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의 근대, 불교의 재발견

1. 들어가면서

‘근대’라고 하는 말은 왠지 낯설다, 적어도 ‘불교’와 관련지어 보는 한에서는 말이다. 우리에게 있어 불교와 ‘근대’ 혹은 ‘근대화’는 그만큼 동떨어진 별개의 것으로 인식되는 경향이 강하다. 왜일까?

근대 혹은 근대화라는 말은 상당 부분 ‘서구’ 혹은 ‘서구화’라는 용어와 동질성을 지닌다. 이 부분까지는 아시아의 여러 다른 나라와 그리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다. 그런데 우리는 근대화에 좀더 다른 의미를 부가해서 바라본다. 서구화를 가끔 ‘기독교화’라는 의미로 이해하기 때문이다.

근대를 만들어낸 서구 세계가 기독교 세계였던 데서 비롯되는 인식이기도 하고, 혹은 우리의 근대화가 기독교적 가치관과 강하게 결부되어 있던 서구 세계 닮아가기였던 데서 나온 인식이기도 하다. 근대화 과정에서 우리는 다른 어떤 나라들 못지않게 서구 세계 닮아가기에 골몰했고, 그 결과 중의 하나가 기독교의 급속한 성장이었다. 그리고 그러한 성장은 반대로 기독교화가 근대화를 의미하는 것으로 인식하게끔 하기도 한다.

적어도 우리 사회에서 불교가 ‘근대’ 혹은 ‘근대화’라는 말과 친숙하지 않고, 혹은 그에 역행하는 것으로까지 이해되기도 하는 것은 이 같은 배경에 말미암은바 크다고 생각된다. 하지만 생각해보자. 그렇게 이해되는 것은 정당할까? 혹은 그렇게 이해되어 버려도 좋은 것일까?

이 같은 질문을 모두에 던지는 이유는 동아시아 3국 특히 한국의 근대화에서 불교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하는 의문 때문이다. 혹 던지지 않아도 좋을 질문인지도 모른다. 극소수에게는 예외가 되겠지만, 한국불교 연구자들에게 근대 혹은 근대화가 주목받기 시작한 것은 극히 최근의 일일 뿐이고, 그 동안의 한국불교 연구에서 근대 혹은 근대화는 거리가 먼 남의 집 이야기일 뿐이었기 때문이다.

솔깃한 이야기이기는 했기 때문에, 우리에게도 ‘근대’에 걸맞는 무엇인가 있다는 이야기는 숱하게 운위되었다. 하지만 그 미답의 풍요로운 황무지를 직접 두 발로 걸어 들어갔던 연구자는 그리 많지 않았던 것 또한 사실이다. 이제 그 미답의 영역에 들이미는 발걸음들이 하나 둘 보이기 시작한다.

평자는 김영진(이하 ‘저자’)의 《중국 근대사상과 불교》를 읽으면서 심재관이 발표했던 《탈식민 시대 우리의 불교학》을 떠올렸다. 심재관의 책은 서구 혹은 근대와 만났을 때 우리 불교학이 어떻게 반응했는가를 짚으면서 한국에서 이루어진 불교학의 근대화 과정을 살핀 것으로, 우리 불교학의 정체성 왜곡에 대한 고민과 함께 ‘오리엔탈리즘’에 의해 왜곡되어가는 근대화의 이면을 들여다보는 작업기도 했던 것으로 기억한다.

근대화 과정에서 수동적으로 이끌려가면서 왜곡되었던 현실에 대한 성찰과 새로운 지향의 모색을 보면서 내심 반성되지 않은 스스로를 부끄러워했던 기억이 여전히 남아있다. 그리고 역동적인 시대에 역동적이지 못했던 우리 불교학의 움직임이 적극적이지 못했던 것 같다는 아쉬움의 감상도.

