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집 | 한국인에게 불교는 무엇인가

-석가여래와 관음보살에 관한 문자언어와 조형언어

1. 서언

강우방
일향 한국미술사연구원 원장

예술가들은 조형언어로 불교사상의 본질을 그린다.

요즈음 통도사에서 개암사 괘불을 바라보며, 예술가들은 아무리 증명법사가 있다고 하더라도 예술적 직관을 가지고 나름의 해석을 표현했을 것이라는 점을 지울 수 없었다. 불화는 경전의 내용을 그대로 표현했다고 대부분의 학자 등은 믿고 있으며, 따라서 도상의 근거를 문자언어로 쓰인 경전에서 찾으려고 노력하여 왔다. 그런데 경전뿐만 아니라, 일본 학자들이 쓴 논문을 따르는 한국학자들의 논문을 바탕으로 연구가 진척되고 있으니, 엄청난 오류가 축적되어 온 것이다. 왜냐하면 조형미술에 관한 한 오류가 있으며 일본학자의 논문들에는 엄청난 오류가 있기 때문이다. 그러니 불화를 조사하고 공부할수록 물론 경전의 내용을 충실히 따르는 경우도 있지만, 예술가들은 그들 나름으로 종교사상을 해석하여 그림으로 표현하였다고 확신하게 되었다. 말하자면 옛 예술가들은 표현의 자유를 때때로 누린 것이다. 그러한 창조적 해석으로 해서 옛 조형미술이 위대한 것이다. 그렇지 않다면 우리는 옛 조형미술을 연구할 가치도 없으며 그 불교미술을 연구하는 미술사학이 독자적인 인문학으로 자리 잡을 수도 없었을 것이다.

《보살영락경》이란 경전이 있다. 불화에 보주가 왜 많은지 그런 경전에서 해답을 얻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 즉 보살의 수행에 따라 금, 은, 동, 유리, 수정 등을 얻을 수 있는데 그러한 영락들은 각기 다른 기능과 위력을 지니면서 중생을 위해 널리 쓰인다고 한다. 아마도 종교철학자나 문헌을 중히 여기는 미술사학자들은, 여래와 보살의 몸을 장엄한 영락을 그렇게 경전대로 따르면서 그대로 넘어가기가 쉽다. 그러나 그림을 자세히 살피면 그 경전에 의거하거나 해서 그려진 것이 아님을 알 수 있다. 그런데 미술사학자들은 그런 경전에 의거하여 해석해야 옳다고 생각하며, 조형언어를 읽어내어 새로이 해석하면 믿지 않으려 한다. 대단히 큰 병폐이다.

그런 경향에서 종교철학을 연구하는 학자들도 미술사학도 연구할 수 있다는 생각을 하는 경향이 있다. 가능할지 모르나 불교학자가 불교미술을 성공적으로 분석하고 해석하는 경우는 별로 보지 못했다. 미술사학자는 불교사상에 약하고, 불교학자는 조형미술에 약하다 보니, 연구가 이루어지는 사이에 오히려 오류가 점점 축적되어 올바른 해석이 묻혀버리게 된다. 우리는 불화에서 종교철학사상을 읽을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한다. 조형미술에는 경전에 묘사되어 있지 않은 진리가 가득 차 있다.

문자언어로 불교사상이 쓰여 왔으나, 한편 조형언어로 더욱 근본적으로 불교사상을 표현해 왔음을 확인하였으며, 어떤 점에서 문자언어로 표현하지 못한 점을 조형언어로 표현하기도 하였음을 알았다. 문자언어로 이해하려 할 때에는 여래나 보살의 형상을 상상할 수 없다. 자세한 묘사가 바로 32상 80종호인데 그대로 따라 조형화하면 여래의 모습은 괴물이 될 것이다. 그런데 나의 경험에 의하면 불교사상에 이해가 깊을수록, 항상 그런 것은 아니지만 오히려 조형적 표현에 시선이 가지 않는다는 것을 알았다.

말하자면 불교사상 연구자가 불화를 연구하면 가장 이상적일 것이지만 그런 경우는 드물다. 한편 불교미술을 연구하는 경우, 그 조형에 불교의 진리가 반영되어 있으므로 불교사상을 다른 각도에서 접근할 수 있을 것이지만, 그런 경우도 매우 드물었다. 사람들은 예술로는 불교사상을 표현하는 데에는 한계가 있다고 생각할지 모른다. 그러나 내가 보기에는 문자언어로 된 자료를 가지고 연구를 왕성하게 한다고 하더라도, 조형언어보다 더 한계가 있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문자언어에 비하면, 민족마다 지역마다 시대에 따라 역사적으로 조형언어로 된 불교미술은 팔만대장경에 비하면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양이 많으며 표현방법도 훨씬 더 다양함에도 불구하고 불교미술에 내포된 사상은 거의 밝혀진 바 없다.

그러면 왜 이런 일이 일어나고 있는 것일까. 그것은 조형언어를 해독하지 못하였기 때문이다. 불교미술은 한갓 장식으로 보는 것이 지배적이다. 경전에 나오는 이야기를 표현한 불교미술을 사람들은 쉽게 알아차리지만, 무엇인지 모르는 기호 같고 암호 같은 조형들은 해독하지 못하고 장식무늬로 치부해 버리고 지나쳐버려 왔다. 그런데 바로 그 무엇인지 알 수 없는 조형이 노자와 장자를 중심으로 한 동양의 우주생성론의 핵심인 생명생성의 과정을 표현한 것임을 처음으로 해독하였다. 이미 춘추전국시대, 아니 신석기시대부터 조형화된 고대의 우주생성론은 끊임없이 조형화되어 왔으며, 조형미술의 모든 장르에 걸쳐 표현되어 왔다.

