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집-20세기 한국불교의 회고와 반성

1. 머리말

모든 사물이나 현상은 상호 연관되어 서로 작용과 반작용을 통해 존재를 실현하고 있다는 연기론은 불교의 핵심사상이다. 즉 모든 사물과 현상은 끊임없이 운동(諸行無常)하고 있으며, 모든 법칙에는 객관성(諸法無我)이 있어야 한다는 것이며, 궁극적으로 갈등과 대립이 지양된 사회(涅槃寂靜)를 이루기 위해 올바른 실천을 강조하고 있다.

불교의 사회운동은 바로 이런 명제를 실천이념으로 삼아 중생의 고통을 현실에서 제거하고자 하는 일체의 행동을 칭한다. 따라서 한국사회가 처해 있었던 조건에 따라 어느 때에는 민족해방운동으로, 어느 때에는 민족불교운동으로, 또 어느 때에는 민족통일운동으로 나타나기도 했다. 양상과 명칭은 다르지만 한결같이 사회적 모순의 해결을 통한 모든 중생의 행복을 추구한 것이 불교의 사회운동이었다. 불교인으로서 사회운동에 직접 참여하든 아니면 사회운동을 방해하는 사람이라 하여도 중생계는 고통에 가득 차 있다는 점에 이견이 없다.

다만 그 고통의 근본원인은 무엇이며 어떻게 실천할 것인가에 대해서는 다양한 견해가 있게 된다. 이런 견해의 다양성으로 불제자 사이에서도 대립과 갈등이 존재하며 경우에 따라서는 적대적인 관계로 서로 치열한 다툼이 따른다. 겉으로는 단순한 견해의 차이로 비추어지지만 ‘목적세계’에 대한 이해가 다르면 지향하는 바도 다를 수밖에 없다. 말은 똑같이 정토사회를 이룬다고 하지만 그 사회의 내용에 대해서는 정반대가 될 수 있다.

기존의 낡은 사회구조를 유지하려고 하는 보수적 성향이 있는가 하면 반대로 새로운 사회로 대체하려고 하는 진보적 성향을 갖는 견해가 있게 된다. 결국 이 둘은 서로 대립할 수밖에 없으며 경우에 따라서는 그 대립의 강도가 심해 적대적 관계를 갖기도 한다. 역사는 우연한 사건들이 총합되어 필연으로 가는 과정이다. 그러한 과정에서 수많은 시행착오도 있을 수 있으며 이 시행착오의 올바른 교정으로 ‘당파성’을 형성하여 간다.

과연 무엇을 위한 당파성인가? 말할 것도 없이 민중을 억압하고 수탈하는 계급사회를 넘어 만인이 진정한 자유와 평등을 향유하는 사회건설을 위한 당파성이다. 금세기 한국사회에서 불교사회운동은 바로 이것이었다. 돌아보면 말은 쉽게 할 수 있으나 실천은 대단히 어려운 것이었음을 알 수 있다. 역사는 과거와 현재의 대화라고 했다. 그 대화를 갈무리하는 한편 새로운 세기에 무엇을 할 것인가를 고민할 필요가 있다.

2. 민족해방을 위한 불제자의 실천

1) 식민지시대 불교계 독립운동의 유형


조국의 자주 독립을 위한 투쟁의 전선에는 전민족이 계급과 성별, 종교 등을 불문하고 동참하고 있었고 불교계 역시 그 전선의 중요한 몫을 담당하였다. 만주 지역의 무장항일투쟁에 금강산의 스님들도 참여하여 민족해방운동을 벌였으며1) 국내에서도 다양한 방법과 형태로 항일운동을 전개하였다. 강석주 스님의 회고를 박경훈 씨가 정리한 《불교근세백년》에는 당시의 항일운동 방식을 크게 3가지로 분류한 바 있다. 1) 님 웨일즈, 《아리랑》 참조. 2) 이에 대해서는 현재 전국불교운동연합의 중요 소임을 맡고 있는 김남수의 연구논문 <일제하 불교계 초기 사회주의운동>에 상세하게 쓰여 있다. 컴퓨터 통신망을 통해 누구든지 열람할 수 있다. 이하 김남수 논문에서 상당 부분을 인용한다. 3) 여익구, <한국 근대불교의 전개와 그 역사적 과제>, 《현대한국불교론》, 여래, 1983년.

첫째, 산업을 중점적으로 장려하여 경제적 힘을 바탕으로 해야 한다는 생각과, 둘째 민족교육을 진흥시켜 민족의 각성을 바탕으로 해야 한다는 생각, 셋째 당장 무력으로 독립을 쟁취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첫째의 유형에는 백용성 스님 등이 속하는데 1930년 전후 5, 6년간을 만주 길림성에서 동포들을 규합하여 농장을 경영했으며 항상 사찰에 공장을 세워 생산에 힘써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둘째의 유형으로는 이운허 스님이 대표적인 인물로서 한 사람의 학생만 있어도 학교를 세울 정도로 교육에 심혈을 기울였고 후일 경기도 양주군에 광동산림고등학교도 설립하였다. 운허 스님은 일찍부터 항일운동에 나선 분이며 대동청년당 등 지하조직을 건설하였고 만주 봉천성에 흥동학교를 설립하는 등 뛰어난 민족의 선각자로서 항일과 교육운동의 대표로 손 꼽힌다.

셋째의 유형으로는 이종욱 스님 등이 있다. 이종욱 스님은 1919년 3.1운동에 참가한 뒤 상해로 건너가 임시정부에 근무하였고 국내의 독립운동단체를 통합하는 작업을 수행, 23년에는 김상옥의사의 종로서 폭탄투척 등과 관련하여 3년의 옥고를 치른 바 있다. 이 세 가지의 방식과는 별도로 조국의 광복을 이루는 것이라면 어떤 방법을 사용해도 좋다고 주장하는 한용운 스님 등도 있었다. 한편 국내의 지하조직 활동도 활발하였는데 유명한 만당결사와 이 조직에 속했던 스님 등의 치열한 투쟁은 일반적으로 널리 알려진 업적으로 치부되고 있다.

석주 스님의 회고담에서는 다루지 않았으며, 또한 기록도 거의 없다시피 하지만 당시 민족해방운동의 중요한 축이었던 좌익계열에서 활동한 스님들도 적지 않았던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그 동안 일반적으로 항일독립운동이라고 하면 주로 만해 스님을 중심으로 한 3.1운동, 불교청년회, 유신회, 만당결사 운동들에 제한되어 온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이들 외에도 좌익계열의 조직활동이 활발하였다는 점은 여러 사료에서 확인할 수 있다.

2) 식민지시대 불교계 사회주의운동

일본의 조선 침탈과 청일, 러일전쟁을 치르는 과정에서 유럽에서 ‘유령’처럼 떠돌던 새로운 사상이 조선에도 유입되기 시작했다. 사회주의 사상이었다. 러시아 10월혁명이 성공한 후 러시아 공산당은 제3인터내셔날을 창립하기 위한 작업에 들어갔다. 1918년 12월 19일 페트로그라드에서는 새로운 국제회의가 열렸다.

