담마사회주의의 이상과 현실

1. 들어가며

태국의 불교개혁운동은 1932년 입헌혁명 이래 승가 내부에서 마하니까이(Mahanikai) 승려들에 의해 승가법 개정을 중심으로 전개되는 한편 승가 외부에서는 개인 승려 차원에서 다양하게 전개되었다.

개인 승려 중심의 불교개혁운동의 발생과 전개 배경에는 1960년대부터 시작된 급격한 공업화, 도시화에 따른 사회 환경의 변화에 대응하지 못하는 기존불교의 정체, 승가 내 종파 간의 갈등과 승위(僧位)를 둘러싼 투쟁, 중앙집권적인 승가 조직의 보수적 체질 등을 들 수 있다. 이 외에도 정치·사회적 변동에 따라 도시(특히 방콕) 신흥 중산층이 증가함에 따라 이들의 요구에 부합하는 새로운 불교개혁운동의 필요성이 대두되었다. 더불어 1970년대 중반 이후 민주화운동이 전개되면서 종교적 일원화(一元化)에 대한 반발도 주요한 배경이 되고 있다.

풋타탁
이러한 불교개혁운동에 앞장선 대표적인 인물이 풋타탓(Budd-hadasa: 1906~1993)이다. 풋타탓은 1906년 태국 남부 차이야(Ch-aiya)에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는 중국인 2세로 상인이었으며 어머니는 태국인이었다. 20세에 출가한 그는 방콕의 번잡성과 승가의 부패에 좌절한 후 산림에 거주하면서 불경을 탐구하는 것이 법(dhamma)의 실천에 더욱 도움이 될 것이라고 판단했다. 그래서 1932년경 교단과 속세에서 멀리 떨어진 차이야의 한 산림에 쑤원목(Suan Mokkh, ‘garden of release’) 사원을 설립했다.

산림 거주 수도승 아란야와씨(Aranyavasi)를 연상하게 하는 장소 선택과 관련하여 풋타탓은 “법을 실습하는 장소는 매우 중요하다. 그 이유는 우리가 자연으로부터 직접 배울 수 있기 때문이다.”라고 언급했다. 산림 속에서 명상수련과 경전 연구에 열중한 그는 단순히 수도승으로만 머물러 있지 않았다. 강연과 저술 활동 등을 통해 법을 대중화하기 위해 노력하였으며 아란야와씨 전통과 촌락 거주 수도승인 캄마와씨(Gamavasi) 전통을 성공적으로 결합시켰다. 1993년 풋타탓이 세상을 떠나자 그의 장례는 국장으로 행해졌으며 아직도 그의 카리스마는 많은 승려들과 재가신도들에게 깊게 각인되어 있다.

풋타탓은 현대 태국이 낳은 가장 저명한 불교 사상가 중 한 명이라고 말할 수 있다. 풋타탓의 산림 은신처인 쑤원목은 전통적 불교의 재해석을 지지하는 사람들과 중산층, 전문가 집단, 지식인들에게 많은 관심을 이끌어내며 명상의 중심지가 되었다. 또한 그는 합리적인 교리해석으로 승가의 모든 종파로부터 지지를 받았다. 어떤 누구도 그를 직접적으로 공격하지 못했고 그의 카리스마에 도전하지 못했다.
이 글의 목적은 풋타탓의 불교개혁 사상의 뿌리와 그 내용적 특징과 의의를 살펴보는 데 두고 있다.

2. 불교개혁 사상의 뿌리: 몽꿋 왕의 탐마윳 운동

1926년 마하니까이로부터 계를 받은 풋타탓은 1930년대 중반 이후 독특하고 개혁적인 방법으로 불교교리를 재해석했다. 그는 몽꿋 왕(Rama 4세, 1851~1868년)과 와치라얀(Wachirayan) 왕자의 종교개혁 이성주의로부터 영향을 받았다. 그는 마하니까이에 속해 있으면서도 탐마윳니까이 승려들로부터도 지지를 받았는데 그 이유는 그의 개혁적 사고가 몽꿋 왕으로부터 시작되어 와치라얀이 계승한 합리적 지적 전통을 계승했기 때문이다.

