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집 - 20세기 한국불교의 회고와 반성

김광식
대각사상연구원 연구부장
1. 불교교단 개혁운동의 성격

20세기 불교교단의 개혁에 관련된 활동은 당시 불교사를 집약하여 보여 주는 단면이다.

거기에는 불교계가 주어진 현실을 극복하여 불교발전을 기하려는 처절한 고뇌가 담겨 있는가 하면, 불교계 구성원들이 명리에 얽혀 현실과 타협·굴절·좌절한 부끄러운 행적도 찾을 수 있다.

교단 개혁을 둘러싸고 있었던 외적인 문제는 주로 정치권력 즉 국가와의 관계였고 내부적인 문제는 교단 운영과 개혁을 추구하는 방법과 교단 운영의 성격을 이질적으로 파악한 세력간의 갈등이다.

이러한 갈등의 배후에는 교단 개혁을 주도하거나, 개혁이 성사되었을 경우 파생되는 명리가 개재되었음을 부정할 수 없다. 일제하에서는 주로 교단 재건을 통한 불교 개혁이 주된 고민이었으며, 해방 이후에는 교단 내부의 운영이 개혁의 대상이었다.

이에 본 고찰에서는 이러한 전제하에 20세기 교단 개혁과 관련된 흔적 중 중요한 활동을 선별하여 그 개요와 성격을 조망하고자 한다. 우리는 이러한 흔적들에 담겨진 본질을 되새겨봄으로써 21세기 교단 개혁의 이정표를 가늠할 수 있을 것이다.

2. 중앙기관, 총무원·교무원의 성립과 분열 (1920년대)

개항 이후 근대불교로 접어든 불교계는 조선 후기 당시의 부진을 극복하기 위해 다양한 행보를 거듭하였다. 그것은 불교 대중화로 요약할 수 있으며, 산간불교에서 도회지 불교로의 전환이라 말하기도 한다.

그 과정에서 원흥사, 사사관리서, 불교연구회, 원종, 임제종 등이 등장하였지만 이를 정상적인 교단으로 보기는 어렵다. 1911년 한국을 강탈한 일제가 제정한 사찰령 체제에 의해 ‘조선선교양종’이라는 종명이 탄생하였지만 이 또한 근대적인 교단과는 거리가 있었다. 오히려 사찰령으로 인해 불교는 30본산으로 개별화되었고 1915년 2월에 등장한 조선각본사연합제규(朝鮮各本寺聯合制規)에서 교단의 흔적과 시원을 찾을 수 있다.
이 제규는 당시 각 본산이 중앙에서 교육과 포교를 공동으로 행하기 위한 사무처리 수준의 약속이었다. 이를 통해 중앙학림, 지방학림, 각황사 중앙포교당 등을 운영하였다. 그러나 이 제규는 교육과 포교를 위한 것에 머물렀기에 종단이 갖고 있는 기본 성격인 불교계 전체의 통일성은 없었다. 더욱이 사찰령 체제에 기대어 일신의 안일을 추구한 본산 주지들의 친일성이 이 제규 시행 이후 본격적으로 대두되었다.

이 문제점은 1919년 거족적인 3·1운동 직후 청년승려들에 의하여 불교계의 모순으로 지적되면서 그를 개혁하려는 움직임이 본격화되었다. 이러한 과정에서 가시화된 것이 중앙기관으로서의 총무원과 교무원이었다. 3·1운동 직후 각 분야에 나타난 자주의 몸부림은 불교계에도 나타났는데 이것을 선도한 것은 1920년 6월 20일 창립된 조선불교청년회와 그 별동대였던 조선불교유신회였다.

1920년 12월의 불교유신예비회와 유신협의회는 그 이듬해 개최되는 30본산주지총회에 건의할 8개항의 유신안을 결정하였다. 8개항의 주요 내용은 조선불교는 만사를 공의에 부칠 것, 30본산연합제규를 고칠 것, 사찰의 재정을 통일할 것, 조선불교 교육의 주의와 제도를 혁신할 것, 포교방법을 개선할 것, 종래의 의식을 개선할 것, 경성에 홍교원을 건설할 것, 인쇄소를 설치할 것 등이었다.

이중 연합제규의 변경, 사찰재정의 통일, 교육제도 혁신 등이 교단 건설의 주된 내용인 것이다. 이 안은 전국 불교청년 단체들의 동의하에 30본산연합사무소에 제출되었다. 1921년 1월에 개최된 30본산주지총회에서는 연합사무소의 제도 폐지, 종무원(宗務院) 제도 활용, 연합사무소의 확충 등을 결의하였다. 그러나 이 결의는 이를 반대하는 일부 승려와 일제의 반대로 즉각 이행되지 못하였다.

이에 불교청년들은 기득권적인 주지층을 반대하는 움직임을 노골화하였다. 불교청년들의 불만은 마침내 1921년 12월 조선불교유신회의 창립으로 이어졌다. 불교청년들은 유신회의 지표로 조선불교의 현행제도 변경, 통일기구(종무원) 건설, 사유재산 정리, 포교·교육기관 확장 등 4대 강령을 정하여 교단 건설에 매진할 것을 결의하였다. 이에 불교계는 유신회의 주장을 수용하려는 부류와 이를 배척하려는 부류로 양분되었다.

