벌써 올해도 중반에 접어들었다. 어릴 적에는 나이 먹는 것이 어른이 된다는 기대로 기다려지기도 했던 것 같은데 인생 중반을 넘어서고 보니 세월 가는 것 자체가 아쉽기만 하다. 누구에게나 이쯤 되면 더 이상 가지 말고 머물렀으면 하는 것이 솔직한 마음일 것이다.

그동안 정신없이 달려온 삶이었지만 아직도 하고 싶은 것들이 왜 그리 많은지 욕심이란 끝이 없는가 보다. 나이가 들수록 여유를 찾고 버릴 것은 버리면서 비워 나가야 한다고 다짐하면서도 그게 쉽지가 않다.

필자는 약 10년 전부터 여행과 등산의 즐거움에 깊이 빠지게 되었다. 근년에는 마치 젊었을 때 다니지 못했던 곳을 이제 모두 섭렵해야 하는 것같이 서두르고 있다. 그냥 취미 정도가 아니라 바보처럼 몰입하는 수준이라고나 할까. 주말이나 휴일에는 거의 어김없이 배낭을 메고 집을 나선다. 그리고 어디론가 떠난다. 젊었을 때는 무심코 지나쳤던 곳, 별로 관심이 없던 곳도 이젠 모두 새로움으로 다가온다. 볼수록 아름답고 경이롭게 느껴진다. 고은 시인의 짧은 시 “내려갈 때 보았네/ 올라갈 때/ 못 본// 그 꽃”의 의미가 바로 이런 마음이 아닐는지. 아무튼 이게 욕심인지 집착인지 잘 알 수 없다.

얼마 전 〈버킷 리스트(Bucket List)〉라는 영화를 본 적이 있다. 암에 걸려 6개월 시한부 선고를 받은 두 노인의 이야기다. 자동차정비공으로 평생을 살아온 카터 챔버스라는 흑인과, 병원 오너이면서 억만장자인 에드워드 콜이라는 백인 노인이 우연히 같은 암병동에 입원해 있으면서 의기투합하여 살아 있는 동안 하고 싶은 일을 나열한 소위 ‘버킷 리스트’를 작성한다. 그들은 그 리스트를 가지고 가족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홀연히 병실을 떠나 그 짧은 기간 동안 하나하나 마지막 하고 싶은 꿈, 가고 싶은 여행을 성취해 나간다.

스카이다이빙도 하고 카레이싱도 해 보고, 인도 타지마할 여행도 하고, 눈물 날 정도로 실컷 웃어보기도 하고…… 그들은 하고 싶은 것을 이룰 때마다 리스트에서 그것을 하나하나 지워 나간다. 백인 노인의 리스트 중에는 ‘우주의 장엄한 풍경을 보는 것’도 있는데 그 소원은 죽어서 히말라야 만년설에 유골이 묻히는 것으로 푼다. 한글로 번역된 부제도 “죽기 전에 꼭 하고 싶은 것들−마지막 순간까지 아낌없이 즐겨라”이다.

우리에게 앞으로 살아 있는 동안 정말 해 보고 싶은 것은 무엇들이 있을까. 아직은 갈 길이 먼 필자의 경우에도 갑자기 버킷 리스트를 작성해 보고 싶은 생각이 든다. 그동안에는 두서없이 살아왔지만 이제부터는 뭔가 진정 해 보고 싶은 것, 꼭 가 보고 싶은 여행 등을 리스트업 해 놓고 우선순위대로 차곡차곡 실천해 보고 싶기도 하다. 마치 영화 《버킷 리스트》의 스토리처럼 말이다.

또 ‘버킷 리스트’의 한구석에 죽음을 가정하고 미리 유언을 남기는 방법 등으로 ‘이별 연습’도 넣어보면 어떨까. 유언이란 죽기 전에 마지막으로 남기는 말이다. 따라서 이 땅을 떠나는 마지막 순간에 남기는 말이므로 가장 진실한 마음이요 진솔한 언어일 것이다.

3년 전 우리나라의 대표적 시인 73명이 《시로 쓴 유언》이라는 시집을 펴낸 적이 있다. 우리는 일상 속에서 너무나 흔하게 죽음이란 말을 접하고는 있지만 정작 나와는 아무런 상관없는 일처럼 생각하고 또 그렇게 여기고 싶어 한다. 그러다가 죽음에 임박해서야 죽음 앞에 아무런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다는 것을 깨닫는다. 그렇기에 아무런 준비 없이 죽음을 맞이할 것이 아니라 건강한 모습으로 살아가는 지금, 미리 죽음에 대한 두려움을 이겨내고 ‘좋은 죽음’으로 맞이할 수 있도록 준비할 필요도 있다.

73명의 필진 중 한 분인 오세영 시인은 “이 시집은 죽음에 관련된 내용의 시들을 모아 묶어낸 사화집이다. 그러나 기실 그것은 삶의 진정성을 탐구한 내용의 시들이라고 말해야 더 옳을 것이다. 왜냐하면 진정한 삶은 진정한 죽음 의식 없이 이루어질 수 없기 때문이다. 빛이 있음으로 그늘이 있듯 삶이 있으므로 죽음이 있는 것이다.”라고 말했다. 그는 〈무엇을 쓸까〉라는 제목의 유언 시로 “무엇을 쓸까./ 탁자에 배부된 답지는/ 텅 비어 있다./ 전 시간의 과목은 ‘진실’/ 절반도 채 메꾸지 못했는데/ 종이 울렸다./ 이 시간의 과목은 ‘사랑’/ 그 많은 교과서와 참고서도/ 이제는 소용이 없다./ 맨손엔 잉크가 마른 만년필/ 하나,/ 그 만년필 붙들고/ 무엇을 쓸까./ 망설이는 기억의 저편에서/ 흔들리는 눈빛/ 벌써 시간은 절반이 흘렀는데/ 답지는 아직도 순백이다./ 인생이란 한 장의 시험지,/ 무엇을 쓸까./ 그 많은 시간을 덧없이 보내고/ 치르는 시험은 이제/ 당일치기다.”라는 글을 남기기도 했다.

법정 스님은 《무소유》에서 “죽게 되면 말없이 죽을 것이지 무슨 구구한 이유가 따를 것인가. 스스로 목숨을 끊어 지레 죽는 사람이라면 의견서(유서)라도 첨부되어야겠지만, 제 명대로 살 만치 살다가 가는 사람에겐 그 변명이 소용될 것 같지 않다. 그런데 죽음은 어느 때 나를 찾아올는지 알 수 없는 일이다. 죽음이 언제 어디서 내 이름을 부를지라도 ‘네’ 하고 선뜻 털고 일어설 준비만은 되어 있어야 할 것이다. 그러므로 나의 유서는 남기는 글이기보다 지금 살고 있는 ‘생의 백서(白書)가 되어야 한다.”라고 말한 적이 있다.

우리는 이 세상에 나올 때 맨몸으로 태어났다. 그리고 살 만큼 살다가 이 세상을 떠날 때도 빈손으로 갈 것이다. 법정 스님은 “아무것도 갖지 않을 때 비로소 온 세상을 갖게 된다는 것은 무소유의 또 다른 의미”라고 말하시기도 했다. 스님은 또 ‘집착은 괴로움’이라고 했다. 법정 스님이 말한 ‘무소유’는 주로 ‘물건이나 사람의 소유’에 관해서 말한 것 같은 데 필자와 같은 ‘여행이나 산행 욕심’은 ‘소유, 무소유’와는 관계가 없는 것인지 궁금하기도 하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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