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집 | 한국인에게 불교는 무엇인가

1. 머리말

김상현
동국대 사학과 교수
불교는 전래된 이후 국가에 정치외교적으로 많은 영향을 주었다.

고구려를 비롯하여 백제와 신라에서는 불교적 정치 이념인 전륜성왕사상을 수용했고, 왕실에서는 적극적으로 불교를 신앙하면서 불교의 영향을 받았다. 이러한 전통은 고려시대에도 계승되어 고려 왕실에서는 여러 불교의례가 국가적 행사로 치루어졌고, 국왕은 보살계를 받은 불제자임을 분명히 하기도 했다. 조선시대 임진왜란과 정유재란 이후 사명대사는 도일하여 도쿠가와 이에야스(德川家康)와의 회담을 통해 조일 양국의 국교 정상화를 위한 토대를 마련하는 외교적 성과를 거두기도 했고 개화기의 개화승 이동인은 활발한 외교활동을 펼치기도 했다. 이처럼 한국역사상 불교의 정치 외교적 역할은 매우 긍정적인 것이었다. 다만 본고에서는 신라불교의 경우만을 논의하고자 하는 것이다.

신라 왕실은 적극적으로 불교를 신앙하고 후원했으며, 또 고승들은 왕실의 안정이나 현실 정치에 많은 영향을 미쳤다. 따라서 신라의 정치에 미친 불교의 영향은 적지 않았다. 신라 중고기 왕실에서는 불교의 전륜성왕사상을 수용했고, 원광과 자장 등은 외교 문제에 직접 도움을 주기도 하였다. 그리고 원효와 경흥 등은 불교적 정치사상에 관해 언급하기도 했다. 본고에서는 황룡사 장육존상의 조상 연기설화를 불교의 정치이념인 전륜성왕사상의 수용과 관련지어 살펴볼 것이다.

그리고 7세기 전반에 활동한 자장의 정치 외교적 활동에 대하여 살펴보고자 한다. 이를 위해 본고에서는 당시 신라가 처해 있던 위기 상황과 국제 정세, 신라 외교의 실패와 성공 등에 관하여 살펴보고, 동시에 대당외교 정책에 관한 자장의 역할에 관하여 검토할 것이다. 그리고 자장이 국내 정치 문제에 어떤 영향을 주었는지에 대해서는 황룡사 구층탑의 건립 등과 같은 불교적 활동과 연관해서 고찰할 것이다. 원효(元曉)와 경흥(憬興)은 신라 중대 초기에 해당하는 7세기 후반의 대표적인 고승이자 왕실과도 깊은 인연을 갖고 있었다. 그런데 원효와 경흥은 국왕이 나라를 다스리는 일을 논함에 있어서 《출애왕경(出愛王經)》에 많이 의거했다고 한다. 이는 7세기 후반 불교정치사상의 해명을 위해서는 중요한 실마리가 될 것이다. 


2. 신라의 전륜성왕사상 수용

1) 장육상(丈六像)의 주성

진흥왕 35년(574) 3月에 황룡사의 장육상(丈六像)이 주성(鑄成)되었다.  높이 1장(丈) 6척의 거대한 석가여래로 두 협시보살을 거느린 입상이었다. 《삼국유사》에는 이 장육상의 조상 연기담이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

바다 남쪽에 큰 배 한 척이 떠와서 하곡현(河曲縣) 사포(絲浦)에 닿았다. 조사해 보니 첩문(牒文)이 있어, ‘서축의 아육왕이 황철 5만 7천 근과 황금 3만 분을 모아서 석가삼존상을 주조하려다 이루지 못해, 배에 실어 바다에 띄우면서 인연 있는 나라에 가서 장육존용(丈六尊容)을 이루어 달라고 하였고, 1불과 2보살의 상도 함께 실려 있었다. 현리(縣吏)가 문서로 자세히 아뢰니 사자를 시켜 그 현성(縣城)의 높고 메마른 땅을 택하여 동축사(東竺寺)를 지어 그 삼존불(三尊佛)을 모시고 그 금과 철은 서울로 옮겨 대건(大建) 6년 갑오 3월에 장육존상을 주조했는데 단번에 이루어졌다. 그 무게는 3만 5천 7근으로 황금 1만 198분이 들었으며 두 보살상에는 철 1만 2천 근과 황금 1만 136분이 들었다. 황룡사에 모셨더니 그 이듬해에 불상에서 눈물이 발꿈치까지 흘러내려 땅이 1척 가량이나 젖었는데, 대왕이 돌아가실 징조였다.

장육상의 조상 연기담에서 주목되는 것은, 인도의 아육왕(阿育王)이 석가삼존상(釋迦三尊像)을 주성하려다가 이룩하지 못하고 인연 있는 국토에 이르러 장육의 존용(尊容)이 이루어질 것을 기원하며 배에 실어 보낸 금과 철이 신라에 이르러 불상이 훌륭하게 이루어졌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와 비슷한 연기설화를 가진 불상은 일찍이 중국에도 있었다. 즉 혜교(慧皎, 497~554) 찬의 《고승전》 도선(道宣, 594~667)의 《광홍명집》 그리고 《집신주삼보감통록》 등에 아육왕이 세웠다는 8만 4천 탑의 기단석의 자리가 발견되었다든가, 혹은 아육왕이 만들었다는 불상이 이미 4세기 남조의 진대(晉代)에 중국의 곳곳에서 기적적으로 나타나 여러 가지 경이로운 영험을 나타냈다고 하는 기록이 보이고 있는 것이 그것이다.

