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집 | 한국인에게 불교는 무엇인가

1. 생과 사에 대한 불교적 인식

구미래
동국대학교 외래교수
인간은 죽음이라는 절대적이고 불가항력인 전제 앞에서 끝을 절감하기도 하고 죽음을 디딤돌로 삼아 저편에서 전개될 새로운 세계를 내다보기도 한다. 그러나 내세에 대한 합리적인 인식 이전에, 존재의 영속성에 대한 추구는 인간 본연의 종교적 심성이라 할 수 있다. 이에 생명의 유한함과 소멸에 대한 불안을 해소하고, 죽음이란 끝이 아니라 또 다른 삶의 열림이라는 가르침을 제시하는 것은 종교의 궁극적 목적이 되고 있다.

특히 불교는 오랜 세월 동안 우리 문화의 기층을 이루면서 한국인의 내세관과 죽음 인식에 커다란 영향을 미쳐왔다. 불교의 생사관에 따르면 인간은 깨달음을 얻어 윤회에서 벗어나지 않는 한 끊임없이 생과 사를 되풀이하며, 일회의 삶은 생유·본유·사유·중유라는 4유로 이루어져 있다고 본다. 곧 모태에 의탁하여 태어나는 순간을 생유(生有)라 하고 출생 후 죽음에 이르기 전까지 생전의 존재를 본유(本有)라 하며, 죽는 순간을 사유(死有), 죽어서 다시 태어날 때까지의 존재를 중유(中有)라 하는 것이다. 따라서 죽은 즉시 다음 생을 받는 것이 아니라 이승도 저승도 아닌 곳에서 얼마 동안 중유의 존재로 머문 뒤 새로운 존재로 태어나게 된다고 본다.

이처럼 끊임없이 나고 죽기를 거듭하는 불교적 생사관의 핵심은 사후세계가 전생에 지은 업에 따라 단계적으로 분화되어 있다는 사실이다. 지옥·아귀·축생·아수라·인간·천상 등 육도(六道)의 세계로 펼쳐져 있는 내세의 모습은, 죽으면 누구나 가게 되는 저승이 아니라 최악의 지옥에서 최선의 천상에 이르기까지 생전의 삶과 직결되어 있는 것이다. 사후의 문제를 다룬 시왕도·지장도 등의 불화를 보면 망자의 업을 심판하는 장면과 함께 참혹한 벌을 받는 지옥의 모습이 담겨 있으며, 아귀 또한 굶주리고 목이 마른 상태이지만 목구멍이 바늘처럼 좁아 음식을 삼킬 수 없고 입에서 불이 뿜어져 나와 물을 마실 수 없어 고통받는 존재로 묘사되고 있다. 도상에서 설명하는 이러한 내세의 모습들은 자업자득의 인과법칙을 일깨우면서 생전의 삶을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에 대한 문제를 던져주고 있는 것이다.

이와 같이 지은 대로 받는 ‘업과 윤회의 관계’는 윤회의 주체에 좌우되는 자력의 인과관계라 할 수 있다. 그런데 이전 존재의 죽음(사유)이 다음 존재의 탄생(생유)으로 곧장 이어지는 것이 아니라, 얼마 동안 중유의 존재로 머무는 중간 단계를 거치게 됨으로써 윤회의 양상은 보다 다각도로 진행되기에 이른다. 곧 생전에 극히 선하거나 악한[極惡極善] 업을 지은 이는 곧바로 다음 생을 받게 되지만, 대부분의 사람은 중유기(中有期)에 다음 생의 모습이 결정된다고 본다. 따라서 중유의 단계는 생전의 업을 심판받는 기간인 동시에 타력으로 망자의 구제를 도모할 수 있는 시간으로 수용되었던 것이다. 이에 따라 유족이 망자를 위해 행하는 지극한 공덕으로 부처님의 가피를 받아 망자의 내세에 큰 영향을 미칠 수 있다고 여기게 되었다. 49일간의 중유기 동안 망자를 보다 좋은 곳으로 보낼 수 있도록 기원하는 사십구재가 불교상례의 의미로 자리한 것은 이러한 관념적 기반에 따른 것이라 하겠다.

지금까지 살펴본 것처럼 불교의 순환적 생사관에 따르면, 내세의 모습을 좌우하는 것은 스스로 지은 업에 따라 결정되는 자력의 과보뿐만 아니라, 남은 자들이 중유의 기간에 망자를 위해 행하는 타력의 공덕이 함께 작용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런데 생사의 문제에 대한 불교의 근본 가르침은 민간에 회자되는 이러한 통상의 불교적 생사관과 많이 다르다는 사실이 남아 있다. 불교의 생사관이 대중에게 전달되는 방식은 두 가지 큰 흐름으로 구분되기 때문이다.

석가모니의 가르침에 입각한 근본불교에서는 불변하는 실체적 자아를 인정하지 않으며 따라서 윤회를 하는 주체로 불멸하는 영혼의 존재 역시 없다고 본다. 불교에서 보는 인간존재는 육체적 요소인 색(色)과, 정신적 요소인 수(受)·상(想)·행(行)·식(識)의 오온(五蘊)이 일시적으로 결합된 것이며, 수·상·행·식의 정신적 현상이나 그 작용은 영혼과 같은 존재에서 발생하는 것이 아니라 감각기관과 그것에 관계되는 대상의 만남에서 발생하는 일시적 현상이라는 것이다. 자아는 그것을 발생시키는 조건이 있을 때만 존재할 뿐 고정 불변하는 실체적 나는 없으며, 윤회가 이루어지는 현상 역시 인과관계에 따른 연기설로써 설명하고 있다.