몽꿋 왕
몽꿋 왕은 19C 전반에 걸쳐 태국의 근대화 과정에서 가장 중요한 종교개혁자였다. 그는 라마 1세와 같이 본래의 불교 관습과 전통에 따른 불교의 복원을 종교개혁의 목표로 삼았다. 하지만 라마 1세가 개혁의 모델로 설정한 것은 아유타야 왕조(Ayutthaya, 1350~1767)의 불교전통이었던 데 비해 그는 그보다 역사적으로 훨씬 오래된 몬(Mon) 불교의 전통을 따르고자 했다.

몽꿋 왕은 왕위에 오르기 전 27년간 승려생활을 하면서 발리어 경전의 연구에 심취했으며 불교경전과 태국 승려들의 실제 관습 사이에 상이점을 발견하게 되었다. 그는 몬의 사원 관습이 본래의 불교 관습과 가깝다는 사실을 알게 된 후 자신과 유사한 신념을 가진 승려들을 모아서 기존의 태국불교 종파인 마하니까이(Mahanikai)와 다른 새로운 종파인 탐마윳니까이(Thammayut)를 만들어 불교 개혁운동을 전개하게 되었는데 이 운동을 탐마윳 운동이라고 한다. 몽꿋이 주도한 탐마윳 운동의 주요 내용은 경전주의(經典主義), 주지주의(主知主義), 합리주의(合理主義)를 특징으로 한다.

첫째, 당시의 삼장(三臧) 모음집은 불완전하였기 때문에 몽꿋은 올바른 불교교리의 이해를 위하여 본래의 불교경전에 충실할 것을 강조하여 순수 발리어 경전 복원에 심혈을 기울였다. 그는 1840년과 1843년에 실론으로부터 삼장을 수입해 왔으며 발리어 작품 인쇄를 위한 인쇄소를 만들기도 했다.

둘째, 몽꿋의 개혁주의는 순수 불교경전에 충실하게 됨으로써 소위 청교도적 주지주의(purinical intellectualism)를 강조하게 되었으며 사실 무근의 신화, 환상적 우주론, 미신적 믿음 등에 적대적이었다. 몽꿋은 미신이나 의례적관습만을 비난한 것이 아니었다. 《차독(Jataka, 본생담)》과 같은 출처가 의심스러운 전설적인 경전을 거부하는 데 주저하지 않았고 어린이나 대중의 계몽을 위한 우화도 거부했다. 그는 부처의 초자연적인 힘의 자질을 모든 사람이 타고난 능력의 발전으로 설명했다. 부처나 성인들의 생애에 발생한 신비한 사건들도 똑같이 우화로 여겼으며 인간적인 척도로 평가했다. 뿐만 아니라 불교에 삽입된 전통적인 믿음과 관습들을 거부했으며 전통적인 불교적 우주론도 거부했다. 그의 불교적 우주론은 그가 서양인과의 접촉에서 습득했던 과학적 견해나 경험적인 지식과 일치하는 것이었다.

셋째, 몽꿋은 서구 사상의 영향을 받아 불교의 합리주의를 강조했다. 그는 서구 사상의 영향을 받은 최초의 태국인 중 한 명이었다. 이 덕분에 태국의 불교가 얼마나 비합리적인가를 깨달아 그가 추진해 왔던 개혁의 합리적인 성격을 강조하게 되었으며 종교 정화의 필요성을 느끼고 법과 근대과학을 조화시키려 노력했다.
한편 서구사상의 영향을 받은 몽꿋의 불교는 주지주의와 합리주의를 강조했음에도 불구하고 전통적인 우주론적 개념들을 완전히 포기하지는 않았다. 그는 비경험적인 자연현상의 설명을 비난하면서도 여전히 윤리적 가르침−업, 공덕, 윤회−은 유효하다고 주장했다. 또한 몽꿋은 본래의 순수한 불교를 악용했던 브라만적이고 미신적인 요소들에 대하여 강력히 반대했으나 동시에 왕실 의식에 참여했을 뿐 아니라 그의 선대 왕들이 무시했던 브라만적인 의식들을 재제정하는 등의 모순을 범하기도 했다.

