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화를 위해 고통 위에 서다

1. 머리말

티베트의 정치, 사회, 문화, 예술은 불교와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성장하고 발전했기 때문에 티베트인들의 삶은 불교와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있다. 이런 상황 속에서 티베트인들이 믿고 따르는 부처님의 가르침과 그 가르침을 전하는 스승은 절대적인 가치를 지닐 수밖에 없다. 티베트불교에는 많은 스승들이 있다.

티베트의 4대 종파인 겔룩빠(dGe lugs pa), 닝마빠(sNying ma pa), 싸꺄빠(Sa skya pa), 까규빠(bKa’ rgyud pa)의 종파에는 다수 라마(lama)들의 계보가 있고, 이들은 수행과 저술 등으로 많은 존경을 받고 있다. 라마들은 많은 사람들의 지지를 받는 귀의처이기 때문에, 이 라마들 한 사람 한 사람이 중요한 티베트의 불교사상가이면서 불교운동가들이다. 그중에서 14대 달라이 라마(Dalailama)는 티베트 안팎에서 가장 큰 신망을 받고 있는 라마이다. 더구나 그는 티베트가 나라를 잃은 어려운 상황에서도 내적인 수행과 외적인 활동을 원만하게 수행하고 있다는 점에서 그 어느 라마보다도 대중의 존경과 신망을 크게 받고 있는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티베트의 라마들은 환생자로 태어나지만, 철저한 교육과 수행을 통해 완성된다는 점에서 라마의 교육을 책임지는 스승들은 혼신의 힘을 기울여 라마들의 교육에 전념한다. 그렇기 때문에 달라이 라마와 같은 큰 라마들의 스승들에게는 ‘용진(Yongs ‘dzin)’이라는 특별한 칭호를 부여한다. 이런 점에서 달라이 라마가 불교를 배우고, 그것을 중심으로 가르침을 전하는 바탕에는 티베트불교의 독특한 교육 시스템이 자리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 교육 시스템을 중심으로 달라이 라마가 불교를 배우고 법을 설하는 과정을 살펴보자.

2. 달라이 라마는 누구인가?

달라이라마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달라이 라마는 14대 달라이 라마인 아왕 롭상 예쎄 뗀진 갸쵸(Ngag dbang blo bzang ye shes bstan ‘dzin rgya mtsho, 1935~  )이다. ‘14대’이기 때문에 달라이 라마의 계보에서 열네 번째 환생자를 의미한다. 1대 달라이 라마에서부터 14대 달라이 라마에 이르기까지 그 흐름이 단절되지 않고 전승되어 온 것이다.

역대 달라이 라마 중에서 교학과 정치 등의 분야에서 남다른 업적을 남긴 달라이 라마는 1대, 3대, 5대 달라이 라마를 꼽을 수 있다. 이들 달라이 라마의 발자취를 여기서 간단히 살펴보는 것은 14대 달라이 라마의 가르침과 활동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된다.

1대 달라이 라마인 겐뒨둡빠(dGe ‘dun grub pa, 1391~1475)는 티베트의 위대한 학승이자 수행승인 쫑카빠(Tshong kha pa, 1357~1419)의 만년의 제자였다. 스승으로부터 《중론(中論)》, 인명(因明), 보리도차제(菩提道次第), 《입보리행론(入菩提行論)》 등의 가르침을 듣고 감명을 받아 제자가 되었다. 중앙 티베트에서 12년간 수행하고, 35세부터 불법을 강의하기 시작했다. 50세에는 날탕(Narthang) 승원 위쪽에서 만달라(Mandala) 관상과 무상요가(無上瑜伽) 딴뜨라의 명상에 몰두하여 특별한 체험을 얻었다.

이 시기에 일종의 종교 박해가 일어났다. 겔룩빠의 세력이 점점 커지자 까르마까규빠(Karma bka’ rgyud pa)가 귀족 세력과 결탁하여 신흥 세력인 겔룩빠를 탄압하기 시작한 것이다. 이 사건은 일단락되었지만, 진압하는 과정은 매우 끔찍했다. 겐뒨둡빠는 제자들에게 폭력으로 대항하지 말고 연민[悲]으로 인내하는 실천을 닦으라고 가르쳤다. 겐뒨둡빠는 스승의 유훈을 받들어 따시룽보(bKra shis rlung po) 사원을 건립하고 84세로 입적했다.

1475년에 한 농가에서 태어난 아이가 겐뒨둡빠의 환생자로 밝혀져 제2대 달라이 라마인 겐뒨갸초(dGe ‘dun rgya mtsho, 1476~1542)로 공인됨에 따라 달라이 라마의 계보가 성립되었다.

