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제역과 살처분의 시대에 부쳐

1. 육식문화, 이대로 좋은가?

작년 11월 말 경북 안동 지역에서 시작된 구제역과 살처분(殺處分)의 여파가 해를 넘기고도 여전히 맹위를 떨치고 있어 전국의 축산농가를 사실상 공황상태로 몰아넣고 있다. 뿐만 아니라 집단 매몰지 주변에는 침출수의 하천 유입 및 2차 환경오염의 위험성이 고조되고 있는 것으로 알려져 관계 당국과 일반 국민 모두를 불안하게 만들고 있기도 하다.

이와 함께 그동안 살처분과 생매장 현장을 고스란히 지켜보아야 했던 축산 농부들의 인간적 아픔과 함께 이에 동원된 방역공무원들의 육체적 및 정신적 고통 또한 이루 말로 다할 수 없을 만큼 심각하다는 보도가 이어지고 있다. 이와 같은 일련의 비극적 사태가 벌어지게 된 근본 원인은 누가 뭐라고 해도 우리의 음식문화, 좀 더 구체적으로 말하면 육식 중심의 식단이 불러온 필연적 인과응보라고밖에 볼 수 없을 것이다. 더 많은 고기를 더 싼 값에 공급하려는 경제논리가 결국 이 지경으로까지 상황을 악화시키고 말았다는 점을 인식한다면, 이제 우리 모두 너 나 할 것 없이 차분하게 자신들의 일상적인 식생활을 생명윤리적으로 되돌아 볼 때가 되었다고 생각한다. 이런 태도의 변화야말로 불살생계를 수지하고 살기로 한 모든 불자의 가장 기본적인 마음가짐이 아닐까?

모르긴 몰라도 일상생활 속에서 우리 대부분은 오늘도 어제와 마찬가지로 고기반찬 한두 가지쯤은 반드시 포함된 밥상을 아무런 반성 없이 마주 대하고 있을 가능성이 높다. 그것이 소고기나 돼지고기 혹은 닭고기로 만든 것이든, 아니면 생선요리이든 간에 고기반찬 종류인 것만은 틀림없다는 말이다. 내일도 사정은 오늘과 크게 다르지 않을 것임은 우리의 관행적 식습관으로 미루어 볼 때 대체로 수긍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돌이켜 보면 인간들의 고기반찬이 되기 위해 자신들의 하나밖에 없는 목숨을 희생당하는 식용동물들의 짧은 일생은 한 마디로 측은하고 불쌍하기 이를 데 없다.

이는 무엇보다도 우리가 음식으로 소비하고 있는 가축들 대부분이 공장식 집약적 동물농장에서 마치 공산품처럼 기계적으로 생산되고 있는 비인도적 현실과 결코 무관하지 않다. 지금의 기성세대가 어렸을 때 시골집 주변의 논밭이나 담장 밑에서 흔히 볼 수 있었던 평화스럽고 목가적인 가축들의 생활모습과 오늘날 이른바 축산농가라고 불리는 곳에서 집단적으로 강제사육 당하고 있는 식용가축들의 억압된 삶은 그 존재 의미가 본질적으로 다를 수밖에 없다고 생각한다.

주지하다시피 자연의 본성상 돼지들은 주둥이로 땅을 파헤치고 꿀꿀대면서 진흙목욕을 하는가 하면, 서로 쫓고 쫓기는 가운데 각자 짝을 찾아 어느 순간 어른 돼지가 되는 개체적 삶의 보람과 즐거움을 맛볼 수 있어야 한다. 소들 또한 푸른 초원을 이리저리 왔다 갔다 하면서 자기가 좋아하는 풀을 뜯으면서 따뜻한 햇볕을 마음껏 쬘 수 있어야 함은 두말할 나위도 없다. 그리고 닭들은 땅을 긁거나 쪼아 댈 수 있는 공간을 제공받아야 하며, 횃대와 가끔은 날개도 활짝 펼 수 있는 환경을 제공받아야 마땅하리라고 보지 않는가. 그와 같은 광경이야말로 인간과 자연의 본래적 모습일 것이다.

불과 몇십 년 전만 해도 인간과 동물들은 이러한 삶의 조건을 서로 인정하고 공유하는 상생적 관계를 유지하고 있었다. 하지만 언제부터인가 대단위 산업단지가 되어 버린 집단축산농장의 이해타산 앞에서 이런 목소리는 아무런 반향도 불러일으키지 못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그들에게 기르는 동물들은 인간이 그렇듯이 쾌락과 고통의 감수 능력을 지닌 하나의 생명체라기보다는 다른 상품들과 마찬가지로 그저 경제적 이익을 산출해야 하는 한낱 거래품목과 같은 존재들에 지나지 않는다. 이처럼 인간과 동물들의 사이가 말 그대로 최소한의 희생을 전제로 하는, 공존공영의 관계에서 일방적으로 잡아먹고 잡아먹히는 소외와 갈등의 관계로 변모한 것은 인간들의 탐욕스러운 육식문화에서 상당 부분 그 원인을 찾을 수밖에 없을 것이다.

