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라한의 길인가, 웨익자의 길인가

1. 들어가는 말

미얀마 불교의 특징은 상좌불교의 전통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으면서도, 그 기원을 정확히 알 수 없지만 토착사회에 뿌리내려 고착화된 정령신 낫(nat)과 결합하는 제설혼합적(syncretic) 특징을 띤다. 이러한 이유로 모든 불교사원에는 낫당(nat shrine)이 모셔져 있다. 또한 정령신의 고향이라고 정의되는 뽀빠산(Mt. Popa)은 1년 내내 참배객들로 분주하며 낫들과 인간을 잇는 영매(靈媒)인 낫꺼도(natkadaw)의 모습도 흔히 볼 수 있다. 이렇게 불교에서 정령신이 부속적인 역할을 하는 이유는 불교의 종교적 속성에서 기인한다. 불교는 내세 지향적이기 때문에 불교도들은 세속적인 성공이나 현실의 고통으로부터 탈피하기 위해 정령을 찾는 것이다.

미얀마의 종교적 특성은 학계뿐만 아니라 일반인들에게도 오래된 논쟁거리이다. 스스로 불교도라고 칭하면서도 불교교리에 대한 이해가 부족하기 때문에 정령을 섬기는 일을 포함한 그들의 종교 활동이 공덕을 쌓는 것으로 오인하는 사례 연구도 있다. 그리고 점괘에 따라 행동에 관한 처방전을 제시하며 금전을 요구하는 영매나 승려들의 활동이 불교사상에서 어긋난다고 주장하는 현지인들도 있다. 종교의례 행위가 전문가 또는 비전문가에 의해 행해지는 사례를 들어 정령신앙이 불교의 영역이 아니라는 주장이 제기되기도 했다. 불교의 개방적 종교관이 정령신을 포용하는 역사사회학적 연구와 함께 미얀마 불교의 하위 범주를 열반형(nibbanic), 업형(業型, kammatic), 액땜형(apotropaic)으로 분류하고, 낫신앙을 불교와 별도의 종교로 인정하는 연구도 주목할 만하다.

위와 같은 논쟁이 발생하는 이유는 미얀마 불교의 포용성과 함께 불교의 전파와 정착 과정을 살펴보면 쉽게 이해된다. 11세기 통일왕조가 성립되기 전 불교는 도처에 성립된 도시국가로 이미 전파되었는데, 힌두교와 혼합된 양상이 그 독창적 성격이었다. 그중 7세기경 인도, 티베트 상인들이 미얀마로 내도하면서 전파된 불교의 한 부파인 아예찌(Ari)불교가 있는데, 이 종교는 당시 낫신앙, 나가(naga, 海龍) 숭배사상 등 모든 정령신을 포함하는 형태였다. 아예찌불교를 수행하는 승려들은 정법을 중시하지 않고 술을 마시고 격투기를 즐겼으며 심지어 성관계를 하는 등 불교의 수행과는 동떨어진 생활을 했다. 이들은 흑마술, 주술 등 각종 마술을 겸비한 자들로서 엄격히 말하면 승려라고 부를 수 없는 자들이었다. 13세기 들어 상좌불교에서 힌두적 요소는 모두 사라지게 되는데, 왕권과 관련된 의례는 잔존하게 되었다. 특히 점성술과 같은 비술(秘術)은 웨익자(weikza)에 의해 그 명맥이 이어져 오고 있다.

이 글은 미얀마 근대 주요 불교운동가들 중 미얀마 불교의 이중성을 대표하는 승려들의 종교관과 세계관 등을 상호 비교함으로써 미얀마 불교의 특징을 규명하고자 한다. 이를 위해 아라한(Arahant) 또는 야한다(Yahanda)로 분류되면서, 인간세계의 모든 진리를 깨달았다는 의미로 통용되는 웨익자의 경계를 넘나드는 승려 세 분을 연구 사례로 선택하고, 이들의 종교관, 주요 활동, 정치관 등을 상호 비교 고찰하고자 한다. 이들에 대해 대중은 공통적으로 아라한으로 평가하고 있으나 실제로 각 승려들 간의 활동과 종교관은 동일하지 않았다. 특히 미얀마와 같이 군부가 집권하면서 종교를 정치에 이용하려는 노골적인 전략이 표출되는 환경에서 승려들의 활동은 정치상황에 따라 제약을 받기도 한다. 그렇기 때문에 아라한이라고 평가받더라도 친정부적인 성향을 보인 승려들에 대한 대중의 시각 변화를 살펴볼 필요가 있을 것이다. 궁극적으로 이 연구는 아라한이라고 칭해지는 승려들로부터 투영되는 미얀마 불교의 이중성에 대한 근본적인 탐구이자 불교가 정치와 사회에 미치는 영향력과 상호 관계를 규명하는 시도이다.

