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집 | 한국인에게 불교는 무엇인가

1.한국인의 정신적 요람

김용덕
한양대 교수
한국인의 마음 깊숙한 곳에는 강한 종교 심성이 흐르고 있다. 외래 종교가 유입되면 한국인의 종교 심성은 외래종교를 받아들여 포용하는 다종교적 특성을 지니고 있다. 역사적으로 한국에는 여러 종교들이 함께 공존해 왔다.

새로운 종교의 유입은 단순히 종교의 교체를 가져오는 데 그치지 않고 국가의 지도이념과 정신의 세계까지 변화시킨다. 불교는 원시종교에 이어 통일신라 시대부터 국가와 국민의 정신적 지주로 자리 잡아 고려와 조선을 거쳐 지금까지 민족종교로 자리하고 있다. 고려 말 한때 유교의 성리학이 국가의 지도이념으로 떠올랐으나 유교의 특성상 종교로 자리 잡는 데는 한계가 있었다. 그래서 억불숭유의 억눌림 속에서도 불교는 여전히 조선조에서 백성들의 종교로서 정신적 요람의 자리를 유지했다.

역사적으로 불교사상은 한국의 문화원형을 형성하는 데 중요한 요소가 되었으므로 불교를 떠나서 한국문화를 논하기 어렵다. 따라서 여기서는 불교가 한국인의 생사 우주관은 물론 사유체계와 가치관을 형성하는 데 영향을 미친 현상들에 대해서 살펴보려 한다.

먼저, 한국인의 생사 우주관 형성에 불교는 큰 영향을 미쳤다. 불교가 전래하기 전 한국인의 원시 종교관은 신화에서 찾을 수 있다. 신화에 나타난 한국인의 조상은 하늘에서 내려왔고 하느님의 자손이라는 긍지를 가지고 있었다. 단군, 주몽, 혁거세를 비롯한 신라의 6촌장, 가락국 수로왕 등은 모두 하늘의 자손임을 표방하고 있다. 위기에 처했을 때는 하늘의 자손이므로 응당 하늘의 보호를 받아(주몽) 이 땅에서 멸하지 않으리라는 신념이 있었다. 그리고 후손을 위해 떠나지 않고 산신(단군)이 되거나, 하늘과 땅을 왕래(주몽)하거나, 영토를 지켜주는 수호신(박혁거세)이 될 것임을 약속하였다.

신화의 세계에서는 자기가 서 있는 곳이 우주의 중심이라는 관념이 있다.우주 중심 사상은 종교의 일반적 특성이다. 우리처럼 유목민족의 후예로 신화 구조가 비슷한 유태인들의 신화는 종교로 발전하였는데 우리의 신화는 온전한 종교로 형성하여 발전하지 못하였다. 그러나 이와 같은 종교 심성은 불교가 들어와 습합하면서 그 자리를 확보하였다. 우리 신화의 우주 중심 사상은 불교의 불국정토 사상으로 발전하였고, 생사관은 극락왕생의 윤회사상으로 전이하였다.《삼국유사》에는 당시 조상들의 신앙심을 알게 해주는 많은 설화가 있다. 이 땅이 불국정토라는 신앙은 경주 남산을 비롯하여 전국적으로 분포하고 있는 불교 유적들에서 찾을 수 있다. 신화의 우주 중심 사상에 따른 불교의 불국정토 신앙은 구체적으로 미륵정토 신앙으로 형상화되었다.

미륵불은 석가에 이어 다음 세상에 부처가 되기로 정해져 있는 미래불이다. 미륵불은 지금 도솔천에 머물며 56억 7천만 년 뒤에 다시 사바세계에 출현하여 용화수(龍華樹) 아래에서 성도하고 3회에 걸쳐서 설법을 하며 이 ‘용화삼회(龍華三會)’의 법회에서 272억이나 되는 중생들을 교화한다고 예정되어 있다. 도솔천의 미륵보살이 중생구제를 위한 자비심을 품고 먼 미래를 생각하며 명상하는 자세가 곧 금동미륵반가사유상(국보 78호)으로 형상화된다. 미륵신앙의 핵심은 정토신앙이다.

내세의 이상향에 대한 동경은 모든 종교의 공통분모다. 불교의 내세는 극락이며 극락세계는 정토신앙으로 구현된다. 극락정토는 일반적으로 말하면 아미타불이 계시는 서방정토 왕생신앙인데, 미륵신앙에서는 이와 달리 도솔천의 정토가 그대로 이 세상에도 구현된다는 약속이 되어 있는 점이 다르다. 죽어서 간다는 서방정토 신앙보다 살아서 누리는 미륵정토 신앙이 더 강한 것은 우리의 신화적 특성으로 볼 때 이 땅은 하느님이 보우하사 길이길이 보전될 땅이라는 관념이 강하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한 신앙의 흔적은 전국적으로 산재하고 있는 미륵불 유적에서 입증할 수 있는데 미륵불이 많이 조성된 배경에는 한국인이 이 땅을 곧 낙원으로 인식했음을 말해 주는 증거다.  

조상들은 불법의 힘으로 이 땅을 수호하려는 호국불교의 사상도 강했다. 특히 고려는 불법의 가호를 입어서 세워진 나라라고 여겼으므로 불법을 크게 선양하였다. 왕건은 그의 〈훈요십조〉에서 세 항목에 걸쳐 불교와 관련되는 조항을 넣었다.

첫째, 고려의 대업을 잇기 위해 부처님의 가피가 있어야 한다. 그러므로 명승지에 선교의 사찰을 세워 스님들로 하여금 수행케 하라.

둘째, 사원은 도선의 풍수설에 따라서 세우되 후세의 국왕과 대신들이 이 풍수설을 어기는 일이 없도록 하라.

셋째, 연등회와 팔관회는 거국적인 행사로 진행하되 이를 국가의 규정으로 삼으라. 이처럼 지시를 내리고 그 스스로 팔관회를 성대하게 베풀고 국가의 안녕을 기원하기 위해서 10개나 되는 사찰을 즉위한 원년 한 해 동안에 건립하였다. 태조의 유훈에 따라서 역대 왕들이 불사를 일으키고 불교를 크게 신봉했음은 당연하다.

 신라에서 주변의 적들로부터 나라를 보호하기 위해 세운 황룡사 9층탑이나, 고려에서 몽고의 침입을 받으면서 국민을 한 덩어리로 결집시키기 위해 조성한 대장경의 판각은 호국 불교의 대표적인 예가 된다. 조선조에도 불교는 임진란과 병자호란의 위기에서 특유한 호국의지를 보여 구국의 일선에 서서 승병으로 목숨을 바쳤고 전란 후에는 무너진 도성의 복구에 동원되어 헌신적인 노력을 보이기도 했다. 불교는 천시당하고 핍박받았으나 전란으로 곤경에 처해서 고통받고 흔들리는 백성을 한 동아리로 묶어 나라를 지키는 역할을 하는 데 지대한 공헌을 했다.