이 같은 현실은 1922년 1월 7∼9일에 개최된 30본산주지총회에서 표면화되었다. 그 총회는 주지들만의 회의였지만 유신회원들도 참관하는 등 그 진행 및 결과는 당시 불교계의 초미의 관심사였다. 유신회의 회장인 박한영은 대회에 정식 참가하여 유신회의 입장을 개진하였다. 이에 대회에서는 당초대로 주지총회로 진행하려는 측과 이를 불교총회로 전환하려는 측 사이에 팽팽한 대립이 전개되었다. 마침내 대회의 성격을 놓고 표결한 결과 13대 11로 불교총회로 결정되었다. 그러나 이에 불만을 품은 주지들은 대회에서 이탈하였다.

불교총회로 전환된 회의에서는 불교청년들의 주장을 수용하여 30본산연합제규를 폐지하고 새로운 중앙기관인 총무원의 설립을 결정하였다. 총무원에 동참한 본산은 해인사·통도사·범어사·석왕사 등 10여 본산이었다. 그리고 유신회에서는 그들의 주장을 지방회원에게 홍보하면서 불교개혁의 최대 장애인 사찰령의 철폐를 위한 건백서를 2,284명의 연서를 받아 총독부에 제출하였다.

그 주요 내용은 30본사제도의 변혁, 일반 교회의 통규(通規)에 준하여 자립자치할 불교의 통일기관의 조직이었다. 총무원측에서는 총무원을 완전한 통일기관 이전의 임시기관으로 설정하고 규칙 제정, 사업 수행, 사업비 납부, 집행부서인 의사회를 구성하였다. 그러나 여타 본산 주지들은 일제 당국의 은근한 후원을 받으며 독자적인 총회를 갖고 사찰령을 부정하는 총무원을 반대하였다. 일제는 사찰령 철폐는 불가하나 사법(寺法)은 개정할 수 있다는 입장을 견지하면서 불교총회는 법으로 인정한 회의가 아니라는 이유로 총무원을 인정하지 않았다.

그러나 반총무원 노선에 서 있었던 주지들도 연합제규의 존속을 지속적으로 고집하지는 못하였다. 마침내 이들도 연합제규의 폐지를 통한 독자적인 노선을 경주하였으니 그는 1922년 5월에 결의한 재단법인 조선불교 교무원이었다. 60만원 재단으로 출발한 교무원에는 일제의 강압이 작용하여 30본산 중 27본산이 참여하였다.

총무원과 교무원의 갈등·대립은 치열하게 전개되었다. 이를 단적으로 말하는 것이 강대련 명고축출사건과 각황사 문패철거 사건이다. 전자는 불교유신회원이 용주사 주지 강대련을 ‘불교계대악마강대련’이라는 깃발을 등뒤에 강제로 지게 하고 북을 두드리며 서울 종로거리를 행진한 사건이다. 후자는 총무원과 교무원이 각황사의 연고권을 서로 내세우며 문패를 독점적으로 걸려는 사건이었다.

이처럼 1920년대 전반기는 총무원과 교무원이라는 중앙기관이 성립하였다. 그러나 총무원과 교무원은 사찰을 통할할 근거와 능력이 없었기에 교단의 성격은 미흡하였다. 우선 두 기관 모두 한국불교 전체를 대상화하지 못했다. 총무원은 교단을 지향하는 활동을 하였지만 교헌은 끝내 성사시키지 못했고, 교무원은 불교사업을 추진하기 위한 재단법인의 성격에 머무르고 말았다. 총무원은 청년의 단체로, 교무원은 노덕의 단체로 지칭된 바에서 단적으로 드러나듯이 두 기관의 성격도 매우 이질적이었다.

총무원측은 주지의 전횡을 문제삼았으며, 교무원측은 청년층의 신풍조에 중독되어 불교가 속세화되고 있다고 주장하였다. 이러한 대립의 이면에는 일제의 사찰정책을 수용할 것인가의 여부를 둘러싼 갈등이 내재해 있었다. 결국 1924년 3월경 총무원측 본산이 교무원으로 들어오는 방법으로 두 기관은 통합되었다. 물론 여기에는 일제의 부단한 조종과 압력이 작용하였다.

3. 자주 교단의 건설과 소멸(1930년대)

재단법인인 교무원은 불교계의 사업(교육, 포교)을 공동으로 수행하는 기관으로서 제한된 의미에서 교단의 역할을 수행하였지만 정상적인 교단이라고 볼 수는 없었다. 무엇보다 불교계 전체를 통할하는 기준 및 규율이 부재했다.

더욱이 각 본산들은 군웅할거하며 불교계 전체의 발전을 고려치 않고 본산의 이익만 추구했다. 게다가 여기에 일제의 사찰정책이 불교 전통을 고려치 않고 대처 육식을 조장하여 수행정신을 파괴, 불교의 타락을 초래하였다. 이러한 모순을 해결하려는 움직임이 곧 불교계의 통일운동이었다.

