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교의 모국, 부흥을 꿈꾸다

1. 들어가며

기원전 5세기 인도에서 교단이 설립된 이래 불교는 철학적 통찰과 수행을 통한 교리의 체계화와 폭넓은 전파를 이루며 기존 인도사회의 지배적 이데올로기였던 브라만주의(Brahmanism)를 극복해 나아갔다. 기원후 4~6세기 굽타 시대에 기존의 브라만주의는 불교와 자이나교적인 요소를 과감하게 포용하는 일대 개혁을 통해 힌두교라는 종교로 거듭나게 된다. 이후로 불교는 국가적 후원과 신도 수 감소 등으로 쇠퇴의 길을 걷다가 마침내 10세기경부터 시작되는 이슬람 세력 침략의 여파로 인도아대륙에서 자취를 감추게 되었다. 이후 인도의 학자, 사회개혁가들이 불교 사상에 다시 눈뜨기 시작한 것은 19세기에 이르러서였으며, 20세기 초부터는 대중적 종교운동 형태의 불교 부흥이 시작된다.

현대 인도의 불교 부흥은 먼저 학문적 관심과 불교 사상의 재발견에서 비롯되었다. 19세기 후반부에 십여 개의 논문과 저서를 출간한 미뜨라(Rajendra Lal Mitra), 벵골 지방에 불교 전통이 살아 있음을 발견했던 샤스뜨리(Hara Prasad Shastri), 불교경전협회(Buddhist Text Society)의 저널을 창간했던 다스(Sarat Chandra Das) 등이 제1세대 학자로 꼽힐 수 있겠다. 1890년대에 들어서면 이러한 학문적 전통이 더욱 발전함은 물론 종교로서의 접근도 이루어지게 되는데, 마하비라(Mahavira)가 최초로 스리랑카에서 비구계를 받고 인도로 돌아와 쿠시나가라에 도량을 창건하였으며, 마하비라 스님의 열반 후에는 버마 출신인 짠드라마니(Chandramani) 스님이 도량을 이어받았다. 인도의 두 번째 출가수행자는 꼬삼비(Dharmananda Kosambi)였는데, 어린이를 위한 대중적인 글에서 시작된 그의 불교에 대한 관심은 경전에 대한 본격적인 연구와 출가수행으로까지 이어졌다. 그의 활동은 1950년대 암베드까르의 대중적 불교운동에도 큰 영향을 끼친 것으로 평가된다.

꼬삼비 이후 인도의 불교 중흥은 학문적 연구와 대중적 종교운동의 두 가지 맥락으로 전개되는데, 전자는 주로 학자−출가자들에 의하여, 후자는 주로 하층 카스트 출신의 재가 사회운동가들에 의하여 주도되었다. 학자 겸 출가자로서 불교의 학맥을 이은 것은 상끄리땨얀(Rahul Sankrityayan), 까우살랴얀(Anand Kausalyayan), 까샵(Jagdish Kashyap) 세 스님들이었다. 이들은 모두 북인도에서 성장하며 아리야 사마즈(Arya Samaj)의 사회개혁적 성향에 영향을 받았고, 불교의 이성주의적, 평등주의적 가르침을 중시하였다. 한편 대중적 불교운동은 벵골(Bengal), 따밀나두(Tamil Nadu), 마하라슈뜨라(Maharashtra), 웃따르 쁘라데쉬(Uttar Pradesh) 등의 지역에서 조직화되어 나타났으며, 이 중 따밀나두, 마하라슈뜨라, 웃따르 쁘라데쉬의 불교운동은 하층 카스트 중심의 사회개혁 운동과 맥을 같이하고 있다.

이와 같은 현대 인도불교의 흐름 속에서 본고는 불교 ‘운동’의 성격을 강하게 드러내는 따밀나두와 마하라슈뜨라의 움직임에 주목한다. 따밀나두에서 대중적 불교운동가의 선구로 활약한 아이요티 타스와 그의 동료이면서 본격적인 불교 개론서를 저술한 락슈미 나라수, 그리고 그 영향을 받아 본격적인 대중 불교운동을 시작한 암베드까르로 이어지는 현대 인도 불교운동의 흐름을 살펴본다.