여기서 일반 시민의 이해를 돕기 위해 잠시 식용동물들이 처한 사육 환경과 우리의 식탁에 오르기 전까지의 과정을 있는 그대로 되돌아보기로 하자. 오늘날 이른바 농장에서 사육되고 있는 어린 새끼돼지들의 성장 환경은 말 그대로 처참하기 이를 데 없다. 식육용으로 길러지는 돼지의 90% 이상이 콘크리트와 강철로 만든 좁아터진 축사 안에서 평생 동안 갇혀 지낸다. 평생이라고 해 봐야 고작 몇 달 내지는 몇십 개월에 불과하지만 말이다. 그들은 태어나 죽을 때까지 단 한 번도 바깥나들이를 하지 못한다. 따라서 흙에서 자란 풀밭을 밟아 보지도 못한다. 심지어 대부분은 단 한 번도 마른 볏짚 더미 위에서 잠잘 수 있는 기회조차 허용받지 못한다. 그뿐만이 아니다. 최대한 빨리 도축할 수 있는 일정 수준 이상의 살덩어리를 만들기 위해 성장호르몬 주사를 맞아야 하는 것도 이들의 피할 수 없는 운명이다.

이렇게 강제로 비육된 돼지들이 도축장으로 끌려갈 무렵에는 그동안 운동 부족으로 허약해지기 일쑤다. 비정상적인 몸무게를 견디지 못한 그들의 다리는 결국 부러지게 되고, 그 고통을 참지 못한 돼지들이 날카로운 비명을 질러 댄다. 하지만 이들의 고통과 생명 보호에는 직업의 성격상 따뜻한 눈길을 줄 수 없는 무표정한 작업 인부들에 의해 짐짝처럼 끌려가는 안타까운 광경이다. 일반적으로 알려진 사실과는 달리 돼지는 정이 많고 아주 영리한 동물이며 자신에게 무슨 일이 일어날지를 미리 알고 어떻게든지 생의 마지막 순간을 모면해 보려고 발버둥치다가 어느 한순간 체념한 듯 자신의 운명을 받아들인다고 한다. 영문도 모르는 채 죽어야 하면서도 제발 한 번만 살려달라고 소리 내어 울부짖는 그 간절한 모습을 한번 떠올려 보라!

지금까지 용케도 죽지 않고 목숨이 부지되고 있다는 이유만으로 죽어야 하는 운명에 처한 소의 경우는 또 어떤가? 자세히 묘사하기는 그렇지만 도살장의 살풍경을 상상해 보는 것도 우리가 앞으로 음식문화를 개선하는 데 조금이나마 도움이 되지 않을까 생각한다. 미국의 아이오와 주 포스트빌에 있는 애그리프로세서즈는 이른바 유대교식 도살장으로 유명한 곳이다.

유대교식 도살장은 전통적으로 동물들의 목을 날카로운 칼로 단숨에 절단하는 방법을 사용함으로써 최대한 고통을 줄인 가운데 깨끗하게 도살하게 되어 있다고 한다. 그러면 피가 급속하게 빠져나가면서 소의 뇌는 몇 초 지나지 않아 무의식 속으로 빠져든다고 믿는다.

그러나 이곳을 몰래 잠입 취재한 동물보호단체들의 비디오테이프는 소들이 목이 잘리고 기관이 끊어진 상태에서도 한참 동안이나 몸부림을 치다가 마지못해 죽는 모습을 여실히 보여준다. 어떤 소들은 일어서려고 발버둥치며 그중에는 실제로 일어서는 소도 여럿 있다.

이런 끔찍한 광경이 벌어지는 동안 도살장 인부들은 잡담을 하면서 소가 완전히 숨을 거두기를 느긋하게 기다린다. 그들의 경험상 모든 소들은 결국 죽게 마련이기 때문일 것이다. 어떤 소는 놀랄 만큼 오랫동안 쓰러지지 않은 채 비틀거리며 도살장 문을 빠져나와 옆방까지 간 뒤에야 숨을 거두는 모습을 보여주기도 한다. 그 소가 짧은 생의 마지막 순간을 그렇게 몸부림치며 조금이라도 살아 있는 시간을 연장해 보려고 하는 동안 도살장 안에는 또 다른 소들이 들어와 목이 잘린 친족 소가 고통스럽기 짝이 없는 삶을 마무리하는 마지막 모습을 눈물을 머금고 지켜본다.

물론 이런 장면이 우리나라에서도 그대로 재연되고 있으리라고는 상상하고 싶지 않다. 그러나 전국 대부분의 가축처리장 상황도 이와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라고 본다. 이와 유사한 상황이 언제든지 벌어질 수 있을 것이다. 아직 숨이 붙어 있는 채로 온몸이 부위별 고깃덩어리로 해체되는 장면이 곧 그것이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엄연히 살아 숨 쉬는 하나의 생명체였던 소나 돼지 등이 먹기 좋은 포장상품으로 바뀌는 데 걸리는 시간은 고작 30~40분에 지나지 않는다. 서울의 마장동 도축장 등에서 어쩔 수 없이 죽음을 받아들여야 하는 자신들의 슬픈 운명을 그렁그렁한 눈물로 호소하는 소들의 이야기는 필자도 심심치 않게 들은 바 있다.