불교가 우리의 정신세계에 영향을 준 자취는 사고의 틀을 결정하는 데서도 찾을 수 있다. 종교는 하나의 신앙체계이며 가치체계이고 행동체계다. 그런 뜻에서 종교는 정신세계를 형성하는 중요한 요인이 된다. 우리 민족사에서 불교는 세상을 살아가는 안목과 지혜를 주어 인생을 행복하게 꾸려가도록 이끄는 훌륭한 스승이 되었다. 일상의 삶 속에서 불교적 사유 방식이 잘 나타나는 모습은 일상 언어 속에 남아 있는 불교 언어에서 확인된다. 예를 들면 인연, 권선징악, 인과응보, 윤회 등이 그것이다.

인생에서 일어나는 크고 작은 일들, 사람들과의 관계 등 세상살이에서 자주 마주치는 일들이 인연의 결과며 인과응보라고 인식하는 사고의 틀을 만들어 주었다. 인연이라는 말은 불교 교리의 바탕이 되는 인식론이다. 인과응보 사상은 지금 살고 있는 이 삶이 전생의 업보이며, 지금 내가 짓는 선악의 업에 따라서 나의 다음 생이 결정된다는 생사관이다. 한국인의 의식 속에는 죽으면 이생에서 지은 업보에 따라서 다음 세상에 윤회전생 한다고 믿는 불교적 생사관이 뿌리 깊게 박혀 있다. 이 말들은 불교를 배타적으로 보는 종교에서도 무의식중에 쓰는 말이고, 말은 의식의 반영이기 때문에 과거로부터 우리 삶 속에 불교적 인식의 틀이 얼마나 굳건한지 보여주는 사례다.

불교는 이처럼 외래종교이면서 도교나 유교와 달리 1,700여 년 동안 오랜 세월을 한민족과 함께했다. 일상의 삶 속에 녹아들어서 정신생활을 윤택하게 하고 전통종교로서 문화의 원형을 형성하는 데 절대적인 영향을 주었다. 특히 생사관 우주관 가치관의 형성에서 불교적 영향은 결정적인 역할을 했고, 호국불교 신앙은 국가를 위난으로부터 방어하여 오늘의 눈부신 한국 발전에 공헌한 바 크다.

불교가 한국인의 정신적 요람이면서 문화원형으로 자리하고 있는 구체적 사례들을 토착신앙과의 습합 양상, 의례와 세시풍속에 준 영향, 일상 언어에 살아 있는 모습, 회화 조각 음악 무용 등 한국 예술의 혼으로 살아있는 현상 등에 대해서 살펴보기로 하겠다.

2. 토착신앙과의 습합

현대사회는 다종교 사회다. 다종교 사회란 두 개 이상의 종교가 일정한 세력을 형성하면서 공존하고 있는 사회를 말한다. 특히 한국은 다종교 사회의 표본이다. 한국은 역사적으로 자생한 종교도 있으나 외래종교가 들어와서 뿌리를 내리고 종교사의 주류를 형성해 왔다. 새로운 종교가 들어와서 기존의 종교와 갈등을 빚기는 했으나 기존의 종교도 완전히 소멸되지는 않고 함께 공존하면서 명맥을 유지해 왔다.

다종교 사회에서는 종교 간의 긴장과 갈등, 알력과 반목의 문제가 필연적으로 대두되어 전쟁을 일으키기도 한다. 고대의 전쟁이 영토의 확보를 위한 토지 전쟁이었다면 지난 세기는 이념의 갈등인 이데올로기의 냉전시대였다. 현재 세계의 전쟁 현상은 종족 간의 갈등이 국지적인 전쟁을 일으키고 있으며, 미래의 전쟁은 종교와 종족 간의 갈등이 복합적으로 작용하는 종교 전쟁으로 발전할 가능성이 매우 크다. 이미 중동 지역에서는 종교로 빚어진 문명의 충돌이 전쟁으로 비화되고 있다.

이처럼 종교의 제국주의적 속성은 종교와 종교 사이의 긴장과 갈등을 일으키고 심각한 경우에는 분쟁이나 전쟁으로까지 가게 되는 것이다. 다종교 사회에서 종교 간의 긴장과 갈등은 타 종교를 대하는 태도로부터 야기된다. 타 종교를 대하는 태도를 비교하면 종교 간의 특징이 잘 드러난다. 타 종교를 대하는 태도는 배타주의·포괄주의·상대주의·다원주의로 나눌 수 있다.

첫째, 배타주의는 전통적으로 유태교, 이슬람교, 기독교 등 유일신을 믿어온 종교들이 타 종교를 대하는 태도다. 유일신교의 배타주의는 자신의 종교만이 참종교라 여기고 자신의 종교가 아닌 다른 종교는 이단이라고 믿는다. 그러나 다원 가치와 상대주의를 추구하는 탈현대의 포스트모더니즘 관점에서 보면 배타주의는 평화적 공존이라는 인류의 명제에서 벗어나 있다. 둘째, 포괄주의는 자신의 종교가 다른 모든 종교를 예외 없이 포괄하고 있다고 주장하는 태도를 말한다. 포괄주의는 다른 종교를 무시하는 것이 아니라 인정하면서 자신의 종교가 더 우월하다고 믿는다.

포괄주의는 개방적 태도를 지향하지만 그것은 타 종교를 자기 종교로 흡수 통합하고자 하는 독선적 개방이라고 할 수 있다. 셋째, 상대주의는 모든 종교를 동등하게 인정하며 공존의 입장을 취한다. 그러나 동등하게 서로를 인정하면서 ‘너는 너대로, 나는 나대로’의 냉정한 입장을 취하게 됨으로써 타 종교 신자들에 대한 적극적 애정을 갖지 않는다. 넷째, 다원주의는 다양한 종교 전통을 인정하면서 자기 존중에 바탕하여 타 종교를 존중한다. 다원주의는 개방적이고 대화를 통해 자기 자신에 대한 이해와 쇄신을 도모한다. 진리를 향해 진지하고 정직한 자기 개방을 추구하고, 타 종교의 신자들에 대한 진지한 이해를 포기하지 않는다.