이 회의에는 조선의 대표로 한씨 성을 가진 사람이 참석하였다. 공산주의 인터내셔날(코민테른)의 창립에 앞서 개최된 이 회의에서 조선대표 한은 ‘일본이 조선인을 억압하고 있다’고 하였으며 미국의 윌슨은 그 억압을 돕고 있다는 것을 강조하였다. 이때 한은 ‘민족혁명평의회’라는 조직 명칭을 사용하였는데 그 실체가 정확하지 않으나 어떤 형태로든 조선인의 사회주의 조직이 있었음을 엿볼 수 있다.

1919년 3월, 조선반도를 뒤흔든 ‘3.1독립운동’이 일어난 바로 다음날 모스크바에서 국제공산주의자 회의가 개회되고, 이달 4일 코민테른의 창립이 가결되었다. 이 회의에 조선대표가 포함되어 있었는데 조선노동자동맹의 강상주(姜尙柱)였다. 사회주의 사상의 유입은 불교계 인사들에게도 전파되어 불교계의 독립운동에 중요한 영향을 끼쳤다.

1920년대 초기부터 조선불교청년회, 유신회를 중심으로 사회주의 계열의 인사들과 빈번한 교류가 이루어진다.조선불교 청년회는 1920년 6월 15일 불교중앙학림에서 발기총회를 거쳐, 동년 6월 20일 각황사에서 100명이 참가한 가운데 창립되었다. 그리고 조선불교청년회와 동근이지(同根異枝)의 성격을 갖는 조선불교유신회는 1921년 12월 20일 창립되었다.

조선불교청년회는 21년 4월 30일 인사동회관에서 김사국(金思國)과 도진호를 초청하여 각기 ‘아불교개선관(我佛敎改善觀)’, ‘무아의 애’라는 주제로 강연을 하였다. 김해불교협회는 22년 석가탄신일을 기념하여 무산자동맹회 회장(1922. 3. 31. 창립) 김한(金翰)과 청년웅변가 박일병(朴一秉. 1920. 동경에서 조선고학생동우회를 결성한 이)을 초청하여 강연회를 개최하였다. 위의 두 강연에 초청된 김사국, 김한, 박일병은 초기 사회주의운동에 주요인물이다. 김사국은 불교와의 인연이 남다른 것으로 보인다.

김사국은 아버지를 여의고 동생 김사민과 같이 1916년 금강산 유점사에서 거주한 경험이 있다. 김사국은 특히 김성숙에 큰 사상적 영향을 미쳤다. 김성숙(金星淑)은 봉선사에 출가한 승려로 3.1운동에 참여하여 투옥되었는데 이를 전후하여 김사국과 접촉하였으며, 복역 후 초기 무정부운동에 참여하여 무산자동맹회, 조선노동공제회에 가담하였다.

김성숙은 1921년에 창립한 조선불교유신회에 가담하였을 뿐만 아니라 22년 2월에는 유신회를 일반 사회에 공지하기 위하여 호남쪽으로 가서 설명회를 갖기도 했다. 위의 과정을 살펴볼 때, 1920년대 초기 불교청년회, 유신회는 사회주의 운동가들과의 교류가 있었음을 확인할 수 있고, 특히 김성숙의 예에서 볼 수 있듯이 무정부주의, 사회주의 단체에 직접 참여하여 활동했을 가능성도 충분히 있다.

3) 불교계 사회주의 청년운동의 조직

1923년에 들면서 국내의 노동운동, 농민운동이 왕성해지기 시작하고 사회주의자 그룹도 생겨나기 시작하는 등 주체적 조건이 상당하게 성숙되었다. 불교계 단체가 사회주의 계열의 독립운동에 참여한 것이 확인되는 것은 1923년 3월 24일부터 30일까지 개최된 전조선청년당대회(全朝鮮靑年黨大會)에 불교청년회와 조선불교여자청년회가 참여하면서부터이다.

전조선청년당대회는 초기 사회주의 운동노선을 제창한 김사국, 이영(李英), 한신교(韓愼敎) 등이 참여하였던 서울청년회가 중심이 되어 성사시킨 행사였다. 이들이 이 대회를 개최하게 된 계기는 종래의 청년운동을 계급투쟁의 노선으로 방향 전환하려는 것이었으며, 각 청년단체의 의식적, 유기적 연결을 실현하여, 앞으로의 사회주의 청년운동의 대강과 실천요강을 토의하려는 것이었다. 불교청년회의 이종천(李鍾天)과 불교여자청년회의 우봉운(禹鳳雲)은 한신교, 이영, 강인택, 신명균, 민중식, 강우, 강영순 등과 1923년 2월부터 전조선청년당대회 준비에 착수하였으며 본 대회에는 불교청년회에서 기석호(奇石虎), 이종천, 김운악(金雲岳)이, 불교여자청년회에서는 김광호(金光浩), 이명규(李明珪), 우봉운이 참여하였다.

1927년 9월 28일 강릉에서 개최된 강원청년연맹혁신대회에 강릉불교여자청년회가 참가하였다. 이 대회는 ‘조선의 사회운동이 정치투쟁의 표방을 들고 민족적 정치운동으로 방향을 전환함에 있어서 청년운동도 과거의 자연생장적 조직형태를 근본적으로 변혁하여 그 기초를 견고히 하는 동시에 방향을 전환하여 민족적 청년운동으로 그 조직을 확대하게 됨’을 목표로 개최되었다.

4) 해방정국과 혁신불교운동

해방정국을 맞아 불교계는 일제의 잔재를 청산하기 위한 자정의 노력이 드세어졌고 한편으로는 자주적 독립국가를 건설하기 위한 운동을 활기차게 벌였다.

8·15해방 직후부터 30본산 대표자대회를 태고사(현 조계사)에서 개최하여 친일파 승려를 색출 추방할 것을 만장일치로 결의하고 내선일체, 황민화운동에 앞장 선 승려들을 교계에서 몰아내고 아울러 총무원의 소임자들을 모두 친일파라고 규정, 사표를 내게 한 후 새로운 진용을 갖추어 나갔다.

새로 들어선 종단의 지도자들은 적산사원 및 일본 신사 등을 접수하여 한국불교에 귀속시키는 작업도 병행하였다. 이런 자체 정화운동이 진행되는 과정에서 민족 자주국가 수립을 위한 혁신운동도 눈에 띄게 전개되었다. 여운형 등과 민족좌파진영의 조선인민공화국 건설에 맞추어 불교계도 불교청년단·불교여성총동맹·혁명불교도연맹·선우부인회·재남이북승려회·불교혁신연맹 등 6개 단체와 선학원이 가세한 7개 단체를 묶어 불교총본산이라는 기구를 만들어 선학원에 본부를 두고 총무원(해방 이후 친일기구였던 총본산을 총무원으로 개칭)과 대립하였다.