굳이 심재관의 책을 언급한 이유는, 지금 서평의 대상으로 삼고 있는 《중국 근대사상과 불교》라는 책에서 그 때의 아쉬움이 내가 제대로 발견하지 못했던 어떤 것들, 여전히 미답으로 남아 직접 두 발로 걸어 들어오기를 기다리는 어떤 것들이 존재한다는 것을 미처 발견하지 못했던 데서 오는 부족함의 소치라는 것을 실감했기 때문이다.
불교가 중국의 근대사상을 어떻게 추동해 갔는가를 다루고 있는 《중국 근대사상과 불교》라는 책을 다루면서 우리 불교와 근대를 말하는 것은 사실 동떨어진 언급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평자가 읽고서 느낀 첫 번째 생각은 ‘아, 우리 근대 불교에도 놓친 것이 적지 않겠구나.’ 하는 것이었다. 평자는 무의식중에 이 책을 한국불교의 근대를 되새길 수 있는 반면교사로 수용하고 있었던 셈이다.

2. 보여주는 것 그리고 보아야 할 것

저자의 머리말을 빌려 책의 구성을 살펴보자. “행장을 요즘 말로 고치면 평전 정도 될 것이다. 물론 평전이 행장보다 말이 많다. 이 글은 평전의 집합이다. 그 사이에 근대 중국과 불교라는 두 기둥을 세웠다. 여러 주인공은 비슷한 시기를 앞서거니 뒤서거니 했다.

더구나 불교라는 교차로를 연신 오갔다. 그래서 그들은 낱낱 떨어져 있지 않다. 남의 살림에 많이들 관여했다. 결국 한 삶이 여러 삶에 걸쳐 있다. 이런 연유로 열아홉 개 평전이 한 덩이의 근대 불교를 이야기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이게 연기법(緣起法)이다.” 그 연기법으로 엮어진 열아홉 개의 평전을 ‘근대불교학의 형성과 유식학’ ‘세간과 출세간의 간극’ ‘불교와 유교’ ‘불교 계몽과 학의 탄생’이라는 네 개의 주제로 나누어 배열한다.

이 책은 평전의 묶음이다. 저자의 말이니 믿을 수밖에 없다. 하지만 저자의 말처럼 ‘행장보다 말이 많은 평전’의 묶음은 아니다. 책의 편집은 평전들의 묶음이지만 저자가 보이고자 한 것은 개개인의 평전이 아니기 때문이다. 저자는 좀더 다른 것을 의도한다. 머리말의 말미에 저자가 언급한 아쉬움, 근대에 활동한 고승의 일화와 수행과 관련된 이야기를 “《고승전》의 형식을 빌려서 따로 작업하고 싶다”는 것이 바로 그것이다.

저자가 하고 싶었던 작업,《고승전》의 형식은 전기의 모음이기는 하지만, 전기가 아니다. 동아시아 불교에서 《고승전》은 불교의 사상과 역사를 담아내는 중요한 형식 틀의 하나인 때문이다. 곧 저자는 사상사의 형식으로 중국 근대의 불교를 담아내고 싶은 것이다. ‘평전’이라는 명목을 빌어서 말이다. 해서 이 책은 평전들의 묶음이기는 하지만 동시에 사상사의 서술이기도 하다는 점을 염두에 두고서 볼 필요가 있다. 따라서 우리가 이 책에서 보아야 할 것은 중국 근대를 살아간 불교인들의 평전이 아니라, 그 평전의 서술 중간 중간에 숨어있는 사상사에 대한 저자의 관점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3. 중국 근대, 그리고 불교

동아시아의 ‘근대’는 서구문명의 충격으로부터 촉발된 것이다. 중국의 경우도 당연히 그렇다. 이 말은 동아시아 사회의 ‘근대’가 내부로부터의 깨어남이 아니라 외부로부터의 자극에 의해 시작된 시대임을 말한다. 곧 역사의 변화를 이끄는 힘이 동아시아 사회의 내부에서 비롯되지 않았다는 것이다. 자연 현재 가지고 있는 내적인 토양은 종속적인 변수로 전락하고 만다. 이유는 간단하다. 상황에 주체적으로 대응할 수 있는 내부의 활력을 이미 상실한 상태에 도달해있기 때문이다. 이때 활로의 모색은 대개 두 가지 방향에서 이루어진다.

