지 않는, 그러니 일반 사회에서는 너무나 알려지지 않은 그곳에, 한국 여성 선 수행자들이 있다. 참선이 한국불교를 대표하고, 원로 남자 선사가 참선을 대표하는 것에 반해, 여성 수행자는 너무나 소외되어 있는 것이다. 하지만 앞에서도 말했지만 한국은 현재 가장 많은 숫자의 여성들이 선 수행을 하고 있다. 같은 동아시아 선불교 전통을 가지고 있어도 중국과 일본 혹은 대만, 홍콩 등에서 비구니의 선 수행은 그리 광범위하지 않으며, 더군다나 일반 여성들의 참선 수행 문화는 서구에서 아무리 활발하게 이루어진다고 해도 수적으로나 질적으로 한국의 그것을 따를 수 없을 것이다.

올해 하안거에도 천 명에 가까운 숫자의 비구니 스님들이 결재에 들어갔다고 기사에 전하는데, 이 숫자는 천이삼백 명의 비구 스님들에 비하면 조금 적지만, 비구니 스님들의 어려운 생활조건과 열악한 선방 상황에 비하면 이들의 수행 열기가 결코 작지 않은 것임을 알 수 있다.(2010년 선원 현황은 총림 5곳, 비구 선원 59곳, 비구니 선원 33곳이다. 총림이 모두 비구 사원인 점을 고려하면 비구니 선원의 수는 비구 선원의 절반 정도밖에 되지 않는 것이다.) 

여성 불자 일명 보살 수행자들의 상황은 또 어떠한가. 수천 명의 회원을 보유한 대형 선원에서도 여성의 비중이 압도적이라는 것은 널리 알려진 일이다. 또 전문적인 여성 선 수행자들로만 구성된 보살선원도 존재한다. 규모가 100~200명 정원에 달하는 시민선원도 적지 않으며, 한 주에 한 번 참선 모임을 갖는 것부터, 출가 수행자들과 똑같이 3개월 집중 안거 수행을 하는 것까지 다양한 방식으로 여성들은 참선 수행에 적극 참여하고 있다. 또한 수행 이력이 오래된 구참 여성 수행자들도 적지 않은데, 이들 소위 ‘노보살’ 수행자가 실질적으로 선방을 지도하는 경우도 있다고 불교계 신문기사에 종종 소개되기도 했다.    

재가 여성 선 수행자의 현황에 대한 통계가 조사된 적이 없어 정확한 규모와 구체적인 모습을 알 수는 없으나, 대략 추산해 보아도 수천 명이 참선 모임에 지속적으로 참여하고 있으며, 적극적으로 참선을 닦는 여성들도 출가 선 수행자의 규모에 버금갈 것으로 추측된다. 이것은 사실 엄청난 규모와 열의이다. 현대 한국불교문화의 독특한 정체성을 가장 잘 대변해 주는 현상은 바로 이 ‘여성들의 참선’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그런데 그럼에도, 왜 한국 여성 수행자들은 세상의 눈에, 심지어 불교공동체 내부에서도 주목되지 않는 것일까? 수적으로나 열기로나 여성들의 이 엄청난 에너지는 모두 어디에 모여 있는 것일까? 서양 여성 불교학자들이 가끔 재가여성이 참선수행을 할 수 있는 곳은 아시아에는 거의 없다고 말하는 이유가 그들이 단지 한국불교를 잘 모르기 때문인 것일까?

서양 여성 불자들이 아시아의 여러 스승들로부터 법을 전해 받고, 선원을 직접 운영하거나 법사로서 활발하게 활동하는 것에 반해, 한국 여성 선 수행자들이 공식적인 역할을 부여받고서 선방 안팎에서 활동을 보이는 예는 극히 드물다. 재가여성은 말할 것도 없고, 비구니 선사의 법문이나 대중적인 저술도 대부분 접하기 어렵다. 우리에게는 단지 비구니 선방의 정갈함과 비구니 수행자의 정적인 이미지만이 반복적으로 제시되고 있을 뿐, 이들의 살아 있는 체험과 그 소리는 들을 수 없다. 

여성주의 불교학자들 사이에서는 ‘여성 스승의 부재’ 문제가 오래전부터 제기되어 왔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지도자 역할을 할 수 있는 여성이 없는 것이 아니라, 여성을 지도자로 인정하는 ‘제도의 부재’인 것이다. 여성 스승은 특히 여성 수행자들에게 더욱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수행에서도 역할 모델이 갖는 중요성은 자주 지적된다(리타그로스 〈지도자와 스승으로서의 불교여성들〉 제8차 세계여성불자대회 자료집).