그런데 이 가운데 불교혁신연맹은 백석기(서울시 사회국장이었다가 한국전쟁중 납북), 유성갑(대전출신으로 후일 제헌의원 역임하였는데 역시 한국전쟁중 행방불명) 스님이 중심 인물이었다. 이들 스님은 대처 출신이긴 하지만 비교적 온건한 민족우파적 성향을 갖고 있었으며 따라서 이종욱 스님이 총무원장을 보고 있던 총무원측과는 대립관계에 있었다.

45년 겨울 이종욱 스님 등이 총무원장직에서 물러나고 김법린 스님이 후임원장으로, 최범술·유엽 스님 등이 간부로 취임하였다. 총무원의 진용이 바뀌었어도 선학원을 중심으로 하는 김용담, 장상봉, 이부열, 곽서순 스님 등은 계속하여 총무원과 대립하였다. 당시 총무원으로 대표되는 불교계의 민족우파진영은 남한만의 단독정부수립에 찬성하였고 미군정의 하지중장을 만나 교권회복을 위한 교섭을 벌이면서 당면한 민족적 모순의 해결에는 관심이 거의 없었다.

선학원의 김용담 스님 등은 정치노선에 있어 남한만의 단독정부수립을 반대하였다. 이들은 사회주의 이념을 불교교리 내부에서 융해시키고자 혁신잡지를 통해 좌파적 견해를 밝혔다. 이들의 불교적 논리에 따르면 승려는 수도에 전념하고 사찰의 재산은 전부 교도들에게 맡겨 모든 재산은 공유해야 한다고 하였다. 이런 주장은 젊은 불교도들의 절대적인 지지를 받았으며 따라서 혁신운동의 세력은 점차 증대하여 갔다.

또한 이들은 김구 선생이 남북협상을 위해 북한을 방문할 당시 동행하였다. 흔히 해방 후의 불교계 움직임을 비구-대처의 분쟁으로 싸잡아 설명 하지만 해방 이후 5년 사이에 전개되었던 불교계의 흐름은 분명 비구-대처의 분쟁만 있었던 것은 아니다. 물론 일제의 식민통치 내내 교란되었던 조선불교의 정통성을 회복하기 위한 정화도 있긴 했지만 더 중요한 것은 친일세력에 대한 청산이었으며 한편으로는 해방 이후 새로운 자주적 통일국가 수립을 위한 실천도 상당히 강력하게 전개되었다.

3. 멸실된 불교사회운동(50∼70년대)

식민통치에서 해방된 조국은 완전한 독립을 이루지 못한 채 38선을 경계로 남과 북으로 갈라졌다. 조국의 분단과 서로 질이 다른 정권의 수립은 민족의 크나큰 비극이었다. 한국전쟁은 이 비극의 결정판으로써 민족사 최대 최악의 참상을 드러냈다.

동족상잔의 피비린내 나는 혈전이 조국의 강산을 물들였고 전쟁이 휴전으로 일단 멈춘 뒤에도 남한 사회 전반에 걸쳐 수십년간 전쟁의 후유증을 앓아야 했다. 4월혁명은 한국전쟁으로 단절된 혁신운동이 다시금 민중의 힘으로 복원되는 계기가 되었다. 그러나 한국전쟁 직후 느닷없는 이승만의 정화유시로 격화된 비구-대처 사이의 물리적 충돌로 심각한 후유증을 앓고 있던 불교계는 참담한 민중의 고통을 돌아볼 여유가 없었다.

쿠데타로 집권한 군사정부가 매국적인 한일회담을 벌이는 상황에서도 아무런 역할을 하지 못했다. ‘6·3사태’로 불리는 65년의 한일협정반대시위가 노도와 같이 일어나 군사정부 출범 이후 최대의 위기를 맞고 있을 때 불교계는 종단 대립의 골만 깊어가고 있었다. 조국의 청년들이 군사정부가 내건 ‘재건’을 위해 미군 대신 월남땅에서 목숨을 잃고 있어도, 또 그런 월남에서 베트남 민족의 자주와 민주 그리고 평화를 위해 그곳의 승려가 소신공양을 하고 있다는 소식을 접하면서도 진정 한국불교가 해야 할 바를 찾지 못하고 있었다.

식민지 시절 조국과 민족의 진정한 해방에 몸 바쳤던 전통, 해방 후 조국의 자주적 독립을 실현하고자 정진했던 불교혁신운동의 맥은 완전히 단절되었던 것이다. 71년 4월 27일 제7대 대통령선거에서 야당의 대통령후보 김대중 씨와 접전을 치룬 박정권은 들불처럼 번지는 국민의 민주화 요구로 쿠데타 이후 최대의 궁지에 몰리게 되었다. 그러자 72년 7월 4일 오전 10시 충격적인 ‘7·4’남북공동성명을 통해 ‘자주, 평화통일, 민족적 대단결’의 통일 3대원칙에 관한 성명을 발표하였다. 정권의 안정을 위해 마지막 방편으로 민족의 자주적 평화통일이라는 명분을 선택한 것이었다.

그러나 ‘7·4성명’의 잉크가 채 마르기도 전에 박정권의 음모는 ‘10월유신’으로 나타났다. 이어 73년 8월 김대중 납치사건, 74년 1월의 긴급조치 1호, 74년 4월의 긴급조치 4호를 발동시켰고 다음해 5월에는 일체의 집회를 포함한 시민적 권리를 차단하는 긴급조치 9호가 내려졌다. 이런 일련의 상황에서 종교인들의 양심적인 민주화운동이 잇달았다. 당시의 암울한 상황에서 종교인의 양심적 실천은 거의 개신교가 주도했다. 통칭 ‘5가권’(서울 종로 5가의 기독교회관을 중심으로 하는 개신교의 사회운동으로 붙혀진 별칭이다.)으로 불리는 개신교는 박정권의 인권탄압에 맞서는 강력한 힘이었다.

개신교와 천주교계는 그들이 갖고 있는 국제적 지원이라는 배경을 상당히 효과적으로 활용하였다. 국민의 눈과 입이 봉쇄당한 상황에서 박정권의 실상이 외국 선교사의 입을 통해 국제적으로 알려졌고 외신과 자주 접할 수 있는 개신교와 천주교는 그러한 국제적 여론을 국내에 알리는 창구가 되었다. 반면 불교계는 조계-태고의 분규를 거쳐 조계종단의 분규로 날을 지새야 했다. 대처승이 살고 있는 절을 ‘정화’한다고 폭력배까지 동원하여 접수하는 일로 한국불교계는 하루도 조용한 날이 없었다.

