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교는 사회를 개혁할 수 있는가

1. 신흥불교청년동맹의 결성과 세노오 기로

세노오 기로
1931년 4월 5일 오후, 동경제국대학 불교청년회관에서는 신흥불교청년동맹(이하 신불청) 결성식이 있었다.“현대는 고뇌한다. 동포는 신애를 원하나 어쩔 수 없이 투쟁에 휘말리고, 대중은 빵을 구하나 탄압을 당한다. 도피할 것인가, 투쟁할 것인가. 지금 세상은 온통 혼돈과 곤궁으로 방황하고 있다. (중략) 청년 불교도여, 지금이야말로 우리가 일어나야만 할 때다. 단연코 인습을 버리고 일제히 불타에 귀의하라. 그리고 사랑과 평등의 불교정신을 먼저 스스로 체험하고, 과감히 자본주의 개조에 직진하라. 이렇게 하여 우리가 이상으로 하는 불교사회 건설에 노력해 가지 않겠는가!” 이 자리에 모인 20대로부터 30대에 걸친 젊은이들 전원은 이 선언을 이의 없이 가결했다.

그리고 다음의 강령을 선포했다.“첫째, 우리는, 인류가 지니고 있는 최고의 인격인 석가모니불을 찬앙(鑽仰)하고, 동포신애의 교강에 따라 불국토 건설의 실현을 기한다. 둘째, 우리는 전 기성종단이 불교정신을 모독하는 잔해적 존재임을 인정하고 이를 배격하며 불교의 신시대적 선양을 기한다. 셋째, 우리는 현 자본주의 경제조직은 불교정신을 위반하고 대중생활의 복리를 저해하는 것으로 알고 이를 바르게 개혁하여 당래사회(當來社會)의 실현을 기한다.”당래사회에 대해 사회주의로 할 것을 명기하자는 의견과 반론 등이 제기되었지만, 다음 기회로 미루기로 하고 회칙을 심의한 후 가결하였다. 드디어 신불청이 결성된 것이다.

이로써 현실의 모순을 불법의 빛으로 타파하기 위한 세노오 기로(妹尾義郞, 1889~1961)와 그의 지지자들의 목숨을 건 투쟁이 막이 올랐다. 세노오는 그날 일기에 이렇게 썼다.“이렇게 제1성은 어쨌든 올랐지만 과연 이것이 어떻게 움직여 갈까. 제일 먼저 나 자신의 성심에 달려 있다. 몸을 버려야만 빛나는 신운동이다. 밤, 집에 돌아와서 집사람에게도 사신(捨身)의 각오를 주문했다.”순수한 감성과 병약한 몸으로 냉엄한 인간 현실의 고통 해소를 위해 정열을 불태운 세노오의 불교개혁이자 사회개혁운동은 이렇게 시작되었다. 군국주의의 경고를 무시한 이카루스(Icarus)의 태양을 향한 이 비상은 일본 근대불교계를 통틀어 불타의 이상에 가장 가까이 접근하고자 한 그의 순수한 신앙이 추동한 것이다. 

세노오의 불교운동은 생전에는 평가되지 않았으며, 그가 죽은 후 불교사가(佛敎史家)들에 의해 간헐적으로 기록되었다. 1970년대에 비로소 이나가키 마사미(稲垣眞美)가 《불타를 짊어지고 가두에: 세노오 기로와 신흥불교청년동맹》(1974),《세노오 기로 일기》(총 6권, 1974),《세노오 기로 종교논집》(1975)을, 마쓰네 타카(松根鷹)가 《세노오 기로와 신흥불교청년동맹》(1975)을, 세노오의 가장 측근인 하야시 레이호(林靈法)가 《세노오 기로와 신흥불교청년동맹: 사회주의와 불교의 입장》(1976)을 세상에 내놓음으로써 그의 업적이 드러나게 되었다. 그러다가 2000년대에 들어와서 키무라 겐묘(木村憲明), 오타니 에이이치(大谷栄一), 사토 아쓰시(佐藤厚) 등의 논문에 의해 종교사회학 내지는 사회주의 입장에서 재평가되고 있다. 본 글의 구성도 이러한 선행 자료와 연구에 기반하고 있다.

일본 불교계의 입장에서는 자신의 근대적 상황을 돌아보면 볼수록 그의 불교정신과 실천행에 더욱 많은 빚을 지고 있음을 자각하리라 생각된다. 왜냐하면 세노오의 불교와 사회개혁관이 확대된 조직인 신불청이 활동하던 시기는 각 종파가 소위 전시교학이라고 하는 전도된 교학체계의 수립이 본격화되면서 자신의 신도들을 전쟁에 협력하게 하고, 군국주의 국가와 더불어 젊은이를 전쟁터로 내몬 공범의 위치에 있었기 때문이다. 그는 반전운동을 통해 불살생을 최고의 덕목으로 하는 불교의 계율을 현실 속에서 구명하고자 한 것뿐만은 아니었다. 자본주의의 욕망과 그로 인한 민중의 고통에 대한 극복과 대안 제시, 피폐해 가는 농촌사회에 대한 연민의 정에 넘친 구원 활동, 사회 곳곳의 약자들에 대한 무한한 자비심의 발로로 자신의 온몸과 영혼의 에너지를 쏟아 부었기 때문이기도 하다. 혹자는 그가 군국주의 정권에 의해 체포된 뒤, 모진 고문을 통한 회유에 의해 전향했다고도 하지만 앞의 연구와 기록물들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결코 그렇지 않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렇다면 먼저 신불청의 결성에 이르기까지 세노오의 인생 역정을 잠깐 살펴보기로 한다.