2. 따밀나두 지역의 불교운동가

1) 아이요티 타스(Iyothee Thass: 1845~1914)

아이요티 타스(Iyothee Thass: 1845~1914)

남인도 따밀나두의 달리뜨 출신인 아이요티 타스는 남인도 전통의학인 싯다(Siddha) 의사로 환자들을 진료하며 자신이 속한 빠라이아(Paraiahs) 카스트회의를 통하여 하층민들의 권익 향상을 위해 활동하는 사회운동가였다. 1891년부터는 기독교 선교단체와 연합하여 사회개혁적 모임을 만들고 잡지를 발간하기 시작했으며, 바로 다음해에는 불가촉천민들도 힌두교 사원에 출입하고 학교에 다닐 수 있는 권리를 얻기 위한 캠페인도 시작했다. 아이요티 타스는 빠라이아 카스트가 아쇼카 대왕 시절에는 불교를 신봉하였으나, 이후 침략자들에게 땅을 빼앗기고 카스트는 강등되었으며, 종교적 정체성마저도 잃어버렸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는 오랜 기간의 숙고 끝에 1890년 붓다의 가르침에 진리가 있다는 확신을 갖게 되었고, 1891년에는 신지학회(Theosophical Society)의 올코트 대령(Henry Olcott)과 접촉하여 지원을 받기 시작하였으며, 마하보디협회와도 연결되었다.

1897년 이미 빠라이아 카스트회의를 주도하여 마드라스불교협회(Madras Buddhist Society)를 조직했던 아이요티 타스는 올코트 대령과의 인연으로 불교국인 스리랑카에 갈 수 있었다. 그는 1898년 스리랑카에서 비됴다야(Vidyodaya) 대학의 학장인 수망갈라 마하나야까(Sumangala Mahanayaka) 스님으로부터 5계를 수계하고 정식으로 불법에 귀의했다. 그는 귀국하자마자 마드라스에서 사캬불교협회(Sakya Buddhist Society)를 발족하고 스스로 사무총장이 되어 불교운동에 앞장섰다. 이 협회의 목적은 ‘카스트 없는 드라비다인들에게 (자신들이 가지고 있던) 불교의 역사와 전통을 알게 하고, 그 종교적 덕목과 가르침을 통하여 진보로 나아가도록 돕는’ 것이었다. 협회의 이름에 ‘사캬’라는 명칭을 사용한 것은 아이요티 타스의 출신 카스트인 빠라이야의 하위 카스트 중 하나인 ‘발루바-사캬(Valluva-Sakya)’가 바로 싯다르타 태자의 출신 부족인 사캬족의 혈통적 후손이라는 믿음 때문이었다.

아이요티 타스는 곧 《붓다: 밤낮없이 빛나는 빛》이라는 제목의 따밀어 팸플릿을 발간한다. 이 팸플릿에서 그는 소위 ‘따밀불교 프로젝트’라는 자신의 포교 계획을 밝힌다. 그는 과거 찬란했던 ‘발루바-사캬’의 역사와 불교전통이 브라만들의 침략으로 몰락하고 그 자신들은 하층 카스트로 강등되었음을 문헌연구를 통해 보여주었다. 그리고, 발루바-사캬의 영광을 재현하기 위해서는 불교사원 건설, 불교대학, 병원 등의 신설, 불교 청년조직의 활성화, 불교전통의 재현, 석가탄신일의 축제화, 불교자선기금의 형성, 그리고 불교도 등록 등의 불교 중흥 방법을 적극적으로 이용해야 한다고 촉구했다. 이에 따라 뜻을 같이하는 사람들의 모임이 형성되었는데, 창립회원들 모두가 5계를 수계한 불교도였던 것은 아니었으나 1898년부터 매주 일요일마다 정기적으로 모임을 갖고 강연 등의 프로그램을 이어 갔다.