노동자가 분신하고 농민들이 농산물을 태우면서까지 격렬한 삶의 몸부림을 치고 있어도 그 중생의 고통현장에 눈을 돌릴 새가 없었다. 이러한 불교계에 대한 국민의 불신은 당연한 것이었다. 비록 그 분규의 원인이 어디에 있던 간에 치열한 삶의 현장을 외면한 응보는 오랜 세월 깊은 상흔으로 남아 오고 있다.

그런데 70년대 초부터 유일하게 스님 한 분이 민주화대열의 전면에 서서 중생의 고통을 함께 하고 있었다. 법정 스님이었다. 효봉 선사를 은사로 득도한 법정 스님은 당시 민주화운동의 상징이다시피한 함석헌 선생 등 개신교계의 인사와 더불어 박정권에 맞선 민주화와 민족통일의 양심이었다.

법정 스님은 다른 종교인, 지식인들과 함께 옥고를 치르기도 했는데 그로 말미암아 불교계의 자성도 일게 된다. 만해 스님의 민중불교론과 혹독한 조건에서도 민족해방운동을 실천했던 불제자들 그리고 이후 해방국면에서 민족의 자주독립국가와 새로운 사회로의 이행을 위한 혁신불교운동의 전통은 70년대 중반의 상황에서 환생의 기미를 보이게 된다. 젊은 불자들은 비록 낮은 수준의 문제제기에 그치긴 했으나 불교의 민중화를 시도하게 된다.

단절된 역사를 서서히 봉합하려는 주체적인 노력이었다. 가장 적극적인 사람은 여익구였다. 흔히 민중불교운동의 일세대로 불리는 여익구는 74년 민청학련과 관련하여 구속된 바 있었다. 그는 75년 고준환과 함께 ‘민중불교회’를 조직하게 된다. 고준환은 74년 10월 동아일보와 조선일보 기자들이 ‘자유언론수호선언’을 발표할 당시 동아일보 기자였다. 그해 12월 동아일보 광고탄압이라는 전대미문의 언론탄압을 맞아 결국 해직되었다. 여익구와 고준환, 그리고 황석영 등은 유신정권의 철권통치로 신음하는 민중의 아픔에 동사섭하기로 결의하고 ‘민중불교회’를 결성하였다. 이즈음 당시 한국대학생불교연합회 회장을 맡고 있던 전재성은 학생불자들을 대상으로 ‘불교인 의식구조 조사연구보고’라는 설문조사를 하여 학생불자들의 정치적 각성을 촉구하였다. 또한 이를 토대로 <민중불교론>이라는 논문을 발표하여 민중불교의 논리적 근거를 밝혔다.

월간 《대화》 1977년 10월호에 전서암이라는 이름으로 발표한 <민중불교론>에서 “물질적 정신적인 고해에 허덕이는 중생은 정신적 고통을 물질적 정신적으로 해결할 수 있는 중생과는 구별된다”고 하여 중생 일반과는 계급적으로 구분되는 민중을 설정하고 진정한 보살행은 이 억압 당하고 있는 민중의 해방을 위해 노력하는 실천이라고 주장했다. 그는 “민중불교운동은 본래 불타정신으로 돌아가 승가를 이 사회 속에서 구현하고자 하는 신앙적 태도에 입각해야 하며 민중 즉 다수집단의 종교 및 종교적 사회운동이어야 한다.”고 규정하고, 민중불교운동의 과제를 다음과 같이 제창하였다.

첫째, 민중불교운동의 근거지를 도시와 농촌으로 침투시켜 참선 및 포교를 담당하는 지역사회운동으로 민중과 긴밀한 연대의식을 조성한다.

둘째 불교 아카데미본부를 설치하여 민중불교운동의 동일정향적 이념을 추구하고 지역사회 가람 및 복지관의 구체적 자료로서 민중불교운동의 방향을 다각적으로 설정한다.

셋째, 청년불교운동을 통해서 민중불교의 사회·문화적 소집단운동을 전개함으로써 생동하는 불교세력을 극대화한다.

넷째, 민중불교운동을 전개하기 위해 민중과 유리된 특권층과의 결탁은 배제되어야 한다.

다섯째, 민중불교운동은 어디까지나 종교운동이기 때문에 정치운동과는 분리되어야 한다고 밝혔다.

75년 5월 13일 박정권은 긴급조치 9호를 발표하였다. ‘긴조9호’라는 약칭을 갖고 있는 이 조치는 그때까지 내려진 앞서의 긴급조치보다 강도가 엄청난 조치였다. 정부에 대한 어떠한 비판도 용인되지 않았고 심지어 정부를 비판하는 문서를 갖고 있다든가 그 내용을 말로 전하는 행위 일체도 처벌하는 조치였다. 이러한 엄혹한 현실 속에서도 대불련 출신의 젊은 청년들이 개별적으로 또는 다른 조직의 일환으로 민중의 삶 속으로 들어가고 있었다.

<민중불교론>에서 제기된 것처럼 학생이라는 낭만적, 특권적 신분을 벗고 노동 현장에 들어가서 노동계급의 의식을 몸소 겪기도 하고, 공장지대에서 야학활동을 통한 의식의 전이도 담당했다. 70년대 후반 노조민주화운동이 격랑을 일으키는 그 현장에서 젊은 불자들은 노동자와 함께 있었다. 이들의 경험과 이론적 축적물이 80년대 민중운동에 커다란 이바지를 하게 된다.

4. 80년대 사회와 민중불교운동

1) 민주화의 봄과 ‘10·27법난’

80년의 상황은 한국사회에서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서울의 봄을 무참히 짓밟은 5월 17일의 군부쿠데타와 다음날부터 스무날 동안 처절하게 진행된 광주민중의 저항과 죽음은 살아있는 사람에게 영원한 짐으로 남았다. 계엄군의 총칼 아래 스러져간 형제들의 마지막 모습은 한국사회의 중첩된 모순에 대해 과학적 인식을 바탕으로 한 조직적 항쟁만이 절실함을 느끼게 하였다. 1980년 5월. 광주민중항쟁의 대열에 이 지역의 불자들은 몸을 사리지 않았다.

무등산의 증심사 스님들을 비롯하여 재가불자들의 투쟁이 시민들의 용기를 북돋았다. 한국대학생불교연합회 전남지부장 김동수는 공수부대의 진압에 맞서 장렬한 투쟁을 벌이다가 그들에 의해 살해됐다. 증심사의 한 스님은 도청 앞에서 희생자들을 후송하던 중 공수부대가 난사한 총알에 중상을 입었다. 제6대중앙종회를 구성하여 출범한 화합종단은 비록 완벽하게 화합을 이루지 못하긴 했으나 그 나름대로 종단의 화합과 발전을 위한 모색을 게을리 하지 않았다. 그런데 난데없이 80년 10월 27일 새벽 신군부세력이 ‘분규만을 일삼는 조계종단은 더 이상 자체 정화의 능력이 없으므로 부득이 타력으로나마 정화하지 않을 수 없다’는 구실을 내걸고 조계종단의 주요간부를 강제 연행하였다. 월주 스님 등은 강제 사퇴하고 18명의 승려가 구속되고 32명의 승려는 강제로 승적을 박탈당하였다. 자주적인 종단의 발전은 또다시 좌절되고 권력에 의한 정화라는 과거의 폐악이 재현되었다.