중국이 불교를 받아들일 때, 처음부터 불교와 노장사상이 융합되었듯이, 이미 불교가 들어오기 전에 성립된 중국 고대의 조형을 그대로 불교미술이 이어받아 불교조각이나 불교회화와 불교공예, 그리고 불교건축에 표현하였음을 처음으로 밝히게 되었다. 그처럼 불교미술과 도가사상의 미술이 아무 갈등 없이 융합될 수 있었던 것은, 바로 ‘생명’이라는 인류문화의 최대 쟁점에서 두 사상의 조형이 만날 수 있었기 때문이다. 불교 역시 생명존중사상이어서, 생명이 생성하여 영원히 지속하는 신비하고 불가사의한 진리에서 서로 만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불교미술을 이해하기 위하여서는 도가사상이 반영된 영기, 영기문 그리고 영기화생의 상호관계를 파악해야 한다. 그 이론은 중국의 조형에서 찾아 정립한 것이 아니고, 그 영향을 받거나 독자적으로 전개하기도 한 고구려 무덤 벽화에서 풀어내어 정립할 수 있었다.

이제 지금까지 무엇인지 알 수 없었던 영기문을 완벽히 해독했으므로 그동안 지나쳤던 조형을 조형언어로 읽을 수 있게 되었으며, 수천 년 조형언어로 표현한 동양사상의 진수를 파악할 수 있게 되었다. 따라서 그동안 문자언어에만 의존하여 왔던 불교사상의 연구를 조형언어로도 연구할 수 있어서 문자언어로 표현할 수 없는 절대적 진리를 복원할 수 있는 경우가 많아졌다. 복원이란 말은, 문자언어로 불충분하게 밝혀진 진리를 조형언어의 힘을 빌려 서로 도와서 완벽하게 밝혀낼 수 있다는 의미에서 쓴 것이다. 그것은 지금까지 베일에 갇혀 있던 처녀의 세계이다. 아무도 해독하지 못하였던 새로운 불교진리의 세계이다. 불교가 인도에서 중앙아시아를 거쳐 중국에 수용되었을 때, 이미 중국에서 정립된 생명생성의 과정을 표현한 영기문이 그대로 불교미술 조형에 스며들었던 것이어서 불교가 수용되었을 때 곧바로 불교미술의 성립이 가능했던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불교사상을 연구할 때, 역사적으로 지속적으로 성립하여 온 경전들과 함께, 역시 여러 나라에서 역사적으로 이루어진 선교미술을 함께 연구하여야 올바르고 완전하게 불교사상을 연구할 수 있다. 선교미술(仙敎美術)이란 유불선(儒佛仙) 3교에 근거하여 신선사상에 입각한 조형으로 필자가 만든 말이다. 어떤 점에서는 선교미술이 가장 근원적인 사상을 제시해 주기도 한다고 생각하여 선교미술이 융합된 불교미술이 불교사상을 복원할 수 있으리라는 가능성을 감히 말한 것이다. 그동안 우리는 불교미술을 올바로 해석하지 못했으나, 고구려벽화를 연구하면서 수천 년 지나쳤던 불교미술에서 가장 근원적인 사상을 밝혀낼 수 있게 되었다. 선교미술에서 발견한 조형원리는 영기―영기문―영기화생으로 요약할 수 있다. 영기(靈氣)란 철학적인 기(氣)를 미술사학에서 쓰는 용어로 만든 것이며, 보이지 않는 기를 갖가지 무한한 조형으로 표현한 것을 영기문(靈氣文)이 부르며, 갖가지 영기문에서 삼라만상이 탄생하는 것을 영기화생(靈氣化生)이라 요약하여 둔다.

2. 여래

10년 전만 하더라도 불교조각이나 불교회화에서 ‘물’을 의식하지 못하였다. 물이 표현되어 있어도 보이지 않았고 그 상징도 읽을 줄 몰랐다. 물이 얼마나 절대적인 것인지는 최근 고구려벽화를 공부하면서 불화에서 확인하게 되었다.

여래는 여러 가지 방법으로 화생(化生)한다. 화생이란 용어는 파악하기 매우 어렵다. 어떤 과정을 거치지 않고 홀연히 나타나는 것을 말한다. 습생, 난생, 태생, 화생 등, 사물이 탄생하는 네 가지 방법을 사생(四生)이라 하는데, 실은 화생은 나머지 탄생방법과 차원이 전혀 다르고 방법도 다양한다. 나의 이론으로 말하면 여러 가지 방법으로 영기화생하고 있다. 아직도 대부분의 사람은 여래나 보살이 ‘연꽃 위에 앉아 있다’고 말하지만, 실은 《아미타경》에 의하면 연화에서 화생하므로 ‘연화화생’이라고 표현해야 한다.

그러나 불교미술의 표현 방법을 자세히 살펴보면 여래나 보살은 연꽃에서만 탄생하는 것이 아니고, 다른 여러 가지 만물의 근원인 것에서 탄생한다는 것을 찾아내었다. 그러므로 경전에 나온다고 해서 모두 옳은 것이 아니다. 예술가는 표현은 하지만 글로 남기지 않았다. 왜냐하면 예술가들은 조형언어로 이미 표현하였기 때문에, 그리고 문자언어로 설명하기 어려우므로 아무것도 문자언어로 남긴 것이 없다. 그런데 후대에 예술가가 아닌 다른 분야의 사람들이 조형미술품을 보고 잘못 기록한 것이 많다.

누구나 믿고 있는 연화화생도 올바른 것이 아니다. 연꽃을 선택한 까닭은 연꽃의 씨방이 원추형, 혹은 반구형이기 때문에 시각적으로 여래나 보살이 앉아 있거나 서 있기가 편하고 보기에도 안정적이다. 경전에 ‘연화화생’이라는 용어가 나오므로 해서, 오히려 후대에 다른 만물생성의 근원에서 화생하는 것이 보이지 않을 뿐만 아니라 적당한 명칭도 붙이지 못한 채 오늘에 이르고 있다. 그 연화화생이란 용어 때문에 연화화생이라는 도상 이외에는 보이지도 않고 해석할 수도 없게 되었으므로 ‘연화화생’이라는 용어로 인하여 우리는 다른 여러 가지 가능성의 추구를 원천적으로 차단당한 셈이다. 우리는 조각과 회화에서 다음과 같은 여래의 여러 가지 화생 방법을 살펴볼 수 있다.

