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교의 정체성 확립을 지향하다

1. 들어가는 말

한국사회에서 근대는 밖으로부터 서구문물이 전래되어 우리 사회의 가치관 변화가 크게 일어났으며, 안으로는 자신에 대한 정체성에 대한 탐구가 시작된 시기이다. 이런 분위기에서 한국불교 역시 조선조의 배불 경향에서 벗어나 불교의 고유성을 재확인하고 이를 사회에 적용하려고 하였다.

그러나 굳건한 토대를 구축하지 못했던 한국사회는 자주력 부족으로 서구열강의 각축장이 되었다가 결국 일제 강점기를 맞게 되었다. 그 결과 한국불교 역시 일제의 통제를 받으며 스스로 성장할 수 있는 동력을 상실하였다. 이런 경향들은 한국불교 내에서 근대성을 갖추기 어려운 요인으로 작용하면서 한국불교의 발전을 방해하였다.

그럼에도 이런 시대적 한계 속에서 많은 선각자들이 우리의 고유한 정체성을 찾기 위해 그리고 외세의 침략에 맞서 민족을 지키려고 노력한 것처럼 불교계 역시 한국불교의 발전을 위해 노력한 선각자들이 많이 나타났다.

이런 배경하에 근현대 한국불교를 위해 헌신한 사람들은 모두 구태의연한 구시대의 모습을 탈피하고 다가오는 새 시대에 맞는 불교로 전환하여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그리고 각자의 방법으로 시대적 지평을 열 수 있도록 노력하였다. 이들의 주장은 많은 대중의 호응을 받았고, 교단 차원에서 시행되어 한국불교를 변모시킨 부분도 있었다. 따라서 이들의 면모를 살펴보는 것은 과거 우리의 모습을 반추하여 미래의 방향을 엿볼 수 있는 점에서 매우 중요하다.

마지막으로 본 글에서 거론하지 않은 사람 가운데 근현대 불교운동을 위해 헌신한 분들이 많다. 모두를 살펴보지 못한 것은 지면의 한계도 있지만 논자의 부족한 역량도 원인이다. 독자의 넓은 아량을 바란다.

2. 근대 불교운동의 실천 방향

1) 불교개화를 염원한 이동인과 무불

이동인

1876년 문호를 개방한 한국사회는 개화의 분위기로 급격하게 변모하였다. 불교계 역시 이런 분위기에 젖어 한국불교를 변화시키려는 개화의식을 지닌 승려가 등장하였다. 그 대표적인 인물이 이동인과 무불이다. 이들은 개화사상을 바탕으로 불교계의 변화를 도모하였다.

이동인은 개화파의 일원으로 크게 활약한 개화승이다. 새로운 문물과 해외지식에 대한 궁금증이 강해 부산에 일본불교 별원이 개설되자 그들을 통해 세계정세를 알고자 하였다. 그리고 직접 일본에 건너가 근대화에 성공한 일본사회를 살펴보는 등 호기심이 강했다.

그는 한국이 빈약하여 부강하지 못한 것은 사회를 변화시킬 수 있는 제도가 없고, 일부 있는 제도도 바뀌지 않은 데서 생긴 폐단으로 보았다. 그런 한계적 상황에 직면한 한국사회가 나아가야 할 길을 부국강병이며 그렇게 되기 위해서는 공업과 상업의 발달이 중요하다고 생각하였다.

먼저 공업의 발달은 풍부한 광산과 개발되지 않은 땅을 활용해야 하는데 우리에게 자본과 기술이 없으므로 일본과 힘을 합해 개발한다면 공업이 발달하여 한국도 무비를 갖출 수 있다고 생각하였다. 다음 상업이 발달하려면 육의전에서 배를 구입하고 일본인 상인을 고용해서 한국의 내륙과 개항장 사이에 통신의 길을 만들어 사람들이 개항장을 왕래할 수 있도록 하며, 그에 필요한 재정은 일본정부에서 빌어 상인들에게 빌려준다면 육의전의 상업이 발전할 것으로 예견하였다.

이런 그의 생각은 누구도 사회변화에 대해 예견하지 못하고 있던 당시의 상황에서 그처럼 진지하고 세심하게 분석하고 있었던 점은 높이 평가할 만하다. 특히 사회적인 제한이 뒤따르던 승려라는 신분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다양한 방면으로 보여주고 있는 진보적 성향은 불교계의 새로운 분위기를 일으키는 데 크게 공헌하였음은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무불(無佛)은 백담사 출신으로 속명은 탁정식이다. 처음에 각지라는 법명을 쓰다가 뒤에 무불로 바꿨다. 일찍부터 불교에 귀의하고 애국의 뜻이 높아 일본에 건너가 국제적인 정세를 파악하고 한국의 개화를 도모하려 하였다. 화계사에서 김옥균을 만나 뜻이 일치된 이후 개화파의 일원이 된 이후 세 차례나 일본으로 건너가 새로운 지식을 체득하였다. 그의 1차 도일은 이동인보다 늦게 이루어졌다. 그가 일본에 온 것은 박영효와 김옥균 등의 명을 받아 이동인이 하는 일을 돕는 역할이었다.