이때 윤회의 주체는 업이며, 한 존재가 살아 있을 때 지은 업은 잠재적 에너지(業力) 상태로 그 존재 속에 축적되어 있다가 죽으면 그 업력이 작용하여 다음 존재를 만든다는 것이다. 곧 업은 윤회의 동력이므로, 윤회를 한다는 것은 곧 업이 있기 때문이라 본다. 석가모니는 모든 법이 인연으로 생겨나 실체가 없지만 사람들은 이에 집착하여 그릇된 견해를 일으키므로 ‘일체의 법이 무아(諸法無我)’임을 설하였다. 아울러 모든 번뇌는 고(苦)에서 비롯되고 이는 나에 대한 집착에서 생겨나는 것이기에 ‘나’는 실체가 없는 무상한 것이라는 불변의 진리를 깨닫도록 하는 데 목적을 두었다. 이러한 불교의 무아 이론은 다른 종교나 사상과 구별되는 독특한 교리로, 인도에서 통용되었던 일반의 윤회설과는 달리 영혼이라는 실체에 의해서가 아니라 오직 업에 의해서만 재생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실제 민간에 회자되는 불교 생사관에 따르면 ‘업’이 ‘영혼’으로 대체되어 있다. 윤회의 주체가 업이라는 사실은 무아윤회를 기반으로 하는 것이기에, 사후에도 생전과 동일한 정체성으로 존재한다는 일반적인 죽음인식과는 거리가 멀기 때문이다. 사후세계는 몸과 분리된 영혼을 통해 설명할 때 보편적 수용이 가능하므로 민간의 맥락에 적합한 방식으로 자리 잡아 온 셈이다. 따라서 사후에도 실체적 자아에 해당하는 영혼이 남아 윤회를 한다고 보며, 이러한 불변의 영적 존재를 인정함과 동시에 ‘업을 다스리는 심판자’가 등장하고 ‘타력으로 망자를 구제하는 의례’ 또한 발달하게 되었다. 이는 정토신앙·밀교 등이 혼합된 대승불교의 독특한 결실로, 자력수행만으로 이끌 수 없는 중생을 위한 방편적 가르침이라 할 수 있다. 

이처럼 죽음에 대한 불교의 관점은 근본불교와 방편불교의 이중적 구도 속에 놓여 있다. 이러한 두 가지 흐름은 석가모니가 스스로의 깨달음을 통해 설법한 근본불교는 자력수행의 인식론적 각성을 중시하는 것이었으나, 점차 믿음을 기반으로 하는 신앙적 측면으로 발전해 나간 데 따른 것이다. 그러나 두 가지 모두는 자기성찰의 삶을 가능하게 하고 종교적 심성을 가꾸어 나갈 수 있는 중요한 측면으로, 중생의 근기에 따라 다양한 접근방식을 택함으로써 궁극의 목표에 도달하기 위한 길을 여러 갈래로 열어놓은 것은 석가모니 당시의 가르침이기도 하였다. 특히 실존적 인식 못지않게 믿음을 통한 삶의 순화는 소중한 가치이며 영혼과 내세에 대한 추구는 보편적 심성을 담고 있어, 방편불교적 생사관은 민간의 심성에 보다 적합한 모습으로 수용되어 왔다.

2. 중유와 내세의 한국적 수용양상 

앞서 살펴본 바와 같이 불교적 내세관에 따르면 사람이 죽은 뒤에 전개되는 세계는 두 차원의 단계를 거치게 된다. 곧 중유의 존재로 머무는 첫 단계를 지난 다음 비로소 두 번째 단계인 새로운 생을 받게 되는데, 이때 ‘중유’와 ‘내세’는 모두 사후에 속하지만 큰 차이를 지니고 있다.

죽은 직후에 머무는 중유의 단계는 그곳에 머무는 존재양상에서부터 시공간의 개념에 이르기까지 누구에게나 평등하게 일원화되어 있다. 시간적으로 중유에 머무는 기간은 특별한 경우를 제외하면 누구에게나 49일로 설정되어 있으며, 공간적으로 중유에 머무는 곳은 이승도 저승도 아닌 중간지점에 해당한다. 아울러 이러한 시공간에 머무는 존재는 생전의 정체성을 그대로 지닌 영적 존재이고, 중유·중음(中陰)·중음신 등이라 불린다. 이후 중유의 단계를 지나면 새로운 내세를 받게 되는데, 이때의 내세는 개인의 생전 업에 따라 차별화되고 다원화된 모습을 지닌다는 것이다. 지옥ㆍ아귀ㆍ축생ㆍ아수라ㆍ인간ㆍ천상으로 구분된 육도는 존재양상 또는 세계의 변화가 전면적으로 이루어진 상태이기 때문이다([표 1] 참조).

[표 1] 불교에서 보는 사후의 두 단계중유 일원화·평등화 ➡ 내세
(육도) 다원화·차별화
 시공간, 존재양상   존재양상 또는 세계


이러한 불교의 ‘중유’와 ‘내세’에 대한 관점은, 무속을 중심으로 한 민간의 보편적 내세관과 동일한 기반을 지니고 있다. 민간에서도 사람이 죽으면 존재가 소멸되는 것이 아니라 이승을 떠난 영혼이 저승으로 가서 살게 된다는 보편적인 내세관을 지니고 있다. 또한 죽은 자는 곧장 저승으로 가는 것이 아니라 인간에게 영향력을 미칠 수 있는 ‘이승도 저승도 아닌 중간단계’에 머물게 되며, 이 시기에 망자의 문제를 해결해주어 무사히 저승으로 보내는 것이 산 자들이 해야 할 일이라 생각했던 것이다.