중국의 이러한 기록들을 염두에 두고, 또 인도의 아육왕(B.C. 3세기경)과 신라 진흥왕대까지는 무려 7·8세기의 간격이 있다는 것을 생각한다면, 신라 장육존상의 기록도 이미 중국에 알려져 있는 기록에서 유래되어 이루어진 전설일 것이라고 한 김리나(金理那)의 설은 주목할 만하다. 사실 송 명제(明帝) 대시(大始, 466~471) 말에 아육왕이 조성했다는 장사사(長沙寺)의 불상이 눈물을 흘렸는데 그 후 명제가 죽었다는 기록과 《삼국유사》에서 장육상을 모신 이듬해에 불상에서 눈물이 발꿈치까지 흘러내려 땅이 한 자나 젖었는데 그것은 대왕이 세상을 떠날 조짐이었다는 기록은 그 궤를 같이하는 것으로 생각되기도 한다.

설사 황룡사 장육상의 조상 연기담이 중국 문헌의 영향을 받아 생겨난 것이라고 하더라도, 여기에는 중국의 설화와는 매우 다른 특징이 나타나고 있음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아육왕과 관련이 있는 중국의 불상 중 가장 대표적인 장사사 불상의 경우, 그것은 아육왕이 직접 만든 불상으로 홀연히 중국 땅에 나타났다고 한 데 비해, 아육왕이 이룩하지 못한 것을 진흥왕이 완성했다고 한 황룡사장육상의 경우 판이하게 다른 것이다.
그러면 정법(正法)의 치자 아육왕이 주조에 3번이나 실패하고 배에 실어 보낸 금과 철이 남섬부제(南閻浮提) 16국과 500 중국, 7,000 소국(小國), 8만 촌락을 두루 다녔으나 이루어지지 못했는데, 신라에 이르러 진흥왕이 문잉림(文仍林)에서 그것을 잠깐 사이에 훌륭하게 이루었다는 설화는 신라 불연국토설(佛緣國土說)은 물론 전륜성왕사상(轉輪聖王思想)과도 관련이 있다.

이 장육상의 조상 연기담을 통해 진흥왕은 전륜성왕의 정법왕국사상(正法王國思想)을 그 정치이념으로 받아들이고 있다. 이 전륜성왕의 정법왕국사상은 불교의 이상적인 정치이념인데 진흥왕이 이 정치이념을 도입하고 있었음은 이 장육상의 설화에서뿐만 아니라 그의 치적, 그리고 왕의 두 아들의 이름을 전륜성왕이 굴리는 네 보륜(寶輪) 중의 금륜(金輪)과 동륜(銅輪) 등에서 취하고 있는 점 등을 통해 알 수 있다. 그리고 장육상의 조상 연기담에는 신라의 불연국토설도 강조되고 있다. 그것은 인연 있는 나라에 이르러 장육존용이 이루어질 것을 기원한 아육왕의 염원이 신라 땅에서 이루어졌다고 하는 것으로 표현되고 있다. 장육상설화에서 의도적으로 강조되는 전륜성왕의 정법왕국사상이나 신라 불연국토설은 서로 밀접한 관계를 갖고 있다고 생각된다. 불교와 인연 없는 국토에서 불교적인 정치사상을 펼 수는 없기 때문이다.

신라 중고기의 왕들도 전륜성왕을 그들의 이상으로 생각했다. 이러한 희망은 중대의 국왕들에게도 그대로 계승되고 있었음은 성덕왕에게 칠보(七寶)와 천자(千子)와 장수(長壽) 등이 구족되기를 기원한 황복사탑(皇福寺塔)의 사리함기(舍利含記)를 통해서 알 수 있다. 황복사탑은 효소왕과 신문왕비가 신문왕의 명복을 빌기 위해 692년에 건립한 것인데, 성덕왕이 전륜성왕과 같은 이상적인 군주이기를 희망했던 것이다.
 
2) 전륜성왕사상 

전륜성왕은 정법(正法)에 의한 통치로 이 세상에 이상 국가를 실현한다는 제왕이다. 전륜성왕은 세간적인 존재로 출세간의 붓다와 상대적 위치에 있다. 전륜성왕에 대해서는 《전륜성왕수행경(轉輪聖王修行經)》 《세기경(世起經)》 등 여러 경전에서 설하고 있다. 이들 경전에 의하면, 전륜성왕은 32상(相)을 갖추고, 칠보(七寶)를 지니고 있으며, 4신덕(神德)을 성취하고, 4병(兵)을 거느리고, 4천하를 다스리며, 1천 명의 아들을 두고 있다고 한다. 32상이란 32가지의 뛰어난 용모와 미묘한 형상을 말하는데, 결국 그의 용모는 붓다와 비슷하게 설명되고 있다. 32상은 실제의 모습이 아니라 붓다와 전륜성왕의 내적 지혜와 자비와 덕을 상징하는 것으로 이해되고, 32상의 배경이 되고 있는 선행과 공덕의 내용은 자비와 도덕의 정치를 지향하는 전륜성왕의 정법정치의 이념과 일치하고 있다는 지적도 있다.

네 가지 신덕이란, 오래 살아 일찍 죽지 않으며, 건강하여 병이 없고, 용모가 단정하며, 재산이 충분한 것 등이다. 그리하여 전륜성왕은 천자(千子)가 구족하여 용맹하고 강건하여 능히 원적(怨敵)을 항복받는다. 그리고 전륜성왕의 칠보는 금륜보(金輪寶)·백상보(白象寶)·감마보(紺馬寶)·신주보(神珠寶)·옥녀보(玉女寶)·거사보(居士寶)·주병보(住兵寶) 등이다. 이는 결국 이상적인 정법정치(正法政治)의 실현과 효율적인 국가 경영에 필요 여러 요소로 이해된다.

즉, 금륜보는 정법에 의거한 정치외교를, 백상보와 감마보는 교통 통신을, 신주보는 정법의 실현에 필요한 여러 수단과 방법을 제공하는 과학기술이나 건설을, 옥녀보는 비서진을, 거사보는 재정과 후생복지를, 주병보는 국방과 치안을 의미한다고 보아도 좋다고 한다. 전륜성왕이 금륜보를 타고 동서남북의 여러 지방을 주유(周遊)하면, 그곳의 대소 국왕이 서로 다투어 나라와 인민을 바쳐 그 신하가 되기를 청한다. 전륜성왕은 자기에게 귀순하는 왕들에게 다음과 같이 말한다.