일련종 조사 니치렌 좌상 . 교토 묘각사
세노오는 양조업을 하는 집안의 4남5녀 중 4남으로 태어났다. 젊은 시절 인생의 행로에 끼친 첫 결정적인 계기는, 1920년 국제연맹 사무차장이 된 니토베 이나조(新渡戸稲造)를 그가 교장으로 있던 고등학교에서 만남으로써 그의 열린 인간성에 깊이 심취하게 된 것이었다. 다음으로는 각종 병으로 인해 몸이 쇠약함에 따라 정양을 하면서 만나게 된 신심 깊은 일련종 신자인 마쓰자키 규타로(松崎久太郎)였다. 그로부터 《법화경》과 종조 니치렌(日蓮, 1222~1282)을 알게 된 것이다. 그는 이 시기의 감상을 《빛을 사모하며》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시대가 참으로 요구하는 것은 살아 있는 인간이며, 편리한 기계는 대저 끝이다. 학식만이 높은 박사도 아니고, 능변의 설교가도 아니고, 교수법이 뛰어난 교원도 아니다. 일체를 공관(空觀)한 소달마(小達磨)도 아니고 금색의 미타불도 아니고, 물론 유행하는 벼락부자도 아니다. 박애를 읊고 다니는 인간이나 자선냄비도 아니고 현생의 안온과 후생의 극락을 외치는 법화주의자도 아니다. 진지함이 불타오르듯 ‘쉬운 것을 피해 어려운 것을 행하는 이것이 대장부다’라고 마음 깊은 곳에서 외치며 처마를 들어 올릴 힘을 가진 대범부의 출현을 요망한다.”

이는 훗날 모든 고난을 무릅쓸 자신을 향한 외침이었을 것이다.

실제 자신을 《법화경》의 홍포자로 자칭한 니치렌은, 권력의 정점인 천황이나 권속마저도 석가불의 노예라고 하며, 천황가의 주신인 아마테라스 오미가미(天照大神)에 대해 석존의 사자에게 머리를 숙이고 땅에 엎드려야 한다고까지 하고 있다. 무소불위의 세속권력을 불법의 아류로 보는 대단한 자부심이 아닐 수 없다. 세노오는 니치렌과 같은 세속의 권위를 넘어선 불법의 절대성을 이 시기 확립한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법화신자로서 사찰 순례를 하는 동안 출가를 하게 되고, 가쿠오(學應)라는 승명을 받았다.

세노오가 보다 본격적인 법화계 교단과의 만나게 된 것은 당시 니치렌주의(日蓮主義)의 제창자인 다나카 치가쿠(田中智學)의 국주회와 불교계 교단의 통일을 주장한 혼다 닛쇼(本田日生)의 현본법화종이었다. 그는 다나카의 관료적인 성격에 실망하고 혼다가 조직한 통일각에 들어가 일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32세 때인 1920년, 젊은이가 일어서지 않으면 나라가 위태롭다고 보고 “불타를 등에 업고 가두에”라는 슬로건으로 대일본 니치렌주의 청년단을 발족시켰다. 움직이는 사찰 운동을 시작한 것이다.

기관지 《젊은이(若人)》도 발행하였다. 제1차 세계대전의 참상을 전해 듣기도 하고, 1923년 관동대지진 때에 위기에 처한 조선인을 구하기도 했지만, 학살되는 수많은 조선인에 대한 아픔에 고통스러워하기도 하였다. 또한, 지주에게서 착취당하는 소작농의 편에 서서 농촌개혁을 실천하기도 하고, 공창 문제의 해결을 위해 나서기도 하였다. 더욱이 자본에 의해 착취당하는 노동자의 노동환경을 목격하고 자본주의 제도의 변혁을 꿈꾸기 시작했다. 이 시기 국가신도(國家神道)에 의해 정당성을 부여받은 천황제에 대해서도 의문을 가졌다. 1931년 마침내 이러한 사회적 모순을 개혁하기 위한 새로운 전환의 시점이 도래했음을 자각하고, 기존의 조직을 신불청으로 재편하고, 기관지도 《신흥불교의 깃발 아래에》라는 제호의 잡지로 변모시켰다. 혼다의 교단으로부터도 나와 독립적인 행보를 시작한 것이다.   

바야흐로 불법의 이름 아래 사회현실에 무기력한 기성 교단에 대한 배척은 물론 모순과 부조리로 가득 차고, 약자의 고통을 생산하는 국가와 사회의 조직 및 자본주의 이념에 대한 개혁의 총공세를 펴며, 시대의 변혁을 시도하게 된 것이다.

2. 신흥불교청년동맹의 사회개혁
 
신불청이 활동한 기간은 1931년부터 1936년 12월, 세노오가 경찰서에 검거되고 2년 후 신불청 간부와 회원들마저 검거되기까지의 기간으로 약 7년 동안이라고 할 수 있다. 이 기간 신불청은 매년 전국대회를 열고, 회원들의 결의에 의해 결정된 사항을 집행해 갔다. 첫해에는 회원 모집과 지부 창설에 주력했다. 본부의 조직에는 위원장, 서기장 아래 조직부를 비롯 13부를 두었다. 간부들은 각 부장과 중앙집행위원이 중심이 되었으며, 지방 지부의 책임자가 중앙위원으로 선출되었다. 

