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색과 성찰

―고광영*을 기리며 
* 불교시대사 대표와 《불교평론》 편집장을 지냈으며, 올봄 타계했다. 가슴으로 교유한 필자의 선지식이다.

 

밥을 먹지 못한 때가 있었다. 몸이 아니라 마음이 지독하게 아파서 밥 한술 뜨지 못했다. 지난해 이루어진 실직은 가장의 무능력을 말해주고 있었다. 살아 있는 것이 창피하다고 여겨졌고 자괴감은 나날이 커 갔다. 부처님 말씀이란 전혀 가르침이나 위로 따위가 되지 않았다. 스스로 나를 가두기 시작했다. 바깥세상으로부터의 격리는 내 ‘못남’을 감추는 수단이었다. 감추어진 그곳은 아무도 찾지 않는 외딴 ‘섬’이 되었다. 그런데 가끔 ‘섬’을 두드리는 도반이 있었다. 나 역시 그의 두드림엔 빗장을 풀었다.

 그가 ‘섬’을 방문하면 위로가 되었다. 그러나 이마저 과분했던 탓일까. 금년 들어 ‘섬’을 잇는 가교라 할 통신수단을 감추었다. 그리고 맞이한 게 그의 비보(悲報)다. 환하게 웃고 있는 그의 영정 앞에서 그가 언젠가 ‘섬’을 뚫고 들어와 내뱉은 말을 다시 떠올려야 했다.

“우리 밥 잘 먹자.”

그나 나나 술로 밥을 대신 했었다. ‘밥 잘 먹자’는 그의 말은 우리 사이 여러 의미를 함축하고 있었다. 난 지금도 그가 그렇게 말한 의미를 이 공안에서 찾는다. 

금우 화상은 매일 점심때만 되면 스스로 밥통을 들고 승당 앞에서 춤을 추며 만족스럽다는 듯이 껄껄 크게 웃고는 “자, 보살들아! 와서 밥을 먹게나.” 했다. 훗날 한 중이 장경 화상에게 금우 화상이 이렇게 한 뜻이 무엇이냐고 물었다. 장경 화상이 “밥 먹을 때 고맙다고 하는 것과 똑같은 거야.”라고 대답했다.

《벽암록》 제74칙 ‘금우반통(金牛飯桶)’으로 소개되는 공안의 내용이다.

금우 화상은 매일매일 보살들과 동체(同體)를 이루었다. 그 동체를 이루는 배경에는 즐거움과 감사함이 함께 깃들어 있다. 즐거움과 감사함은 밥을 먹듯 일상의 연속이다. 밥 먹을 때만 기쁨을 느낀다면 동물 수준에 지나지 않는다. 늘 한결같아야 즐겁다. 금우 화상은 이런 마음으로 보살들과 날마다 하나 되어 놀 수 있었다. 가족의 관계도 마찬가지다. 밥을 먹는 매일매일의 관계는 가족이다. 일상이 밥으로 이루어진 것이 가족이라는 얘기다. 그래서 식구(食口)다. 

밥은 사상을 만든다. 긍정적 사고를 길러주느냐 아니면 부정적 시각을 키우느냐 하는 사상의 시발이 밥에서 나온다는 것이다. 밥이 세상을 따뜻하게 바라보는 힘을 주기도 하지만 반대로 밥이 충분하지 않으면 불만이 앞서고 세상을 보는 눈이 부정적으로 바뀌게 된다. 밥이 세상과 자연의 조화를 꾀하는 자양분이 되는 반면 밥의 공급이 원활치 못할 경우 ‘트러블 메이커’가 양산된다. 우리의 역사는 배가 고플 때 세상 악습을 조롱하고 패악한 무리를 경계하는 목소리가 높았다. 밥은 일상에 해당하나 이렇듯 사상을 형성하는 단초를 제공한다. 

밥은 또 사람을 만든다. 언제나 밥을 같이할 수 있는 사람은 가족이다. 친구다. 애인이다. 나아가 동지다. 희로애락을 나눌 수 있는 사람이 식탁을 같이한다. 그러므로 밥은 세상과 동화할 수 있는 힘을 준다. 세상과의 동화(同化)는 어떠한 목적을 향한 견인(牽引)으로 나아간다. 함께 밥을 먹을 수 있게 된 데 대해 좋아하지 않고 감사하는 마음이 없으면 동화는 이루어질 수 없다.

‘스님이 싫으면 스님이 입는 가사도 싫어진다’는 말이 있다. 즉 동화되지 않으면 동화되지 않는 그것과 그것 주변의 모든 것이 내게서 멀어진다는 의미다.

도반의 죽음은 나의 ‘섬’을 해체했다. 그는 나에게 새삼스레 밥에 대한 중요성을 깨우쳐 주고 갔다. 언제 봐도 지겹지 않은 사람. 그는 밥과 같은 사람이다. 

그와 만나게 된 것은 특별한 계기가 있어서는 아니었다. 저잣거리에서 술 한잔에 호기를 부리던 나로선 선비 기질이 다분한 그가 처음엔 싫었다. 불교계에서 ‘종이 밥’ 먹는 것으로 직업을 삼았던 우리는 우연이든 아니든 매일 마주쳤다. 그리곤 아주 가까운 친구로 와 있었다. 철학을 전공한 친구가 이를 ‘에펠탑 효과’ 또는 ‘단순노출 효과’라고 설명했다. 

프랑스 에펠탑. 프랑스는 1889년 3월 프랑스 대혁명 1백 주년을 맞아 기념 조형물로 에펠탑을 세우기로 하고 건립계획과 설계도를 발표했다. 설계도에 따르면 1만 5천여 개의 금속 조각과 250만 개의 나사못이 투입되어 7천 톤의 무게, 높이 320.75미터의 철골 구조물로 파리 한복판에 세워진다. 이 발표 즉시 프랑스의 문인, 화가, 조각가들은 일제히 에펠탑이 천박하다며 반대운동에 돌입했다.

여기엔 수많은 시민들도 동참했다. 국민의 반발이 거세자 프랑스 정부는 20년 후에는 철거하는 것으로 약속하고 건립을 강행했다. 에펠탑이 세워진 후에도 유명인사들의 저항운동은 계속됐다. 시인 베를렌은 “흉측한 에펠탑이 보기 싫다.”는 이유로 파리 근처엔 얼씬도 하지 않았다.

소설가 모파상은 자신의 동상을 에펠탑을 보지 못하게 등을 돌려 세웠다.  20년 후 다시 철거 논의가 거세게 일었지만 탑 꼭대기에 설치된 전파 송출 장치 덕분에 살아남게 된다. 철거 논의는 갈수록 수그러들었다. 오히려 파리 시민은 에펠탑을 사랑하게 됐다. 그때 당시는 천박하고 흉물스럽게 여겨지던 에펠탑이 지금에 와서는 프랑스 국민과 파리 시민의 자랑이 된 것이다. 날마다 보면서 정이 드는 현상을 학자들은 ‘에펠탑 효과’ 또는 ‘단순 노출의 효과’라 표현한다고 했다. 

나와 비슷한 처지에서 가슴앓이도 했던 그였지만 이미 그의 인품은 세상을 넉넉히 포용하고 있었다. 그가 간 후 나는 그가 나의 에펠탑인 것을 알게 되었다. 만남의 깊이가 더할수록 그는 나의 선지식으로 자리 잡고 있었다. 그의 말마따나 난 맛있는 밥을 먹기 위해 ‘섬’을 해체하고 오늘도 사람 만나는 맹연습을 하고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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