두 번째 일본에 건너간 것은 이동인이 한미수호조약의 체결을 알선하기 위해 청국공사 하여장을 만나러 갈 때 동행하였다. 그는 두 번째 일본행에서 이동인과 헤어진 다음 고베에서 주일본 영국영사인 애스턴(W. G. Aston)의 한국어 교사가 되었다. 동경에서는 영국공사관 서기관인 세토우(E. N. Stow)를 만나 서양문물에 대해 배웠으며, 그들에게 우리나라 말을 가르쳐 주는 등 교류를 확대하였다.

세 번째 도일은 이동인이 신사유람단을 이끌고 일본에 갈 예정이었다가 실종되자 이 일을 맡아 선발대 13명을 이끌고 일본으로 건너갔다. 이때 무불은 동경외국어학교 교사로 취직하여 외국 정세에 대해 다각적인 방법으로 정보를 얻었다. 일본은 물론 당시 일본에 거주하면서 활동하고 있는 외국 사절들과도 밀접한 관계를 형성하면서 그들을 통해 세계정세에 대한 흐름과 안목을 배웠다.

무불은 한국의 현실을 아직도 문명의 개화가 일어나지 않은 모습을 보고 있었다. 그래서 서양의 문물이 한국에 전해져 야만적 상태를 벗어나려면 서양의 문물을 이해할 수 있는 그들의 언어의 습득이 우선적이라고 생각하였다. 그의 생각은 급병으로 성사되지 못했지만 당시 세계사의 흐름을 어느 정도는 인식하고 있었던 몇 안 되는 불교인 가운데 하나였다.

2) 선불교 중흥을 꾀한 경허

경허스님
1846년 전주에서 태어난 경허(鏡虛)는 9세가 되던 해 광주 청계사에서 계허를 은사로 출가하였다. 그 후 계룡산 동학사의 만화에게 수학하면서 본격적으로 내전을 배우자 곧바로 그 재주를 드러냈다. 이후 그의 재주와 이름이 널리 드러나고 학문이 진취되어 유교는 물론 노장까지도 정통하였다. 대중들의 요청으로 23세에 동학사에서 강의를 하자 사방에서 명성을 듣고 학인들이 몰려왔다. 강사로서 명성을 떨치자 옛 은사인 계허를 뵙고자 서울로 가던 중 전염병이 돌던 마을에서 목숨이 참으로 호흡하는 사이에 있고 일체 세상의 일이 꿈 밖의 청산같이 느껴져 삼계를 벗어나려는 사교입선(捨敎入禪)의 계기가 되었다.

동학사로 돌아온 경허는 학인들을 보내고 문을 걸어 잠그고 단정히 참구하기 시작하였다. 3개월이 지나 1879년 동짓달 보름 깨달음을 얻은 경허는 20여 년간 호서에 머물면서 많은 대중을 위해 설법하면서 선풍을 크게 떨쳤다.

그는 1899년 54세가 되던 해 해인사 조실로 주석하면서 결사를 결성한 것을 시작으로 1903년까지 5년간 영남과 호남지방에서 결사운동을 주도하였다. 이 시기는 안으로는 조선조의 배불정책으로 법맥이 쇠퇴해져 신앙적으로 말세의식이 만연되어 수행의 의욕이 상실되었다. 그리고 밖으로는 일본불교의 유입으로 한국불교의 전통이 변질되기 시작한 혼돈의 시대였다. 이러한 시기 경허는 결사운동을 통해 선의 중흥하여 불교의 근본으로 돌아가자고 주장하였다.

경허는 내부적인 모순과 함께 외부의 압력이 가중된 시기 한국불교가 보존될 수 있는 길은 수행을 통한 자기성찰과 그것을 대중에게로 회향하는 자리이타의 실현이라고 판단하였다. 그래서 결사를 운용하는 방식에서도 정법의 교화에 중점을 두어 다소 파격적인 형식을 허용하였다. 그것은 결사 장소의 동일성과 참여자의 단일성을 뛰어넘는 운영 방침이었다. 경허는 누구보다도 원칙을 존중하는 수행승이었지만 근본을 살리기 위해 변용을 허용한 것이다.

결사의 목적은 수행을 통해 불교의 근본을 회복하는 것이다. 그 목적에 비추어 생각한다면 수행을 하고자 하는 발심이 우선되어야 하지 수행하는 장소나 사람은 차후의 문제이다. 그 같은 생각에 따라 경허는 결사에 동참하는 자는 일정한 곳에 모여서 수행하지 않아도 무방하며, 결사에 참여하는 사람도 승속은 물론 남녀노소 현우귀천을 가리지 않고 참여를 허락하였다. 그러나 수행의 분위기와 이타정신의 실천을 위해 참여 대중들의 화합을 강조하였다. 그런 경허의 결사는 사상적인 면에서 보조의 사상을 계승하였다. 이것은 역사적 전통은 물론 법통의 회복을 도모한 것임을 알 수 있다.