신불청이 결성된 해인 1931년 9월에 일본은 만주사변을 일으켰다. 세노오는 이 전쟁에 대해 자신의 일기에 “그들은 전쟁만이 충의라고 생각하는가. 아아, 이 기만! 자본주의를 기반으로 한 전쟁은 민중의 고통 증가를 결과로 하는 것 이외에 그 어떤 것도 아니다. 민중은 전쟁 방지를 위해 자위적 최대한 노력을 해야 한다.”고 하며, 전쟁이야말로 인류 최대의 불행이자 제국주의 전쟁은 민중의 적이라는 반전사상을 분명히 드러냈다.
이러한 가운데에 같은 달 국제어 에스페란토(Esperanto) 연구회를 발족시켰다. 당시에는 에스페란토 운동이 활발하던 시기이기도 했다. 평화를 사랑하는 범세계인들 간의 국제적 연대는 물론, 신불청의 국제적인 조직을 염두에 둔 기획이라고 할 수 있다. 지금도 일본에 진지하고도 열성적인 에스페란티스토(Esperantisto)들이 꽤나 있는 것은 이러한 신불청과의 인연도 한몫한 것 때문으로 보인다.

또한 같은 시기 불교무산당(佛敎無産黨)과 신흥불교소비조합을 제창했다. 전자에 대해 세노오는 무산운동이 일본 전통과 그 외의 객관적 실정을 무시한 마르크시즘의 공식 강요에 머물고 있기 때문에 인격적 행동을 강조하는 특색을 가진 정당을 결성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결성에는 이르지 못했다. 후자도 정관을 만들기는 했지만 성립시키지 못했다. 그러나 세노오의 이러한 주장들은 당시 사회적으로 일본 전투적 무신론자 동맹이나 일본 반종교 동맹과 같은 반종교운동과 함께 커다란 반향을 일으켰다.

이어서 장례식의 무료화를 선언했다. 관습적인 관혼상제의 허례허식을 철폐하자는 것이었다. “장제식전(葬祭式典)의 무료시행!!”이라는 제목 아래 12조 항의 전칙(典則)을 쓴 벽보를 만들어 마을마다 붙이기도 했다. 이는 일상의 생활개혁운동이었다. 에도(江戸) 시대, 막부의 단가제 실시로 인해 일본의 거의 모든 민중은 사찰에 종속되었다. 이후 근대 메이지유신을 통해 천황제의 정당성을 위한 국가신도 확립 과정에서 파생된 폐불훼석과 함께 신정부에 의해 단가제 당위성의 효력 상실이 선언되었음에도 여전히 장식불교(葬式佛敎)로써 사찰에 신도들을 묶어 두고 있었던 것이다. 따라서 승려들은 장제(葬祭)를 통해 생활수단을 얻었으며, 사찰은 장제불교라는 오명을 쓰고 있었다. 이러한 현실을 민중의 의식에서부터 개혁하자는 것이었다. 생활개혁은 먼저 농촌에 중점을 두었다.

신흥불교 청년동맹 회원들. 앞줄 중앙이 세노오 기로.
다음 해인 1932년 1월에는 신불청 제2회 전국대회를 개최하였다. 자본주의에 의한 문명의 폐퇴 현상을 폭로하고, 이를 개혁하고 불교를 통한 농촌계몽운동을 지속적으로 실시해 가자는 방안이 결의되었다. 또한 무산(無産) 운동은 시기적으로 수용이 되지 않기 때문에 총선에서 사회민중당을 추천, 지지하기로 하였다. 한편, 세노오는 만주사변을 정면으로 반대하였다. 그는 기관지의 ‘구도일기’란에 불교교리에 반하는 전쟁에 반대하며, 군용기 헌납 반대 캠페인을 벌였다. 특히 육군대학 교관인 후루카와 다이고(古川碓悟)와 논쟁을 통해 반전사상을 명확히 했다. 후루카와가 불교 논리를 빌려 만주사변을 정의의 전쟁이자 일본의 정당한 권익을 위한 옹호전이라고 한 것에 대해 세노오는 불교는 원칙적으로 전쟁을 반대하며, 그것은 대승불교의 안이한 이론의 통속화이자 현실체제에 대한 긍정에 지나지 않는다고 했다. 이에 더해 사유 부정의 통제에 의해서만 국가사회의 진정한 복리가 보장되고, 세계 인류의 평화와 복리는 세계 연대의 계획적 생산에 의해서만 가능하다는 것을 불교교리는 보여주고 있다고 주장했다.  