다종교 사회에서 종교 간의 갈등과 알력이 확대되어 분쟁과 전쟁의 상황으로 발전하도록 방치할 수는 없다. 신앙이 다르다는 이유 하나로 인류의 문화유산을 한 줌의 재로 태워버리거나 파괴하도록 방관할 수도 없다. 그러기 위해서 진정으로 종교에 대한 근본적인 이해가 필요하고 종교 간의 대화로 문제를 풀어가야 한다. 진정한 대화가 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먼저 정직한 자기 개방과 양보, 그리고 상대방에 대해 이해하려는 태도가 필요하다. 이런 점에서 불교는 대화에 가장 개방적인 종교다. 불교는 자기 신앙에 대한 철저한 확신을 가지고 있으면서 상대의 신앙을 공감적으로 이해하려는 태도를 갖고 있다.

이러한 불교의 성격은 세계 어느 나라에 전파되더라도 그 나라의 고유 신앙과 습합하여 그 나라 고유 불교 모습으로 생명력을 견지하면서 그 나라 문화의 원형을 이루는 데 기여하는 종교다. 불교는 우리나라에 유입되어서 토착 종교와 갈등을 겪지 않고 토착신앙을 이해하고 포용하면서 한국적 불교로 정착하였다. 불교와 토착신앙은 상호 보완적 관계를 유지하면서 한국인의 정신적 요람이 되어 한국의 문화를 창조하는 데 기여하였다. 불교와 토착신앙의 습합 양상은 불교가 포용한 민간신앙의 모습과 민간신앙이 포용한 불교의 모습으로 나누어 살펴보기로 한다.

먼저, 불교가 수용한 민간신앙의 유형은 산신신앙, 칠성신앙, 용왕신앙, 조왕신앙, 장승신앙 등이 있다. 이들 민간신앙이 수용된 시기에 대해서는 불교 전래 초기부터라는 설과 조선 중기 1500년대 이후라는 설이 있다. 습합이 전래 초기라는 설은 기존의 학설이며 대체적으로 그렇게 받아들여지고 있다. 그런데 현존하는 산신각 등의 건립 시기와 산신탱화의 조성 연대 등 실질적 사료를 준거로 조성 시기가 16세기 이상으로 소급할 수 없다는 주장도 있다. 이 문제는 별도의 고찰을 요하므로 여기서는 습합에 대한 현상만을 가지고 살펴보기로 한다.

불교가 포용한 민간신앙의 대표적인 경우는 산신신앙이다. 우리나라는 국토의 7할이 산악이므로 산간문화가 일찍부터 발달하였다. 상고시대부터 산을 중심으로 수렵채취 생활을 해왔기 때문이다. 단군신화를 비롯한 신라의 6촌장과 김수로왕 등 거의 모든 신들은 산을 통해서 하강한다.

단군신화에서 환웅이 태백산(묘향산, 구월산)에 하강하여 신단수를 중심으로 신시(神市)를 베풀었다고 했는데 이때 산은 우주의 중심이고 신단수는 우주목이 된다. 그리고 단군은 아사달 산에 들어가 산신이 됨으로써 후손을 보살피는 신격을 획득한다. 씨족이 분화하면서 산신은 마을의 수호신으로 좌정하게 되는데 비록 산간을 떠나 평야지방에서 농사를 지으면서도 모시는 신은 산신이며 산신제를 지낸다. 산신은 조상신의 성격과 수호신의 성격을 가진다. 마을마다 있는 서낭신도 수호신으로서 근본은 산신에서 유래하였다.

산신은 할아버지 또는 할머니나 호랑이로 표상화된다. 우리나라 산신의 성별은 남성 신이 많으며 여성 신인 경우도 있다. 남성 산신은 천신의 성격이 있고 여성 산신은 지모신의 성격이 있다. 동해안 골매기 당 할매신이나 선도산 성모, 지리산 마고할미는 대모로서 지신의 성격을 갖는다. 그래서 사찰의 산신각에 모셔진 산신 가운데는 할아버지상이 주를 이루지만 계룡산 동학사의 산신상, 속리산 천황사와 지리산 실상사 약수암에 봉안되어 있는 탱화는 여성 산신이다.

산신탱화의 일반적 구성은 호랑이와 할아버지(할머니)와 동자상이 노송 아래 그려진다. 장식으로 책거리나 대나무 장식, 차를 달이는 도구, 경전(《법화경》)을 손에 펴들거나 단주를 쥐고 있기도 하다. 산신탱화에서 반드시 등장하는 동물이 호랑이다. 호랑이는 산신의 사자이기도 하지만, 때로는 산신과 구분하지 않고 그 자체를 산신·산군·산신령으로 부르기도 한다. 호랑이를 산신으로 모시는 신앙 형태는 강원도 일대 산악지방에서 산신제를 지낼 때 신당 앞에 생 돼지머리와 간을 제물로 바치는 경우에서 볼 수 있다.

단군신화에서 호랑이는 인간이 되는  데 실패하였으나 설화에서는 신령스러워 인간으로 변신할 수 있다고 믿는다. ‘김현감호’ ‘해와 달이 된 오누이’ 강감찬과 관련된 《용재총화》의 설화에서 호랑이는 인간으로 변신한다. 호랑이는 신으로 등장하기도 하지만 ‘희방사 창건설화’나 ‘동학사 남매탑 설화’에서처럼 인간과 교감하고 친밀감을 주는 동물이 되기도 한다. 호랑이는 이같이 불교가 들어오기 이전부터 한민족과 친근감을 주는 토템 동물이며 신으로 숭앙받아 왔으므로 백성들이 가진 신앙을 자연스럽게 신앙의 대상으로 사찰에 수용된 것으로 보인다.

산신각과 함께 사찰 경내에 있는 칠성각이 있다. 칠성신앙은 본래 중국 도교의 성숙숭배(星宿崇拜) 신앙이 민간신앙으로 정착하였던 것인데 다시 불교에 수용된 경우다. 칠성은 남두칠성과 북두칠성이 있으며 우리나라는 북두칠성 신앙이 강하다. 칠성신은 인간의 수명과 복록을 관장한다고 믿는다.

특히 아들을 점지하고 수명장수를 기원하며 재물이 풍족하기를 바라는 사람들의 소박한 욕구를 채워주는 신이 바로 칠성신이므로 그들 신에 대한 신앙을 불교적으로 윤색하여 사찰의 경내로 흡수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산신이 공동체 수호신이라면 칠성신은 개개인의 명과 복을 주는 신이다. 칠성신의 양상은 민간에서도 칠성당, 칠성굿, 칠성본풀이, 칠성새남 등 제주도 무속에서 또 다른 양상으로 존속해 오고 있다.