2. 이론적 논의: 아라한과 웨익자

아라한과 웨익자라는 두 용어에 대한 정의에 앞서 대중에게 영향력을 미칠 수 있고, 종교적으로 수행이 잘된 승려로 평가되는 기준은 카리스마의 보유 정도이다. 미얀마에서 카리스마는 아나(ana)와 오자(awza)로 개념화되는데, 전자는 물리적 권력인 반면, 후자는 영향력으로 정의할 수 있다. 즉 승려는 제도적인 틀에 갇혀서 힘을 발산하는 아나보다 오자에 기인하는 카리스마를 가져야 하며, 전생에서 쌓은 업(業)만큼 현실에서 그 영향력을 발휘할 수 있게 하는 퐁(hpon)에 기초해야 한다. 퐁은 상대방을 강요할 수 있는 보이지 않는 힘으로서 높은 퐁을 가진 자일수록 속세에서 성공할 확률이 높다. 미얀마어로 승려는 ‘퐁지(hpon-gyi)’, 즉 퐁이 높은 사람을 가리키므로 미얀마 인들의 관념에 따르면 전생에 쌓은 업에 의해 승려가 되는 것은 당연한 이치이다.

이제 아라한과 웨익자가 되기 위해 정신적으로 영험한 조건을 갖추게 되면, 수행 단계로 넘어간다. 일반적으로 승려는 사원에 기거하면서 삼장(三藏)수행이라는 쁘리얏띠(pariyatti)와 계율수행(Vinaya) 또는 명상수행을 의미하는 뻐디빳띠(padipatti)를 실시하게 된다. 후자의 경우 데익딴(deikhtan)이라고 하여 일정 기간 숲 속에서 행하기도 한다. 승려들은 지리적·정치적으로 고립되어 있거나 문맹 등으로 인해 불교 공부를 할 수 없는 환경에 처한 대중을 직접 방문하여 정법(正法)을 설파했고, 이를 통해 유명세를 타게 되었다. 대중으로부터 완전한 경지에 이른 아라한이라고 칭해지는 승려에 대한 명확한 정의는 없다. 다만 아라한은 그의 영험한 기운을 발산하는바, 윤회의 사슬로부터 자유로워진 미래불이라고 믿어지며, 고통과 죽음 앞에서도 의연히 대처하는 모습을 보인다. 그래서 대중은 이러한 승려들이 행하는 일련의 모든 행동에 신성함을 부여하는 것이다.

흥미로운 사실은 대중은 아라한과 웨익자의 존재를 별도로 분리하지 않고 같은 의미로 보는 경향이 높다. 실제 미얀마 종교를 연구한 학자들 사이에도 웨익자를 승려로 볼 것인지, 단순히 정령을 숭배하는 존재로 볼 것인지에 대한 논쟁이 벌어졌다. 웨익자는 ‘고도의 또는 비전(秘傳)의 지식’에 정통한 남성으로서 마술적 힘을 보유하거나 특별히 장수하는 능력을 모색하는 평신도를 가리킨다. 반면 아라한은 다섯 번째 미래불인 멧떠야(Mettaya)의 조건을 충족시키기 위한 고행만 집중한다. 즉 아라한이 되면 웨익자의 능력을 보유한 것으로 믿어지지만 실제로 아라한은 그가 보유한 능력이나 초자연적 결과 등 초인적 능력에 관심을 가지지 않는다. 대신 웨익자가 되면 초자연적 힘을 가지지만 미래불이 도래할 때까지만 그 생명력을 부여받을 수 있다.

이러한 미묘한 차이가 있지만 아라한과 웨익자의 초인적 능력은 공유되는 측면이 적지 않다. 이들은 수행을 통해 특별한 정신 상태를 유지하고 초인적 힘을 얻을 수 있게 되는 이른바 에익띠바(eikdibar)라는 능력을 갖추게 된다. 웨익자는 연금술사처럼 땅, 물, 불, 공기 등으로 대변되는 고체, 액체, 기체의 흐름을 감지할 수 있는 닷(dat)이라는 능력을 보유하게 되는데, 닷은 불교에서 파생된 것이다. 반면 아라한이 가진 능력은 더고(dago)라고 하여, 사유화된 어떠한 권력에도 얽매이지 않는 해탈한 정신적 상태로 정의된다. 예를 들어 불탑이나 부처상이 영험한 장소에 모셔지게 되면 이를 퍼야더고(Hpaya-dago)라고 정의한다. 그러나 초자연적인 힘을 의지하는 미얀마어는 더고와 빨리어 에익띠바다의 합성어인 더고에익띠바로서 두 영역의 경계가 허물어진다.

웨익자나 아라한이 보유한 정신력은 객관화되거나 명쾌하게 설명될 수 없기 때문에 두 존재에 대한 정의나 구분은 명확하지 않은 것이 사실이다. 또한 두 존재의 종교 및 각종 비술 수행 기간과 수행법은 철저히 비밀에 부쳐져 그 신비성이 더하다. 그러나 아라한은 본질적으로 내재하는 재생력을 가지고 있으며 인간의 윤회에 직접 영향을 미치며, 악행을 행하는 자들에게도 공덕을 행하는 모습을 보이는 일종의 조정자 역할을 한다. 그렇기 때문에 아라한이라고 추정되는 승려들은 수염을 기르지도 않을 뿐만 아니라 그들만의 특별한 위엄을 드러내지도 않은 채 여느 승려와 마찬가지로 고행하는 모습만을 보인다.