그런데 특히 선불교 여성에게는 지극히 남성적인 영웅, 소위 ‘대장부(大丈夫)’ 모델이 제시되어 왔기 때문에 여성 모델, 여성 스승의 문제는 더욱 특별한 주제가 된다고 할 수 있다. 선사들의 법문 속에서 ‘대장부’는 “장부의 기개가 필요하다.” “대장부의 활개를 치라.” 등으로 수행자에게 덕목으로 자주 주문되는데, 여기서 ‘대장부’는 물러서지 않는 용맹심, 생사를 초월하는 자세, 목숨을 걸고 도를 구하는 마음, 굳은 의지, 결단력 등을 상징한다. 선불교의 이런 성격은 다음과 같이 비판되기도 한다.

선불교 전통은 겉으로는 평등을 주장하면서도 그 표현에서는 남성적 영웅주의의 표현양식을 사용하여, 여성 수행자들에게 부처의 가르침을 진정으로 실행하려면 남성적 능력을 갖추어야 한다는 것을 내재적으로 보여 왔다.(Miriam L. Levering, “Lin-chi(Rinzai) Ch'an and Gender”)

선불교의 남성 영웅주의론은 남성 중심적인 사회문화 규범과 인식의 수용이다. 이것은 종교적인 성평등론과 긴장관계를 형성한다. 미리암 레버링은 ‘대장부’라고 하는 젠더 관련 은유를 선사들이 계속 사용하는 것은 “궁극적인 레벨에서의 ‘젠더 차이 의미 없음’이 현상적인 레벨에서 ‘차이의 중요성’에 대한 그들(남성 선사들)의 신념을 흔들지 않았다.”고 강도 높게 비판하였다. 즉 진리의 평등론이 현상 세계의 남성 중심론을 뛰어넘지 못한 한계적 표현이 ‘대장부’론이라는 지적이다.

그렇다면 대장부 모델이 여성 수행자에게 문제가 되는 것은 무엇일까? 이 주제에 대해서는 다음 글이 참고될 수 있다.

많은 여성들에게 ‘남자 영웅 같은 여자’의 이미지는 사실상 비현실적인 것이며, 실현 가능한 것도 아니고 게다가 바람직한 것도 아니다.(Grace Schireson, Zen Women: Beyond Tea-Ladies, Iron Maidens, and Macho-Masters) 

여성 선 수행자들은 이와 같이 여성 스승의 역할모델 부재를 넘어, 실현 가능하지도 않은 남성 영웅의 이상을 추구하며 구도의 길을 걸어가야 했던 것이다. 여성 스승의 부재 문제는 여성 수행의 이 비현실적이고 바람직하지도 않은 남성적 이상향으로 인해, 악순환의 고리 속에서 지속되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이 문제는 어디에서 풀어나가야 할 것인가? 선불교 역사 속에 여성 스승의 모델은 없는 것일까? 선불교는 필연적으로 ‘남성중심의’ ‘남성적 성격의’ ‘남성들만의’ 전통이었던 것일까?

3. 역사 속의 동아시아 여성 선사들

선불교 역사의 첫 장은 대체로 보리달마의 전등(傳燈)이 혜가, 승찬, 도신, 홍인을 거쳐 6조 혜능으로 이어지는 조사(祖師)들의 계보로 시작되었다고 설명된다. 이것은 선종 내부에서는 신앙적이기까지 한 내용이지만, 오늘날 역사학자들의 연구에 의하면 달마의 초조(初祖)설도 선종 내부의 임의적인 위치 선정이며, 전승 계보도 역사적 사실로 온전히 확인되지 않는다고 말한다.

선종이 계보를 형성하여 문헌에 기록하기 시작한 것은 북종선의 신수(神秀)에 의해서였다. 측천무후의 스승으로 존숭되면서 선종(禪宗)의 권위를 보이기 위한 것이었다. 선사들의 전승은 사실상 매우 복잡한 것이었다. 북종과 남종, 우두종 그리고 이후에 5가 7종의 선사들은 경쟁하기도 했지만 교류하기도 하였고, 긴밀한 인적교류를 하기도 했다. 즉 사상적으로 단절되고, 인적으로 폐쇄적인 계보가 아니었던 것이다.

한편, 계보 내에서는 깨달음의 체험이 이심전심으로 수십 대(代)를 거쳐 그대로 전승되었다고 하면서, 조사들의 사상에 차이와 변화가 있었다는 것을 거부하는 경향을 보이지만, 실제 역사상 선불교 사상은 많은 변화를 겪으면서 전개되어 왔다. 계보주의적 관점에서 선사상과 그 역사를 바라보는 것이 얼마나 한계를 갖는지 알 수 있다. 선사상을 있는 그대로 보지 못하게 하는 것은 선사들이 오랫동안 만들어온 바로 그 계보주의에 있는 것이다.

계보는 종종 자파의 권위 확립을 위해 정정되기도 했다. 신회의 하택종이 득력하게 되자, 정중동의 후대 계통에서는 선조를 신회로 바꾸고 묘탑까지도 신회의 탑 옆에 건립하였다. 이것은 계보주의가 힘의 원리로 작동되는 것을 보여주는 사례이다.