그만두어라, 여러분들이여, 그대들은 나에게 공양해 바쳤다. 다만 마땅히 정법으로서 다스리고 교화하여 치우치거나 굽게 하지 말고, 나라 안에 법답지 않은 행이 없도록 하라. 스스로 살생하지 말고, 다른 사람으로 하여금 살생(殺生)·투도(偸盜)·사음(邪淫)·양설(兩舌)·악구(惡口)·망어(妄語)·기어(綺語)·탐취(貪取)·질투(嫉妬)·사견(邪見)의 사람이 되지 않도록 하라. 이것이 곧 다스리는 법이니라.

이처럼 전륜성왕의 정치는 정법의 실현을 그 목적으로 하고 있다. 《세기경(世紀經)》 전륜성왕품 제3에는 전륜성왕이 다스리게 될 때의 세상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아름답게 그려 놓고 있다.

전륜성왕이 이 염부제를 다스릴 때에는 그 땅은 평평하여 가시덤불·구덩이·언덕들이 없었다. 또 모기·등에·벌·전갈·파리·벼룩·뱀·도마뱀 등 악한 벌레가 없었다. 돌과 모래와 기와조각들은 자연히 땅 속으로 빠지고 금은과 보옥은 땅 위로 나타났다. 사시는 고르고 화해서 춥지도 않고 덥지도 않았다.

그 땅은 유연하여 티끌의 더러움이 없으며 기름을 땅에 바른 것 같아 깨끗하고 광택이 있어서 티끌의 더러움은 없었다. 전륜성왕이 다스릴 때의 땅도 또한 이와 같았다. 땅에는 청정한 샘물이 솟아 다할 때가 없으며 부드러운 풀이 나서 겨울이나 여름이나 언제나 푸르렀다. 수목은 무성하고 꽃과 열매는 풍성하였다. 땅에는 부드러운 풀이 나서 빛은 공취와 같고 향기는 바사와 같으며 연하기는 하늘 옷과 같았다. 발로 땅을 밟으면 땅은 4촌이나 들었다가 발을 들면 도로 올라와 빈 곳이 없었다. 자연의 멥쌀은 등겨가 없고 온갖 맛을 갖추고 있었다.

경에는 계속해서 과실나무, 향나무, 그리고 옷과 그릇과 악기 등을 열매 맺는 옷 나무, 그릇 나무, 악기 나무 등이 있다고 서술하고 있다. 결국 전륜성왕이 다스리게 될 때의 세상은 아름답게 될 것이라는 것인데, 그 아름다운 세상이란 전륜성왕의 목표가 되기도 한다.  

3. 자장의 정치 외교적 역할

1) 구층탑의 건립과 찰리종설의 유포

자장(慈藏)은 7세기 전반 선덕여왕과 진덕여왕 대에 주로 활동했던 대표적인 고승이다. 여왕이 통치하던 이 시기 신라는 대내외적으로 매우 어려운 상황에 처해 있었다. 특히 백제에게 대야성을 빼앗긴 선덕여왕 11년(642) 이후의 신라는 사직의 보전까지 걱정해야 하는 위기에 몰렸다. 이처럼 어려운 시기를 맞아 자장은 불교로 교화하는 한편 정치 외교적인 자문도 해서 신라가 위기를 극복하고 삼국을 통일하는 데 크게 기여했다.

자장이 신라 조정의 요청에 따라서 귀국한 것은 선덕왕 12년(643) 3월이다. 그는 당나라에서 두루 명성을 떨치고 태종의 후한 대접을 받을 정도의 고승이었다. 신라는 선덕왕 11년(642) 7월과 8월에 백제의 공격을 받아 매우 심각한 위기에 처했는데, 이러한 사정으로 인해서 선덕여왕은 곧 자장의 귀국을 요청했던 것이다. 자장의 귀국은 대야성이 함락된 때로부터 약 6개월 만에 이루어졌는데, 신속한 귀국이었다.

자장은 위기에 처한 신라의 소식을 접한 뒤로 어떻게 난국을 해결할 것인지에 관해서 고심했는데 그가 오대산의 태화지(太和池) 가에서 만난 신인(神人)과 나눈 대화에는 그의 이러한 심정이 잘 드러나고 있다. 자장이 태화지변을 지날 때, 홀연히 신인이 출현하여 물었다. 당신 나라에 어떤 어려운 일이 있느냐고. 이에 자장은 고구려와 백제 두 나라가 변경을 침략하여 횡행하는 것이 백성들의 환란이라고 답하면서, 고국으로 돌아가 무엇을 하면 나라에 도움이 될 수 있겠는가고 다시 물었다. 이때 신인은 황룡사에 구층탑을 세우면 이웃 나라의 항복을 받을 수 있을 것이라고 일러준다.

자장이 귀국하자 온 나라가 그를 환영했다. 왕은 그를 대국통(大國統)에 임명하고, 분황사에 주석하도록 했으며, 또 별도의 조용한 집을 짓고, 따로 10명을 득도시켜 언제나 흡족하게 공급하여 시봉하도록 했다. 자장이 선덕여왕의 특별한 후대를 받으면서 불교로 교화하는 일과 더불어 정치외교적인 여러 현안에 관해서 자문했다.