용왕과 조왕단도 불교에 수용된 민간신앙이다. 용은 우리말로 ‘미르’라 하는데 물(水)의 고어 ‘믈’, 은하수의 우리말 ‘미리내’와 관련이 있는 물의 신이다. 용신 신앙은 민간에서 비를 내려주는 신으로 숭앙되며 6월 보름에 용신제를 지낸다. 또 용왕굿을 하여 농사의 풍년과 바다의 풍어를 기원하는 대상 신이다. 그런데 불교에서 용은 호법신중에서 천룡팔부(天·龍·夜叉·乾達波·阿修羅·迦樓羅·緊那羅·摩喉羅迦)의 하나다. 그래서 불법을 옹호하는 신중이지만 사람들은 ‘용왕할머니’ ‘용궁마님’ ‘용신할머니’처럼 부르며 가뭄에 비를 내려 풍작을 돕고 고기를 많이 잡게 해주는 풍어의 신으로 숭앙한다.

조왕신은 부엌의 신으로 불을 관장하는 불의 신이다. 조왕은 주로 주부가 섬기는 신이므로 가택신들이 그러하듯 가정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에 관계한다. 삼신이 아기를 점지하는 기능이 있다면 조왕은 아기의 건강을 지켜주는 육아의 기능을 갖는다고 믿는 한편 재물을 지켜주고  가족의 질병과 액운을 막아달라고 빌기도 한다. 조왕의 형태와 봉안 위치는 부엌에서 부뚜막 안쪽 벽의  중앙에 흙으로 조그만 단을 만들고 정화수를 담은 종발을 올려놓는다. 민간의 조왕신앙이 불교에 수용될 때는 호법신중의 하나로 편입되었다. 조왕은 신중탱화 하단에 위치하며 인사(人事)를 검찰하고 선악을 가려내는 신으로 참여한다. 사찰에서 조왕은 다시 독립하여 조왕단과 조왕탱화가 생겨났다. 조왕탱화에는 조왕대신을 중앙에 배치하고 왼쪽에 담자역사(擔紫力士)를 오른쪽에 조식취모(造食炊母)를 묘사한다. 조왕단에 조왕탱화 대신 글씨를 써서 ‘남무조왕대신(南無竈王大神)’이라는 신위를 봉안하기도 한다.

그 밖에 저승에 가면 심판을 한다는 시왕신앙, 사찰의 경계와 수호신격인 장승신앙, 신령에게 바치는 정화수신앙, 주술적 부적신앙 등도 불교가 수용한 민간신앙의 하나다. 이들의 습합 양상에 대해서는 지면의 제약으로 언급하지 못하지만 민간신앙이 불교에 습합된 사례는 더 찾을 수 있을 것이다.

다음으로 민간신앙에 수용된 불교의 습합 양상에 대해 살펴보기로 한다. 불교와 민간신앙의 습합이 이루어진 대표적 사례는 무속이다. 무속은 원시신앙에 바탕을 두고 있는 기층 신앙이지만 체계가 잘 정리 되어 있는 고등종교와 차이가 있다. 불교는 종교의 기본 요소인 교조와 의식과 교리가 체계적으로 갖추어진 성립종교인 데 비해 무속은 종교적 구조의 틀이 느슨하다. 그래서 무속은 고등종교인 불교로부터 여러 요소들을 가져와 종교적 틀을 갖추어서 생존하려는 태도를 보인다. 무속이 수용한 불교의 요소는 신앙의 대상이 되는 신격, 제의 형식인 의례의 절차, 종교사상인 사유체계 측면에서 찾아볼 수 있다.

먼저 무속은 교조가 없고 여러 신들이 섬겨지므로 신 관념의 폭이 넓다. 무속에서 섬겨지는 신 가운데 불교적 성격의 신으로는 석가모니를 비롯해서 삼불제석 약사보살 지장보살들 불보살과 서산·나옹·무학 대사 등 고승들도 등장한다. 이들은 무신도로 그려져 함께 봉안되고 신앙된다. 세존굿(시준굿) 또는 제석굿은 거의 모든 굿에서 발견되는데 무당이 고깔을 쓰고 장삼과 가사를 차려입고 목에 염주를 걸고 삼불제석이 그려진 삼불선을 들고 무의를 진행한다.

무가에는 후렴구에 ‘나무아미타불’을 반복하거나 불교의 생사관을 보여주는 극락 지옥 장면이나 불경의 어떤 구절을 가져와 부르기도 한다. 무속 의식(의례)의 절차는 굿을 통해 구현되며 일정한 틀을 유지하고 있는 편이다. 굿의 기본 구조는 청신-오신-송신의 구조로 짜여지는데 이 구조는 불교의 49재나 수륙재 등 큰 재 의식 구조(시련, 대령-각단 의식-봉송, 회향)와 일치한다. 무속의 우주관 영혼관 내세관 인간관 등 종교적 사유체계는 다양하다. 무속이 불교뿐 아니라 도교와 유교 등 여러 종교로부터 여러 사유체계를 받아들여 자기화한 결과일 것이다. 무속의 불교적 사유체계는 생사 우주관에서 잘 드러난다.

무속의 내세관은 극락과 지옥으로 구분되며 영혼이 연화대에 가기를 바라는 왕생사상이 강하다. ‘칼산지옥’ ‘한빙지옥’ ‘흑암지옥’ 등 지옥들의 명칭은 《시왕경》에 나오는 지옥들이 나열된다. 인간들이 삶과 죽음의 세계를 인지하고 우리 민족은 그 세계를 ‘이승’과 ‘저승’으로 구분하고 있었는데 불교가 들어온 이후 ‘극락’과 ‘지옥’의 관념으로 구체화된 듯 보인다.

무속이 불교를 수용한 배경에는 체계적 틀을 갖춘 불교를 모방함으로써 스스로 생존을 모색하려는 의지의 반영이라고 본다. 무당이 불교의 사제자인 ‘법사’ ‘보살’이라는 명칭을 차용하고, 점집에 ‘卍’ 자를 내걸고, 굿당에 불상과 보살상을 안치하여 불교의 위신력을 빌어 무업을 하는 현상을 찾아볼 수 있다. 민간신앙은 불교를 배우고 가져와서 스스로 존립기반을 세우려 했으며 불교는 배타적이기보다 포용주의적인 태도로 민간신앙을 수용하여 한국적 불교를 형성하였다. 불교와 민간신이 습합된 한국 불교의 특성은 한국인의 삶 속에서 기도를 들어주고 마음을 달래주고 꿈을 밝혀주는 전통종교로서 그 위상을 확립하고 있다.

3. 의례와 세시풍속에 뛰는 맥박

세시풍속은 일상의 삶에서 관습적 주기적으로 반복해서 행하는 풍속이다. 세시풍속은 생활에서 변화와 리듬을 주고 생기를 북돋우어 활동적 생활을 영위하는 데 도움을 준다. 그리하여 단순한 시간의 변화를 역동적이고 의미 있는 시간의 흐름으로 바꾸어 준다. 세시풍속은 생명력을 유지하고 회복시키는 기능을 가지기 때문에 일상의 삶과 맞물려 있다.

