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집 | 한국인에게 불교는 무엇인가

이종찬
동국대 명예교수

불교는 한국사회에서 다양한 방면에 걸쳐 문화적 교류를 해왔다. 문학과 미술, 음악은 물론이고 민속과 언어생활 등 광범한 분야에서 영향을 주고받았다. 이 글은 그중에서도 불교가 국가적 이념이었던 고려시대와 유교를 이념으로 하였던 조선조에서 지식인으로 대표되는 승려와 유생들이 교류의 수단이었던 시의 수창을 살핌으로써 당시 사회의 한 단면을 짚어 보고, 이것을 기반으로 하는 오늘의 좌표는 어떠해야 할 것인가 살펴보고자 한다.

고려조에서는 진정국사(眞淨國師)의 백련사(白蓮社)가 중심이 된 백련시사(白蓮詩社)에 모인 시인들을 검토하고, 조선조에서는 동악 이안눌(東岳 李安訥)의 동악시단(東岳詩壇)을 중심으로 수창한 승려들과, 초의(艸衣) 선사가 활동했던 두릉시사(杜陵詩社)의 유생들과의 수창을 살펴 두 왕조 시대의 차이점을 집중적으로 검토해 보겠다.


1. 백련사 진정국사의 백련시사

진정국사의 법명은 천책(天頙)인데, 천책이란 법명을 가진 스님이 두 분이어서 혼돈될 때가 있다. 여기 거론되는 진정(眞淨)국사는 《호산록(湖山錄》의 저자이고, 《선문보장록(禪門寶藏錄)》의 저자인 천책은 진정(眞靜)대선사이다. 여기서는 《호산록》에 수록된 시편들에서 유불교섭의 시적 교류를 살피려 한다.

《호산록》은 원래 4권이었으나 현존하는 것은 2권이다. 현존 2권을 상·하권으로 편찬하여 상권은 시, 하권은 소(疏) 서(書) 등의 문으로 되어 있다. 만약 4권이 전해졌다면 더 많은 시가 남아 있었을 것이다. 지금 전해지고 있는 시들은 대부분 백련사의 도반들이 입사(入社)에 관한 내용으로 주고 받은 시이다.

수창한 사람들을 참고 삼아 열거해 보면, 임계일(林桂一) 이장용(李藏用) 유경(柳璥) 김구(金坵) 김록연(金祿延) 정가신(鄭可臣 ?~1298) 김서(金㥠) 이영(李穎 ?~1277) 곽여필(郭汝弼) 등이다. 다른 시문집과 달리 수답의 경우 주고받은 시가 함께 수록되어 있어 당시 문인들의 상황을 알기에 도움이 될 뿐만 아니라, 당시 사회가 성가(禪家)의 사상에 얼마나 영향을 박았는가 하는 점도 잘 이해하게 된다.
다음 몇 편의 수답을 살피기로 한다.

伴食黃扉已八春      재상집에 의지한 생활이 여덟 해
無功可立謾因循      세운 공도 없이 부질없이 머뭇거려
若爲去作社中客      만일 절간의 나그네 된다면
應導何曾林下人      응당 숲 속 사람으로 인도하겠지
四軸初成傳異迹      네 폭의 글로 처음 이적을 전했고
百篇時出指迷津      온갖 시 때로는 길잡이 되었소
遙知一榻香烟畔      아득히 알겠소, 법상 앞 향피운 연기에서
恒見靈山面目新      항시 새로운 영산의 면목.              
— 〈樂軒 李藏用 上〉

念念如遊劫外春      세속 밖의 봄에 노니는 생각 생각
和光何足嘆因循      빛으로 어울리거늘 어찌 머뭇거림만 있겠소
不唯養素資靈覺      바탕을 기름이 신령한 깨우침에 의지할 뿐 아니라
況復說玄服遠人      더구나 현리(玄理)를 말하여 이 사람 설복했소
善繼祖風行正道      조사의 풍도 이음이 바른 길 행함이니
誰嗟叔世溺邪津      누가 속세에 어울려 간사함에 빠진다 하리
在家已得忘家久      집에 있어도 이미 집 잊은 지 오래이니
眞樂軒中樂日新      진락헌 안에서 즐거움 날로 새롭구료.   
— 〈奉啓李侍中藏用入社詩〉

백련사에 입사하겠다는 뜻을 보인 이장용의 시와 이에 답하는 진정국사의 시이다. 나랏일의 큰 임무를 맡은 이장용이 백련사에 입사하고 싶다는 글이다. 이제 대사가 있는 백련사에 입사한다면 동도자로서 자신에게 인도함이 있으리라는 바람이다. 전련의 ‘사축시성전이적 백편시출지미진(四軸初成傳異迹 百篇時出指迷津)’으로 보아 이장용과 진정국사의 사이에는 수시로 시편이 오고 간 것으로 짐작이 된다.

여기에 대한 진정국사의 대답은 굳이 입사가 아니더라도 이미 정도(正道)에 들고 있다는 것이다. 항상 세상 밖의 봄[劫外春]에 놀고 있고, 이미 공명의 세계에 들고 있는데 무슨 머뭇거림이 있느냐는 것이다. 자신의 영각을 기를 뿐만 아니라, 현리(玄理)를 말하여 더 많은 사람을 감복시키고 있지 않느냐는 것이다. 조사의 풍조를 이어 정도를 행하고 있는데 어찌 사도에 빠지겠느냐는 것이다.

집에 있어도 이미 출가한 것이나 다름 없으니, 그야말로 신락(眞樂)의 새로움을 날로 느낀다는 것이다. 이장용의 당호가 낙헌(樂軒)이기에 이름 그대로 즐거움을 누린다는 것이다 여기에서 두 사람의 마음의 교분을 이해할 수가 있다.

다음은 임계일과의 수답시이다.