또한 경허는 그런 결사에 현실적 구원사상을 수용하여 다양한 신행 방법을 도모하였다. 정혜를 닦는 결사의 모임에 도솔천 상생을 발원하는 미륵사상을 도입함으로써 정혜에 미치지 못하는 중생들에게도 구원의 희망을 제시한 것이다. 경허가 결사를 주도한 때는 말세의식이 만연된 시대였다. 이 같은 현실 속에서 의식 있는 수행자들에게 시대적 사명감을 불러일으킬 수 있는 정혜를 닦음이 통용될 수 있지만, 상대적으로 도가 미숙한 자에게는 쉽게 불교를 이해시킬 수 있는 미륵사상을 수용하여 도솔천에 상생하는 이상세계를 중생들에게 제시한 것으로 생각할 수 있다.

그런 경허의 사상은 근대 한국불교의 근간이 되었다. 일제 침략이라는 시대적 상황에서 각종 통제와 함께 내적 모순을 극복하고 불조(佛祖)의 정맥을 계승하려던 선학원의 창립과 활동에 사상적 배경이 된 것이다. 먼저 선학원을 창립하고 그 활동을 주도한 인물들은 대부분 경허의 제자이거나 결사와 관련이 깊은 사람이었다. 그리고 선학원이 지향한 선의 대중화 운동 역시 경허의 결사에서 보여주고 있는 공동체 운동을 계승한 것이다. 그런 영향은 1942년 선학원에 의해 경허의 문집인 《경허집》 발간이 발기되고 당시 전국의 선원이 동참한 것은 한국의 근대불교는 경허에게 직접적으로 영향받고 있음을 시사하는 것이다.

1) 개혁불교를 주장한 권상로, 한용운, 이영재

권상로
개항을 통해 근대화에 눈을 떠온 한국 사회는 1910년 한일합방 이후 자율적 발전을 잃어버리고 정치적, 사회적으로 종속 체제가 형성되자 한국불교도 이 한계적 상황을 극복하지 못하고 일제의 영향 아래 놓이게 되었다.

이러한 때 한국불교의 모순을 타파하고 새로운 시대에 맞는 불교의 이념을 제시한 것이 불교개혁론이다. 그런 이론을 제시하여 현실적인 면에서 변화될 수 있도록 노력한 사람이 권상로, 한용운, 이영재 등이다. 이들은 근대적 종교로서의 자격을 상실하고 법맥의 흐름조차 쇠잔해진 불교계의 혁신을 도모하여 새로운 지평을 열자고 주장하였다.

그런 개혁론의 제시는 1912년 4월부터 《조선불교월보》에 연재한 권상로의 〈조선불교개혁론〉이 시작이다. 그 다음 1910년 집필을 끝냈지만 1913년 5월에 이르러 간행된 한용운의 《조선불교유신론》 그리고 1922년 〈조선일보〉에 연재된 이영재의 〈조선불교혁신론〉 등이다.

권상로의 조선불교개혁론은 1912년 4월 《조선불교월보》 3호에 시작해서 1913년 7월 18호까지 연재되면서 당시 한국불교계에 대한 개혁을 제시하였다. 이를 대별해 보면 개혁의 의미와 필요 그리고 개혁의 전례를 서술한 전반부와 자신의 개혁사상을 체계적으로 서술한 후반부로 나눌 수 있다. 그러나 이 개혁론은 미완으로 끝난 탓에 그가 개혁하고자 했던 전체적인 내용에 대해서는 자세히 알 수 없다. 특히 교육개혁에 있어서도 본인 스스로가 사범 서적 체제 장소 등을 거론하였으나 사범에 이르러 끝나고 있음을 볼 때 정확한 개혁 방안을 알기는 곤란하다. 그러나 이 개혁론은 한국불교의 변화를 추구하며 서술된 글로서는 서두에 위치하여 근대 개혁사상의 인식과 방향에 많은 점을 시사한다.

만해의 개혁사상은 전후로 나누어 살펴볼 수 있다. 그 첫 번째가 《조선불교유신론》에 나타난 사상으로 구태의연한 종단의 모순을 척결하자고 주장한 시기이다. 두 번째는 한일합방을 거치면서 사찰령에서 오는 종교의 정치적 예속을 벗어나며, 일제하에서 불교계가 일관했던 자기모순을 척결하고자 노력한 시기이다. 만해의 유신론을 통해 나타나고 있는 개혁의식은 자신이 처한 시대적 모순을 척결하고 새로운 사회에 적응할 수 있는 제도적 모색에 있고, 그 같은 사고는 유신론 전편에 걸쳐 나타나고 있다.

