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색과 성찰

지금으로부터 10여 년 전, 2000년 7월에 중국의 둔황 일대, 흔히 ‘실크로드’라고 일컫는 곳을 다녀왔다. 좀 더 정확히 말해 그해 7월 18일에 김포공항을 떠나 중국 시안[西安]→우루무치→투루판→유원→둔황→시안→김포로 이어지는 7박 8일의 여정이었다. 중국의 시안은 산시성[陝西省]의 성도(省都)로 주나라 무왕이 세운 호경(鎬京)에서 비롯되며, 그 뒤 한나라에서 당나라에 이르기까지 약 1천 년 동안 단속적이었으나 국도(國都)였던 역사적인 도시로 그간에는 장안(長安)이라는 이름으로 불리었다.

여행 중에 진시황릉, 병마용 박물관, 당 현종과 양귀비가 사랑을 나누었던 화청지, 투루판의 청포도 거리, 아름다운 서체를 관람할 수 있는 비림박물관 등도 볼 만했다. 하지만 내게 큰 충격과 감동을 안겨준 것은 둔황 막고굴의 다양한 석굴들이었다. 600개나 되는 석굴 중에 직접 들어가서 본 것은 대여섯 개밖에 되지 않지만 그 척박한 땅에, 그렇게 많은 사람이, 엄청난 세월에 걸쳐, 그렇게 많은 석굴에다가 불상을 만들어 두었다니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벽마다 그려져 있는 신비로운 벽화는 또 얼마나 가슴에 뜨거운 감동을 주었던지!

막고굴은 입구부터 사람을 압도하는 힘이 있다. 막고굴의 상징물로 조성된 북대불전은 9층 누각으로, 양측으로 많은 굴이 뚫려 있었다. 명사산의 동쪽 끝 절벽에 벌집처럼 뚫려 있는 막고굴은 남북으로 약 1.6km에 걸쳐 조성되었다. 여기에는 2,400여 개의 불상이 있고 4만 5,000㎡에 달하는 벽화가 그려져 있는데 관광객들에게는 극히 일부만 개방해 보여주고 있었다. 막고굴은 한마디로 말해 불교문화의 보물창고이다. 둔황의 불교문화가 워낙 찬란하고 무궁무진하여 ‘둔황학’이라는 학문이 생겨났고, 세계 각 대학에서 이 학문을 연구하는 이들이 계속 나와 박사가 되고 있다.

가 보고 싶은 방이 있었는데 제17호 굴이었다. 이 굴에서 대량의 불화와 경전이 발견되자 특별히 ‘장경동(藏經洞)’이라는 이름이 붙여졌다. 바로 신라의 혜초 스님이 쓴 《왕오천축국전(往五天竺國傳)》이 이 방에서 발견되었는데, 불행히도 관람이 허락되지 않고 있었다. 그곳에 있던 온갖 불화와 경전은 다른 곳으로 옮겨져 텅 비어 있을 테니 가본들 큰 의미는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제249호 굴의 천장화인 비천상 등을 보며 마음속으로 계속 감탄사를 연발하였다. 이 엄청난 규모의 막고굴은 그리스의 파르테논 신전이나 이집트의 피라미드, 중국의 만리장성같이 수많은 인간의 피와 땀으로 건설된 것이 아니었다. 수많은 사람의 마음에 심어진 불심이 중국에서도 첩첩오지이며 사막지대인 둔황으로 오게 하여 600개나 되는 굴을 뚫게 하였다. 2,400개나 되는 불상을 만들어 세우게 했고 4만 5,000㎡에 달하는 벽화를 그리게 했다. 정말 놀라운 일이 아닌가.

막고굴이 만들어진 시기는 5호16국 시대 전진(前秦)의 지배하에 있던 355년 또는 366년으로 추정되며, 승려 낙준이 석굴을 파고 불상을 조각한 것을 시작으로 원나라 시대에 이르기까지 1,000년에 걸쳐 조성되었다.
열여섯 어린 나이에 당나라로 유학길을 떠난 혜초는 광저우에서 만난 인도인 스승 금강지의 권유에 따라 열아홉 살 때 인도 여행을 떠난다. 일단 천축국으로 불리던 인도에 가서 부처님이 태어나신 곳(룸비니 동산), 깨달음을 얻은 곳(부다가야), 처음으로 설법한 곳(녹야원), 법화경을 설법한 곳(영취산), 입적한 곳(쿠시나가라), 가장 먼저 생긴 사원(죽림정사) 등을 둘러보았다.

 혜초의 여정은 부처님의 행적을 더듬어본 것에서 그치지 않는다. 서역으로 발걸음을 옮겨 지금으로 치면 파키스탄, 아프가니스탄, 이란, 우즈베키스탄, 타지키스탄 등 중앙아시아 일대와 티베트 등을 돌아보고 온다. 무려 40개국 2만km의 대장정을 했던 것인데, 혜초는 자신의 발걸음을 내디딘 각국의 생활습속, 정치상황, 기후와 음식, 풍경과 지세, 신앙심의 정도 등을 꼼꼼하게 기록하였다. 그것이 장경동에서 1908년, 프랑스의 펠리오란 사람에 의해 발견된 《왕오천축국전》이다.

펠리오는 중국의 관리에게 헐값에 산 스물네 상자의 문헌과 다섯 상자의 직물류를 프랑스로 옮겨 박물관에 보관하였다. 빼앗은 것이 아니라 사간 것이라 주장하니 중국이나 우리나라나 할 말이 없었지만 우리는 끈질기게 간청하였다. 마침내 그들은 마지못해 우리에게 잠시 빌려주기로 했다. 그래서 작년 12월 18일부터 올해 4월 3일까지 용산에 있는 국립중앙박물관에 《왕오천축국전》을 전시했고, 전시가 끝나자마자 본국으로 가져갔다.

나는 둔황 일대를 비행기와 기차, 버스로 이동했지만 혜초는 걷고 또 걸어서 답사하였다. 40개국의 음식은 입에 맞았을까? 길은 제대로 나 있었을까? 잠자리는 어떻게 마련했을까? 말은 통했을까? 한자를 알면 필담이라도 했겠지만 중앙아시아 대부분의 나라는 아랍어권이지 한자어권이 아니다. 그럼에도 혜초는 40개국을 돌면서 그 나라의 이모저모를 상세히 기록하였다. 게다가 《왕오천축국전》에는 다섯 수의 시가 나온다. 그는 시인이기도 했던 것이다.

비록 7박 8일의 여행이었지만 혜초가 걸어갔던 길이었기에 귀국해서도 그곳에서의 풍광이, 특히 실크로드라는 통상로와 혜초의 여행길이 잊히지 않는 것이었다. 그래서 지난 10년 동안 ‘혜초의 길’을 소재로 하여 61편의 시를 써 《천상의 바람, 지상의 길》이란 시집을 내기도 했다. 혜초의 신심이 굳건하지 않았더라면 그 험난했던 구법 여행에 나서지도 않았을 것이다. 혜초는 당나라로 돌아와 인도 경전을 한문으로 옮기는 사업에 평생을 바쳤고, 780년 4월 15일, 중국의 오대산에 있는 건원보리사에서 입적하였다. 그래서 끝내 조국 땅은 밟아보지 못하고 중국에서 숨을 거두었다. 혜초가 고향을 얼마나 그리워했는가는 그가 남긴 다섯 편의 시 속에 잘 나타나 있다. 그는 정이 많은 신라 사람이었던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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