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색과 성찰

이동식
KBS 정책기획본부장
중국의 동해바다, 곧 동중국해에 ‘신라초(新羅礁)’라는 암초가 하나 있다는 사실을 아는가? 지도를 들여다보면 양쯔강(揚子江)이 바다로 들어가는 곳에서 남쪽으로 조금만 내려오면 예로부터 유명한 무역항인 닝보(寧波)가 있고 그 동북쪽 바닷속에 주산군도(舟山群島)라고 부르는 섬들이 있다. 가장 큰 섬은 주산도(舟山島)이고, 그 동쪽에 보타도(普陀島)라는 그리 크지 않은 섬이 있다. 그런데 보통의 지도에는 나오지 않지만 그 섬 남쪽 바닷속에 있는 암초가 하나 있다. 주민들은 이 암초를 ‘신라초(新羅礁)’라고 부른다.

신라초가 있는 보타도는 중국불교의 4대 성지 중 하나다. 중국불교의 4대 성지라면 김지장으로 유명한 지장보살의 성지 구화산(九華山), 문수보살의 인연이 서린 산시성(山西省)의 오대산(五臺山), 보현보살의 성지인 쓰촨성(四川省) 아미산(峨嵋山)과 닝보의 관음성지인 보타낙가산을 꼽는다. 특히 보타도는 다른 세 곳이 산인 것과 달리 바다를 배경을 하고 있는 절경인 데다 관음보살의 연기설화가 더해져 많은 불자가 찾는 곳이다.

보타도의 관음 관음보살의 연기설화는 ‘불긍거관음원(不肯去觀音院)’이라는 절 이름에서 비롯된다. ‘불긍거(不肯去)’라는 말은 ‘가려고 하지 않는다’는 뜻. 즉 가려고 하지 않는 관음원이라는 것인데 이 이름에는 이상하게도 일본 스님의 일화가 전해지고 있다.

남송(南宋, 1127~1279) 때 저작된 《불조통기(佛祖統紀)》라는 책에는 이런 이야기가 있다. 혜악(惠萼, 慧鍔이라고도 함)이라는 일본 스님이 후량(後粱, 907∼923) 때인 서기 916년 산시성 오대산에서 본 관음상을 일본으로 가지고 가려고 배를 타고 이 바다를 지나려고 했다. 그런데 도대체 배가 움직이지 않더라는 것이다. 그는 이 관음상이 중국 동해와의 인연이 끝나지 않은 때문이라는 생각이 들어 배에서 내려 이 섬에 올라가 한 절에서 봉안의식을 거행했다. 그렇게 하자 비로소 배가 움직였다. 이런 설화를 바탕으로 보타도는 현재까지 일본인들에게 인연이 있는 관음보살의 성지로 알려져 있다. 해마다 수많은 일본인 관광객들이 이곳을 찾는다. 자신들이 중국불교의 4대 성지의 하나를 만들었다는 자부심을 느끼면서.

그런데 한 가지 이상한 점이 있다. 배가 걸려서 가지 못하게 된 암초를 현지에서는 ‘신라초’라고 부른다는 사실이다. 일본의 승려가 관음상을 가지고 가려던 설화가 있다고 하는 데에 왜 암초는 신라초로 부르는가? 전후 사정을 살펴보면 거기에는 그럴 만한 사연이 있다. 사실은 관음보살을 봉안하려고 했던 것은 일본 스님이 아니라 신라의 상인이기 때문이다.

불긍거관음원이 일본 승려와 인연이 있다고 기록된 것은 앞에서 본대로 《불조통기》라는 책이다. 그런데 그보다 140여 년 전인 1124년에 나온 서긍(徐兢)의 《고려도경(高麗圖經)》에는 다른 사실을 전하고 있다. 이 책의 관음사 관련 항목은 다음과 같다.

“보타도 돌다리에 오르면 깊은 산록에 소량(蕭梁) 때 세운 보타원전에 영감스런 관음상이 있다. 옛날 신라 상인이 오대산에서 불상을 새겨 가지고 와서 귀국하려 하자 바다에 암초가 나타나서 갈 수가 없었다. 이에 불상을 암초에 올려놓고 승려 종악이 보타원전에 봉안한 후에 선박의 왕래가 가능해졌다. 복을 빌면 감응이 없지 않다.”

즉 오대산에서 관음상을 가지고 온 스님은 일본의 혜악이 아니라 신라상인이라는 것이다. 서긍의 《고려도경》은 《불조통기》보다 연대가 훨씬 앞선다. 또 후대의 자료인 1739년에 간행된 보타도에 관한 가장 상세한 기행문인 허염(許琰)의 《보타기승(普陀紀勝)》에는 “신라초 서남쪽 바다인 석우항(石牛港)은 일본 승려 혜악이 배를 잡고 염불하던 곳”이라고만 했을 뿐, 혜악이 관음상을 가지고 왔다는 사실이 기록돼 있지 않다.