세시풍속에는 의례가 따른다. 의례는 신화시대의 제의에서 연원한다. 제의는 자연의 생명이 다시 살아나야 한다는 강렬한 범세계적 욕망을 표현하는 현상이다. 처음에 간단하였던 제의는 신화를 통해서 복잡한 의례로 발전하여 진화하는 동안 관례화하고 관습화하고 혹은 규정이 되어 법률화한다. 종교의례는 종교적 대상과 합일이라는 상징적 의미를 가지는데 환경의 변화로 종교 관념이 전이되면 의례도 변화한다. 불교의 의례도 교단을 벗어나 민중 속으로 전이될 때 그 모습이 환경에 적응하게 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본바탕에 깔린 종교관념 본래의 모습은 어떤 형태로든 잔존하게 된다.

세시풍속과 의례 가운데 두드러지는 불교의 맥박으로 남은 풍속은 초파일과 백중이다.

초파일 연등의 기원은 삼국시대로 거슬러 올라간다. 우리나라 연등회에 대한 기록은 신라 경문왕 6년(866)에 황룡사에서 연등회를 거행했다는 기록이 처음이다. 그리고 진성여왕 4년(890) 정월 15일에 왕이 황룡사로 행차하여 간등(看燈)한 내용이 보인다.이 기사에서 연등 시기가 정월이라는 점과 간등(看燈) 후에 잔치를 베풀었다는 점에 주목하면 종교적 의례라기보다 왕실 번영의 기원 또는 연희의 성격에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연등회가 정월과 2월에서 사월초파일에 행해진 것은 고려 중기 의종(1146 ~1170) 때부터다. 문헌기록에 의하면 고려시대에 사월 초파일의 연등회는 궁중에서 행한 것이라기보다 특정 신분의 계층이나 민간에서 행해졌음을 알 수 있다. 궁중과 관계없이 민간에서 초파일 연등행사를 했다는 것은 부처님 탄생과 관련된 불교적 의미가 강한 행사였음을 알기에 충분하다. 공민왕 때에는 4월 8일에 집집마다 연등을 하는 국가적인 축제 성격을 띠었음을 알 수 있는데 이는 고려사회에서 정치적 경제적 문화적 기능이 컸음을 의미한다. 연등회는 고려사회가 창출해낸 문화적 장치며 나아가 고려문화를 대표하는 중핵이었던 것이다.

고려의 초파일 연등은 조선에서도 그대로 이어지고 있다. 조선이 유교주의를 표방했으므로 국가적 명절은 아니었으나 이미 민간에 깊이 뿌리박은 초파일 풍속을 금지시키는 데까지 통제하지는 못했다. 홍석모의 《동국세시기》에는 당시 민간에서 행해진 초파일 풍경이 매우 자세히 묘사되어 있다. 1900년 이후 근세 약 1세기에 걸쳐서 나타나는 초파일 연등은 왕조시대의 모습과 달리 시대상을 반영하여 새로운 모습을 보인다. 세시풍속이나 연중행사는 산업의 형태, 사회조직의 변화, 정치제도 등 시대상을 반영하는 것이므로 연등회도 자연히 이러한 경향에 따라서 그 모습을 달리하게 된다. 이 시기는 급변하는 시대만큼이나 연등회도 크게 변화를 보인다.

광복 이후의 초파일 형태는 1955년을 전후로 나누어 구분된다. 해방이 된 직후는 그동안 총독부에 의해 주도된 행사와 달리 이전의 전통적인 모습으로 복원되어 간다. 초파일 행사의 핵심인 제등행렬도 현재의 모습으로 자리 잡아 간다. 각 지방에서도 초파일 행사가 성대하게 열린 사실을 신문들이 소개하였는데 특히 남원에서 현대식 축제의 발단으로 보이는 ‘춘향뽑기’와 ‘그네뛰기’ 경연을 했다는 기사가 눈에 띄며 현대적 축제의 요소를 수용하는 모습도 발견된다. ‘부처님오신날’이라는 우리말 용어는 1966년 처음 쓰기 시작하여, 1968년부터 공식 명칭으로 정하여 통일하였다. 중요 행사의 내용도 초파일 당일에만 하는 것이 아니라 백일장·웅변대회·강연회·관등경연대회·무용제·선서화전·법요식 등으로 다양해졌다.

초파일 연등회가 축제화되어 정착하는 시기는 1960년대 중반부터다. 1975년은 ‘부처님오신날’이 국가 공휴일로 지정되고, 1981년 이후 초파일 행사는 조계종 외에 범종단 차원에서 타 종단도 참가하여 제등행렬의 길이가 10만 연등 에 달하는 장관을 이룰 정도가 되었다. 오늘의 연등회는 소연등회와 대연등회로 나누어 법요식, 욕불의식, 문화마당, 장엄연등행렬, 회향마당 등으로 구성되며 불교의식뿐 아니라 이미 세계 축제마당으로 홍보되었다.

백중은 百中, 百衆, 백종(百種), 중원(中元), 망혼일(亡魂日)이라고도 한다. 백중의 전승 양상에서 불교의 흔적을 찾을 수 있다. 절에서 이날 드리는 불공을 ‘백중불공’이라 하며 민간에서 무당들이 이날 하는 굿을 ‘백중맞이’라 한다. 백중불공이 절에서 죽은 사람의 명복을 비는 불공이듯 백중맞이도 죽은 이의 넋을 천도하는 굿이다. 이날을 망혼일이라고 부르는 까닭과 천도재를 올리는 연유는 《우란분경》에서 지옥에 떨어져 고통받는 어머니를 제도하기 위해서 목련존자가 오미백과(五味百果)를 담아 시방대덕에게 공양하여 어머니의 영혼이 구원받았다는 내용이 있다. 절에서는 하안거를 마치고 회향하면서 대중(百衆) 앞에서 잘못을 고백하는 날이므로 백중이라 불렀다는 설도 있다.

우리나라는 불교가 융성했던 신라와 고려에서 7월 15일 사원은 물론 민간인들이 우란분회를 열어 음식을 장만하고 부처님께 공양하였다는 기록이 있다. 《동국세시기》에 따르면 백 가지 꽃과 햇과일 등 백 가지(百種) 음식을 장만하여 부처님께 불공한다는 데서 이 말이 유래하였다 한다. 이들 내용을 종합하면 백중은 원래 불교에서 많은 음식을 차려 대덕스님을 공양하고 조상을 천도하는 조상숭배 성격이 강한 의식임을 알 수 있다.