이 통일운동의 주도 세력은 3·1운동 직후 불교혁신운동을 추진하였던 불교청년들이었다. 민족운동 참여와 조선불교유신회를 통하여 불교 개혁을 추진하였지만 현실의 높은 벽을 절감하고 외국유학을 다녀왔던 그들은 우선 조선불교청년회를 재기하고 불교계 통일운동을 실행에 옮겼다.

그들은 이를 위해 1928년 11월 30일, 승려대회 발기대회를 개최하였다. 당시 발기대회를 주도한 백성욱은 대회의 목적이 종헌과 종법의 제정이며 불교발전의 장애는 각자 분립의 상태로 인한 통일운동의 부재라고 지적하였다. 이러한 준비를 거쳐 1929년 1월 3∼5일 각황사에서 역사적인 승려대회가 열렸다.

당시 승려대회에는 불교계 대표로 지정된 대상 인물 156명 중 107명이 참가하였다. 대회에서는 종헌, 종회법, 교무원칙, 교정회 규약, 법규위원회 규칙 등을 결정하였다. 이 중 가장 중요한 종헌은 12장 31조로 구성되었고, 입법·대표기관인 종회, 행정·실행기관인 중앙교무원이 성립하였다. 또한 불교계를 대표하는 교정 7인도 선출하였다. 이러한 결정은 1900년 이래 한국불교계의 핵심적 과제 중 하나였던 교단의 자주적 성립을 의미한다. 그러나 그 종헌에도 일정한 한계는 있었다. 요컨대 사찰령을 완전 극복치는 못하였다는 것이다.

특히 종명과 사찰재산, 인사권 행사에 있어서 사찰령 체제를 뛰어 넘지 못하였다. 또한 승려대회 때부터 일제의 회유 등에 의해 중도탈락한 인사도 있었다. 그러나 불교계는 이를 사찰령 극복의 지름길로 여기었기에 이를 실행하는 것을 불교계의 당면과제로 여기었다. 이는 종헌 실행 운동으로 명명되었는데, 이는 곧 교단의 정상화를 의미하였다. 불교계는 종헌에서 규정한 바와 같이 제반 사업을 정상적으로 추진하였다.

1930년에 승려법, 포교법, 교육법을 제정한 것도 그와 유관하다. 그러나 1931년경부터는 종헌 실행에 차질이 생기기 시작하였다. 종헌 실행를 저지하려는 반종헌 세력이 등장한 것이다. 반종헌 인사들은 재산권과 인사권을 행사하고 있는 일제의 눈치만 보는 친일 세력이었다. 당시 일제 당국은 종헌의 정신이 사찰령 반대운동 혹은 민족운동으로 확대되는 것을 예의 주시하고 사찰령에 저촉되지 않는 범위 내에서만 불교계의 자주를 용인하겠다는 입장이었다. 이에 대한 불교계의 대책은 종헌인가설 검토, 사법(寺法)개정운동, 종헌반포기념일 제정 등이었다.

종헌인가설은 종헌을 일제 당국에 승인을 얻자는 논리였는데 이는 종헌의 자주성을 파괴한다는 비판에 의해 사라졌다. 사법개정은 종헌에서 규정한 불교계 통일의 요소를 각 본산의 사법에 포함시키고 그 사법을 일제 당국의 승인을 받자는 것이었다. 이 운동은 일시적으로 각 본산 주지들도 동의하였지만 성사되지는 못하였다. 종헌반포기념일 제정 운동은 종헌이 제정된 1월 4일을 기념일로 정해 매년 의식을 갖자는 것이다. 1933년 1월 4일에는 중앙과 지방에서 이 의식을 거행하였으나 효과는 미약하였다.

이상에서 보듯이 당시 불교계는 종헌 실행을 불교 자주화의 구현과 식민지 불교 극복의 차선책으로 여기고 이를 실행하기 위한 노력을 다각적으로 추진하였지만 결과는 만족스러운 것이 아니었다. 마침내 1934년경에는 종헌이 소멸되고 종헌에서 규정한 종회와 중앙교무원도 사라졌다. 종헌이 소멸됨으로써 불교계는 종헌 추진세력과 반종헌 추진세력으로 양분되었다. 이로 인해 불교 사업은 날로 퇴보의 길을 걷게 되었다. <불교>지의 휴간, 보성고보의 매각, 중앙불전의 경영 여부 논란, 재단법인 교무원 증자 이행 불투명, 만당(卍黨)의 내분 등도 이러한 갈등 구도에서 나온 것이었다. 이는 교정의 퇴보이자 불교계 비자주성의 산물이었다.

4. 해방공간의 교단개혁(1940년대)

8·15해방은 불교계의 다양한 변화를 야기하였다. 그중 가장 주목할 만한 것은 일제하의 교단 집행부가 사직하고 새로운 과도체제가 등장하였다는 사실이다.

