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나라 여성의 고학력화가 뚜렷해지는 현상은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다.

정부 통계에 따르면 1980년대 이후 출생자의 남녀 학력 비율을 살펴볼 경우 이미 2000년에 여성 대졸자 수가 남성 대졸자 수를 추월했다고 한다. 딸이기 때문에 받았던 편견과 교육 기회의 남녀 차별성이 없어져 우리나라의 교육수준이 그만큼 높아졌다는 반증이다. 최근 미국 여성의 석사 이상 고학력자는 물론이요 대학 졸업자의 비율이 이미 15년 전에 남성을 넘어섰다는 통계에 비하면 늦은 감이 없지 않지만, 한국사회에서 여성 인권이 남성과 비등해진 것은 가치 논리로 볼 때 지극히 당연한 일이다. 

이 같은 사회현상을 한국 불교교단에 비춰 살펴보자. 출가양중의 한 축을 형성하고 있는 비구니의 고학력화 현상도 이미 오래전의 일이다. 1990년대 이후 출가 여성의 대학 졸업자 비율이 해를 거듭할수록 높아지고 있다. 2011년 기준 동국대와 중앙승가대 졸업생이 1천2백여 명에 이르고 석·박사과정을 졸업한 비구니가 5백여 명을 웃돈다는 수치가 그 반증이다. 이는 곧 출가본연의 수행과 함께 교단의 종무행정과 사회적 역할 면에서 비구니의 능력과 자질이 충분하다는 전제를 말해 준다.

잘 알다시피 비구니는 비구와 다르지 않은 수행자이면서도 여성이라는 신분에 갇혀 있다. 적지 않은 비구니들이 출가 당시 ‘팔경계법(八敬戒法)’과 ‘여인은 성불할 수 없다’는 이른바 ‘여인오장설(女人五障說)’을 접하고 은연중 의기소침해진 결과 매사 소극적인 사고방식과 폐쇄적인 행동을 보인다는 지적을 받아온 것은 그 때문이다. 부처님 스스로가 교단 내 인격 평등을 구현한 사실은 물론이고, 일체중생 실유불성(一切衆生 悉有佛性)으로 상징되는 불교의 평등주의와 상구보리 하화중생(上求菩提下化衆生)으로 상징되는 불교의 구세주의와도 전면 배치되는 교단의 구조적인 모순이 그와 같다.

비구니들의 소극적이고 갇힌 사고는 비구니들 스스로도 가장 큰 문제점으로 지적하는 사항이다. 단지 비구니라서, 단지 여성이라는 성적 차별에 갇혀 종회 같은 주요한 공개 석상과 사회활동 현장에서 자신의 견해를 분명히 밝히지 못하는 경향이 농후하다는 성찰이 그것이다. 수많은 비구니를 역사 속에서 지워 버린 우(愚)를 범하게 된 전후사정도 그와 무관하지 않다. 출가승단을 반분하는 요체이면서도 스스로의 행적을 세상에 드러내지 못한 저간의 실정은 그와 같은 현상의 부인할 수 없는 단면이다.

근현대기로 접어들면서 다행히 비구니 승가의 세계(世系)가 형성되고, 그에 기반한 문도 결집이 이뤄진 사실은 그나마 고무적인 현상으로 평가받고 있다. 독립적인 은상좌연(恩上佐緣)과 선풍호지 활동을 비롯해 강맥 전승과 율맥 전수 등의 활발발한 계맥(系脈) 형성이 마침내 문중 확립으로 결실을 보게 된 것이다. 불가(佛家)의 고승은 비구만이 존재해 왔다는 저간의 사정과 문중 개념의 비구 독점 시각을 비로소 교정하기 시작한 것은 이로부터다.

필자는 10여 년 전 근대기 비구니의 행장을 처음 정리한 단행본 《깨달음의 꽃》을 펴내면서 “한국불교의 보루는 비구니다.”라는 명제를 천명한 바 있다. 불교 본연의 목적성을 실현할 수 있는 청정도량 가꾸기에서부터 전법·수행과 요익중생의 사회복지 활동에 이르기까지 현하 비구니들이 보여주는 모습에서 한국불교의 미래를 담보해도 부족하지 않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비록 육체적으로는 연약한 여성이지만 비구 못지않은 기개와 각오로 수행과 교화의 모범을 보이고 있는 현실에서 한국불교의 희망을 놓을 수 없다는 기대가 컸기 때문이다. 물론 그러한 기대는 지금도 유효하다.

그래서다. 10여 년 전에 비해 비구니를 조명하는 학술의 장이 적잖이 확산되었다고는 하나, 여전히 역사 속에 박제된 비구니들을 수면 위로 끌어내 생명성을 불어넣는 작업은 시각을 다툰다. 비구와 함께 교단의 역사를 이어온 주체이면서 스스로 역사 속에서 사라져 버린 지난날의 우를 온전하게 벗어내는 일도 시급하다. 역사 속의 비구니가 우리에게 어떤 모습으로 다가오고 있는가를 화두로 부여잡고 오늘과 내일의 모습을 일궈 가야 하는 이유는 그 때문이다. 행적은 물론 당대의 사회적 배경에 기반한 활약상을 남김없이 기록해 후세에 전하는 일은 후학들에게 소중한 이정표로 작용한다는 사실을 가볍게 생각해서도 안 된다. 역사에 대한 무지, 그것은 역사에 대한 반역과 다름 아니다. 역사는 현재와 미래를 보다 발전적으로 이끄는 지고한 교훈이요 생명력 넘치는 지표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또 간과해선 안 될 사항은, 교단 내에서 비구니의 위상을 정립해야 하는 주체도 비구니요, 그와 맞물려 의식을 개혁해야 하는 대상도 비구니라는 냉담한 현실이다. 비구니는 출가 즉시 성을 초월한 수행자일 뿐이다. 비구니의 위상이 크게 향상된 현실을 기꺼이 수용한다고 하더라도, 여전히 비구니 스스로 팔경계법의 수칙을 위의(威儀)로 삼거나 여인오장설에 갇혀 변성남자성불설(變姓男子成佛說)에 의지하는 사고유형을 탈피하지 않고서는 불교 본연의 수행과 교화의 진정한 가치를 구현해 낼 수 없다는 역설적인 명제를 곱씹고 곱씹어야 한다는 말이기도 하다.

여성이 아닌 출가수행자로서 교단 내부와 우리 사회의 모든 분야에서 비구니 스스로의 역할과 권리와 책임을 당당하게 주창할 수 있어야 한다는 당위성을 강조하는 까닭은 그 때문이다. 교단 내의 성차별을 극복하고 비구니의 위상을 정립할 수 있는 방안과 출가양중의 요체로서 제 기능을 확보해 불교 중흥의 주역으로 거듭나는 일은 그로부터 가능할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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