하나는 외부의 자극 그 자체에서, 또 하나는 그 사회가 지니고 있는 과거의 기억을 더듬어 보는 것을 통해서. 물론 이 두 방향은 동떨어져서 진행되는 어떤 것이 아니라 늘 일정한 지점에서 교차한다. 중국의 ‘근대’가 그렇듯이, 중국 근대의 ‘불교’ 역시 이러한 교차점 위에서 태어났다. 다만 그 출발은 전혀 의외의 곳에서 비롯되었다고 해야 할 것이다.

저자의 말대로 ‘청나라 말기의 남루하기 짝이 없던 불교’는 중앙무대로 뛰쳐나올 힘을 상실한 상태였다. 그 남루하기 짝이 없는 불교를 새로운 시대를 헤쳐 나가는 돌파구로 주목한 것은 양런산(楊仁山, 1837-1911), 곧 우리에게는 ‘양문회’로 더 잘 알려져 있는 인물이다. 그렇다고 양런산이 불교적 풍토에서 자랐다거나, 어려서부터 불교와 특별한 인연이 있었던 것도 아니었다.

양런산이 불교를 주목한 것은 ‘우연’이었다. 태평천국의 난 때문에 피난 가 있던 항저우에서 사랑의 열병을 앓다가 서호 근처의 서점에서 우연히 발견한 것이 《대승기신론》. 언뜻 통속적으로도 보이는 양런산과 불교의 만남은 1866년 난징의 금릉각경처(金陵刻經處) 설립으로 이어졌고, 이것이 근대 중국불교의 시작이 된다.

여러모로 근대 중국불교는 독특하다. 근대 중국불교는 승려들의 불교가 아니라 거사불교였다. 청나라 말기의 남루하기 짝이 없던 불교전통에서 비롯된 것도 아니었고, 시대를 앞서간 승려의 혜안에서 비롯된 것도 아니었다. 전적조차 제대로 구비되어 있지 않았고, 승려는 글조차 제대로 모르던 시대의 불교. 해서 중국 어느 시대의 불교보다도 전통에서 자유로웠던 것이 근대의 중국불교였다.

금릉각경처의 설립, 당나라 이후 사라졌던 중국 불교 전적들의 일본으로부터의 귀환, 이런 일들이 모여 근대 중국불교의 기원을 이루었고, 그 중심에 양런산이 있었던 것이다. 그래서 저자는 양런산의 평전을 ‘기원의 곡절’이라는 제목으로 장식하고, “청말 새롭게 나타난 지식인 가운데 불학과 무관한 사람은 하나도 없었다. 청말 불교를 신앙한 사람은 모두 양런산에게 귀의했다.”는 양치차오(梁啓招)의 말을 빌려 끝맺는다.

다시 말하지만 근대 중국불교는 독특하다, 여러모로. 근대 중국불교의 서두를 장식한 인물이었기 때문이기도 하겠지만, 저자가 평전의 첫머리에 양런산을 놓은 이유가 그 때문만은 아닐 것으로 보인다. 그에게서 비롯된 불교가 이전의 중국불교와는 궤를 달리하는 어떤 것이었고, 많은 근대불교의 특징이 또한 그에게서 비롯되었기 때문이라는 것이 좀더 합당할 것이다.

평자가 보기에 저자가 말하고 싶은 것은 ‘근대 중국불교는 이전의 전통에서 기원하지 않는다, 근대 중국불교는 승려 중심의 불교가 아니다, 근대 중국불교는 신앙 중심의 불교가 아니다’는 것이고, 그래서 ‘실천적인 학문으로서의 불교였고, 거사중심의 불교였으며, 이전의 전통으로부터 전혀 돌출된 어떤 것’이라는 점이 아니었을까. 이처럼 근대 중국불교의 기원은, 인물로는 양런산에게, 전적으로는 금릉각경처에, 교육은 기원정사에 있다고 말해야 할 것이다. 그 뿐일까? 양런산에게 사사한 인물 중에 재가를 대표하는 것이 어우양징우(歐陽竟無, 1871-1943)였고, 출가를 대표하는 것이 타이쉬(太虛, 1889-1947)였다. 이 둘을 이은 것이 뤼청((呂徵, 1896-1989)과 인순(仁順, 1905-2005)이다. 가히 근대 중국의 불교학을 대표하는 인물들은 모두가 양런산의 문하였던 것이다.