掖垣秋思坐蕭然      벼슬살이 가을 생각 쓸쓸히 앉아 있자니
正是前賢結社年      이 해는 바로 옛 현인들 결사하던 해
貞節初期鷄省行      굳은 절개 처음부터 鷄林의 대 기대했고
妙香終受鷲峯蓮      오묘한 향기 끝내 鷲峯의 연꽃 사랑하다
九街車馬黃塵暗      아홉 거리 수레 먼지만 자욱하나
千里溪山皓月圓      천리의 계산에는 흰 달이 둥글다
他日相從林下樂      다음날 숲 속의 즐거움 따르면
先聲海角一荒篇      먼저 하신 말씀 이 먼 곳의 거친 글에 더하리 
— 〈弟子左正言林桂一上〉

一入天台慕湛然      한번 천태에 들어 조용함을 사모하여
道場初峙壬辰年      도량은 처음부터 임진년에 당했다
春深不踏溪前草      봄 깊어도 뜰앞 풀 밟지 않고
日用唯攻峯上蓮      날마다 하는 일 책상 위 연꽃에 잠심
欲使佛音流遠邇      부처 말씀 원근에 펴러 하고
曾制祖詰棣偏遠      조사 말씀 두루하려 정제하다
喜君染指醍醐味      그대 이 불법의 맛 물들어
鑽仰山家節要篇      출가의 요긶란 글귀 우러름 기쁘오.              
— 〈答林正言桂一〉

임계일의 시와 그에 답한 시이다. 임계일의 시는 《동문선(東文選)》에 서가 있어 당시의 사정을 짐작하기에 좋은 자료이다. 곧,

丙寅仲秋一日 謁平章慶源公 因語及宋學士王父公禹偁西湖蓮社詩 其起聯云 夢幻吾身是偶然 勞生四十又三年 時予適已過先師不惑之年 而加數勢 惻然有感 因和成一篇 遙寄呈大尊宿丈下 以達鄙懷 且約他時問道 冀綠蘿煙月 無以予爲生客耳

라 하였으니, 왕우칭의 시에 “이 몸 꿈처럼 우연히 와서 어려운 삶 43년이 되다.”라는 시구를 이야기하다 자신도 이미 40이 지난 것을 느껴 이 시를 보낸다는 것이니, 기쁨이나 슬픔의 정감을 스스럼없이 논의하는 처지임이 저절로 이해된다.

관가의 가을 쓸쓸함 속에 옛 분들이 40을 넘어 시문으로 맺은 결사의 해를 생각하여 높은 분을 기리고 있다. 충절을 지키려 국가에 몸바치고 있지만, 이제는 영축산의 연꽃 향기가 사랑스러운 것이다. 번화한 서울 거리는 먼지로 쌓여 있지만 저 계산에는 흰 달이 둥글 것이라는 산사의 동경이다. 서에서 보듯이 몽환 속에 우연히 온 인생이 불혹의 나이를 넘기고 있어 한번 뒤돌아보는 계기가 되기도 한다. 승속을 넘나드는 고결한 사귐을 여실히 보여 준다.

다음은 김록연(金祿延)과의 수답시이다.

塵勞眼前事紛然      눈앞 시끄러운 세속 일 수고하다
汨沒虛消耳順年      헛된 일 골몰하다 예순이 되었네
吟樂不須腸吐錦      즐거움 읊기야 꼭 창자 속 비단 토함 아니나
念經唯冀舌生蓮      경을 외움은 오직 혀끝에 연꽃 피기 바라지
羨君白業花曾秀      그대 깨끗한 꽃잎 피움 부럽고
愧我玄門果未圓      나는 玄門 과일 익지 않음 부끄럽다
只爲掛名香社裏      다만 선사에 이름만 얹고
强將荒句續佳篇      애써 이 거친 글로 좋은 글귀 잇기 바라오.       
— 〈中書舍人金祿延上〉

逃名入社豈徒然      이름을 禪社로 얹음이 우연이겠소
正是蘇山妙悟年      大蘇山 思大師 뵙던 스물세 살 같았지
塵靜虎溪携靖節      먼지 없는 虎溪에서 도연명 손잡고
風淸衆席引張蓮      바람 맑은 선방에서 펼친 연꽃 이끈다
爲成五十人隨喜      50여 인의 기쁨 따름 이루기 위하여
感悟三千境最圓      삼천대천의 원융한 경계에 감동하네
珍重中書賢學士      진중하신 그대 중서의 현학사는
留心此事寄佳篇      이 일을 마음에 새겨 좋은 글 보내었네.   
— 〈答中書舍人金祿延〉

두 분의 정의를 엿볼 수 있는 시이다. 세속의 일에 골몰하다 늙음에 이르러 옛 정과 함께 조용한 선경(禪境)을 그리는 마음이다. 젊은 시절에 이미 불법에 귀의하여 지금껏 그리는 정성이 주고받는 시에서 다정하게 부각된다.

‘正是蘇山妙悟年’ 구에는 《동문선》에 다음과 같은 주가 있다. “天台智者一十三 始謁大蘇山思大禪師 妙悟法花三昧 我輩年亦至一十三 始謁圓妙 聖凡雖殊 似遵遺躅 故及此云(천태지자가 13세에 대소산 사대선사를 찾아가 법화삼매를 깨달았다. 우리도 13세에 원묘선사를 찾아 갔으니, 성인과 범인의 일이 다르기는 하나 옛 자취를 따른 셈이 되어 이른 말이다.)”하였으니, 두 분이 젊어서 원묘선사에게 함께 입문했던 것으로 여겨진다. 그러나 60의 나이가 되어 서로의 길이 현격히 달라졌으니, 옛 정이 더 두드러졌던 것이다.

위에서 살펴본 몇 편의 시에서 보이듯 〈호산록〉은 수록된 시가 비록 일부분이라 하더라도 당시 백련사를 중심으로 한 한 시대의 문인 생활을 살필 수 있는 좋은 사료이니 당시의 문단사로 보아도 손색이 없다.

2. 운곡(雲谷)이 유자와 수창한 시편들

조선조에 들어 유교를 건국이념으로 하여 불교를 배척하게 되니, 승려들의 존재가 어려운 것이 사실이지만, 그래도 500여 년의 역사를 이어오며 종교로서 힘을 유지하는 것은 이 어려운 여건에도 굴함이 없이 당당히 교리를 수호한 호법정신의 위대함이었다.

이러한 호법의 자세에 음으로 양으로 도움을 준 분들이 있다면 이 또한 당시 사대부이면서 시인으로 자부할 만한 문학인이었던 것이다. 그들은 시라는 매개체를 이용하여 너와 나의 격의 없는 교분으로 서로의 인격을 존중하여 상대방의 이념을 너그러이 수용하는 참다운 지식이었던 것이다.
 
1) 운곡(雲谷)과 동악(東岳)의 수답시

동악 이안눌(東岳 李安訥, 1571~1637)은 주변에 당시의 승려가 모두 모여든 인상을 받게 한다. 우선 그의 문집인 《동악집》에 승려로 보아야 할 인물의 숫자만 해도 백 명에 가깝다. 웬만한 스님은 그에게 시를 주고 받음이 일상적이었던 것 같다. 남한산성에 주석한 희안(希安)스님은 강화유수로 가 있는 동악(東岳)을 수시로 찾아가 시를 수창하고 있다. 희안은 당시 시(詩)·서(書)·화(畵)로 알려져 있던 승려이니, 동악의 시에 이끌려 먼 길을 마다 않고 찾았던 것으로 보인다.