3. 불교개혁운동과 풋타탓의 사상

미완으로 끝난 몽꿋 왕의 불교개혁운동은 1932년 입헌혁명 후 전개된 승가 내부의 권위주의 타파를 시작으로 하여 20세기 후반에 들어서는 몇몇 개혁주의 불교 승려들의 불교교리 재해석 운동으로 발전하였다. 개혁주의 승려들은 주로 태국의 경제, 사회적 변화에 의해 발생한 중산층이나 전문직 종사계층의 정치적 열망과 경제적 이해를 반영하여 불교의 교리와 관습을 재해석하고 새로운 종교적, 정치적 정당성을 개발하고자 했다. 이런 개혁주의 승려들 중 한 명이 풋타탓이다.

개혁주의 불교는 미신적이며 형이상학적인 교리해석과 전통적 불교관습의 기반을 이루는 업(業, kamma)사상을 거부하고 종교적 자유와 암묵적으로는 정치적 자유를 획득하고자 하는 개인적 능력을 강조하는 합리주의적, 탈신화적(demythologised) 교리해석을 지지하며 개인 구원과 개인의 명상을 통한 열반(nibbana)에의 도달을 핵심 사상으로 삼고 있다. 전통적으로 열반은 소수의 승려들만이 성취할 수 있는 정신적인 목표로 여겨져 왔다.

개혁주의 불교의 개인 구원과 열반의 핵심 사상은 승가의 지지를 통할 때만 재가신도들이 정신적 고양을 이룰 수 있다는 전통적 교리해석을 거부했다. 이와 함께 승가 자체를 거부하지는 않았으나 승가의 중앙집권적 권력구조 및 국가의 승가 통제 그리고 승가와 권위주의 정치권력 간의 밀착 관계를 비난했으며 개혁주의 불교와 참여민주주의 정당성과의 이론적 연계성을 모색하게 되었다.

전통주의적 불교에서 정치체제 구성원은 전생의 부도덕한 행동의 결과인 업에 따라 개인적 고통과 정치적 권리의 박탈을 인정하는 정신적, 정치적 운명의 객체로 규정 지워지며 국가적 연대감, 중앙집권적 정치구조에 대한 충성과 같은 집단적 가치들이 강조되었다. 반면에 개혁주의 불교는 개인을 사회적, 정치적 환경뿐 아니라 정신적 조건을 결정짓는 데 중심적인 역할을 담당하는 것으로 여기며 개인적 구원과 개인의 정치적 권리를 이론적 중심으로 삼음으로써 총체적 가치나 권위주의를 지지하고 개인적 자유를 거부하는 전통적 정치구조를 비난한다.

풋타탓은 현세의 운명이 과거의 공덕(merit)과 악덕(demerit)으로 정해져 있다는 업 결정론(determinism)보다는 현세에서 자기 수양을 통해 결정된다는 공덕 쌓기 개념(tambun concept)에 비중을 두고 이런 개념을 현세의 행동을 포함하여 재해석하였다. 그는 “열반은 윤회 속에 있으며(in samsara exists nibbana) 승려들만의 것이 아니라 누구나 획득할 수 있다.”라고 했다. 재가신도들에게 불교신앙을 강조하면서 불교의 궁극적인 목표를 달성하려면 출가해야만 한다는 기존 불교의 개념을 정면으로 반박한 것이다. 그는 깨달음은 엄격한 수행 형식이나 힘든 명상 프로그램을 통해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니라 간단하면서 행하기 쉬운 내부명상(Vipassana)으로부터 얻어질 수 있다고 했다. 열반은 인간이 속세의 경험으로 더럽혀지기 이전의 인간의 본성 즉 비집착의 상태를 되찾음으로써 도달할 수 있는 것이며 지옥이나 천당, 윤회전생 등의 믿음은 모두 인간의 마음에서 비롯되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1932년 입헌혁명 후 불교개혁운동의 주요 초점은 승가 내부와 사회민주화로 옮겨 갔다. 이 과정에서 탐마윳니까이는 본질적으로 왕실 주도의 개혁이 갖는 한계성을 극복하지 못하고 운동의 주도권을 마하니까이에게 넘겨주게 되었다.

마하니까이의 개혁운동은 본질적으로 국가의 승가 지배에 대한 반발적 성격을 띠는 것으로, 승가와 세속적 권력의 중앙집권적 권위주의를 타파하는 데 목표를 두었다. 몽꿋 왕의 후원하에 만들어진 탐마윳니까이는 라마 5세 때인 1881년에 태국 승가 내의 독립된 종파로서 법적, 행정적 지위를 인정받아 영향력을 크게 확대한 이후 점차 권위주의화 되어 갔다. 이 때문에 마하니까이부터 많은 불만을 사게 되었다.