여기서 윤회를 믿고 있는 우리 불자들로서는 실로 만감이 교차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저들의 삶이 어쩌면 전생의 혹은 다음 생의 우리 모습을 고스란히 보여주고 있는 것일지도 모른다는 생각 말이다. 왜냐하면 현세의 인간도 자신의 업보에 따라 언제든지 축생의 삶으로 떨어질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최근에는 그동안 아무런 성찰 없이 당연하게 받아들이고 있던 우리의 이러한 음식문화를 두고 여러 가지 문제 제기가 이어지고 있다. 예컨대, 우리의 식단에 오르는 고기들의 원형, 즉 동물들(생선 포함)의 일생을 되돌아보면 아무도 함부로 고기음식을 마음 편하게 즐기지 못할 것이라는 윤리적 경고음이 끊임없이 들리고 있는 것 등이다.

이와 같은 분위기를 주도하는 유명 활동가들 가운데서도 1975년 이 분야의 기념비적 저서인 《동물해방(Animal Liberation)》을 내놓으면서 인간들이 동물을 대하고 있는 방식을 가리켜 이른바 ‘종차별주의(speciesism)’를 자행하고 있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고 일갈한 피터 싱어(Peter Singer)와 침팬지를 연구하는 동물행동학자이자 생명평화운동가로 세계적 명성을 얻고 있는 제인 구달(Jane Goodall) 등이 특히 눈에 띈다. 물론 이들 외에도 수많은 동물권리 운동가들이 세계를 무대로 활발하게 움직이고 있다.

피터 싱어는 얼마 전 짐 메이슨과 함께 쓴 《죽음의 밥상(The Ethics of What we Eat)》을 통해, 그리고 제인 구달은 케리 매커보이, 게일 허드슨 등과 함께 근래 출간한 《희망의 밥상(Harvest for Hope)》에서 반성 없는 육식문화를 새로운 방식의 채식문화로 바꾸는 것이야말로 동물의 권리를 인정하고 반성하는 도덕적 행동임과 동시에 공장식 동물농장에서 비롯되는 각종 환경오염 문제를 해결할 윤리적 대안이 될 수 있다고 강력하게 주장한 바 있다.

그러나 매일같이 대하던 밥상의 진실을 있는 그대로 적나라하게 까발리는 그들에 대한 우리의 잡식성 식성은 결코 마음이 편치 못하다. 그럼에도 이제 우리는 국내외에서 무분별하게 자행되는 육식문화에 대해 최소한의 생명윤리적 실천을 요구받는다는 이 엄중한 현실 앞에서 새삼 옷깃을 여미지 않을 수 없다고 본다. 왜냐하면 작년 연말부터 시작된 구제역(口蹄疫)의 한파와 살처분 혹은 생매장의 연속이 모든 불자에게 그 같은 인식의 전환을 새삼스럽게 촉구하고 있기 때문이다.

2. 구제역 사태의 본질은 무엇인가

새해가 밝은 지 수개월이 지났음에도 여전히 걱정과 불안의 대상이 되고 있는 구제역이란 질병은, 소나 돼지, 염소와 양과 같은 두 발굽을 가진 가축들에게 생기는 질병으로 이들의 입술이나 잇몸, 혀 또는 코, 발굽 사이에 물집이 생겨 발열과 함께 심한 고통을 야기하는 제1종 가축전염병을 일컫는다.

 그런데 이 구제역은 아직까지 특별한 치료 방법이 개발되어 있지 않은 데다 워낙 전염성이 강해 다른 가축들의 피해를 막으려면 전염된 가축을 전량 살처분(殺處分)할 수밖에 없다는 데에 방역 당국의 고충이 있다.

지난 연말에 이어 올해 2월 말까지 살처분 또는 생매장된 소와 돼지는 이미 340만 마리를 넘어섰고, 엎친 데 덮친 격으로 고병원성 조류 인플루엔자인 AI에 감염된 닭과 오리 등의 가금류도 100만 마리 이상이나 살처분되었다고 한다. 지금 이 시각 전국 각지의 축산농가 주변은 말 그대로 동물들의 공동묘지가 되다시피한 상황이다. 여기서 우리를 더욱 당혹스럽게 하는 것은 살처분에 앞서 ‘동물보호법 제11조’의 ‘가축전염병예방법’ 규정에 의거, 가스법이나 전살법 등 농림수산식품부령이 정하는 방법에 따라 고통을 최소화하게 되어 있는 법적인 절차가 대부분 무시된 채 해당 가축들이 산 채로 죽음으로 내몰리고 있다는 사실이다.

관련 전문가들의 말에 따르면 지난 20여 년간 우리나라에서 가축을 사육하는 농가 숫자는 매년 감소한 반면, 농가에서 기르는 가축 숫자는 역으로 급격하게 증가했다고 한다. 예컨대, 1990년에 농가당 평균 2.62마리이던 한(육)우가 2010년에는 6배 이상인 16.86마리로 늘어났고, 34.05마리이던 돼지는 1237.63마리로 40배 가까이 늘어났다. 닭의 경우는 이보다 증가 폭이 훨씬 더 커 462.5마리에서 4만 1,051.88마리로 폭증했다. 글자 그대로 공장식 축산 환경에서 소나 돼지, 닭 등의 식용동물들이 밀집사육 당하고 있는 것이다. 실제로 우리나라의 국토 면적 대비 식용동물 사육 규모는 사실상 세계 최고 수준이라는 평가다.