그중에서도 가장 많은 시를 주고 받은 스님이 운곡 충휘(雲谷冲徽, ?~1613) 선사이다. 《운곡집(雲谷集)》에 수록된 동악과의 수답시가 21제에 30수나 된다. 운곡은 동악뿐만 아니라, 당시의 명망 있는 문인과도 교류가 잦았으니, 오산 차천로(五山 車天輅, 1556~1615), 지봉 이수광(芝峰 李晬光, 1563~1628), 계곡 장유(谿谷 張維, 158~1635), 탄은 이정(灘隱 李霆, 1541~?), 관해 이민구(觀海 李敏求, 1589~1670) 등 여러 시인의 이름이 그의 문집인 〈운곡집〉에 오르내리고 있다. 더구나 수창한 상대방의 시도 아울러 기록되어 있어 수창하던 당시의 사정을 살피기에도 아주 좋은 자료이다.

우선 운곡이 동악과 수창한 시를 살펴보는 것으로 유불 교섭의 조그만 사례를 살펴보려 한다.

謹次錦溪明府東岳李先生
白日鈴齋靜      대낮에도 군청의 청사는 조용하니
民閑一境春      백성도 한가한 한 고을의 봄일세
花村聞犬吠      꽃 마을에 개의 울음을 들으니
知有醉歸人      취해 돌아오는 이 있음을 알겠네.

太守初臨郡      태수가 처음 고을에 이르자
黎民盡闢田      백성들은 모두 밭을 일군다
里無官吏跡      마을에 관리의 자취 없으니
孤犬向陽眠      외로운 개만 햇볕에 존다.               
— 《雲谷集》 한국불교전서, 8-266.

금계(錦溪, 충남 금산) 군수로 가 있는 동악에게 보내는 시이다. 군 청사에 할 일이 없음은 백성이 한가한 탓이다. 이태수가 부임하여 백성들이 마음 놓고 생업에 종사하게 되었다. 삶을 간섭하는 관리가 마을에 이르지 않는다 이따금 술 취한 이나 있어 동네의 개를 괴롭힐 뿐이다.

선정(善政)하는 태수를 잘도 묘사했다. 이에 화답하는 동악의 시는 다음과 같다.

次韻 答沖徽上人
白月爐峯雪      흰 달은 비로봉의 눈이고
黃梅野館春      누런 매화는 들 집의 봄일세
洞天歸計晩      동천 골 안에 돌아갈 계략 늦으니
華鬢愧山人      센 귀밑머리는 스님께 부끄럽구나.

峽縣迎梅雨      산골 마을에 매화 비를 맞이하고
湖鄕種秫田      호수 고향에 수수 밭을 가꾼다
黃堂一枕夢    태수 관아 한 베개의 꿈은
歸伴白鷗眠      돌아가 백구와 동반하여 졸자.
— 《東岳集》 十-45

충휘는 운곡의 법명이다. 운곡이 보내온 시에 대한 답이다. 보내온 시는 일 없이 평화로이 다스리는 관장을 찬양했고, 답으로 보내는 시는 산인인 중이 부럽다는 기림이다. 눈같이 흰 달이요 누런 매화의 아름다움이지만, 귀밑머리 희어지도록 굴레를 벗지 못하는 자신의 안타까움이다.

安城社再用前韻 敬呈東岳李相國
野館春多雨      들 관사의 봄에는 비가 많으니
溪橋水浸田      시내 다리에 물이 밭으로 넘친다
一笻今日別      지팡이 하나로 오늘 이별을 하면
何處對床眠      어느 곳에서 침상 마주해 조나.           
— 《雲谷集》 상동서, 8-266

안성에서 다시 동악에게 준 운곡의 시이다. 오늘 이별하면 언제 다시 만나느냐는 아쉬움이다. 이에 대한 동악의 대답은 이러하다.

復用沖徽上人韻 題安城倉
野鳥啼茅屋      들새는 초가집에서 울고
山雲覆麥田      산 구름은 보리밭을 덮다
行春少官事      봄을 보내며 관가 일 없어
虛館日高眠      빈 청사에 해 대낮까지 졸다.                 
— 《東岳集》 十-45〉

일이 없는 관청의 묘사이니, 은연중에 선정을 자랑하는 느낌이다. 일이 없어 관사에 해가 높도록 자고 있다는 것이다. 여기서 잠시 두 시인의 시의 수사적 기법을 훔쳐보아야 하겠다. 시의 전후 단락이 자연의 서경을 앞에 두고 지금의 사실을 뒤로 이어서 대상의 자연과 거기에 거처하는 주인공을 살며시 들어내고 있다. 들 새, 산 구름의 한가로움이 이미 주인의 한가함을 암시하고 있다. 자연과 나의 물아일여적 배치법이다. 두 사람은 이러한 시의 서사력에서 더욱 가까워진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도 하게 된다.

錦溪李使君移尹慶州 路上吟別奉酬 春日用前韻見示之作
馬隨流水去      말은 흐르는 물 따라 가고
笻向故山歸      지팡이는 옛 산 향해 온다
亂峰深雪裏      늘어진 봉우리 깊은 눈 속에
惆悵欲沾衣      쓸쓸한 정이 옷을 적시려 해.              
— 《雲谷集》 상동서, 8-266

금계태수에서 경주 부윤으로 옮겨 가는 동악을 그리며 지은 시이다. 중앙에서 멀어지는 한 벼슬아치의 심정을 잘 묘사했다. 이에 대한 동악의 화답은 이러하다.

次徽師道中見寄韻
誤被浮名繫      잘못 뜬 이름에 묶이게 되어
滄洲久未歸    물갓으로 오래 돌아가지 못해
春來釣船夢      봄이 오면 낚시 배의 꿈으로
煙雨滿蓑衣      안개비가 도롱이 옷에 가득해.                  
— 《東岳集》 十-50

뜬 세상의 이름에 묶여 자연으로 돌아가지 못하는 자신은 항시 스님만 못한 처지이다. 말 없이 상대방을 기리는 수법이다.