그리고 달마나 혜능의 전기 등 우리가 일반적으로 알고 있는 선종의 여러 도그마가 확립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 것은 《경덕전등록》으로 지적된다(이부키아츠시, 최연식 역 《새롭게 다시쓰는 중국 선의 역사》). 이 문헌은 먼저 황제에게 바치고 대장경에의 입장(入藏)을 허락받았는데, 기존에 전승되어 왔던 각 계보설을 단일하게 정비하고 선사들의 전기, 기연들을 정리하여, 선종과 그 계보의 권위를 국가적으로 인정받았다. 하지만 이로써 선종의 계보는 실제 복잡하고 다양했던 역사가 단순화되고, 정통과 방계의 관점에서 다시 우열로 구분되는 배타성이 강화되어 갔다.

이와 같은 선종의 강력한 계보주의 역사 속에서 과연 살아남아 있는 여성들이 있었을까? 만일 존재한다면 그녀들은 어떤 모습을 그리고 어떤 목소리를 남겼을까? 동아시아 선불교 여성의 역사를 살펴보기 전에 우리가 먼저 유념해야 하는 것이 바로 이 선종의 계보주의 성격이다. 선불교의 여성 선사 조상이 우리에게 거의 보이지 않았던 것은 이런 맥락에서 이해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선불교의 오랜 역사 속에 여성들의 흔적을 모두 제외시키는 일은 불가능했다. 제한되고 왜곡되고 생략되어 왔지만 그럼에도 여성 선사들의 역사는 발굴되고 있다. 여성들의 이야기는 우리의 선불교 역사관을 많은 부분 교정시켜줄 것으로 기대한다. 왜냐하면 이들은 대부분 선종이 배타적 계보주의에 심하게 갇히기 이전, 초기 선불교의 비교적 자유분방한 모습을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1) 보리달마의 제자 총지 비구니

《경덕전등록》 〈달마전〉에는 달마로부터 득법한 제자 4인이 등장하는데, 전등의 역사 첫 장면으로 간주되는 이곳에 비구니가 포함되어 있다. 주인공은 바로 총지(總持)인데, 달마와 관련한 다른 선문헌에는 전혀 보이지 않다가, 《전등록》에서 갑자기 언급되고 있어 그 배경이 조금 의심스럽기도 하다. 특히 총지니(總持尼)가 양나라 왕실과 관련이 있다는 전설이 그런 의혹을 더욱 키우게 한다. 한편, 총지니의 탑에 대한 기록이 후대 선문헌(《祖庭事苑》)에도 명시되어 있는데, 그녀가 달마의 직제자였는지 여부는 확언할 수 없으나, 총지라고 하는 여성 선사는 실존인물이었던 것 같다.

《전등록》이 전하는 총지니의 모습은 이러하다. 스승 달마 대사가 제자들에게 각각 얻은 바를 말하도록 한 자리에서 총지니는 “제가 보기에는 아난이 아촉불국을 볼 때 한 번 보고는 다시 보지 않음과 같습니다.”라고 말하였다. 이에 대해서 달마는 “너는 나의 살을 얻었다.”고 평가한다. 이것은 선가에서 꽤 유명한 달마의 피육골수론(皮肉骨髓論)인데, 총지니는 이 중에서 두 번째인 달마의 살(肉)을 얻은 것에 비해, 마지막에 제자 혜가는 아무런 말을 하지 않고 절만 하고 돌아가 달마로부터 ‘골수’를 얻었다고 평가받는다.

이 이야기는 달마의 제자 4인의 득법에 ‘심천우열(深淺優劣)이 있다’ 그리고 골수에 해당하는 법의 핵심은 선종 2조 ‘혜가에게 전해졌다’는 식으로 해석되어 왔다. 그러니까 나머지 제자들은 전등의 정통맥에 대해서 방계 혹은 주변부에 지나지 않는 것이 된다. 하지만 이 이야기가 실제 달마의 방에서 일어난 역사적인 사실로 생각해서는 곤란하다. 《전등록》이 편찬된 송대(宋代) 선사들의 아이디어가 반영된 스토리라고 하는 것이 오히려 더 적합할 것이다.

그렇지만 주목되는 것은 그들이 달마의 주요 제자 리스트에 비구니를 포함시켰다는 점이다. 이것은 송대 선불교 문화에서 이상적인 형태로 간주된 모습이 아니었을까 추측해 본다. 

2) 혜능과 비구니

혜능(慧能, 638~713)은 선종을 대표하는 선사임에도 불구하고, 혜능에 대한 역사적 사실은 거의 확정할 수 없다고 할 정도로 가장 많은 전기 개편이 이루어진 인물이다. 바로 제자 하택신회(荷澤神會)가 현재 알려진 혜능의 모습을 탄생시켰다고 추청된다.