재가에서 양런산을 계승한 어우양징우는 《유가사지론》을 판각하여 간행하면서 장문의 《유가사지론서(敍)》를 서술하여, 중국의 법상종과 인도의 유식학은 다르다고 주장한다. 이 주장은 곧바로 법상종과 유식학은 분리할 수 없다고 주장하는 타이쉬(太虛)와의 교학논쟁을 빚게 된다. 이 어우양징우의 전통에서 벗어난 불교 이해는, 스승인 양런산의 불교가 중국 불교전통에 굳이 매이지 않았기 때문에 가능했던 근대불교의 또 다른 특징을 보여준다.

어우양징우는 양런산이 설립한 기원정사의 학맥을 계승하는 ‘지나내학원’을 1918년에 설립한다. 이 지나내학원에 차이위안페이, 장타이옌, 량치차오 등이 발기인으로 참여했고, 뤼청, 왕언양(王恩洋, 1897-1964), 탕융퉁(湯用?, 1893-1964) 등이 강의를 맡았으며, 근대불교학의 정초자인 량치차오와 현대 신유학의 발동자인 량수밍(梁?溟, 1893-1988)과 슝스리(熊十力, 1885-1968)가 여기에서 배우거나 어우양징우와 관계를 맺고 있었다.

양런산에게서 기원한 근대 중국불교는 량치차오, 타이쉬, 인순, 탕융퉁, 천위안에 이르러 저자가 말하듯 ‘불교 계몽과 학(學)의 탄생’으로 이어진다고 저자는 평가한다. 그렇다고 저자가 이 양런산에게서 기원하여 전개된 근대 중국불교의 흐름만을 이야기하지는 않는다.

무술변법의 주역으로 활약하다 형장에 쓰러졌던 《인학(仁學)》의 저자이자 불교혁명가였던 탄쓰퉁(譚嗣同, 1865-1898), 신해혁명 이후 손문 등과 함께 건국의 3걸로 불리었으며, 중국 근대의 대문호인 루쉰이 ‘학술이 있는 혁명가’로 기억했던 스승인 장타이옌(章太炎, 1868-1936), 불교적 이상세계와 유교적 가치를 결합하여 대동세계의 이상을 갈구한 《대동서(大同書)》의 저자이자 혁명가였던 캉유웨이(康有爲, 1858-1927) 또한 저자는 놓치지 않는다. 그들의 삶에 그들의 정신세계에 불교가 어떻게 흡수되었고, 불교는 그들의 삶과 정신을 통해서 현실과 어떻게 맞부딪쳐 갔는지를 놓치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처음 글을 읽을 때는 ‘아, 이 사람이 이렇게 불교와’ 하는 재미에 거침없이 책장을 넘겼으나, 두 번째 읽을 때는 전혀 다른 것이 눈에 들어온다. 마치 평전의 대상이 된 인물들의 사소해 보이는 일상과 그 주변을 짧은 글들에나마 최대한 담아내고 싶어하는 듯 보인다. 굵직한 삶의 줄거리 사이사이에다 주변 사회의 모습들을 슬쩍슬쩍 부기하고 있는 것이다. 여기서 평자가 발견한 것은 ‘이 사람이 이 시대를 이렇게 살고 갔구나.’ 하는 것이 아니라, “아, 불교가 이렇게 다양한 모습으로 한 시대를 부딪쳐 가는 것이구나.” 하는 감탄이었다. 그리고 불교가 이렇게 역동적으로 살아 움직여 한 시대를 헤집고 추동하는 동력원이기도 한 것이구나 하는.
저자는 불교라는 울타리 안에서만 불교를 발견하고 싶어하지 않는다. 불교가 어떻게 변신하고서 불쑥 근대사회에 얼굴을 들이밀었는지를 중국의 근대, 근대 중국의 불교라는 이름을 빌어서 말하고 싶어하는 것으로 보인다. 물론 이러한 돌출의 바탕은 근대 중국불교의 돌출성 때문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 돌출성을 포획해낸 저자의 친절하고 세심한 안내가 없었다면 중국 근대의 사상사를 더듬는 여행이, 그것도 ‘불교’라는 코드를 빌려서 가는 여행이 쉽게 가능했을까.