이런 상황에서 구제역과 같은 가축전염병이 창궐하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귀결인지도 모른다. 지금까지 우리나라의 밀집형 축산농가는 한마디로 전염성 바이러스의 집단 배양장이자 가축전염병의 온상으로 사실상 방치되고 있었다고 해도 조금도 지나친 말이 아니다. 그것이 결국 2조 원이 넘는 국가 예산의 낭비와 더불어 엄청난 규모로 자행된 전국 단위의 살생 행위를 초래한 근본원인이 되고 있는 것이다.

의학자들에 따르면 최근 들어 과체중과 비만에서 비롯된 것으로 의심되는 각종 심·뇌혈관 질환 및 암이나 당뇨병과 같은 성인성 질환이 빠른 속도로 증가하고 있는 것은 우리의 식습관이 전통적인 채식 위주 식단에서 육식 위주로 급속히 서구화되고 있는 것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고 한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어쩌면 문제의 심각성을 알리기 위해서라도 관계 당국에서 일주일에 하루쯤은 채식의 날로 정할 필요가 있을지도 모르겠다. 마치 1970년대에 분식의 날을 정해 강제로 시행했듯이 말이다.

근래 발생한 구제역 파동과 살처분 및 생매장되는 가축들을 뉴스로 지켜보는 많은 국민은 현장의 어느 공무원이 했다는 “그것은 차마 인간이 할 짓이 못된다.”라는 말에 누구나 공감하고 있을 것이다. 이는 아마도 우리 인간들이 인간 외의 다른 동물들(nonhuman animals)의 삶과 고통에 대해서도 마음만 먹으면 얼마든지 되돌아볼 줄 아는 이른바 도덕적 사고의 소유자들이기 때문이 아닐까 생각해 본다.

이는 비단 필자가 살생을 금지하고 있는 종교인 불교 신자이기 때문만은 아닐 것이라고 믿고 싶다. 왜냐하면 필자는 인간들의 도덕적 사고와 행동에 대한 근본적인 믿음과 기대감을 지금까지, 그리고 앞으로도 결코 포기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여기서 잠시 가만히 눈을 감고 구제역과 조류독감의 매몰 현장을 한번 떠올려 보라! 이유도 모른 채 어느 날 갑자기 포클레인에 실려 나와 미리 파 놓은 구덩이 속으로 내동댕이쳐지는 가축들의 비명과 살려달라는 몸부림이 우리의 귀와 눈에 너무나 생생하게 와 닿지 않는가? 불현듯 우리가 짓고 있는 이 공업(共業)의 과보(果報)가 어떻게 되돌아올지 몰라 온몸에 소름이 돋는 기분이다. 요즘은 한 사람의 불자로서 참으로 많은 것을 곱씹어 보게 하는 사건들이 연속적으로 일어나고 있다는 느낌을 받는다. 과연 이대로 좋은 것일까?

3. 생명윤리적 반성 없는 육식문화의 문제점

우리 모두가 조금만 관심을 둔다면 쉽게 알 수 있는 일이지만, 굳이 애써 상기하고 싶지 않은 식용 가축들의 일생은 대부분 밀집 형태의 집단농장에서 시작되고 또한 끝을 맺는다.

 이 말은 동물들이 대자연 속에서 스스로 먹이를 구하는 형태의 삶을 영위하는 것이 아니라 밀폐된 공간에서 농장으로부터 공급되는 사료를 먹으며 그야말로 죽지 못해 겨우 목숨을 유지하며 산다는 것을 뜻한다. 이들이 소비하는 사료를 만들기 위해서는 또 다른 곡물 생산지가 있어야 한다.

그것은 다른 방식의 영농에 비해 토지와 에너지, 물의 사용 측면에서 환경에 훨씬 더 큰 부담을 안겨준다. 사육장에서 강제로 살찌워지고 있는 소들이 먹는 곡물은 대부분 옥수수지만 지역에 따라서는 밀이나 또 다른 곡물인 경우도 있다. 계산 방법에 따라 다소간의 차이는 있을 수 있겠지만 대체로 1파운드(454그램)의 쇠고기를 만들어내는 데는 약 21파운드의 곡물이 필요하다고 한다.

그리고 같은 면적의 땅을 고기에게 먹일 사료를 경작하는 대신 곡물 시리얼을 생산하기 위해 사용한다면 다섯 배나 더 많은 단백질을 만들 수 있다. 돼지의 경우 1파운드의 뼈 없는 살코기를 만들기 위해서는 대략 6파운드의 곡물이 필요하다.

이에 비해 닭고기는 상대적으로 효율적이긴 하다. 왜냐하면 1파운드의 닭고기는 단지 2파운드의 곡물 사료만 필요로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여기서 유의해야 할 점은 같은 1파운드라고 해도 고기 1파운드는 곡물 1파운드에 비해 물의 함유량이 훨씬 더 많다는 사실이다. 그만큼 경제적 에너지의 낭비가 심하다는 말이다.