還山道中 却寄東岳李明府
白水呼船渡      흰 물살에 배를 불러 건너고
靑山信馬歸      푸른 산에 말에 맡겨 돌아가다
谷風鶯語夕      골 바람은 꾀꼬리 울음의 저녁
花露濕荷衣      꽃 이슬에 연꽃 옷이 젖는다. 
— 《雲谷集》 상동서, 8-266
次徽師道中見寄韻
虎溪春又晩    호계에는 봄이 또 늦었는데
空送老僧歸      공연히 늙은 중을 보내네
吏役眞堪愧      관리의 일 참으로 부끄러워
風塵染素衣      풍진 세속에 흰 옷 물들어.                      
— 《東岳集》 十-50

산의 자연으로 돌아가는 스님과 관직으로 자유롭지 못한 지방장관의 수창이다. 산인은 어디까지나 자유로움의 표현이요, 관리는 노역에 시달려 풍진의 먼지 속에 젖음의 대조가 잘 보인다. 그러면서도 서로 시라는 매개물로 하여 먼 거리를 항시 이어주고 있다.

지금까지는 운곡이 먼저 주고 동악이 수답하는 시를 보았으니, 이도 역시 〈운곡집〉의 편찬에 따른 것이므로 운곡을 주인공으로 내세우려는 편찬적 의도도 있을 듯하고, 아무래도 제도 안에 있는 관리에게 방외자적 승려로서는 먼저 수작을 드리는 것이 자연스런 현상일 것이다.
다음은 동악이 먼저 수증하고 거기에 답하는 운곡의 시를 보자.

寄贈沖徽上人
聞說名僧方外遊      유명한 스님이 방외에 노닌다 들으니
淸詩句句似湯休    맑은 시 글귀마다 탕혜휴와 같구료
春風莫道雲山隔      봄바람에 구름 산 막혔다 말하지 말라
一采金英寄郡樓    한 번 국화를 꺾은 뒤로 군루에 기탁하오.    
— 《東岳集》 十-44〉

安城社 敬次東岳李使君見寄之韻
安城縣裏使君遊       안성의 고을 안에서 군수님은 노니시며
山水同僧說未休       산과 물과 같은 중이라고 쉼 없이 말해
薄酒三盃成小醉       박주의 술 석 잔으로 약간은 취했는데
一簾明月宿高樓       발에 걸린 밝은 달이 높은 누대에 자다.       
— 《雲谷集》 상동서, 8-268

남조 송(宋)의 승려 시인인 탕혜휴(湯惠休)에 비유되는 운곡으로 대접한다. 멀다고 막힘이 아니라 시로 주고 받음이 서로 항시 이어주는 매개체이다.

동악 이안눌이 시로써 승려들과 격의 없는 사귐을 유지한 것은 조선조 사회에서 유가와 불가라는 벽을 허무는 도구가 바로 시의 수창이었음을 여실하게 보여주는 한 예라 하겠으며, 유가적 사대부들은 배불이라 하여 불교를 모두 경원하였다고 단정할 수 없는 실례이다. 동악시단(東岳詩壇)이라 자서(自署)할 정도로 당시의 문단을 주도한 동악에게는 동도자로서의 유가 문인만이 아니라, 방외자로 인식되는 승려 문인도 많았고, 또 그들 승려와의 수창이 바로 시의 순수성을 더 들어낼 수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 하나의 예가 운곡 충휘와의 수답이라 하겠다.

동악이 당시의 스님들과 얼마나 교분이 많았고 자주 만났는가 하는 점을 여실하게 보여 주는 시가 있으니 다음과 같다.

積石寺妙正上人 傳燈寺志敬上人 淨水寺裕巖上人 文殊寺天悟上人 一時見訪 喜甚有賦 時南漢 山義賢 眞一 希安三禪師竝來 見余而去 纔兩日矣

적석사 묘정상인 전등사 지경상인 정수사 유엄상인 문수사 천오상인이 일시에 찾아와 기쁨이 넘쳐 짓다. 이때 남한산 의현 진일 희안 3선사도 함께 와서 나를 보고 간 지가 겨우 이틀이다.

平生性癖愛雲林      평생 성격이 괴벽하여 구름숲을 사랑하니
到處沙門託契深      이르는 곳마다 스님과 교분이 깊구나
昨日三師纔見過      어제 세 선사가 겨우 다녀갔는데
今晨四釋又招尋      오늘 네 스님이 또 찾아 주었네
年荒吏哂頻留饋      흉년이라 아전들 자주 먹어 댄다 빈정대고
夜短僮嗔久對吟      밤이 짧으니 종놈들 시 오래 읊는다 욕해
直欲身隨飛錫去      곧바로 이 몸 나는 지팡이 따라가고 싶지만
秋霜滿鬢愧朝簪      서리 머리 가득하고 벼슬 비녀 부끄럽네.  
— 《東岳集》 十八-3

어제 스님 세 분이 다녀갔는데 오늘 다시 네 분 스님이 찾아왔다. 손님 대접하는 아전들은 불평이 많다. 시를 읊는다고 짧은 밤을 지새우니 종놈들도 귀찮다는 것이다. 이때가 동악이 강화 군수로 있을 때일 것이다. 군청의 관아가 스님들의 숙소인 듯하다. 이렇게 교류가 자유로웠던 것이 바로 시를 매개로 주고받는 우정이다. 동악이 집무하는 관청이 바로 동악시단(東岳詩壇)이었던 것이고, 이 시단의 구성원의 일부가 스님들이었던 것이다.

2) 그 밖의 수창시들

敬次灘隱石陽君垂示之韻
삼가 탄은 석양군이 보낸 시에 차운함
東林一夜曾同宿      동림사의 하루 밤을 진작 함께 자고
淸曉開門雪滿巓      맑은 새벽 문을 여니 눈이 산마루 가득
因畵數叢江上竹      인하여 강 위의 대를 두어 폭 그리니
似聞風遞葉聲傳      잎이 대신하여 전하는 바람을 듣는 듯.      

附次韻
倚石凍泉寒峽裏      바위 기댄 얼음 샘물의 추운 골짜기 속
經霜落木晩山巓      서리 지나 지는 잎이 늦은 산 마루일세
石門月出鳥歸盡      돌 문에 달이 솟으니 새 모두 돌아가고
淸磬一聲雲外傳      맑은 경쇠소리 한 가닥이 구름 밖에 전해.  
— 《운곡집》 8-26

敬次觀海李方伯韻
삼가 관해 이방백의 시에 차운함
老禪家在海西山      낡은 중의 집이 바다 서쪽 산에 있으니
天外孤雲夜獨還      하늘 가 외로운 구름은 밤에 홀로 돌아와
石榻幾時重入定      돌 책상에 몇 번이나 거듭 입정했던가
滿庭花影啓松關      뜰 가득한 꽃 그림자에 솔 문을 닫았네.