일본강점기 불교계의 자각을 호소하고 새로운 시대에 대비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추자고 주장된 것이 이영재의 〈조선불교혁신론〉이다. 1922년 〈조선일보〉 지면을 통해 발표된 이 혁신론은 한국불교의 쇠퇴는 바로 믿음을 잃어버린 데에 있으며, 목숨을 아끼지 않는 바른 믿음이 한국불교 개혁의 무기라고 단호한 어조로 말함으로써 3·1 운동 후 사회에 전반적으로 만연되었던 좌절감 속에서 새로운 진로를 모색하려는 불교계에 하나의 좌표를 던져 주었다. 그러나 이영재가 1927년 인도 구법 중 급작스럽게 사망하여 혁신적인 활동으로 이어지지 못하였다.

그럼에도 이영재의 〈조선불교혁신론〉에서 보여주고 있는 시대적 인식과 특히 일제하라는 시대적 배경 속에서 불교혁신을 주장한 것은 현대를 살아가는 불교인들에게 하나의 지표가 될 수 있다.

이와 같이 한국 근대불교의 성격을 드러내는 개혁론과 개혁운동의 대두는 격동하는 사회를 맞이하여 그 시대가 요구하는 사명을 전개한 시대적 자각운동이었다. 그것은 오랜 역사를 통해 사상적 배경이 되어온 불교가 조선시대의 배불정책으로 잃어버렸던 사회적 지위와 교화의 역할을 근대라는 시대적 변혁의 분위기를 통해 새롭게 회복하기 위해 추구된 움직임으로 파악되기 때문이다. 거기에 부응하듯 이러한 개혁론은 종풍 확립이나 승단 제도와 의식의 개혁, 교육과 포교의 변화 추구 그리고 계몽적 활동에 이르기까지 다양하게 나타나고 있다.

개혁론은 한국 불교계에 많은 영향을 던져주었다. 특히 그들이 지니고 있던 시대적 인식과 함께 미래에 대한 진보적 안목은 불교계의 변화를 가져오기에 충분하였다. 물론 일제하 급변하는 시대적 배경 속에서 나타난 이론과 혁신운동이어서 그 결실이 완성되지는 못했지만 그들이 주장했던 개혁의 요소들은 아직도 우리 불교계가 해결해야 할 문제점인 것을 볼 때 그들의 인식이 얼마나 선구적이었는지 느낄 수 있다.

4) 불교의 한글화와 대중화를 주장한 용성

용성스님
백용성(白龍城, 1864~1940)은 생애에서 알 수 있듯이 그의 일생은 개화와 일제 강점기라는 격변의 시대를 살아야 했다. 그렇지만 용성은 혼란과 억압의 시대에 굴하지 않고 굳건한 의지로 자신의 세계관을 펼쳐갔다. 깨달음을 얻은 후 한국사회와 한국불교에 대해 깊이 인식한 그는 불교 대중화에 힘쓸 것을 생각하였다.
그러나 대중화 운동은 생각처럼 순탄하지 않았다. 먼저 쇠락한 불교계의 현실을 극복하는 것이 어려웠고, 다음 일제의 불교정책에 의해 한국불교는 점점 어려운 길을 갈 수밖에 없는 현실이었기 때문이다. 이런 현실을 극복하기 위해 제일 먼저 실행한 것이 불교경전을 한글로 번역하는 일이었다.

3·1운동으로 수감생활을 하게 된 용성은 불교 서적이 미비함을 깊이 느꼈다. 그래서 1921년 출옥한 이후 경전 번역부터 시작하였다. 《금강경》을 시작으로 《능엄경》 《원각경》 《선문촬요》 등을 거쳐 1927년 11월 《화엄경》 번역을 마칠 때까지 매진하였다. 물론 이때 경전 번역만을 한 것이 아니었다. 《불교창가》 《팔상록》 《심조만유론》 《수심정론》 《대각교 의식》 등을 저술하여 불교가 대중화될 수 있도록 심혈을 기울였다.

용성은 누구보다도 불교가 대중화되어야 한다는 의식이 뚜렷하였다. 그래서 대중적 개혁에 많은 노력을 기울였고 성과도 있었다. 용성이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는 교화 지침은 세 가지였다. 첫 번째가 불교의 생활화였다. 거기에는 생활과 부처님 법은 불이(不二)라는 불교관이 담겨 있다. 두 번째가 불교의 대중화였다. 불교의 대중화는 불자들이 신앙의 기본 목표가 기복에 있음이 아니고 성불에 있다는 불교의 근본을 확인하는 일이다. 세 번째는 불교의 지성화로 대중들도 참선, 염불, 간경, 주력 등 불교에서 행하고 있는 수행으로 자신의 신앙심을 향상시켜 가기를 염원하였다. 이런 용성의 교화 방법은 불교가 당시 한국사회에서 사회적 인식을 제고하는 데 기여하였으며, 지금까지 구태의연한 포교 방식에서 벗어나 새로운 방법론을 도입하는 결과를 가져왔다.