그런데 덕이본과 종보본 《육조단경》 그리고 《선림유취(禪林類聚)》 등에는 혜능의 개오에 영향을 준 비구니, 무진장(無盡藏)에 대한 이야기가 있다. 무진장니는 역사적 실존인물이었던 것으로 생각되는데, 고찰 무진암(無盡庵)에 그녀의 모습을 조각한 석각도(石刻圖)가 남겨져 있으며, 이 사실을 선문헌 《불조도영(佛祖道影)》에서 다시 확인하고 있는 것으로 보아, 선종 일가에서 무진장니를 중시해 온 전통이 있었지 않나 생각된다.

한편, 무진장니는 《금강경》을 중시한 신회에 의해 형성된 혜능의 《금강경》 오도(悟道) 전설에서 벗어나게 해주는 다른 스토리를 가지고 있어 흥미롭다. 무진장니는 《열반경》을 항상 독송했던 수행자였으며, 혜능을 깨달음으로 인도한 그들의 대화도 《열반경》 구절에 대한 것이었다. 혜능의 선사상과 《열반경》의 연관성을 생각해 볼 수 있게 하는 대목인데, 실제 초기 선종의 사상은 지론종 남도파의 영향을 많이 받았으며, 이들에게 중시된 경전이 바로 《열반경》임이 알려져 있다.   

그런데 무진장니는 누구였을까? 혜능은 홍인 대사의 문하로 가기 전에 먼저 소주(韶州) 지방으로 가서 당시 덕망 높은 인사 유지략(劉志略)을 만나 교우를 맺었다 한다. 무진장니(無盡藏尼)는 유지략의 고모였던 것이다. 혜능의 구도 과정에 비구니의 영향이 있었던 만큼 그의 제자 중에도 비구니가 존재했다. 그가 설법할 때는 승니도속(僧尼道俗) 1천 명이 운집했다고 하는데(종보본, 대승사본 《육조단경》), 이 표현을 그대로 수용하기는 어렵다 하더라고 그 무리 중에 비구니와 일반 여성들도 포함되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선등세보(禪燈世譜)》 《불조종파세보(佛祖宗派世譜)》 등의 기록에 의하면, 혜능의 제자 계보도 중에 ‘정거니 현기(淨居尼 玄機)’라는 글이 있다. 즉, 현기(玄機)가 혜능에게서 사법(嗣法)한 비구니라는 것이다. 또한 정거사(淨居寺)는 중국 선종사 중 기록에 나타난 최초의 선종 니사(尼寺)라고 평가된다(曹洞宗尼僧團本部 《曹洞宗尼僧史》).

3) 선불교 여러 종파의 비구니 선사들

남종 계열 외에 우두선(牛頭禪)과 북종선 계통에서도 비구니 제자들의 이름이 확인된다. 우선, 우두종의 혜충(慧忠, 683~769) 선사 제자 중에 명오(明悟)라는 이름의 비구니 제자가 있다(《경덕전등록》). 그리고 신라인 출신으로 정중선파(淨衆禪派)를 개창한 무상(無相, 684~762) 선사에게도 많은 여성 제자들이 있었음이 추정된다. 그의 설법과 수계의식을 설명하는 글(《圓覺經大疏鈔》)에는 “승니사녀(僧尼士女)를 소집하고 방등(方等)도량을 설치하다”라거나, “혹은 니중속인(尼衆俗人)의 부류” 등의 표현이 있어, 그의 문하에 많은 비구니와 사족(士族) 여성들이 운집하여 배웠음을 유추할 수 있다.

북종선의 신수(神秀) 계열에서도 비구니 제자들의 활동이 확인된다. 신수 문하의 법완(法玩, 715~790)에게서 비구니 제자 이름을 볼 수 있다. 적연(寂然), 명전(明詮), 계일(契一), 지원(志元), 혜응(惠凝) 등이 그들이다.

4) 위앙종의 여성 선사들: 유철마, 묘신니, 남대낭자

선법이 다양해지면서 선불교가 가장 활발하게 꽃피던 시절에 비구니 선사의 활약은 두드러졌다. ‘쇠맷돌’이라는 이름의 유철마(劉鐵磨) 비구니가 대표적이다. 선종 오가(五家) 중 최초로 독자 선법을 펼쳤던 위앙종 초대 조사들, 위산영우(潙山靈祐, 771~853)와 그의 제자 앙산혜적(仰山慧寂, 802~887) 등이 그녀의 스승이자 법거량을 나눈 선사들이었다. 철마 즉 쇠맷돌로 불릴 정도로 일체의 경계를 여지없이 갈아 없앤다는 그녀는 그 선기(禪機)가 어느 정도였는지 가늠하기 어려울 정도이다. 《벽암록》 《종용록(從容錄)》 《전등록》 등 선종 주요 문헌에서 그녀가 남성 선사들과 나눈 선문답이 화두로 제시되어 전승되었다.