다만 기성종교인 불교의 내세관이 논리적 체계를 갖추고 있는 데 비해, 자생적인 민간신앙의 경우는 체계화되어 있지 못한 차이를 지닐 따름이다. 이처럼 보편적 인간심성에 기반을 둔 ‘중유’와 ‘내세’에 대한 불교의 관점은 민간에 널리 확산되어 있는데, 그 수용양상에서 몇 가지 흥미로운 시사점을 발견할 수 있다.

1) 중유, 죽음을 수용하는 완충의 단계

먼저 ‘이승과 저승의 중간 단계’에 대한 인식은 근래로 올수록 불교의 중유관념이 민간에 보다 적극적인 영향력을 미치며 전승되고 있다는 점이다. 전통적으로 사람이 죽어 머무는 ‘이승도 저승도 아닌 단계’에 대한 한국인의 인식은 다양한 함의를 지니고 있다. 죽은 영혼에 대해 ‘떠돈다(공간)’거나 ‘머문다(시간)’는 등의 시공간적 표현을 즐겨하듯이, 이 기간에 넋굿 등으로 이승을 떠나지 못한 망자의 문제와 원한을 씻어줌으로써 무사히 저승에 보내줄 수 있다고 보았던 것이다. 또한 내세를 인정하지 않는 유교에서도 장례를 치른 즉시 망자를 조상신으로 모시는 것이 아니라, 신주나 지방에 혼을 안착시키고 거상(居喪)의 기간을 보낸 다음 탈상을 하면서 비로소 망자는 후손들로부터 제사를 받는 조상신으로 좌정하게 된다.

이때 무속에서는 죽은 영혼이 이승에 머무는 기간을 명확하게 정해놓지 않고, ‘이승의 문제 때문에 저승에 가지 못할 것을 우려하여’ 넋굿을 행하기 때문에 굿의 선택에서부터 행하는 시기에 이르기까지 필요에 따라 조절되는 현실적 측면을 지니고 있다. 유교상례에서도 거상 기간이 만 2년→1년→100일로 점차 짧아지다가 근래에는 삼우제를 지냄으로써 탈상을 겸하거나 3일장으로 마감하는 등 탈상이라는 개념이 유명무실해져 가고 있다. 이처럼 망자가 저승으로 진입하기 위해 필요한 대기 시간이 산 자들의 편의에 따라 점차 짧아지거나 생략되면서 혼란을 주고 있는데, 불교에서는 중유관념으로써 이에 대한 확고한 답을 제시하고 있는 것이다.

사람이 죽은 뒤 49일이 지난 다음에 새로운 세계로 편입된다고 보는 불교의 중유관은 오늘날의 한국인들에게 커다란 영향력을 미치고 있다. 중유의 단계가 죽은 자에게는 저승으로 가기 위한 준비 기간이라면, 남은 자들에게는 죽음이 가져다준 충격과 슬픔을 정리할 수 있는 완충 기간에 해당한다. 죽음을 맞은 망자와 유족 모두는 보다 바람직하게 저승과 일상으로 돌아가기 위한 시간과 장치가 필요한 존재들이기 때문이다. 예전에는 장례를 치른 후에도 거상이라는 완충지대가 있었고, 넋굿을 통해 죽음이 가져다준 온갖 문제들을 풀어내는 기제가 존재하였다. 그러나 탈상 기간이 점차 축소되고 넋굿 역시 현실적 기반을 잃어가는 가운데, 현대인들은 이러한 완충장치를 거치지 않은 채 불안하고 아쉬운 마음으로 일상과 맞닥뜨리게 된 것이다.

이와 같은 상례지형의 변화 속에서, 중유 단계에 행하는 사십구재(四十九齋)는 체계적인 불교 내세관에 따라 망혼을 보다 좋은 곳으로 보내주기 위한 종교의례인 동시에, 죽음에서 비롯된 산 자들의 심리적·정서적 문제를 충족시키는 탈종교적 전통의례로 수용되고 있다. 의례를 통해 이승과 저승의 중간에 머물고 있는 망혼이 저승으로 편입되는 천도(薦度)의 과정과 의미를 구체적이고 명확하게 제시하는 가운데, 무속의 넋굿과 유교 탈상의례의 기능을 포괄적으로 담당해가고 있는 것이다.

2) 육도윤회의 현실적·이원적 수용

불교의 중유관념이 근래로 올수록 그 영향력이 커지고 있다면, ‘윤회’로 대변되는 불교 내세관이 한국인의 생사관에 미친 영향력은 보다 깊은 뿌리를 지녔다고 볼 수 있다. 그런데 전생의 업에 따라 윤회하되, 육도로 이루어진 내세의 모습은 민간정서에 보다 적합하게 재편된 형태로 수용되어 왔다. 무속을 기반으로 한 한국인의 전통적 내세관은 현세를 ‘이승’, 내세를 ‘저승’이라 보면서 천상·지상·지하 등과 같은 한계는 분명히 설정하지 않고 있다.