해방 이전의 교단은 1941년 4월 사찰령 시행규칙의 개정으로 나타난 ‘조선불교조계종 총본사 태고사법’의 산물인 조계종을 말한다. 그리고 그 과도체제는 조선불교혁신준비위원회였다. 이에 이 위원회의 준비에 의거 1945년 9월 22~23일 태고사에서 전국 승려대회가 개최되었다. 이 승려대회에서는 일제 사찰령 부정의 천명, 집행부 선출, 교헌 제정의 방향, 교구제 실시, 광복사업 동참 등이 결정되었다.

여기에서 결의한 제반 내용은 각 지방별 승려대회를 통하여 전국으로 파급되었다. 교단의 완전한 성립은 1946년 3월 태고사에서 개최된 제1회 중앙교무회에서 교단의 근간을 규정한 교헌의 통과로 볼 수 있다. 그 교헌에서 정한 새로운 교단의 내용은 사찰령 체제와는 적지 않은 변화가 있었다.

우선 조계종명을 제거하고 ‘조선불교’라고만 한 것이 눈에 띈다. 이는 당시까지만 하여도 교단의 분립화가 없었기에 굳이 종명을 붙일 필요성이 없던 것에서 나온 것으로 보인다. 종단의 교정 구도는 기존 종회를 대신한 중앙교무회, 기존 종무원이 중앙총무원으로, 기존의 감사원이 중앙감찰원으로, 그리고 교정의 자문에 응하는 고문회가 신설되었다. 그리고 이전 본산체제를 부정하고 각 도별 교구제로 전환시켰다. 이에 각도에는 교구 교무원을 설치하여 각 도 교정의 중심을 삼도록 하였다.

그 밖의 중요한 내용은 재산통합(5·3·2제), 친일파 숙청, 교도제 실시, 모범 총림 설립, 역경사업 실시 등이었다. 이같이 변모한 교단의 집행부는 교헌에서 제정한 제반 내용을 실천할 과제에 직면하였다. 교단 개혁을 기하려는 불교 혁신단체가 다수 등장한 것이 해방 공간의 특징이다. 불교청년당, 혁명불교도동맹, 조선불교혁신회, 불교여성총동맹, 재남이북승려회, 선리참구원, 선우부인회, 불교학생동맹 등 혁신단체들은 교단의 집행부가 불교 혁신을 대하는 자세가 미온적이라 하여 다양한 혁신안을 개진하였다.

그 공통점을 제시하면 다음과 같다. 첫째는 사찰령 철폐이다. 그러나 사찰령 철폐는 미군정에 의해서 수용되지 않았거니와 이는 집행부의 안일한 일 처리에서 기인한 것이었다. 교헌에 대해서는 일제 말기의 태고사사법을 자구(字句)만 수정한 것이라고 비판하였다. 가장 논란이 많았던 분야는 교도제와 재산통일이었다. 교도라 함은 부처님의 제자를 총칭하는 것으로, 행도(行徒, 승려)와 신도로 구분하였다. 요컨대 혁신단체 주장의 요체는 대처승들은 승려가 아니므로 신도로 신분을 전환시켜야 한다는 것이었다.

즉 대처승은 광의의 교도이되, 승려로 볼 수 없다는 논리였다. 이는 당시 승려의 95%가 대처승이었기에 불교계 초미의 관심사였다. 혁신단체 내에서도 이 문제는 다양한 의견이 있었지만 승려의 신분은 유지하되 교화승으로 두는 방법, 신도로 신분을 변동시키되 그들에게 포교사·교사·종무원의 직분을 제공하는 방법으로 대별되었다. 재산 통일의 문제에 대해서는 5·3·2제를 교헌에 반영하여 각 사찰 재산의 50%는 해당 사찰의 운영비로, 30%는 지방 교구의 자금으로, 20%는 중앙의 납부금으로 설정하였다. 그러나 이는 효율적으로 이행되지 않았다.

한편 혁신단체에서는 토지개혁이 곧 실시된다는 판단하에 사찰토지를 국가 및 농민에게 제공하고 승려는 노동에 종사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이들은 불법을 계승하기 위해서는 자급자족하든가 아니면 일반 대중 즉 신도에게 의지하는 등 불교의 대중화로 나아가야 한다는 논리를 제시하였다. 이는 곧 포교에 유의할 당위성과 수행을 청정케 해야 신도들의 외호가 가능하다는 문제로 이어지는 것이다.

그러나 교단 집행부는 기존 사찰 재산의 유지를 통한 교단 수호책을 세웠으며, 교도제도 신도의 조직화로만 이해하였다. 또한 집행부는 한용운의 불교 대중화 노선에 의거 승려 대처를 용인하는 입장이었다. 이러한 혁신단체의 주장은 교단 집행부가 수용하기 어려운 문제였다. 혁신단체는 1946년 11월에 개최된 제2회 중앙교무회에 교헌수정안과 혁신방안을 제출하였지만 전혀 수용되지 않자 독자 노선으로 선회하여 불교혁신총연맹을 설립하였다. 1946년 12월 3일 선학원에서 발족된 총연맹은 1947년 5월 8∼14일 태고사에서 전국불교도대회를 개최하였다.