명확한 사실은 이들은 엄격한 계율수행과 정신수양을 통해 일반인이 범접할 수 없는 종교성과 함께 초자연적인 능력을 갖추게 되었다. 다양한 점괘와 비술로 신도들을 현혹해 돈을 갈취하는 웨익자와 달리 아라한으로 추정되는 승려들은 제도권 내 교육 수준이 높지 않고 승단 내에서도 높은 지위에 오르지 않았으며, 정치권으로부터 떨어진 주변부에서 개인의 수양만을 고집하는 특성을 보인다.

한편, 민간정부 시기(1948~1962)와 달리 1962년 군부가 집권한 이후 정부는 승려 등록증을 부여하는 등 강력한 승려 정화 정책을 실시하는 등 정치에서 종교를 배제하고자 했으나, 정치권과 결탁하는 소수의 승려들이 출현하기도 했다. 1988년 쿠데타를 통해 집권한 신군부는 불탑 보수 및 신축, 불교사원 건립 등 불교를 다시 정치권으로 편입시키고자 하는 노력을 보였다. 이에 따라 군부는 명망 높은 승려들을 자신들의 편에 서게 함으로써 국민에게 불교를 보호하고 전파하는 역할을 자처하고 있다고 선전하며, 이를 국영언론에 보도했다. 민주화운동에 입문한 초기에는 아웅산수찌(Aung San Suu Kyi)가 종교와 정치의 연관성을 역설하지 않았던 사실과 차별화되는 점이었다. 그러나 국민은 정치권과 결탁하는 승려들에 대한 지지를 보내지 않았다. 즉 미얀마 현대 정치의 상황적 측면을 고려할 때 아라한은 현실정치에 대해 비판적인 입장을 보일 가능성이 높은 존재이다.

3. 주요 불교운동가의 이중적 성향: 주요 활동과 비판

1) 띠따구 서야도(Thitagu Sayadaw)

 

띠따구 서야도(Thitagu Sayadaw)
띠따구 서야도로 알려진 냐니따라(Nyanithara)는 1937년 2월 23일 버고주(Bago Division) 떼공(Thegon)에서 태어났다. 7세에 불가에 입문한 후 15세에 사미승으로 출가하여 18세와 20세가 되던 1956년, 1958년 종교부가 주관하는 2차 교육 대상자 빨리어 불교시험인 빠따마뺭(Pathamapyan)에 합격했다. 만달레(Mandalay) 소재 킨마강(Khinmagan) 빨리(Pali) 대학교에서 불교학으로 석사학위를 취득하고, 불교 포교를 위해 양공 소재 승가대학에서 영어 디플로마 과정을 수료했다. 대부분의 승려가 출가 후 불교를 공부한 후 낙향하여 지역 사회의 불교 전파에 노력했던 것과 달리 띠따구 서야도는 내국인뿐만 아니라 외국인에게도 불교를 포교하기 위한 차원이 다른 견해를 가졌으며, 1965년 남서부 델타지역에 BBM 대학을 설립함으로써 그 결실이 맺어졌다.
3년간 이 대학에서 그는 학장과 행정업무를 도맡았고, 1968년 중부 저가잉의 저가잉언덕(Sagaing Hill)으로 거처를 옮겨 사무승과 비구들을 대상으로 불교 교리와 영어를 가르쳤다. 또한 그는 여기서 빤디따(U Pandita, 1899~1977)스님의 제자가 되어 1975년까지 설법에 관한 정교한 기술을 익히게 된다. 1975년부터 1978년까지 하부 미얀마 몽주의 숲 속에서 고행을 했으며, 1979년 저가잉언덕으로 돌아와 신도들의 기부금을 바탕으로 띠따구사원을 건립했다.

 

1979년 이후 그는 자신의 설법 내용과 쉽게 불교를 이해하고 습득할 수 있는 내용을 중심으로 집필 활동을 시작하여 현재까지 38권의 단행본과 5권의 영문 서적을 발행했다. 또한 이 시기부터 그의 명성이 외국에도 알려졌는데, 1981년 동남아 6개국을 시작으로 총 12회의 포교 활동을 위해 30개국 이상을 방문했다. 국내적으로는 자신이 기거하는 저가잉언덕의 생활환경을 개선하는 사회봉사활동도 시작했다. 우선 그는 지형적으로 고립되어 있고, 건조 지대인 저가잉언덕으로 에야워디 강의 물길을 끌어오기 위해 배수사업을 시작했다. 그래서 저가잉언덕에 소재한 800개의 사원과 승려와 비구를 포함한 1만 명의 거주자들에게 식수를 공급할 수 있게 되었다. 또한 열악한 의료환경을 개선하기 위해 4년간에 걸쳐 승려들을 위한 병원을 신축했다. 띠따구 서야도의 정법을 지키는 절제된 생활과 불교 전파에 대한 치적을 인정한 군사평의회는 1993년 마하담마까티까 버후야나티다드라(Maha Dhammakathika Bahujanahitadhara), 1995년 아가 마하 따드담마 조티카다자(Agga Maha Saddhamma Jotikadhaja) 서품을 수여했다.