풋타탓은 승가의 중앙집권체제를 해체해야 하고 젊은 승려들에게도 종교 행정에 대한 참여를 확대해야 한다고 주장하면서 마하니까이의 주장에 동조했다. 하지만 쑤원목에 거주하면서 탐마윳니까이가 지배하는 승가 행정에 관해서는 간여치 않음으로써 승가와 갈등을 피했다.

풋타탓은 개인적인 정치 참여를 회피했지만 민주주의를 지지하는 정치세력들과 접촉을 계속하였고 정치 관련 글을 쓰는 등 정치에 꾸준히 관심을 표명했다. 그는 진보적 정치인 쁘리디 파놈용(Pridi Panomyong)이나 변호사 싼야 탐마싹(Sanya Thammasak), 진보적 작가이며 비평가인 꿀랍 싸이쁘라딧(Kulaap Saipradit)과 관계를 맺고 있었다.

정치적인 면에서 풋타탓은 한 국가의 지도자는 ‘선한 사람(good men)’이어야 하고 지도자가 그의 정당성을 얻기 위해서는 높은 도덕적 신념을 지녀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그는 지도자상은 언급하면서도 바람직한 정치체제와 지도자를 선택하는 방법에 대해서는 뚜렷이 언급하지 않았다. 때때로 그는 ‘선한 사람’이란 철학적인 왕이라고 주장하기도 하고 선거를 통해 민주주의를 실행하는 지도자라고도 주장하였다. 사실상 풋타탓은 한편으로는 중앙집권적인 정치체제를 지지했지만 또 다른 한편으로는 민주주의 체제를 지지했다고 볼 수 있다. 그럼에도, 그의 지적인 냉혹함은 중산층의 불교 혁명에 대한 이론적 정당성과 젊은 개혁승려들의 개혁 추진 정당성을 제공하게 된다.

파이싼(Phaisaan Wisaalai)은 풋타탓의 정치적 이념 성향을 잘 분석한 학자 중 한 명이다. 그는 풋타탓은 불교의 왕권 개념에 따른 열 가지의 법(十法, dasarajadhamma)을 강조하고 있다고 주장했다. 파이싼의 주장에 따르면 풋타탓은 전통적이고 실용적인 불교 접근법에 따라 정치체제의 이상형을 제시한 것이다. 정치지도자가 도덕적이라면 정치체제가 자치적이고 민주적이든 아니면 중앙집권적이고 권위적이든 간에 상관없다는 것이다. 그러나 파이싼은 이 같은 전통적인 불교적 지도자의 모델은 다양한 집단들에 권력이 분산된 근대 태국 사회에서는 더 이상 효력이 없다고 주장한다. 파이싼은 현재 불교는 올바르고 도덕적인 지도자가 중재하는 전통적 집단적 복지를 강조하는 것과는 대조적으로 개인의 복지와 도덕성의 중요성을 강조해야 한다고 했다. 파이싼은 풋타탓이 집단성과 강력한 도덕적 지도자 개념을 중시했으나 사회 각 구성원의 도덕적, 지적 능력 개발에 대해 소홀히 했다고 주장했다.

4. 대안적 정치체제: 담마사회주의

풋타탓은 기존 정치체제를 대체할 수 있는 대안적 정치체제로 담마사회주의(Dhammic Socialism)를 제시했다. 담마사회주의라는 용어는 1960년대 말 동남아 지역에서 민주주의와 공산주의의 정치적 대치가 진행되는 가운데 그가 만들어 낸 용어다. 1960년대 태국은 베트남 전쟁의 늪에 빠져들었다. 그 기간 중 공산반군과 미국의 지지를 받는 우익 군사정권 사이에 무력대결이 점증했으며 승려들은 정치적 침묵을 강요당했다. 이때부터 풋타탓은 본격적으로 담마사회주의를 언급하기 시작했다. 풋타탓은 이미 1940년대부터 민주주의와 태국의 정부형태에 관한 토론을 하기도 했지만 1960년대에 들어서는 직접적으로 불교는 기본적으로 사회주의적인 성격을 띠는 종교라고 주장했다.