2) 불교의 민중화를 향한 새로운 도전

대불련 지부장의 장렬한 죽음과 민중학살, 그리고 ‘10·27법난’ 등 일련의 사건은 청년 학생불자들이 과연 무엇을 어떻게 할 것인가를 곱씹게 하였다. 준계엄적 상황으로 공개적이고 합법적인 운동은 불가능해졌고 또한 대불련이라는 기구차원의 운동에도 한계가 있음을 여실히 느낀 진보적 청년 학생들 사이에 운동의 공간을 바꾸어야 한다는 지적이 나왔다.

즉, 학생들만의 신행활동이 주가 되고 있는 대불련이라는 기구를 떠나 대중의 일상생활과 직접 만나는 현장에서 진보적 불교운동을 해야 한다는 문제 제기였다. 따라서 사찰의 청년조직 활동을 통한 의식화 작업이 우선적이라는 판단 아래 일부의 불교운동가들이 사찰을 근거로 한 민중불교운동을 전개하였다. 비록 수적으로는 적은 수였고, 지향하고자 하는 이념의 체계화도 미약하였으나 당시의 정세와 역량을 감안할 때 대단히 진보적인 움직임이었다.

이들은 민중불교운동의 근거를 초기불교가 담고 있는 실천적 정신에서 찾고자 하였다. 고통받는 중생과 함께 해방되는 세상을 향해 전진하는 청년불자상을 건설하고자 했다. 그래서 81년 가을 무렵부터 ‘여래사(如來使)운동’이라는 개념을 공식화하였다. 그리고 운동의 과학화를 위한 연구도 병행하였다. 여래사운동의 기관지라 할 수 있는 <청년여래> 창간호(81년 가을호)의 서문에서 최연은 “불교가 중생교화의 본래 사명을 완수하기 위해서는 구체적인 상황에 대한 올바른 인식과 아울러 사회구조 속에서 삶을 영위하고 있는 인간으로서 중생을 인식해야 한다.

하화중생의 구체적인 방법론의 모색과 그 실제 적용을 위한 사회와 민중에 대한 적극적인 관심을 함께 엮어 명실공히 젊은 불자들의 전열을 정비하여야만 한다. 이렇게 만난 동지들을 여래사라 하며 여래사들의 재도전을 여래사운동이라 한다.”라고 밝히며 꾸준한 연구작업과 실천을 통한 검증이 민중 속에서 이루어질 것을 다짐했다. 80년도의 상황은 좌절과 새로운 도전을 준비하는 초보적 단계였다. 그래서 운동을 규정하는 명칭이나 개념이 일치되어 사용되지 않았다.

‘여래사운동’이라고도 했고 ‘사원화운동’이라고도 했다. 그러나 이 운동은 82년 초에 호된 서리를 맞는다. 사원화운동의 중심인물인 석법우, 최연, 신상진 등 3명이 구속되고 이와 관련하여 수많은 스님, 학생이 정보기관에 끌려가 심한 고문과 조사를 받았다. 정보기관의 탄압으로 이 운동은 일단 겉으로는 중단되고 말았다. 81년 성문, 돈연 스님 등이 중심이 되어 중앙승가대의 분위기를 바꾸는 한편 대불련 전국법사단을 구성하여 운동의 전열을 가다듬었다.

그리고 81년 7월 제1회 ‘청년승가육화대회’를 열어 전국의 젊은 학인들이 한국불교의 현실에 대해 토론하고 해결을 위한 방법을 찾고자 노력했다. 이런 노력의 성과로 승가와 재가의 조직체인 ‘청년불교도연합’을 결성하기에 이르렀다. 83년에는 학생운동이 잠복기를 지나 전면적으로 정권타도투쟁으로 번지기 시작하는데 ‘청불연’은 그해 7월 17일 부산 범어사에서 ‘전국청년불교도연합대회’를 개최하여 불교운동의 조직적인 모습을 대중에게 보였다. 이에 앞서 대불련은 70년대에 연례행사로 가져왔던 ‘화랑대회’의 명칭과 성격을 바꿔 82년 여름부터 ‘한국불교1600년대회’를 개최하였다.

이 대회는 70년대에 제기되었던 ‘민중불교론’을 발전시켜 80년대의 정세를 반영하는 운동이념을 학생대중에게 확산하고 나아가 불교계 전반에 정치적 의식을 제고하고자 했다. 단일한 학생조직으로서는 최대의 규모를 갖고 있는 대불련이 그간 보수적 신행을 중심으로 활동하였던 점을 극복하고 민중의 고통을 해결하기 위한 주체로 청년학생불자가 나서는 모범을 보이고자 했다. 83년의 전국청년불교도대회는 바로 한국불교가 이제 운동의 조직적인 정비를 어느 정도 마쳤다는 자신감의 표현이 될 수 있다.

3) 민중불교운동의 환생

83년 들어서 전국의 각 대학에서 시위가 연일 계속되었다. 그해 12월 정부는 이른바 ‘학원자율화조치’를 발표하게 된다. 이 조치로 당시 구속된 학생들이 석방되었고 제적생들이 특별조치로 복학할 수 있게 되었다. 84년 봄부터 학원과 공장의 시위는 불이 붙었다. 민중운동단체들도 속속 창립되었다.

그 이전부터 존재했던 각 종교권의 민주화운동단체들도 활기를 띠었고 민주화운동청년연합 등 각 부문의 운동조직도 만들어 졌다. 각 부문의 운동이 활성화되고 특히 ‘2·12 총선’의 결과 김대중, 김영삼 씨가 이끄는 야당의 승리로 굳어지는 등 전체 사회적 분위기도 상당히 호전되었다. 이런 성과로 재야의 연합조직인 ‘민주통일민중운동연합’이 결성되었고 정치인 중심의 민주화추진협의회도 결성되었다. 불교계의 움직임도 다시 활기를 찾았다.

비상종단 때 만들어졌던 불교사회문화연구소와 청년승가회 등의 인사들이 그 움직임을 주도하였다. 성문, 현담 스님 등과 여익구, 이희선, 김태수, 이영근 등 84년 11월 이후 불교의 민중화를 위한 조직건설을 위해 그 필요성에 공감하는 사람들이 모임을 가졌다. 85년 초에는 구체적인 인선작업을 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85년 5월 4일 오후 2시 서울의 광화문에 있는 한글회관에서 민중불교운동연합이 창립하게 된다.