1) 여래의 여러 가지 화생 방법

① 여래의 용화생(龍化生)

여래가 용의 입에서 화생한다는 것은 물에서 화생한다는 의미이다. 그런데 용의 입에서 집적 화생하는 것은 조형상 부적합하므로 용의 입에서 역시 물을 상징하는 연꽃이 나오며 그 연꽃에서 여래가 화생하는 도상은 즐겨 만든다. 특히 중국 용흥사 출토 불상에 많다(도 1). 용문석굴에서도 영기문에서 화생한 용의 입에서 연꽃이 나오고 연꽃에서 연화화생하는 도상이 많다(도 2). 그러므로 원래는 용화생(龍化生)이라 불러야 하지만, 용조차 영기문에서 화생하므로 더 근원적으로는 영기화생이라 불러야 한다. 그래도 용의 비중이 크므로 용화생이란 말을 만들어본다. 그리고 조형상으로 용의 입에서 직접 화생하는 것이 부적합하다고 하였으나 매우 드물게 그런 도상이 표현되기도 한다(도 3).

② 여래의 영수화생(靈水化生)

우리나라 통일신라 초의 비암사의 불비상(佛碑像) 가운데는 바닥에 물결을 그리고 그 물에서 연꽃이 나와 여래가 화생하는 도상이 있다(도 4). 연꽃도 물론 중요하지만 그 밑의 물을 지나치는 경우가 많다. 그런데 바로 그 물이 근원적으로 더 중요한다. 그러한 물에서 영기문이 생기며 함께 물에서 연꽃이 나오며 여래를 화생시키는 도상으로는 일본 다씨바나부인 감실불상이 있다(도 5). 그 바닥에는 물결이 일고 사이사이에 영기문이 일어나고 그 바닥에서 연꽃 줄기가 올라가서 연꽃에서 여래가 화생한다. 그동안 우리는 연꽃만 보았지 그 밑의 물과 물의 생명력을 가시화한 영기문을 보지 못했고 그 중요성도 인식하지 못했다. 명나라 불화 가운데 대좌에 여래가 연꽃에서 화생하는 도상이 있다. 그런데 대좌를 조금 열어 보이며 대좌 안에 물이 바다처럼 출렁이는 광경을 보여준다(도 6). 즉 석가여래가 영수에서 화생한다는 것을 의도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③  여래의 보주화생
보주에서 화생하는 경우도 있다. 일찍이 경주 월지(月池)에서 보주화생하는 도상의 조각품이 발견되었지만 그때만 해도 보주에서 화생하는지 몰랐었다(도 7-1). 그러나 보주의 중요성을 점점 인식하면서 요즈음 보주에서 화생하는 도상임임을 알게 되었다. 그리고 연화대좌가 있고 광배가 있고 천개가 있으면 여래나 보살이 앉는 자리인데, 여래 대신에 보주가 자리 잡고 있다는 것은 여래가 곧 만물생성의 근원인 보주와 동격임을 웅변하는 것이다(도7-2). 티베트의 수불(繡佛)에서 여래가 보주에서 화생한다는 것을 처음으로 알게 되었다. 물이 있고 물속에 보주가 많이 있는데 그 가운데 영기를 발산하는 보주에서 여래가 화생하는 도상이 있다(도 7-3). 보주 안에는 생명력이 압축되어 있어서 엄청난 위력을 발휘한다. 보주 안에는 역시 무량한 물이 가득 차 있어서 보주화생도 역시 물에서 화생하는 것임을 알 수 있다. 따라서 이 모두를 포괄하여 영화된 물에서 화생하므로 영수화생(靈水化生)이라고도 부를 수 있다.

④ 여래의 연화화생

여래의 연화화생은 《아미타경》에 나오는 말이다. 엄밀히 말하면 연화화생이 아니라 씨방화생이다. 다만 연화의 씨방이 여래가 앉기가 편하고 연꽃잎이 아름답기 때문에 선호한 것뿐이다. 그러므로 모든 꽃에서도 즉 영화된 꽃의 씨방에서 화생하는 것이다. 그래서 연화씨방뿐만 아니라 씨방 주머니에서 무량보주가 쏟아져 나오는 도상이 모든 장르에 나타나고 있는데(도 8), 그와 관련하여 씨방에서 여래가 화생하는 것이지 막연한 연꽃에서 화생하는 것이 아니다. 모든 꽃에는 씨방이 있으므로 모든 영화된 꽃에서 만물이 탄생하는 것이다. 흔히 씨방이 석류처럼 보여서 석류라 부르지만 대부분의 씨방은 석류 주머니처럼 생겼으므로 석류라고 단정하여 말하면 안 된다. 씨방을 강조하여 연화대좌에서 씨방을 강조한 것은 특히 고구려 초기의 불상에서 많이 보인다 (도 9).

⑤ 여래의 만병화생

만병에서 발산하는 영기문 사이에서 나오는 연꽃에서 즉 씨방에서 여래가 화생하는 도상은 중국 사천성에서 특히 많이 발견된다(도 10).그런데 중국 불상으로 처음 간다라 영향으로 만들어진 불상의 맨 밑에서 만병을 찾아내고는 반가웠다(도 11). 그동안 우리는 만병이 보이지 않아 그저 연화화생으로 알아왔었다. 또 우리는 그것이 만병인 줄 모르고 꽃병 혹은 물항아리라고 말해왔다.

그러나 그것은 만병이라는 도상과 용어가 이미 인도에서 만들어졌으며 중국에서도 만병이라고 번역했다. 항아리에 물이 가득 차 있고 따라서 생명력이 충만하여 만병(滿甁)이란 이름을 얻었다. 우리나라 학계에서는 그동안 꽃병 혹은 물항아리라 불리어 왔으나 이제는 만병이라는 용어를 써야 한다. 결국 여래의 만병화생도 여래가 물에서 화생하는 것을 뜻하는 셈이 된다. 이러한 만병화생의 전통은 인도 고대에 이미 확립하여 기원전 3세기 이래 지속적으로 표현되어 왔으며 그 대표적인 예가 락슈미 여신의 만병화생이다(도 12). 그러한 도상은 불교 사원뿐만 아니라 힌두 사원에서 더욱 흔히 볼 수 있다.