이처럼 동물에게 인간이 먹을 곡물을 제공하는 대가로 얻는 우유나 고기, 달걀 등은 우리가 그 곡물을 재배하는 땅으로부터 얻을 수 있는 것보다 훨씬 더 적은 먹을거리를 얻을 수밖에 없는 생산방식이라는 데에 문제의 심각성이 있다. 또한 이 과정에서 계속 단일품종만 재배하는 경작 방식도 땅의 생산력을 크게 떨어뜨리는 원인이 되고 있다고 한다.

뿐만 아니라 농기계를 가동하거나 운송수단에 사용되는 연료 및 화학비료의 형태로 쓰이는 화석연료의 양도 결코 만만치 않은데, 이 또한 환경오염의 주요 요인으로 작용하고 있다. 그렇다면 차라리 고기를 먹는 대신 직접 곡물을 식품으로 사용하는 것이 훨씬 더 이익이라는 계산이 나온다. 이는 지금 이 순간에도 약 8억 명의 인구가 고기는커녕 마른 빵 한 조각을 얻기도 힘들다는 현실을 고려해 볼 때 더더욱 가슴에 와 닿는 호소이기도 하다.

지금처럼 대규모로 이루어지는 공장식 축산 방식으로 야기되는 또 다른 환경문제는 동물농장단지를 조성하기 위해 벌채되고 있는 엄청난 크기의 삼림과 그와 같은 축산단지가 고기를 생산하기 위해 소비하는 물의 양이다. 아마존 강 유역의 열대우림은 지금도 매년 약 25,000㎢씩 사라지고 있는데, 그 자리에는 대부분 소를 키우기 위한 목초지나 다른 동물들의 사료용 콩밭이 들어서는 중이다.

그것은 곧 1분당 11에이커의 삼림이 사라진다는 것을 의미한다. 지구의 산소공급원, 즉 허파 역할을 하는 소중한 산림자원이 파괴되고 있는 곳은 비단 아프리카뿐만이 아니다. 전 세계적으로 고기의 소비량이 증가함에 따라 아프리카 이외의 지역에서도 사료용 곡물을 재배하기 위해 외견상 그다지 쓸모 있는 것처럼 보이지 않는 원시림을 갈아엎게 하고 있다. 따라서 우리의 고기 위주 식단은 비록 간접적이긴 하지만 다른 지역들의 삼림을 없애는 데 단단히 한몫을 하고 있는 셈이며, 이는 그만큼 생물종의 다양성을 감소시키는 행위에 다름 아니다. 그런 점에서 무분별한 육식문화는 이제 날이 갈수록 환경오염과 자연파괴의 직접적인 원인이 되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이에 덧붙여 육식 반대론의 주요 근거로 고기를 생산하는 데 필요한 물의 양이 지나치게 많다는 점이 지적되고 있다. 세계적으로 이용 가능한 청정수의 약 70퍼센트가 농업용수로 쓰이고 있는 실정이다. 알다시피 물이 없으면 인간은 더 이상 생명을 유지하지 못한다. 그런데 세계의 많은 지역에서 심각한 물 부족 현상이 벌어지고 있고 우리나라도 예외가 아니어서 유엔에 의해 잠재적 물 부족 국가로 지정된 바 있다. 여기서 유명한 일화 하나를 소개해 본다.

 1981년 당시 미국의 여러 지역이 가뭄으로 고통을 겪고 있을 때 〈뉴스위크〉는 “1,000파운드의 수송아지 한 마리가 마실 물이면 구축함 한 척을 띄울 수 있다.”는 다소 과장된 비유를 통해 고기를 생산하는 데 필요한 물의 양을 신랄하게 꼬집은 바 있다. 최근의 연구 결과에 따르면 쇠고기 1파운드당 평균 1,860갤런(1갤런은 약 3.8리터) 정도의 물이 소비되고 있다고 한다. 따라서 1,000파운드의 수송아지는 79만 2,000갤런의 물을 소비한 결과물이다. 그와 같은 양이 과연 현대식 구축함 한 대를 부양시킬 수 있을 정도인지는 모르겠지만 어쨌든 어마어마한 양의 물임에는 틀림없는 것으로 보인다.

생명활동의 필수요소이면서 동시에 유한한 수자원이 이렇게 낭비되고 있다면 우리의 육식문화는 근본적인 반성이 필요한 것이 아닐까? 우리가 매일 접하는 기본 먹을거리 중에서도 쇠고기는 다른 먹을거리에 비해 몇 배나 더 많은 물을 소비하고 있는 것이다. 그야말로 우리는 물 먹은 소를 먹고 있으면서도 매스컴에서 떠드는 ‘물 먹인 소’ 운운하는 말에 핏대를 올리는, 우스꽝스러운 모습들을 연출하고 있는 셈이다. 한마디로 소가 웃을 일이다.

여기서 보듯이 우리가 별다른 생각 없이 반복하고 있는 육식 습관이 말 그대로 대재앙 그 자체가 될 수도 있다. 아무튼 세계의 경제사정이 좋아지면서 고기 소비량도 덩달아 늘어나고 있지만 그만큼 환경문제도 점점 더 악화되고 있다는 현실을 잊어서는 안 될 것으로 보인다. 현재 선진국과 후진국의 한 사람당 평균 고기 소비량은 약 3배 정도 차이가 나지만 그 격차도 날이 갈수록 좁아진다고 한다.