사태가 비상하다고 판단한 집행부는 대회 도중에 임시중앙교무회를 개최하였다. 이에 혁신총연맹에서는 그 교무회에 최종적인 대중불교실시안(교단재건책)을 제출하였지만 수용되지 않았고, 총연맹은 새로운 교단인 조선불교총본원과 전국불교도총연맹을 발족시켰다. 이 같은 이질적인 교단 개혁 방안의 이면에는 상호 불신의 벽이 적지 않았다. 집행부에서는 혁신단체의 주장을 이북불교의 모방, 대중불교 혁명의 추구, 과도기적 유행, 교단 파괴 행위로 인식하였다.

이에 반해서 혁신측에서는 교단 집행부를 보수적이며, 역량이 부족하고, 개혁 자세가 미흡하다고 평하였다. 또한 그들 대부분은 일제하에는 친일적인 행동을 한 식민지 불교의 부산물인 대처승들이라는 것이었다. 교단 집행부는 한용운의 이념에 의거한 불교 대중화를, 혁신단체는 청정 비구 옹호와 근로경제를 구현한 불교의 대중화를 주장하였다. 교단 집행부와 혁신파의 차이점은 이념적인 좌우의 대응이라기보다는 혁신의 강약이라고 하겠다. 더욱이 그 본질에는 명분을 내세워 현실적인 기득권의 옹호를 하였던 집행부와, 일제시대 이래 교단 중심부에서 소외되었던 비구측의 승단 중심부 진입이 깔려 있었음을 배제할 수 없다.

또 한편으로는 식민지 체질의 불교를 청산하겠다는 여론 또한 강력하였다. 이상에서 본 바와 같이 당시 교단 집행부와 혁신파의 갈등은 불교개혁의 대상과 방법에 대한 차별성에서 파생된 것으로 불교사상을 놓고 전개된 것이라기보다는 다분히 명리 다툼의 성격이 짙었다. 그렇기에 교단 집행부측에서는 그 해결을 경찰에 의뢰하였고, 혁신파에서는 현실의 난관에 부딪치자 김구의 북행에 동행하였다가 북한에 잔류하기로 하였다. 이러한 대립은 미군정이 1947년 말부터 본격적으로 우익 중심의 정책을 구현하면서 혁신단체의 활동 기반이 상실되면서 소멸되었다.

5. 불교정화의 명암(1950~60년대)

불교‘정화’는 비구측 승려들이 이승만 대통령의 ‘유시’를 계기로 불교 이념과 사상이 관철되는 교단으로 만들려는 일련의 노력과 그 산물을 말한다.

그러나 이 정화에 의해 희생된 측에서는 ‘법난’으로 말하고 있고 결과적으로 종단 주도권의 쟁탈과 그에서 비롯된 사찰의 점거 위주로 흘렀기에 ‘분규’로 지칭하기도 한다. 정화는 1954년에 시작되어 1970년 대처측의 태고종 등록이 완료된 시점까지 16년간 불교계를 지배하였던 중심 문제였다. 따라서 그 개요, 과정, 성격 등은 매우 복잡할 뿐만 아니라 파장이 다양하였기에 그 이해의 줄기를 잡는 것도 단순치 않다.

여기에서는 간략한 경과와 그 성격만을 요약하겠다. 불교정화는 1954년 5월 20일 이승만의 불교정화 유시로부터 가시화되었다. 유시는 곧 대처승의 축출을 의미하였다. 이승만의 유시에 자극받은 비구측 승려는 그 직후 수좌 모임을 갖고 1954년 8월 24∼25일 선학원에서 전국비구승대표자대회를 개최하여, 불교정화 방침을 결정하였다. 이후 수좌들은 수차례의 승려대회를 갖고 비구 중심의 교단을 건설하기 위한 노력을 다하였다.

그 결과 일단 1955년 8월 12일 전국승려대회를 통하여 종헌을 공포하면서 종정·총무원장 등 교단 간부들도 구성하였다. 그러나 비구측의 움직임은 기존 교단을 구성하였던 대처측의 반발로 인해 갖은 대립과 갈등을 노정하였다. 요컨대 대처측은 공권력이 후원·개입하였던 정화를 결사 반대하였다.

때문에 정화는 정상적으로 이행되지 못하였다. 문제를 더욱 혼란케 한 것은 비구측을 후원하였던 이승만이 4·19혁명으로 인해 퇴진한 것이었다. 이에 그간 공권력의 배척으로 밀려났던 대처측의 종단 복귀 노력이 일시적으로 거셌다. 그러나 곧 이어진 5·16쿠데타로 인해 비구·대처 양측의 대립은 또 다시 원점에서 시작되었다. 5·16을 주도한 박정희는 불교의 분규를 해결하겠다는 강한 의지를 갖고 불교 내부의 자율 해결을 요청하였다.

그러나 불교계의 자율적인 성과가 부재한 가운데 정부의 개입과 주도로 1962년 4월 비구·대처가 인정한 통합종단이 출범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통합종단의 종회의원 비율에 대한 불만으로 대처측의 퇴진과 반발이 나타났다. 이후 대처측은 속세의 법을 활용한 법적 투쟁을 치열하게 전개하였으나, 1969년 10월 23일 대법원은 대처측이 제소한 ‘종헌결의 및 종정추대 무효확인’의 소송을 이유 없다고 기각하였다.