민불련은 창립선언문을 통해 “초강대국에 의해 분단된 조국은 민족의 총체적 발전을 저지·파괴하며 반민중적 권력집단이 자행하는 폭력과 비민주적 제도는 민주의 기본적인 생존권조차 유린하고 있다.”고 규정하고, 민불련은 “초종단적인 사부대중의 힘의 결집체로서…… 간단없는 투쟁을 지속하여 불교의 민중화를 이룩할 것”이라고 밝혔다. 민불련의 창립과 활발한 활동은 불교계의 운동력을 크게 높혔다. 85년 전두환정권의 민중운동탄압에 맞서 힘찬 투쟁을 아끼지 않았다. 내적으로는 민중불교운동론의 정립을 위한 학습과 연구에 매진하는 한편 불교의 민주적 개혁을 위해 열정적으로 나날을 보냈다.

또한 반민중적·반민족적 정권을 타도하기 위한 각종 시위와 집회, 농성 등에 전력을 기울였다. 85년 구로공단의 대우어패럴 파업을 계기로 촉발된 동맹파업 당시 파업 현장에 대한 지원 및 농성도 적극 벌였으며, 특히 86년 초부터 민통련을 중심으로 전개되던 민주제 개헌 요구투쟁에도 어느 단체보다 열정적으로 참여하였다. 그리하여 80년 5월 광주항쟁 이후 최대의 가두시위로 기록되는 ‘5·3인천사건’을 중심적으로 이끌었고 이로 인해 안기부 등 공안기관의 집중적인 탄압을 받게 되었다.

여익구 의장이 수배되고, 서동석 집행위장, 진철승 문화부차장, 성연 스님, 김승진 학생이 줄줄이 구속되는 중대한 조직적 위기를 맞았으나 오히려 정부의 탄압은 불교계의 결집을 도와준 셈이 되어 곧 조직을 재정비, 87년 민주화항쟁에 혁혁한 기록을 남기게 된다. 이런 민불련의 활동에 힘입어 86년 들어 독자적인 승가조직이 결성되었다.

민불련이 창립되고 일년 남짓 지나면서 진보적 불교운동에 자신감을 갖게 된 스님들만으로 초유의 대규모 시국성명서를 86년 5월 9일 발표하였다. ‘민주화는 정토의 구현이다’라는 제하의 시국선언문에는 모두 조계종 승려 152명이 서명한 것으로서 민주화와 민중생존권의 확보 그리고 부처님 오신 날을 맞아 모든 양심수의 석방을 요구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 당시 성명서에 서명한 이들은 이후 정토구현승가회를 창립하는 주요한 인물들이며 민불련의 간부 또는 회원이 상당수 여기에 결합하였다. 성문, 명진, 현기, 진관, 벽우 스님 등과 민불련 회원들이 조직하고 대회를 이끈 ‘9·7해인사 승려대회’는 자주적 민주적 불교발전을 가로막고 있는 불교 관계 악법의 철폐와 ‘10·27법난 진상 규명과 책임자 처벌’을 주장하는 한편 ‘5·3인천사건’으로 구속 수배중인 불자들의 석방 및 정권의 불교탄압 등에 대해 강력하게 항의하였다.

해인사에서 대회가 끝나고 나서 서울 안암동의 승가대에 결집한 대중은 대회의 주장을 관철하기 위한 농성을 강행, 불교 내외에 큰 파문을 일으켰다. 해인사 대회는 그 동안 축적된 민중불교운동의 성과물이며 동시에 불교대중이 전면적으로 반정부 투쟁에 나서는 기폭제가 되었다. 후일 전두환 정권은 해인사 승려대회와 관련하여 명진, 현기, 벽우 스님을 집시법 위반으로 구속하였다. 86년 출가와 재가의 연합체인 민불련에서 츨가조직이 별도로 만들어져 진보적 승려의 결집은 힘을 받았고 전국의 많은 승려가 정토승가회에 합류했다.

이렇게 하여 학생조직인 대불련과 청장년불교운동가조직인 민불련, 승가조직인 정토승가회가 존재하게 되었고 여기에 기존의 대한불교청년회 등도 점차 진보적인 불교운동의 흐름에 동참하였다. 이들은 공동사업을 통해 훈련되고 경험을 쌓아갔다. 이들의 단결은 드디어 87년 군부독재에 대항하는 ‘6월 항쟁’에 결정적으로 기여했다. 전두환 정권이 서서히 말기로 치달으면서 그 폭압의 강도는 극에 달했다. 그리하여 마침내 악명 높은 치안본부 대공요원들에 의해 서울대 박종철 군이 남영동의 분실에서 혹독한 고문으로 사망하는 사건이 발생하였다.

신심 깊은 불자집안의 아들이면서 책임감이 투철한 이 학생의 죽음은 곧바로 대대적인 ‘정권타도’의 민중적 전선을 형성케 하였다. 불교계를 비롯하여 각 종교, 사회 단체 등과 정치권이 연대하여 ‘고 박종철군 범국민추도 준비위’를 결성하였다. 이 준비위에는 지선, 진관, 고광진(2기 민불련의장) 등이 대표로 참여하였다. 이 준비위의 주도로 87년 2월 7일 박종철의 추모를 위한 범국민 대회가 열렸고 이어 살해 당한 지 49일 되는 날을 맞아 한국 사회운동 최초로 불교식 천도의식인 ‘49재’가 국민적 의례로 치러졌다. 박군의 부친 박정기, 모친 정차순씨가 평소 다니던 부산의 사리암에서 3월 3일 오전 10시부터 치러진 ‘49재’는 원래 조계종 총무원 주관으로 조계사에서 봉행될 예정이었다.

이날 조계사 앞 대로에서 약식으로 치러진 49재는 참여한 대중과 경찰의 치열한 몸싸움으로 ‘민중’ 불교의례가 되었다. 49재는 서울을 비롯하여 부산, 광주, 부천 등 전국적으로 봉행되었으며, 범국민추도위는 이날을 맞아 ‘범국민 민주화 평화대행진’을 전국에서 동시다발로 개최하여 그야말로 49재가 불교의례를 넘어 민중의례로 치러졌다. 불교계의 결집된 단결력은 87년 들어 정권의 반민주적 반불교적 폭압통치에 대항하는 전국적 공동투쟁 조직으로 발전하였다.

특히 87년 5월 18일 광주 원각사에서 청년회원 80여 명이 ‘5·18 광주희생민주영령 추모법회’를 갖던 중 갑자기 전경 50여 명이 최루탄을 쏘면서 법당에 난입, 무차별 구타 연행하는 사건이 발생하였다. 이 사건은 그렇지 않아도 폭발 직전에 있는 불교계를 자극하여 전국 곳곳에서 규탄 성명, 단식 농성, 항의 시위가 연일 열리게 하였다. 5월 31일에는 서울 중앙승가대에서 전국의 강원에서 올라온 학승 등 사부대중이 범불교도 대회를 개최하여 반정부 투쟁을 벌였다.