사회문제에 대한 그의 이중적인 태도는 다소 논란의 대상이다. 일반적으로 아라한이라 칭해지는 승려들은 종교 이외에 세속적인 일에는 관심을 두지 않지만, 국가가 국민을 제대로 보살피지 못할 때는 군주의 잘못을 나무라는 것처럼 정치권에 대한 비판도 서슴지 않는다. 띠따구 서야도도 1988년 민주화운동 당시 네윈을 강력하게 비난했고, 정부의 체포령을 피해 그가 불교를 전파했던 미국 테네시 주 내슈빌(Nashville)로 피신해야 했다.

그러나 국내로 복귀한 이후 그는 친정부 인사로 변절했다. 세속적 교육과 승려들을 위한 보건환경을 개선하는 차원에서 당시 권력서열 2위인 마웅에(Maung Aye) 국가법질서회복평의회(State Law and Order Restoration Council: SLORC) 부의장과 긴밀한 관계를 유지했고, 그의 행적은 민주화 운동가들의 비난 대상이었다. 2007년 승려에 의해 촉발된 반정부 시위 당시, 그는 여타 승려와 달리 사원의 빗장을 잠그고, 소속 사원 승려들의 정치활동을 강력히 억제했다. 그러면서 물가상승의 원인을 제공한 정부를 강력히 비난했다고 한다. 2008년 5월, 나르기스(Nargis) 피해 복구를 위해 자발적으로 기금을 모금하고, 피해지역을 직접 방문하여 구호에 앞장섰다는 측면에서 그는 사회복지가로서 변함없는 활동을 한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그의 변절은 자신의 정치적 욕망을 위한 것이라기보다 억압과 핍박 속에서 가난을 헤쳐나가고자 하는 평신도와 보다 나은 환경에서 불교 수행을 하고자 하는 승려들을 위한 결단일 수도 있다.

2) 따마냐 서야도(Thamanya Sayadaw)

 

따마냐 서야도와 아웅산 수찌 여사
따마냐 서야도로 더 유명한 위나야(U Winaya, 1910~2003) 스님은 1910년 까렌 주(Karen State) 빠안(Hpa-an)의 빠오(Pa O) 족 마을에서 태어났다. 13세이던 1923년 불가에 사미승으로 입문하여 7년의 수행 끝에 약관의 나이에 비로소 승려가 되었다. 이후 몽 주(Mon State), 태국 메솟(Mae Sot) 등 12개 사원을 다니면서 쁘리야띠(pariyatti)와 뻐디빳띠(padipatti)를 수행했다. 몽 주 쉐야웅뺘(Shwe Yaung Pya) 사원에 기거하고 있을 당시 그는 스승인 무띤 서야도(Muthin Sayadaw)와 함께 ‘무덤 속에서 수행하는 방법’을 익혔다.

 

이 수행법은 초자연적 신앙의 일종으로 연금술사들이 초자연적 힘을 얻는 과정과 유사하다. 연금술사에 대한 신앙도 인도에서 전래된 일종의 힌두 사상의 부산물로서 미얀마에서는 금속을 제련하는 과정이 아니라 물질의 성질을 바꾸어 결국에는 영원불멸의 초자연적 존재가 된다는 데 의미를 부여할 수 있다. 연금술사는 강철 성질을 지닌 돌을 발견하게 되면 최종 목적인 영원불멸의 초자연적 존재를 향하는 첫 번째 관문을 통과한다. 이 돌을 지니고 있으면 하늘을 날 수도 있고 물속으로 잠수할 수 있으며, 피로를 느끼지도 않고 각종 질병에 시달리지도 않는다. 그러나 이 상태는 돌에 의한 초능력일 뿐 그것을 보유한 인간의 육체는 평범하다. 이 돌은 수은의 성질에서 강철의 성질로 바뀌게 되는데, 마지막으로 돌을 소유한 자는 돌을 삼키고 일주일간 땅속에서 고행을 한다. 돌을 삼키기 이전 소유자는 반드시 숲이나 동굴에서 생활해야 하고 자신이 신뢰하는 자가 매장을 직접 해야 한다. 일주일 후 인간의 육신으로 발견될 경우 초자연적인 힘은 발산되지 않기 때문이다.

따마냐 서야도가 조지와 같은 초자연적 힘을 가지거나 그가 소유했던 강철 성질의 돌을 가졌는지는 밝혀지지 않았으나 그의 스승인 무띤 서야도와 함께 무덤에서 명상했다는 사실은 그가 조지와 같은 현세를 초월하는 존재가 될 수 있다는 가능성을 함축한다. 그의 자서전에는 이와 같은 연금술을 수행하지 않았다고 기록하고 있으나 실제로 1937부터 1939년까지 메솟에 위치한 퍼야지(Hpaya Gyi) 사원에 머물 당시 연금술을 적극적으로 수행했다. 연금술을 이 외에도 점성술, 흑마술 등을 익혔으나 역시 그의 자서전에서 이런 사실은 배제되었다.