풋타탓은 태국 사회의 경제성장에 따른 물질주의를 비판하면서 담마사회주의의 개념을 발전시켰다. 그는 담마사회주의는 연기(緣起)에 따라 생겨나는 사물들의 자연스럽고 정상적인 상태이며, 개인적 야망과 모든 이기적인 충동에 대한 절제를 통해서 도덕적, 사회적, 자연적 질서가 확립된 사회체제라고 했다. 또 그는 각 사물이 독립적으로 존재하고 동시에 다른 사물도 함께 존재하는 환경이 사회주의적이라고 했다. 한마디로 담마사회주의는 부처의 가르침을 바탕으로 한 공동 사회체제라고 할 수 있다.

정치적인 면에서 풋타탓은 마르크스주의나 자본주의 모두를 담마사회주의와는 다른 체제라고 비판하였다. 참된 사회주의란 법과의 상호일치, 상생하기 위한 대화, 상대방을 파괴하지 못하게 하는 정치제도의 확립을 바탕으로 만들어지는 것이다. 경제적인 면에서 살펴보면 풋타탓은 모든 근본적인 사회문제는 이기적인 탐욕에서 비롯된다고 하였다. 그는 어느 정도의 경제적 불균형은 인정하지만 재산은 반드시 자비와 짝을 이루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담마사회주의를 따르는 사회에서는 자본주의와 같은 심각한 부의 불균형을 용납할 수 없지만 공산주의와 같은 강제에 의한 부의 분배가 아니라 종교와 도덕의 가르침인 자비와 보시의 신념으로 부를 분배하도록 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의 사회주의는 개인주의와 반대된다. 불교에 있어서 개인적 책임은 중요한 것이기는 하지만 불교는 결코 개인적인 성격을 띤 것은 아니다. 담마의 가르침이라는 것은 개인을 희생하지 않으면서도 총체적인 선(the collective good)을 강조하는 것이며 총체적인 사회복지는 개인적 욕망을 위해서 희생될 수는 없는 것이다.
그의 사회주의 개념은 담마가 본질이며 본질은 담마라는 핵심적 시각에서 연유한다. 삼라만상 모든 것이 담마이기 때문에 담마 아닌 것이 없다. 담마는 자연법(natural law)이며 조건성과 상호관련성의 법칙(the law of conditionality and inter-relatedness)이기 때문에 공동체 사회의 상호관계를 무엇보다 중시하게 된다.

풋타탓에 따르면 오늘날의 세상에서 사회주의의 본질을 찾기는 어렵다. 현상적으로 나타나는 사회주의의 본질은 물질주의적 비전뿐이다. 하지만 담마사회주의는 결코 물질주의적 사회주의가 아니다. 지금까지 역사적인 사회주의 형태는 폭력적이었지만 담마사회주의는 비폭력적이다. 그는 계급투쟁을 본질로 하는 공산주의와 마르크시즘을 비난했다. 피에 목마른 자본주의(blood-thirsty capitalism)와 복수심에 불타는 마르크스주의(vengeful Marxism)를 대비시키고 그 중도를 찾기 위해 노력했다. 그가 추구하는 담마사회주의는 이기심을 억제함으써 이룰 수 있고, 비담마적 체제(non-Dhammic systems)에서 나타나는 것과 같이 탐욕과 공포심의 조장을 통해 이룰 수는 없는 것이었다.

자본주의와 공산주의 사이의 치열한 대립이 진행되는 기간 중 쑤원목은 좌와 우의 중간지대로서 보수주의적인 관료, 사업가, 군인들뿐 아니라 마르크스주의 신봉자, 급진좌파 학생들과 정치적 행동가들, 농민, 노동자들에게 모두 환영받는 중립지대가 되었다.

담마사회주의에서 나타나는 풋타탓의 정치적 성향 때문에 그는 때때로 공산주의자로 매도되었다. 풋타탓의 주요 비평자인 분미 미탕꾼(Bunmii Meethaangkuun)은 다음과 같이 그를 비난한 적이 있다.