이는 법적으로 대처측이 완전 패소하였음을 말한다. 그 직후 대처측은 독자 노선 즉 분종의 길로 매진하여 1970년 5월 태고종으로 정부에 정식 등록하였던 것이다. 이러한 과정을 거쳐 비구와 대처 양측은 조계종과 태고종으로 이원화되었다. 16여 년의 갈등과 대립, 수많은 송사와 사찰 쟁탈전 등에 대하여 양측은 그 명분을 불교사상에서 근거를 찾았다. 그러나 실상은 분규라고밖에 할 수 없는 측면이 적지 않다.

그것은 다음과 같이 대별하여 살필 수 있다. 정화의 명분에서 균형과 타당성 상실, 공권력의 요청과 개입으로 인한 자주성 박탈, 정화 추진 방법에서 반불교적인 재판과 폭력행사 난무, 성직자인 승려의 자격이 없는 인물들의 정화 일선에의 투입, 보편적인 상식을 벗어난 가치관과 행동 자행 등이었다. 그리하여 그 결과는 기존 종단과 사찰 운영의 주도권을 누가 갖느냐로 판가름이 났다.

물론 비구·대처측이 끝까지 논란을 벌린 문제는 승려자격 문제와 기존 대처승을 어떻게 수용·인정하는가이었다. 결국 비구측의 논리를 정부가 동의한 방향으로 결말이 났다. 그런데 이후 비구측의 행보와 이면을 보면 결코 그 기준을 이행하지 않았다. 또한 비구측을 인정한 정부도 대처측의 입장을 수용하여 태고종 출범을 인정하였기에 결국은 자가당착에 빠지고 말았다.

이 같은 제반 사정을 모두 고려하면 불교‘정화’에서 실질적으로 남는 것은 교단 주도권 쟁탈뿐이라고 할 수 있다. 물론 정화에서 내걸었던 승려의 결혼에서 야기된 계율의 적용과 한국불교 전통의 중심과 실체를 찾으려는 의식에는 의의가 있었다. 그러나 그 의의는 정화의 방법과 부정적인 결과에 완전히 가려지고 말았다. 정화는 얻은 것이 하나 둘이라면 잃은 것은 셀 수 없을 정도였고 후유증이 70∼90년대까지 지속되었다. 불교정화의 모순은 바로 여기에 있으며, 정화가 정화로 인정받지 못하고 분규로 전락된 원인도 여기에 있다.

6. 비상종단의 한계(1980년대)

비상종단은 1983년 9월 15일 종단 운영 비상조치의 단행부터 1984년 8월 1일 해인사 전국승려대표자대회에서 비상종단 해체 결의시까지의 종단을 지칭한다.

약 1년여 동안 존재하였던 비상종단은 1954~70년의 불교계 분규(정화)와 1970년대의 조계종 분규에 나타난 제반 모순을 척결하기 위한 구도에서 탄생하였다.

30여년 간 불교계 내외에서 노정된 모순과 부패는 실로 간단치 않았다. 이는 수행풍토의 파탄, 부적격자의 불교계 유입, 사찰재산 망실, 수많은 재판, 문중·문도간의 이합집산, 10·27 법난, 종정·총무원장 중심제의 논란, 불교현대화의 부진, 불교의 위상 추락 등이었다.

이 같은 현실로 인해 불교계는 방향 감각을 상실하고 불교의 존재 당위성마저도 의심케 되었다. 이를 극복하려는 구도에서 가시화된 것이 바로 비상종단이었다. 따라서 비상종단의 과제는 엄청난 것이었다. 비상종단의 등장은 우연한 계기로 나타났거니와 그 단초는 1983년 8월 6일 발생한 신흥사 승려 살인 사건이었다. 그러나 그 이면에는 불교 개혁을 추구하려는 불교계 내부의 자생적인 움직임이 움트고 있었다.

그것은 우선 1975년부터 가시화되었던 재가불자들의 민중불교 운동을 들 수 있다. 1975년 4∼5월경 고은·여익구·전재성·최연 등의 민중불교회의 연구 모임, 1976년 여름의 대불련 대회에서 전재성의 민중불교론 발표, 1980년의 여익구·윤재승·홍사성·성문·원혜·도수 등의 민중불교 공부 모임, 1981년의 법우·최연 등의 사원화운동은 당시 사회의 민주화운동에 계발되면서 불교계의 변화를 모색하였던 조류였다.

또한 1981년 7월 중앙승가대에서 개최된 전국청년승가육화대회에서도 불교발전책을 모색하였다. 1983년 7월 17일 범어사에서 개최된 전국청년불교도연합대회에서는 불교의 개혁과 민중불교의 실현을 논의하였다. 특히 승가대와 범어사의 대회는 참가자가 3천여 명이라는 것, 그리고 재가와 승가가 불교 개혁을 위한 공동노선에서 결합하여 대회를 치러냈다는 측면에서 큰 의미가 있었다.