자장은 국왕에게 황룡사에 구층탑을 세울 것을 건의했다. 왕은 이 문제를 여러 신하들과 함께 의논했고, 그 결과 백제로부터 아비지(阿非知)라는 기술자를 초청하고, 김용춘(金龍春)에게 감독을 맡겨서 14년(645) 3월에 완성했다. 《삼국유사》에 전하는 황룡사 구층탑의 창건 연기설화는 황룡사 구층탑 건립의 종교적·정치적 배경을 설명해 주고 있다. 중국의 태화지 가에서 만난 신인은 자장에게 “지금 당신의 나라는 여자로 임금을 삼았기에 덕은 있지만 위엄이 없으므로 이웃 나라가 도모하려는 것이니, 빨리 본국으로 돌아가서 황룡사에 구층탑을 세우면 이웃 나라가 항복하고 왕업(王業)이 태평하게 될 것”이라고 일깨워 준 것으로 설화는 설명하고 있다. 특히 “신라는 여자로 임금을 삼았기에 위엄이 없어서 이웃 나라가 도모하려는 것”이라고 한 신인의 말은 당나라의 태종이 신라 사신에게 했던 말과 거의 같다. 이 점 주목할 만한 사실이다.

선덕여왕 12년(643) 당나라 태종에 의해 제기된 여왕 폐위론은 신라의 국가 존립과 관련된 심각한 문제였다. 선덕여왕을 실주(失主)라고 하면서, 그를 퇴위시키고 당나라 왕족 중의 한 사람을 왕위에 추대하여 당나라 군사를 신라에 주둔시키자는 당 태종의 제안이 신라 조정에 전해졌을 때 그 충격과 파문이 컸을 것임은 쉽게 짐작되는 일이다. 그런데 자장은 신인의 권위를 빌려서 선덕왕은 여자이기에 위엄이 없어서 이웃의 침략을 받게 되었다고 한 태종의 말을 그대로 인용했다. 그리고 그는 여왕무위(女王無威)와 그로 인해 초래된 난국을 구층탑의 건립으로 극복하려고 했다. 그가 신인의 권위를 빌려서 “황룡사에 구층탑을 세우면 이웃 나라가 항복하고 구한(九韓)이 와서 조공하며 왕업이 오래 태평할 것”이라고 주장했던 것은 그의 이런 의도를 반영한 것이다.

자장이 구층탑을 건립하고자 했던 것은 웅장한 탑과 그 속에 봉안한 사리의 신성성에 의해서 실추된 왕실의 권위를 회복하려 했던 것으로 이해된다. 이 탑은 높이가 225척이나 되는 거대한 구층목탑이었고, 계단을 따라서 구 층까지 올라가서 사방을 조망할 수 있도록 되어 있었다. 국가 존망의 위기 상황하에서 이처럼 거대한 토목공사를 진행하게 된 데는 절실한 이유와 목적이 분명히 있었을 것이다. 그것은 당시에 대내외적으로 심각하게 문제되고 있던 여왕폐위론을 구층탑의 건립을 통해서 해결해 보려는 의도였다고 생각된다. 구층탑을 통해서 왕실의 권위를 상징적으로 과시하려는 의도가 있었을 것이다. 이웃 나라의 항복과 구한의 내공, 그리고 왕실의 태평 등 호국의 의지를 구층탑에 투영함으로써 당시 신라인의 염원까지도 이 탑의 건립을 통해서 표출해 보고자 했던 것이다.

자장이 가지고 온 불사리의 일부를 봉안한 이 탑은 종교적인 신성성을 확보할 수 있었고, 따라서 신라 불교신앙의 중요한 대상이 될 수 있었다. 구층탑의 종교적 신성성은 찰리종(刹利種)으로 강조된 선덕여왕의 권위와도 곧 연결되는 것이었다. 《무구정경(無垢淨經)》에 의하면, 탑은 온갖 좋지 못한 일들을 없애고, 그 나라를 외적으로부터 수호한다. 태화지변에서 만난 신인은 자장에게 황룡사에 탑을 세워 나라의 안녕을 도모하라고 했다.

백제의 침략을 받아 나라가 심각한 위기에 처하자 그 책임이 선덕여왕에게로 쏠린 것 같다. 대야성 함락 이후에는 선덕왕은 여왕이기에 위엄이 없어서 이웃이 얕보고 침략한다는 여론이 대두했던 것 같다. 여왕무위론에 맞서서 선덕여왕을 옹호하려는 노력은 자장에 의해서 구체화되었다. 자장은 신라 왕실이 찰리종이라는 설을 내세워 왕실 혈통의 신성함을 주장했다. 그는 신라 왕이 천축의 찰리(Ksatriya)종이라고 했는데, 다음의 기록이 그것이다. 

자장법사가 서쪽으로 유학 가서 오대산에서 문수보살의 수법(授法)을 감득(感得)했다. 또 문수보살은 말했다. “너의 나라 국왕은 천축의 찰리종인데, 왕이 미리 불기(佛記)를 받았으므로 특별한 인연이 있기에 동이(東夷) 공공(共工)의 종족과 같지 않다.” 자장은 이것이 대성(大聖)의 변화인 줄 알고 슬피 울면서 물러갔다.

문수보살의 이 이야기는 구층탑의 창건 연기설화 앞에 나온다. 구층탑과 직접적인 관계가 없는 신라 국왕이 찰리종이라는 설을 덧붙였던 것은 신라 왕실의 신성함을 강조하기 위함이었다. 물론 진평왕대에도 석가모니의 가계에서 이름을 빌려 쓰는 등의 진종설(眞種說)이 있었다. 그러나 자장은 여왕폐위론 등을 의식하면서 선덕여왕은 천축의 찰리종에 속하기 때문에 동이족과는 다르다는 것을 구체적으로 강조하고자 했던 것이다.

이처럼 어려운 시기에 자장은 대국통이 되어 불교 교단을 이끄는 한편, 황룡사에 구층탑을 세우도록 건의하고, 국왕이 천축의 찰리종이라는 설을 유포하여 왕실의 신성함을 강조하기도 하였다.