3대 달라이 라마 쏘남갸초(bSod nams rgya mtsho, 1543~1588)는 ‘달라이 라마’라고 불린 최초의 달라이 라마였다. 열한 살 때 데붕(‘Bras spung) 사원의 주지가 되고, 열여섯 살 때에는 쎄라(Se ra) 사원의 주지가 되었다. 스승인 뺀첸 쏘남닥빠(Paṇchen gSod nams grags pa, 1478~1554)로부터 철저하게 현교를 수학했고, 밀교의 가르침 중에서 으뜸이라고 하는 《구흐야 사마자 딴뜨라(Guhyasamāja tantra)》를 비롯한 여러 무상요가 딴뜨라의 관정식을 받아 현밀의 가르침을 수학했다. 22세에 구족계를 받았다. 구족계를 받은 후 1대 달라이 라마가 세운 따시룽보와 1대 달라이 라마가 수계하고 수학한 날탕 등 여러 사원을 방문하여 법문하고, 자신도 매일 엄격하게 수행했다.

1571년에는 당시 중국 북방의 광활한 몽골 고원의 실권을 장악하고 있던 알탄칸(Altan khan)의 요청으로 몽골을 방문했다. 티베트인들의 우려와 힘든 여정을 무릅쓰고 무사히 몽골에 도착하여 열렬한 환영을 받았다. 3대 달라이 라마는 알탄칸을 만나 법을 설하면서 부처님께서 말씀하신 십선업(十善業)의 가르침을 설명하여, 살생과 훔침 등의 악업을 버릴 것을 강조했다. 알탄칸은 법을 설해 주신 그에게 ‘바다’를 의미하는 몽골어 ‘달라이(dalai)’에 스승을 의미하는 티베트어 ‘라마(lama)’를 더해 ‘달라이 라마’란 명호를 바쳤고, 3대 달라이 라마는 알탄칸에게 ‘법왕(法王) 대범천(大梵天)’이라는 칭호를 내렸다.

몽골 방문을 성공적으로 마친 후 달라이 라마는 동부 지역 암도(Amdo)와 캄(Kham) 쪽으로 순례를 나서 많은 승원과 사원을 건립했다. 쫑카빠의 탄생지에 세워진 꿈붐(sKu ‘bum) 등도 방문했다. 다시 중부 티베트로 들어온 달라이 라마는 겔룩빠의 수행자들을 위해 관정(灌頂)과 강설을 베풀었다. 이런 전법 활동의 결과로 중국, 몽골 등 도처에 이름이 알려졌고, 여러 언어로 그 가르침이 번역되었다.

5대 달라이 라마의 유년기에도 안팎의 상황은 그렇게 순탄하지 않았다. 5대 달라이 라마가 태어나기 1년 전 짱(rTsang)의 왕인 까르마 푼촉 남걀(Karma phun tshogs rnam rgyal)이 라싸(lHa sa) 지방에 있는 다수의 겔룩빠 사원을 공격하여 약탈했다. 데붕 승원에서는 학살한 승려들의 피가 산을 붉게 물들였다고 한다. 겔룩빠의 장로들은 자파의 종교 사원을 지키기 위해 몽골의 세 부족에게 도움을 요청했다. 자식들을 겔룩빠의 사원으로 출가시킨 몽골의 족장들은 구시칸(Gu shri khan)에게 평화를 수립하는 임무를 맡겼다.

이에 놀란 짱(rTsang)의 왕은 청해에 있는 촉두몽골에게 도움을 요청했지만, 구시칸이 청해 근처에서 촉두군을 격파하고, 그 우두머리인 알사란을 굴복시켜 군사를 청해에 남긴 채 함께 라싸로 들어가 평화협정을 맺을 것을 종용했다. 이에 감화를 받은 알사란은 구시칸과 함께 라싸로 들어가 5대 달라이 라마를 친견하고 제자가 되기를 발원했다. 거듭되는 촉두군의 위협을 물리친 구시칸에게 달라이 라마는 ‘가르침의 보호자인 불법의 왕’이란 칭호를 주고, 구시칸은 달라이 라마를 끝까지 보호할 것을 약속했다.

1640년 짱 왕은 캄(Kham)을 지배하는 강력한 장군 베리와 연합하여 겔룩빠를 공격할 준비를 세우지만, 그 계획을 안 구시칸의 공격을 받고 퇴각한다. 짱의 왕이 반역죄로 투옥되면서 다시 티베트는 하나로 통일된다. 이를 계기로 달라이 라마는 정치와 종교를 모두 관장하게 되었다. 이를 공고히 하기 위해 5대 달라이 라마는 옛날 토번의 왕궁이 있던 자리에 뽀딸라(Potala) 궁을 건립하고, 라싸의학원을 건립하여 의사를 양성했다. 또 조세제도를 확립하여 교육, 사원, 진료시설, 환경 정비에 사용하였다. 특히 전쟁으로 황폐해진 환경을 보호하기 위해 야생동물의 수렵을 금지했다. 5대 달라이 라마는 집필 활동에도 많은 시간을 할애하여 다수의 저술을 남겼다.