따마냐 서야도의 행적 중 가장 특별한 일은 신도들과 함께 따마냐언덕에서 종교공동체를 형성한 것이다. 그는 1979년 몇몇 제자와 함께 수행을 위해 간단한 오두막을 짓기 시작했으나 지역 주민들의 제안에 따라 이듬해 따마냐언덕으로 거처를 옮기게 되었다. 이때부터 위나야라는 이름 대신 따마냐 서야도로 알려지기 시작했고, 혼자서 고행하던 방식을 버렸다. 따마냐언덕의 메솟형제 불탑(Masot Brother Pagoda) 보수를 시작으로 수계식을 위한 떼잉(thein), 설법 장소인 담마용(dammayon) 등 종교 건축물 신축과 공동체 생활에 필요한 생활편의시설을 위한 기부금이 모금되었다.

따마냐언덕은 ‘종교수행의 땅’이라는 의미인 따드나메(thatana-myei)로 명명되었고, 이주자들은 해마다 기하급수적으로 증가했다. 1981년 첫 번째 이주자를 시작으로 1980년대 중반에는 300명, 1990년대 말까지는 약 1천 명까지 거주민이 증가했다. 군부 통치로 인해 거주 이전의 자유가 없고, 가난한 농촌 지역이면서 내전이 빈번한 지역이지만 종교적 안식처를 찾아 불행한 현실을 잊고자 이 지역으로 이주한 것으로 보인다. 이주 종족들도 빠오 족에서 버마 족, 까렌 족 등 주요 종족들과 인도인, 중국인 등으로 확대되었다. 1997년부터는 경제적 고충이 전혀 없는 부유한 사업가들도 이곳으로 이주하면서 그 수는 7천 명까지 증가했고, 자연스럽게 이 지역은 상권이 형성되기 시작하면서 전형적인 고산도시의 면모를 갖췄다.

따마냐언덕에 거주하기 위해서는 오계(五戒, pinsathila-nga-ba)를 지키고, 육류를 가져오거나 취식하지 말고, 술, 마약, 무기 등을 소지하지 말아야 한다. 첫 번째 규칙인 오계는 불교도면 으레 지켜야 할 관행이고, 두 번째 규칙은 따마냐 서야도 개인적인 설법이 고착화된 것이다. 원래 따마냐 서야도가 채식주의자였다는 설은 확인되지 않지만 따마냐언덕에 정착한 이후 그를 따르는 신도들이 자신에게 공양할 육류를 구하기 어렵고, 운반하기도 쉽지 않았기 때문에 채식주의자로 변신했다고 한다.

따마냐 서야도는 신도들의 기부를 적극적으로 수용하면서 따마냐언덕을 작은 국가로 탄생시켰다. 언덕을 자동차 지역(ka-yon), 용수 지역(ye-yon), 전기공급 지역(mi-yon), 건설 지역(set-yon), 식당 지역(htamin-yon) 등 총 5개 구획으로 새롭게 정비하고 기부된 물품은 해당 지역별로 보관 및 관리했다. 따마냐 서야도가 모든 기부품의 관리 및 사용처를 지휘하지만 하위 승려의 대표들과 촌락별 수장들의 의견을 적극적으로 수렴했다. 또한 거주민들은 언덕 내에서의 경제활동을 통해 현금을 기부하고 이를 통해 공덕(kudo)을 쌓고, 한 가구당 한 명씩 마을의 공동 노동에 참여했다. 1995년 가택연금에서 해제된 민주화운동가 아웅산수찌는 최초 방문 장소를 따마냐언덕으로 정했는데, 강압적인 미얀마의 정치현실과는 괴리된 듯한 이곳의 풍경과 따마냐 서야도의 가르침에 큰 감동을 받았다고 말했다.

따마냐 서야도는 모든 거주자들이 쁘리야띠와 뻐디빳디를 수행해야 한다고 설법하는 한편, 현세의 삶에 대해서는 찰나의 순간까지도 자애롭게 생활해야 한다는 자비의 사랑인 메따(metta) 정신을 강조했다. 그럼에도 그의 행적 가운데에는 웨익자의 특성과 일치하는 점이 적지 않다. 그 첫 번째 사례는 그가 연금술사와 같은 초인적 능력을 보유한다는 점이다. 그가 보유한 7대의 자동차는 여신으로부터 받은 황금이 변한 것이며, 모든 사물을 만지게 되면 그 수가 두 배로 늘어나게 하는 능력도 보유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또한 따마냐언덕 개발 초창기에 거주자들에게 이 지역이 평화롭고 불교가 융성한 지역이 될 것이라고 예언하기도 했다. 따마냐언덕 곳곳에는 불교와 융합된 각종 민간신앙의 흔적을 발견할 수 있는데, 특히 따마냐 서야도가 숲 속과 동굴에서 고행할 당시 그를 수호해 주었다는 사슴상이 조각되어 있다. 그러나 거주민 어느 누구도 그것이 웨익자를 상징한다고 보지 않았으며, 이 지역에는 웨익자의 존재 자체가 없다고 주장했다.