곧이어 1900년에는 마하보디협회도 마드라스 지부를 창설했다. 사캬불교협회와 마하보디협회는 비교적 상호보완적인 활동을 펼쳐나갔으며, 1903년에는 사캬불교청년회(Sakya Buddhist Young Men’s Association)가 사캬불교협회와 마하보디협회 사무총장들의 공동후원으로 발족하기도 했다. 두 협회의 활동은 서로 구분되는 것이었으나 사캬불교협회는 마드라스를 방문하는 마하보디협회 스님들로부터 각종 행사에서 의례상 도움을 받았고, 몇몇 인사들은 두 협회에서 모두 강연을 하는 정도의 교류는 이루어졌던 것 같다.

1907년 올코트 대령의 죽음으로 사캬불교협회는 믿음직한 후원자를 잃게 되었다. 더구나 이미 이전부터 신지학회에서 베다-브라만 전통이 득세하면서 그 외의 인도 전통사상과 종교는 경원시되었다. 특히 불교는 특유의 무신론적 교리와 베다사상에 반(反)하는 개혁적 성향 때문에 사회에 혼란을 가져오는 세력으로 비난받기도 했다. 그럼에도 같은 해 아이요티 타스는 따밀어로 발간되는 불교 주간지인 〈오루 빠이사 따밀란(Oru Paisa Tamilan: 1908년부터 ‘따밀란’)〉을 창간하여 사캬불교협회의 각 지부를 연결하고, 따밀 불교의 전통을 가르치며, 세계 불교계의 흐름을 알리는 뉴스레터 기능을 하도록 했다.

또한 아이요티 타스는 불교신자였던 올코트 대령의 장례식이 불교전통에 의하여 엄수되도록 주관했고, 올코트 대령이 창설하여 운영하던 하층민을 위한 무료학교도 인수하여 훗날 정부학교로 병합될 때까지 계속해서 운영했다. 역시 같은 해 후반에는 뱅갈로르(Bangalore)와 꼴라르 금광에협회의 지부를 설치하여 집단개종 운동을 계속해 나갔으며 별도의 출판사를 설립하여 불교서적 출판에도 힘을 기울였다. 사캬불교협회 꼴라르 지부는 적극적인 회원들을 조직력 있게 운영함으로써 헌신적인 운동가들을 배출했고, 기금을 조성하여 협회에 풍부한 물적 기반도 제공했다.

이와 같이 따밀 불교운동을 궤도에 올려놓은 아이요티 타스는 따밀나두의 전통적인 문헌들을 불교적 입장에서 재해석한 활발한 저술활동과 교육의 확대, 힌두교와는 분리되는 불교의 정체성 강화 활동에 힘을 기울이며 운동을 이끌다가 1914년 69세의 나이로 갑작스럽게 세상을 떠났다.

2) 락슈미 나라수(P. Lakshmi Narasu: 1860~1933)

락슈미 나라수(P. Lakshmi Narasu: 1860~1933)
락슈미 나라수는 원래 따밀나두 출신이 아닌 뗄루구(Telugu)어를 사용하는 안드라 쁘라데쉬(Andhra Pradesh) 출신으로, 마드라스 크리스천 칼리지(Madras Christian College)에서 물리학을 가르치는 교수로 일하며 사캬불교협회의 활동 초기부터 아이요티 타스의 협력자로 함께 일해 왔다. 젊은 시절부터 인도사회에 뿌리깊은 카스트 제도에 대한 반감이 컸다고 하며 따라서 ‘전투적인’ 사회개혁가로 활동해 왔다. 아빠두라이야르(G. Appaduraiyar), 무루게삼(M. Y. Murugesam) 등과 함께 초기 사캬불교협회의 지도자들 중 하나였으며, 특히 아이요티 타스의 사망 이후로 마드라스 지부를 중심으로 한 그의 리더십이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게 되었다.

락슈미 나라수의 따밀 불교운동의 중요성은 개종자들에게 불교교리의 기본과 따밀 불교적 사회사상을 교육시킬 수 있도록 교리 체계를 마련했다는 점에서 찾을 수 있을 것이다. 1907년에는 붓다의 생애와 기본 불교교리를 담은 《불교의 정수(Essence of Buddhism)》 를 마하보디협회의 다르마팔라(Anagarika Dharmapala) 스님의 서문과 함께 출간하였다. 원래 영어로 출간된 이 책은 이후 따밀어로 번역되어 따밀 불교도들의 불교에 대한 이해의 기반이 되었다.