이 해에 세노오는 전쟁에 의해 농촌이 더욱 궁핍해지는 것을 보고, 농촌은 정토신앙에 의해 다음 생의 극락이나 타력본원류의 환상적 안심, 밀교적인 자력의 관념 등에 의해 농민에게 복종의 도덕을 강요하고 있다고 비판, 농촌에 이익이 되는 일에 힘을 쏟을 것을 강조했다. 그리고 그 구체적인 안으로는 탁아소 개설, 농가 부업 연구와 지도, 일요학교나 도서관의 개설, 청년 남녀의 계몽을 위한 촌숙(村塾)의 개설, 주부를 위한 봉제의 지도 등 사찰이 할 수 있는 일이 많이 있음을 주장했다. 이러한 주장에 힘입어 지역 사원에서 협동조합운동을 전개하기도 했다. 세노오는 일련주의 시대 동지인 와고 츠네오(和合恒男) 등이 벌인 3개조청원 기성동맹회에 참여하였다. 그 3개조는 농가 부채의 보류, 비료자금 지원, 만주 이주비용 보조 등에 관한 것이었다. 농본주의적인 세노오는 발기에도 참여하고, 신불청에서도 협조하여 2천여 명의 서명을 확보하였다.
1933년 제3회 전국대회에서는 국가주의 반대, 만주침략 반대, 전쟁 반대, 군국주의 반대의 4대 운동을 명확히 했다. 그리고 25항목의 구체적인 운동 강령을 결의했다. 세노오는 7월에 반(反)나치ㆍ파쇼운동과 8월에는 극동평화의 친구회에도 참가했다. 파시즘 비판과 신흥불교라는 주제로 신불청 주최 강연을 개최하기도 하였다.

이 시기의 특징 중 하나는 수평사(水平社) 운동과 연대했다는 점이다. 1922년 일본 최초의 인권선언이라고 불리는 창립선언을 발판으로 발족한 전국수평사는 차별받는 민중들의 부락해방운동 단체를 말한다. 특히 이 수평사는 조선인들의 차별철폐운동을 위해 1923년 발족된 형평사(衡平社)와도 연대하고 있었다. 그는 11월 연 대강연에서 “지배계급이 스스로 우월함을 드러내기 위해 노동계급 비하의 사상을 극단화하여 부락민의 관념을 만들어 냈다. 이 차별이야말로 횡포한 지배계급이 받아 마땅한 죄벌의 속죄에 바쳐야 할 희생의 상징이 아니고 무엇인가. 차별의 철폐는 관념적 융화운동 등으로 달성되는 것은 아니다. 그것이야말로 노동의 가치와 권위에 승복한 갈취, 계급 없는 공동사회 건설로만이 가능하다.”고 주장하였다. 끝내는 임석한 감시 경찰의 제지로 연설을 다 하지 못했다.   

1934년 제4회 때는 사회생활의 공동화, 국제주의 강조, 불교 종파의 발전적 통일화의 4대 운동 방침을 설정하여 신불청 운동을 보다 확산시켜 나갔다. 제3회 때의 실천강령에 대해서도 재확인하였다. 신불청 운동 노선에 맞추어 도쿄 전철노동자의 파업에 참여하여 지원연설을 하였다. 특히 신불청은 전쟁과 국제평화 문제라는 주제로 강연회를 열었다. 이러한 반파시즘 및 전쟁반대 운동으로 인해 경찰과 헌병에 의한 감시가 더욱 심해지기 시작했다. 11월에 일본 동북 지방에 냉해가 일어나 심한 고통을 받는 농민들을 위해 모금운동 등을 통해 적극적인 지원에 나섰다.

1935년 제5회 대회 때는 국제주의의 정력적 고양, 자본주의 개조운동의 강화, 반종교운동의 배격, 각자 내면생활의 철저 등의 4가지 방침을 결정했다. 이를 위해 4월 일본노동조합 전국평의회의 권유로 《노동잡지》의 편집ㆍ발행인을 맡았다. 더 나아가 정치적 행보도 시작했다. 세노오가 세우고자 했던 불교무산당과 노선이 유사한 노동무산협의회(1937년 일본무산당으로 개칭)에 개인적으로 참여하여 도쿄 부의회 선거에 입후보하기도 하였다. 비록 낙선하기는 했지만 반파시즘 및 반자본주의 공동전선의 구축을 위해 선택한 길이기도 했다.

1936년 12월 세노오는 결국 경찰에 체포되었다. 《노동잡지》 편집진이 공산당 재건 준비위원회에 관계하고 있다는 혐의였다. 그리고 이는 향후 2년에 걸친 신불청에 대한 대대적인 탄압의 신호탄이기도 했다.                 

3. 《사회변혁도상의 신흥불교》의 성격

《사회변혁도상의 신흥불교》는 《신흥불교》(《신흥불교의 깃발 아래》가 1931년 9월부터 《신흥불교》로, 1933년 9월부터 〈신흥불교신문〉이 되었다)에 〈불교학 비판〉이라는 논문을 1932년 1월부터 6회에 걸쳐 게재한 것을 모은 것이다. 당시에는 판을 거듭해 수천 부가 팔려나갔다. 세노오의 핵심적인 불교개혁사상은 여기에 망라되어 있다.

그는 사회가 발전한다는 진보적인 역사관 위에 신흥의 목소리, 즉 신흥과학, 신흥예술, 신흥교육 등 사회변화에 발맞추어 예전의 껍질을 벗고 현대의 요구에 응하는 불교로 거듭나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리고 6가지 현대사회의 요구 조항을 세웠다.