군부의 집권에 대해서 직접적으로 이들을 비판한 적은 없지만 그의 행적을 보면 군사정권을 지지하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그는 군부가 수여한 어떠한 서품 수여식에도 참석하지 않았고, 군 수뇌부의 알현 초대나 알현에도 응하지 않았다. 1995년 아웅산수찌의 따마냐 서야도 방문 이후 당시 국가법질서회복평의회 킨늉(Khin Nyunt) 1서기의 방문도 이어졌는데, 이와 관련된 일화는 그가 초인적 힘을 가지고 있으면서 정권을 우회적으로 비난하고 있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따마냐 서야도는 아웅산수찌를 직접 배웅하기 위해 따마냐언덕을 내려왔다. 하지만 킨늉에게는 배웅도 하지 않았으며, 독대뿐만 아니라 사진촬영까지 허락하지 않았고, 그의 자동차 선물도 거절했다. 또한 아웅산수찌에 대한 직접적 지지 표명과 달리 킨늉에게는 어떠한 의사 표명도 하지 않았다.

2002년 2차 가택연금에서 해제된 뒤 아웅산수찌는 다시 따마냐 서야도를 찾았는데, 그녀가 가택연금 동안 행한 위빠사나(vippasana) 수행 결과에 대해 솔직한 의견을 교환했다고 알려졌다. 당시에도 따마냐 서야도는 현실정치에는 참여할 수 없지만 집권 군부의 만행에 대해 깊은 유감을 표하고 아웅산수찌에 대한 변함없는 지지를 약속했다고 한다.

따마냐 서야도를 만나지 못한 킨늉이 양공으로 돌아가기 위해 따마냐언덕에서 자동차를 탔으나 시동이 걸리지 않았다. 따마냐 서야도에게 도움을 요청하자 킨늉의 화가 멈추면 자동차 시동이 걸릴 것으로 조언했는데, 정말로 얼마 후 시동이 걸렸다고 한다. 자동차와 관련된 이러한 일화는 전국적으로 회자되면서 따마냐 서야도는 자동차를 관장하는 신(神)의 경지에까지 오르게 되었다. 도시와 시골을 막론하고 모든 자동차의 앞유리에는 따마냐 서야도의 사진이 부착되어 있는데, 운전자들은 이 사진이 교통사고를 막는다고 믿는다.
원래 1991년부터 양공을 중심으로 따마냐 서야도의 존재가 알려지기 시작했고, 그가 기적을 만들고 초자연적 힘을 가지고 있다는 소문이 퍼지게 되면서 신도들이 그를 한번 만나기 위해 따마냐로 향하는 일이 많아졌고, 국민들 사이에는 따마냐 서야도를 만난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들로 나뉘게 되었다. 공교롭게도 경제적 이유로 방문하지 못하는 자들을 위해 따마냐언덕 주민들은 따마냐 서야도의 사진, 부적, 가짜 금반지 등을 팔면서 가난을 탈출하고 고정적인 수입을 확보할 수 있게 되었다. 킨늉 방문 사건이 이후 그의 명망은 비불교도들에게까지 확산되어 그의 사진을 간직한다는 사실은 자신의 안위를 보장받는 것이기도 하고, 동시에 정치세력으로서 군부를 인정하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했다.

따마냐 서야도는 2003년 12월 입적했으나 2008년 4월 2일, 신원을 알 수 없는 무리들이 그의 시신을 훔쳐 도망가는 사건이 발생했다. 며칠 뒤 그가 머물렀던 사원에서 불에 탄 그의 시신이 있다는 제보가 접수되었다. 시신을 훔친 범인들이 누구인지 밝혀지지 않았으나 사원 관계자들은 군부의 사주를 받은 자들이 자행했다고 확신했다. 지역 경찰이 더 이상 수사를 하지 않은 점도 그러하고, 열반에 들었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아웅산수찌를 지원하고 있다고 믿는 군 수뇌부는 그들의 집권에 대한 두려움을 희석시키기 위한 방편으로 이런 일을 저질렀다고 보았다. 이는 웨익자나 유명한 점성술가들이 하는 일종의 ‘운명 바꾸기’인 야댜체(yadyachae) 행위로서 합리적 의사결정에 따른 국가정책의 시행보다 초자연적 힘에 따라 국가 운명을 결정하는 군부의 오랜 관행인 것으로 이해된다.

3) 꼰롱 서야도(Konlon Sayadaw)

열반에 든 꼰롱 서야도
떼자니아(Tezaniya)가 본명인 꼰롱 서야도(1907~2004)는 샨 족의 하위 종족인 다누(Danu) 족으로 13세에 출가하여 1926년 샨주 삔더야(Pindaya) 소재의 뺘니(Pyani) 사원에서 정식 승려가 되었다. 흥미로운 사실 중 하나는 앞서 살펴본 띠따구 서야도와 달리 그의 종교 수행에 관한 객관적인 사료가 거의 알려지지 않았고, 종교부가 주관하는 어떠한 시험에도 응시한 흔적이 없다는 점이다. 대신 생명체에 해를 끼치지 않을 목적으로 초식을 하면서 숲 속에서 수행했으며, 연금술, 민간요법, 건축 등 세속적 학문에 정통한 것으로 알려졌다.