락슈미 나라수는 이 책에서 불교를 이성에 근거한 종교이며 도덕성 즉, 계율을 생명으로 하는 종교로 해석하며, 이 점을 불교와 기존 브라만주의적 힌두교의 가장 큰 차이점으로 보았다. 불교는 이성의 종교이다. 따라서 신, 미신, 초자연적 현상 등 온갖 ‘알려지지 않은’ 것들을 논의에서 제외시키며 현재, 이 세상에서 일어나고 있는 ‘사실’에 주목한다. 그러나 그는 맹목적 믿음이 가져올 수 있는 위험성을 경고하는 한편, 믿음 없는 이성이 인간을 열정 없는 기계로 만들 수 있음도 지적하였다. 종교란 맹목적 믿음이 아닌 이성적 사고에 의한 믿음이어야 하며, 이 ‘이성적’ 믿음이야말로 추상적 이성주의를 열렬한 희망과 사랑으로 바꿀 수 있는 것이라고 하였다.

1922년에는 두 번째 책인 《카스트의 연구(A Study of Caste)》가 출간되었는데, 이 책은 당시까지 주간지 〈따밀란(Tamilan)〉을 비롯한 사회운동 잡지들에 기고한 글들을 모아 손질한 것이다. 그는 카스트란 인도사회를 불구로 만드는 질병으로 보았다. 또한 ‘브라만과 짠달라(불가촉천민)는 똑같이 여성의 자궁에서 나왔으며 똑같은 신체를 가지고 있어 조금도 차이가 없다’는 붓다의 말씀을 인용하며 카스트에 의한 차별이 단지 브라만주의적 힌두교에서 시작되어 남인도 드라비다인들에게 강제된 제도임을 강조하였다. 이러한 그의 카스트에 대한 이론은 아이요티 타스는 물론이고 당대와 후대에 활동하던 대부분의 사회운동가들의 생각과 유사성을 보이며, 따밀 불교운동 역시 19세기 말부터 20세기에 이르는 인도의 반(反)카스트적 성향의 사회운동들과 맥을 같이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락슈미 나라수는 아이요티 타스의 사망 이후 오랜 기간 동안 따밀 불교운동을 이끌었으며, 특히 남인도불교도회의(South Indian Buddhist Conference)에서 보여준 그의 리더십은 아이요티 타스의 계승자라는 인정을 받기에 충분했다. 따밀 불교운동은 꼴라르 금광 지역의 성공적인 사례 이외에도 따밀나두 곳곳에 지부를 설치했고, 버마, 남아프리카 등 해외에까지 진출하여 지부를 만들었다. 그러나 따밀나두의 불교는 주로 도시 거주 달리뜨(Dalit)를 중심으로 소수의 사람들에게만 전파되었다. 각 지부의 회원 수는 1,000여 명 또는 그 이하에 불과했고, 대규모 집단개종으로까지는 이어지지 못했다. 회원들의 불교 개종은 마하라슈뜨라의 경우와는 달리 카스트 전체의 결정에 의한 집단개종이 아니라 꾸준한 포교 활동의 결과로 인한 개개인의 판단과 신앙에 의한 개종이었으므로 작은 조직이지만 탄탄하게 운영되었다.

따밀나두의 불교운동은 1910년대 말부터 서서히 교세가 정체되다가 1920~30년에는 뚜렷한 쇠퇴기로 접어들었다. 그 이유는 당시 따밀나두의 하층 카스트 엘리트들이 보다 강력한 정치적 운동의 색채를 띄는 비(非)브라만 운동(Non-Brahmin movement)에 대거 참여하면서, 사회운동이면서도 불교라는 종교색을 띠었던 따밀 불교운동은 상대적으로 소외되었던 것 같다. 또한, 불교운동 내에서도 보다 급진적인 인물들은 뻬리야르(Periyar)의 경우에서 볼 수 있듯이 무신론으로 기울어 종교성을 배재한 운동 쪽으로 선회했다.