곧 저승은 그저 죽어서 가는 곳, 멀고 먼 저세상이라고만 생각하여 천상이나 지하의 수직관념으로 보지 않았으며, 사다리·밧줄·두레박 등 상승적 모티브가 아니라 짚신·가시문·다리·쪽배 등과 같이 수평적인 도보여행이나 뱃길여행의 끝자락에 놓여 있다. 이처럼 전통적 내세관은 내세를 현세와 유사한 방식으로 인식하여 인간세계의 연장선상에 있는 수평적ㆍ평면적이고 경험의 세계로 설정되어 있는 데 비해, 불교의 내세는 지옥·아귀·축생·아수라·인간·천상이라는 여섯 층위로 구성되어 있을 뿐만 아니라 ‘인간·축생’의 세계를 제외하면 대부분 현실과 무관한 관념적 세계에 해당한다.

이때 중요한 것은 육도윤회가 불교 내세관의 핵심을 이루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윤회’와 ‘육도’의 세계가 민간에 수용되는 방식은 또 다른 원리 속에서 움직이고 있다는 사실이다. 먼저, 윤회에 대한 한국인의 관념은 ‘인간계’나 ‘축생계’와 같이 현실 속에서 인식 가능한 존재를 염두에 두고 있다. 윤회를 한다면 몸을 바꾼 새로운 인간으로 태어난다고 보면서, 현세에 큰 고난이 닥치면 전생의 업에 따른 것이라 여기는 것이 일반적이다. 이에 더하여 개나 소 등으로 태어나는 민담이 널리 성행하고 있듯이 삶 속에서 익숙한 축생에 이르기까지 보다 확장된 윤회 개념을 지니기도 한다. 이처럼 인식 가능한 현실적 존재를 중심으로 윤회한다고 보는 것은, 저승을 이승의 모습과 유사하게 여기는 것처럼 보다 자연스럽고 보편적인 생각에 속한다.

뿐만 아니라 육도 가운데 대극을 이루는 ‘극락(천상계)’과 ‘지옥계’는 윤회와 별개의 이원적 구도로 수용된다는 점이다. 불교신자라 하더라도 이들이 받아들이는 극락과 지옥은 ‘선악에 따라 가게 되는 사후세계’의 개념일 뿐, 윤회하는 육도의 한 세계라는 인식은 희박하다. 곧 ‘지옥에 떨어지지 않고 보다 좋은 세계인 극락으로 가는 것’이 목적이듯이, 윤회사상을 따르면서도 내면적으로는 극락과 지옥을 윤회하는 하나의 세계가 아니라 단지 이원적 종교관념에 따라 수용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는 불교의 내세관이 민간의 심성에 보다 적합한 방식으로 수용되고 있다는 점을 잘 보여주고 있다. 

한편, 이승과 저승으로 구분된 무속의 생사관 역시 불교의 영향을 받아 보다 다양한 저승의 모습과 존재양상을 드러내고 있다. 이에 대해 많은 학자들은 표면상 불교적 내세관과 혼합되어 있는 듯하나 실제 무속신화와 굿에서 보이는 무속의 내세관은 문제적 현실을 극복하여 영혼을 저승으로 인도하는 데 초점이 맞추어져 있을 뿐, 극락으로 상승시키기 위한 노력은 찾아보기 힘들다고 본다.

본래 무속에서 생각하는 내세는 먹을 것과 입을 것이 걱정 없고, 질병과 분쟁과 죽음이 없는 곳으로서 현세의 반대편에 있다고 믿는 사후의 세계이다. 이때의 사후세계는 극락과 유사하지만 심판 개념이 따르는 선과 악의 구도를 떠나 있어, 악업에 의해 가게 되는 지옥과 같은 세계가 본래부터 배제되어 있는 것이다. ‘영혼이 지닌 문제’ 역시 산 자들에게 영향을 미치는 것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어 모든 문제는 이승에서 해결될 수 있으며, 저승은 생전에 지은 문제와는 무관한 셈이다.

무속 내세관의 원형이 이렇다 하더라도 실제 넋굿의 현장에서 추구하는 저승은 ‘극락’, 지옥은 ‘벗어나야 할 세계’로 존재하고 있으며, 이때의 극락과 지옥은 영혼의 존재를 상정했을 때 필연적으로 설정 가능한 이원적 사고를 반영하고 있다는 점에서 불교적 내세관과 만나게 된다. 곧 인과응보는 보편타당한 도덕성으로, 사람들은 현실적 응보(應報)를 비켜간 악행에 대해 ‘하늘이 무섭다’는 표현을 하면서 시공을 초월한 차원의 징계를 자연스러운 것으로 받아들이고 있다.

뿐만 아니라 악행을 일삼던 이와 선행으로 살아온 이가 죽어서 동일한 저승에 간다는 설정은 민간의 심성과도 맞지 않는다. 따라서 자연적 원시종교의 형태를 지녔던 무속의 내세관 역시 인간사고의 개발과 더불어 발전할 수 있고, 더욱이 이를 체계화한 불교적 관념과 만났을 때 긴밀히 융합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곧 무속 내세관의 원형이 보다 자연의 형태로 존재하는 가운데, 불교의 영향을 받으면서 점차 인간본원적인 것을 중심으로 결합되어가는 내적 개연성을 살펴볼 수 있다.