이러한 광범위한 불교 개혁의 목소리가 성장하고 있던 차에 신흥사 사건이 일어났다. 이 사건은 불교계 내외에 큰 충격을 불러일으켰으며, 불교 개혁이 없이는 안 되겠다는 자성과 비판의 소리가 드높았다. 이에 당시 종단 집행부도 종단사태 수습백서를 발표하는 등 그 대책 마련에 부심하였다.

그러나 봇물처럼 터져 나오는 비판과 개혁의 흐름을 막을 수는 없었다. 마침내 그해 8월 27일 원로회의에서 종단 비상사태를 선언하고 9월 5일 조계사에서는 전국승려대회가 개최되었다. 그후 종단 집행부의 퇴진 결정, 종권의 원로회의로의 이관, 종단운영비상조치법 통과, 비상종단운영회의 발족 등이 불과 20여 일 만에 처리되었다.

비상종단 운영회의는 입법·행정·사법의 권한을 행사하는 초법적인 기관으로 종단의 정화와 개혁 작업을 진두 지휘하는 권한을 갖었다. 개혁작업이 완료된 후는 정상적인 종단체제에 그 권한을 넘기는 한시적인 기구였다. 비상종단 운영회의는 불교 개혁 작업에 박차를 가하여 1984년 7월 7일 개혁의 열망을 담은 종헌의 의결 통과, 14일에는 종헌을 선포하였다.

그 종헌의 주요 내용은 승려의 자질 향상, 승단질서의 회복, 재산관리의 합리화, 종단분규 종식, 포교의 활성화, 신도조직 및 조직관리에 유의한 것 등이었다. 당시 종헌 작업을 주도한 승려들은 이 종헌이 교육종단, 포교종단, 분쟁없는 종단을 만들라는 이성철 종정의 교시를 수용하였다고 언급하였다.

그러나 이 종헌에 대하여 당시 이성철 종정은 수용하기를 거부하고 종정의 사퇴를 발표하였다. 여기에서 비상종단의 개혁 작업은 암초를 만나고 그간 비상종단 작업에 불만을 갖고 있던 본사주지, 이전 집행부, 중진승려 등은 1984년 8월 1일 해인사에서 전국승려대표자대회를 개최하여 비상종단이 주도한 종헌의 부정과 비상종단의 해체를 통한 새로운 집행부를 결성시킴과 동시에 조계사에 진입하였다.

이로써 비상종단이 추구한 종단개혁은 일시에 물거품이 되었다. 그러면 왜 이 같은 현실로 귀결된 것일까? 그 원인은 다음과 같이 대별하여 이해할 수 있다.

첫째, 신흥사 사건이 일어남과 동시에 불교 개혁에 대한 주장은 많았지만 그를 이행할 조직체로서 등장한 것이 범어사에서 결성된 청년불교도연합회였다.그러나 그 구성원인 청년 승려들이 비상종단의 운영과 개혁작업을 주도함으로써 개혁 지지 기반이 축소되었다.

둘째, 갑자기 돌출한 비상사태로 소장 승려가 전면에 등장한 결과 청년불교도연합회 소속의 재가불자, 여타 신도 등의 재가의 지원과 외호가 미약하였다.

셋째, 종헌 제정시 종정이 추천한 7인제도위원회라는 돌발적인 변수에 대한 대처가 미흡하였다. 종정과 여타 승려들의 주장을 그 7인제도위원회를 통하여 여과하지 못한 것이다.

넷째, 포교를 전담하는 재가 교역자(전법사, 전교)의 신설에 대한 몰이해가 승려의 위기 의식을 촉발시켰다. 재가 교역자는 당초에는 4부대중에서 6부대중으로 교단구도를 전환시키는 구도에서 나온 것이기에 이에 대한 의아심, 홍보 부족, 승려의 기득권 유지가 혼재되었다.

따라서 이 사항은 ‘비구승의 대처화’로 회자되면서 교단 질서를 뒤흔드는 문제로 인식하였지만 그를 비상종단에서 적절히 대응하지 못하였다. 종정이 주장한 비상대권의 포함 문제도 역시 그러하였다. 요컨대 비상종단의 실패는 개혁의 프로그램 부재에서 비롯된 성급한 개혁 작업과 재가 교역자의 제도화에 따른 승려층의 기득권 유지라는 암초로 좌초되었다고 할 수 있다. 또한 거기에는 비상종단을 주도한 소장 승려들에 대한 다수 승려층의 암묵적인 반대가 적지않게 작용하였다.

7. 개혁종단의 명암(1990년대)

1984년 8월, 비상종단의 중도 퇴진 후 종단은 외견상으로는 안정을 취하는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지속적인 개혁 부재하의 문중과 문도의 이익을 앞세운 종단의 행태는 교단정상화를 가로막았다.

종정 추대를 둘러싸고 전개된 추태와 총무원장 장기 집권의 그늘에 나타난 수많은 부패는 상호 응집하였으며 불교계의 모순은 극에 달하였다. 더욱이 권력과 야합한 행태는 그 모순을 심화시키기에 충분하였다. 이러한 배경하에 등장한 서의현 총무원장의 3선 연임 강행은 당시 제반 모순이 일거에 노출된 것이었다.