첫 번째, 현대과학은 초인간적인 신불(神佛)의 존재를 부정하며 무신론을 설한다고 한다. 그는 엥겔스와 마르크스의 언설을 근거로 불교가 비록 천지창조를 설하지는 않지만 정토진종의 아미타여래, 일련종의 구원실성의 본불, 진언종의 대일여래, 선종의 제불 등 초인적인 신불이 존재하는가에 대해서는 노라고 말할 수밖에 없다고 한다. 무지가 신을 만든 것이며, 신은 경제생활의 산물이라고 한다. 레닌이 ‘천국의 행복 입장권’을 파는 종교를 아편이라고 본 것처럼 사원이나 교회가 민중의 적이라고 본다. 하지만 바라문교의 천지창조설을 부정하고 상의상관의 연기법에 바탕하여 세운 불교의 4제 8정도의 교설은 인과의 이법과 무아(無我)의 실천에 의한 인류해방의 교리라고 한다. 불교는 무신론이자 불타야말로 인격화된 진리이기 때문에 과학적인 현대에 있어서도 불교의 가능성은 충분히 있다고 하며, 기성불교의 아편적 미망성과 역할을 청산해야만 한다고 한다.       

두 번째, 현대과학은 사후의 생활을 인정하는 피안주의를 부정하며 무영혼론을 설한다고 한다. 원래 사후의 피안이라고 하는 것은 깨달음을 나타내는 말이며, 종래의 정토, 천국, 영산 등의 피안의 존재는 믿는 자의 주관이자 이상세계의 표상일 뿐이라고 한다. 초기경전에서 무아나 무영혼론을 설했음에도, 후대에 영혼불멸이나 피안주의 사상으로 전환된 것은 이 논리가 보수적인 상좌부에 의해서 채록되었으며, 불타의 대기설법에 따라 현실에 선인선과, 악인악과의 윤리를 세우고, 바라문의 유신(有神)적 반동운동에 대항함과 동시에 영생을 원하는 비과학적 대중에 대한 교화의 필요성에 의해 발전했다고 본다. 결국 피안사상이나 삼세인과설은 기성교단이나 전제사회의 지배계급에 의한 어용화에 지나지 않는다고 주장하고 있다. 따라서 계급대립의 자본주의 사회의 종언과 인격평등이 이루어지는 고차원의 과학적 사회에서는 신흥계급이 부활하여 구불교학이 청산되어야 한다고 한다. 

세 번째, 현대인은 환상적 행복에 만족하지 않고 실제 생활 가운데 모든 행복을 누리기를 원한다고 한다. 세노오는 민중의 현실적 행복을 보장해야만 함에도 당시의 설교가 정신주의에 경도되어 법열에 젓는 관념적인 행복만을 요구하는 것은 용인할 수 없다고 한다. 1928년 도쿄에서 개최된 일본종교대회에서 문부대신 쇼다 카즈에(勝田主計)가 “물질주의의 극복은 정신주의의 고조에 의해 이루어져야 한다.”고 했음에도 불구하고 소작쟁의, 학교소동 등이 늘고 악화되어 가는 것은 종교의 무능함을 폭로하는 것이라고 한다.

불타의 무아와 8정도에 의한 상호부조, 공존공영의 사회생활이나 승가의 중도생활에 비추어 보면 현재는 물질생활이 무시된 왜곡된 불교라고 한다. 불타 재세 시 교단은 국왕이나 부호의 권력과 경제력에 의해 발전했다고 한다. 일본의 조사들 또한 공허한 정신주의를 배격하였다고 한다. 따라서 본능에 뿌리박은 실제생활의 충실과 인격적 정화야말로 인간의 요구이자 지상의 천국을 만드는 본질적 운동이라고 주장한다.      
네 번째, 현대 대중은 경제생활의 안정을 원하며, 자본주의의 개조를 요구한다고 한다. 세노오는 맹자가 말한 항산(恒産)은 자본주의에 의해 빼앗기고 있으며, 사회인의 9할은 무산계급이라고 한다. 자본주의는 상품주의, 기계주의, 임금주의에 의해 무계획적인 이기적 자유경쟁의 경제조직이며, 이로 인해 격화되는 계급투쟁이야말로 사리투쟁의 이익사회로 가장 비불교적 사회라고 주장한다. 의식주는 물론 교육, 의료 등 생활 필수 부문이 보장되는 사회에서는 사유재산은 결코 절대적인 것은 아니다.

불교도의 이상 생활은 사유욕을 청산한 승가생활이며, 이는 사유적 영리사회가 아니라고 한다. 사방물(四方物)은 모두 공유의 의미이며 연기, 상의상관, 무아론의 근본원리에 의한 불교정신이야말로 당연한 삶의 형태이다. 그러므로 이처럼 공동사회의 이상과 형식을 가졌던 불교도가 자본주의 개조는 물론 사회주의를 요망하는 대중과 함께 행동하는 것은 논의의 여지가 없다고 한다.  

다섯 번째, 자각한 인류는 국가주의를 지양하고 국제주의를 고조(高調)한다고 한다. 세노오는 정토진종의 왕법위본, 진언종의 진호국가, 선종의 흥선호국, 일련종의 입정안국론 등은 불교의 정신에서 볼 때 바른 것일까 하는 의문을 제기한다. 국가는 자국 본위이자 국제주의는 세계적 협조라고 보고, 전자는 자본주의적이며, 후자는 사회주의적이라고 한다.