13대 달라이 라마는 한 차례 인도로 망명하는 등 정치적으로 힘든 과정을 겪으면서도 티베트의 근대화에 힘써 많은 티베트인들의 지지를 받았지만, 1933년 58세로 입적했다. 제자들은 여러 가지 단서를 통해 새로운 환생자를 찾기 위해 노력했다. 13대 달라이 라마의 유해를 노블링카(Nor bu rling kha)에 안치했을 때 얼굴이 자꾸 북동쪽으로 돌아간 것, 또 라싸의 남동쪽에 있는 호수에 ‘아(A)’ ‘까(Ka)’ ‘마(Ma)’의 세 글자가 비친 것을 근거로 라싸의 북동쪽과 암도(Amdo)의 ‘아’, 꿈붐(sKu ‘bum)의 ‘까’, 이름 라모(lHa mo)의 ‘마’ 자에서 13대 달라이 라마의 환생자를 찾았다. 환생자는 전통적으로 환생자를 찾는 시험과 네충(gNas chung) 사원의 신탁을 통해 환생자임이 증명되었다.

새로운 14대 달라이 라마에 대한 기대가 컸지만, 티베트를 둘러싼 상황들은 점점 나빠졌다. 어린 달라이 라마가 감당하기 힘든 일들이 계속 진행되고 있었다.

13대 달라이 라마 때부터 계속된 중국의 침입은 여전히 어려운 문제로 남아 있었다.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1951년 티베트정부 대표단이 중국을 방문했지만, 별다른 성과를 얻지 못했다. 오히려 티베트를 중국의 통치하에 두겠다는 일방적인 17개 조항 협약에 서명하라고 압력을 가했다. 중국은 서서히 티베트 영토를 점령하기 시작했고, 티베트를 도와준다는 명목하에 침공 준비를 하나하나 진행하고 있었다. 1957년부터 중국의 티베트 침공이 본격화되었고, 1959년 달라이 라마는 티베트를 떠나 인도로 망명했다.

3. 달라이 라마의 불교 수학

티베트는 인도와 지리적으로 가깝기 때문에 다른 나라에 비해 인도불교와 직접적인 교류가 빈번했다. 따라서 인도의 훌륭한 논사들과 수행자들이 직접 티베트로 들어와 불교를 전할 기회가 많았다. 또 티베트인들 역시 인도로 들어가 불교를 배우고 실천할 기회를 얻기 쉬웠다. 대역경가인 말빠(Marpa, 1012~1099)도 세 차례나 인도로 들어가 스승들의 가르침을 배웠다.

티베트불교는 샨타락씨따(Śantarakṣita)나 까말라쉴라(Kamalaśīla)와 같은 대학승과 빠드마삼바바(Padmasambhava)와 같은 대수행승에 의해 그 기초를 다졌다. 이런 학승들이 전해 준 불교는 교학적으로는 중관학파(中觀學派), 수행적으로는 밀교적인 배경이 있다.

달라이 라마가 불교를 배우고 이해한 것, 그리고 이를 통해 대중에게 법을 설하는 것도 결국 현교와 밀교의 두 가지 전통에 바탕을 두고 있다. 전통적으로 티베트에서는 먼저 현교를 배우고 밀교를 수학하는 방식으로 불교를 배운다. 예를 들면 겔룩빠의 전통에서는 세 학문사원 즉 간덴(dGa’ ldan), 쎄라(Se ra), 데붕(‘Bras spung)에서 현교에 대한 과정을 마친 사람들은 규메(rGyud smrad)와 규뙤(rGyud stod)에서 밀교를 배운다. 달라이 라마의 불교 수학도 이러한 전통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은 것이다.

달라이 라마가 불교를 배우는 과정을 자세하게 소개하고 있는 자료는 그다지 많지 않다. 《나의 조국과 나의 민족》이라는 초기 자서전에서 짧게 언급되고 있는 정도이다. 이 자서전에서는 달라이 라마가 인도로 망명하기 이전 전통적으로 티베트 사원에서 불교를 수학하는 과정을 설명하고 있다.

티베트 사원에서 일반적으로 현교를 수학하는 과정에서는 제일 먼저 배우는 것은 불교논리학이다. 불교논리학을 배우면서 최종적으로 읽는 텍스트는 법칭(法稱)의 《양평석(量評釋)》이다. 그러나 처음부터 까다로운 《양평석(量評釋)》을 읽을 수 없기 때문에 기초 과정에서는 티베트 학자들에 의해 정리된 논리학 입문서인 《뒤라(bsDus grwa)》 《로릭(bLo rigs)》 《딱릭(rTags rigs)》을 배운다. 《뒤라》는 불교논리학의 기초적인 개념을 정리한 교과서이고, 《로릭》은 불교인식론, 《딱릭》은 불교논리학의 입문서에 해당한다. 반야학은 미륵(彌勒)의 저술로 전해지는 《이만오천송반야경(二萬五千頌般若經)》의 주석서인 《현관장엄론(現觀莊嚴論)》을 배우는데, 하리바드라(Haribhadra)의 《명의석(明義釋)》에 대한 티베트 학승의 주석서를 주로 읽으면서 공부한다. 중관학은 월칭(月稱)의 주석서인 《입중론(入中論)》을 읽는데, 이 역시 각 사원에서는 각기 다른 주석서를 통해 공부한다. 아비달마(阿毘達磨)는 《구사론(俱舍論)》의 주석을 읽는다.