⑥ 여래의 영기싹 화생

영기싹은 역시 만물생성의 근원이다. 영기싹들이 솟아나고 그 사이로 연꽃이 나오고 연꽃에서 여래가 화생하는 도상이 미황사 괘불에서처럼 불화에 많다 (도 13). 그러므로 영기싹 무늬들이 더 근원적이어서 영기싹 화생이라 부르지만, 역시 넓게 보면 영기화생이다. 그런데 한편 실은 영기싹들 밑에 물이 생략되어 있는 셈이어서 결국 영기싹 화생도 물에서 화생하는 셈이다. 그러나 물이 생략되어 있으니 영기싹 화생이라 일단 불러두기로 한다.

마침내 이상의 여러 가지 화생 방법을 포괄하여 필자는 영기화생(靈氣化生)이란 말을 만든 것이다. 물론 갖가지 영기문의 형태도 포괄하여 영기문(靈氣文)이라 부른다. 그러므로 나의 영기화생론은 매우 광범위한 이론 체계를 지니고 있는데 10년 전에 시작된 정립의 과정이 아직도 계속하여 보완하여 나가고 있다.

2) 우리가 알고 있는 여래의 뜻

여래란 쉽게 말해 부처님의 다른 이름이다. 여래는 원래 이 현세에 태어나 고행 끝에 정각을 이룬 후 설법을 하다가 열반에 든 석가여래 한 분이지만, 대승불교가 흥기하면서 초역사적이며 보편적인 존재로 변모하는데 석가여래의 여러 속성을 의인화하여 무수한 여래들이 출현한다.

원래 불상이 전공인 필자는 수많은 불상을 조사하면서 존명이 석가여래인가, 아미타여래인가, 약사여래인가, 비로자나여래인가, 관음보살인가, 문수보살인가 등 존명을 확인하는 데 적지 않은 노력을 기울여왔다. 여래와 보살들을 형상으로 만든 조각품이나 회화를 평생 공부다가 불교사상과 결부시키며 연구하던 중, 어느 사찰에서 ‘시방삼세제불 일체동(十方三世諸佛 一切同)’이란 말을 새긴 주련을 보고 크게 깨친 바 있었다.

말하자면 ‘일즉다 다즉일 일중다 다중일(一卽多 多卽一, 一中多 多中一)’의 대원리에 입각하여 여래를 보아야 한다는 생각을 하게 된 것이다. 마침내 여래는 진리 그 자체가 되었음을 불상의 역사적 전개과정에서 깨닫게 된 것이다. 그리하여 석굴암의 건축과 조각을 다룬 일련의 논문에서 항마촉지인을 비로자나불로 해석하기를 시도하였으며 석굴암이 조영되었던 즈음에 동양에서 지권인을 맺은 비로자나불의 형상이 통일신라에서 처음 766년에 창안되었다는 것을 증명하려 했다.

아직까지 석남사(石南寺) 비로자나불보다 제작연대가 이른 중국의 비로자나불이 아직 확인된 바 없으니 현재로서는 비로자나불상의 도상은 통일신라의 것이 가장 이르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그것은 그리 큰 문제가 못 된다. 언젠가 중국에서 더 이른 시기에 만들어진 비로자나불이 발견될지도 모른다. 비로자나불은 진리 그 자체이므로 형상화할 수 없는 것이지만, 예배 대상으로 형상화된 것이다. 처음에는 보살형으로 조성되다가 곧 여래형으로 변한다. 결국 여래가 곧 법(法)이라는 결론을 불상에서 확인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요즈음 여래가 ‘생명’이라는 진실을 조각이나 회화에서 확인할 수 있었다. 그 영원한 생명이란 것을 《법화경》 여래수량품(如來壽量品)에서 언급한 것처럼, ‘구원의 그 옛날 성불한 여래는 그의 생명의 양이 무량하여 항상 존재한다’거나, ‘한량없는 과거세 백 천만 억 나유타 겁’이라는 부처님의 수명론은 여래가 영원한 생명임을 강조하고 있다. 부처님의 수명이 시작도 없고 끝도 없는 무시무종(無始無終)이라면 내가 태어나도, 내가 죽어도, 나는 부처님의 수명 가운데서 함께하는 것을 의미한다. 무시무종이라는 절대의 존재 속에 내가 존재한다는 뜻이어서 인간 생명의 영원성이라는 메시지를 전해주며 부처님을 인간 생명의 근원으로 삼는다. 바로 그 여래가 생명의 근원인 ‘물’ 즉 영수(靈水)에서 화생하므로 영수화생(靈水化生), 더 나아가 여래의 영기화생이라고 포괄적으로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시간적으로 공간적으로 한정된 한 사람의 종교적 인격자로서 석가여래가 아니라, 시공을 초월한 영원한 생명으로서 여래를 《법화경》은 강조하고 있다. 그러나 역사적 존재인 석가모니를 버리고 초역사적이며 초월적이며 절대자인 여래를 만든 것이 아니라, 어디까지나 석가여래의 속성 안에서 이루어지는 불교사상의 확대와 전개라 할 것이다.

3. 관음보살과 지장보살

우리가 상식적으로 이해하고 있는 보살[菩薩, Bodhisattva]은 대체로 다음과 같다. 산스크리트 보디사트바의 음사(音寫)인 보리살타(菩提薩陀)의 준말이다. 보디(bodhi)는 budh(깨닫다)에서 파생된 말로 깨달음·지혜·불지(佛智)라는 의미를 지니며, 사트바(sattva)는 as(존재하다)가 어원으로 생명 있는 존재, 즉 중생(衆生) ·유정(有情)을 뜻한다. 보살의 일반적인 정의(定義)는 ‘보리를 구하고 있는 유정으로서 보리를 증득(證得)할 것이 확정된 유정’ ‘구도자(求道者)’ 또는 ‘지혜를 가진 사람’ ‘지혜를 본질로 하는 사람’ 등으로 풀이할 수 있다. 보살이 모든 사람을 뜻하게 된 것은 대승불교(大乘佛敎)가 확립된 뒤부터이지만, 그 용어와 개념의 시초는 BC 2세기경에 성립된 본생담(本生譚: 석가의 前生에 관한 이야기)에서였다. 본생담은 크게 깨달음을 얻은 석가를 신성시하고, 그 깨달음의 근원을 전생에서 이룩한 갖가지 수행에서 찾는 것이다. 본생담에서 가장 중요시한 것은 자기희생이다.