결정적으로 1935년 인도정부법의 발표로 이후 실시된 각종 선거에서 하층 카스트 힌두교도에게만 의석 유보를 인정함으로써 정치에 관심 있는 많은 사람들이 선거에서 불이익을 당하지 않기 위해서 자신의 정체성을 힌두교도로 유지하려 했다. 소수로 유지되던 불교협회 회원들 중 불교도라는 종교적 정체성을 거부하는 경우가 점점 늘어나서 결국 불교도는 극소수에 그치게 되었다. 따밀나두의 자생적 불교운동은 아직까지도 그 명맥을 유지하고 있지만, 따밀나두의 불교도 수는 수천을 넘지 못하여 ‘운동’으로서의 다이내믹함은 사라져버렸다고 해야 할 것이다.

3. 마하라슈뜨라 지역의 불교운동가

1) 암베드까르(B. R. Ambedkar: 1891~1956)

암베드까르(B. R. Ambedkar: 1891~1956)
현대 인도의 불교운동은 20세기 중반 마하라슈뜨라에서 비로소 ‘대중운동’이라는 이름에 걸맞은 규모로 그 세를 확장하게 된다. 우리나라에도 이미 알려진 바와 같이 마하라슈뜨라의 불교운동을 이끌었던 이는 암베드까르라는 걸출한 인재였다.

그는 불가촉천민에 속하는 마하르 카스트로 태어나 갖은 고초를 겪으며 고등교육을 받고 평등주의를 추구하는 반(反)카스트 운동가가 되었다. 초기에는 힌두교 내에서 개혁을 추구하여 사원출입운동 등을 주도하기도 하였으나, 힌두교 내에서 카스트 개혁은 불가능하다는 점을 깨달았다. 마침내 그는 1935년 “나는 나의 의지와는 관계없이 힌두로 태어났다……. 그러나 힌두로 죽지는 않을 것이다.”라는 유명한 선언으로 개종을 선포했다.

그러나 이 개종 선언이 실현된 것은 20년 이상이 지난 후였고, 그 사이 암베드까르는 여러 가지 종교를 비교, 연구하며 인도의 하층 카스트와 평등을 추구하는 모든 인도인들에게 가장 적합한 새 종교는 무엇인가 고민했다. 그는 공식적으로 개종식을 거행하기 전에도 1950년경부터는 불교와 관련된 활동을 적극적으로 했었는데, 사실 암베드까르는 젊은 시절부터 불교와의 인연이 없지 않았다. 학사학위 시험에 합격하여 마하르 카스트 중 최초의 대학졸업자가 된 암베드까르가 지인으로부터 받았던 선물이 바로 락슈미 나라수가 지은 《불교의 정수》였으며, 그가 처음으로 접한 불교교리서가 바로 이 책이었던 것이다. 이 책은 그의 불교에 대한 관심이 깊어지고 불교로 개종을 고려했을 무렵인 1947년에는 암베드까르 자신의 서문으로 다시 출간되기도 했다.

개종 선언이 있은 후 그는 의회에 진출하여 입법권을 얻는 정치적인 방법을 이용하여 평등사회를 추구하였으며, 1940년대 후반부터는 종교에 다시 눈을 돌려 불교 관련 활동들을 병행했다. 1946년 그가 설립한 국민교육협회(People’s Education Society)는 봄베이에 대학을 설립하였는데, 암베드까르는 대학의 이름을 ‘싯다르타 칼리지(Siddhartha College)’로 명명하였다.

그는 1950년과 1952년 《마하보디저널(Maha Bodhi Journal)》에 두 편의 글을 기고했고, 비슷한 시기에 불교학자들과 종교인들의 회의에 참석하기 위하여 스리랑카를 방문하기도 했다. 1950년에는 처음으로 석가탄신일을 기념하는 모임에 참석하여 연설했고, 다음 해에는 뿌네의 시바 사원을 불교사원으로 새로 단장하는 낙성식에 참석하여 직접 불상을 안치하기도 했다. 이 자리에서 그는 불교교리서를 저술하고 있다고 밝혔고, 《붓다와 그의 법(Buddha and His Dhamma)》은 1956년에 완성되어 그의 사망 후에 출간되었다. 이 시기 암베드까르는 따밀나두의 불교운동에도 깊은 관심을 가졌고, 1950년과 1954년 사캬불교협회의 마드라스와 뱅갈로르, 꼴라르 금광 지부를 방문했다.

