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대중국 사회변혁의 조타수들

1. 머리말

동아시아에서 근대는 새로운 방식으로 삶이 재편되는 과정이었다. 개인이나 사회가 겪은 혼돈과 충격은 실로 엄청났다. 이른바 산고에 가까운 고통과 노력으로 근대가 출현했다. 하지만 근대라는 삶의 형태가 꼭 좋은 것만은 아니다. 근대의 온갖 폐해를 아는 우리로서는 섣불리 그것을 칭찬할 순 없는 노릇이다. 그런데 근대를 과거로 대하는 우리와 달리 당시 그 속에서 온전히 살아야 했던 사람들은 자신이 생각하는 근대라는 상을 향해 고군분투했다. 비록 서툴렀지만, 그들은 절실했다.

사회의 변화는 일개인의 노력만으로는 이룰 수 없다. 함성은 개인에게 출발할 수 있지만 사회를 변혁하는 거대한 물결은 숱한 물방울의 결합으로 이루어진다. 아름드리 장송도 혼자 잘나서 하늘까지 뻗은 게 아니다. 저 뿌리까지 적시는 비를 흠뻑 맞았고, 가지와 잎 사이를 훑는 바람, 그리고 대지를 덮는 찬란한 태양이 오랜 인연이었다. 인간 사회에서 거대한 물결이 지향을 가질 때 그것은 운동(movement)이 된다. 운동은 다양한 분야에서 진행되고 하나의 운동 속에서도 여러 갈래 힘들이 작동한다. 그런 힘의 분출과 대중의 웅성거림이 새로운 시대를 이끈다.

근대불교라는 영역에서도 운동 개념을 적용할 수 있다. 근대불교 자체가 하나의 지향이었다고 말할 수는 없다. 그 속에서 갖가지 지향과 힘의 분출이 있었고 결국 그것이 하나의 운동으로 작동했다. 운동이 개인의 고군분투가 아님은 명백하나 운동의 발원지나 조타수는 있게 마련이다. 불교운동에서도 마찬가지다. 운동의 발화점이 되는 인물이 등장하게 마련이다. 이 글에서 근대중국에서 불교운동 몇 가지 유형과 운동을 이끈 대표적 인물을 소개하고자 한다.

중국 근대불교를 네 가지 운동으로 정리했다. 근대불교의 계기가 된 각경운동과 양런산(楊仁山), 불교계 개혁과 사회계몽에 앞장 선 타이쉬(太虛), 근대 사상의 한 축인 유식학 연구와 지식인 불교교육을 선도한 어우양징우(歐陽竟無), 가난과 전란 그리고 재해 속에서 무참히 쓰러진 고통받던 사람들을 구호한 슝시링(熊希齡)을 대표적 인물로 다루겠다. 더불어 이들과 함께 운동을 조직한 인물들을 종합적으로 소개한다.

2. 양런산의 금릉각경처 설립과 각경운동

양런산
양런산(楊仁山, 1837~1911)은 1866년 난징(南京)에서 뜻있는 거사들과 함께 금릉각경처(金陵刻經處)를 설립했다. 그들의 각경처 설립은 대단히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청말(淸末) 불교인은 여전히 많았지만 불교의 정교한 학습이나 신앙생활을 위해서 필요한 불교 문헌은 턱없이 부족했다. 양에서도 그렇지만 질적인 면에서도 심각한 수준이었다. 정교한 교감이나 판본 대조가 없이 판각된 부정확한 문헌이 유통됐다. 양런산은 바로 이 점을 안타까워했고 결국 직접 이 문제를 개선하고자 뛰어든다.

정확한 불교문헌을 판각하고 인쇄하여 유통시키는 것은 불교적 앎을 생산하고 확대하는 과정이다. 만약 이것이 없으면 불교는 산속의 신앙으로만 있어야 한다. 아울러 그것이 2차 3차 번지고 확대되는 것이 불가능하다. 양런산은 여러 사찰을 방문하여 다양한 판본의 불교 문헌을 구했다. 1866년 금릉각경처에서 《정토사경(淨土四經)》을 판각해 인행했다. 다시 각경처의 경론 출판 방식은 여러 판본을 수집해서 교감과 비판 대조를 통해서 정본을 만들고, 그것을 목판으로 판각한 후 인쇄하는 식이었다. 전통적인 방책형(方冊型) 책자로 만들어 유통했다.

양런산이 금릉각경처를 설립한 이후 오래지 않아 양런산의 도반 미아콩(妙空)이 장쑤(江蘇) 양저우에 강북각경처(江北刻經處)를 설립했다. 이 두 곳은 근대 최초의 각경처라고 할 수 있고 현재도 활발하게 운영되고 있다. 고승 에카이(冶開)는 장쑤 성 창저우(常州) 천녕사(天寧寺)에 비릉각경처(毗陵刻經處)를 설립했다. 뿐만 아니라 비록 금릉각경처나 강북각경처 규모는 아니지만, 베이징이나 톈진 등지에 크고 작은 각경처가 설립됐다. 한 가지 주목해야 할 점은 이들 각경처에서는 단지 불교 경론만이 아니라 다양한 중국 고전도 판각 인행했다는 점이다. 불교 영역을 넘어선 문화생산자로서 역할을 했다고 할 수 있다.