특히 이러한 점은 불교신자들에게서도 일관되게 살펴볼 수 있다. 곧 불교신자라 할지라도 육도 가운데 최선과 최악의 존재인 극락·지옥을 중심으로 내세를 인식하고 있는데, 이는 종교적 인간이 지닐 수 있는 내세관의 전형적ㆍ본원적 모습을 반영하고 있기 때문이다. ‘극락과 지옥’의 이원관념과 ‘윤회하는 인간존재’에 대한 이러한 생각은 이미 불교의 영역을 넘어 한국인이 사후세계를 인식하는 광범위한 기반을 이루고 있는 듯하다. 민간에서 생각하는 ‘극락·지옥’과 ‘윤회하는 인간존재’가 서로 별개의 사유체계에 속하는 것이라 하더라도 이러한 복합성의 공존 속에서 움직이는 것이 보다 자연스러운  인간의 삶이기도 한 것이다.

3. 불교 죽음의례의 종교복합적 특성

내세에 대한 인식은 의례에서 가장 명료하게 드러난다. 죽음을 다루는 의례는 대부분 죽음이 단순한 ‘존재의 소멸’이 아니라는 사실을 공유하면서, 죽음을 극복하고 해석하기 위한 문화적 장치의 역할을 하게 된다. 따라서 종교의례가 아니더라도 일종의 종교적 관념과 형식 아래 의례가 치러지고, 문화권마다 그 형태는 다르더라도 온전한 저승으로의 편입이나 또 다른 탄생을 위한 통과의례로 작용한다는 의미는 유사하다. 불교에서도 임종의례에서부터 시다림, 다비(화장)에 이르기까지 체계적인 죽음의례가 마련되어 있으며, 그중에서도 불교의 내세관이 집약되어 있는 대표적인 죽음의례는 천도재(薦度齋)라 할 수 있다. 천도재는 삼보(三寶)의 보살핌 속에서 망자가 보다 좋은 곳으로 왕생하기를 기원하고, 법문을 들려주어 미혹함에서 벗어날 수 있도록 이끌어주는 의례이다. 천도재는 죽은 뒤 중유에 머무는 동안에 치르는 사십구재가 그 핵심에 놓여 있으나 사십구재를 치른 이후에도 동일한 망자를 대상으로 거듭 치를 수 있으며, 수륙재(水陸齋)와 같은 합동천도재도 보편화되어 있다.

그런데 근래에 이러한 천도재가 불교적 믿음과 무관하게 많은 한국인들이 선택하는 사후의례의 대안이 되고 있어 주목된다. 불과 20~30년 전까지만 해도 사후의례는 유교식 상·제례가 주축을 이루는 가운데 불교와 무속에서 각기 담당하는 영역이 비교적 뚜렷하였다. 그러나 앞서 살펴보았듯이 상례지형의 변화와 함께 점차 유교와 무속 고유의 의례 역할을 불교 천도재가 담당해가고 있는 것이다. 이와 같은 현상은 단지 유교와 무속 죽음의례의 약화에 따른 것만이 아니라, 천도재의 의례 자체에도 이러한 다종교적 전통요소들이 축적되어 있다는 점에서 시사점이 크다. 곧 천도재는 유교 상·제례의 핵심을 이루는 ‘효와 조상숭배 정신’, 무속의 넋굿과 밀접하게 결합된 ‘방편적 영혼관’을 지니고 있어, 이러한 관념적 기반을 통해 죽음과 관련된 한국인의 의례 욕구를 충족시키고 있는 것이다.

1) 유교 상·제례의 불교적 수용

백일 탈상은 부담스럽고 삼우제 탈상은 아쉬운 현대 한국인들에게 사후 49일 동안에 행하는 사십구재는 사찰에 의뢰하여 치를 수 있는 간편한 탈상의례로 적극 수용되고 있다. 아울러 사십구재는 망자를 보다 좋은 내세로 보내기 위한 종교적 배경을 지니고 있을 뿐만 아니라, 7일마다 일곱 번의 의례를 통해 완결됨으로써 49일의 전 기간을 의례적 상황으로 조성하는 데 적합한 구조를 갖추고 있다. 이는 사랑하는 가족을 잃고 쉽게 일상으로 돌아서기 힘든 유족들에게 심리적·정서적 완충장치로서 적합성을 띠고 있는 것이다. 또한 장례 이후에 다시 망자의 죽음을 공론화하는 의례를 치름으로써 공동체에서 상주(喪主)의 명분을 드러낼 수 있다는 점 역시 사십구재의 수용성을 높이는 요인으로 꼽을 수 있을 것이다.

서울·경기 지역 사찰을 대상으로 행한 사십구재 연구에 따르면, 무작위로 선정·조사한 12건의 사례 가운데 윗대에는 사십구재를 지낸 적이 없었던 경우가 7건을 차지하고 있어 사십구재의 탈상기능을 뚜렷이 살펴볼 수 있다. 12개 사례 모두는 사십구재로 탈상을 치른 경우였는데, 이는 얼마 전까지만 하더라도 불교신자들에게 사십구재와 탈상이 별개의 개념으로 수용되었던 점을 생각하면 커다란 변화이다. 불교신자라 하더라도 백일이나 소상·대상 등의 유교상례를 기본적으로 따르는 가운데 망자의 극락왕생을 위한 사십구재를 추가로 치러왔기 때문이다. 불교적 관점에서는 망혼의 중유기가 끝나는 사십구재가 곧 탈상이지만, 이와 무관하게 규범적 생활의례로 정착되었던 유교식 상례는 계속되었던 셈이다. 