개종식이 거행되었던 것은 사망하기 불과 1개월 남짓 전인 1956년 10월이었다. 당시 그 자리에서 50만의 하층 카스트들이 그를 따라 개종했다고 한다. 인도에서 최초로 ‘집단개종’이 시작된 것이다. 암베드까르의 사후, 개종 행진은 더욱 거세게 마하라슈뜨라 전역으로 퍼져 나갔고, 웃따르 쁘라데쉬에서도 그의 영향으로 불교운동이 일어났다.

암베드까르의 불교 이해는 그가 남긴 교리서인 《붓다와 그의 법》을 통해 알아볼 수 있다. 여기에 나타나는 내용 중 가장 주목되는 부분은 이성주의에 입각한 불교 해석이다. 영혼의 존재와 물질의 순환을 제외한 모든 윤회를 부정한다. 비물질적 존재의 윤회를 부정함에 따라 연기설은 오로지 현세에만 적용되는 인과율로 설명되는데, 이와 같이 과학적 사고에 근거한 이성주의적 해석은 락슈미 나라수에게서 찾아볼 수 있었던 것과도 유사하다.

또한 사성제의 첫 번째 항목이며 불교에서 가장 근본적인 문제의식인 ‘고(苦)’를 외부의 세계, 즉 힌두교적 사회제도나 그에 의한 착취에서 찾으며, 투쟁을 통해 그 근원을 없애야 한다는 주장은 암베드까르의 사회사상, 정치사상과 깊은 연관을 갖고 독특하게 해석된 부분이라 할 수 있다.

암베드까르는 개종식을 거행한 후 불교운동가로서 실질적인 활동은 거의 하지 못하고 사망하였다. 그러나 그가 남긴 《붓다와 그의 법》은 인도 불교도들의 성전으로 끊임없이 읽히고 있으며 인도의 불교계는 그가 사망한 지 50년 이상이 지난 오늘날까지도 전적으로 암베드까르의 영향력 하에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4. 마치며—인도불교의 미래

현대 인도의 불교운동의 흐름을 세 명의 인물을 중심으로 주마간산 격으로 풀어내고 나니, 제한된 지면에 현대 인도 불교의 부흥에 가장 중요한 역할을 한 인물 세 명을 한꺼번에 담는 것 자체가 무리한 일이었음을 절감한다. 그러나 암베드까르 이전의 인도 불교의 상황에 대한 연구가 전무한 우리나라에 선구자들을 우선적으로 소개하는 것이 시급하다고 생각했기에 시론적으로 세 운동가의 생애와 활동을 중심으로 소개하고 그들의 사상적 흐름을 살펴보았다는 점에서 의미를 부여하고 싶다.

본문에서 살펴보았듯이 아이요티 타스는 불교로 개종하고 근대 인도 최초의 불교도협회를 조직하여 말 그대로 ‘최초의 운동가’로서 의미를 지니고 있다. 또 락슈미 나라수는 그 협회에 가입하여 아이요티 타스의 사상과 불교 이해의 직접적인 영향력하에서 불교교리를 체계화시킨 본격적인 저술활동을 하였다. 그리고 그가 쓴 《불교의 정수》는 암베드까르의 독특한 불교 이해에 근간이 되는 영향을 미쳤다.