附原韻
杖錫隨緣別故山      지팡이는 인연 따라 고향 산을 이별하여
春來塵土不知還      봄이 온 먼지 속세에 돌아갈 줄 모르나
香雲滿壑無人到      향기 구름 골에 가득해도 오는 사람 없으니
花外禪扉盡日關      꽃 밖의 절집 사립문은 종일 닫혀 있구나.  
— 《운곡집》 8-270
 
敬次洪州使君芝峯李相國韻
삼가 홍주사군 지본 이상국의 시에 차운함
洪郭重來謁      홍주의 성 안에서 다시 와 뵈오니
懸燈蹔展眉      등 밝혀 잠시 눈썹을 폈네요
人逢今日雨      사람은 오늘의 비에 만났지만
花發舊年枝      꽃은 지난 해의 가지에 피었네
蔬筍山僧偈      나물 채소 같은 산승의 게송이나
瓊琚刺史詩      구슬 같은 원님나리의 시구이지요
一宵淸意味      하룻밤의 맑았던 속뜻을
應復入峯知      응당 산 속에 들어 다시 알겠지요.

附原韻
擁褐鈴齋夜      담뇨를 웅켜안은 군청의 밤이요
靑燈對雪眉      푸른 등 밑에 마주한 흰 눈썹
樓雲眠古堞      누대 구름은 낡은 담에서 졸고
窓雨響寒枝      창가의 빗방울 추운 가지에 울려
細討經中字      경전 안의 글자를 자세히 논의하고
閑尋橐裏詩      전대 속의 시구를 한가로이 탐색해
遙看心性處      멀리 바라보는 마음 본성의 처지는
不語兩心知      말 없이도 알아지는 두 사람 마음.   
— 《운곡집》 8-271

敬次五山車校理韻
삼가 오산 차교리의 시에 차운함
一笻疎雨下山巓      지팡이 하나 가랑비에 산마루를 내려가
江海扁舟訪謫仙      강과 바다 조각배로 귀양온 신선을 찾다
洪館初逢仍乞句      홍주 객관에서 처음 만나 시구를 구걸하고
公城重見更論禪      공주의 성에 다시 보고 또 선을 담론하였네
窮通有命那書字      궁하고 통하는 것 운명인 것 어찌 글로 쓰며
出處無機不怨天      나아가고 물러감 기회 있음에 하늘 원망 왜해
家在玉京身萬里      집은 백옥의 서울에 있고 몸은 만리의 밖이니
故園松菊定蕭然      고향 동산의 국화 소나무 바로 아슬히 쓸쓸.

附原韻
不是昌黎款太巓      창려 한유가 태전스님 그리움이 아니라면
何如寥老遇坡仙      삼요선사가 동파 소식 만남이라면 어떨까
久知得適能忘適      적정함 알아야 적정함 잊음을 오래전 알고
方信安禪可縛禪      선에 안주함이 선에 속박됨 이제 믿겠네요
夜靜千江空皓月      밤 고요하니 일천 강에 흰 달이 비어있고
雲開萬里豁靑天      구름 만 리에 개었으니 탁 트인 푸른 하늘
南華巵語筌蹄在      장자의 어리석은 말은 말 안에 갇혀 있으니
悟道冥心合自然      진리 깨우친 깊은 마음은 자연에 부합되어야.
— 《운곡집》 8-273

4. 초의선사(艸衣禪師)의 수창시(酬唱詩)                         

1) 동일주제의 연작시

초의의순(艸衣意恂, 1786~1866) 선사는 그 당시 큰 유생들과 교분이 남달리 두터웠다. 스님의 시문집에는 스님들과의 교유적 시보다도 유생과의 수답이 두드러지게 많다. 보내온 시가 한두 수에 지나지 않아도 스님의 수답(酬答)은 10여 수까지 이어지는 동일 제목으로 짓는 수법이 놀라울 정도이다.

조선조의 선사들이 유가와 시를 주고받음이 일상적 생활처럼 되어 있던 것이 당시의 사정이기는 하나, 초의선사가 유가와 교유하는 수답은 유달리 많았다. 당시의 사조가 중국의 실학적 학풍이 유입되던 시기이고, 스님이 교유한 유가의 학자들이 이 실학적 사조가 강했던 분이었던 것을 감안하면 스님의 시문은 당시의 문학사적 측면에서 주목되어야 할 대목이다.

我思紫霞洞      내 자하동 생각하니
花木正繽紛      꽃 나무 정히 어지럽겠지
淫雨苦相防      장맛비 괴로이 서로 방해하니
束裝踰二旬      행장 차리고 20일이 지나네
深孤長者命      어른의 청 깊이 저버려
無由訴情眞      참다운 정 하소연할 길 없소
星月露中宵      달과 별이 한밤에 드러나고
屯雲散淸晨      짙던 구름도 흩어진 맑은 새벽
欣然起長策      흔연히 긴 지팡이를 일으키니
物色正鮮新      물색도 정히 새롭고 고와라
褰裓涉幽澗      옷을 걷고 깊은 새내를 건너
俛首穿深筠      머리 들어 깊은 대숲 뚫다
行至萬瀑橋      만폭교까지 걸음이 닿자
天容忽更顰      하늘 모습 다시 찡그려
谷風動林起      골 바람이 숲을 흔들어 일고
流氣被嶙峋      흐르는 물기 산자락 덮다
飛沫跳水面      나는 물방울 수면에 뛰니
細汶起鱗鱗      가는 무늬가 비늘처럼 일다
中行成獨復      가는 걸음 홀로 돌아오게 되니
惆悵難具陳      쓸쓸한 심정 다 펼수 없구나
由旬尙如此      몇 리의 길도 이와 같으니
何以窮八垠      어떻게 천하를 다하랴
哀哉七尺身      슬프다 칠척의 이 몸을
輕擧諒無因      가벼운 나들이도 길이 없구료.

〈조우미왕다산초당(阻雨未往茶山草堂)〉이라 제한 시이다. 다산과의 교분은 널리 알려져 있는 사실이다. 여기서는 만나려 해도 만나지 못하는 심회를 서술하였다. 만나지 못하는 심정을 주변 경관에 의해 그러함을 말했다. 장마철의 물색을 여실하게 말하여 가지 못하는 이유를 외계의 사물이 가로막음으로 설명한 셈이다. 비가 오락가락함으로 해서 길을 떠났다가도 중도에 돌아오는 상황이 어쩌면 세상의 인정을 비겨서 말한 듯도 하다. 이 시는 날씨의 변덕을 순서적으로 잘 설명함으로 해서 길을 끝까지 가지 못하는 안타까움을 보인다. “星月露中宵 屯雲散淸晨”에서는 희망적 앞길을 보이다가 “行至萬瀑洞 天容忽更顰”에서 마침내 앞길이 저지당하고 만다. 가까운 길도 이러하니 넓은 천하를 어찌 다하랴(由旬尙如此 何以窮八垠) 함은 구도의 길을 걷고 있는 자신의 모습을 보인 것이라 해도 무방하겠다.