이 대목에서 필자는 감히 지구를 살리기 위해서라도 일주일에 한 번씩은 고기를 먹지 않는 날로 정하면 어떨까 하는 생각을 진지하게 해 보았다. 그러면서 나 자신은 가능하면 고기를 먹지 않겠다는 서원을 세워 실천한 지 어느덧 7~8년이 되고 있다. 이는 에너지를 절약하기 위해 자가용 차량의 운행 횟수를 요일별 또는 자동차번호 뒷자리 숫자별로 제한하자는 말과 같은 맥락이다.

우리는 이 문제와 관련하여 《월드 워치(World Watch)》의 편집자들이 한 말을 인용하지 않을 수 없다. “‘개인이 고기를 먹느냐 마느냐 하는, 겉보기로는 사소한 문제’가 이제 지속가능성의 논의에서 중심을 차지하게 되었는데, 그 이유는 ‘환경과학이 발달함에 따라 동물의 고기에 대한 인간의 욕망이야말로 지금 인류의 미래를 위협하고 있는 거의 모든 환경 피해, 즉 삼림 소멸, 표토의 소실, 청정수 부족, 대기오염과 수질오염, 기후변화, 생물다양성 감소, 사회적 부정의, 공동체 파괴와 새로운 전염병의 창궐 등의 저변에 있음이 뚜렷해졌기 때문이다.’” 이 말은 지금까지 우리가 문제 삼은 모든 것에 대한 적절한 요약임과 동시에 그 처방전이기도하다.

자, 사정이 그렇다면 이제 우리에게는 어떻게 행동할 것인가라는 선택의 문제만 남은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그것은 ‘이상’이 ‘현실’을 압도하거나 ‘관념’이 ‘실천’을 능가하는 방식이 아닌, 말하자면 우리에게 필요한 최소한의 작은 윤리라는 형태를 띠어야 할 것이다. 필자는 그럴 때 비로소 일반인들로부터 대중성과 함께 실천적 설득력을 얻을 수 있을 것이라고 믿는다.

4. 육식은 포기할 수 없는가

세계인들에게 널리 알려진 유명한 동물보호론자이자 채식주의자들이기도 한 피터 싱어와 제인 구달, 마크 롤랜즈 등은 인간의 지나친 육식문화가 초래한 환경위기의 근본적인 해결책을 채식주의에서 찾고 있다. 그들이 보기에 지금과 같은 고기 생산방식은 해당 동물들에게 엄청난 고통을 야기할 뿐만 아니라 우리 삶의 터전인 지구환경을 송두리째 뒤흔들고 있기 때문이다. 피터 싱어는 자신이 채식을 선호한다고 해서 지금 당장 모든 사람에게 어떤 형태로든 채식주의자가 되라고 요구할 생각은 없다고 말한다. 다만 일상화된 세계인들의 육식 습관이 그로 인해 희생되는 동물들에게 어떤 고통을 주고 있는지, 그리고 그 과정에서 환경은 또 얼마나 파괴되고 있는가를 윤리적으로 한번 반성해 보자는 제안을 하고 있을 따름이다.

그럼에도 우리는 그의 일관된 학문적 입장이나 진지한 생활자세 탓에 왠지 우리 또한 채식주의자가 되어야 할 것 같은 최면에 걸리고 있다면 지나친 표현일까? 물론 선택은 개인의 자유지만 말이다. 그러나 여러 가지 이유를 들어 완전한 채식주의는 불가능할 뿐만 아니라 실제로 그럴 필요도 전혀 없다는 주장을 하는 사람들도 많다. 이에 대해서는 별도의 지면을 빌려 긴 논의를 해야 할 만큼 다양한 의견들이 제시되고 있으므로 여기서는 더 이상의 언급을 자제하기로 한다.

사실 따지고 보면 우리가 고기나 달걀, 우유 등 동물성 식품을 먹지 않는 것이 뭐 그렇게 대단한 일이 아닐지도 모른다. 고기 먹기를 포기하라는 것은 삶을 포기하라는 것도, 건강을 포기하라는 것도 아니다. 적어도 대부분의 환경에서 인간은 고기를 먹지 않고도 잘 산다. 그것도 아주 잘 산다. 이는 세계의 거의 모든 지역에서 영양학적으로 아무런 문제가 없는 수백만 명의 채식주의자들이 살고 있다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입증될 수 있다. 우리가 육식문화를 포기해야 한다면 정작 우리가 잃는 것은 소중한 생명도 아니요, 없어서는 안 될 건강도 아니다. 그저 ‘식탁 위의 어떤 즐거움’을 잠시 유보하는 것뿐이다.

이에 반해 동물들은 인간의 단순한 식도락을 위해 그들의 하나뿐인 생명을 내놓는다. 이것은 누가 봐도 불공평한 처사가 아닐 수 없다. 여기서 우리는 하나의 최소 윤리적 행동원칙을 공유할 수 있다고 보며, 이를 일상생활 속에서 구체적으로 실천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것은 다음과 같은 형식의 행위원리가 될 것으로 보이는데, 이는 불살생계에 바탕을 둔 불교적 작은(최소) 윤리로도 거듭날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한다.

이를테면 다음과 같은 원리가 이에 해당할 수 있을 것이다.