이날이 우리나라의 농사력에 맞추어 생장의례의 마지막에 해당하므로 힘든 농사일이 마무리되는 시점과 맞물려 농촌에서는 머슴을 위로하는 날의 의미가 강화되어 머슴날이라고 하여 사찰과 따로 행사를 벌이고 있으나 백중날의 바탕에는 불교적 의미가 아직도 남아 있어서 무속인들은 아직도 백중맞이 굿을 성대하게 치른다. 백중이라는 세시풍속이 원래 농경과 관련된 농신제인데 후대에 불교의 우란분회 영향으로 원래 의미가 변했다는 설도 있으나 불교적 행사를 통해 불교와 농경세기의 교섭을 알 수 있는 농경세시임을 확인하게 된다.

‘제석단지’ ‘세존단지’ ‘조상단지’라고 부르는 풍속도 불교와 관련이 있다. 제석단지는 가신의 하나로 지방에 따라서 여러 가지 이름으로 불린다. 제석단지는 대개 안방의 윗목 시렁에 모시는데 신체가 단지나 항아리에 쌀을 가득 담아서 입구를 한지로 봉한 형태다. 이 쌀은 햇곡이 나면 처음 수확한 쌀로 바꾸어 넣고 대소 명절이나 출산 등 경사가 있을 때 주부가 장성으로 밥과 떡을 차려 놓고 의례를 행한다. 이때 술과 고기를 바치지 않는 것은 불교의 영향이라고 보인다. 명칭에서부터 이미 불교와 연관되어 있음을 알 수 있거니와 제석은 수미산 꼭대기의 도리천을 주재하는 불교의 신이다. 제석은 석제환인(釋提桓因)이라고도 하며 신들의 제왕이기도 하기 때문에 머리에 ‘帝’자를 붙여 제석이라 한다. 역사상에서 보면 단군신화에서 제석이라는 이름이 등장한다. 단군은 “환인(桓因, 帝釋을 이른다)의 서자(庶子, 여러 아들) 환웅”이 하강하여 웅녀와 혼인하여 낳은 아들이다. 이처럼 일찍부터 제석신앙은 우리의 신화에 등장할 정도로 친근한 신앙이었기에 가정신앙으로 쉽게 전승된 것으로 보인다.

의례에서 헌다례(獻茶禮)는 불교의 유풍이다. 《삼국사기》에 따르면 흥덕왕 3년에 당나라 사신으로 갔던 대렴이 차 종자를 가져와 지리산에 심은 것이 처음이다. 《삼국유사》에 보면 경덕왕 때 충담사가 삼화령 미륵불에게 차를 공양한 기록이 있고, 월명사에게 왕이 염주와 차 한 봉을 하사했다. 보천과 효명 태자가 오대산의 오만 진신에게 차를 공양한 일,수로왕의 17세손인 갱세급간(賡世級干)이 세시마다 다례를 지냈다는 기록 등은 차가 의례용으로 쓰였음을 알게 한다. 하대에 오면 불가에서뿐 아니라 화랑도(사선이었던 영랑, 술랑, 남랑, 안상이 강릉 경포대와 한송정에서 차를 끓이는 데 사용했던 돌우물과 절구가 남아 있다.)와 일반인들도 차를 약이나 의례 용품으로 활용하였다.

차와 함께 다례의식도 발전한 것으로 보이는데 초기 불교가 궁중을 중심으로 보호받아 성장했으므로 다례풍속도 궁중을 중심으로 발전했다. 고려 말에 정몽주 이숭인 등이 주청하여 송나라 《주문공가례》를 받아들여 관혼상제의 다례가 채택되면서 조정에서는 다례를 받아들여 궁중에서는 여전히 길례와 가례, 흉례에서 다례의식이 집행되었다. 종묘에 햇차를 올리는 ‘천신종묘의(薦新宗廟儀)’, 중국 사신을 접대하는 ‘원접다례(遠接茶禮)’ 등이 있었고 민간에서도 관혼상제에 다례가 확대되어 갔다. 제례는 기제사와 명절제사가 있는데 명절제사에 지내는 의례를 차례(茶禮)지낸다고 구분하여 부르는 명칭에서 명절 때 행하는 의식에서 특별히 다례의식이 행해진 흔적을 발견할 수 있다. 제사 때에도 국(羹)을 올린 후 숭늉(냉수)을 드리는 절차를 ‘진다(進茶)’라고 표기하는 것을 보면 예전에 차를 우린 찻물을 제사상에 올린 흔적이 남아 있음을 알 수 있다.

이 밖에도 부분적으로 불교의 맥박이 뛰고 있는 세시풍속을 볼 수 있다. 섣달 그믐밤의 야광귀(夜光鬼)가 약왕보살(《법화경》 〈약왕보살본사품〉)과 관련 있다는 설, 제웅치기, 동지팥죽 뿌리기 등 축귀(逐鬼)에 불보살 명호를 부르는 일, 단오부적과 단오선에 불경 구절을 쓰는 일 등 불교가 오랜 세월 동안 전통종교로 자리 잡으면서 우리의 생활 속으로 녹아들어 생활풍속과 의례에 그 자취가 남아 있는 현상들이다.

4. 일상언어에 살아 있는 숨결

우리는 반만년의 찬란한 역사를 가진 문화민족이라는 긍지를 가지고 있다. 어떤 민족에 있어서 문화란 곧 그 민족이 대대로 살아오면서 쌓아올린 탑과 같은 것이어서 순간적으로 몇몇 사람에 의해서 이루어지는 것은 아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 문화를 잘 분석하여 보면 민족성이 쉽게 드러난다.

문화는 다양한 지식과 풍부한 경험의 축적으로 이루어지므로 한국문화 역시 선사시대로부터 조상들이 겪은 경험을 통한 지식과 지혜가 쌓여서 이루어낸 결과인 것이다. 이러한 한국 문화의 특징을 한마디로 꼬집어 표현하기는 어렵다. 그 민족의 문화의 특징을 간단히 알려면 박물관과 언어를 보면 된다. 박물관에는 선사시대로부터 현대에 이르기까지의 문화의 발전상을 한눈에 볼 수 있기 때문이다. 또 언어는 박물관의 유물과는 달리 살아 있는 화석으로서 문화 특징을 잘 간직하고 있기도 하다. 말은 생각의 그릇이므로 그 언어를 잘 분석해 보면 그 말을 쓰는 사람의 생각의 틀과 깊이를 알 수 있는 것이다.