그러므로 보살은 구도자로서 석가를 지칭하는 말이 되었다. 특히 연등불수기(燃燈佛授記: 석존이 연등불로부터 불타가 될 것이라는 예언을 받았다는 이야기)를 계기로 하여 석가를 깨달음을 구하는 사람, 즉 보살이라 일컫게 된 것으로 보이다. 이같이 단수로서 석가만을 가리키던 보살이 복수로서 중생을 뜻하게 된 것은 본생담의 석가가 출가(出家) 비구(比丘)에 국한되지 않고 왕·대신·직업인·금수(禽獸)이기도 하였으며, 나아가 과거·현재·미래세계에 다수의 부처가 있다는 생각에서 비롯된 것이다. 따라서 석가보살과 같은 특정의 보살만이 아니라, 누구든지 성불(成佛)의 서원(誓願)을 일으켜 보살의 길로 나아가면 그 사람이 바로 보살이며, 장차 성불(成佛)할 것이라는 이른바 ‘범부(凡夫)의 보살’ 사상이 생겨났다.

이러한 보살사상은 공(空) 사상과 결합하여 하나의 절대적 경지에 이르렀으며, 육바라밀(六波羅蜜)·사무량심(四無量心: 慈·悲·喜·捨)·무생법인(無生法忍) 등의 실천을 근간(根幹)으로 대승불교의 기본적인 축(軸)이 되었다. 대승불교의 보살사상 중 기본적인 두 개념은 서원(誓願)과 회향(回向)이다. 그것은 중생을 구제하겠다는 서원이며, 자기의 쌓은 바 선근공덕(善根功德)을 남을 위해 돌리겠다는 회향이다. 보살은 스스로 깨달음을 여는 능력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 세상에 머물러 일체중생을 먼저 이상세계[彼岸]에 도달하게 하는 뱃사공과 같은 자라고 설명하고 있다. 그리고 보살도 그 수행 단계에 의하여 몇 가지 계위(階位)로 분류할 수 있다. 즉 초발심(初發心: 최초 단계의 진리를 추구함), 행도(行道: 번뇌의 속박에서 벗어나려고 수행함), 불퇴전(不退轉: 도달한 경지에서 물러나거나 수행을 중지하는 일이 없음), 일생보처(一生補處: 한 생이 끝나면 다음에는 부처가 됨)의 4단계가 있는데, 후에 《화엄경》에서는 십지(十地: 歡喜·離垢·發光·焰慧·難勝·現前·遠行·不動·善慧·法雲地)로 정리되기도 하였다.

보살의 개념이 확대되어 미륵불(彌勒佛)이 탄생하였다. 미륵불은 미래에 성불할 자로서, 현재는 도솔천(兜率天)에 미륵보살로서 거주한다는 미래지향의 미륵신앙이 나타났다. 또한 정토사상과 관련하여 아미타불(阿彌陀佛: 法藏보살)과의 관계가 성립되었다. 그리고 자비의 신앙대상으로 관음(觀音)보살과 지혜의 대세지(大勢至)보살, 《반야경》 계통의 문수(文殊)보살, 《화엄경》 계통의 보현(普賢)보살이 성립되고, 이어 지장(地藏)보살 등 수많은 보살들이 나타났다. 또한 보살은 실재했던 고승(高僧)이나 대학자에 일종의 존칭과 같이 사용되어 인도의 용수(龍樹)·마명(馬鳴)·제바(提婆)·무착(無着)·세친(世親) 등도 보살이라 불렀으며, 중국에서는 축법호(竺法護)가 돈황(敦煌)보살로, 도안(道安)이 인수(印手)보살로, 그리고 한국에서는 원효(元曉)가 보살의 칭호를 받았다.

나아가 ‘범부(凡夫)의 보살’은 재가(在家)·출가(出家)를 불문하고 불교도 전체로 확대되었는데, 특히 중기 대승불교 이후 성했던 여래장(如來藏)·불성(佛性) 사상과 표리관계를 이루며, 불―보살―일체중생(산천초목도 포함)의 활동은 ‘상구보리 하화중생(上求菩提 下化衆生: 위로는 보리를 구하고, 아래로는 중생을 제도한다)’ 자미도 선도타(自未度 先度他: 자신보다는 다른 사람을 먼저 제도한다)’라는 말을 낳았으며, 불교 활동의 중요한 추진력이 되었다.

그런데 조형미술에서는 이상의 보살상을 어떻게 조형적으로 표현할 수 있는가. 미술사학자는 이상의 교학의 설명을 듣고 보살의 성격을 이해하고 있지만, 필자는 조형미술 자체에서 해답을 얻고자 한다. 우선 여래가 무량한 만큼 보살도 무량할 것이다. 그 가운데 중요한 보살들은 관음보살, 문수보살, 보현보살, 지장보살 등이다. 필자는 이들 보살의 존재가 수많은 여래처럼 석가여래의 속성들을 형상화했다고 생각한다. 즉 문수보살은 여래의 지혜를, 보현보살은 여래가 강조한 실천을 형상화한 보살이다.

그러나 이미 관세음보살이란, 우리가 겪는 환란과 두려움과 괴로움으로부터 구제해주는 보살로 생각하고 있다. 모든 재난은 물론 자식을 얻게 해주고 복덕을 나누어주는 현세이이적 소망을 들어주는 보살이 관세음보살이기도 하다. 관세음보살은 여래의 자비구제의 원력을 모태로 태어난 보살인 만큼, 중생을 평등하게 보아 누구든지 가리지 않고, 구제하는 절대자비의 자재신이며 만물의 본래 면목이다. 바로 인간의 평등을 강조한 여래의 자비심의 화현이 바로 관세음보살이다.