1994년 초의 범승가종단개혁추진위원회의 발족, 구종법회 및 단식, 공권력 개입, 승려대회 개최, 개혁회의 발족 등이 불과 1달여 만에 완료되었다. 그리고 8개월 간의 개혁회의는 정법종단의 구현, 종단운영의 민주화, 청정교단의 실현, 불교의 사회적 역할 증대라는 5대지표를 내세웠다.

이 지표하에 개혁회의는 종헌·종법의 제·개정을 완료한 후 1994년 11월 25일 새롭게 출발한 개혁종단에게 개혁의 임무를 넘겼다. 당시 개혁회의의 작업은 그간의 모순을 제거하고 그 성과를 종헌과 종법에 담는 일을 하였다. 그 주요 내용은 입법·사법·행정의 독립으로 상호 견제와 균형, 종단 재정의 공개, 교육원과 포교원의 별원을 통한 교육·포교의 강화 등이었다. 이는 곧 종단의 안정과 민주적 운영으로 요약된다.

사찰운영위원회, 교구종회, 산중총회의 활성화도 그 구도에서 나온 것이다. 개혁회의에 이어 등장한 개혁종단은 개혁회의에서 마련한 개혁의 토대하에서 종단안정과 지속적인 개혁을 추진하려고 안간힘을 다하였다. 그 결과 종단 각 분야에서 적지않은 개혁이 있었다. 그 중 승려교육 체계화 시도는 의미가 깊은 것이었다.

그런데 1998년 9월경부터 종단은 송월주 총무원장 3선 문제로 내분에 휩싸이며 또 다시 종권 분란을 겪게 되었다. 이에 종단은 기존 집행부와 3선저지연대회의로 나뉘어지며 끝내는 연대회의측에 종정이 가담하면서 부끄러운 분규를 연출하고 말았다. 그 분규는 총무원 청사 점거와 승려대회로 지속되면서 마침내는 그 계기를 제2의 정화로 삼겠다는 정화회의와 종헌·종법을 수호하겠다는 집행부·종회의 치열한 대결로 지속되었다.

불교계 내외에 큰 충격을 주면서 불교의 위상을 땅에 떨어뜨린 분규는 속세의 법에 의하여 일단락되었다. 불교계 내외의 큰 성원을 받으며 출범한 개혁종단이 이처럼 그 내부의 모순으로 인하여 시련을 겪은 원인은 무엇인가?

첫째, 불교의 자주화의 여망으로 개혁은 시작되었지만 결과적으로 제도개혁에 안주한 것이다. 변화된 제도를 잘 운영만 하면 된다는 의식의 축소와 개혁이념의 상실로 나갔다는 것이다.

둘째, 제도 개혁과 종단 안정에 유의하였으나 불교 자주화라는 4부대중이 공감하는 개혁의 실체가 미흡하였다. 이는 개혁종단의 당위성 상실을 말한다.

셋째, 94년 종단개혁의 성사는 재가의 전폭적인 지원하에 가능한 것이었다. 그러나 개혁의 내용에서는 재가자들의 개혁의지 혹은 의견을 종단에 반영시킬 제도적 장치가 전무하였다. 예컨대 각 사찰에 대중공사의 정신에 입각한 사찰운영위원회를 두도록 하였으나 유명무실하였다.

넷째, 불교와 종단의 개혁을 뒤받침해줄 의식의 변화가 부재하였다. 그중 승려의 반불교적인 행태는 가장 심각한 것이었다. 성직자라고 볼 수 없는 행태의 지속은 교단개혁을 명리 추구의 방편으로만 보았다.

다섯째, 개혁의 추이와 결과를 감독할 조직과 체제가 부재하였다. 종단개혁을 가동시킨 범종추는 해체되었고 개혁종단을 감독할 종회는 애초부터 여력이 없었으며, 98년 분규시에는 그를 통제하거나 중재할 장치가 전혀 없었다. 불교계 구성원 모두가 어느 일방에 기울어져 있었기에 속세의 법에 의해서 마무리가 될 수밖에 없었다.

여섯째, 개혁 주도 세력의 분열이 있었다. 개혁의 이념도 애매한 상태에서 개혁 주체의 분열은 치명타였다. 심지어 98년 분규에는 기존 문중과 문도의 구도에서 한발 더 나아가 사형사제간, 개혁의 동료 사이에도 분열이 있었는바 이는 명리에 목숨을 건 불나비와 같은 행태였다.

요컨대 개혁종단의 명암은 극명하였는데, 이는 불교의 개혁이 지난함을 상징한 것이었다. 이 사태는 21세기 진입을 눈앞에 둔 시점에 대두되어 더욱 씁씁한 뒤맛을 남겼다. 그리고 불교계의 정체성 점검 작업이 시급함을 알려 주었다. <끝>


김광식
건국대 사학과 및 동 대학원 졸업.문학박사. 현재 대각사상 연구원 연구부장. 저서로 <고려 무인정권과 붉교ㅖ><한국 근대불교사 연구><한국 근대 불교의 현실인식>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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