용성이 불교 대중화를 전개하면서 심혈을 기울인 부분은 바로 불교라는 종교에 대한 사람들의 인식을 높이는 일이었다. 그런 현상에 대해서 직접적인 원인은 불교계에 있음을 용성은 주시하였다. 일부 몰지각한 승려들에 의해 우리나라 전통불교가 퇴색되고 일본불교의 영향에 따라 그들을 답습하여 스스로 가치를 저하시키고 있었다. 거기에다 조선조 동안 일관되게 추진된 배불정책의 뿌리가 완전히 없어지지 않아 승려를 천시하자 불교인이 된 것을 부끄럽게 여기는 분위기였다.

그래서 그런 병폐를 없애고 새 시대의 종교로서 그 가치성을 인정받고자 노력하였다. 그 방법으로 ‘불(佛)’을 번역하면 ‘대각(大覺)’이기 때문에 대각교를 창립하여 우리나라 불교도의 나아갈 길을 제시한 것이다. 용성은 53세 되던 1916년 서울 종로 봉익동 1번지에 있던 민가를 구입, 이를 개조하여 대각사를 창건하였다. 대각교 운동은 절대적 신을 신앙하는 종교처럼 신도들을 미약한 존재로 인식하는 것에서 출발하지 않았다. 오히려 세계와 중생이 모두 밝은 성품으로 이루어진 존재에서 출발하였다.

마지막으로 용성이 불교의 이미지를 높이는 방법으로 생각한 것은 불교의 자립경제였다. 그것이 선농일치(禪農一致)였다. 그는 선농일치를 위해 전후 두 차례 농장을 매입하고 구체적인 행동을 보였다. 첫 번째는 용성의 나이 59세인 1922년에 이루어졌다. 용성은 나라와 불법을 위해 만주 간도성 연길현 명월촌과 그곳에서 30리가량 떨어진 봉령촌에 각각 농토 70정보를 확보하여 농장을 마련하여 대각사 선농당을 설립하였다. 거기에 일제의 침탈에 견디지 못하고 유량의 생활로 내던져진 동포를 맞이하여 불교를 신앙하고 민족의식을 일깨울 수 있도록 도와주었다.

이와 같은 불사에 이어 두 번째 실시된 선농일치 불사는 용성의 나이 64세가 되던 1927년에 이루어졌다. 이번에는 만주가 아닌 경상남도 함양군 백전면 백운리 백운산에 임야 3백여 정보와 그 인근의 전답을 구입하여 화과원을 설립하였다. 이곳에서 용성은 과일나무 수만 주를 심고 동시에 일하면서 참선하는 선농불교를 일으켜 한국불교의 수행관에 일대 변화를 가져왔다.

3. 현대 불교운동가의 방향과 지평

1) 현대 결사운동의 두 주역 효봉과 성철

(1) 효봉의 정혜결사와 의의

한국불교의 대표적인 수행인 정혜결사는 보조국사 지눌 이후 송광사를 중심으로 면면히 계승되었다. 그곳은 16국사가 배출되는 등 고려시대 수행의 중심처가 되었으며, 불교계의 위상이 저하된 조선시대에도 계승되었다. 이런 수행풍토는 근현대에도 계승되었는데 그 중심인물이 효봉이다.

효봉은 1930년 43세가 되던 해 금강산 법기암(法起庵) 뒤편에 토굴을 짓고 1년 6개월의 일일일식(一日一食) 장좌불와(長坐不臥)의 필사적인 용맹정진으로 깨달음을 얻었다. 그 후 유점사, 마하연, 신계사 미륵암, 설악산 봉정암, 태백산 정암사, 덕숭산 정혜사 등을 운수행각하다가 1937년 50세가 되던 해 조계산 송광사에 이르렀다. 효봉은 송광사 삼일암에 10년간 주석하면서 많은 납자들을 제접하는 한편 이곳에서 보조국사의 가풍과 정혜쌍수의 선풍을 진작시키려는 원을 세웠다.

그런 서원을 세운 뒤 1938년 4월 지금까지 불렀던 운봉원명(雲峰元明)이란 법호와 법명을 효봉학눌(曉峰學訥)로 바꾸면서 지눌의 사상을 계승한 납자임을 드러내었다. 이후 이곳에서 10년간 선풍을 진작하며 보조의 선사상을 계승하는 데 최선을 다하는 한편 정혜쌍수의 구도관을 확립하였다.

그 가운데 가장 대표적인 것이 1946년 7월 15일 하안거 해제일에 송광사 삼일선원에서 시작한 삼 년 정혜결사이다. 당시 송광사 회주로 있던 효봉은 “약미발명대사 서불하산(若未發明大事 誓不下山)”이란 발원과 함께 삼 년 결사를 맹약하였다. 이때 동구불출(洞口不出), 오후불식(午後不食), 장좌불와(長坐不臥), 묵언(黙言)의 청규를 정하고 용맹정진하였다.