그러면 지장보살은 어떤 존재인가? 석가여래가 입멸한 후 미륵 부처님이 출현할 때까지 56억 7천만 년 동안 부처님이 계시지 않은 ‘무불시대의 교주’이다. 그런 시대에 육도에 몸을 나투어 천상에서 지옥까지 일체중생을 교화하여 해탈케 하겠다는 비장한 서원을 세운 대원대비(大願大悲)의 보살이다. 도리천에서 석가모니의 부촉을 받고 매일 새벽 항하사의 선정에 들어 중생의 갖가지 근기를 관찰하는 보살로 무불시대에 천상, 인간, 아수라, 아귀, 축생 지옥의 중생들을 교화하는 대비보살이다.

‘지옥이 텅 비지 않는다면 결코 성불을 서두르지 않겠다. 육도의 중생이 다 제도되면 비로소 깨달음을 이루리라’ 지장은 머리에 두건(두건이 없는 것도 있음)을 쓰고 보주를 들고 있지만 석장(육환장)을 함께 들고 있기도 한다. 지장(地藏)은 산스크리트어로 ‘크시티가르바(Kisitigarbha)’를 한문으로 번역한 말이다. 크시티가르바란 ‘대지의 태(胎)’ 또는 ‘자궁(子宮)’이란 뜻을 지니고 있는데 즉 땅을 감싸고 있는 보살이란 뜻이다.

그러니 지장보살은 바로 땅의 보살이요, 인간을 비롯하여 자연만물을 지탱하고 있는 대지는 많은 덕을 갖추고 모든 생물을 생장발육시키며 중생의 삶의 터전이 되고 있는 대지의 신이다. 대지의 위대한 공덕을 지니고[藏] 있기에 지장이다. 그러므로 지장은 인류의 시작부터 숭배의 대상이 되었던 대모지신(大母地神)의 성격을 지니고 있다고 하겠다. 그러므로 지장은 어떤 면에서 관음보살의 자비심의 극대화이고 보편화라고 말할 수 있다. 그래서 관음이나 지장보살은 석가여래만이 지닐 수 있는 보주를 받들고 있다. 그러면 왜 승형으로 표현하였을까. 스님이 모습으로 표현한 것은 그만큼 우리가 친근감을 느끼도록 하기 위함이었을 것이다. 여래에서 보살로 다시 출가자(승려)에서 재가자(유마거사)로 중생의 구원자가 우리와 가까운 존재로 변하여 가며, 결국 우리 중생이 스스로 구원자가 되는 것이다.

수많은 보살 가운데 독립적으로 가장 많이 불화나 조각으로 조성되어 온 것이 고려불화에서 보다시피 관음보살과 지장보살이다. 중생을 구제하려는 석가여래의 자비심이 형상화된 것이 관음보살이며, 그것으로도 모자라 대자대비심을 극대화하여 형상화한 것이 지장보살이다. 그것은 누구나 지닐 수 없는 보주를, 석가여래와 관음보살과 지장보살만이 지물로 삼고 있다는 도상으로도 충분히 증명할 수 있다. 그러면 조형미술에서 관음보살과 지장보살이 어떻게 표현되어 있는지 살펴보기로 한다.

1) 관음보살의 영수-만병-영기화생

① 관음보살의 영기화생

-관음보살을 흔히 연꽃 위에 서 있거나 앉아 있거나 하여 연화화생이라고 말하고 있으나, 연화 밑의 영기싹 무늬를 지나치고 있다. 더구나 연꽃도 그저 연꽃이 아니고 연꽃잎마다 보주나 영기문을 부여하여 영화시키기 때문에 실은 연꽃도 영기문의 범주에 든다고 할 수 있다. 중국 용흥사 출토 보살상에서처럼 물론 그 밑에는 물을 상징하는 용을 두고 있다 (도 14). 그런데 어느 경우든 연꽃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씨방이다. 그래서 용흥사 석불에서 씨방이 크게 강조되어 있다. 그런데 그 씨방 역시 영화되어 조형적으로 보주로 변하여 무량하게 씨방으로부터 쏟아져 나오고 있다. 따라서 갖가지 영기화된 영기싹, 영화된 연꽃잎, 영화된 씨앗 등 영기문들을 강조하여 ‘관음보살의 영기화생’이라고 부르기로 한다.

② 관음보살의 만병화생

-관음보살은 물론 영기문과 연꽃에서 화생하는데, 연꽃과 영기문이 만병에서 나와서 마침내는 연꽃에서 화생하는 것처럼 보이다. 이 경우에는 가장 근원적인 것이 조형상 만병이므로 관음보살의 만병화생이라고 불러야 한다. 중국 사천성에서 출토한 보살병립상에 그런 도상이 있다 (도 15). 실은 만병 안에는 물이 가득 차 있거나, 보주들이 가득 차 있다 하더라도 만병이 있으므로 만병화생이라 부르는 것이 좋다. 인도 엘로라 석굴의 만병에서는 강력한 구름 모양 영기문이 발산하면서 영기문이 보살로 영기화생하는 광경을 보여준다 (도 16).

고려불화로는 일본 대덕사 소장 수월관음도를 들기로 한다. 이 걸작품에 대한 단독 논문이 없어서 필자가 시도한 바가 있다. 이상하게도 걸작품일수록 그에 대한 논문이 없다. 이 작품이 대단히 중요한 까닭은 수월관음의 본질을 매우 자세히 묘사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 작품을 자세히 보면 출렁이는 바다를 압축한 만병에서 강력한 영기가 발산하며 영기문으로 이루어진 물결과 만나서 관음보살로 향한다. 그 물줄기 끝에서 갑자기 영기문이 솟구치며 그 가운데서 연꽃이 피어오르고 사면보주로 영화된 연꽃의 씨방에서 관음보살이 화생하는 광경이다 (도 17). 그러나 바다의 중요성이 큰 만큼 같은 말이지만 만병화생보다는 영수화생이라는 말이 더 적절하다고 생각하지만, 만병의 존재가 크게 강조되어 있는 만큼 만병화생이라고 일단 불러 놓는다.