불교는 중도주의에 입각하고 있으며, 불교야말로 국제주의적이라고 하고, 국가에 의한 각국의 투쟁을 근절시켜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는 인류의 역사에서 군주국가가 무너지고 공화, 민주국가로 전환되는 배경은 국가주의의 청산과 국제주의의 가능성을 예고하고 있다고 본다. 석가가 나라를 버린 것은 국가에 배은한 것이 아니라 진리의 국가 건설만이 영원한 복리가 있음을 몸소 보여준 것이라고 한다. 이처럼 국가를 앞세워 국제주의의 실현에 노력하는 것이야말로 ‘불심을 이루고자 하는 것이 곧 중생을 제도하는’ 대보살행을 하는 것이라고 한다.

여섯 번째, 진보적인 불교신자는 종파적 불교를 청산하고 그 통일을 열망한다고 한다. 현재 일본의 13종 56파에 달하는 불교분파는 시대와 위기에 응해 분열한 문화발전 과정이었으므로 이제는 청산, 지양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각종의 종학은 근본적으로 대동소이하고 무아론에 바탕하여 사랑과 평등의 현실생활을 제창하는 것이었던 것만큼 이제 불타의 정신으로 돌아가야 한다는 것이다. 아미타불이나 대일여래도 모두 역사적 불타로부터 추상화된 이상불이므로 석존 이외에 우리를 구제할 절대불이 없다고 한다. 불타의 절대적 인격 아래에서 분열된 종파는 대승경전을 비롯 일체의 경전이 설하는 무아애의 실천을 지향한다. 이 무아애야말로 미혹과 아집을 해탈, 해방하는 유일한 길이다. 세노오는 실천이 없는 종파적 사변을 없애고 일제히 단결하여 무아애의 현대적 실천에 나서라고 하며, 통일운동이야말로 불교의 세계적 발전, 국제주의화의 중요한 기여라고 한다.      

이러한 6가지 비판정신에 의거하여 신불청 운동의 운영 방침 또한 6가지를 제시했다.

첫 번째는 단연코 종파적으로 이용되어서는 안 되며, 오히려 종파적 절대성을 청산하고 불교 통합의 선구적 운동이어야 한다고 한다. 두 번째는 어용화된 국가주의적 불교의 청산운동이어야 한다. 세 번째는 앞 조항의 귀결로써 근본적으로 국제적 규모로 추진되어야 한다. 네 번째, 종래의 개인적ㆍ관념적 복음주의로부터 사회적ㆍ생활적 해방운동으로 나아가야 하며, 그 구체적 운동은 직간접으로 자본주의의 개조이지 않으면 안 된다. 다섯 번째, 계급 대립의 사회상을 무시해서는 안 되며, 사회의 변증법적 발전을 분명히 인식, 신흥계급의 해방전선에 합류하여 각종의 구체적인 운동을 강화하고 동시에 인격적 정화를 성취해야만 한다. 여섯 번째, 기성교단이 잃어버린 계율의 현대적 실천을 강조하는 운동이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어서 신불청 운동의 지도원리로 자귀의불(自歸依佛), 자귀의법(自歸依法), 자귀의승(自歸依僧)을 내걸었다. 이에 대해 세노오는 뒤쪽에서부터 설명해 들어간다. 그는 자귀의승은 갈취 없는 공동사회 실현의 신조라고 한다. 그리고 승가는 원래 중(衆)을 의미하는 말이며, 가나(gana)와 같이 중의(衆議)에 따라 입법ㆍ행정 그 외 국사를 결정하는 정체(政體), 즉 공화정체를 의미하는 말이므로 공동사회 실현이야말로 가장 적절한 지도 신조라고 말한다. 또한 자귀의법은 공동사회 실현의 기초철학이며, 법이라는 것은 말할 필요도 없이 공관ㆍ연기의 그것으로 사유(私有) 부정, 상의상관의 실천적 무아론이라고 주장한다. 자귀의불은 앞의 두 세계의 이상적 체험자ㆍ창도자(唱導者)로서의 불타 석존에 대한 간절한 믿음이라고 한다. 물론 현대인들은 인간에 대한 최고의 실재는 인간이라는 사실을 분명히 인식하고 있기 때문에 기존의 아미타불, 대일여래, 구원본불 등등 추상적 이상불은 필요하지 않다고 한다. 오히려 이러한 여러 추상불을 창작하게 한 인간 석존이 보인 최고의 인격성으로 말미암아 불타를 칭명하는 쪽이 보다 절실한 믿음과 감응을 생기게 한다고 본다. 따라서 이는 기성교단을 통일케 하는 유일무이한 조건이라고 주장한다.

4. 세노오 기로의 개혁 노선과 미완의 꿈

앞에서 본 것처럼 세노오의 불교개혁 노선은 니치렌주의와 불교사회주의로 볼 수 있다. 먼저 니체렌주의는 근대일본 일련종단의 개혁 슬로건이기도 했다. 앞에서도 언급했듯이 이를 근대사회에 정립한 것은 다나카 치가쿠(田中智學)였다. 그는 “니치렌 성인이 창도(唱導)주장하신 교의를 통해 우리의 몸이 처하고, 마음을 정하는 표준이자 전심으로 일관되게 지켜야 할 마음의 표준 규율을 니치렌 주의라고 한다.”고 하여 종단 내에서는 물론 일상생활에까지 이를 광범위하게 전개하고자 하였다. 그 특징으로는 재가주의, 절복주의(折伏主義), 말법관 등으로 볼 수 있다. 재가주의는 기존 출가 교단의 한계를 벗어나 세속에서 불국토를 건설하자는 것이다. 또한 절복주의는 불법을 비방하는 개인이나 세력에 대해서는 철저히 대응한다는 불교인의 행동주의 슬로건이다. 말법관은 일본의 정토 계열이 그렇듯 일본이라는 변토의식(邊土意識)에서 싹튼, 쇠미한 불법을 다시 부활시키자고 하는 종교운동의 토대가 된 사상이다.

