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색과 성찰

내가 출판사를 하게 된 계기를 먼저 거슬러 올라가 보면 애초에 부처님과의 인연이 아닌가 싶다. 현재 화남출판사 상호는 당시 원명 노장께서 “남수가 빛나야지.” 하면서 빛날 화(華) 남녘 남(南)이라는 법호로 지어준 것이다.

시골에서 중학교를 졸업한 1974년 1월 말, 대구 효목동에 있는 통천사란 절에서 군복무를 하며 자취를 하는 큰형님에게 무작정 들이닥쳤다.

일찍 홀로 된 어머니께서 구 남매의 생계를 책임지고 있는 어려운 집안 형편상 상급학교에 진학할 수 없는 사정을 잘 아는 큰형님도 따로 이유를 물을 상황이 못 되었다. 십여 일을 고민하던 큰형님은 불현듯 서울을 다녀오시더니 메모지 한 장을 건네주면서 ‘부모님 원망 말고 절에 가서 스님 말씀 잘 따르고 열심히 공부하라.’는 당부를 하셨다. 내가 갈 곳이 도선사였던 것이다.

중학교 내내 입던 교복을 입은 채로 책가방 하나 들고 동대구 터미널에서 동양고속을 탔다. 그야말로 시골 촌놈이 꿈에 부푼 한양길에 올랐던 것이다.

지금의 서울역 대각선 맞은편에 동양고속 하차장이 있었는데, 거기서 남대문 쪽으로 버스 정류장이 있었다. 요즘 같으면 전철을 이용했겠지만 그땐 1호선이 개통 전이었다. 1974년 8월15일이 1호선 개통일이니 6개월 전이었다.

6번 시내버스를 타고 우이동 솔밭 맞은편에 무사히 내렸다. 당시엔 우이동 종점에서 도선사까지 유일한 교통수단은 6인승 검정색 외제 지프밖에 없었다. 그 지프를 타고 도선사로 향했다.

종무소에 들러 동광 스님을 맨 처음 뵙고 인사를 드리니 반갑게 맞이해 주셨다. 얼어붙었던 마음이 조금 누그러졌다. 동광 스님은 전화와 칠판을 영어로 무엇이냐고 질문하셨다. 아는 단어라 답변을 잘해냈다. 저녁 늦게 들어오신 혜성 스님은 독성각 대중처소에 입방시키지 말고 시자실인 도현 스님 방에 같이 기거토록 하면서 잘 가르치라고 지시하셨다. 

그날부터 절이란, 소풍 가서 김밥 먹고 보물찾기를 한 울진 불영사밖에 모르던 내게 그야말로 난생처음 겪어보는 절 생활이 시작되었다. 어리둥절한 상황 속에서도 매사에 조심하며 정신을 가다듬었다.

절 생활은 규칙적인 공동생활이다. 기본인 본인 빨래는 물론 소임이 수시로 바뀌면서 공양주, 갱두, 채공, 개울 건너 산 너머 밭 풀 매기, 땔감 하기, 제설작업, 신문발송 작업, 종무소 신도접수, 신도주소록 인쇄하기 등 잠잘 때까지 철저한 행자생활의 연속이었다.

청담, 성철 큰스님께서 설립한 ‘실달학원(悉達學院)’ 큰 방에서 설산 노장님이 강의하신 초발심자경문을 배우고 일암 노장님의 염불, 원명 노장님의 원효대사 법회송이라던가 어김없이 찾아오는 새벽예불 시간과 단체 체벌을 받을 때면 삼천 배, 천 배 석불전 참회는 수행 생활 중 잊을 수 없는 기억들이다.

행자 시절 사형으로는 당시 지 자(字) 돌림으로 지현, 지원, 지웅이 있었고 도 자 돌림으로 바뀌면서 1974~1976년 사이 오십여 명의 사형사제가 입산하여 혜성 스님의 상좌가 되었는데, 매년 음력 2월 보름이면 석암 큰스님을 계사로 모시고 수계식을 열었다. 부산에 계시던 노장 스님을 모시러 간 스님은 사숙이신 현성 스님이 담당하셨던 기억이 생생하다. 그때 노장 스님들 중 혜명, 설산, 원명, 일암, 호운, 도우, 법공, 원로의원을 역임하신 정천 큰스님 등은 열반하셨고, 지금은 은사 스님을 비롯한 사숙뻘 되시는 스님들께서 노장의 반열에 올라 있으니 세월의 흐름을 새삼 느낀다.

당시 은사인 혜성 스님은 도선사의 전체 살림과 조계종 사회부장, 동국대 강의, 혜명복지원, 학교법인 청담학원 이사장 소임 등으로 분주한 나날을 보내셨다.

도선사에는 혜명 주지 스님이 계셨고, 고운사 주지를 역임하고 봉암사 결사 주역 중 한 분이신 보봉도우, 원명 부주지, 현성 총무국장, 선래 교무국장 스님들과, 동광, 혜자, 광복, 도완, 혜덕, 현욱, 지성 스님들, 노장 스님으로 원명, 설산, 일암, 호운 등 오십여 대중이 살았다.

그즈음 은사인 혜성 스님께서는 도선사 사서실이 있는 을지로 새마을 빌딩에 《불교사회문제 연구소》를 설립하고, 소장으로 계시면서 교수 및 여러 학자들을 두어 단위사찰 최초 신문 〈도선법보〉와 불교계 유일의 여성잡지 《여성불교》 또한 청담 대선사님의 유저 및 사상서 등을 펴내는 작업을 하였다. 행자인 내게 편집 일을 돕는 일을 하도록 했는데 그때 문학을 접하게 되었다. 오늘날 출판을 하게 된 동기와 인연의 끈은 그때 맺어진 게 아닌가 생각된다.

그 후 나는 본의 아니게 10·27법난이라는 초유의 사태로 운명이 바뀐다. 10·27법난을 잠깐 설명하면, 1980년 10월 27일 새벽 4시 계엄군이 전국 주요 사찰과 조계종 총무원을 군홧발로 짓밟은 사건이다. 군경합동 3만 2천 명을 동원, 사찰 5천730여 곳, 승려 이천 명을 폭행, 수사했다. 

나는 이 사건을 2005년 소설가 유응오(당시 불교계 기자)와 함께 《10·27법난의 진실》이라는 이름으로 1,700년 한국불교의 최고 치욕사건에 관한 책을 펴냈다. 지금까지 출판업을 하면서 가장 큰 자부심을 느끼는 일이다. 

대사회 고발서적인 《10·27법난의 진실》이야말로 세상의 눈을 총과 군홧발로 숨길 수 없다는 진리를 만천하에 보여준 일대 사건이었다.

1981년 군 제대를 한 나는 출가사찰인 도선사에 갔으나 혜성 스님의 제자인 관계로 방부를 받아들일 수 없다는 말을 듣고, 지리산 쌍계사 등 여러 군데를 전전하다가 결국은 하산의 길을 택했다. 

출가 생활을 접고 세속의 생활을 시작한 나는 한림제약회사 영업부에서 1983년부터 1989년까지 근무를 했다. 그리고 미국으로 건너가 사진관에서 2년간 근무를 하는 중에 사형들과 사숙님들의 권유로, 도선사 월간 《여성불교》 편집주간의 직책으로 돌아와 하산 후 일반인으로 근무하게 된다.

참으로 부처님과의 인연은 지중한 것임을 새삼 깨달으며 십여 년 전 화남출판사를 설립하여 불교서적과 문학을 넘나들며 세상과 소통을 하고 있다.
불의를 고발하며 마음과 정신의 안락과 지혜의 눈을 밝히는 등불이 되고자 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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