이 자료를 종합하면 결론은 이렇다. 보타도 관음설화는 일본 승려 혜악에 의해 생겨난 것이 아니라 사실은 신라 상인이 불상을 본국에 봉안하려고 보타도를 지나다가 신라초 근처에서 바로 관음보살의 이적을 경험했다는 것이다.

보타도가 우리에게 중요한 의미를 갖는 것은 역사적 신앙적으로 몇 가지 반전의 자료를 제공하기 때문이다. 우리나라의 관음신앙 성지로 일컬어지는 양양 낙산사는 보타도와 매우 비슷한 구조로 이루어져 있다. 낙산사는 의상대사가 낙산 동쪽의 바닷가 굴 속에서 관음보살의 진신을 보고 지었다는 절이다. 의상대사가 관음보살을 만난 관음굴은 지금의 홍련암이다. 굴 속으로 바닷물이 파도와 함께 들어왔다 나갔다 하며 신비스런 분위기를 연출한다. 이는 보타도의 불긍거관음원 옆에 있는 조음동(潮音洞)과 너무 흡사하다. 낙산사의 관음굴과 보타산의 조음동은 밀려오고 밀려가는 바닷물 소리를 들으면서 관음보살을 만나는 곳이다. 낙산에는 의상대라는 정자가 있듯이, 보타산에는 담담정(澹澹亭)이란 정자가 서 있는 것도 같다. 그 두 곳은 관음신앙을 함께 갖고 있는 형제인 것이다.

의상대사의 생존 시기는 625년에서 702년이다. 의상대사가 관음보살을 친견한 것은 7세기라고 할 수 있고, 중국 보타도에서 관음보살의 설화가 생긴 것은 10세기 초다. 그런데 10세기라고 하면 장보고(張保皐, ?~846)가 동중국해를 지배하던 때에서 반세기 정도 지났을 때이다. 9세기 당시 신라의 무역선들이 동아시아 곳곳을 연결하고 있었고, 일본의 승려인 엔닌(圓仁, 794~ 864)도 장보고의 배를 타고 중국에 갔다가 일본으로 돌아간 뒤 이 사실을 《입당구법순례행기(入唐求法巡禮行記)》라는 기행문에 남긴다. 당시 한국과 일본으로 떠나는 무역선들은 항해의 안전을 기원하기 위해 이 보타도를 찾았다. 이 무렵 동아시아에서 가장 큰 무역을 하던 상인으로는 장우신(張友信)이란 재당(在唐)의 신라인이 있었다. 이 사실은 김성호(金聖昊) 씨가 쓴 《중국 진출 백제인의 해상활동 천오백 년》 1권 45~87쪽에 잘 나타나 있다. 또 중국의 관음신앙을 연구했던 일본 교토대학의 사에키(佐伯富) 교수도 송(宋)나라 때 장방기(張邦基)라는 사람이 편찬한 《흑장만록(黑莊漫錄)》이란 글을 인용해서 보타도에 있는 절과 종 등이 모두 신라 상인들이 바친 것이라고 지적하고 있다(《塚本博士頌壽記念佛敎史學論集》 1961, 372~389쪽). 이런 정황으로 보면 이 관음상을 가져가려 한 것은 신라인 장우신일 가능성이 높다. 또 불긍거관음원도 장우신이 만들었을 가능성이 높다.

그러나 중국 현지의 관광 안내자료들은 한결같이 보타도는 일본의 승려 혜악으로 해서 이런 인연이 이뤄졌다고 기재하고 있다. 중국의 CCTV(중국중앙텔레비전)도 2006년 4월 4일 방송된 현지르포 프로그램에서 이런 인연을 전하고 있다. 이와 함께 보타도 옆 연화도라는 작은 섬에서는 주인민(朱仁民)이라는 한 중국인이 섬 전체를 조각공원으로 만들면서 혜악 스님의 상을 만들어 전시할 것이라고 전한 바 있다.(이미 공원이 만들어졌는지 모르겠다.)

이런 문제의 해결을 위해서는 우리나라 학계와 불교계가 적극적으로 나서서 왜곡을 바로잡을 필요가 있다. 이를 통해 우리는 동아시아 바다를 주름잡았던 9세기 신라인들의 모습을 온전히 되찾을 수 있기 때문이다. 아울러 잃어버린 우리나라 불교의 신앙과 역사도 되찾게 될 것이다. ■

저작권자 © 불교평론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