상례만이 아니라 제례의 경우에도 불교의 역할이 점차 증가하고 있다. 사찰에서 지내는 제사는 독실한 불교신자이거나 아들·후손이 없는 경우가 주를 이루는 가운데, 아들·후손이 있더라도 간편하게 제사를 모시기 위해 의뢰하는 비율이 점차 증가하고 있는 것이다. 전통유교의 상·제례는 가정에서 담당해왔으나 삶의 환경이 달라진 현대인들에게 이러한 사후의례가 부담으로 작용하게 되면서, 불교신자가 아니더라도 불교식 사후의례인 천도재를 통해 전통적 의례욕구를 해결하는 경향이 점차 증가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처럼 불교신자가 아닌 이들이 서로 다른 이념에서 출발한 유교의례를 불교의례로 수용할 수 있는 가장 큰 까닭은, 법당의 영단 앞에서 제사와 유사한 의례를 치르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천도재에서는 관욕으로 생전의 업을 씻어 청정하게 된 망자와 함께 상단(上壇)으로 나아가 불보살을 향해 불공을 올리게 되며, 이후 중단(中壇)의 신중에게 가피를 기원한 다음 하단(下壇)의 영단으로 돌아와 망자의 영정과 위패를 모시고 시식(施食)을 올리게 된다. 이때의 시식은 민간의 제사를 그대로 옮겨놓은 모습으로 진행되고 있어, 천도재 속에 망자를 대상으로 한 제사가 하나의 재차(齋次)로 자리하고 있는 것이다.

나아가 사십구재로써 망자의 천도가 이루어진 이후에도 거듭 천도재를 올리는 것이 이상하지 않은 것은 민간에 ‘제사’라는 지속적인 의례가 이미 존재하고 있기 때문이다. 사십구재의 한 과정인 시식은 민간의 제사와 유사한 모습으로 진행되며, 이후에 계속되는 천도재 역시 시식을 포함하고 있는 것이다. 또한 후손들이 사찰에서 망자의 기제사를 지낼 때도 재(齋)로 수용될 뿐만 아니라, 의례의 의미 역시 ‘천도’라는 목적 속에서 진행되고 있다. 이처럼 천도재는 제사의 의미와 결합하여 탄생된 개념으로, 불교적 의미 속에 수용된 제사는 천도재와 동일한 목적과 형식으로 수렴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천도재가 불교의 ‘재’에 유교의 ‘제사’를 접목시킨 방식으로 의례를 치르고 있지만, 민간의 제사와는 다음과 같은 점에서 중요한 차이를 지닌다. 첫째, 불·법·승 삼보의 범주 속에서 의례를 행한다는 점이다. 불보살을 모신 법당에서(佛) 승려의 진행에 따라(僧) 경전을 염송하면서(法) 의식을 치르는 것은 삼보에 귀의하는 불자의 신행행위를 반영하는 것이며, 승려의 염송 내용이 곧 제사의 의미를 나타내는 텍스트의 역할을 하게 된다. 둘째, 망자를 보다 좋은 사후세계로 보내기 위한 천도의 의미를 지닌다는 점이다. 천도의 방식은 불보살의 가피를 기원함과 동시에, 망자에게 불법을 들려줌으로써 스스로 깨우침을 얻도록 하는 불교 특유의 관점을 취하고 있다. 셋째, 개인을 위해 치르는 재라 하더라도 천도되지 못한 채 떠도는 모든 고혼(孤魂)과 지옥중생을 함께 의례의 대상으로 삼는다는 점이다. 이는 불교에서 중시하는 회향의 의미를 실천하는 것으로, 자신이 지은 선행의 공덕을 중생을 위해 돌리는 대승적 차원에서 이루어지고 있다. 넷째, 상차림에서 육류·생선과 술을 사용하지 않는다는 것으로, 이는 곧 불교 재물(齋物)과 일반 제물(祭物)의 기본적인 차이점이기도 하다.

2) 무속 넋굿의 불교적 수용

무속에서 망혼을 보는 주된 관점은 죽은 자가 산 자에게 영향력을 미칠 수 있다는 것이다. 죽음은 불행한 사건이기 때문에 심한 부정(不淨)이 발생하며 부정은 죽은 이가 산 사람에게 탈을 낼 수 있는 힘을 지니고 있다고 믿기 때문이다. 곧 한을 품고 죽은 이들은 저승으로 쉽게 편입되지 못한 채 ‘이승도 저승도 아닌 곳’에 머물면서 현실에 영향력을 미치는 존재로 보는 것이다. 이처럼 억울한 죽음일수록 망혼이 지닌 힘은 강력한 것이라 여겨, 적절한 해원의례(解寃儀禮)를 통해 이를 풀어주어야 한다는 인식이 광범위하게 자리하고 있다. 따라서 넋굿을 하는 목적은 망자가 지닌 원한과 미련을 씻어주고 죽음의 부정을 제거함으로써 이승의 존재였던 망자를 저승으로 무사히 돌려보냄과 동시에 남은 자들의 재액초복을 기하려는 것이라 할 수 있다.
불교에서도 천도되지 못한 채 외롭게 중유의 세계를 떠도는 무수한 고혼의 존재를 인정하고 있다.