한 가지 고려해야 할 점은 강남 지역에서 이렇게 불교 각경사업이 활발하게 전개될 수 있던 문화적 배경은 청대 학술 전통이다. 물론 절대적으로 이 때문만은 아니지만 청대 고증학의 발달에 따른 문헌교감과 출판은 문헌 제작과 판매유통의 발달을 견인했다. 항저우, 쑤저우, 창저우, 난징 등 강남 지역 도시에는 크고 작은 도서관이 있었고 서적상이 활발하게 활동했다. 이런 문화와 기술의 축적을 기반으로 각경사업이 진행될 수 있었다.

양런산이 설립한 금릉각경처를 특히 주목해야 하는 까닭은 이곳에서 기존 불교 문헌에 대한 정본화 사업뿐만 아니라 중국에서 산실(散失)된 많은 문헌을 출간했다는 점이다. 중국의 경우 당말(唐末) 이후 전란이나 무관심 등으로 몇몇 종파의 문헌을 제외하곤 많은 문헌이 일실됐다. 특히 고대 주석서들은 일찌감치 사라진 게 많았다. 이런 차에 양런산은 일본에 보존된 많은 중국 찬술 문헌들을 수입했다. 양런산이 일본에서 중국 찬술 문헌을 수입할 수 있었던 까닭은 그가 영국 체류 중에 교류한 난조 분유(南條文雄, 1849~1927)의 도움이 컸다. 그는 1878년 쩡궈판(曾國藩)의 장자인 쩡지쩌(曾紀澤)를 수행해서 유럽을 방문했다. 1879년 초 영국 런던에 도착했고 3년여를 그곳에 머물렀다. 이때 난조 분유를 만났다.

난조 분유는 일본 승려로서 당시 런던 옥스퍼드 대학에서 인도학자이자 종교학자인 막스 뮐러(Mac Müller)에게 범어와 불교를 학습하고 있었다. 난조 분유는 양런산의 독실한 신앙과 중국 불교 개혁에 대한 포부에 감동하여 교류를 시작한다. 두 사람의 만남은 이후 중국불교에 중대한 영향을 끼친다. 일본에서 불교가 수입되는 상황이 연출되는 것이다. 고대 불교로 보자면 중국과 일본은 수출국과 수입국으로 나뉜다. 근대에 와서 이 관계는 상당 부분 역전되고 만다. 중국불교는 일본에서 불교 문헌을 수입했을 뿐만 아니라 밀교 등 끊어진 법맥을 이식하기도 했다. 난조 분유는 이후 대량의 문헌을 양런산에게 보낸다.

당나라 때 최고의 역경가로 추앙된 현장은 중국 법상종의 시조라고 할 수 있다. 그가 인도 유식학 전통을 《성유식론》이라는 글로 편집 정리했고, 제자인 자은 규기는 《성유식론술기》를 써서 그것을 해설했다. 바로 이 맥락이 중국 법상종의 출발이라고 할 수 있다. 난조 분유의 도움으로 오랫동안 중국에서 유통되지 않던 규기의 《성유식론술기》 등 많은 주소(注疏)가 중국으로 역수입된다.

근대 중국에서 각경사업은 이후 근대 중국의 사상계에도 많은 영향을 끼쳤다. 양런산과 제자 어우양징우가 교감하여 간행한 《유가사지론》 100권은 근대 유식학 부흥의 결정(結晶)이었고, 어우양징우의 제자 뤼청(呂徵)이 티베트본까지 동원한 《섭대승론》 교감은 전통적인 한문 전적 간의 대조 교감이 아니라 한문 외 전적을 교감에 이용했다는 점에서 특별하다고 할 수 있다.

산스크리트나 티베트어 판본과 대조하는 작업은 ‘자료의 확대’라는 차원에서 전통적인 불교 연구에서 벗어났다고 할 수 있다. 일본 불교학자 사쿠라베 하지메는 난조 분유의 근대불교학을 다루면서 근대불교학은 “에도시대까지 행한 불교학에 비해서 자료나 방법론 혹은 그 의도에서 명확히 구별할 수 있는 새로운 유형의 불교 연구”라고 지적했다.

불교적 앎은 경전 공부와 수행을 통해서 확보되고 확장한다. 근대 시기 각경사업은 불교적 앎의 확산을 위해서 핵심적인 역할을 했다고 할 수 있다. 단일 경론에 대한 판각과 인쇄뿐만 아니라 대장경 전체를 인쇄하고 유통시킨 경우도 있다. 혁명화상이라 일컬어지기도 한 쭝양(宗仰, 1865~1921)은 1908년 상하이 애려원(愛儷園)에서 대장경 간행을 발원한다. 그는 일본 도쿄 홍교서원(弘敎書院)에서 1885년 완성한 《대일본교정축쇄대장경》을 저본으로 기존 대장경과 교감 작업을 진행했다. 1912년 쫑양은 《빈가정사교간대장경》을 간행한다. 중국 근대에 처음 이루어진 대장경 발간이라고 할 수 있다.