“풋타탓의 불교적 해석은 불교를 유물론자, 공산주의자에게 부합하도록 만드는 것이며 종교와 국가안보를 해하려는 것이다. 불교는 태국의 정체성을 만들어 내는 가장 강력한 요소다. 불교는 국민통합의 중심이 되고 있다. 불교가 쇠퇴해 가면 무슨 일이 일어날 것인가? 어떻게 국가와 군주제가 유지될 수 있을 것인가?”
풋타탓은 담마사회주의의 실천장인 쑤원목을 협동조합과 같이 운영했다. 그에게 자연은 협동적인 것이다. 숲 속에 살고 있는 동물, 곤충, 벌레들은 숲이라는 공간을 유지하기 위해서 상호협동적인 역할을 수행한다. 자연을 가깝게 관찰하고 사는 사람들은 이런 점을 이해하게 된다. 그는 인간이 숲이나 들판과 같은 자연적 환경 속에서 협동적으로 사는 법을 배울 수 있다고 믿었다.

쑤원목에서 대부분의 활동은 선택적인 것이었다. 정해진 규칙은 없었으며 그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이 명상을 하고, 책을 읽으며, 기도하는가를 감시하지도 않았으며 단지 자유롭게 자연으로부터 배우도록 가르칠 뿐이었다.

쑤원목은 항상 생태적인 비전을 갖는 장소였다. 풋타탓은 태국 내에서 최초로 산림생태 보존을 거론했던 선각자이다. 근대화 과정과 더불어 태국 산림은 급속히 훼손되어 갔으며 보존의 필요성이 절실했다. 그의 생태 비전은 불교와 어린 시절의 경험에 뿌리를 두고 있다. 그의 어린 시절, 산림은 인생의 중요한 한 부분이었다. 그의 생태적 관심은 자연스럽게 단순성을 강조해 쑤원목의 대부분의 행사와 의식, 활동들은 모두 야외에서 행해졌다. 쑤원목에 만들어진 건축물들은 최소한에 그쳤고, 먹는 음식은 단순하고 소박했다. 그의 담마사회주의는 단순하게 생활할 때 효과적으로 얻을 수 있는 것이었다.

5. 중도사상

풋타탓은 그의 정치사상에서 잘 나타나듯이 항상 한곳에 치우침이 없었다. 그는 인간은 이분법적이고 상반된 것을 만들어 내는 습관을 오랫동안 가져왔다고 말했다. 하지만 삼라만상은 인과법에 따르며, 어떤 것도 고정적이며, 절대적인 것은 없다. 따라서 인간은 이데올로기나 지위 같은 이분법의 덫에 걸리지 않도록 주의해야 한다고 가르쳤다.

인간은 일반적으로 전통과 근대, 보수와 개혁, 승가사회와 속세 등을 구분하는 것과 같이 이분법적이고 양극적인 사고를 하게 된다. 하지만 그는 극단 사이에서 중도만이 가장 올바른 길이라는 것을 강조했다.
그가 살았던 시대는 서구 문명과 제국주의의 침투가 만연했던 변화의 시대였다. 이 같은 변화를 통해 새로운 도로와 학교가 만들어지고 의료기술이 발전하는 등 얻는 것도 많았지만 산림 파괴, 사회적 타락, 전통적인 생활방식의 실종 등 잃는 것도 많았다. 이런 과정에서 한쪽에서는 서구화와 근대문명을 받아들이고 또 한쪽에서는 그것을 거부하고 전통을 고수하려 했다. 하지만 풋타탓은 어느 한 쪽을 따르지 않고 중도를 추구했다.

풋타탓은 서구화로부터 배울 것이 많다고 생각했다. 서구과학에 매료된 그는 젊은 승려 시절에 타이프라이터를 사용하고, 라디오와 전축을 즐겨 들었으며 사진을 즐겨 찍기도 했다. 프로이트 등 서양 심리학자들과 헤겔, 마르크스의 저서도 많이 읽었다. 그는 서양의 발전을 건설적으로 사용할 수 있는 길이 있다고 믿었다. 서구화를 맹목적으로 거부하기보다는 잠재적인 위험에 주의하면서 그것을 실제에 적용하는 방법을 배워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는 서양 사람들이 생각하고 행동하는 바를 아시아 사람들도 자신들의 지혜를 포기하지 않고 배울 수 있는 것이라고 했다. 풋타탓은 서양 사람들은 불교와 비견할 수 있는 어떤 것도 만들어 내지 못했다고 지적했다. 그리고 불교는 기독교보다 과학에 더 부합한다고 언급하면서도 서양의 경제력과 군사력의 우월성을 인정했다. 풋타탓은 서양의 것을 현명하게 받아들이고 불건전한 것을 걸러내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담마를 이해할 것을 역설했다.