2) 나당 군사동맹과 자장

신라는 대야성이 함락당한 642년 이후 몇 년 동안 대내외적으로 심한 난관에 봉착해 있었다. 고구려와 당나라에 군사 원조를 요청했지만 모두 실패했고, 일본과의 외교 교섭 또한 성공하지 못함으로써 고립무원의 상태가 계속되고 있었다. 당시의 정세로 볼 때, 고구려와 일본과의 외교 교섭은 쉽지 않았다고 하더라도, 전통적으로 친선관계를 유지해 왔던 당나라마저도 신라의 청병에 선뜻 응하지 않고 있었다. 이처럼 어려운 상황에서 신라 조정에서는 당나라 군사의 출병을 보장받기 위한 특별한 외교정책을 결정하게 되었는데, 그것은 당의 복장제도를 받아들이고, 당의 연호를 사용하는 것이었다. 이처럼 중대한 외교정책의 결정에 자장은 깊이 참여하고 있었다. 이와 관련하여 《삼국유사》의 다음 기록은 주목할 만하다.

일찍이 우리나라의 복식이 중국과 같지 않으므로, 조정에 건의하여 윤허를 받았는데, 진덕왕 3년(649)에 비로소 중국의 의관을 사용하게 되었다. 이듬해에 또 정삭(正朔)을 받들어 비로소 영휘년호(永徽年號)를 사용했다. 그 후로는 중국에 조빙(朝聘)할 때마다 그 반열이 번국(藩國)의 윗자리에 있었는데, 이는 자장의 공로다.

이와 비슷한 기록은 《속고승전》과 《대각국사문집》에도 전한다. 《속고승전》 중의 〈자장전〉에는 자장이 중국의 복장을 받아들인 것은 사정에 의해서 헤아려 생각함에 온 나라가 모두 이를 따랐다고 했다. 《대각국사문집》에 의하면, 당나라의 복식을 사용하자고 자장이 상소하자 국왕이 이를 허락했다고 한다. 이들 기록에 의하면, 자장이 중국의 복장제도와 연호를 받아들이자고 조정에 건의했던 것은 확실한 것 같다. 

이 무렵 자장은 세계의 정세나 변화에 대하여 누구보다도 거시적으로 파악할 수 있었다. 그는 수년간 당나라에서 생활했을 뿐 아니라, 당 태종과의 개인적인 친분도 있었는데, 이러한 경험은 당시 당나라의 정치 상황이나 태종의 정치노선 등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되었을 것이다. 그는 당나라에 체류하는 동안 태종으로부터 후한 대접을 몇 차례나 받았다. 자장은 당나라의 환심을 살 수 있는 조건을 제시해서라도 당나라와의 군사 동맹을 이끌어낼 수 있게 하자는 건의를 했던 것 같다. 물론 사직의 수호마저도 위태롭게 된 위기 상황에서 선택한 고육지책이었다. 조정에서는 자장이 건의한 바에 따라서 대당외교의 기본 방향을 결정하고 김춘추(金春秋)와 그의 아들 문왕(文王)을 당에 파견했다.

김춘추 일행은 진덕왕 2년(648) 겨울에 당나라로 파견되었다. 김춘추는 당 태종의 후한 대접을 받으면서 나당 군사동맹을 이루어 냈다. 김춘추는 복장을 고쳐서 중국의 제도를 따르고, 정삭(正朔)을 받들도록 청했다. 그리고 동반했던 셋째 아들 문왕을 당경(唐京)에 머물러 숙위(宿衛)토록 요청하기도 했다. 김춘추의 이러한 요청은 신라 조정의 대당외교의 기본 정책이나 지침에 따른 것이었다. 낭혜화상비(朗慧和尙碑)에는 김춘추가 태종에게 요청했던 내용이 진덕여왕의 명에 의한 것이라고 구체적으로 서술하기도 했다.

김춘추는 진덕여왕의 명으로 소릉황제(昭陵皇帝)를 알현하고 정삭을 받들고 복장을 바꿀 수 있도록 면전에서 진원(陳願)하였다.

물론 김춘추 자신에게 맡겨진 재량권이 없지 않았겠지만, 중요한 문제는 조정의 정책에 따른 것임이 확실하다. 당 태종과 김춘추 사이에는 나당연합군이 고구려와 백제를 병합하려는 의도를 분명히 했고, 또한 그 이후의 영토 분할 문제까지 논의했다. 나당 군사동맹을 성공적으로 이끌어 내는 데 중요한 토대가 된 것은 중국의 복장제도와 연호의 수용이었다. 따라서 당의 복장제도 및 연호를 받아들이자고 제안했던 자장이 신라의 대당외교에 미친 영향은 컸다.

4. 원효와 경흥의 국왕론
         
1) 중대 왕실의 불교신앙

신라 중대 왕실은 적극적으로 불교를 신앙했고 국왕들은 대부분 독실한 불제자였다. 문무왕은 불법을 공경하여 유언으로 화장을 당부했고 죽어서도 불법을 받들어 숭상하기를 원했다. 황복사 금동사리함기(金銅舍利函記)에서는 신문왕이 오계(五戒)로 세상에 응하고 십선(十善)으로 백성을 다스려 통치를 안정시키고 공을 이루었다고 찬양했다. 그리고 692년 7월 2일에 신문왕이 돌아가자, 신목태후(神睦太后)와 효소왕은 종묘성령(宗廟聖靈)을 위해서 선원가람(禪院伽藍)을 건립하고 3층 석탑을 건립했다.

성덕왕은 돌아간 신목태후와 효소왕을 위하여 706년에 불사리 4과와 순금미타상 6촌 1구와 《무구정광대다라니경》 1권을 탑 속에 봉안하고, 신문왕과 신목태후와 효소왕의 대대 성묘(聖廟)가 열반산(涅槃山)을 베고 보리수(菩提樹)에 앉기를 빌었다. 그리고 성덕왕은 태종대왕을 위하여 봉덕사(奉德寺)를 세우고 7일 동안 인왕도량(仁王道場)을 개설하고 대사(大赦)했다고 한다.