4. 더 듣고 싶은 이야기

그러나 그렇다고 하더라도 여전히 아쉬움은 남는다. 여행이 여행으로만 끝나버려서, 정착지를 발견하지 못한 듯한 아쉬움이 그것이다. 너무 많이 보아서 무엇을 취해야 할지 모르겠다는 것이 더 정확한 표현일 것이다. 평소 저자가 보여주었던 한 단어로 무엇인가를 관통해서 보여주던 집요함이 아쉬웠다고 해야 할 것이다.

현실과 괴리되지 않은 불교, 밀착된 현실을 반영하여 살아 움직이는 불교를 ‘근대 중국의 불교’에서 발견하고 보여주는 데는 성공한 것으로 보이지만. 그리고 우리 근대 불교를 바라는 우리의 시각이 불교 안에만 국한되는 바람에 외눈박이가 되어버렸다는 부족함도 일깨워주지만. 저자가 아직 우리 앞에 펼쳐 보여주지 않은 것, 혹은 평자가 저자에게서 더 듣고 싶은 이야기를 언급하는 것으로 맺음을 대신한다.

우선 이 책만으로도 근대 중국불교의 돌출을 보여주는 데는 훌륭하지만, 그 돌출의 앞 이야기 이를테면 왜 청나라 말기에 불교는 남루하기 짝이 없었는지, 그 현실의 곡절에 대한 구체적인 이야기를 발견할 수 없었다. 실상 청대에 이르러서도 불교전적은 여전히 그리고 거듭해서 인경되었음에 불구하고 불교 전적 구하기가 그렇게 어려워졌는지도, 수많은 사찰의 존재에도 불구하고 승려들이 수준 이하였던 곡절은 또 어떻게 되었는지 알 수가 없다.

또 왜 불교를 매개로 현실사회에 치열하게 부딪쳐간 사상가들이 중국 근대를 대표했음에 불구하고, 불교는 그 빛을 중국 땅에서 잃어버려야 했는지에 대한 곡절 역시 알 수 없다. 혹은 평자가 놓친 것인지도 모르지만. 마지막으로 ‘사묘를 몰수하여 학교로 사용하고 교육을 일으키자고 주장했던’ 소위 묘산흥학(廟産興學)의 풍조가 근대 중국불교의 중요한 분수령의 하나였음에도 그 반향과 중국 불교계의 대응은 거의 기술되어 있지 않다.

이러한 부분들은 사실상 사상사의 맥락을 짚어 보이고 있는 이 책에서 의도하지 않은 부족분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이는 ‘중국근대불교인물사상사’라는 제목으로 불교신문에 연재하였던 형식의 한계에서 오는 것이기도 할 것이다. 또 평전을 형식을 취하고, ‘사상과 학(學)’의 부침에 초점을 맞추다 보니 빠졌을 것이다. 하지만 연재 당시보다 훨씬 더 상세해지고 풍부해진 ‘평’들은 그런 부족을 상쇄시켜주기도 한다. 그리고 아쉬움은 기대로 남는 법이다. 저자가 언급했다시피 자세히 다루지 못한 사건이나 고승의 일화 등에 대해서는 별도의 작업을 예고하고 있으므로.

석길암
외국어대 경제학과 졸업. 동국대 대학원 불교학과 박사과정 졸업. 현재 한국불교연구원 전임연구원이며, 본지 편집위원. 논문으로 <원효의 보법화엄사상연구><법장교학의 사상적 전개와 원효의 영향> <나말여초 불교사상의 흐름에 대한 일고찰> <중국초기선종사에 나타난 원효 인식> 등이 있다
저작권자 © 불교평론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