사회적으로는 재가자의 입장에 선 다나카의 운동으로 널리 확산되어 많은 사상가들이 영향을 받았다. 이와는 다르게 출가자의 입장에서는 혼다 닛쇼가 앞장섰다. 세노오는 혼다의 영향을 받은 것이다. 그러나 다나카의 일련주의는 국주법종(國主法從)에 기반하여 천황제의 기반이 된 국체론의 추인, 군국주의 이론의 지원, 전쟁의 적극적 찬동 등으로 변질되고 말았다. 심지어 천황을 현현신(顯現神)이자 불타의 화현으로까지 보았다.

혼다 또한 근본적으로는 다나카의 국수주의와 다름이 없었다. 다나카의 영향을 받은 우익 활동가 이노우에 닛쇼(井上日召), 만주사변과 만주국 건설을 추진한 육군 군인 이시하라 칸지(石原莞爾), 우익혁명가이자 사회주의적 일련주의 운동에 투신한 기타 잇키(北一輝) 등은 군국주의의 선봉에 서 있었다. 물론 이 외에 많은 문인들과 종교학자들에게도 영향을 끼쳤다. 특히 1930년대 일련계 신종교인 창가학회(創価學會)도 일련주의의 영향하에 있었다고 할 수 있다. 

세노오 또한 이 시대 이러한 일련주의의 성격과 흐름을 잘 파악하고 있었다고 본다. 그는 몸이 아파 고등학교를 휴학하고 있을 때, 두부를 파는 독실한 일련종계의 신자인 마쓰자키 규타로와의 만남을 후에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그 두부 가게의 주인이 일을 쉬고 있을 때,‘작은 새도 목숨이 아깝겠죠. 살생으로 배를 채우는 것보다 두부를 만드는 일이나 나무묘법연화경의 제목(題目)의 발성이 무엇보다도 좋은 운동일지 모릅니다’라고 권해 준 말이 나의 마음을 울렸습니다.”라고 회상한다. 건강을 위해 조언해 준 말이었지만, 그 말의 전제가 되는 생명에 대한 가치의 소중함을 절실히 깨달은 것이다. 그것은 숙업에 의한 자신의 고통을 통해 더욱 크게 다가왔다고 할 수 있다. 이러한 계기가 일생을 불살생이라고 하는 신념으로 일관되게 했다. 보다 본질적인 니치렌주의에 발판한 세노오에게는 불법의 근본정신을 사회와 인류 전체로 확산시키는 데는 어떤 장애도 두렵지 않았던 것이다.

세노오의 사회주의관은 그 당시 유행하던 사회주의 사상과 초기불교의 승가공동체의 일치에서 찾을 수 있다. 그의 저작에서는 마르크스에게 영향을 미친 포이에르 바하의 《그리스도교의 본질》을 비롯하여 엥겔스의 《반뒤링론》, 마르크스의 《헤겔 법철학 비판서설》, 마르크스와 엥겔스의 《공산당 선언》, 레닌의 《사회주의와 국가》 등이다. 불교의 사회화를 위해서 이러한 사회주의의 이론을 초기 불교의 불전을 해석하는 데 활용하고 있는 것이다. 또한 그의 논집에는 율장의 《대품(大品)》 《선생경(善生經)》 《우바새경(優婆塞經)》 등이 등장하고 있다. 뿐만이 아니라 일본 조사들의 어록 등을 통해 그 근본정신을 밝히고 있다. 이러한 양자의 결합은 불교사회주의라고 칭해도 부족함이 없을 것이다.

그러나 세노오는 이러한 양자의 원전에만 밝은 것이 아니었다. 그는 당시 서구 사조의 범람으로 많은 사회ㆍ인문학자들이 서양의 사상을 수입하고 연구하며, 일본사회에 적용하고자 하는 지적인 흐름에 무한히 심취해 있었다. 특히 사회주의 사상의 연구는 사원경제 연구에도 영향을 끼치고 있었다. 토모마쓰 엔타이(友松圓諦)의 《불교경제학》, 호소카와 카메이치(細川龜一)의 《일본상대불교의 사회경제》와 《일본불교경제사 논고》 등은 그에게 크게 영향을 주고 있다.

그는 1933년 성립된 불교사회학회에 참여하여 연구하기도 했다. 더욱이 당시는 근대불교학의 연구 방법론에 힘입어 다양한 연구성과를 내고 있었다. 특히 기무라 타이켄(木村泰賢)의 원시불교사상 연구에 대해 우이 하쿠쥬(宇井伯壽)나 아카누마 치젠(赤沼智善)은 초기불교의 교설을 둘러싸고 해석을 달리하며 서로 연구성과를 축적하고 있었다. 이 외에도 다카쿠스 준지로(高楠順次郎)와 와타나베 카이쿄쿠(渡辺海旭)에 의한 대정신수대장경이 완성된 것도 1934년도의 일이었다.