이는 천도재에서 의례의 주인공뿐만 아니라 유주무주(有主無主) 고혼을 함께 청하여 천도해주는 점에서도 알 수 있는데, ‘유주무주 고혼’이란 후손이나 모셔줄 사람이 없거나(無主) 자손이 있더라도(有主) 천도재를 올려주지 못해 떠도는 망혼을 일컫는다. 이러한 천도재의 특성으로 인해 집안에 우환이 잦고 일이 잘 풀리지 않을 때 이를 원혼에 의한 탈이라 여겨 넋굿을 하는 것과 동일한 이유로 사찰을 찾아와 천도재를 하는 이들이 많은 비중을 차지하고 있는 것이다.

수십 년 전만 하더라도 관례적으로 진행되는 유교상례를 제외할 때, 무속의 넋굿은 민간의 죽음을 다루는 가장 보편적 의례였다. 굿판은 유족과 망자의 슬픔과 억울함을 푸는 자리였고, 나쁜 죽음일수록 이승에 대한 미련과 한이 깊을 수밖에 없어 ‘악상에는 굿을 해야 한다’는 관념은 광범위한 것이었다. 이러한 생각은 천도재를 치르는 이들에게도 동일하게 이어지고 있어, 무속에서 집중적으로 담당해온 해원의 기능이 ‘넋굿에서 천도재로’ 점차 이전되는 경향을 드러내고 있는 것이다. 전통시대에 비해 무속의 기능은 약화되었지만 이러한 무속적 심성은 여전히 자리하고 있기 때문이다. 특히 이전에는 별도의 탈상 기간을 지키는 가운데 넋굿이나 사십구재 등의 위령제가 행해졌으나, 백일 탈상 등이 무화되면서 망자를 위한 통합적인 사후의례로서 심적 부담이 따르는 굿보다 체계화된 기성종교가 보다 적합하다는 인식 역시 살펴볼 수 있다.

이처럼 유교나 기독교 등에서는 망자를 좋은 곳으로 보내기 위한 의례가 존재하지 않는 데 비해, 무속과 불교의 경우는 산 자들의 정성과 신적 존재의 보살핌으로써 망자를 보다 좋은 곳으로 보낼 수 있다고 본다. 특히 ‘곤경에 처한 망자’와 ‘이를 구해줄 수 있는 유족’이라는 구도는 천도재의 필요성에 대한 설명 방식으로 널리 확산되어 있다. “자식을 군대 보내면 좋은 데로 보내려 하지, 나쁜 데 떨어지도록 하는 사람이 있겠는가. 좋은 데 떨어지게 하려고 애쓰는 것이나 똑같다고 본다”는 어느 유족의 말처럼, 저승에 편입되지 못한 채 떠도는 망자를 위해 남은 자들이 큰 힘을 발휘할 수 있다고 할 때, 안타깝고 간절한 마음으로 적극 임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의례를 치러줌으로써 망자가 이승에서의 문제를 해결하고 보다 나은 저승세계에 편입될 수 있다는 생각, 나아가 현실의 문제를 망자의 문제에서 비롯된 것으로 투영시켜 의례를 통해 그 매듭을 풀어주어야 현실의 문제 역시 해결될 수 있다는 생각은 넋굿과 천도재를 지내는 이들의 공통적 관념이라 할 수 있다.

넋굿의 의례구조 역시 천도재와 유사하여, 망혼과 신적 존재를 청해 모시고 공간을 신성하게 정화한 다음, 망자의 문제적 요소를 씻어주고 신적 존재를 섬겨 의례 목적을 달성한 뒤, 이들을 돌려보내는 동일한 구조를 지니고 있다. 이러한 구조적 동일성은, 신적 존재에게 망자의 문제해결을 기원하는 성격의 의례가 지니는 공통된 특성에서 비롯된 것으로 여겨진다. 특히 두 의례에 공통으로 존재하는 ‘씻음의 의례’라는 상징적 행위는 정화·재생의 보편적 상징성을 넘어, 해당 죽음이 지닌 문제의 근원을 해결한다는 동일한 의미를 지니고 있다.

특히 천도재에 투영된 무속적 죽음 인식은 ‘영혼관’을 중심으로 내면화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천도재에서 법당으로 맞아들이고 보내는 대상, 생전의 죄업을 씻어주고 법문을 들려줄 수 있는 대상은 인격적 주체, 곧 몸을 떠난 영혼이 아니고서는 불가능하며 승려와 유족 역시 이러한 믿음체계 속에서 의례를 진행하고 있는 것이다. 이처럼 천도재에 등장하는 영혼은 생전의 정체성을 갖춘 인격적 주체로서 산 자들과 교류하는 존재, 일정한 시기를 거친 후 사후세계에 거듭나지만 전생의 문제 또는 죽음형태로 인해 현세를 떠돌며 산 자들에게 영향력을 미칠 수 있는 존재로 설정되어 있다. 이러한 영혼관은 불교가 민간의 보편적 신앙과 관념을 수용함과 동시에 무불(巫佛)의 경계를 허물며 넘나들게 되었고, 불교와 불교 아닌 것을 구분하기 힘들 정도로 불교의 신앙체계에 결합되어 있다. 이처럼 영혼의 존재를 설정함과 동시에 불교와 무속의 관련성은 밀접해졌고, 천도재와 넋굿은 본연적으로 유사한 목적과 의례구조를 지니게 된 것이라 하겠다.