1930년 시안(西安)에서 송나라 간행 대장경인 《적사장(磧沙藏)》이 발견됐다. 예공춰(葉恭綽, 1881~1958)와 장웨이차오(蔣維喬, 1873~1920) 등은 1931년부터 19355년까지 《적사장》 500부를 영인해서 간행했다. 1933년에는 산시성(山西省) 자오청(趙成) 현 광승사에서 금나라 대장경이 발견됐다. 이후 《금장》 혹은 《조성장》으로 불렸다. 당시 베이징 거사 조직인 삼시학회에서는 《적사장》과 《금장》을 비교해서 《적사장》에서 빠지거나 훼손된 부분을 《금장》에서 골라 《송장유진(宋藏遺珍)》이라는 이름으로 따로 간행했다. 끊임없이 연구하고 보존하려는 저들의 노력은 홍진세계에 불법을 새겨 넣으려는 큰 의미의 각경사업이었다.

3. 타이쉬의 불교 계몽운동과 인간불교

근대 시기 기존 전통을 반성하고 새로운 시대에 조응하여 자신을 바꾸는 작업이 곳곳에서 진행됐다. 정치 영역이나 문화 영역뿐만 아니라 학술 영역에서도 어김없이 이런 경향은 나타났다. 종교계도 마찬가지였다. 동아시아에서 근대는 계몽의 시대이기도 하다. 이 말은 계몽의 의미에 주의를 기울이면 알 수 있다. 칸트는 〈계몽이란 무엇인가〉라는 글에서 계몽은 미성년처럼 아직 몽매한 상태의 인간에게 이성의 빛을 던져 주어 미망에서 벗어나도록 하는 것이라 했다. 영어 인라이트먼트(enlightenment)는 빛의 확대를 의미한다. 여기서 빛은 이성이다. 몽매함을 벗겨 거기에 빛이 들이치는 국면이다.

중국에서 근대 시기 계몽을 말한다고 해서 모두 이성이라는 개념에만 주목한 것은 물론 아니다. 하지만 계몽가들은 근대적 합리성에 대해 기본적으로 동의했다. 불교계 내에서 기존 전통에 대한 반성과 합리적 비판 그리고 발전 방향 제시 등 일련 계몽운동과 개혁운동을 강력하게 진행한 인물은 타이쉬(太虛, 1889~1947)다. 그는 젊은 날 캉유웨이(康有爲)나 탄쓰퉁(譚嗣同), 량치차오(梁啓超) 등 변법파 지식인의 글과 옌푸(嚴復)나 장타이옌(章太炎) 등 신지식인의 글을 탐독했다. 그는 사회개혁과 불교개혁에 일찌감치 마음을 두었다. 타이쉬가 애독한 《인학(仁學)》에서 저자 탄쓰퉁은 “세상의 온갖 속박을 남김없이 찢어 버리겠다.”라는 충결망라(衝決網羅)의 정신을 선보였다. 타이쉬는 마치 탄쓰퉁처럼 구습을 혁파하고 불교를 혁신하겠다는 서원을 세웠다.

타이쉬는 1909년 양런산 거사가 금릉각경처 내에 설립한 ‘기원정사’에 입학하여 보다 넓은 시야에서 중국불교를 볼 수 있게 되었다. 양런산은 세계 불교에서 중국불교의 역할을 강조했다. 그는 기원정사에서 훈련된 불교도를 키워 불교가 거의 사라진 인도에 가 불교를 복원시키고자 했다. 그래서 외국어 학습을 중시했다. 또한 타이쉬는 기원정사에서 어우양징우 등 이후 불교계를 함께 이끌 동료들을 만났다.

1913년 2월 상하이 정안사에서 열린 고승 징안(敬安, 1851~1912)의 추모회에서 타이쉬는 불교 3대혁명을 발표했다. 징안은 1912년 중국 전체 불교계를 대표해서 조직된 중화불교총회의 회장이었다. 그가 그해 12월 베이징에서 갑자기 입적한 이후 행해진 추모회 석상이었다. 다시 보수로 회귀할 것 같은 분위기에서 젊은 타이쉬는 일성을 터트렸다. 당시 혁명이라는 단어는 사회 곳곳에서 사용됐고 시대의 요동과 함께 사회변화를 추동하는 강렬한 구호였다. 불교 3대혁명은 교리혁명(敎理革命), 교제혁명(敎制革命), 교산혁명(敎産革命)이다. 타이쉬는 기존 불교를 혁명하여 신불교를 건설하고자 했다. 이것은 신해혁명의 정신을 대표한 쑨원의 삼민주의와 닮았다고 이야기된다.