우리가 부지불식간에 쓰는 말 가운데에는 불교에서 나온 말들이 많다. 우리 선조들은 이 강토를 지상의 낙원인 불국토로 인식하고 또 그렇게 가꾸고자 노력했다. 금강산, 비로봉, 낙산, 안양 등 전국의 산과 지명의 이름은 물론 인연, 야단법석, 점심, 장로(長老-기독교에서 가져다 쓰고 있다) 등 일상어에도 불교에서 나오거나 불교적인 생각으로 붙인 이름이 얼마든지 있다. 이처럼 산 이름 땅 이름 하나를 짓는 데도 불교적인 생각을 했으며, 경주의 남산을 비롯한 전국의 명승지에 산재하는 마애불을 통해 선인들의 불교신앙이 어떠했는지 짐작하기에 어렵지 않다.

우리는 나의 생각을 상대방에게 잘 이해시키기 위해서 때로는 몸짓과 그림을 그리기도 하면서 장황하게 설명을 늘어놓기도 한다. 그러나 어떤 경우에 단 한 마디의 속담이 장황한 설명보다 효과적으로 말하려는 뜻을 상대방에게 이해시킬 수 있다. 물론 그러한 속담이 가지고 있는 압축된 상징적 의미를 얼른 알아듣고 이해하려면 그 사회에서 공동의 문화적인 배경을 가지고 공동의 체험을 했을 경우에 한하여 가능하다. 속담은 한 두 사람의 생각이나 체험만으로 이루어진 것이 아니요, 또한 한두 해에 이루어진 것도 아니며, 오랜 세월 동안 여러 사람에 의해 이루어진 지혜의 응결체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속담 속에는 우리들의 일상생활 속에서 경험을 통해 얻은 지식과 예지, 그리고 독특한 정서와 심리를 포괄하고 있다. 속담은 격언이나 금언처럼 특수한 지식층에 의해 이루어지지 않았다 하더라도 생활의 진리를 풍부히 담고 있기도 하다. 또한 속담은 서민대중에 의해 이루어지므로 사회적 산물이며 향토성도 갖추고 있고 시대성도 갖추고 있다. 속담의 형식은 간결한 것이 특징이다. 말하기 쉽고 알아듣기 쉬우며 기억이 잘되어야 하기 때문에 간결한 형식을 갖추었다.

속담의 내용은 사회적 산물이기 때문에 그 속담이 형성된 시기의 사상과 민간 의식을 잘 나타내 준다. 그러니 우리 속담에는 지난날 우리 사회의 시대상과 민간 의식이 잘 반영되어 있다고 하겠다. 그 가운데 불교와 관련되는 속담에는 억불숭유의 사상이 강하게 나타나 있다. 속담에 불교적인 내용이 많이 남아있는 것은 우리문화의 배경, 특히 서민문화의 배경에서 불교가 차지하는 비중이 컸기 때문이다. 불교와 관련된 속담은 불보살과 관련된 것, 절과 관련된 것, 스님과 관련된 것으로 나눌 수 있다. 그리고 이들 속담은 불교에 긍정적인 내용과 부정적인 내용으로 나눌 수 있다.

먼저 불보살과 관련된 긍정적인 내용의 속담이다. “부처님 가운데 토막 같은 사람.”이라는 속담은 성질이 온순하고 마음이 어진 사람을 비유할 때 흔히 말한다. “돌미륵이 웃을 노릇”은 너무도 어처구니없는 일을 이르는 말로 “부처님더러 생선(방어)토막을 도적하여 먹었다 한다.”는 속담과 유사한 처지일 때  쓰인다. 이들 속담은 부처님의 속성을 나타내는 긍정적인 속담이다. 종교로서 불교는 오랜 세월 동안 한국인의 우주관과 세계관에 지대한 영향을 주었고, 인생을 살아가는 지표가 되었으므로 시대를 초월하여 예나 지금이나 불교를 보는 관점은 바뀔 수 없다. 조선 사회가 억불숭유라는 정책을 폈음에도 부처님과 관련되는 속담은 긍정적일 수밖에 없다. 유교의 가치관으로 보더라도 부처님께서 설한 말씀은 진리이기 때문에 유학자들도 불경을 읽고 심취한 학자들이 많다.

한편 불교를 부정적인 면을 드러내는 속담은 불보살이 아닌 스님이나 절에 관련되어 있다. 불교 본질에 관한 사항이 아니라 불교가 처한 환경에 따라서 해석을 달리할 수 있어서 부정적 속담이 생겨날 가능성이 있는 것이다. “미운 중놈이 고깔을 모로 쓰고 ‘이래도 밉소?’ 한다.”는 속담은 ‘밉다고 하니까 더 밉살스러운 짓만 한다.’는 의미인데 여기에 보조관념으로 동원된 스님은 부정적으로 인식될 여지가 있다. 또 “중이 고기 맛을 알면 빈대도 남아나지 않는다.”는 속담은 ‘해서는 안 될 일을 경험하게 되면 절제하지 못한다는 인간성의 욕망을 표현한’ 내용이다. 그런데 이 두 속담에서 ‘중’이라는 보조관념은 파계한 스님 이미지를 떠올리는 부정적 기호로 인식되는 효과도 함께 주게 된다.

‘중’이라는 단어는 조선조에 와서 승려를 백정 등 여덟 가지 천민 가운데 하나로 인식하면서 스님을 천하게 이르는 말이 되었지만 이 말은 원래 추장이나 존장자를 일컫는 말이었다. 《삼국유사》에 보면 신라 2대 유리왕을 ‘자충(慈充)’또는 ‘차차웅(次次雄)’이라 불렀는데 이 말은 한자를 빌어 우리말을 적는 반절법(半切法)에 의하면 ‘중’이라는 말이 되고, 일연 스님이 달아 놓은 주에 보면 “향언으로 존장자를 말한다”고 했다. 고려 말 승려의 숫자가 늘어나고 파계승이 늘어나 이성계와 신흥 유학자들에게 역성혁명의 빌미를 제공한 불교의 타락상이 조선조에 이어지면서 승려를 천하게 보는 관습이 자리 잡아 가면서 존칭이었던 ‘중’이 천한 말이 되고 ‘스님’이라는 말이 대신 쓰이게 된 것이다.

이처럼 불교와 관련된 속담은 시대와 상황에 따라서 저마다 다르게 부처님을 해석하거나 불교를 보는 시각이 생겨났다. 그리고 우리가 일상에서 쓰는 말을 통해서 우리 조상들이 불교를 통해서 세상을 보고  세상을 살아가는 지혜를 습득하였으며 불교를 삶의 일부로 삼아 살아왔음을 알게 해 준다. 사람은 만물의 영장이라 말한다. 사람이 영장류 중에서도 맨 꼭대기에서 군림할 수 있는 것은 두 발로 서서 걷고, 불을 사용하고, 연장을 쓰는 특징도 있지만, 의사를 소통하기 위해 글자를 쓰고 말을 할 줄 안다는 것이 또 하나 중요한 요건이 된다. 말과 문자는 서로의 생각을 전하고 이해하는 데 있어서 꼭 필요하다. 불교 용어가 우리의 일상어로 자리 잡았다는 사실은 불교를 통해서 생각하고 서로 의사를 소통하는 문화의 근간이었음을 알게 해준다.