이런 효봉의 결사운동은 해인사로 옮겨져 시행되었다. 1946년 11월 6일 한국불교 교정 박한영(朴漢永)은 혼란기의 한국불교를 바로 세우기 위해 그를 한국불교 가야총림 조실화상으로 위촉하였기 때문이다.

해인사로 옮겨온 효봉 역시 한국의 선풍을 진작시키기 위해 헌신하였다. 그런 자세를 알 수 있는 것이 〈해인사가야총림방함록서(海印寺伽倻叢林芳啣錄序)〉이다. 그는 이 글에서 깨달음에 이르기 위해서는 천지를 덮는 기염을 방출하고 부처와 조사를 뛰어넘는 위광을 발휘해야만 하고 활구를 참구하고 사구를 멀리하라고 당부하였다.

그것은 활구로써 깨달음을 얻으면 영겁토록 잊지 않는 것은 활구가 마치 물과 불이 서로 통하는 것과 같아서 수마와 망상이 침범할 수 없지만, 사구는 혼침과 산란함에 빠져 귀신의 굴속에서 헤매는 것이므로 이것으로는 자기 자신을 구제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효봉은 그런 수행에 있어 성적등지(性寂等持)하여 정혜쌍수(定慧雙修)할 것을 당부함으로써 보조의 사상을 계승하고자 하였다. 그래서 해인사에서 학인을 지도하며 상세(上世)에 가장 친절한 이는 육조(六祖)이며, 중세(中世)에 친절한 이는 조주(趙州)이며, 하세(下世)에 친절한 이가 보조(普照)라 하였다.

그는 자신의 수행에서도 철저하게 보조를 계승하였다. 정혜에 대해 정은 혼침과 산란함이 없으며, 성성하고 적적한 것이기 때문에 그런 정력(定力)이 없다면 혜는 건혜(乾慧)일 수밖에 없어 그런 혜로는 생사를 면할 수 없기 때문에 정혜를 쌍수하고 안팎이 명철해야만 한다고 하였다. 이런 효봉의 정혜관은 정은 진리에 합하여 산란한 마음을 수습한다는 보조의 생각과 일치하고 있으며, 그런 정혜 두 문에 의지해서 마음의 모든 때를 다스림이 옳다고 하는 보조의 생각과 일치하고 있다.

(2) 성철의 봉암사 결사운동

성철스님
성철은 한국 현대불교에 큰 족적을 남긴 분이다. 그가 일생 동안 보여준 많은 행적과 법어는 세간의 주목을 끌었다. 1912년 경상남도 산청에서 태어난 그는 어려서부터 책을 좋아하였다. 청년이 되면서 학문적 성취를 이루기 위해 일본에 유학하였지만 마음에 일치하는 바가 없어 23세에 귀국하였다. 그 후 집에서 독서를 하며 쉬고 있던 어느 날 우연히 한 노승으로부터 영가(永嘉)의 〈증도가(證道歌)〉를 얻어 보았다. 홀연히 심안이 밝아짐을 느꼈고 이를 계기로 지리산 대원사 탑전에서 40여 일을 정진하였다.

 25세가 되던 1936년 봄 동산을 은사로 출가한 성철은 그 해 운봉 화상에게 비구계를 받았다. 그 후 범어사 금어선원에서 하안거를 시작으로 범어사 원효암, 통도사 백련암, 범어사 내원암, 등 제방의 선원에서 수행하였다. 28세인 1939년에는 경북 은해사 운부암에서 하안거, 다음 해인 1940년에는 금강산 마하연에서 수행하였다. 마침내 29세가 되던 이 해에 대구 동화사 금당선원에서 마침내 어둠을 타파하고 깨달음을 얻었다. 깨달음을 이룬 후에도 보임의 과정은 치열하였다. 이런 성철의 구도는 봉암사 결사에서 꽃을 피웠다.

깨달음을 얻은 그는 당시 한국불교가 무분별하게 받아들인 여러 관습을 척결하고 부처님법대로 수행하고자 하였다. 그래서 1947년 문경 희양산 봉암사에서 선종 본래의 종풍을 회복하고 옛 총림의 법도를 이 땅에 되살리고자 결사를 주도하였다. 이곳에 뜻을 같이하는 도반과 젊은 수좌들이 운집하였다. 그들은 어려움이 있더라도 부처님의 가르침대로 수행할 것을 약속하였다. 당시 이 결사에 참여한 인물들을 살펴보면 청담, 향곡, 자운, 월산, 혜암, 법전 등으로 그들은 해방 후 급격한 사회변화 속에서 종단을 지켜가며 불조의 정법을 드러냄으로써 교단의 초석을 세웠다. 이들에 의해 한국불교는 교학연찬, 참선수행, 대중포교라는 근본적 의미를 되살리고, 부족한 재원을 보충하기 위한 기복적 의례와 일본불교의 자취가 스며든 수행풍토를 바로잡을 수 있었다.