중국에서 장래 불교를 대표할 승려와 사찰은 마땅히 봉건적 조건 아래 형성된 구습을 혁파하고 원래 부처님 유교(遺敎)를 근본으로 해서 현 시기 중국 환경에 적합한 신불교를 건립해야 한다.

교리혁명은 무엇일까? 얼른 보면 기존 교리해석을 뒤엎겠다는 식이지만 결코 그런 것은 아니다. 량치차오가 〈사회통치와 불교의 관계를 논함(論群治與佛敎之關契)〉에서 지적했듯 미신이 아니라 이성적인 불교신앙을 위한 교리해석이라고 할 수 있다. 기존 미신적인 불교 이해나 구태의연한 불교 해석을 거부하고 합리적인 불교 해석을 시도해야 한다는 주장이었다. 더불어 중국 사회와 인류 사회의 발전을 견인할 수 있는 자리이타의 대승불교 정신을 적극적으로 해석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타이쉬는 이런 기반에 서 있었기 때문에 전 생애에 걸쳐서 불교계와 일반 사회에 대해 적극적으로 발언하고 불교적 대안을 제시하고자 노력했다. 불교적으로 중생계를 개선하고자 했던 셈이다.

교제혁명은 불교계의 제도 개혁을 가리킨다. “승려 대중의 생활과 조직제도의 개혁을 통해서 시대의 요구에 적응하고 진정 불법을 담당할 수 있는 승단을 건립하는 것이었다.” 바로 승가제도의 개혁이다. 타이쉬는 1915년 구체적으로 《정리승가제도론(整理僧伽制度論)》으로 교제혁명을 정리한다. 그는 중국의 불교혁명에서 “가장 근본은 혁명승단이 건강한 조직을 갖는 것”이라고 말했다. 타이쉬는 불교계의 중심이 현실적으로 출가자 집단일 수밖에 없음을 인정한다. 그런 이유로 건전한 출가자 집단을 형성하기 위해서는 건강한 출가자 조직이 필수임을 역설한다.
나아가 타이쉬는 승려의 자질을 제고해야 함을 강조한다. 이른바 승격에 대한 고민이라고 할 수 있다. 그는 1925년 〈승려 자질의 양성(僧格之養成)〉에서 육화중(六和衆) 개념을 거론했고, 〈지금 현실에서 승려 제도를 논함(僧制今論)〉에서 불교 대중(大衆)을 크게 승려와 신도로 나눈다. 다시 승려 대중은 장로중, 학행중, 복무중, 니중 넷으로 그리고 신도 대중은 귀계중, 연구중, 여중 셋으로 나누었다. 모든 불교도가 동일한 역할을 담당할 수는 없고 가는 길이 다를 수밖에 없다. 각각 길을 가지만 합당한 불교적 역할을 제시한 것이다. 또한 그 분야에서 분명한 수준을 요구한 것이라 할 수 있다.

교산혁명은 불교계 재산에 대한 건전한 운용을 말한다. 당시 사찰 재산은 주지를 비롯한 몇몇 권력 있는 승려들이 폐쇄적으로 사용했다. 한국에서도 이런 일들이 많았는데 주지가 환속하면서 사찰을 매각하는 일까지 있었다. 결코 개인 재산일 수 없지만 개인적으로 유용하는 일이 많았다. 타이쉬는 바로 이런 불합리하고 비불교적인 재산 운용에 대해 개선을 요구한 것이다.

타이쉬의 불교 3대혁명이 당시 불교계에 성공적으로 실현된 것은 결코 아니다. 하지만 타이쉬는 이런 기본 방향으로 갖고 입적할 때까지 활동했다. 이후 그의 불교계몽운동은 인간불교라는 개념으로 정립된다. ‘인간’불교. 어쩌면 이 말은 그리 불교적이지 않을 수도 있다. 불교는 육도윤회하는 육도중생에 대한 가르침이 아닌가. 하지만 타이쉬는 현실적으로 우리는 인류에 대해서 불교를 운용할 수밖에 없음을 인정했다.

타이쉬가 말하는 인간은 단순히 호모사피엔스를 가리키는 건 아니다. 그에게서 인간은 복수 개념임이 분명하다. 그것은 사회나 민족, 국가, 세계로 확장되는 인류사회 전체를 가리킨다. 그가 제기한 인간불교 개념은 자신의 불교계몽과 불교혁신운동을 핵심적으로 드러내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인간불교는 인간이 인류사회를 떠나서 신이나 귀신이 되게 하는 게 아니고, 또한 모두 출가시켜 산속에서 승려로 살게 하자는 것도 아니다. 그것은 불교의 도리로써 사회를 개량하고 인류가 진보하게 하여 세계를 개선하는 불교이다.

타이쉬는 불교가 불교에 한정되는 것이 아니라 불교 인류사회를 구원하는 현실적 가치로서 작동하길 바랐다. 그 바람과 그의 정열적인 활동이 인간불교로 개념화한 것이다. 타이쉬는 또한 인생불교라는 개념도 제시한 바 있다. 인생관이 부재한 시대에 불교는 인간이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지 제시해야 함을 역설했다. 그는 특히 현생을 중시했다. 다음 생에 내가 어디서 태어날 것인가의 문제가 아니라 지금 생에 내가 어떻게 살 것인가의 문제에 집중해야 한다고 말한다. 문제 해결 장소를 현생으로 돌려놓았다.