그런데 한편, 유철마가 고전 선문헌에서 자주 회자될 수 있었던 것은 그녀의 터프함 즉 대장부 스타일의 여성 선사 이미지 때문이 아니었나 생각해 볼 수 있다. 확실히 선가에서는 그녀의 남성적인 면이 매우 강조되어 왔다. 이에 대해서 유철마의 남성적 이미지는 선사의 지위를 얻을 수 있는 여성의 유일한 형태였는지, 즉 선(禪)이 ‘철마(鐵磨)’를 창조했는지, 아니면 철마와 같은 여성들만이 선 수행에 이끌릴 수 있었던 것인지 질문이 던져지기도 한다(Grace Schireson, Zen Women).

하지만 위앙종에는 유철마만 있었던 것이 아니다. 비구니 묘신(妙信)은 앙산혜적의 제자였는데, 이 종파 사찰의 주요 행정직−총무 역할의 해원주(廨院主)−이 회의를 통해 그녀에게 맡겨지기도 했으며, 스승을 대신해 다른 비구승들에게 선법을 전하여 지도자 역할도 수행한 일화가 전해진다. 그런데 묘신니에 대한 이 흥미로운 이야기는 일본 도겐(道元) 선사의 《正法眼藏》 〈禮拜得髓〉에서만 전하는데, 도겐이 어떤 자료를 인용한 것인지 밝히지 않아 그 출처가 불분명한 아쉬움이 있다. 묘신니는 일본 도겐 선사가 여성 제자들에게 보여주고 싶었던 여성 선사의 모범적 모델이 아니었을까 생각된다.

위앙종에는 이 밖에도 정씨 성의 한 소녀가 있었는데, 그녀는 어린 나이에 위산영우 선사에게 참문하여 많은 문답을 통해 날카로운 선기(禪機)를 표했다고 한다. 후에 출가하여 대안(大安)의 법을 이었는데, ‘남대(南臺)낭자’의 이름으로 유명하였다고 한다(《선림유취》).

위앙종에 이처럼 걸출한 비구니 선사들이 많았던 것을 볼 수 있는데, 이런 배경에는 위앙종 선승들의 열린 자세가 있었음을 빼놓을 수 없을 것 같다. 특히 어린 소녀와 선문답을 하는 노장 위산 선사의 모습이 흥미롭고, 그의 제자 앙산은 묘신니에게 중요한 직책을 맡기고 사람들을 지도할 수 있게 한 점이 주목된다. 

5) 전등사(傳燈史) 속의 유일한 여성-말산요연(末山了然)

말산요연(末山了然)은 선종 역사상 가장 독보적인 비구니 선사이다. 《전등록》에서 여성으로서 자신만의 기록을 가졌으며, 남성 일변의 전등사 속에서 법의 전승을 인정받고, 또 나아가 실질적으로 법을 전하기도 했던 유일한 비구니이기 때문이다.

요연은 균주(筠州) 지역 말산(末山)에서 수행하였다 하여 ‘말산요연’이라고 불렸다. 그녀는 달마 제10세 홍주(洪州) 고안대우(高安大愚) 화상의 유일한 법손으로 기록되어 있다. 고안대우(高安大愚)는 임제종의 개조 임제의현(臨濟義玄, ?~867)을 깨닫게 한 것으로 유명한 당대(唐代)의 대선사였다. 임제는 자신의 제자들에게 대우 화상과 그의 제자 말산요연에 대해 이야기를 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리하여 임제의 제자 관계지한(灌溪志閑, ?~895)은 요연니를 만나기 위해 말산으로 찾아갔다. 요연니는 상당(上堂)하여 지한에게 물었다.

“상좌(上座)는 오늘 어디서 떠났습니까?”
“길 어귀(路口, 지명)에서 떠났습니다.”
“왜 덮어버리지 않소?”
지한은 말문이 막혔다. 그리하여 비로소 예를 갖춰 절하고 물었다.
“말산(末山, 지명이자 산의 정상, 여기서는 요연의 본성 의미)은 무엇입니까?”
“정상(頂上)은 드러나지 않습니다.”
“말산의 주인은 누구입니까?”
“남자, 여자의 모습이 아니오.”
지한은 이내 한 소리 지르면서 말했다.
“왜 변하지 않는 것이요?”
“신(神)도 아니고 귀(鬼)도 아니니 무엇으로 변하겠소?”

이후 지한은 요연니 문하에서 3년 동안 원두(園頭) 소임을 맡아 살면서 선법을 배웠다. 그리고 그는 훗날 일가를 이룬 다음에 대중에게 이런 고백을 했다고 전한다(《指月錄》).