성철은 이런 수행을 통해 자신의 본성에 있는 불성을 찾는 일을 강조하였는데 그것이 바로 자기를 바로 보는 신앙관이다. 그가 남긴 법문 가운데 많은 부분이 바로 이것을 지적하고 있다. 구원되어 있는 자신을 바로 보자는 견해이다. 우리의 존재가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여 영원하고 무한하며, 유형,무형 할 것 없이 우주의 삼라만상이 자기라서 모든 진리는 자기 속에 구비되어 있음을 의미한다.

이런 자신의 존재가 물질만능에 휘말려 본 모습의 거룩하고 숭고함을 보지 못하면서 끊임없는 욕심에 눈이 멀어 암흑세계를 헤매는 비극이 계속된다는 것이다. 그렇지만 본모습은 먼지가 덮여 있는 구슬과 같아서 먼지가 아무리 쌓여도 구슬은 변함없으므로 먼지만 닦아내면 본래 깨끗하고 구슬은 찬란하게 빛날 수 있다는 것이다.

봉암사 결사는 여러 해 실행되다가 6·25 전쟁 때문에 불가피하게 무산되었지만 기간이 짧았음에도 불구하고 많은 것을 시사한다. 여러 가지 개혁이 시도되었는데 먼저 신앙 대상의 정리였다. 그것은 사찰 안에 있는 비불교적 요소들을 제거하는 일로 칠성단, 산신각 등과 법당 안의 칠성탱화, 산신탱화, 신장탱화 등을 없앴다. 이 외에도 신앙생활에서 아무런 비판 없이 사용하던 것들을 전통적 격식에 따라 재정비하였다. 우선 사찰에서 쓰는 용품을 재정비하여 가사, 장삼, 바리때를 새롭게 만들었다. 당시 많이 사용하던 나무 발우는 부처님 법에 맞지 않으므로 질그릇이나 쇠발우로 바꾸었다. 그러나 질그릇은 깨지기 쉽고 쇠는 무거워 실용적이 못하자 다시 목발우로 환원되었다. 현재 조계종의 장삼과 가사가 이때 제정되었다. 당시 수행자가 입던 가사 장삼은 일본불교의 영향으로 모두 호사스러운 비단 제품이 대다수였다. 이것을 붉은색에서 괴색으로 바꾸고, 장삼은 송광사에 보존되어 있던 보조국사의 장삼을 모본으로 하여 바꾸었다.

이런 결사의 생활은 지금까지의 승가생활을 크게 변화시켰다. 그것은 의식주 모두를 직접 해결하는 생활로의 변화였다. 스스로 일하지 않으면 먹지 말아야 한다는 청규를 지켜나갔다. 이런 올곧은 수행은 수행자에 대한 인식은 물론 한국불교에 대한 인식을 높일 수 있었다.

2) 해외포교의 두 주역 숭산과 구산

숭산스님
한국불교가 세계 포교에 눈을 돌린 것은 1960년대 중반이다. 국내 문제가 어느 정도 안정화되었고, 총림과 선원이 증가하면서 불교에 대한 기대가 높아진 때였다.

이 무렵 해외포교의 선두에 선 분은 숭산(崇山)이었다. 그는 1966년 일본에 홍법원을 설립한 것을 계기로 본격적으로 해외 포교에 매진하였다. 그런 노력으로 1972년 미국에 홍법원을 개원하여 미국인들에게 한국 선(禪)을 알리는 데 앞장섰다. 당시 미국은 오래전부터 소개된 일본불교에 익숙한 탓에 한국불교에 대해서는 잘 모르고 있었다. 이런 상태에서 한국불교와 문화를 선양하여 큰 호응을 얻었으며, 우수한 외국인 제자들이 생겨났다. 그 외에도 숭산은 유럽은 물론 아프리카까지 포교하여 수만 명에 이르는 외국인 제자들이 생겨나게 되었다. 이들은 한국불교를 이해하려고 노력하였으며, 자신의 국가에 한국불교가 소개하는 데도 적극적이었다. 또한 양국의 문화교류에도 크게 기여할 수 있었다.

숭산에 이어 한국불교의 세계화에 노력한 분은 구산(九山)이었다. 1966년 실론에서 개최된 세계불교승가대회에 한국 대표로 참석한 것을 필두로, 1972년 12월에는 한국불교 최초로 미국 캘리포니아 카멜 시 근교에 한국 사찰인 ‘삼보사’ 개원식에 참석하기 위하여 첫 번째 미국 순방길에 올랐다. 이어 1973년에는 미국의 LA, 뉴욕, 시카고, 등 동서부와 동부 지역을 순방하고 3월 13일 귀국길에 미국 LA의 최초 사원인 ‘달마사’ 개원 법회에 참석하여 설법하는 등 한국불교를 미국사회에 알리는 데 앞장섰다.