이상의 다섯 과목을 공부하는 것에는 불교학을 체계적으로 이해하기 위한 티베트불교의 오랜 전통이 깔려 있다. 티베트불교는 중관귀류논증파(中觀歸謬論證派)의 철학적인 배경에 서 있다. 그러나 귀류논증파를 정확하게 이해하기 위해서는 하위 학파의 철학을 이해하지 않고서는 불가능하다. 유부(有部)의 철학에서부터 유식(唯識), 중관자립논증파(中觀自立論證派)의 철학을 종합적으로 이해하고, 최종적으로 중관귀류논증파의 교학을 이해하는 방식이다. 따라서 《양평석》 《현관장엄론》 《입중론》 《구사론》의 주석에서는 유부, 경량부(經量部), 유식, 중관자립논증파 등 모든 부파의 교학적 관점을 이해할 수 있는 토대를 마련한다.

달라이 라마도 이 다섯 과목에 대한 공부를 체계적으로 진행했다. 일반 승려와 달리 제한된 시간 속에서 교학에 대한 공부를 마쳐야 했다. 가장 많은 시간이 필요한 반야학에 대한 공부를 5대 달라이 라마의 주석을 통해 시작하면서, 불교논리학에 대한 공부를 병행했다. 토론 수업을 위해서는 라싸 근처의 세 학문사원에서 일곱 명의 학자들이 도움을 주었고, 때때로 이 세 학문사원을 방문하여 그곳 스님들과 직접 토론 수업을 진행하기도 했다.

티베트에서 불교 과정을 우수하게 마친 사람에 대해서는 ‘선지식(善知識)’으로 번역되는 ‘게쎄(dGe shes)’의 칭호가 부여된다. 환생자인 라마가 아닌 일반 승려가 얻을 수 있는 가장 영광스런 호칭이다. 최고의 게쎄 학위를 받기 위해서는 정월에 벌어지는 대기원제에서 대중이 보는 앞에서 벌어지는 토론 시험에 참가해야 한다. 현교의 모든 교과과정에 대한 최종적인 시험으로 달라이 라마 역시 이 시험을 치르고 마침내 영광스런 게쎄 학위와 함께 현교 수학을 마무리했다.

4. 달라이 라마의 불교 실천행

 

쫑카빠 (1357-1419)의 소상
달라이 라마의 불교 실천행을 크게 둘로 구분할 수 있다. 하나는 달라이 라마 스스로 불교를 어떻게 실천하는가 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다른 사람들을 불교 실천으로 어떻게 이끌어 주는가 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티베트불교는 대승불교를 지향하고 있고, 대승불교의 기본적인 정신은 자리(自利)와 이타(利他)이기 때문이다. 자리와 이타 역시 글자처럼 명확하게 구분되는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자리는 이타를 원만하게 실천하기 위한 자리이고, 이타도 결국에는 자리로 회향되기 때문이다.

자리와 이타의 보살행을 완성하기 위해 달라이 라마는 많은 사람들에게 부처님의 가르침을 전하는 활동을 쉬지 않는다. 달라이 라마는 다양한 활동에 참여하지만, 가장 중심이 되는 것은 전법 활동이다. 달라이 라마는 불자들과 만나 부처님의 법에 대해 토론하고 대화하는 것을 좋아한다. 남방불교의 불자든, 러시아나 몽골의 불자든, 불교에 관심을 가지기 시작한 유럽이나 미국의 불자 든 다양한 불자들을 만난다. 때로는 찾아가기도 하고, 때로는 방문을 받기도 한다. 달라이 라마는 늘 자신을 ‘평범한 한 사람의 비구’라고 소개한다. ‘성(聖)’ ‘법왕(法王)’ ‘활불(活佛)’ 등의 수식어가 붙는 ‘달라이 라마’가 아니라, 평범한 티베트의 출가인으로 사람들과 만나 대화하기를 좋아한다. 평범한 한 사람의 출가인으로서 불교를 실천해 가는 수행자가 가장 의미가 있다는 것이다.

달라이 라마는 겔룩빠라는 티베트의 종파를 이끄는 라마이다. 겔룩빠는 쫑카빠(Tshong kha pa)에 의해 창종된 종파이고, 티베트에서 가장 늦은 시기에 형성된 종파이다. 그러나 가장 큰 세력으로 성장하여 지금은 티베트를 대표하는 종파가 되었다. 쫑카파는 1대 달라이 라마의 스승이기 때문에 쫑카빠의 불교가 곧 달라이 라마의 불교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쫑카빠가 세운 겔룩빠는 신까담빠(dKa’ dam pa)라고 하는 것처럼, 겔룩빠는 까담빠의 전통을 계승한다. 까담빠는 아띠샤(Atiśa)의 제자들에 의해 형성된 종파로서, 이 종파의 근본 가르침은 아띠샤가 티베트인들을 위해 강설한 《보리도등론(菩提道燈論)》을 근거로 한다. 《보리도등론》에서는 사람을 작은 사람, 중간 사람, 큰 사람의 세 사람으로 나누어 세 사람이 수행하는 것을 통해 현교교학을 구분한다.