③ 관음보살의 영수(靈水)화생

- 관음보살의 다리가 연꽃 위에 있거나 연꽃 밑에 영기문이 있는 경우 물이 생략되어 있는 경우가 많지만, 그 밑바닥에 물이 있는 표현되어 있는 경우가 있다. 이런 경우에는 물을 크게 강조했으므로 영수화생이라 부르는 것이 좋을 것이다. 일본 공산사(功山寺) 소장 관음보살은 연꽃 밑에 연잎과 갖가지 영기문 등이 있으나 밑의 하반부는 물이 가득하므로 관음의 영수화생이라고 부르기로 한다 (도 18).

그러나 이상 세 가지 예는 모두 물을 근원으로 삼고 있어서 모두 영수화생이라 불러야 마땅하나 물이 생략되어 있는 경우 도상적으로 영기문이나 만병을 중요시하여 다른 명칭으로 부르는 것뿐이다.

2) 지장보살의 영기화생

지장보살도 관음보살과 마찬가지로 여러 가지 화생하는 방법에 따라 여러 가지 도상들이 성립할 수 있을 것이나, 한 가지 예만 들기로 한다. 개인 소장의 고려불화 가운데 한 다리를 연꽃 위에 놓아 지장보살의 연화화생이라고 부르지만, 실은 그 연꽃 밑에 다발로 생긴 역동적 모양의 영기문들이 있다. 이런 경우에는 영기문의 비중이 크므로 지장보살의 영기화생이라 부르는 것이 좋을 것이다. 물론 그 밑에는 물이 생략되어 있다 (도 19).

이 밖에도 다른 여러 여래나 보살도 역시 다양한 방법으로 화생하고 있지만 비슷하여 이 글에서는 생략한다.

4. 결어-여래와 보살의 초역사적 보편적 존재

그러면 조형미술에서 다양하게 표현한 여래와 보살의 영기화생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여래와 보살이 영기싹이나 용이나 연꽃에서 화생하는 도상을 모두 포괄하여 영기화생이라 부르는 까닭은, 보이지 않는 영기를 무한히 다양한 조형으로 표현하여 여래나 보살 등을 화생시키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미 살펴본 바와 같이 일체의 영기문은 ‘물’과 관계가 있다.

갖가지 영기싹은 물에서 생겨나고, 용 역시 물을 상징할 뿐만 아니라 물 자체이고, 연꽃도 물을 상징한다. 따라서 모든 것은 궁극적으로 물에서 탄생하는데 물이되, 영화(靈化)되고 정화(淨化)되고 성화(聖化)된 물에서 탄생하되 영기문과 관련되어 있으므로 영수화생(靈水化生)이라 불러야 마땅하다. 단순히 물이라고 하면, 단지 물만 연상되어 일체 생명이 물에서 생기지만 물 자체를 가리키는 갖가지 중요한 영기문을 지나치게 되며 그 갖가지 영문이 무엇인지 모르게 되므로 ‘영화된 물’이어야 한다.

그런데 우리가 경전에서 찾아볼 수 있는 말은 연화화생(蓮華化生)뿐이다. 그러나 조형미술에서는 얼마나 많은 방법의 화생을 발견할 수 있는가를 확인하여 왔다. 우리는 경전에서 알 수 없는 것을, 불교미술 즉 조형언어를 통해 비로소 알 수 있는 것이 많다. 그래서 필자는 불교사상을 물론 경전이나 논문을 통하여 알 수 있으나 그 나름의 한계가 있으므로, 조형언어로 불교사상을 복원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해 왔다. 즉 여래나 보살이 ‘물에서 탄생한다’는 말은 경전에서 찾아볼 수 없다.

그러나 모든 존귀한 존재는 ‘영화된 물’에서 탄생한다는 것을 조형미술에서는 얼마든지 찾아볼 수 있었다. 그런데 영화된 물에서 갖가지 영기문이 나타나는데, 대개 영화된 물을 생략하는 경우가 많으며, 그 대신에 물의 생명력을 조형화한 여러 가지 영기문에서 흔히 탄생하므로 갖가지 화생하는 방법을 포괄하여 영기화생(靈氣化生)이란 용어를 만들어 쓰고 있는 것이다.

근대 이전의 조형에서는 일체의 조형을 영기화(靈氣化)시킨다. 영기화를 줄이면 영화(靈化)가 된다. 즉 일체의 조형을 영화시키는데 그 영화시키는 방법을 우리가 근대―현대를 거치면서 잃어버린 것이다. 연꽃이나 용이나 모란이나 구름이나 모든 것을 영화시키는 것을 우리는 고구려벽화를 통하여 보아왔고, 그 이후 통일신라를 거쳐 고려와 조선시대를 거치면서 그러한 경향은 조금도 줄어들지 않고 훨씬 더 치열해졌다.

그런데 ‘물’도 마찬가지로 갖가지 영기문으로 영화시켜 왔으며 바로 그 영화된, 전혀 다른 차원이 된 영수(靈水), 혹은 정수(淨水), 성수(聖水) 등에서 만물이 태어난다. 즉 가장 중요한 존재인 신이나 여래나 보살 등이 모두 갖가지 색의 보주들이나 산호들로 영화시킨 영수에서 탄생하고 있다. 즉 여래와 보살은 근원적으로 영수화생(靈水化生)이라 할 수 있으나, 물을 갖가지 영기문으로 영화시켜 탄생시키므로 영기화생(靈氣化生)이라 부르며 여러 가지 화생 방법을 영기화생의 범주 안에 포괄시키고 있다.

그런데 이상을 요약하면, 불화(聖畵)나 불상 조각의 가장 맨 아래에는 반드시 물, ‘영화된 물’이 있다. 그 물의 생명력을 가시화한 것이 갖가지 영기문이고, 그 만물생성의 근원인 물을 조형적으로 가시화한 영기문 역시 만물생성의 근원이 되는 셈이다. 그러한 영화된 물과 영기문에서 연꽃이 피는데, 바로 그 연꽃에서 만물이 탄생하는 것이 아니라, 연꽃의 씨방에서, 연꽃 씨방 안의 씨앗들을 다시 영화시켜 조형적으로 보주로 만들고 그러한 상징을 품은 씨방에서 만물이 탄생하는 것이다.