이 시는 그리운 이를 만나려 하나 만나지 못함을 말하면서도 스님으로서의 구도적 자세도 은연 중에 보이는 시라 하겠다.

선사께서 유가와의 수답에서는 즉석에서 여러 수를 연작하는 것이 일상의 예이어서 많은 경우에는 20여 수까지 연작되는 경우도 있다. 이것이 바로 선사의 민첩한 시재였던 것이고 이러한 시재의 탁월함이 사대부와의 처지의 다름이나 직위의 고하, 연치의 높낮이에 구애 없이 시를 매개로 해서 모였던 것으로 보인다.

동장(東莊)에서 승지인 김재원(金在元), 김경연(金敬淵), 김유근(金逌根, 1788~1850), 김정희(金正喜, 1786~1856)와 이별하면서 지은 시는 무려 21수에 달하고 있다. 전별의 자리라면 즉석 수창일 터인데 이런 양의 작시를 할 수 있었다면 이는 놀라운 시재라 하지 않을 수가 없다. 이 때 이 자리가 남달리 다정했던 자리이었음은 추사와의 교분으로도 이해된다. 추사와는 생년이 같은 동갑이고, 황산 김유근(黃山 金逌根)은 선사보다 1년 위의 연상이다. 나이가 같음으로 해서 두터운 친분이었을 것으로 이해된다.
다음 몇 수를 가려보자.

旅館違良知      나그네 집에서 좋은 친구 이별하니
竟日愁悄悄      종일토록 시름으로 섭섭하구나
獨憐霽後峰      홀로 연련하노니 비 개인 봉우리가
姸姸露林表      숲 밖으로 곱게곱게 드러나는 것을.

忽開上方信      갑자기 상방의 서신을 펴자
鸞驂稅雲端      난새 수레 구름 끝을 가다
悠然起長策      유연히 긴 채찍을 날려
超遞躋巑岏      높은 뫼뿌리 뛰어넘었네.

澗口雲方合      시내 어구까지 구름이 맞닿아
山頂日未顯      산마루엔 아직 해 드러나지 않다
吁嗟虛谷中      오! 이 빈 골짜기에서
孤往竟誰戀      외로운 걸음 누구와 연련해야 하나.

제1수에서 3수까지이다. 네 사람과 헤어져야 하는 서곡이다. 이렇듯 이 시는 21수가 한 주제로 이어지는 연작의 형태이다. 나그네길에서 서로 이별해야 하는 외로움을 주변의 경관을 빌어서 은연히 나타내고 있다. 첫 수에서는 개인 날씨에 곱게 솟은 숲으로 희망적 우겅을 서술하고. 다시 맞물리는 구름이 해를 가리는 어둠으로 이별의 정한을 암울하게 그리고 있다. 친구는 만나서 기쁘고 헤어져 섭섭함을 주변의 경관으로 잘도 상징화하고 있는 것이다.

東老題後跋      동로 김재원이 발문을 쓰는 것은
爲識雪鴻遊    눈에 기러기 자욱 남기려 함이나
明朝成古今      내일 아침이면 옛날 지금이 되어
殊覺此生浮      문득 이 삶이 뜬 구름임을 깨닫지.

將解潮州袂    韓愈를 조주로 보내던 소매 이해하려고
更題河梁篇    다시 공자가 다리에서 쉬던 시편을 쓰다
詞惋體古淡      말씨 부드러워 고담을 본받으니
勝獲靑瑤鐫      푸른 구슬의 뛰어남 얻음보다 낫다.
夕陽芳草路      지는 해 꽃다운 풀의 길에
鳴騧就駸駸      우는 말도 점점 내달아
臨高一遙送      높은 곳에서 멀리 전송하니
秋山嵐氣侵      가을 산에는 아지랑이 감도네.

제19수에서 끝 수까지이다. 결론 부분이다. 동로 김재원에게 발문을 쓰게 했던 것 같다. 놀이라는 것이 눈 위에 남긴 고니의 발자국이다. 내일이면 사라져 없어진다. 내일이면 어제가 옛날이다. 시를 쓴다고 하는 것은 어쩌면 이렇게 사라짐을 남기는 작업일 수도 있다. 떠나는 걸음은 한유가 조주로 귀양가는 길처럼 멀지만, 공자가 본국으로 돌아와 다리 위에서 쉬듯이 고향으로 돌아가는 기쁨도 있을 것이니 이런 희비의 양 끝을 이어주는 것이 바로 시를 짓는 의미이다.

이제 결론을 내려야 한다. 시선이 닿을 수 있는 곳까지 멀리 와서 보내는 지금, 지는 해 산자락에는 아지랑이가 감싼다. 이별이란 이쪽저쪽의 거리로 갈라지는 것인데, 이런 때의 시를 지음은 이 거리를 잇는 역할이다. 이러한 거리의 이음을 송별의 한 자리에서 단숨에 21수의 연작을 하고 있다. 한 수 한 수가 각기 독립되면서도 문맥이 하나로 이어지는 것이 한 편의 장시처럼 느끼게 한다. 여기서 초의선사의 작시적 재능의 민첩성을 이해하게 한다. 이 민첩한 재능이 승속을 초월한 동호인으로 단결되게 한 것이다.

스님의 시는 주고받는 수창(酬唱)의 시가 많은데, 한 번의 화답에 10 수 이상인 것도 많다. 이는 스님의 작시의 민첩성을 여실히 보이는 대목이다. 우선 제목만 살펴보아도 다음과 같다.

“奉和酉山 十二首” “吳大山昌烈謁酉堂於古湖 和石屋閑居韻見寄 次韻奉呈 十二首” “春日酉山見寄一絶 奉和答之 十首” “雲翁月槎用前韻見寄 次韻却寄 十首” “奉和于石申公見贈 十首”

이 중에서도 “춘일유산견기일절 봉화답지”는 저쪽에서 1수의 시를 보내온 것에 대한 10수의 화답이니, 동일한 운을 10번 반복하는 것이다. 동일운을 10차례나 반복한다는 것은 그만큼 많은 어휘력이 없이는 불가능한 것이다. ‘扉’ 자의 용례를 보면 ‘竹下扉’ ‘水際扉’ ‘宋玉扉’ ‘款竹扉’ ‘扣仙扉’ ‘啓荊扉’ ‘綠巖扉’ ‘兩扇扉’ ‘巖上扉’ ‘聖女扉’ 라 했으니, ‘사립문’의 종류를 이렇듯 여러 가지로 나누어 말하고 있는 것이다. 여기서 다시 선사가 수창에 뛰어난 시인임을 강조하게 된다.