구산스님
구산의 한국불교의 해외 소개는 자신의 방문으로만 끝나지 않았다. 1973년 여름 안거부터 조계총림에 한국 최초의 국제선원인 ‘불일국제선원’을 개설하여 한국불교에 관심 있는 외국 스님들에게 기회를 제공하는 등 한국불교의 국제화에 앞장섰다. 그런 구산은 또한 외국인 제자들을 위해 영문판 법어집인 《구산(nine mountains)》을 발간하기도 했다. 이런 영향은 뒤에 외국인으로 송광사에서 출가 수행한 버스웰(Buswell, 慧明)이 지눌의 법어집을 영문으로 번역하여 서구에 지눌의 사상을 알리는 계기가 되었다.

1980년 그의 나이 72세가 되던 해 10월 14일 두 번째 미주 순방길에 올라 많은 외국인에게 수기 설법으로 선풍을 진작시켰고, 12월 21일에는 송광사 불일국제선원의 LA 분원 ‘고려사’를 개원하였다. 1982년 세 번째 미국 순방길에 올라 미국 각지에서 포교활동을 하고 있는 한국 사원들을 순방하고 법회를 개최하고, 서구인들을 위한 수련 도량의 개설을 위해 유럽을 순방하기도 하였다.

 그 해 6월 17일 프랑스 파리에 도착한 구산은 불일국제선원을 개설하려 하였으나 여의치 않아 스위스 제네바로 옮겨 ‘불승사’를 개원하고 7일간 개원기념 법회를 개최하였다. 이어 프랑스, 스위스, 이탈리아, 독일 덴마크 등 유럽 각국을 순방하면서 법회를 주관하였다. 그해 여름 미국을 다시 방문한 구산은 캘리포니아 카멜 시에 ‘대각사’를 개원하고 많은 미국인에게 수계법회와 참선법회 등을 개최하여 한국 선불교를 고취시켰다. 또한 영문판 법어집인 《한국선의 길(The Way of Korean Zen)》을 발간하여 송광사 국제선원에서 수행하고 있는 많은 외국인들에게 한국의 선을 이해시키는 데 노력하였다.

구산은 해외포교 못지않게 국내 포교 활동에도 적극적이었다. 그것이 송광사에 세운 조계총림이다. 1969년 5월 30일 그는 은사인 효봉의 유훈인 송광사의 복원을 실천하여 해인총림에 이은 조계총림을 발기하고 하안거 결제일에 개원식을 거행하였다. 이때 조계총림 설립위원장에는 청담 스님을 추대하였고, 자신은 초대 방장에 추대되었다. 이렇게 송광사에 총림이 개설됨으로써 전란으로 소실된 도량이 새롭게 변모할 수 있었으며, 고려 때부터 행해진 정혜결사 전통을 계승하여 승보사찰로서 명맥을 이어갈 수 있었다.

구산은 총림을 개원한 후에도 총림의 수행 재정을 마련하기 위해 후원단체인 불일회를 전국적으로 결성하여 대구불일회가 조직된 것을 시작으로 부산, 광주, 대전, 서울 등 대도시마다 지회가 결성되었다. 이들에게 생활불교의 지표인 7바라밀 사상을 실천하도록 선양하였다. 이런 불일회의 도움으로 구산은 1970년 3월 조계총림에 선원인 수선사를 신축하여 명실상부한 총림의 모습을 갖출 수 있었다.

4. 맺는 말

한국 근현대에 불교운동을 전개한 사람들은 승속을 망라하여 배출되었다. 먼저 근대에 활동한 불교운동가들이 불교의 개화와 개혁, 선풍의 정립 그리고 대중화에 중점을 두었다면, 현대에 활동한 불교운동가들은 일제강점기로 변모한 한국불교의 전통을 회복하고 이를 세계에 알리려는 움직임이 강하게 드러났다.
이런 시대적 특징을 갖고 있지만 이를 종합해 보면 근현대 불교운동가들은 불교의 발전과 이미지를 높이기 위해 노력한 수행자였으며, 민족의 현실을 극복하려는 선각자였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현대 한국불교가 처한 상황에서 가장 시급한 것이 무엇이며, 어떻게 변화시켜 대중들이 불교를 재인식할 수 있는지 끊임없이 고민하면서 자신의 생각을 하나하나 구축한 실천가였음을 알 수 있다.

따라서 이들을 통해 전개된 불교운동을 통해 우리 대중들에게 제시된 길은 과거의 한 모습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앞으로 우리가 걸어가야 할 길의 귀감으로 삼을 만큼 의의가 깊음을 알 수 있다. ■

 

김경집 
진각대학원대학 교수. 동국대 대학원 박사과정 졸업. 성균관대학교, 중앙승가대학교, 동국대학교 강사와 위덕대학교 겸임교수 역임. 현재 한국불교학회, 한국불교학연구회 이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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