4. 불교 내세관과 죽음의례의 방향

불교가 ‘포용성’이나 ‘통불교’라는 말로 곧잘 설명되어 온 데는 그 가르침의 보편성에서 비롯된 경향이 크다. 인간 고통의 근원을 직시하여 그것을 제거하고 깨달음의 열락을 누리도록 이끄는 것은 도그마가 아닌 명쾌하고 보편적인 가르침이기 때문이다. 불교 내세관이 지닌 보편적 특성 역시 한국인이 죽음의 문제를 인식하고 해결하는 데 커다란 영향력을 미쳐왔으며, 민간의 심성에 보다 적합하게 해석·변화되면서 역동적인 양상으로 전승되어왔음을 살펴볼 수 있었다.

‘악업은 지옥을 낳고 선업은 극락을 낳는다’는 섭리를 깨닫고 자신을 돌아보는 삶은 소박하지만 최선과 통하는 것이다. 종교적 삶이란 초월적 섭리에 대한 믿음과 더불어 선악에 대한 본연의 윤리관념을 지니고 살아가는 삶을 의미할 것이기 때문이다. 전통사회에서는 삶의 곳곳에 스며들어 있는 각종 신들에 대한 인식과 그에 대한 신앙생활이 몸과 마음에 자연스럽게 배어 있었으며, 일상화된 신앙적 삶은 끊임없이 자신을 돌아보고 반성하는 삶을 가능하게 하였다. 일상의 건강하고 도덕적인 삶이 신의 의지에 부합하는 복 받는 삶임을 피부로 깨달아, 기복만 있고 행동은 그에 배치되는 삶은 인과응보가 따르게 된다는 것을 믿었던 것이다. 이처럼 대다수 민중이 스스로 종교인이라는 생각을 하지 않으면서도 종교적 삶을 추구해 왔듯이, 불교의 내세관은 인간이 지니고 있는 이러한 힘을 보편타당한 섭리와 체계화된 교리로써 이끌어 왔던 셈이다.

그런데 이러한 내세관이 궁극적으로 산 자들의 문제이고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의 문제를 일깨우고 있다는 점에서, 내세관이 집약된 천도재 역시 망자를 위한 것만이 아니라 산 자를 대상으로 하는 데 실질적인 무게가 실릴 필요가 있다. 죽음의례가 ‘사후극락’에만 초점이 맞추어질 경우 불교 본래의 가르침에서 멀어지고 종교가 지닌 순기능 역시 왜곡될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현재 진행되는 의례들은 망자의 극락천도에 치중되어 있어, 죽음이라는 궁극적 사건을 계기로 삶을 되돌아보고 성찰적 삶으로 이끄는 종교의례의 목적이 뚜렷하게 정립되어 있지 않아 아쉽다. 특히 탈상의 일환으로 사십구재를 치르면서 불교와 인연을 맺게 되는 경우가 많은데, 의례를 치른 이후 유족과의 연계는 여전히 제사·합동천도재·영구위패 봉안 등과 같이 망자를 위한 후속조치에 치중되어 있는 것이다. 현대불교의 장을 연 지 오래이지만 여전히 젊은 신자를 폭넓게 포용하지 못하는 것도 이러한 점과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한편, 불교 죽음의례의 변화에서 또 한 가지 주목해야 할 점은 근래에 전개되고 있는 사회적ㆍ문제적 죽음에 대한 천도재의 역할일 것이다. 불교계에서는 근래에 사회적 갈등으로 초래된 문제적 죽음을 맞아 사찰을 벗어난 공간에서 종교를 초월한 일종의 위령제로 망자를 천도하고 이를 공론화하는 데 적극 참여해오고 있다. 이는 사찰의 재정기반과 밀접히 연계된 채 폐쇄적 구도에 머물고 있던 불교 천도재가 사회공동체의 문제에 적극 뛰어듦으로써 전통적으로 계승되어온 수륙재의 정신을 잇는 것이기도 하다. 지난 노무현 전 대통령의 사십구재 역시 국가행사로 진행된 국민장에 이어 자율적인 민간 상례의 면모를 보여준 바 있다. 사십구재는 분명 불교의례이지만 애틋하고 비통한 죽음의 문제를 풀어내는 ‘종교적’ 의례이자 전통의례로 수용됨으로써 사실상 종교를 초월한 민상(民喪)의 성격을 띤 채 진행될 수 있었던 것이다. 

이처럼 불교 죽음의례가 요청에 따라 개별적으로 행하는 폐쇄적 구도에서 벗어나 광장으로 나아가는 현상은, 한국사회의 갈등과 문제를 공유하고 성찰하며 화합으로 이끄는 자생적 힘의 매개체로 기능할 수 있음을 의미한다. 그런데 천도재가 진정한 공동체의례로 남기 위해서는 불교의 영향력 확대나 정치적 목적에 좌우되지 않고, 의례를 통해 추구하는 가치의 순수성과 천도재의 대상에 대한 평등이 전제되어야 할 것이다. 의례 자체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의례를 통해 구현하려는 가치가 중요한 것이기 때문이다.

누구의 죽음인가와 무관하게 모든 억울한 죽음, 문제적 죽음을 껴안고 치르는 평화적 의례를 보면서, 국민 스스로 공동체의 문제에 성찰하는 계기를 갖도록 하는 이끄는 것이 종교가 사회문제에 개입하는 바람직한 방법일 수 있을 것이다. ■

 

구미래 / 동국대학교 외래교수. 안동대 민속학과에서 박사학위(불교민속 전공)를 받았다. 주요 논문으로 〈불교적 관점에서 본 공론화된 죽음에 대한 의례〉 등과 저서로 《한국인의 죽음과 사십구재》 공저로 《종교와 그림》 《종교와 의례공간》 《종교와 일생의례》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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