그의 독창적 불교수행법이나 설법이 출판되어 국민에게 회자되는 대신 그의 행적은 불교신도뿐만 아니라 일반인들에게도 구전되는데, 어떤 측면에서 그는 웨익자의 성향이 강했다. 꼰롱 서야도는 육체와 영혼을 분리하는 능력이 있고, 야생동물이 득실거리는 숲 속에서 고행을 해도 어떠한 물리적 해를 입지 않았으며, 모든 자연 만물과 대화를 할 수 있다고 믿어진다. 그가 수행하는 동굴 속에서는 빛이 새어 나오거나 동굴 주변으로 무지개가 항상 끼어 있고, 그가 거론한 꽃은 계절이 지났음에도 만개를 시작했다. 꼰롱 서야도를 신봉하는 신도들은 그가 나눠 주는 승복 조각을 간직하고 있으면 불의의 사고나 액운을 막을 수 있다고 믿고, 그가 공양하다가 남은 음식을 섭취하면 역시 꼰롱 서야도의 초인적인 힘을 공유할 수 있다고 믿었다.

그의 외관은 보통 사람들과 다른 모습이 많은데 신도들은 그의 수행이 초인적 힘을 가져왔고, 신체적 변화로 나타난 것이라고 주장한다. 예를 들어 그의 오른손 엄지에는 너가용 불탑(Nagayon Paya), 왼손 엄지는 짜익티오 불탑 형상이 각각 나타난다. 오른손 손바닥과 왼손 손바닥은 각각 아라한이라고 믿어지는 신우뻐곡(Shin U Pagok), 신우띠와리(Shin U Thiwali)의 형상이 나타난다. 그의 발은 과일즙 냄새가 난다고 그와 가까운 승려들은증언하며, 발바닥에는 만개한 연꽃 형상이 나타난다고 한다. 그의 목덜미에는 미얀마의 3대 정복왕으로 손꼽히는 짠싯따(Kyansitta) 왕의 목덜미에 쓰인 같은 문자가 적혀 있어 짠싯따 왕이 환생한 것으로 간주된다.

만개한 연꽃 형상이 나타난다는 꼰롱 서야도의 발바닥
여타 승려들과 달리 그는 체계적인 불교 교육을 받지 못했고, 영어에도 능통하지 못했지만 그의 신비한 능력에 대한 명성은 국내외로 전파되었다. 특히 그는 정치권에 대해 어떠한 입장도 피력하지 않았지만 군 수뇌부들은 그에게 서품을 수여하고, 수차례에 걸친 방문과 선물 공세를 통해 그가 군부의 편에 서기를 희망했다. 딴쉐 전 SPDC 의장의 경우 자신에게 짠싯따 왕의 영혼이 깃들어 있다고 믿는 인물이기 때문에 꼰롱 서야도를 독대하는 일은 영혼 간의 교류로 받아들일 수 있을 것이다. 또한, 국가의 중대사를 웨익자나 점성술가들로부터 조언을 받는 행태를 참고로 했을 때 꼰롱 서야도로부터 특별한 기운을 받고자 하는 의도도 있을 것이다.

삔더야에 소재한 꼰롱 서야도의 사원은 조성 초기와 달리 군 수뇌부의 방문이 있었던 1990년대 이후 시설 면에서 눈에 띄게 발전했다. 포장된 도로를 이용하여 10분 이내에 사원 입구까지 도착할 수 있어 말을 타고 몇 시간씩 가야 하는 수고를 덜었고, 사원 입구에는 고위 군부들이 쉽게 왕래할 수 있도록 헬기 이착륙장이 별도로 조성되어 있다. 이 지역과 전혀 어울리지 않는 콘크리트로 지은 관사는 외국 귀빈들의 숙소로 이용되었다. 꼰롱 서야도는 원래 채식자이면서 물질적 풍요를 추구하지 않는 종교관을 견지했다. 그러나 물질문명의 혜택을 입게 된 삔더야사원은 그의 의도였는지 아니면 군부를 포함한 외부의 기부에 무관심했는지 그 연유는 정확히 알려지지 않았다. 그러나 군부는 정치권력을 유지하기 위해 웨익자 전통을 따르고 있다. 즉 꼰롱 서야도의 존재를 인정하고 그를 자신들의 편에 서게 함으로써 군부는 그들의 집권에 초자연적 힘을 불어넣어 어떠한 난관이 닥치더라도 정권을 유지할 수 있다는 믿음을 갖게 되는 것이다.

4. 나오는 말

지금까지 살펴본 바와 같이 세 명의 승려는 공통적으로 대중에게 아라한이라고 불리며 국민적 숭배의 대상이 되어 왔다. 그 정도를 측정하여 수치화할 수 없지만 이들은 모두 전생에 쌓은 업으로 인해 현세에서 일반인들보다 높은 퐁을 지녔다고 믿어진다. 모두 10세 전후에 불가에 입문하여 쁘리얏띠와 뻐디빳띠 수행을 통해 일찍이 아라한의 기질을 보였다는 귀납적 설명으로 가능하다.