이와 같이 세 사람이 깨달음의 길을 밟아가는 과정은 그대로 쫑카빠의 주저인 《보리도차제광론(菩提道次第廣論)》(이하 《광론》으로 약칭함)으로 계승되고, 이 《광론》에서 자세하게 ‘세 사람의 도차제(道次第, Lam rim)’가 완성된다. 《광론》에서 설명하는 도차제의 가르침이 겔룩빠의 핵심적인 가르침이기 때문에 달라이 라마의 불교 실천행도 역시 이 《광론》을 바탕으로 함을 알 수 있다.

《광론》은 분량이 광대하기 때문에 읽기가 쉽지 않다. 쫑카빠는 말년에 《광론》을 간추린 《보리도차제약론(菩提道次第略論)》(이하 《약론》으로 약칭함)을 저술했다. 《광론》과 《약론》의 핵심을 모아 짧은 게송으로 도차제의 핵심을 정리한 것이 《도의 세 가지 핵심》이다. 이상의 세 저술에서 핵심적인 가르침은 결국 보리심(菩提心)과 빈 것 즉, 공(空)이다. 이것이 대승불교의 핵심이고, 이것 없이는 대승불교가 성립할 수 없다. 그렇기 때문에 이 두 가지 주제는 달라이 라마의 불교 실천행의 핵심이다. 달라이 라마 자신도 이것을 중심으로 불교를 배웠고, 이것을 중심으로 대중들에게 법을 설한다. 달라이 라마가 《광론》 등의 법문에서 보리심과 빈 것의 의미를 간추리면 다음과 같다.

1) 보리심(菩提心)

보리심은 대승으로 들어가는 유일한 문이다. 왜냐하면 ‘일체중생을 구하기 위해 부처님의 깨달음을 구하겠습니다’라는 보리심이 없으면 완전한 깨달음을 성취할 수 없기 때문이다.

보리심을 일으키기 위해서는 먼저 평등심(平等心)을 키워야 한다. 평등심이 없으면 친구나 친척에 대해서는 애착하는 마음, 적에 대해서는 미워하는 마음이 생기기 때문에 보리심을 일으킬 수 없다. 일체중생은 행복을 누리고, 고통을 피하고 싶어한다는 점에서 나와 남이 똑같기 때문이다.

일체중생을 염두에 두는 보리심을 일으키기 위해서는 일체중생이 나와 관련이 없다는 마음을 버려야 한다. 우리는 과거 무수한 세월을 윤회해 왔고, 세세생생 윤회하는 동안 나를 낳아 주고 길러 준 어머니가 있다. 이 어머니는 셀 수 없을 정도로 많다. 따라서 전생에 어머니였던 적이 없는 중생은 단 한 사람도 없다고 생각해야 한다.

현생의 어머니뿐만 아니라 전생의 어머니도 힘든 고통을 겪으면서 낳아 기르고, 모든 더러움을 씻어주고, 필요한 모든 것을 구해 입히고 먹고, 두 발로 설 수 있을 때까지 나를 보호했다고 생각한다. 현생의 어머니뿐만 아니라 불쾌하고 보기 싫은 짐승이나 벌레까지도 전생에는 나의 소중한 부모로서 나를 낳아 주고 길러 주었다고 생각해야 한다.

은혜에 대해 떠올릴 수 있으면 은혜에 대해 보답해야 한다고 생각해야 한다. 은혜에 대한 명상이 마음 깊은 곳에서 우러나면 은혜에 대해 보답은 자연스럽게 일어난다.

일체중생이 전생의 어머니라고 생각할 수 있으면 ‘이 일체중생이 행복했으면 얼마나 좋을까’ 하는 자애심(慈愛心)을 일으킬 수 있다. 자애심이 크면 클수록 그 중생들이 고통에서 해방되고 행복을 누려야 한다는 열망이 더욱 강해진다.

자애심을 일으킬 수 있으면 ‘일체중생이 고통에서 벗어났으면 얼마나 좋을까’ 하는 비민심(悲愍心)이 생긴다. 비민심을 명상할 때에는 일체중생이 고통을 받는 방식을 떠올린다. 비민심을 강하게 일으키기 위해서는 적극적으로 고통을 관찰해야 한다. 예를 들면 도살장에 끌려가는 짐승들을 생생하고 분명하게 떠올리고, 그와 같은 상황에 놓인 축생들의 고통을 떠올려 생각해야 한다.