어제(御製)의 화운 하나를 소개해 보자. 신축(1841) 정월 13일 “봉화어제신월(奉和御製新月)”이라 제한 시가 있다. 우선 “御製元韻”부터 보자.

半輪月色到中天      반 바퀴 달빛이 하늘 중앙에 이르러
明照山河萬國邊      산과 바다 온 나라의 갓까지 밝게 비추다
上下淸光莊暮景      아래 위로 맑은 광채 저녁 경치의 장관이
能令騷客夜無眠      시인 묵객에게 밤잠을 자지 못하게 하네.

이는 헌종이 조각달을 보고 지은 것이다. 역시 군왕답게 온 나라의 끝(萬國邊)까지 비치는 청광(淸光)에 힘을 주었다. 이를 화답한 스님의 시는 이렇다.

新月姸姸初上天      초생달 곱게 곱게 처음 솟아 오르니
淸光藹藹照無邊      맑은 광채 밝고 밝아 가 없이 비춘다
衆星環拱銀河淨      뭇별이 북두로 향하고 은하 청정하니
玉露盈襟夜不眠      가을 이슬 품 속에 차 밤잠을 못 이뤄.

군왕의 시에 대한 화답이니 당연이 군왕에 대한 흠모이다. 원시의 ‘明照山河萬國邊’의 군왕적 기상에 ‘淸光藹藹照無邊’으로 대응하여 군왕의 맑은 광채(淸光)가 가없이(無邊) 비침을 칭송하였다. ‘중성환공(衆星環拱)’은 북두성을 중심으로 모이는 뭇 별을 상징하여 군왕을 향해 합심하는 백성을 상징하는 용어이다. 《논어》의 “정치를 하되 덕으로 하게 되면 비유컨대 북두성이 제 자리에 있으매 뭇별이 모이는 것과 같다(爲政以德 譬如北辰居其所 而衆星拱之).” 함에서 유래한 것이다. 옥로(玉露)는 구슬 같은 가을 이슬을 말함이지만, 품에 가득한 가을 이슬이란 임금의 은혜를 상징할 수도 있으니, 어제의 화운으로 이렇듯 적절하게 아귀를 맞추기가 그리 쉬운 것도 아니다.

이 어제의 운으로 “用前韻奉呈水使沈公” 5 수가 있으니, 스님의 화운은 한두 수로는 직성이 풀리지 않았던 것이다.

2) 두릉시사(杜陵詩社)의 시인들

초의선사의 시적 교분은 거의가 유가의 사대부와 하고 있다. 동도자인 승려와의 수답은 몇 편에 불과하다. 지방관으로 부임하는 관원도 선사와는 시를 수답하는 것이 의례적이었던 것 같기도 하다. 진도목관(珍島牧官)으로 부임한 북산도인(北山道人) 변지화(卞持和)에게 화답한 2 수와 그 밖에 7 수, 5 수를 화답한 것이 있다. 남해(南海) 현감인 정양도인(晶陽道人) 신태희(申泰熙)에게 화답한 5 수와 8 수 등이 있다. 이는 일지암에 계실 때 지방관리의 왕래였던 것이고, 서울에 올라와서 당대의 문인들과 모여 수창함이 많았다.

두릉시사에 모여 지은 “杜陵詩社與諸詞伯同賦”나 “菜花亭雅集”이 그러한 것이다. 이때 모였던 문인들이 영명위 해거재 홍현주(永明尉 海居齋 洪顯周), 유산 정학연(酉山 丁學淵), 운포 정학유(耘逋 丁學遊), 형제와, 진재 박종림(眞齋 朴鍾林). 광산 박종유(匡山 朴鍾儒). 경당 윤정진(絅堂 尹正鎭), 동번 이만용(東樊 李晩用), 저원 홍희인(樗園 洪羲人), 약인 홍성모(葯人 洪成謨) 등이다.

雲蹤到此愛幽居      구름 자취 여기 와 그윽한 거처 사랑하나
邱壑情緣笑未除      산 속의 정과 인연 웃어도 못 버리네
細月娟娟新霽夕      가는 달은 아른아른 새로 개인 저녁이고
斜陽艶艶澹烟墟      지는 볕은 곱게곱게 맑은 연기 옛 터이지
安貧達士誰能致      가난에 통달한 선비 누가 이룰 수 있으며
高尙明時易見疎      밝음을 숭상하는 때도 소외되기 쉬운 것을
江近林深人跡少      강 가깝고 숲도 깊어 사람 자취 드무니
此中友樂半禽魚      이런 중 친구의 즐거움 반은 새와 물고기.

스님의 시이다. 운수행각의 중으로 여기 와서도 이러한 시사의 조용한 곳을 찾았지만, 산 속의 인연만은 버리지 못함을 전제로 하고 있다. 가는 달의 초생달이나, 지는 해의 석양 볕은 산 속이나 여기나 다름이 없겠지만, 세속의 안빈(安貧)이 그리 쉬운 것도 아니고, 밝은 세상이라 해도 소외되기 쉬운 것이 인정이다. 그러니 강과 숲에 사는 이의 친구가 새이고 물고기임을 은연히 자랑하고 있다.

不出蕭然環堵居      쓸쓸한 토담 집의 거처 벗어나지 않으니
梅花開落見乘除      매화 꽃 피고 져 세상의 변화를 보인다
年華忽幻雲歸壑      세월의 햇수는 황홀히 골로 가는 구름이고
夜色空明水接墟      밤빛은 허공을 밝혀 물이 빈 터에 닿다
使酒堪憐窮後數      술로 하여 궁한 살림의 운수 애석해 하고
談禪還惜病中疎      선의 말씀 오히려 병 중에 생소함 애석하다
只須共向臨平老      다만 함께 평탄하게 늙어 감이 필요하니
君在風蒲我釣魚      그대는 바람의 부들이고 나는 고기를 낚아.

유산 정학연의 시이다. 두 사람의 우정을 자연 경관의 변화에 적절히 투영시키고 있다. 선사와의 수창을 의식해서 ‘운귀학(雲歸壑)’이라 하거나, ‘담선(談禪)’이라 해서 서로의 대좌임을 암시하고 있다. 끝내 우정 어린 염려로 ‘평탄한 늙음(平老)’을 기대했다.