“내가 임제에게 있었을 때 반 국자를 얻고, 말산에 가서 나머지 반 국자를 얻었다. 한 국자를 가득 얻은 것이 나로 하여금 지금까지 허기를 채우게 하였다.”

지한(志閑)의 고백에서도 알 수 있듯이 말산요연은 그에게 선법을 전해준 스승이었다. 《전등록》은 비록 그녀가 대우 화상의 법을 계승한 것은 언급하였지만, 지한에게 법을 전한 스승으로서의 역사는 침묵했다.
하지만, 말산과 지한의 관계에서 우리는 당시 선가의 너무나 흥미로운 장면을 읽을 수 있다.

첫째는 비구니가 비구 앞에서 상당(上堂)하여 법문하는 장면이고, 둘째는 비구가 문답을 하던 중 비구니가 스승으로 인정될 때, 예를 갖춰 절을 하였던 것이다. 또 하나는 비구 지한이 비구니 문하에서 함께 생활하면서 직접 선법을 배웠던 점이고, 마지막으로 그는 이 사실을 숨긴 것이 아니라, 제자 대중에게 널리 알렸던 점이다.

선의 황금시대, 남성 선사들이 얼마나 열린 태도로 여성 선사를 존중하였는가를 지한의 사례에서 충분히 느낄 수 있다. 할과 방을 사용하여 ‘장군’으로도 비유되는 가장 남성적인 임제선 문하에도 초기에는 이런 문화가 살아 있었음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그들의 ‘파격’은 이미 인식 속의 파격을 넘어, 남성우위의 전통 규범을 단숨에 깨뜨려 버리는 ‘파격’으로 확장되었던 것이다. 현대 선불교 수행문화에는 비구니 말산요연의 유산만 소중한 것이 아니라, 관계지한과 같은 비구 선사의 태도가 함께 중요하다.  

6) 대혜종고(大慧宗杲) 문하의 비구니 선사들

남송시대 대혜종고(大慧宗杲, 1089~1163)는 간화선(看話禪) 수행법을 대성시켜 이것으로  사대부를 포함한 많은 제자를 양성하여 사회 전체에 큰 영향을 미쳤다(이부키아츠시 《새롭게 다시 쓰는 중국 선의 역사》). 따라서 그의 문하에는 여성 제자들도 많이 있었던 것으로 보이는데, 이 종파의 문헌(《雲臥紀談》)에는 두 여성 선사들의 문답이 수록되어 있어 특히 주목된다. 무제(無際), 초종(超宗) 비구니가 그 주인공들인데, 무제도인−이 문헌에는 이 비구니들을 ‘도인(道人)’ 호칭으로 부르고 있다−이 탑주변을 청소하면서 게송을 읊자, 초종도인이 이에 대해 다음과 같은 답송을 읊었다.

탑은 본래 먼지가 없는데, 쓸어 없애는 것이 무슨 필요가 있는가.   
치우는 것이 곧 먼지가 생기는 것이니, 그리해서는 도달하지 못하네.
塔本無塵 何用去掃
掃即塵生 所以不到.

그리고 《대혜보각선사보설》에는 ‘니자명대사(尼慈明大師)’라는 명칭이 있는데, 도인(道人) 호칭과 함께 비구니를 ‘대사(大師)’로도 불렀던 것을 알 수 있다. 그 밖에 대혜종고의 비구니 제자로는 묘도(妙道), 무저묘총(無著妙總), 진여(眞如) 등의 이름이 확인된다.

한편, 대혜 문하의 비구니 선사들에게서는 선종 역사상 여성 수행자들에게 가장 중요하고 유일한 사례가 창출되었다. 바로 비구니가 비구니에게 선법을 전승한 것이다. 《續傳燈錄》과 《禪燈世譜》에는 “정거니온선사법사(淨居尼溫禪師法嗣) 온주정거니무상법등선사(溫州淨居尼無相法燈禪師)”라고 하는 구절이 있는데, 즉 “정거사(淨居寺) 비구니 혜온(慧溫) 선사의 법 계승자는 온주(溫州) 정거사 비구니 무상법등(無相法燈) 선사이다.”라는 것이다. 이것은 임제종 법계에서 유일한 기록으로 평가된다(曹洞宗尼僧團本部 《曹洞宗尼僧史》).

이것에 근거하면, 혜온 선사는 법을 전승한 스승으로 명시된 선종 최초의 여성이며, 무상법등은 여성 스승으로부터 법을 전해 받은 최초의 여성 전승자가 되는 것이다. 그리고 눈에 띄는 것이 온주 지역의 정거사라는 사찰명인데, 앞서 언급한 바와 같이 이 절은 혜능의 비구니제자 현기(玄機)의 사원이자, 선종 최초 니선원이었다. 정거사가 선종 비구니들의 수행 중심지로 오랜 전통을 지켜왔던 것을 추측해 볼 수 있다. 