“도덕적 지위를 가진 어떤 존재를 죽이거나 상해를 입히는 것에 대해 대안 A가 존재하고, 이 대안 A가 도덕적 지위를 가진 어떤 존재를 죽이거나 상해를 입히지 않고도 동일한 행위자에게 같은 이익을 충족시킨다면, 우리는 대안 A를 행해야 한다.”

이러한 원리는 동물을 음식이나 의복으로 소비하고 있는 우리 인간들에게 곧바로 적용될 수 있다고 본다. 즉, 우리가 고기로부터 얻고자 하는 어떤 이익을 다른 방법으로도 획득할 수 있다면 우리는 당연히 그렇게 해야 옳은 것이다. 인간들에게 고기는 사치품이지만 동물들에게는 자신의 둘도 없는 생명과 관련된 필수품이다. 따라서 고기를 섭취하지 않으면 우리의 생명이 위태롭지 않은 한 우리는 굳이 동물을 잡아먹을 필요가 없게 된다. 또한 멋과 품위를 위해 가죽옷이나 모피 옷을 걸치는 것은 그것의 재료로 쓰인 동물들의 목숨을 담보로 한 것이라는 점에서 이 또한 비윤리적인 행위에 해당할 것이다. 따라서 필자 역시 가능하다면 육식문화를 채식문화로 바꾸는 것이야말로 그것으로 인한 환경오염 및 반(反)생명윤리적 문제를 조금이라도 해결할 수 있는 실질적 방법이라는 결론에 도달하게 된다. 그러나 현실적으로는 필자 자신부터도 완전채식주의자로 전환이 결코 만만치 않을 것이라는 두려움이 앞선다.

필자와 같은 보통사람들에 대해 제인 구달은 그럼에도 채식주의를 선택하는 길만이 한정된 자원을 이용하면서 지속가능한 방식으로 살아야만 하는 인류의 미래를 담보할 현실적 대안이 될 것이라고 주장한다. 사실 누구에게나 육식을 완전히 포기하는 일은 결코 쉽지 않은 일이다. 그러나 육류의 소비를 위해 벌어지고 있는 갖가지 일들에 대한 유쾌하지 않은 진실을 알게 되면 대부분의 사람들은 육류의 섭취를 크게 줄이거나 기껏해야 방목해서 키운 유기농 가축의 고기만을 먹을 수도 있고, 아니면 이참에 아예 육식을 포기하게 될지도 모른다는 것이 제인 구달의 희망 섞인 관측이다.

누구나 짐작할 수 있듯이 고기를 대량으로 생산하는 과정에는 가축들의 생존권과 행복추구권만 희생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먹는 바로 우리 인간들의 건강까지 희생되고 있다는 사실을 명심할 필요가 있다. 정도의 차이는 있겠지만 공장식 사육장이든 풀을 먹여 기르는 방목형 농장이든, 가축을 집단적으로 사육하는 곳에서는 어김없이 생태계의 파괴를 불러온다.

피터 싱어나 마크 롤랜즈도 같은 맥락의 주장을 되풀이하고 있다. 피터 싱어에 따르면 우리 모두는 어떤 형태의 식품 소비자들일 수밖에 없으며, 따라서 식품을 소비하는 과정에서 누구나 어느 정도는 식품업체들이 야기하는 환경오염과 직간접적인 관계를 맺게 된다는 것이다. 그는 한 해 동안 60억의 인구가 음식으로 소비하고 있는 육지동물만 약 500억 마리라고 추산한다. 그들 가운데 대부분은 생애 전체를 구속받고 있으며 소속된 공장식 농장의 주도면밀한 생산계획에 따라 억지로 태어나 마치 자동차 공장의 부품과 같은 취급을 받으면서 마지못해 살다가 오로지 인간의 미각을 위해 살육되는 정해진 길을 걷고 있다. 뿐만 아니라 여기에 더해 수십억 마리의 물고기나 다른 해양 생물들이 횟감이나 매운탕거리로 도마 위에서 토막 나고 있는 실정이다. 그런 와중에 각종 화학물질과 호르몬제는 끊임없이 강과 바다로 흘러들어 지구 생태계를 심각하게 위협하고 있는 것도 더 이상 방치하기 힘든 현실이다. 이 모든 것이 우리의 잘못된 먹을거리 선택에서 빚어지고 있는 일임을 잊지 말아야 한다.

그렇다면 우리는 최소한 지금보다는 더 나은 선택을 고민해 보아야 하지 않을까? 그리고 이러한 태도의 변화는 곧 인류의 도덕성이 그만큼 진보하고 있다는 또 다른 반증이기도 하다는 자부심을 가져 보자. 이와 관련하여 피터 싱어는 육식문화와 그것이 환경에 미치는 재앙에 대해서도 우리가 확실한 윤리적 관점을 취하는 것이야말로 그것의 해결책이 될 수 있다고 힘주어 말한 바 있다. 그는 항상 그래 왔듯이 윤리는 이론을 넘어 구체적 실천이 수반될 때 비로소 현실적인 의미를 획득하게 된다고 보는 것이다. 그것은 결코 어려운 일만은 아니다. 우리가 앞에서 제시한 최소윤리의 작은 실천만이라도 지금 당장 행동으로 옮긴다면 충분히 가능한 일이기도 한 것이다. 다만 우리에게는 결심하는 일만 남은 것으로 보인다.