그러나 아라한과 웨익자의 개념으로 세 명의 승려를 상호 비교해 볼 때 몇 가지 두드러진 차이점이 내재한다. 첫째, 종교의 수행 과정을 기준으로 볼 때 세 번째로 논의한 꼰롱 서야도의 경우 웨익자의 성향이 상대적으로 더 강하다. 웨익자뿐만 아니라 그가 어떻게 불교를 공부하고 고행을 행하였는지에 대한 과정이나 흔적이 전혀 남아 있지 않다. 게다가 다른 승려들보다 비술에 천착하는 승려들의 끊임없는 방문이 이어졌으며, 신도들도 그가 초자연적 힘을 보유하고 있다고 믿는 사실들에서 그는 아라한보다 웨익자와 더 가깝다고 할 수 있다. 특히 다른 승려들에서 나타나지 않는 육체상의 다양한 특징들은 그가 신비스런 존재임을 재차 강조하는 객관적 지표로 보인다.

둘째, 각 승려의 정치적 성향을 보았을 때 두 번째 논의한 따마냐 서야도가 아라한에 가장 가까운 존재로 판단된다. 띠따구 서야도도 정치적 상황에 따라 반정부적 언행을 했으며, 1988년 민주화운동 당시 미국으로 일시 피난을 선택할 만큼 군정에 강한 비난의 칼날을 세웠지만, 사회복지가로서 그는 친정부적인 입장을 견지하며 정부로부터의 지원을 확보했다. 꼰롱 서야도가 기거한 사원이 근대식으로 개보수한 것 이외에도 그는 군 수뇌부로부터 선물 공세를 받았고, 이에 대한 거부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1990년대 후반부터 국영신문에 보도된 그와 관련된 기사들을 통해 국민은 꼰롱 서야도가 정치인과 결탁하는 점성술사로 오인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반면, 따마냐 서야도는 까렌 족 내전과 군부의 강압적인 통치를 피해 온 신도들을 중심으로 국가 안의 작은 국가를 탄생시키며 공동체 생활을 영위했다. 또 결정적으로는 1995년 아웅산수찌의 알현을 수용하고 그녀에 대한 지지를 공론화함으로써 반군부적 성향을 보였다. 어쩌면 따마냐 서야도의 대중적인 인기는 그가 보유한 초자연적 힘과 함께 체제에 저항하는 국민을 대신하는 그의 용기에 기인했다고 할 수 있다.

셋째, 불교의 교리적 측면에서 볼 때 띠따구 서야도가 가장 높은 경지에 도달했다고 할 수 있다. 그는 여타 승려와 달리 영어와 같은 어학공부도 소홀히 하지 않았고, 개인적 수행보다 제자들을 양성하고, 해외에 불교를 포교하는 데 관심을 기울였다. 특히 그는 설교에 관해서는 단연 으뜸인 존재로 손꼽히는데, 미얀마 불교에서 최고의 설교자로 통하는 우 빤디따 승려의 제자가 되면서 실현될 수 있었다. 이에 반해 따마냐 서야도는 메따 정신에 기초한 불교 수행을 주장했지만 이는 따마냐언덕에만 머물렀고, 꼰롱 서야도의 설법에 관한 기록은 대중화되지 않았다.

이러한 차이점에도 불구하고 이들은 대중에게 스스로를 아라한이나 웨익자로 칭하면서 신도 수를 늘리는 행위를 하지 않았다. 또한 웨익자라는 명분으로 미래를 예견하는 일보다 종교 수행, 즉 따더나쀼(thatana-pyu)를 행하는 것이 불교 신도의 첫 번째 일이라는 공통된 종교관을 가졌다.

이상세계인 로꼬웃떠야(lawkawtaya)는 현세에서 쌓은 업에 의해 결정되는 그야말로 알 수 없는 미래이지만 현세 즉 로끼예(lawkiye)를 살아가는 미얀마 대중은 자신들의 안위를 보장받고 소원하는 바를 이루고자 한다. 그 과정에서 불교의 딜레마가 나타나게 되며, 현실과 이상세계의 긴장국면을 치유할 수 있는 승려들을 갈구하는 과정에서 불교는 이중적인 형태를 보인다. 미얀마 국민에게 세 명의 승려는 아라한과 웨익자 이전에 삶의 가치와 미래를 제시해 주는 미래불로 각인된다. ■

 

장준영
한국외대 동남아연구소 책임연구원. 부산외대 미얀마어과 졸업, 한국외대 대학원 국제관계학과 박사(동남아정치). 주요 관심 분야는 미얀마 정치 및 사회변동, 미얀마 정치문화, 동남아 국제관계 등이다. 최근의 주요 논저로 “The Buddhist Nationalism and its Limitations in the Colonial Myanmar: In crossing of Tradition and Modernity.”(2010), 《2010년 총선 이후 미얀마 체제 변동 전망과 그에 따른 한국의 진출 전략》(2010)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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