자애와 비민의 수행은 단지 생각으로만 그쳐서는 안 된다. 실제 중생들의 고통을 덜고, 행복을 주는 일에 직접 내가 나서겠다는 진정한 의지가 발현되어야 한다. 이것이 수승한 마음[增上心]이다. 수승한 마음은 비민의 마음이 클수록 그 마음도 크다,

수승한 마음이 있으면 자애와 비민을 바탕으로 마음속 깊은 곳에서 일체중생을 위해 완전한 깨달음을 성취하겠다는 열망이 자연스럽게 생긴다. 이것이 보리심이다.

2) 빈 것[空]

빈 것은 없는 것이 아니라, 실체가 없는 것이고, 자아가 없는 것이다. 이것이 무아(無我)이다. 티베트불교에서는 중관학파의 견해를 근거로 무아를 설명한다. 무아에는 사람[人]의 무아와 현상[法]의 무아, 두 가지가 있다. 사람은 우리와 같이 육도를 윤회하는 중생을 가리키고, 현상은 사람의 안팎에 존재하는 정신적, 육체적인 요소들을 의미한다.

유부와 경량부는 사람의 무아만을 설명할 뿐 현상의 무아를 설명하지 않는다. 그러나 중관학파와 유식학파는 사람과 현상이 모두 무아라는 것을 인정한다. 무아를 사람의 무아만으로 설명할 경우에는 장애와 번뇌를 완전히 제거할 수 없다고 설명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사람의 무아를 깨닫는 것만으로는 고통에서 완전히 벗어날 수 없다고 한다.

티베트불교는 중관학파 중에서 귀류논증파의 견해를 따른다. 귀류논증파에서 빈 것은 내재하는 실체가 빈 것이다. 이것은 아무것도 없는 것이 아니다. 대신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것처럼 사물에 내재하는 실체가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존재하는가. 연기하는 방식으로 존재한다. 연기하는 것도 개념적인 명칭으로 연기하는 것이다.

연기하기 때문에 색, 소리, 산, 집과 같은 것은 존재한다. 우리가 손으로 가리킬 수 있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이것들은 우리가 인식하는 방식으로 존재하지 않는다. 일반적으로 현상은 우리에게 자상(自相)으로 존재하는 것처럼 나타난다. 그러나 귀류논증파에서는 현상은 자상으로 절대 존재할 수 없다고 한다. 현상은 단지 세속적인 이름으로 존재한다. 만약 현상이 현현하는 방식으로 존재한다면 우리가 찾을 수 있어야 한다. 그러나 아무리 현상을 분석하고 찾아도 현상의 본질을 찾을 수 없다. 그렇기 때문에 현상은 자성으로 존재하지 않고, 자상으로 존재하지 않는다. 빈 것이다.

현상이 본질적으로 존재하지 않지만, 이름과 생각에 의해 명명되는 것처럼, 인과 연에 의존한다는 것을 인식할 수 있을 때, 현상이 독립적으로 존재한다는 오해를 없애고서 올바른 길로 나아갈 수 있다.      

5. 달라이 라마의 사회적 실천

달라이 라마의 홈페이지에는 불교의 전법 활동 외에도 전쟁, 환경, 종교 간의 화합을 위해 애쓰는 달라이 라마의 활동을 알 수 있는 내용들이 정리되어 있다. 중생세간(衆生世間)과 그 중생들이 살아가는 기세간(器世間)은 결코 분리될 수 없어 기세간이 편안하면 그 세간에 사는 중생들이 편안할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달라이 라마는 일체중생을 염두에 둔 자비심을 바탕으로 중생들의 안락과 중생들의 괴로움을 조금이라도 없애기 위해 애쓴다. 

1) 정치

최근 망명정부 총리로 선출된 롭상 상계
달라이 라마는 티베트를 통치하는 실제적인 통치권자의 자격을 가지고 있었다. 얼마 전 달라이 라마는 자신에게 부여된 정치적인 권한을 모두 후계자에게 이양하고 한 사람의 수행자로 돌아갔다. 수행자이면서 티베트의 실질적인 통치자였기 때문에 달라이 라마에게 정치적인 문제는 수행 문제만큼이나 중요했다. 더구나 나라를 잃은 망명정부를 이끌면서 티베트인들에게는 희망을 잃지 않게 격려하면서, 스스로 희망을 찾기 위해 끊임없이 노력했다.

불교에서 전륜성왕(轉輪聖王)과 부처님은 비슷한 덕상을 가진 존재로 묘사된다. 석가모니 부처님도 만약 출가하여 수행하지 않았으면 전륜성왕이 되었을 것이라고 한다. 전륜성왕은 ‘법다운 정치’를 구현하는 왕이다. 티베트인들은 전륜성왕을 희구했기 때문에 가장 훌륭한 분인 위대한 라마가 전륜성왕이 되어 나라를 통치해 줄 것을 염원했다.

그러나 티베트 역사서는 정치권력화된 종교 집단에 의해 자행된 만행을 설명하고 있다. 달라이 라마는 지금도 남아 있는 종파 간의 갈등, 지역 간의 갈등 등 티베트 사회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민주적인 절차에 의해 선출된 대표자에 의해 티베트가 유지되고 발전되는 것이 가장 타당할 것으로 생각했다.