인왕도량은 《인왕반야경》을 토대로 한 법회의식이고, 백 명의 고승을 모시고 개최하는 인왕백고좌회와 비슷한 법회였을 것이다. 효소왕은 망덕사(望德寺) 낙성법회에 참석하여 공양을 베풀었고, 왕위에 오르기 전에 오태산에서 수행한 바 있는 성덕왕은 살생이나 도살을 금하도록 하교했으며, 경덕왕은 진표로부터 보살계를 받았다. 궁중에는 내원이 있었고, 국왕은 고승을 초청하기도 하고, 사원의 법회에 참석하기도 했으며, 신앙 영험에 감동하여 불사를 행하기도 했다. 신라의 삼국통일에 크게 기여했던 김유신, 김양도(金良圖), 김천존(金天尊), 죽지랑(竹旨郞) 등도 불교를 신봉했다.

김유신은 화랑 시절에 그의 낭도를 용화향도(龍華香徒)로 불렀고, 원원사(遠源寺)를 창건하기도 했으며, 불사에서 기도하여 감응을 얻는 일도 있었다. 김양도(金良圖)는 평생 불교를 독실하게 믿어 흥륜사의 주불과 좌우보살상을 조성하고 벽화를 그리기도 했다. 조정에서 당의 침공에 대한 대책에 부심하고 있을 때, 천존은 명랑법사를 천거했다. 죽지랑의 탄생설화에도 미륵신앙의 영향이 보인다. 신문왕 때의 재상 충원(忠元)은 영취사(靈鷲寺)를 창건했다. 이처럼 신라 중대 왕실과 귀족들은 적극적으로 불교를 신앙하고 후원했다. 따라서 불교는 통일 직후 삼국민의 융합에 기여했을 뿐만 아니라, 당시의 정치에 끼친 사상적 영향 또한 적지 않다.

신라 중대 왕실에서는 고승을 국사에 책봉한 경우가 있고, 다른 여러 고승과도 가까이했다. 무열왕은 원효와 특별한 인연을 맺었고, 문무왕의 주위에는 지의(智義), 명랑(明朗), 의상(義相) 등이 있었으며, 신문왕은 경흥을 국노(國老)에 책봉했고, 효소왕은 혜통(惠通)을 국사로 삼았다. 국왕은 고승으로부터 설법을 듣거나 정치적 자문을 구하기도 했고, 간언을 듣기도 했다.

문무왕이 의상(義相, 625~702)의 간언에 따라 축성의 대역사를 중지했던 것은 대표적인 사례이다. 삼국을 통일한 문무왕은 여러 성을 쌓고 궁궐을 장엄하고 화려하게 단장했다. 특히 21년(681)에는 경성(京城)을 새롭게 하려는 계획을 세웠다. 도성을 새롭게 축성한다는 소식을 전해들은 의상은 국왕에게 글을 올려 간했다. “왕의 정교(政敎)가 밝으면, 비록 풀밭에 선을 그어서 성이라고 하여도 백성이 감히 넘지 못하고, 재앙을 씻어 복이 될 것이며, 정교가 밝지 못하면, 비록 장성이 있다 하더라도 재앙이 없어지지 않을 것입니다.” 문무왕은 의상의 건의를 수용하여 곧 공사를 중지하게 했다고 한다.

중대 초기의 여러 고승들 중에서도 원효와 경흥의 활동은 더욱 두드러져 주목할 필요가 있다. 원효는 100여 부의 저서를, 그리고 경흥은 47부의 저서를 남긴 대표적 학승이었을 뿐만 아니라, 이들이 신라 왕실에 준 영향 또한 적지 않기 때문이다. 원효는 무열왕 때 요석공주와 결혼함으로써 왕실과는 특별한 인연을 맺게 되었다. 경흥(~681~)의 생몰년은 정확하게 알 수 없지만, 대략 620년경부터 700년경까지 생존했을 것이라는 설이 유력하다. 문무왕(661~681)은 백제 웅천주 출신의 고승 경흥을 국사로 삼을 것을 유언으로까지 당부했고, 신문왕(681~692)은 그를 국로로 삼았다. 그리고 통일 직후 신라의 국로가 된 경흥은 화려한 차림으로 대궐을 출입하면서 조정의 여러 자문에 응했다. 근심으로 인해 병을 얻어 한 달 이상 고생할 정도로 자문에 적극적이었다. 이처럼 삼국통일 직후에 신라가 백제 출신의 경흥을 국로로 삼았던 배경에는 불교신앙으로 민족 융합을 도모하려는 종교적·정치적 배려도 없지 않았다. 경흥은 47종이나 되는 저서를 남겼는데, 이것은 그 무렵 원효 다음으로 많은 것이었다.

아무튼, 당시 불교계에서 차지하는 원효와 경흥의 위치에 주목하면서 이들의 신라 왕실과의 인연 및 그 역할에 유의할 때, 이들이 신라 왕실의 현실 정치에 끼친 영향 또한 적지 않았을 것이고, 아마도 그것은 불교정치사상에 대한 한 단계 높은 이해와 그 활용이었을 것으로 짐작된다. 

2) 《정법정리론(王法正理論)》의 국왕론

불교의 정치이념과 관련된 내용은 여러 경론에 보이지만, 특히 《금광명경(金光明經)》 《살차니건자경(薩遮尼乾子經)》 《정법정리론(王法正理論)》 《유가론(瑜伽論)》 등에는 국왕이 나라를 다스리는 도리에 대한 내용을 자세히 서술하고 있다. 

《금광명경》은 5종의 이역본이 있었지만, 신라에는 보귀(寶貴)역 《합부금광명경(合部金光明經)》 8권, 의정(淨義) 역 《금광명최승왕경(金光明最勝王經)》 10권 등이 주로 유통되었다. 원효는 《합부금광명경》을, 그리고 경흥을 비롯한 많은 신라 학승들은 모두 《금광명최승왕경》을 텍스트로 했다. 《금광명최승왕경》은 번역 직후인 성덕왕 3년(704) 3월에 당에서 귀국한 사신 김사량(金思讓)에 의해 신라의 국왕에게 전해졌던 경이다.