또 다른 이분법은 보수주의와 개혁주의에서 찾아볼 수 있다. 태국의 사회행동가이며 학자인 쑬락 씨와락(Sulak Sivaraksa)은 풋타탓의 정치 성향을 진보적 보수주의(radical conservatism)라고 평가했다. 풋타탓은 그가 살았던 남부 태국의 문화는 건전하고 현명한 것이기 때문에 그것을 유지하기를 원했으며, 2,500년의 유구한 역사를 간직해 온 불교를 존중했지만 그동안 불교와 관련된 많은 변화들이 불교의 근본과 어울리지 않는 것이라는 것을 발견하고 불교개혁을 주장한 인물이었다. 그래서 그는 진보적이면서 보수적이었으며 보수적이면서 진보적인 인물이었다고 할 수 있다.

그는 열반의 세계(승가사회)와 윤회의 세계(속세)의 이분법을 용납하지 않았다. 그는 열반은 윤회 속에 있다고 주장했다. 미래의 세계가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현재 속에 있다는 것이다. 그에게 있어서 인간계의 고통을 끊는다는 것은 열반을 통해서가 아니라 인간계에서 고통을 겪음으로써 달성할 수 있는 것이었다. 그는 열반을 용광로 속에서 가장 차가운 상태(the coolest point in the furnace)에 있는 것이라고 믿었다.

풋타탓의 중도사상은 타 종교에 대한 관심을 갖고 종교 간 협력과 이해를 위해 노력한 데서도 잘 나타나고 있다. 젊은 시절부터 풋타탓은 타 종교와 밀접한 관계를 맺었다. 1930년대 초에 이미 베단타 철학자(Vedantist)뿐 아니라 모슬렘과도 소통해 그의 말년에 쑤원목 사원에는 모슬렘, 시크교, 힌두교도, 기독교도들이 공존하게 되었다.

1970년대 풋타탓은 태국의 주요한 기독교 대학에서 연례 강좌 시리즈를 담당하는 최초의 불교도 강사였으며 기독교와 불교에 관한 저서도 발간했다. 또 쑤원목 설교를 통해 《불교도가 알아야 할 기독교의 진수(The Essence of Christianity as Far as Buddhists Should Know)》라는 책을 저술하기도 했다. 그는 불교는 기독교의 자비심(loving-kindness)으로부터 배울 것이 많다고 강조했으며 기독교 전통은 아시아의 덜 조직화된 불교전통보다 발전된 사회봉사 전통을 갖고 있다고 언급했다.

풋타탓은 상좌부불교도들에게 타 불교종파에 개방적이 되라고 주문했다. 그는 쑤원목을 방문한 달라이라마를 만나서 불교의 명상법에 관해 토론한 적이 있었다. 달라이라마는 상좌부불교를 통해서 초기불교 명상 관습의 중요성을 깨닫고 티베트 승려들을 쑤원목에 거주시킬 것을 구상한 적도 있었다. 하지만 중국 정부의 반대로 뜻을 이루지는 못했다. 풋타탓은 대승불교 경전인 《능가경(楞伽經, Lankavatara Sutra)》의 일부를 번역하고 두 권의 선불교 경전(The Platform Sutra of Hui Neng and The Zen Teachings of Huang Po. Thus)도 번역했다.

그는 모든 종교는 인간을 이기심과 고통으로부터 구원하는 동일한 기본적인 기능을 수행하고 있으며 모든 종교는 똑같은 하나의 종교라고 믿었다. 기독교의 가르침은 이기심을 버리라는 것이며 진심으로 하느님이 독생자를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라는 것을 믿는다면 인간은 이기적일 수 없다고 했다. 이슬람의 원칙과 노력도 이기심을 극복하고 자제하기 위한 것이며 불교에서는 자아에 대해서 집착하는 것은 의미가 없음을 강조한다고 지적하고 이런 의미에서 모든 종교의 공통적인 가르침은 이기심을 극복하는 것이라고 했다.