水雲鄕裏久藏身      물과 구름의 마을 속에 오래 묻혔던 몸이나
詩酒相歡不厭頻      시와 술로 서로 즐김을 자주 해도 싫지 않아
不是淵明記裏客      도연명의 기억 속에 있을 나그네 아니고
應爲摩詰畵中人    응당 왕마힐의 그림 속 사람 되어야지
煙霞釀作容儀古      안개 아지랑이가 빚어낸 용모는 옛스럽고
風雨飜傾句法新      비바람이 번득이는 시구의 구사는 새롭네
好是士常眞戒在      좋을시고, 선비는 항상 참다운 경계 있으니
請車帶索不言貧   수레 빌리고 새끼줄 띠라도 가난 말하지 않다.

《채화정아집(菜花亭雅集)》이다. 이때도 유산, 운포, 진재, 광산이 모였었다. 이 시로만 보아서는 승려라는 직분을 이해할 수 없는 순수한 시이다. 여기에 같이 읊은 유산의 시 하나만 소개한다.

半世無端老此身      반 평생을 까닭 없이 이 몸이 늙었지만
屠蘇到手太頻頻   술이 손에 닿기를 너무 자주하는구나
竹林放達皆名士      죽림에서 방탕 활달함 모두 명사였고
蓮社風流屬上人   백련사의 풍류 놀이는 스님에게 소속
閤裏雪消梅韻歇      정원 안에 눈이 녹으니 매화 운치 다하고
岸頭臘過柳梢新      언덕 머리 섣달 지나니 버들 가지 새롭다
細君能待尊中酒   아내에게 술잔의 술을 기대할 만하니
楊子何勞賦逐貧   양자여 왜 가난 쫓는 글 쓰기에 수고롭나.

자신들은 죽림칠현의 은사들로 비유하고, 스님은 여산 백련사의 혜원(慧遠) 선사에 비유하고 있다.
스님이 선사(先師)의 탑을 이루어 놓고는 1830년 겨울 해거재 홍현주에게 탑명을 부탁하고 다음날 청양산방(淸凉山房)에서 경당 윤정진(絅堂 尹正鎭), 동번 이만용(東樊 李晩用), 유산 정학연(酉山 丁學淵), 저원 홍의인(樗園 洪羲人), 약인 홍성모(葯人 洪成謨) 등이 모여 시를 지은 일이 있다. 이때 재미나는 대목이 보인다. 이번 시에는 범어(梵語)를 사용하지 말자는 것이다. 스님을 의식한 대목으로 이념을 넘어서는 서로의 배려였다 하겠다. 이때 지은 스님의 시는 참으로 담박하다.

客來暝烟集      손님 오자 뿌연 안개 모이고
野寺鐘聲歇      들 절에는 종소리도 멎다
倂榻淸凉夜      책상을 함께한 청량사의 밤
回看松上月      소나무의 달을 되돌아보다.

말함이 없이 우정으로 젖은 시이다. 절 이름이 시사하듯 그저 청량한 시어지만 마음과 마음으로 통하는 우정이 흠뻑 배어 있다.

이상에서 초의선사의 시를 대략 살펴 보았다. 그 많은 시가 스님이라는 신분이 느껴지지 않으리만큼 자연스러우니, 이것이 바로 스님을 시인으로 자리매김하기에 주저하지 않게 하는 점이다. 이런 자연스러움이 당시 사대부들의 동의를 묵시적으로 얻은 것이다.

스님의 시집에서 보이는 수창(酬唱)의 대부분이 연작으로 이어졌다는 것이 바로 스님의 시인적 자질을 가늠할 수 있게 하는 점이며, 본인 스스로 시를 즐겼다는 증거라 할 수 있다. 스님으로서 시를 지을 때 어쩔 수 없이 교의적 내용이 시어에 드러나는 일이 있을 터이나, 스님에게는 그러한 점이 거의 보이지 않는다. 이 또한 스님의 높은 시적 자질이라 할 수 있거니와 조선조 큰스님들이 사대부와 교유하면서 자신들의 지위를 확고히 했던 아량의 일단이다.

본 논고에서는 이러한 점을 고려하여, 유자와의 수창에 초점을 맞추어 보았다. 당시의 스님들이 유자와의 교분이 모두 두터웠지만, 초의선사만큼 시의 벗으로 맺어진 교분도 드물다 하겠다. 선사이면서 철저한 시인이었음을 확인하였다.

4. 마무리

우리의 역사에서 유교와 불교는 종교적 이념을 넘어 사회의 정신적 지주로서 양립해 왔다고 해야 할 것이다. 불교가 종교적 신념으로서 국민의 정신적 안정을 추구했다면, 유교는 사회의 통치 수단으로서 길잡이 역할을 해 온 것이다.

흔히 고려 사회는 불교를 국가적 종교로 인정했기에 모든 제도가 불교의 교시 아래에서 유지되고, 조선조는 유교를 국시처럼 여기어 불교의 종교적 자취는 사라진 것으로 단순하게 정리하려 하지만, 이는 단순한 2분법적 안이한 해석이지, 당시 사회적 구성원의 실질적 분석은 되지 못한다.

위에서 두 왕조의 지식인으로 대표되는 승려와 유생의 모임으로서의 문단적 구성을 검토한 것은 이러한 외형적 단순성보다는 두 부류의 실질적 교유를 살펴 유불 지식인들의 거리를 가늠해 본 것이다.

고려조에서는 승려가 중심이 되어 유생이 모여드는 문단적 구성이었다면, 조선조에서는 유생이 중심이 된 문단적 구성에 승려가 합류하는 형식이었으니, 결국은 두 부류에 거리가 없었던 것이다. 이는 불교의 자비정신에 자타(自他)를 구별하지 않는 자리이타(自利利他)가 한 사회를 규합하는 원동력이었던 것이다.

다문화 다종교적 사회인 현대에 있어서 인류 통합이라는 세계평화의 지향은 불교의 이 자리이타적 자비정신으로 귀결되어야 할 것이다. 종교 간의 배타적 반목에 불교도 배타적 비판의 목소리를 내는 경우를 보는데, 이는 중생제도의 자비정신에도 위배되는 것이니, 화광동진(和光同塵)의 자비정신으로 포용하여야 할 것이다. ■

 

이종찬 / 동국대 명예교수. 동국대 국문과 및 동 대학원(석사), 한양대 대학원(박사) 졸업. 동국대 국문과 교수, 도서관장, 문과대학장 등을 역임했으며 현재 한국한문학회 고문으로 활동 중이다. 주요 저서로 《조선선가의 시문》 《韓國佛家詩文學史論》 《韓國禪詩의 이론과 실제》 《韓國漢詩大觀(譯註)》 등과 수상록 《옛 시에 취하다》 등 다수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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