《금광명경》의 정론품(正論品)에는 국왕의 정치와 교화에 대하여 국왕이 바른 법으로 나라를 다스려야 한다는 내용을 담고 있다. 《금광명최승왕경》의 왕법정론품(王法正論品)에도 왕법의 정론과 치국의 강요를 설하고 있다. 여러 나라에서 왕이 된 이에게 만약 정법이 없다면 다라를 능히 다스려 중생들을 편안하게 하고 그 자신도 훌륭한 왕위에 오래 있을 수 없을 것이라고 강조하는 것이다. 국왕은 정법으로 나라를 다스려야 함을 역시 강조하고 있다. 만약 국왕이 악을 보고도 이를 막지 않는다면 이로 말미암아 국정은 어려워지고 여러 변괴가 나타나게 되고 마침내 국토는 파괴될 것이라고 경고하고 있는 것이다.

마침내 국위를 잃게 되는 것도 아첨하고 속이는 사람 때문이기에 이런 사람들은 마땅히 벌로써 다스려야 한다고 강조했다. 《금광명최승왕경》 왕법정론품은 국왕이 정법으로 나라를 다스리면 나라가 평화롭지만, 만약 비법으로 다스린다면, 왕정의 어려움은 말할 것도 없고 국가의 안위마저 위태롭게 된다는 것이다. 전쟁과 질병, 그리고 자연의 여러 변괴까지도 그 원인은 모두 국왕이 정법으로 나라를 다스리지 않기 때문이라고 이 경에서는 설하고 있는 것이다. 신라 학승들도 《금광명경》을 중시하여, 원효, 경흥, 승장(勝莊), 도륜(道倫), 태현(太賢) 등이 이 경의 주석서를 남겼다. 특히 이 경에 주목한 원효는 2종의 주석서, 그리고 경흥은 5종의 주석서를 지었다.

원효와 경흥 그리고 승장은 ‘국왕이 나라를 다스리는 일’을 논함에 있어서 《출애왕경(出愛王經)》에 많이 의거했다고 한다. 실제로 원효가 그의 《금광명경소》에서 《출애왕경》을 인용했음을 확인할 수 있다. 《금광명경》의 정론품에는 국왕이 악을 따른다면 화를 초래하여 나라가 패망하게 된다는 것을 밝히면서 국왕이 악을 막을 것을 권하는 대목이 있다. 원효는 이 부분의 주석에서 《출애왕경》을 다음과 같이 인용했다.

대왕은 마땅히 알아야 한다. 과실에는 대개 열 가지가 있다. 만약 왕이 이와 같은 과실을 저지르면, 큰 창고가 있고, 많은 보좌관이 있으며, 많은 군사가 있다고 하더라도 우러러 귀의하지 않을 것이다. 종성(種性)이 높지 않음이요, 자재(自在)함을 얻지 못함이요, 그 성품이 포악함이요, 날카롭게 분을 발함이요, 은혜가 호사하고 박함이요, 삿되고 아첨하는 말을 받아들임이요, 의지 없이 행하여 위의(威儀)를 닦지 않음이요, 착한 법을 돌아보지 아니함이요, 차별을 모르고 지은 은혜를 잊어버림이요, 한결같이 제멋대로 하며 방일하기만 함 등이 그것이다.

“왕이 만약 과실을 범한다면 큰 창고가 있고, 많은 보좌관이 있으며, 수많은 군사가 있다고 하더라도 존경하며 따르지 않을 것”이라고 한 이 대목에 원효는 주목했을 것이다.

일본의 원효(願曉, 835~871)에 의하면 《금광명경》을 주석한 신라의 승장(勝莊)·경흥(憬興)·원측(圓測) 등이 모두 원효가 인용했던 《출애왕경》의 이 구절을 취해서 해석했다고 한다.

신라의 여러 고승들이 중시했던 《출애왕경》은 여러 경록(經錄)에도 보이지 않고, 현존 대장경에도 이 경은 전하지 않는다. 그런데 불(佛)이 출애왕(出愛王), 즉 우전왕(優塡王)을 위하여 설한 경전이 전하는데, 곧 미륵보살조(彌勒菩薩造)·현장역(玄奘譯) 《왕법정리론(王法正理論)》 1권이 그것이다.

648년에 번역이 끝난 《유가사지론》 100권 중에서 제61권의 결택분(決擇分) 중의 심사지(尋伺地)의 내용을 별도로 분리하여 649년 7월에 대자은사(大慈恩寺) 번경원(飜經院)에서 번역 ·간행한 것이다. 원효 등이 ‘왕의 이국사(理國事)’와 관련하여 많이 참고했다는 《출애왕경》은 현존하는 《왕법정리론》과 동일한 경전이고 《유가사지론》 제61권의 내용도 또한 같은 내용이다. 따라서 ‘국왕이 나라를 다스리는 일’에 대한 원효와 경흥의 사상은 《출애왕경》 즉 《왕법정리론》에 그 토대가 있다고 하겠다. 그러나 이에 관한 원효와 경흥의 저술이 전하지 못하는 지금의 상황에서는 《왕법정리론》의 국왕론을 통해서 이들의 정치사상을 유추해 볼 수밖에 없다. 