이에 의해 세 사람의 불교 이해는 기존의 베다, 브라만 중심적인 사회사상과 종교사상을 거부하는 입장에 선다는 공통점을 갖는다. 또한 세 선구자는 공히 하층 카스트 출신으로 힌두적 사회제도에 크나큰 문제의식을 가지고 있었으며, 반카스트적인 사회사상과 그에 의한 불교해석을 하고 있다는 점도 공통된 부분이다. 그러나 인도 고대사에서의 불교를 ‘불교도이며 이민족인 아리안에게 정복당한 피정복 원주민’이라는 하층카스트의 정체성과 연관시키고 있는 아이요티 타스와 비교하여, 락슈미 나라수는 이러한 ‘정서적’ 접근을 배제하고 이성주의에 근거한 해석을 시도하고 있으며, 암베드까르에 의하여 이러한 이성주의적 해석은 극대화되고 불교의 사회사상적 측면이 크게 부각된다.

이러한 차이에도 불구하고 반카스트 사상은 20세기에 다시 시작된 인도 불교의 가장 뚜렷한 특징이며 따라서 이들은 불교의 여러 원리 중에서도 평등의 가르침을 가장 중요한 것으로 받아들인다. 이러한 경향은 대중운동으로서의 불교와 학자−승려를 중심으로 하는 엘리트 불교에서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특징으로서, 향후 현대 인도 불교에 대한 연구에서 반드시 고려되어야 하는 부분이라고 생각된다.

아이요티 타스와 암베드까르가 이끌었던 따밀나두와 마하라슈뜨라의 불교운동을 간략하게 정리하며 현대의 인도 불교에 연관되는 여러 가지 연구과제들을 확인할 수 있었다. 향후 연구가 필요하다고 생각되는 이슈를 제시해 보면 다음과 같다.

첫째, 이 글에서 다룬 인도의 불교운동은 자생적 성격으로 시작되었으나, 지도자들이 최초로 정식수계를 받고 그들에게 조직적 활동의 장을 제공한 것이 스리랑카의 마하보디협회였다는 사실에서 볼 수 있듯이 마하보디협회가 인도의 불교 부흥에 끼친 영향은 간과할 수 없다. 인도 독립 이전 마하보디협회의 인도 내 활동에 대한 연구가 이루어진다면 인도의 불교부흥에서의 마하보디협회의 역할이 보다 명백하게 규명될 것이다. 또, 벵골 지방의 자생적 불교운동에 대한 연구도 필요하다.

이들은 따밀나두, 마하라슈뜨라 지역과는 달리 하층카스트 성원들의 사회운동과 연관된 불교운동이 아니라 토속신앙의 형태로 불교를 지켜가고 있던 부족민들의 움직임이었다는 특이점이 있다. 또한 1856년 치타공에 들렀던 버마 출신의 사라메다(Sangharaja Saramedha) 스님이 남긴 ‘벵골 지방 불교도들의 타락’이라는 기록을 고려해 보건대, 토속신앙 또는 딴뜨라 계열의 종교 관습과 상당한 습합을 이루고 있었을 가능성이 있다.

마지막으로, 학자-출가자들의 불교 이해와 활동에 대한 고찰도 현대 인도의 불교 부흥을 이해하는 데 필수적이다. 현존하는 몇몇 연구들은 이들 학자-출가자들의 불교교리 이해가 대중적 불교운동에서 보이는 성향과 완전히 별개가 아니었음을 시사하고 있다. 종교를 대상으로 하는 학술 활동과 운동적 측면은 결코 따로 떨어져 양립할 수 없음을 기억하고 인도에서는 양자가 어떠한 영향을 주고받으며 발전해 왔는지 1차자료를 통한 양자의 관계 정립이 시급한 과제라 할 것이다. ■

 

이지은
인도 네루대학교 역사연구센터 연구원. 이화여대 사학과 졸업, 한국외국어대학교에서 남아시아 지역학 전공으로 석사, 인도 델리대학교 엠필(M.Phil ), 네루대학교에서 박사학위 취득. 박사학위 논문은 〈인도 하층카스트 운동: 중앙정부, 지방정치, 그리고 대안적 운동, 1947-2000년대〉. 이 외에 〈하층카스트 운동과 그 정치화의 담론: 깐쉬 람(Kanshi Ram: 1934-2006)의 사상과 활동을 중심으로〉  〈남아시아연구 리뷰: 현황과 과제〉 등의 논문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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