그는 모든 종교의 공통의 적은 물질주의-정치적 물질주의, 정신적 물질주의, 쾌락주의적 물질주의-이며 물질주의는 이기심을 영구화시킨다는 견해를 가졌다. 그에게 다양한 형태의 민족주의는 자기 중심주의의 정당화이며 현대의 개인주의는 자기 중심주의를 정당화하는 것이었다.

풋타탓이 타 종교에 대해 비난하지 않은 것은 아니다. 때때로 힌두교가 불교를 오염시키고 있다고 비난하면서도 그 중요한 이유를 불교의 무능함에서 찾았다. 그는 인도불교는 의례주의와 성직의 계서제도, 경전에의 일방적인 편향에 함몰되어 있으며 불교의 원래 가르침에 충실하지 않다고 했다. 더 큰 문제는 불교는 환생의 도덕주의를 강조한 나머지 현생에서의 해방을 잃어버렸으며 본래 목적을 고수하지 못함으로써 힌두교와 분리할 수 없게 되었다고 주장했다.

6. 나오며

풋타탓은 쑤원목 사원을 중심으로 불교개혁운동을 전개했다. 그는 미완으로 끝난 몽꿋 왕의 불교개혁운동인 탐마윳 운동의 맥을 이은 대표적인 불교개혁가였다. 그의 불교개혁 사상은 세 가지 측면에서 그 특징과 의의를 갖고 있다.

첫째, 교리적 측면에서 살펴보면 그는 전통적인 불교교리의 핵심적인 내용-업, 공덕, 윤회-들을 재해석했다. 과거의 업보다는 현생에서 공덕 쌓기를 강조하고 윤회 속에 열반이 있으며 열반은 승려들을 포함해 누구나 도달할 수 있는 것이라고 했다. 윤회, 전생 등의 믿음은 모두 개인의 마음에서 비롯되는 것이라고 주장하기도 했다. 이러한 진보적 교리 해석은 중산층과 지식인층의 많은 관심을 이끌어내기도 했지만 전통적인 불교에 익숙했던 일반 대중에게 쉽게 전달되지 못한다는 약점도 갖고 있었다.

둘째, 개혁적인 교리 해석을 바탕으로 승가 내부의 민주화에 기여했다. 불교개혁운동은 역사적으로 몽꿋 왕이 만든 탐마윳니까이로부터 시작되었지만 왕실 주도 탐마윳니까이가 갖는 태생적인 한계 때문에 이후 승가 내부의 민주화 운동은 마하니까이의 주도하에 진행되었다. 마하니까이에서 수계식을 가진 풋타탓도 이에 동참했지만 탐마윳니까이와의 갈등을 피할 수 있었던 주된 이유는 몽꿋 왕이 만든 탐마윳 운동의 계승자였기 때문이었다.

셋째, 그의 개혁사상은 사회민주화에도 기여했다. 풋타탓은 개인적으로 직접적인 정치참여를 회피했지만 민주주의에 대한 지지 노력을 보였다. 하지만 그의 정치이념에 관해서는 많은 논란이 있었다. 논란의 핵심은 그가 지지하는 정치체제의 모호성 때문이다. 그는 집단성과 강력한 도덕적 지도자의 개념을 강조함으로써 사회 각 구성원의 도덕적, 지적 능력 개발에 대한 강조를 소홀히 했다는 비난을 받았다. 그는 서구식 자본주의와 공산주의 모두를 비난하면서 대안적으로 담마사회주의의 독특한 개념을 발전시켰다. 담마사회주의는 한마디로 부처의 가르침을 바탕으로 한 사회공동체를 의미하는 것으로 개인을 희생하지 않으면서도 총체적인 선을 강조하는 것이었지만 때때로 공산주의자로 매도되기도 했다.

그러나 풋타탓은 이분법적이고 양극적인 사고를 지양하고 일관되게 중도사상을 추구함으로써 도덕적 우월성을 지키고 불교개혁뿐 아니라 정치적 이상을 제시하는 사회의 큰 스승으로 남게 되었다. ■

 

김홍구
부산외국어대학교 태국어과 교수. 한국외국어대학교 국제관계연구학과 정치학 박사. 불교 관련 주요 저서와 논문으로 《태국 불교와 정치적 정통성》(1996), 《라오스의 승가와 국가권력》(1998), 《상좌부 불교의 정치적 영향력》(2001), Some Buddhist Lessons in The Asian Debate(2002), 〈태국 불교의 이해〉(2005)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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