5. 한국 예술혼의 원형

불교가 우리의 예술에서 원형을 이루고 있음을 알기에 어렵지 않다. 우선 우리의 유형 문화재 가운데 불교의 유적과 유물이 7할 넘게 차지하고 있으며 국보 50종에서 47종이 불교 관련 유적인 것만으로도 알 수 있다.유형문화인 회화와 조각은 불교의 문화유산이 절대적이며 무형문화재 가운데 음악과 무용에서도 전부는 아니더라도 그 뿌리에는 불교의 영향을 받아 형성된 종목이 여럿이다.

무용에서 국가 중요무형문화재 제27호로 지정된 ‘승무’는 춤의  구성이나 춤사위가 예술적일 뿐 아니라 불교의 영향이 큰 춤이다. ‘승무’는 복색이 불교에서 스님들이 착용하는 가사 장삼에 고깔을 쓰지마는 엄밀하게 현재 스님들이 착용하는 옷과 다르다. 불교의 복색으로 춤을 추고 이름도 불교적인 색채를 띠고 있으나 민간의 생동적 춤이 불교의 정적인 춤으로 양식화된 것으로 추정한다. 불교 작법 의식무인 나비춤 바라춤 법고춤 등이 ‘승무’에는 그대로 수용되어 있다. 조선조에 정립된 여러 민속춤에서도 불교적 색채가 강한 춤으로 여러 지방에서 추는 탈춤이 있다. 탈춤에는 불교 관련 마당(과장)이 삽입되는데 상좌춤 노장춤 먹중춤 등에서 승무와 일치하는 춤사위를 발견할 수 있다.

음악에서 민속음악의 경우 불교의 영향을 받거나 아예 불교 음악이 민속음악화한 사례가 적지 않다. 무가에 부처님의 공덕을 염하면서 ‘나무아미타불’을 외우는 염불이 화청(和請)으로 성악화되고 염불요로 쓰인다. 서도 지방과 전라도 지방 무가의 염불과 자진염불에서도 비슷한 무악장단이 쓰인다. 전래된 한국 전통음악은 관례적으로 궁궁음악과 민속음악으로 분류하는데 불교적인 전통이나 무속적인 전통과 같은 종교음악과 춤을 포함하고 있다.

대표적으로 궁중음악인 ‘영산회상’이 그렇다. ‘영산회상’은 1상영산 2중영산 3세영산 4가락덜이 5삼현도드리 6염불도드리 7타령 8 군악으로 구성된다. 영산회상이라는 음악 명칭 자체도 부처님이 영취산에서 《법화경》을 설하던 회좌를 찬탄하는 데서 유래했듯이 그 근원이 불교음악임은 분명하다. 별곡의 구성에도 ‘염불도드리’가 들어가 있는 현상을 보면 정악에 불교 음악의 영향이 매우 컸음을 알 수 있다.

불교가사인 〈회심곡〉은 민간에서 상여를 멜 때 상두꾼들이 부르는 상여노래 속에 의례히 들어간다. 또 집을 짓거나 배를 진수할 때 부르는 ‘비나리’에도 〈회심곡〉의 일부가 불려진다. 가사문학의 기원이 나옹화상의 〈서왕가〉에 있다는 학설이 대두되었고 상당한 근거가 있다. 진도 지방 상여소리에 상두꾼들이 후렴구로 ‘나무아미타불’을 부르는 것으로 미루어 우리 삶의 일상에서 불교는 떼려야 뗄 수 없는 혼과 같은 존재라 할 것이다.

민요에도 불교음악의 영향이 직간접으로 많이 수용되었다. 경기소리에서 〈선소리산타령〉은 본래 사당패(寺黨牌) 소리인데 각 지방으로 분화하여 ‘경기선소리 산타령’ ‘서도선소리 산타령’ ‘남도선소리 산타령’으로 분화하였다. 사당패의 발생이 불교와 연관이 있다. 노래 부르는 형식과 구성은 지방마다 다른데 먼저 몇 곡으로 구성된 긴 선소리 산타령을 부르고 끝에 짧은 장절 형식의 민요를 덧붙인다.

남도선소리를 보면 보렴 화초사거리에 이어 긴육자배기 자진육자배기 흥타령 개구리타령 따위의 민요를 덧붙인다. 보렴은 시주하는 손님을 축원하는 염불이며, 이런 선소리 염불을 판염불이라 불렀다. 화초사거리는 중모리로 긴염불 대목을 부르고 다음 중중모리 가락으로 화초염불 대목을 부른다. 긴염불은 경기 선소리 놀량과 비슷하고 선율도 비슷하다. 이처럼 산타령은 불교의 염불가락과 민요가 어우러져서 탄생시킨 음악이다. 전통음악과 무용 그리고 굿판의 현장에서 느끼는 울림에서 불교의 모습을 발견할 수 있다.

또 건축과 조각 회화에서도 면밀히 검토하면 불교적 요소들을 지울 수 없을 것이다. 우리나라 초상화는 서양과 달리 원근법을 쓰지 않고 원색을 많이 쓰는데 이는 탱화를 그리는 수법의 영향이라고 한다. 해방이후 서구식 교육 제도를 도입한 이래 학교 교육에서 음악 교육은 완전히 서양 음악 위주로 전개되어 음악이라 하면 서양 음악을 말하고 정작 우리 고유의 음악은 ‘국악’이라는 별칭으로 부르게 되었다. 미술 시간에도 서양화 중심의 교육이  주를 이루고 우리 미술은 ‘한국화’ ‘동양화’라는 별칭으로 대접을 받는 주객전도 현상이 일어나고 있다. 그러나 아무리 양복을 잘 차려 입더라도 얼굴색을 바꿀 수 없듯이 우리 예술의 저 밑바탕에는 한국혼이 흐르고 있으며 한국혼을 형성하는데 불교가 준 영향이 지대하므로 우리의 전통 예술과 예술혼에는 불교의 원형이 면면히 흐르고 있음을 발견하게 된다. ■

 

김용덕 / 한양대 교수. 비교민속학회 회장, 한국언어문화학회 회장, 교수불자연합회 부회장 등을 역임했고 현재 불교민속학회 부회장, 성보문화재위원으로 활동 중이다. 주요 논문으로  〈미륵불 신앙의 현장연구〉 〈나한신앙에 깃든 의미〉 외 50여 편이 있고 저서로 《한국민속문화대사전》 《우리불교우리문화》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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