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의 많은 바람직하지 못한 일들이 말에서 비롯하는 것은 예나 지금이나 마찬가지인 듯하다. 그래서 옛사람들도 시조나 가사(歌辭), 일화를 통해 말 많은 것이 화를 불러옴을 경계했나 보다. 선인들은 입이 한 개고 귀가 두 개임을 들어 되도록 적게 말하고 많이 들으라고 가르친다. 돌이켜 보면 일상생활이나 인간관계에서도 침묵이 문제 되는 경우는 거의 없다.

말이 많으면 실수를 하고 후회를 하게 되는 것이 인지상정이다. 말과 침묵의 균형이 중요하다. 옳은 말이라도 상황에 따라서 ‘해서는 안 될 말’이 있는가 하면, ‘해서는 안 될 때’가 있고 ‘해서는 안 될 사람’도 있다. 말하기 전 듣는 사람의 입장과 처지를 한 번쯤 생각해 보는 것도 실수를 줄이는 데 도움이 될 것이다. 흉중에 있는 말을 여과 없이 쏟고 나면 잘못을 범하지 않았더라도 허탈해질 수밖에 없는 법이니까.

카프카의 짧은 산문 〈사이렌의 침묵〉에 흥미로운 이야기가 나온다. 트로이 전쟁이 끝나고 영웅 오디세우스가 고국 이타카로 귀환하던 중 바다에서 조우한 요정 사이렌(Siren)의 유혹으로부터 온전히 자신을 지켜낼 수 있었던 것은, 사람들이 흔히 말하듯 가희(歌姬)들의 새된 노랫소리가 아닌, 침묵에 대비한 때문이라는 것이다. 침묵의 중요성을 낯설게 일깨우는 카프카적 언어의 변주요 레토릭이 아니겠는가.

미국의 남성 듀오 사이먼과 가펑클은 영화 〈졸업〉에 삽입된 〈침묵의 소리(The Sound of Silence)〉에서 “사람들은 지껄일 뿐 진심을 담아 말하지 않고(people taking without speaking)” “흘려들을 뿐 귀담아듣지 않는다(people hearing without listening)”고 탄식한다. 사물의 겉모습이나 드러난 현상에 혹하지 말고 숨겨진 본질을 보라는 메시지가 녹아 있는 것이다.

말한다고 참으로 말하여지는 것이 아니고 그렇게 보인다고 정작 그대로인 것 또한 아니다. 사물의 참모습은 보이는 것 너머에 있거나 들리는 것의 이면에 존재하는지도 모른다. 불교에서 말하는 ‘소리를 본다(觀音)’라는 표현도 마찬가지 이치를 논하는 것이다. 플라톤이 설파한 ‘이데아(Idea)’의 세계와 칸트가 언급한 ‘물자체(物自體·Ding-An-Sich)’도 같은 맥락으로 와 닿는다.

말보다 큰 소리는 웅변이고, 웅변보다 더 울림을 주는 소리는 속삭임이며, 속삭임보다 굉량(轟量)한 소리는 침묵이다. 침묵하지 않은 사람은 침묵이 내는 소리를 들어 본 적이 없으므로 침묵의 위대함을 모른다. 폭풍우 치는 날 바다에 가 보면 바다가 울부짖는다. 그러나 그것은 바다의 피부요 겉모습이다. 바다의 은밀한 속살은 볕도 들지 않은 어두운 밑바닥에 있다. 쥐눈의 가오리가 모래먼지를 일으키며 파묻히고 작은 물고기 떼가 놀란 듯 방향을 바꾸며 검은 해초가 하늘거리는 돌 틈 새 물뱀이 수줍은 듯 얼굴을 내미는 곳. 바다를 보려면 밑바닥으로 내려가야 한다. 그곳에 물길의 본류(本流), 해저의 정밀과 충일(充溢), 바다를 바다이게 하는 참모습이 있다.

비트겐슈타인은 《논리학 논고(Tractatus)》에서 “대강 말할 수 있으면 완전히 말할 수 있는 것이고, 대강 말할 수 없는 것에 대해서는 침묵하라.”고 갈파했다. 신문을 들추면 우울한 소식들로 마음이 무겁다. 작금의 우리 사회는 단축공정과 고도성장의 후유증으로 인해 공공선과 인간정신의 고양(高揚)보다 세속적인 영달과 부의 축적을 중요시하는 분위기가 만연돼 있다. 비트겐슈타인의 화법을 인용하면 그러한 경쟁의 와중에서 ‘대강도 말할 수 없는’ 사람들이 더욱 목청을 높이는 형국이다.

 눈에 보이는 것들의 소유와 성취는 지속적이고 순도(純度) 있는 기쁨을 가져다주지 않는다. 또한 그러한 성과물은 보여주고자 하는 바로 그 대상에 힘입어 선취한 것일 수도 있다. 치열한 경쟁의 과정에서 어쩔 수 없이 생긴 소외된 이웃과 사회가 드리운 어두운 그림자를 응시해야 하는 소이(所以)다.

 무릇 사람은 침묵해야 할 때 침묵해야 한다. 그렇다고 말할 수 있으면서도 말해야 할 때 침묵을 빌어 그 속에 숨는 것 역시 떳떳지 못하다. 우리에겐 때로 ‘아니다’라고 부정하는 용기가 필요하다. 뒤틀린 사회현실, 시대정신의 오도, 역사적 대의를 거스르려는 기도, 인간의 존엄과 품위를 해치는 온갖 잘못된 일에 대하여…….

그러나 요란한 다수의 목소리에 편승하거나 짜 맞추어 놓아 경직된 이념의 틀에 기대어 사물을 재단하는 것은 병상첨병(餠上添餠)의 우(愚)를 범하는 것이리라. 개개의 사상(事象)과 이슈에 대해 선현의 지혜, 종교적 가르침, 스스로 깨우친 가치관, 치우침 없는 상식과 보편적 정서에 입각한 판단에 의거해 말해야 하지 않을까.

본디 말과 침묵은 같은 것이어야 한다. 말은 숨겨진 ‘나’의 표출이고 침묵은 내면에서 소리치는 ‘나’의 음성이니 소크라테스가 들은 ‘다이몬(Daimon)의 소리’에 다름 아니다. 말과 침묵은 제각기인 것이 아니라 ‘상즉(相卽)’으로 맞물려 있으니, 침묵은 말의 휴지(休止) 상태이되 그냥 잔류하는 것이 아니라 치열한 준비 기간이 돼야 한다. 미당 서정주의 시어처럼 “한 송이 국화꽃을 피우기 위해” “간밤에는 무서리가 그리 내리고” “천둥은 먹구름 속에서 또 그렇게” 우는 것이다. 한 마디 우레 같은 말을 하기 위해 고독한 사색과 기나긴 침묵의 터널이 필요한 것이려니.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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