1963년 달라이 라마는 자유티베트를 위한 민주화헌법을 선언한다. 망명정부를 행정부, 입법부, 사법부의 세 부분으로 구성하여 티베트의 개혁과 현대화를 모색했다. 1990년에는 자유선거를 통해 46명의 국회의원을 선출했다. 1992년에는 티베트가 독립하면 모든 권한을 버리고 평범한 시민으로 살겠다는 정책을 선언한다. 2011년 달라이 라마는 마침내 모든 정치적인 권한을 이양하고 한 사람의 완전한 수행자로 돌아왔다.

2) 전쟁

중국이 티베트를 점령하는 과정에서 당시 티베트 인구의 6분의 1이 사망하는 비참한 경험을 한다. 그 이후 진행된 탄압에서도 많은 사람이 희생되거나 구속되고, 사원이 파괴되었다. 외적인 파괴뿐만 아니라 종교적인 자유가 억압되고, 문화와 역사, 언어를 배우고 사용하는 데 제약이 가해지는 힘든 과정을 겪어 왔다. 이런 점에서 달라이 라마는 전쟁이 얼마나 비참한지, 전쟁의 결과가 얼마나 참담한지 잘 알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달라이 라마는 전쟁을 막아야 하고, 전쟁을 막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전쟁의 고통은 말로 표현할 수 없을 정도로 크다. 이전 세기의 전쟁과 현대의 전쟁은 전개되는 양상이 다르다. 짧은 시간에 광범위한 지역에서 진행된다. 더 많은 인명이 살상되고, 더 많은 환경이 파괴된다. 이런 비참한 전쟁은 일시에 발생하지 않는다. 여러 가지 원인과 조건이 모여 성숙될 때 일어난다.

그 원인 중에 가장 근본적인 원인은 바깥에 있는 것이 아니라 마음속에 있는 분노와 증오이다. 분노와 증오는 마음이 만들어낸다. 마음이 만들어 내기 때문에 마음으로 치료할 수 있다. 상대를 용서하고 이해하고, 나아가 상대에 대해 연민의 마음을 일으킬 수 있을 때 극복된다. 그렇기 때문에 달라이 라마는 이렇게 말한다. “우리에게 자비심과 인내의 미덕을 실천하도록 가리키는 사람은 바로 우리의 적이다.”

적은 우리가 미워해야 할 대상이 아니라, 우리의 스승이다. 특히 인내의 미덕을 실천할 수 있는 기회를 주는 적이 없으면 인내의 미덕을 키울 기회를 얻지 못한다. 그러나 우리는 대부분 기회를 아무런 의미 없는 것으로 만들어 버린다.  

3) 환경

티베트 사람들에게 자연은 뭇 중생이 살아가는 터전이기 때문에 파괴하거나 정복할 대상이 아니었다. 그러나 중국은 침략전쟁을 수행하는 과정에서 대규모 도로를 건설했고, 티베트의 엄청난 산림자원과 지하자원을 마구잡이로 개발했다. 수백 년 된 나무들이 잘려나가고, 신성한 산들이 파헤쳐지고, 강물이 막히고, 길이 뚫렸다.

티베트의 환경파괴는 티베트만의 문제로 그치지 않았다. 티베트고원에서 일어난 모래바람은 북경을 뒤덮고, 한반도뿐만 아니라 멀리 일본까지 날아간다. 히말라야 설산에서 발원해서 흘러가는 물이 공업용수나 발전용수로 바뀌면서 인도, 파키스탄 등 주변국들에 물 부족 문제를 일으키기도 한다. 자연환경은 파괴하는 데에는 순간이지만 이를 복구하는 데에는 오랜 시간과 노력이 필요하다. 그렇지만 환경을 지키고 보존해야 하는 이유는 당연하다고 달라이 라마는 말한다.

환경은 지금 세대나 미래 세대 모두에게 똑같이 중요하다. 우리가 환경을 심하게 파괴하여 현재 고통받는 것처럼 미래세대도 우리의 고통을 물려받게 될 것이다.

불교인들에게, 특히 윤회하는 삶을 확신하고 있는 티베트인들에게 이 지구는 일회적으로 살고 갈 곳이 아니라, 다시 살아갈 땅이기 때문에 이 땅이 중요할 수밖에 없다. 다음 세대가 바로 나이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할 수 있는 만큼 자연을 보호하고 지키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4) 종교 간의 화합

지금 이 순간에도 세계 곳곳에서 분쟁과 다툼이 일어나고 있다. 그런 다툼 중에서 가장 치열한 다툼은 종교적인 대립에서 야기되는 다툼이다. 왜냐하면 종교는 신념을 바탕으로 하기 때문이다. 굳건하게 신념을 믿고 의지하는 한 그 다툼은 그치지 않는다. 달라이 라마는 종교인이고, 이런 종교적인 속성을 잘 이해하고 있기 때문에 종교 간의 대립과 충돌이 야기하는 결과에 대해서도 잘 알고 있다.