4. 지나내학원과 무창불학원의 교육운동

금릉각경처의 설립자 양런산은 각경사업에만 머물지 않고 불교 인재를 배양하겠다는 서원을 세웠다. 1908년 난징에서 양런산은 ‘기원정사’를 설립했다. 양런산은 스리랑카 불교운동가 다르마팔라(Dharma-pala, 1864~1933)를 만난 이후 인도 포교를 기획했다. 기원정사 설립은 이 기획과 관련 있다. 중국불교 부흥만이 아니라 세계 불교를 고려하고 고민했다고 할 수 있다. 기원정사는 불전 수업뿐만 아니라 범어, 영어, 일어 등을 배웠다. 그는 전혀 다른 불교교육의 목표를 가졌고, 따라서 교육 내용도 달랐다. 근대적 불교교육의 출발이라고 할 수 있다. 아울러 근대적 불교교육 운동의 시작이라고 할 수도 있다.

중국에서 근대 시기 불교교육과 불교연구는 몇 가지 범주로 구분할 수 있다. 전통적인 방식으로 사원에서 이루어진 교육과 연구가 있었다. 그리고 기원정사의 후신으로 금릉각경처에 설립된 지나내학원에서 행한 교육과 연구를 들 수 있다. 거사불교의 연장선에서는 베이징 삼시학회의 불교연구도 거론할 수 있다. 삼시학회(三時學會) 회장 한칭징(韓淸淨, 1884~1949)의 《유가사지론피심기》 같은 책은 상당한 수준에 도달했다. 그리고 1920년대 타이쉬 등에 의해 주도된 승려 위주의 불학원 교육이다. 무창불학원(武昌佛學院) 등 곳곳에서 불학원이 설립됐고 많은 승려 인재를 배양했다. 또한 1930년대 본격화된 대학에서 행한 전문연구이다.

어우양징우의 지나내학원이나 타이쉬의 무창불학원과 한장교리원은 1920, 30년대 비교적 근대화된 불교 교육·연구기관이었다. 그에 앞서 좀 더 전통적인 형식을 띤 불학원이 존재했다. 고승 위에샤(月霞, 1857~1917)는 상하이의 유명한 불교도 뤄자링(羅迦陵)의 도움으로 1913년 상하이 허통위안(哈同園)에 화엄대학을 설립했다. 화엄대학에서는 독경, 경전, 논서, 계율, 참선, 글짓기, 서예 등 일곱 개 과목을 수업했다. 이곳에서 공부한 츠송(持松, 1894~1972)은 이후 일본 고야산에서 일본 밀교를 배우고 귀국해 밀교를 부흥시켰다. 위에샤는 1917년에는 장쑤 성 창슈 흥복사에서 ‘법계학원’을 설립하기도 했다.

위에샤의 사제인 잉츠(應慈, 1881~1950)는 스승 같은 사형의 뒤를 이어서 화엄학 연구에 매진했다. 1925년 그는 청량학원 예비과정을 설립했고, 이듬해인 1926년 청량학원을 정식으로 설립했다. 《화엄경》에서는 동방의 청량산에 문수보살이 살고 있다고 말한다. 그 때문에 ‘청량’은 《화엄경》이나 화엄학의 상징처럼 쓰였다. 잉츠는 청량학원을 운영하면서 화엄의 바다에 뛰어들었다. 그는 오랫동안 청량 징관의 《화엄경소》 교감 작업을 진행했고 1944년에야 출간할 수 있었다. 화엄대학이나 청량학원은 분명 근대불교에 속했지만 전통적인 종파불교의 종지를 계승하고자 노력한 셈이다.

중국 천태종 43대 조사로 일컬어지는 디센(諦閑, 1858~1932)은 1913년 저장성 닝보 사명산 관종사 주지에 취임한 이후 관종강사를 설립했다. 이어서 그곳에 관종학사를 설치함으로써 천태교관의 강의와 연구에 매진했다. 종파불교가 거의 퇴색한 근대 시기에 산사에서 그는 고군분투한 것이다. 천태산에서 출가한 싱츠(興慈, 1881~1950)도 마찬가지로 천태교관을 중심으로 교육 활동을 전개했다. 1924년 그는 상하이에서 ‘법장강사’를 설립했다. 특이하게도 법장강사는 정토종과 천태종의 결합을 시도했다. 이름 ‘법장’도 《무량수경》에 등장하는 법장비구에서 온 것이다. 그는 법장강사에 정업당과 학사를 설치했고, 각각 정토수행과 천태교관을 공부하도록 했다.