1936년 2월 26일 우익 군사쿠데타를 보도한 당시의 신문들.
세노오의 내면에는 이러한 불교학계의 성과를 사회주의 사상에 힘입어 자유롭게 해석하고 적용하는 이론과 실천의 틀을 갖추고 있었다. 세노오의 연구자들은, 그의 사회주의 이론은 물론 초기불교와 조사들의 언설을 정확히 이해하고 있다고 평하고 있다. 불교의 전쟁 참여에 대해 혹독한 비판자인 이치가와 하쿠겐(市川白弦)은 심지어 “궁극적으로 국가권력의 부정에 다다름을 볼 때, 정치적으로는 아나키즘(Anarchism)이며, 철학적 양심의 청산(금욕)을 매개로 사회과학적인 인식과 실천에 의해 자본주의적 사유재산제를 부정하고, 인간 노동력 상품화의 사회적 기초를 뒤엎는 것에 있어서는 경제철학적으로는 공산주의(Communism)다.”라고까지 언급하고 있다. 이러한 논의는 결국 세노오가 《사회변혁도상의 신흥불교》의 이론에 바탕, 농촌 및 노동운동, 차별철폐 운동, 국제적 연대의 실천에서 보듯 불교의 무아, 연기론을 사회주의의 이상과 결부시킴과 동시에 당시 사회주의 운동의 다양한 측면을 일본사회에 응용하고자 한 철저한 사상적 실험정신에서 온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여기서 언급하여 둘 것은 신불청이 활동하던 시기는 만주사변을 계기로 불교부흥 운동이 불같이 일어난 시기이기도 했다. 일례로 일련주의의 영향을 받은 미야자와 겐지(宮沢賢治)의 시와 동화 등 문학작품은 당대 많은 민중의 호응을 받았다. 또한 1930년대 중반 라디오를 통한 토모마츠 엔타이의 《법구경》 강의는 커다란 반향을 불러일으켰으며, 불교계 인사들에 의한 종교부흥, 불교부흥은 진리 운동으로까지 확산되기도 하였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이러한 불교부흥 운동이 점차 관념화되어 가는 한편, 국가의 통제가 강화되고 불교계가 국가주의에 바탕, 군국주의 및 파시즘의 주구(走狗)가 되어 가는 과정에 있었음을 잊어서는 안 된다. 이 시기로부터 1945년 패망에 이르기까지 일본의 사학자들이 말하는 소위 15년의 전쟁 기간 동안 불교는 자발적으로 전시교학을 통해 대외 전쟁에 물적, 정신적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세노오는 황국불교화가 진행되어 가는 그 시점에 서 있었다. 대교단인 정토진종의 진속이제(眞俗二諦)에 의한 왕법위본(王法爲本)의 전시교학, 선종 교단의 전쟁 선의 논리, 더구나 일련종계는 왕불명합(王佛冥合)의 논리로써 군국주의와 파시즘을 지원하는 교학을 수립하는 등 불교교단 전체가 자신들의 단가(檀家), 즉 신도들을 사지(死地)로 내몰고 있었다. 심지어 이시하라 칸지와 같은 초국가주의 일련주의자들은 전쟁을 기획, 일본 중심의 세계통일국가를 실현하고자 한 몽상에 젖어 있었다.

결국 1936년 2월 26일 우익 군사 쿠데타가 발발한 것을 계기로 국가에 의한 사상적 검열이 강화된 가운데 세노오가 체포되었다. 다음 해인 1937년에는 그의 절친한 동지인 하야시 레이호가 신불청의 위원장이 되어 운동노선을 끌고 나갔다. 하지만 10월에는 도쿄 본부를 비롯 지부의 유력인사들이 체포되어 기능이 마비되었다. 다음 해인 1938년까지 치안유지법에 의해 수백 명의 회원들이 검거되어 신불청은 완전히 와해되었다.
세노오는 감옥에서 죽음에 이를 정도로 쇠약해진 6년 뒤인 1942년 7월에 석방되었다. 구사일생으로 살아난 몸을 추스르는 사이 전쟁은 끝이 났다. 그가 죽기 2년 전인 1959년 봄, 나가노현(長野縣)에서 농촌생활을 하던 그는 마침내 일본 공산당에 입당했다. 그는 오랫동안의 숙원이 이루어졌다고 술회했다.

세노오의 이상은 아직 미완이다. 비록 일본 근대의 불교와 사회 개혁가로서의 일생은 끝났지만 결코 그가 그리던 현실적 이상사회는 오지 않았다. 그가 살던 시대의 자본주의가 여전히 그의 저항에도 불구하고 당당히 승리의 깃발을 올리고 있는 이 순간 그가 소망한 인간을 위한 불법의 사명은 여전히 유효하기 때문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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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불교 교무(법명: 익선), 동국대학교 불교문화연구원 연구교수. 원광대학교 졸업. 일본 교토(京都) 불교대학에서 일본불교사상 연구로 석ㆍ박사학위 취득. 현재는 근대일본불교와 민족주의 및 군국주의와의 관계를 심층적으로 연구하고 있으며, 한국, 중국의 근대불교를 비교학적 관점에서 연구하고 있다. 주요 저서로 《동아시아불교, 근대와의 만남》(공저), 《근대 동아시아의 불교학》(공저) 《일본문화사전》(공저)이 있으며, 역서로는 《일본불교사: 근대》(柏原祐泉지음, 공역)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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