달라이 라마는 종교 간의 화합하는 방식을 인도의 예를 들어 자주 설명한다. 부처님 당시에도 여러 종교와 철학이 혼재해 있어 교리적인 논쟁은 있었지만, 종교 간의 다툼과 분쟁은 없었다. 불교를 신앙하는 사람일지라도 다른 종교의 수행자들을 존경하고, 공경하고, 공양했다. 지금도 인도에는 힌두교, 불교, 기독교, 모슬렘, 시크교 등 여러 종교의 전통이 존속하고, 종교의 전통을 따르는 사람들이 있지만, 정치적인 분쟁 외에 종교적인 대립은 그다지 많지 않다.

달라이 라마는 종교 간의 화합을 이루기 위해서는 서로 간의 이해가 선결되어야 한다고 지적한다. 이런 점에서 종교의 보편성과 특수성 중에서 일단 특수성에 대한 부분을 미뤄두고 보편성의 부분에서 서로 이해하는 장을 넓혀야 한다고 주장한다.

당신은 다른 종교를 존중해야 한다. 모든 종교의 근본은 동일하다. 동포애에 대한 진정한 자각, 선량한 양심, 서로에 대한 존경 등을 추구하는 것이다. 만약 우리 내면으로부터 이러한 본성을 키울 수 있다면, 우리는 진정한 평화를 실현할 수 있을 것이다.

일차적으로 보편적인 측면에서 종교에 대한 이해뿐만 아니라 특수한 측면에서 종교의 가치와 가능성을 발견하면 그 종교의 의미를 찾을 수 있고, 그 의미를 발견하면 그 종교가 존재하는 이유를 알 수 있다.
이런 점에서 달라이 라마는 여러 종교의 지도자들과 만나는 것을 주저하지 않는다. 인도에서도 힌두교 등 여러 종교의 의식에 함께 참여하여 기도하는 모습을 자연스럽게 볼 수 있고, 일본의 신도 사원을 방문하기도 하고, 아메리카인디언들의 종교의식에도 아무런 거리낌 없이 참석하기도 한다. 이것은 상대의 종교와 문화를 존중하는 자연스러운 생각에서 나오는 행동이다.      

6. 나오는 말

티베트 사람들은 달라이 라마를 관세음보살의 화신으로 생각한다. 관세음보살의 화신이기 때문에 그분이 사는 곳을 뽀딸라(Potala)라고 부른다. 지금도 라싸에 사는 사람이든, 라싸에 순례차 온 사람이든 모두 뽀딸라를 참배하거나, 뽀딸라를 중심으로 순례를 시작한다. 그곳에는 역대 달라이 라마의 영탑이 모셔져 있기 때문에 신앙의 대상이고, 귀의의 대상이기 때문이다.

달라이 라마가 정치적인 권한을 가지고 있든 없든, 티베트 사람들에게 달라이 라마는 특별한 존재로 남을 것이다. 왜냐하면 달라이 라마는 자신들의 스승이고, 스승 중에서도 근본 스승이기 때문이다. 티베트 사람들에게는 특별한 성이 없다. 대신 라마의 이름이 성을 대신한다. 스승을 중심으로 한 가족이기 때문이다.
달라이 라마는 스스로 아무런 힘이 없는 평범한 비구라고 한다. 그러나 이 말을 그대로 믿는 티베트 사람은 아무도 없다. 새로운 환생자를 인정할 때나, 환생자를 찾기 위한 귀중한 정보를 준다거나, 잊혔던 환생자를 우연히 찾아내거나, 열반할 노스님을 미리 알고 축복한다거나, 정신이 온전하지 않은 외국인을 법회 끝에 다시 찾아가 축복해 주는 것 때문에 달라이 라마를 특별한 능력이 있다고 생각할 수 있겠지만, 이런 것 때문만은 아닐 것이다.

달라이 라마는 법을 추구하는 스승이고, 법으로 이끌어 주는 스승이고, 법에 대해 확신을 보여주는 스승이다. 선사들처럼 짧고 간결한 언어로 정신이 번쩍 들게 하는 것은 아니지만, 몇 시간이고 법상에 앉아서 쉼 없는 말씀으로 법을 설하는 방식으로, 때로는 유머러스하게, 때로는 확신에 찬 목소리로, 때로는 울음 섞인 목소리로 한결같이 법을 설하기 때문에 사람들은 그를 스승으로 받들고 존경한다. 그의 말씀에서 법에 대한 확신을 느낄 수 있고, 그의 행동에서 진실을 보기 때문이다. 그래서 근본 스승은 오직 한 분밖에 없다. ■ 

 

양승규 
동국대학교 강사. 1964년 경남 진해 출생. 동국대 불교학과와 대학원 졸업(석사, 박사). 인도 다람살라에서 티베트불교를 공부했다. 역서로 《티베트금강경》 《보리도차제약론》 《도의 세 가지 핵심》 《싸꺄빤디따의 명상록》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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