1920년대 이후 중국 불교계는 적어도 학술 면에서는 지나내학원과 무창불학원이 이끌었다고 할 수 있다. 금릉각경처가 경전의 판각과 유통을 통해서 불교 지식을 확산했다면 지나내학원은 불교 연구와 불교교육에 집중했다. 양런산의 제자 어우양징우는 1911년 스승을 이어서 금릉각경처를 책임졌고, 1922년에는 지나내학원을 설립했다. 뤼청(呂澂, 1896~1989)과 왕언양(王恩洋, 1897~1964)이 그를 도왔다.

지나내학원은 오랜 준비 기간을 거쳤기에 상당히 체계적이었다. 운영에도 학술과 일반 사무 그리고 경론의 편찬 업무 등으로 구분했다. 이런 일들이 뒤죽박죽되면 주먹구구식으로 운영되기 십상이다. 또한 1923년 지나내학원 내에 법상대학을 설립했다. 예비과, 특과, 예과, 본과, 연구부 등으로 구분했고, 교육부에 정식 대학으로 인가를 받았다. 일반 불학원과 달리 교육부에서 행정적인 지원을 받을 수도 있었고, 폭넓게 인재를 수용할 수도 있었다.

지나내학원이 하나의 운동 차원에서 의미 있는 까닭은 당시의 위상 때문이다. 어우양징우는 지나내학원 설립을 추진하면서 정치나 경제, 학술 여러 영역의 불교 거사들과 연대를 추진했고, 물심양면으로 그들의 지지를 받았다. 량치차오(梁啓超)나 장타이옌(章太炎), 차이위안페이(蔡元培) 등 기라성 같은 학자들이 지나내학원이 불교교육과 불교연구의 기지가 되길 희망했다. 지나내학원은 1920년대 이후 불교연구의 중심으로 우뚝 섰다. 더구나 지나내학원은 단지 불교연구가 아니라 중국 근대사상사에서 중요한 역할을 한다. 어쩌면 중국 근대사상운동의 한 복판에 있었다고도 할 수 있다.

많은 근대 지식인들이 지나내학원에서 공부하고 가르쳤다. 량치차오나 탕융퉁처럼 이미 학자의 반열에 들었던 사람들도 어우양징우를 만나 배웠다. 어우양징우의 학생 슝스리(熊十力)는 지나내학원에서 2년여 유식학을 배우고 베이징대학 교수로 초빙됐다. 그는 훗날 《신유식론》을 써 일약 현대신유학의 상징이 되었다. 슝스리를 어우양징우에게 소개한 사람은 다름 아니라 량수밍(梁漱溟, 1893~1988)이었다. 현대 신유학의 대표자로 불리는 량수밍, 슝스리, 마이푸(馬一浮)가 불교와 깊은 관련이 있었고, 더구나 앞의 두 사람은 지나내학원과 연결되어 있었다. 그리고 베이징대학에서 중국 고전을 가르친 멍원퉁(蒙文通, 1894~1968)도 어우양징우의 제자였다. 근대 시기 어우양징우와 지나내학원의 유식학 연구는 불교계와 전체 사상계에 대단히 중요한 역할을 했다.

지나내학원은 당시 중국 지성계에서 앎의 한 원천이 되기에 충분했다. 이런 지나내학원이 거사 위주로 운영됐다면 타이쉬의 무창불학원(武昌佛學院)은 승려 위주로 운영됐다. 타이쉬는 지나내학원 설립에 자극을 받아서 1922년 9월 1일 후베이(湖北) 우창(武昌)에 무창불학원을 설립했다. 이곳도 지나내학원과 마찬가지로 교육과 연구, 도서관과 출판 업무 등 다양한 기능을 갖춘 종합적 교육기관이었다. 우리나라 사찰에서 운용하는 승가대학 규모를 상상해서는 안 된다. 꽤 큰 규모였다.

스이루(史一如), 탕따위안(唐大圓), 따용(大勇) 등이 무창불학원에서 교사로 활동했다. 이곳에서도 불교뿐만 아니라 중국철학, 영어, 일어 등을 가르쳤다. 제1회 입학생 가운데 파쭌(法尊, 1902~1980)이 있었다. 그는 훗날 티베트 고승 총카파의 《보리도차제론》을 한문으로 번역하는 등 티베트불교 연구와 번역에 출중한 역할을 했다. 그도 젊은 날은 무창불학원에서 타이쉬에게 배웠다. 그에 따르면 스승 타이쉬는 무창불학원을 단순한 불교 교육기관이 아니라 새로운 형태의 사찰로 만들고 싶어 했다. 그래서 첫 입학생은 승려와 재가자를 받았지만 두 번째 입학생부터는 순전히 승려만 모집했다. 재가자 위주의 지나내학원과는 확실히 달랐다.