이 사건은 불교계 각 단체들이 서로가 갖고 있는 성격이나 지향점의 차이에도 불구하고 단체·지역·계층 등이 결합하여 공동투쟁을 벌이는 한 계기가 되었다. 민주헌법쟁취불교운동본부는 공동투쟁의 모범이 된다. 사회 각 종교, 민주단체 등이 총결집한 민주헌법쟁취국민운동본부의 불교쪽 본부가 되는 이 불교운동본부는 서울, 부산, 광주, 대전 등 전국에 지역본부를 갖추어 한국불교사에 최초로 전국적인 불교의 사회운동본부라는 기록을 남기게 되었다.

투쟁본부는 당시 들불처럼 번지는 민주항쟁의 열기 속에서 전국적 조직을 결성하여 힘찬 투쟁을 벌였고 88년 들어 ‘공동올림픽쟁취불교본부’로 전화하여 남북의 축제로 올림픽을 치루고자 염원했다. 통일운동이 불교계의 공동목표로 제기되었으며 공동투쟁의 성과는 민족자주통일불교협의회(통불협)으로 발전하였다. 통불협은 88년 12월 창립하여 다음해부터 활발한 운동을 전개하였다. 특히 한국의 정권에 지대한 영향을 미치고 있으며 ‘광주항쟁’ 당시 군부를 지원한 미국에 대한 반미운동을 주도하였다. 핵철거, 평화협정 체결을 위한 불교도 서명운동을 벌였고 90년 8월에는 통일문화제를 열어 자주적 통일운동의 대중적 확산을 기했다. 88년에는 ‘10·27법란진상규명투쟁’도 공동으로 벌였다.

민불련이 주도한 민중불교운동은 80년대의 마지막 해에 큰 타격을 입었다. 문익환 목사의 방북사건을 계기로 노태우 정권은 민중운동을 말살하려 했다. 이른바 ‘신공안정국’이라 불리는 이 탄압의 표적에 민불련이 걸렸다. 이미 88년에 출간한 <민중법당> 제5호에 실린 ‘민중불교운동이 해결하여야 할 당면과제’와 ‘조직노선의 규정’ 제하의 글을 문제삼아 ‘이적단체’로 규정하였다. 87년 12월 대통령선거를 앞두고 민불련과 정토구현승가회 내부에서 선거전술에 관한 논란이 제기되었다.

김대중 후보를 지지할 것인가, 혹은 야권단일 후보를 통한 선거 승리를 목표로 할 것인가, 아니면 민중의 독자후보전술로 민중의 정치적 의지를 제고할 것인가 하는 문제였다. 결국 이 논란으로 민불련 2기집행부를 맡았던 고광진 의장은 대선에서 김대중 후보 지지운동을 했다가 노태우가 당선되자 평화민주당에 입당하여 조직력의 약화를 불렀고 또한 정토승가회 역시 김대중 지지와 반대의견이 대립되어 대선 이후 조직분열이 있어 정토승가회와 대승불교승가회로 나뉘었다.4)

87년 거대한 민주화의 돌풍이 한국사회의 분위기를 완전히 바꾸면서 사회 전반적으로 대중의 자발적인 조직들이 대거 만들어졌다. 그해 7월부터 한달 이상 지속된 노동운동 쪽의 폭발적인 분출 역시 사회의 이런 분위기를 가중시켰다. 또한 대통령선거로 인한 운동 세력간의 분열도 대중이 새로운 조직·단체를 결성케 하는 요인으로 작용하였다. 88년 2월 전국의 불자 교수 5백여 명이 동참하여 ‘민주통일, 정토구현’을 목적으로 한국교수불자연합회를 창립하였다.

회장 고준환을 비롯하여 이 단체는 한상범, 연기영, 박광서 등 현직 교수들이 대거 참여하여 교계 내외의 주요 현안을 다루는 심포지엄 개최, 강좌개설 등 교육프로그램을 실시하는 한편 불교와 사회 현실의 잘못된 상황에 대해서는 준엄한 비판과 실천에 앞장선다고 하였다. 같은 달 25일 정토구현승가회의 정치적 선택과는 다른 견해를 갖고 있던 승려들 중심으로 대승불교승가회가 개운사에서 창립총회를 갖고 본격적인 활동에 들어갔다.

‘80년대의 민중불교운동을 발전적으로 지양한 민족불교’를 새로운 이념으로 구현한다고 선언한 이 단체는 인권·노동·공해·통일문제 등에 대해 연구와 실천을 아끼지 않는다고 하였다. 대승불교 승가회는 당시 대통령선거 후유증을 앓고 있던 정토구현승가회의 분위기와는 사뭇 대조되며 출발하였으나 후일 90년대 들어와서 소속 회원들의 소극적인 노력으로 단체의 이름만 유지하였다가 93년 실천불교승가회로 통합되었다.

거의 같은 시기에 불교사회교육원이 개원하였고 4월 9일 불교사회연구소가 뒤를 이었다. 불교사회교육원은 정토포교원을 운영하던 최석호(후일 법륜 스님)가 성열 스님 등과 함께 서울 홍은동의 한 빌딩을 세내어 개원한 것으로서 민족불교학당, 민족여성학교, 두레문화교실 등 대중교육프로그램의 개발과 실시를 주요한 사업으로 삼고 있었다.

개원 직후 성열 스님이 사퇴하고 최석호와 대불련 출신의 박수일, 강남포교원 청년회장 출신 오원철 등이 전담하여 운영하게 된 이 교육원은 정부의 탄압을 받기도 하였으나 꾸준히 교육프로그램을 실시하여 강좌 수강생 출신으로 청년여래회를 결성하였으며, 교계에 재가불교운동의 좋은 모범을 남겼다. 불교사회연구소는 대불련 출신 등이 주축이 되어 ‘불교와 사회’에 대한 연구와 조사 사업을 목적으로 만들어졌다. ‘진보적 소장불자’라 불리우는 이들이 주축이 된 불교사회연구소는 연구회보 발간 및 학술 토론 등을 주요한 사업으로 삼아 활동하였으나 90년도에 들어서면서 그 활동이 그치고 말았다.

부산불교교육원(원장 성재도) 등 서울 외의 지역에서도 80년대 민중불교운동에 열정적으로 참여했고 몇 번의 역경을 함께 나누었던 인사들이 지역 실정에 맞는 활동을 꾸준히 전개하여 새롭게 운동의 저변을 넓히고자 노력하였다.

5. 변화되는 사회조건과 운동의 다양화

민중불교운동연합은 ‘신공안정국’을 조성하여 정권을 안정적으로 이끌어 가려는 노태우 정권의 공격을 받아 조직으로서의 생명을 잃었다.