《왕법정리론》 1권에는 왕의 진실한 과실과 공덕에 대하여 각각 9종을 설하고, 또 왕의 쇄손문(衰損門)과 방편문(方便門), 그리고 왕으로서 사랑할 만한 법과 왕이 사랑할 만한 법을 이끌어 발휘하는 법에 대하여 각각 5종을 설했다. 그런대 왕의 과실과 쇄손문은 마땅히 멀리 떠나야 하고, 왕의 공덕 및 왕의 방편문은 마땅히 닦아 익혀야 하며, 왕의 가애법(可愛法)은 사모해야 하고, 인발왕가애법(引發王可愛法)은 받아 지녀야 한다고 했다. 왕이 만약 이를 수학할 때는 일체의 이익과 안락을 얻을 수 있을 것이라고 강조하고 있다. 이처럼 이 논에는 국왕이 갖추어야 할 여러 덕목과 함께 경계해야 할 많은 내용을 설명하고 있는데, 그것은 현실적이고도 실질적인 내용으로 되어 있다.

5. 맺는 말

본고에서는 신라 불교의 정치 외교적 기여 문제를 전륜성왕사상의 수용과 자장의 정치 외교적 역할, 그리고 원효와 경흥의 국왕론을 중심으로 살펴보았다.  

황룡사 장육존상의 조상 연기설화는 불교의 정치이념인 전륜성왕사상의 수용과 관련이 잇다. 인도의 아육왕이 석가삼존상을 주성하려다가 이룩하지 못하고, 인연 있는 국토에 이르러 장육의 존용이 이루어지기를 기원하며 배에 실어 보낸 금과 철이 신라에 이르러 훌륭한 불상이 완성되었다는 것이다. 이 설화에는 신라불국토설과 함께 전륜성왕사상이 강조되고 있다. 인도의 아육왕은 대표적인 정법의 치자인데, 그가 주조에 세 번이나 실패한 불상이 신라의 진흥왕 때에 쉽게 완성되었다는 것은, 진흥왕을 아육왕보다도 더 미화시키고 있음을 엿볼 수 있기 때문이다. 이 설화에서 강조된 전륜성왕의 정법왕국사상이나 신라불국토설은 서로 관련이 있다. 불교와 가장 인연 있는 국토에서 불교적인 정치이념은 실현될 수 있기 때문이다.

신라는 선덕왕 11년(642)에 백제의 침략을 받아 대야성과 더불어 40여 성을 상실하고, 고구려와 백제에 의해 당항성이 위협당하는 등 고립무원의 위기 상황에 처하게 된다. 이처럼 어려운 시기에 자장은 대국통이 되어 불교 교단을 이끄는 한편, 황룡사에 구층탑을 세우도록 건의하고, 국왕이 천축의 찰리종이라는 설을 유포하여 왕실의 신성함을 강조하기도 하였다. 또한 그는 당의 복장제도와 연호를 받아들일 것을 건의하여, 수년간 교착 상태에 빠져 있던 대당외교를 성공시켜 나당군사동맹을 이끌어 내는 데 결정적 기여를 하기도 했다.
신라 중대 왕실은 적극적으로 불교를 신앙했고, 국왕들은 독실한 신앙자였다. 궁중에는 별도의 사찰인 내원이 있었고, 국왕은 고승을 초청하여 설법을 듣거나 정치적 자문을 구하기도 했다. 따라서 불교는 통일 직후 삼국민의 융합에 기여했을 뿐만 아니라, 당시의 정치에 많은 영향을 미치기도 했다.

중대 초기의 여러 고승들 중에서도 원효와 경흥은 최고의 학승이었을 뿐만 아니라, 왕실과 특별한 관계에 있었다. 신라 학승들은 대부분 《금광명경》을 중시했지만, 특히 원효는 2종, 경흥은 5종의 주석서를 각각 지었다. 불교의 정치사상과 관련된 내용은 여러 경론에 보이지만, 특히 《금광명경》과 《살차니건자경》 《왕법정리론》에는 국왕이 나라를 다스리는 일, 특히 국왕의 과실과 공덕에 관한 내용이 자세한 편이다. 원효와 경흥은 국왕의 치국과 관련하여 《출애왕경》 즉 《왕법정리론》에 의하여 이해했다고 한다. 

국왕의 10종 과실에 주목하기도 했고, 경흥도 《왕법정리론》의 이 내용을 취하여 국왕의 악을 경계했었다. 이들은 “왕이 만약 과실을 범한다면 큰 창고가 있고, 많은 보좌관이 있으며, 수많은 군사가 있다고 하더라도 존경하며 따르지 않을 것”이라고 한 대목에도 주목했다. 원효와 경흥은 《살차니건자경》을 그들의 저서에 여러 차례 인용한 바 있다. 이 경의 예엄치왕품 및 왕론품에도 왕이 지켜야 할 여러 도리에 대해서 설하고 있다. 《금광명경》과 《살차니건자경》에 의하면, ‘국왕은 백성의 부모’라고 한다. 그리고 “왕이란 백성으로써 나라를 삼아야 성립될 수 있기에 민심이 불안하면 나라는 곧 위태로워진다.”고 하였다.

원효는 이 구절을 주목하기도 했다. 이처럼 《살차니건자경》과 《왕법정리론》 등에는 국왕의 현실 정치와 관하여 구체적인 내용을 설하고 있다. 따라서 이들 경전을 주목했던 원효와 경흥은 불교의 정치사상, 특히 국왕의 치국에 대해 분명하게 인식하고 있었다. 《금광명경》에 대한 원효와 경흥의 주석서는 현존하지 않지만, 다른 저술에 인용된 단편적인 글만으로도 이들이 《살차니건자경》과 《왕법정리론》 등에 의해서 국왕이 나라를 다스리는 일에 관해 심층적 이해를 갖고 있었던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원효 및 경흥과 특별한 인연을 맺고 있던 중대 초기의 신라 왕실은 이들의 불교적 정치사상에 적지 않은 영향을 받았을 것이다. ■

 

김상현 / 동국대학교 사학과 교수. 동국대 대학원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한국불교사 전공). 주요 저서로 《원효연구》 《신라의 사상과 문화》 《신라 화엄 사상서 연구》 《한국불교사 산책》 등 다수와 100여 편의 논문이 있다.

저작권자 © 불교평론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