타이쉬는 1927년에는 샤먼(厦門) 남보타사 주지와 부설 민남불학원(閩南佛學院) 원장으로 취임했다. 민남불학원은 1925년 남보타에 설립된 꽤 규모가 큰 불학원이었다. 타이쉬가 원장으로 취임하면서 본격적으로 교육과 연구 업무에 뛰어들었다. 고승 인순(印順)도 1931년 민남불학원에 입학해서 배웠다. 타이쉬는 1930년에는 세계불학원을 계획하고는 그 산하로 베이징 백림사(栢林寺)에 백림교리원을 설립했다. 타이쉬는 이때부터 훨씬 큰 그림에서 불학원 운동을 전개한다. 젊은 날 스승 양런산이 인도 포교를 위해 제자를 길렀던 것과 유사하게 ‘세계불교’라는 새로운 감각을 가졌다.

이런 감각의 연장으로 1932년 쓰촨 충칭에 한장교리원(漢藏敎理院)을 설립했다. 중국에서는 티베트를 서장(西藏)이라고 표현하고, 줄여서 장(藏)이라고 말한다. 얼마나 적절한 표현인지는 모르겠지만 타이쉬는 한족 전통불교와 티베트 전통불교를 한장(漢藏)이라고 표현했다. 중국불교 역사에서 처음으로 티베트불교를 내부로 수용한 것이라고 하겠다. 더불어 당대 이후 중국불교라는 틀이 확정되고 나서 여러 개의 불교가 존재함을 인정한 행동이기도 했다.

타이쉬의 제자 파쭌은 티베트 유학 이후 한장교리원으로 돌아와 티베트불교 연구와 티베트 불전번역에 힘을 쏟았다. 무창불학원에서 배운 파쭌은 이제 한장교리원에서 제자를 길렀다. 이렇게 앎은 계승되고 확산되는 법이다.

5. 슝시링의 홍만자회와 구난운동

슝시링
불교가 중생구제를 천명하지만 과연 얼마나 구체적이고 얼마나 적극적이었는지는 깊이 생각해 봐야 한다. 정신적인 구제도 구제지만 헐벗고 배고픈 자를 돌보는 것도 구제이지 않는가. 어쩌면 그것이 중생들에게는 훨씬 와 닿는 방법일지도 모른다. 일체유심조라고 한들 주린 배를 움켜쥐고 죽은 자식이 벌떡 일어나지는 않는다. 두타행을 하는 수행자지만 중생들이 모두 가난하길 바란다고 누가 서슴없이 말하겠나. 출세간이 아니라 세간의 고통도 구제해야 하는 게 불교의 임무라면 임무다.

관음정근을 시작하면서 하는 “나무 보문 시현 원력 홍심 대자대비 구고구난(救苦救難) 관세음보살.” “누구나 다 들어설 수 있는 문을 열어 보이시고, 원력은 크고 깊고, 대자대비로 고통받는 중생, 재난당한 중생을 구제하시는 관세음보살께 귀의합니다.” 이것은 종교적 염원이다. 관세음보살이 현실의 고통을 타파하는 힘을 내게 선물하고, 그 선물로 나는 다시 일어선다. 그런데 현실에서 목청껏 이 말을 외친다고 빈 밥그릇에 얼른 쌀밥 한 덩이가 떨어지는 것은 아닐 테다.

부처가 되고 싶다면 부처로 살아야 하듯 저 관세음보살에 대한 염원을 스스로 살아야 한다. 그것이 종교적 실현이자 종교적 윤리다. 불교인은 관세음보살이 행해야 할 가치를 직접 실현해야 불교적이다. 그때 부처로 사는 게 되고, 보살로 사는 게 된다. 머무는 곳마다 주인 되고, 처처에 부처가 있다는 건 바로 이야기일 것이다. 아마 부처님 당대에도 그랬을 것이고 그 이후도 마찬가지였지만 세상에는 늘 재난이 있다. 개인 규모로 닥치는 게 아니라 사회나 국가 차원 아니면 그것 이상으로 닥치는 고통이다. 인위적일 수도 있고 자연적일 수도 있다. 최근 일본 동북부를 강타한 쓰나미로 인한 피해는 자연재해지만 불안하게 세워 둔 원자력 발전소 사고에 따른 방사능 피해는 인공 재해다.

이런 엄청난 일은 엄청난 노력으로만 극복된다. 역사를 살피면 불교계에서 재난 구제를 위해서 활동한 사례가 많다. 우리가 기억하지는 못하지만 대사찰이 양식을 나누어 주거나 모연을 통해서 난민을 구호하는 경우는 꽤 있었다. 근대 시기에는 이런 행태가 훨씬 조직적이고 상시적이었다. 구난사업은 사회사업이라는 형태로 일상화했다. 중국 근대 불교계에서도 사회사업에 열심이었다.

중국근대불교 연구가 떵쯔메이(鄧子美)는 근대 시기 불교계가 펼친 자선활동에서 세 가지 특징을 추출했다. ①자선 조직과 기구의 설립, ②구호활동 규모의 확대, ③자선활동과 홍법의 연계이다. 근대 시기 조직의 밀도에서 다소 차이는 있지만 다양한 자선단체가 조직됐다. 장쑤성 창저우 천녕사를 중건한 고승 에카이(冶開, 1852~1922)는 상하이 옥불사에서 거사염불회를 조직한 이후 불교자비회를 설립했다. 1914년 승려 칭하이(淸海)는 창저우 청량사에서 황만자(黃卍字) 자선회를 설립하여 자선활동을 했다. 1917년에는 슝시링(熊希齡, 1870~1937)이 향산자유원(香山慈幼院)을 설립하여 재난 지역 아이들을 돌보았다. 쯔메이에 따르면 이 유아원은 가정과 학교와 사회를 결합한 실험학교였다.