7) 일본 선불교와 여성 : 도겐 선사와 무게뇨다이 비구니

일본 선불교 여성사와 관련하여 빼놓을 수 없는 중요한 인물은 일본 조동종 창시자 도겐(道元, 1200~1253) 선사이다. 그는 앞에서 살펴본 중국의 유명한 여성 선사들의 사례를 매우 자세히 소개하고, 자신의 여성 제자들을 독려했다. 말산요연에 대해서는 “지한의 법부(法父)는 임제이고, 법모(法母)는 말산요연이다.”라고 말할 정도로 그녀의 위상을 높이 평가했다. 그래서인지 그의 첫 번째 비구니 제자이자 일본 조동종 최초의 비구니 이름은 요연(了然)이었다. 도겐은 이 밖에도 많은 비구니 제자가 있었으며 여성 차별을 강하게 반대하는 언급을 여러 번 보였는데, 그중에서 주목되는 구절을 하나 소개해 볼까 한다. 

주지나 수좌를 맡은 자의 자리가 비었을 때는 득법한 비구니를 청해야 한다. 비구 가운데 나이가 많고 연륜이 많다고 해도 득법하지 못했을 때는 무슨 필요가 있겠는가? 대중의 주인은 반드시 명안(明眼)에 의해야 한다. −중략− 여인은 전법의 사승(師僧)으로 예배할 수 없다고 하는 자도 있다. 이것은 알지 못하고 배우지도 못한 축생에 가까운 자들이니 불조(佛祖)와는 아주 멀다. -중략- 득도는 누구나 한다. 다만 모두 득법을 공경하고 존중해야 한다. 남녀를 논해서는 안 된다. 이것이 불도(佛道)의 극묘(極妙)의 법칙이다.(《正法眼藏》 〈禮拜得髓〉)

도겐의 양성평등 사상에서 중요한 점은 그가 성불과 득도만의 문제에 한정하여 평등을 말하는 것이 아님에 있다. 여성 선사에게도 공경하고 예배하는 문화, 그리고 주지나 수좌직을 비구니에게도 부여할 수 있는 제도의 문제까지 포괄적으로 평등을 적용하였으며, 이것이 ‘불조(佛祖)’ 그리고 ‘불도(佛道)의 극묘(極妙)의 법칙’이라고 강하게 확신하는 태도를 보인 점이다. 비구 선사가 이처럼 강한 양성평등 의지를 보이고 실천했던 예는, 동아시아에서 도겐 선사 외에는 쉽게 찾기 어렵다.

13세기 일본 가마쿠라불교 시대는 이러한 분위기였다. 그리고 이런 생기에 찬 시대적 배경 속에서 일본 임제종 최초의 비구니가 지도자로 세상에 나왔다. 무게뇨다이(無外如大, 1223~1298)가 그 주인공이다. 그녀는 막부 권력층의 부인으로서, 송나라에서 건너온 불광(佛光) 국사 무학조원(無學朝元, 1226~1286)으로부터 임제선법을 배웠는데, 남편이 죽자 삭발 비구니가 되어서 본격적으로 참선을 닦았다. 어느 날 사찰에 물난리가 나서 물동이로 물을 퍼 나르다가 물동이의 바닥이 툭 터지는 순간 깨달음을 얻었다고 한다.

그녀는 스승 무학조원으로부터 인가를 받고, 그의 임종 무렵에 법의 상속자로 지명을 받았다. 이러한 정황이 무학조원의 《불광국사어록(佛光國師語錄)》에 기록되어 있다. 그러나 그녀 법 상속은 다른 비구승들의 저항으로 인해 좌절되었다. 무게뇨다이는 이 일을 계기로 근거지를 가마쿠라에서 교토로 옮겼다. 그리고 그녀는 5개 산 임제종 연합회를 이끌면서 실질적으로 임제종 지도자의 역할을 수행하였다. 13세기 일본 중세, 임제 선법을 이어받고 이를 전파하는 데 있어서 가장 최선두에 무게뇨다이 비구니 선사가 있었던 것이다. 지금도 교토(京都) 호지인(寶慈院)에는 이 비구니의 목조 좌상이 모셔져 있다. 

4. 한국 선불교에 던져진 화두

선불교는 강한 계보주의와 남성영웅주의 문화로 인해, 여성에게 가장 차별적이고 억압적인 것으로 여겨졌으나−물론 여전히 차별적이고 억압적인 요소가 남아 있다−실제 동아시아 여러 불교 종파 중 여성의 성취를 가장 명백하고 광범위하게 수용하였으며, 여성차별적 규범과 제도를 파격적으로 깨뜨린 전례를 제일 많이 보여준 종파였다고 할 수 있다.