공식적으로는 91년 5월 해체를 선언하였지만 이미 그 이전부터 해체된 것과 다름없었다. 민불련은 불교운동의 논리적 근거를 체계화하는 데 많은 성과를 남겼고 실천과정에서 운동의 경험의 축적과 활동을 통한 인재 배출에도 큰 성과를 이루었다. 후일 94년의 조계종개혁불사를 주도한 인사들의 다수가 민불련과 관련된 사람들이었다는 점이 이를 반증하고 있다. 민불련은 해체되었지만 불교계의 사회운동은 다양해졌고 그 대열에 참여하는 사람들 역시 수적으로는 과거보다 많아졌다. 또한 80년대 초중반과는 달리 운동의 중심세력은 출가승단 쪽으로 옮겨갔다.

재가활동가들에 비해 상대적으로 운동의 성과를 승가 쪽에서는 단절 없이 계승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태생적인 한계를 갖고 출범하긴 했으나 김영삼 정권이 들어서면서 과거 민중운동의 사회적 지형에도 변화가 왔다. 과거 민주화투쟁의 경력이 있는 사람이 대통령이 될 정도로 한국사회의 발전은 상당한 수준에 올라 선 것이다. 자연 민중운동의 성격과 대중활동에 대해 새로운 모색이 진행되고 대중전선에도 변화가 나타났다. 이른바 ‘경제정의’를 표방하는 시민운동의 입지가 상대적으로 강화되는 반면 계급운동은 약화되는 현상이 특징적으로 나타났다.

불교계의 사회운동에도 시민운동적 성격을 표방하는 단체가 결성되었다. 정법을 수호하고 대중의 일상생활과 밀접하게 연계된 불교운동으로 사회정의를 확립하고 민주복지사회를 구현하겠다는 목적으로 91년 7월 ‘경제정의실천불교시민연합’(경불련)이 창립되었다. 심각한 사회문제로 대두되고 있는 공해문제에 대응하기 위해 ‘공해추방불교인모임’ (공추불)이 92년 2월에 창립되었으며, 민불련이 해체되기 전 90년 11월 20일 초기 민불련 관련자들이 ‘불교인권위원회’를 조직하였다. 경불련은 공명선거운동과 외국인 노동자의 인권문제 등 많은 활동을 벌였으며 불교인권위는 비전향장기수 등 양심수에 대한 인권운동과 함께 국가보안법을 비롯한 반민주악법의 철폐 등 정치사안을 다루었다.

특히 일본군위안부로 끌려가 치욕을 겪은 정신대할머니들에 대한 후원사업을 벌여 ‘나눔의 집’을 건설하는 성과를 보였다. 80년대부터 활동한 불교사회운동단체의 발전적 해체와 새로운 조직의 결성 등 변화된 사회조건을 반영하는 노력도 있었다. 정토구현전국승가회는 내부의 논의를 거쳐 과거 대승불교승가회에서 활동했던 스님들을 영입하고 보다 발전된 운동을 펼치기 위해 ‘실천불교전국승가회’로의 조직재편(92년 10월 창립)을 시도했다. 아울러 통불협 역시 발전적으로 해체하고 교계의 신행단체까지 포함하는 ‘전국불교운동연합’(93년 7월 창립)으로 확대 재편하였다.

90년대 들어 승가조직의 활성화는 눈에 띄게 나타났다. 80년대에는 중앙승가대학생회와 동국대학교 불교대학생회 및 석림회 등 서울에 있는 학승 조직이 민중불교운동의 중요한 동력이 되었는데 이들의 경험이 90년대 와서 전국 강원 학승의 연합체인 ‘전국승가대학인연합(전승련)’으로 계승되어 불교 내적 개혁운동과 사회운동에 있어 중요한 역할을 맡고 있다. 전승련으로 이어지는 승가의 운동력은 무엇보다 앞서 80년대 민중불교운동에 직간접으로 참여했던 인적 자원이 주효했고 특히 동국대 석림회와 중앙승가대 동문들의 역할이 컸다.

이들의 간단 없는 실천과 조직적 계승은 재가불자가 안고 있는 생활 등 여러 한계와는 달리 운동의 성과를 축적, 발전시킬 수 있었기에 가능하였다. 승가조직의 발전과 더불어 승가 내부에서 기존의 불교운동에 대한 비판적 검토와 ‘새로운 승가상의 확립’을 목적으로 하는 단체도 등장하였다. ‘선우도량’은 최근 농업을 통한 생명운동에 주력하고 있다. 직접적인 사회운동에 대한 실천은 아직 확실치 않으나 ‘사회·역사 그리고 미래의 문제를 책임질 수 있는 사상체계를 확립하는 작업을 해야 한다’고 선언한 바 있다. 불교의 사회운동은 90년대 들어 확실히 다양한 모습을 보이고 있다.

무엇보다 80년대처럼 총체성을 띤 운동이 아니라 나름대로 전문성을 띤 시민운동이 활성화되고 있다. 아직 정확하게 정착되지 않은 탓에 시민적 권리를 지키고 법률과 정책적 대안을 제시하는 운동에는 미치지 못하고 있으나 시민의 후생과 복지에 관한 방면에서는 좋은 활동과 경험의 축적을 보이고 있다. 국제사회에서 한국불교의 사회적 역할을 제고하는 활동 즉, 후진국의 기아에 대한 구호활동이라든가 북한 및 조선족 동포를 후원하는 활동 등은 90년대가 낳은 불교운동의 또 다른 모습일 것이다. 최근에는 소비자보호운동으로까지 불교의 사회운동 영역이 넓혀지고 있으며 앞으로 이런 사회운동은 더욱 활성화될 전망이다. 전문영역으로 확대되기 위한 전문인력의 양성과 이념의 확립이 과제인데 이것이 해결된다면 불교의 사회적 역할은 더없이 제고될 것이다.

6. 글을 맺으며

한 세기를 갈무리하는 지금 한국불교의 사회운동은, 변화된 사회상황과 맞물려 금세기 초부터 조국의 해방을 염원하며 일본제국주의와 싸웠던 불교인들의 민족해방운동의 전통과는 다소 거리가 있다.

또한 80년대 반독재민주화운동의 전선에서 민중불교운동으로 그 맥을 잇고자 한 실천과도 거리가 있다. 그러나 불교계는 최근 변화된 사회조건을 반영하는 운동의 노선을 어떻게 설정할 것인가에 대해 진지한 논의를 진행하고 있다.

‘불교운동의 새로운 모색’을 위해 과거 80년대의 민중불교운동의 성과와 문제점을 평가하고 앞으로의 진로를 찾고 있다. 모름지기 이런 진지한 모색으로 한국불교의 사회운동은 더욱 발전할 것이다. 더구나 이미 불교운동진영은 젊은 활동가들로 충원되고 있다. 이들이 다가오는 21세기 한국불교의 진보적 사회운동에 중요한 주춧돌이 될 것이라 확신한다. <끝>

서동석
건국대 경제학과 졸업. 민중불교운동연합 의장 역임. 현재 한국불교종단협의회 소비자 위원회 기획실장. 안양불교청년회 지도법사.저서로 <몽키스패너를 잡으면 세상살이가 더욱 빛나 보일 것입니다>가 있다.
저작권자 © 불교평론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