근대 시기 불교계에서 다양한 자선활동이 있었지만 가장 돋보인 인물은 향산자유원을 설립한 슝시링이다. 슝시링은 1894년 진사시험에 합격했고 이후 량치차오나 탄쓰퉁 등과 함께 변법파 지식인들과 활동했다. 신해혁명 이후에는 정치계에 투신하여 북양정부총리까지 지냈다. 그는 불교계의 대표적 명사였고, 또한 정치적으로 거물이었다. 1913년에는 전국적인 불교조직인 중화불교총회를 설립하여 고승 에카이와 함께 회장에 취임했다.

당시 근대적인 산업화가 한참 진행되던 상하이 같은 대도시에는 새로운 경제 계층이 출현했고, 그들이 거대한 부를 획득했다. 슝시링은 불교 거사들과 연대하여 자선사업을 기획했다. 정부 차원에서 부의 고른 분배가 불가능하다면 기부나 자선의 형태로 부나 생활 수준의 편차를 줄여야 했다.

물론 자선활동가들이 이런 의도를 가지고 활동한 것은 아니다. 불교 거사들은 절을 짓고 경전을 판각하는 것만이 불사(佛事)가 아님을 알았다. 난민 구호가 자비행이자 부처행임을 잘았다. 그것이 불사임을 알았다. 1922년 10월 슝시링은 불교 거사들뿐만 아니라 외국 인사들과 연대해서 세계홍만자회를 설립했다. 그리고 베이징에서 중국지회를 설치하고 자신이 회장에 취임했다.

홍만자회(紅卍字會)는 우리가 쉽게 접하는 적십자회(赤十字會)의 중국 버전이라고 할 수 있다. 앞서 거론한 근대불교계 자선사업의 세 가지 특징을 고루 갖추었다. 조직과 규모, 그리고 홍법과 연계. 1923년 일본에서 지진이 일어나자 홍만자회 이름으로 모연을 해서 일본의 재난을 도왔다. 1937년 중일전쟁이 발발하고 수많은 부상병과 피난민이 발생했다. 전쟁 통에는 치명적인 부상이 아님에도 치료를 하지 않으면 목숨을 잃기 십상이었다. 전장에서 신음하며 서서히 죽어간 젊은이들이 부지기수였다. 또한 전쟁터가 된 자신의 마을 피해 객지로 떠도는 숱한 피난민들은 하루하루가 그야말로 전쟁이었다. 목구멍에 밥 한 톨 넘기는 것도 쉽지 않았다. 이런 상황에서 슝시링은 홍만자회의 깃발을 들고 이리저리 뛰어다녔다. 불교거사로서 불연이 닿는 곳마다 자비행을 촉구했다.

6. 맺음말

근대 시기 전체 불교를 운동이라는 차원으로만 해석할 수는 없다. 당연하다. 하지만 작은 몸짓이 인연이 되어 커다란 운동이 되는 경우도 있었다. 단지 세(勢)의 확장이라고 이해하는 게 아니라 인연이 커져 가는 것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보이지 않는 곳에서 시작한 노력이 씨앗이 되어 거대한 숲이 되는 경우를 근대 불교에서 보았다. 그것이 이후 불교계의 큰 흐름을 결정했고, 지금 중국불교를 구성하는 밑거름이 되었다. 대승불교도 하나의 운동으로 일어나 이후 불교를 송두리째 바꿔 놓았다.

우리는 신자유주의 시대에 산다. 한국에선 그것이 대단히 천박하게 작동한다. 멀쩡한 동네를 없애고 아파트단지를 만들어야 경제가치가 확장된다고 말하고, 멀쩡한 사람을 해고시켜야 열심히 일하는 경영자라고 생각한다. 멀쩡한 강을 파헤치면서 얄궂게 생태도시 운운한다. 종교계도 그것이 들이닥쳤다. 한국의 대형교회가 너무도 잘 보여준다.

불교계는 어떤가. 사업성이나 수익성이라는 말이 일주문을 들어선 지 오래다. 이런 시대에 불교적 가치는 뭐고 또 그것은 어떻게 실현해야 하나. 우리는 하나의 운동을 고민해야 한다. 근대불교는 미래불교를 위한 하나의 경험이다. ■


김영진
인하대학교 한국학연구소 HK연구교수. 1970년 경남 삼천포 출생. 동국대학교 불교학과와 대학원 졸업. 지은 책으로는 《중국근대사상과 불교》 《공이란 무엇인가》 《근대중국의 고승》이 있고, 옮긴 책으로는 《대당내전록》(공역), 《근대중국사상사약론》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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