5. 거듭 생명윤리적 삶을 촉구하며

지금까지의 논의에서도 은연중 드러나고 있듯이 개인적으로 필자는 부처님의 가르침을 삶의 지렛대로 삼는 사람들은 무엇보다도 오계의 으뜸인 불살생계의 취지를 철저하게 이해하고 행동으로 실천하여야 한다는 윤리적 신념을 가지고 있다. 물론 나머지 계율들도 불살생계 못지않게 중요하다는 것은 두말할 필요도 없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부처님의 가르침의 핵심은 바로 이 불살생계에 있다고 믿고 싶다. 따지고 보면 불교가 유일신앙 계통의 다른 종교와 비교우위를 점할 수 있는 부분도 바로 여기에 있지 않겠는가? 그것은 불교의 생명평화 이미지를 상징하는 계목이자 생태위기에 직면한 오늘날의 세계적 상황과도 호응하는 측면이 적지 않다고 본다.

주지하다시피 불교는 현대인들의 주요 관심사인 환경이나 생태 또는 생명의 문제와 관련하여 어느 종교보다도 중요한 메시지를 담고 있는 사상으로 알려져 있지만, 실천적인 차원에서는 그에 부합하는 면모를 제대로 보여주지 못했다는 안팎의 비판을 받고 있는 것이 엄연한 현실이다. 그 이유는 무엇보다도 불교계 전반의 분위기가 ‘문법(교학)’으로서의 불교 지식을 우선적으로 강조하다 보니 이를 현실에 맞게 ‘회화체(계율의 현대적 해석)’로 표현하는 것에 대해서는 별다른 관심을 보이지 않았던 탓이 아닐까?

부처님은 누구보다도 생명을 귀중하게 여겨 초목을 베거나 땅을 파는 것조차 금지시키지 않았던가? 풀과 나무도 엄연히 하나의 생명체라는 사실을 가르치고 있을 뿐만 아니라 땅속의 벌레조차 도덕적 고려의 대상으로 삼았다. 심지어 병난 경우가 아니라면 풀 또는 물 위에 대소변을 보거나 침을 뱉는 것조차 금하셨다. 그것으로 인해 풀이 죽거나 물속의 벌레가 해를 입을 수도 있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우리 불자들은 이런 부처님의 생명존중 사상을 결코 소홀히 다루어서는 안 된다. 그것이야말로 이 땅에 사는 모든 불자들이 반드시 가슴에 새겨 두어야 할 일이라고 본다.

그렇다면 구제역과 그것의 전염을 막기 위한 것이라는 이유로 벌어지고 있는 비인도적인 살처분은 불교 생명윤리의 입장에서 볼 때 더 이상 계속되어서는 안 된다. 그것이 이 문제에 대한 가장 간단한 답변이라고 생각하며 이는 우리의 음식문화가 점차 고기를 줄이는 방향으로 바뀌는 것 외에 다른 어떤 특별한 해결책은 없다고 본다.

결론적으로 말해 문제 해결의 근본적인 출발점은 우리 모두가 지금보다는 조금이라도 고기를 덜 먹겠다는 서원을 세우고 곧바로 실천하는 일이라고 본다. 여기서 우리는 너무 걱정하지 않아도 좋을 듯하다. 왜냐하면 부처님께서도 고기의 출처를 잘 헤아려서 골라 먹으라고 하셨지 어떠한 경우에도 고기를 절대로 먹지 말라고 하신 적은 없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고기를 먹지 않겠다는 서원을 했다고 해서 앞으로는 고기를 단 한 점도 먹을 수 없게 될 것이라는 염려는 잠시 접어 두어도 좋을 것 같다는 생각이다. 개인적으로는 이와 같은 실천가능한 최소한의 작은 윤리적 인식의 공유야말로 역설적으로 불교적 의미의 중도 논리가 될 수 있을 것이란 기대를 가지고 있다. 작은 실천 하나가 부처님의 가르침을 더욱 돋보이게 할 수도 있다면 이런 행위야말로 불교윤리의 현대적 재해석이 아닐까? 이제 남은 일은 각자가 매일 아침 ‘사소하지만 오늘 중에 꼭 실천하지 않으면 안 될 행동’ 한두 가지씩을 가슴에 새기고 일상생활에 임하는 것이라고 말하고 싶다.

육식습관과 관련하여 우리가 행동으로 옮겨야 할 작은 실천 하나는 지금 이 순간부터 곧바로 고기음식을 가능하면 덜 자주, 그리고 더 적게 먹겠다는 다짐을 하고 이를 반영한 몸짓을 직접 보여주는 것이다. 필자가 보기에 이 정도의 보살행은 불살생계를 수지한 불자라면 누구나 어렵지 않게 할 수 있는 일이라고 생각한다. ■

허남결
동국대학교 윤리문화학과 교수. 동국대학교 대학원 윤리학과에서 박사학위 취득. 영국 더럼대학 철학과 객원연구원 역임. 《존 스튜어트 밀−생애와 사상》 《공리주의 윤리문화 연구》 《불교와 생명윤리학》 등 다수의 역서와 논·저서가 있다.

저작권자 © 불교평론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