이것은 선사상 본연의 내적인 힘에 의한 파격이라고도 볼 수 있지만, 외적으로는 개방적인 경쟁 시스템과 다양성의 공존과 교류 등의 문화를 창출하였을 때 시도되었고 또 실현되었던 일로 분석된다. 즉, 선불교가 폐쇄적이고 권위적인 문화 속에 있을 때는 여성에 대한 수용이 극소화되었다. 반대로 선가에 여성선사들이 광범위하게 등장하고 이들의 활동이 활발하게 드러났을 때는, 선불교가 열린 관계망을 형성했을 때였음을 볼 수 있다. 위앙종의 묘신(妙信) 비구니의 예에서도 확인할 수 있으며, 임제와 동시대 선사였던 말산의 요연(了然)의 경우도 그러했다. 일본에서는 도겐 선사의 시대에 무게뇨다이(無外如大) 같은 여성지도자가 임제종을 이끌었다. 

한국 선불교 역사에서는 여성 선사들을 배출한 선지식으로 고려시대 수선사(修禪社) 제2대 진각국사 혜심(惠諶, 1178~1244)을 꼽을 수 있다. 정혜결사라고 하는 강력한 종교운동의 에너지가 여성을 제자로 적극 수용하고 이들을 공식 계보에 포함시키게 했던 것이다. 중국의 선법이 왕성하게 직수입되었던 고려 말 시기에도 비구니들의 이름이 등장한다. 나옹, 태고보우(1301~1382)의 비문에도 비구니들이 제자 리스트에 올라 있다(김영미 〈高麗時代 比丘尼의 활동과 사회적 지위〉).

그리고 근현대 선의 부흥기를 맞이하면서 다시 많은 비구니 선사들이 등장하였다. 법희(法喜), 만성(萬性), 본공(本空) 등 여러 비구니 선사들이 깨달음을 인가받았다. 만공(滿空, 1871~1946)은 이런 비구니 제자를 가장 많이 배출한 대표적인 선사였다. 한편, 일반 여성들의 참선문화의 뿌리도 이 시기에 형성된 것인데, 대표적인 여성 수행단체는 선학원 부인선우회(婦人禪友會)가 있었고, 금강산 표훈사에 개설된 부인선원은 조선불교 선원현황 통계조사에 공식 포함되기도 하였다. 이 시기 참선의 대중화 운동을 통해 많은 여성 수행자를 지도했던 대표적인 인물은 백용성(白龍城, 1864~1940) 선사였다.

한국불교의 역사 속에서 여성 선 수행자가 왕성하게 등장했던 시기는 새로운 시대적 변화와 불교계의 쇄신운동이 결합했을 때였음이 다시 한 번 확인된다. 그렇다면 오늘날의 모습은 어떠한가. 급변하는 시대적 상황 속에서 불교공동체는 변화에 공명하고 있는가? 선불교 지도자들은 열린 시스템으로의 전환을 모색하여 새로운 에너지를 수용하고 발산시킬 마인드를 가지고 있는가?

“한국의 간화선은 육조혜능 선사가 정착시킨 조사선의 흐름을 고스란히 이어받고 있는 조사선의 정맥이다.”(조계종교육원 《간화선》)라고 선언되었는데, ‘정맥’이라는 한국 조계종의 자부심은, 중국에서 여성 조사들이 상당법문을 하고, 남성의 스승으로 존숭받기도 하며, 여성들 간에 법이 전승되기도 했던 선종의 바로 그 ‘전통’도 계승할 수 있는 의지로 표출되어야 할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넘어야 할 산들이 있다. 한국 선불교는 이념적으로는 강한 ‘간화선 근본주의’에 빠져 있고, 정치적으로는 ‘배타적 계보주의’에 갇혀 있다. 이 두 산에 막혀 양적으로 세계 최다의, 그리고 역사적으로도 유례가 없는 여성들의 선 수행 에너지가 그대로 방치되고 있는 것이다.

소셜네트워크의 비약적 참여 증가는 권력의 집중과 독점적 통제 방식이 강해지자 그 대안으로 찾아진 것이라 한다. 균형을 이루기 위한 자연스러운 선택이다. 한국 선불교 교단 또한 강한 권력집중과 통제 시스템이 진행되는 곳이다. 균형을 찾기 위한 자발적 시도가 다양하게 이루어지지 않는다면, 어디선가 새로운 관계망의 폭발적 힘이 일어나 이 체제를 견제하게 될 것이다. 한국 선불교에 던져진 화두는 소셜네트워크 시대와의 접점, 바로 ‘여성’이다.

 

조승미 / 서강대학교 종교연구소 연구원. 이화여자대학교, 동국대학교 대학원 불교학과(석사, 박사) 졸업. 동국대 불교학과 강사, 동국대 불교문화연구원 연구교수 역임. 저서로 《여성주의 불교수행론》 《한국 비구니승가의 역사와 활동》(공저), 《근대 동아시아의 불교학》(공저), 《일본불교사 근대》(공역) 등 다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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