그런데 보주 안에는 놀랍게도 무량한 보주가 가득 차 있고, 동시에 보주 안에는 물이 가득 차서 생명력이 충만하고 있다. 그 보주를 다시 항아리 모양으로 만들어 사람들이 좀 더 쉽게 항아리 모양 안에 물이 가득 차 있다는 것을 암시하여 주며 만병(滿甁)이라 부른다. 그러나 더 나아가 항아리뿐만 아니라 정병이나 승반 등 모든 그릇이 만병이 된다. 그러므로 그 만병에서 신이 탄생하고, 여래가 탄생하고, 보살이 탄생하고, 신전(神殿)이 탄생하는 도상이 수없이 만들어진 것이다.   

석가여래나 관음보살이 영화된 물에서 탄생한다는 말은 문자언어로 기록된 바 없다. 석가여래나 보살이 만병에서 탄생한다는 말은 어느 경전에도 없다. 석가여래나 관음보살이 용으로부터 탄생한다는 말은 더더욱 없다. 석가여래나 관음보살이 보주라는 말도 전혀 없다. 관음보살이나 석가여래가 용이라는 것도 기록에 없다. 두 절대적 존재가 같은 것이며 영화된 물과 같이 두 존재가 근원자라는 말도 없다. 물론 이 모두를 아우르는 영기의 직접이라는 말은 더더욱 있을 리 없다.

석가여래와 관음보살은 그리하여 만물생성의 근원이 된다. 뿐만 아니라  이러한 상황은 비슷한 시기의 서양 르네상스 시대의 보티첼리의 ‘비너스의 탄생’이라는 그림에서 똑같이 일어나고 있다 (도 20). 즉 바람으로 바다에서 풍랑이 일어나는 가운데 커다란 조가비에서 비너스는 탄생한다. 대덕사 작품에서 선재동자가 연잎에서 탄생하듯, 그리고 대덕사 소장 수월관음도에서 큰 조가비 같은 승반에 놓여 있는 큰 보주에서 강력한 영기문이 발산하여 관음을 탄생시키듯, 비너스는 큰 조가비에 서서 탄생하고 있다.

도미니크 앵그르의 ‘포말에서 탄생하는 비너스’에서도 확인되는 것과 같이 여러 가지 신화적 이야기를 사상(捨象)하면 물에서 탄생하는 비너스도 수월관음의 메타포와 같다 (도 21). 인도 최고의 신인 평화의 신인 비슈누의 배꼽에서 연꽃이 나와 연꽃에서 창조신 브라마가 화생한다(도 22). 브라마로부터 만물이 생성된다는 인도의 창조신화는 누구나 알고 있다. 그런데 비슈누는 바다에 살고 있는데 한 손에 수레바퀴, 다른 한 손에는 샹카(소라)를 지물로 들고 있다.

샹카를 불면 그 소리에 바다의 파문(波文)이 일고 악령이 물러난다고 한다. 비슈누의 배꼽에서 연꽃이 나온다는 것은 바로 바다, 즉 물에서 비슈누와 브라마라는 창조신이 탄생시키기 위한 것임을 알 수 있다. 이 글은 영기화생이라는 필자의 이론과 조형해석학, 이를 증명하는 채색분석법이라는 방법으로, 관음보살이라고 하는 불교의 예배대상의 역사적 특수성(歷史的 特殊性)의 성격을 초역사적 보편성(超歷史的 普遍性)의 존재로, 즉 신화적 존재(神話的 存在)로 환원(還元)시키는 과정을 밝힌 것이다. 그리스의 비너스, 이란의 달의 신인 아니히타, 인도의 비슈누 등은 모두 물의 신이다. 우리는 여러 나라 신화의 중요한 여신(女神)들이 같은 신성(神性)을 공유(共有)하고 있음을 이해할 수 있다.

근원자로서의 모습을 불교미술은 보여주고 있다는 점에서, 즉 불경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여래와 보살의 본질을 파악할 수 있으므로, 불교미술이 어느 점에서는 불교사상을 근본적으로 복원할 수 있다고 말하는 것이다. 문자언어로 기록한 대장경은 불교신앙과 불교사상을 역사적으로 발전적으로 기록하며 인류의 지혜가 축적된 것이다. 그러나 문자언어로 표현할 수 없는 사상과 신앙을 조형언어로 표현한 동양의 불교미술은 그 전체가 수승(殊勝)한 대장경이라고 할 수 있다.

생명사상(生命思想)을 불교미술에서처럼 아름답고 거룩하고 극적으로 표현하기 어려울 것이다. 한갓 장식미술로 알고 왔던 그 조형들이 불교미술의 본질을 보여주고 있을 줄 몰랐다. 그 불교미술의 본질이란, 석가모니의 가르침을 시각적으로 뛰어나게 표현한 절대적 진리라 할 것이다. 불교는 일원론적(一元論的) 다신교로 발전한 힌두교의 신앙을 이어받아, 인간으로 태어나 깨달음을 성취한 존재는 석가모니 오직 한 분이지만, 무량한 여래와 보살로 화신한다는 것을 불교미술은 웅변해 주고 있다. ■

*보잘것없는 논문이나 만해 보살님에게 바칩니다.

 

강우방 / 1941년생. 일향 한국미술사연구원 원장. 서울대 독문학과 졸업. 서울대 고고인류학과 중퇴. 미국 하버드 미술사학과 박사과정 수료. 국립중앙박물관 미술부장, 학예연구실장, 국립경주박물관 학예연구실장·관장을 역임했고, 이화여대 초빙교수로 봉직했다. 저술로는 논문 모음집인 《원융과 조화-한국불교조각사의 원리 I》과 《법공과 장엄-한국불교조각사의 원리 II》가 있으며, 불교미술 관련 저서로 《한국불교조각의 흐름》 《감로탱》이 있다. 그 외 《한국미술의 탄생》과 에세이 형식의 예술론 《미의 순례》 《미술과 역사 사이에서》 《한국미술, 그 분출하는 생명력》 《어느 미술사가의 편지》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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