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승의 날’이 다가오면 생각나는 분이 계시다.

 40년 전 중학 시절 담임이셨던 오복석 선생님. 벌써 이 땅에 안 계신 지 12년째다. 지금은 강남 지역 부촌의 일부로 꼽히지만 당시만 해도 송파의 성문중학교(후에 일신여중으로 개명)는 시골학교와 별반 다름없었다. 정읍 출신으로 광주 소재 대학교에서 수학을 전공하고 상경하신 선생님을 생각하면 떠오르는 건 학과와는 별로 관련이 없는 것들이다. 물론 선생님은 수업에도 심혈을 많이 기울이셨다. 아직도 뇌리에 강하게 남아 있는 장면이 있다.

1973년 1월 중순 졸업식 날은 몹시도 추웠다. 누군가 흠이 많이 나고 다리가 부실한 책상, 걸상 몇 개를 부숴 난로에 넣었다. 불은 활활 타오르고 모두 박수치며 좋아라 할, 바로 그때였다. 교실 안에 들어와 사태를 파악하신 선생님은 불같이 역정을 내셨다. 손에 쥐어진 회초리 몇 개가 부러져 나갔다. “내가 너희를 잘못 가르친 죄가 크다.” 선생님 눈엔 물기가 흘렀다.

그리고 3, 4년쯤 지났을까? 중학 동창들은 추석과 음력 설 전날 저녁 6시 반이면 어김없이 중곡동 백합베이커리 앞에 모였다. 굳이 따로 연락하지 않아도 6, 7명은 으레 자동이었다. 명절 전날 밤, 서울 어린이대공원 앞 다세대주택 선생님 댁에는 찌개며 고기 굽는 냄새, 철없는 제자들 받아주시는 선생님의 너털웃음으로 넘쳐났다. 약주를 좋아하시던 선생님은 댁에서 1차가 끝나면 인근 호프집이나 노래방으로 옮겨 2차를 선도하기까지 하셨다. 선생님은 필자의 결혼식 주례를 비롯해 제자들 인생상담도 마다지 않으셨다.

20년 가까이 계속되던 모임은 1997년 정초 ‘명절이브 멤버’ 중 한 친구가 유명을 달리하면서 그 이듬해 중단됐다. 그리고 이태 뒤 선생님께서 추석을 앞에 둔 늦여름, 과로로 쓰러지셨다. 명절 이브 선생님 댁 방문은 두세 차례 이어지다, 멈춰 섰다.

금년 설, 사모님을 찾았다. 마침 긴 연휴를 이용해 일본을 다녀오려 준비 중이셨다. 40년 전 갓난아기였던 외아들이 어머니를 모시고 아내와 자녀들의 ‘3대 여행’을 제안해서 가게 됐다고 자랑하신다. 오복석 선생님의 젊은 아들이 아버지를 이어 내게 한 수 가르쳐준다. 스승은 나이와 세대를 초월해 존재하는가 보다.
나는 ‘스승 복’이 많은 사람이라고 종종 생각한다.

조오현 큰스님과 최승우 장군님은 내게 가장 소중한 스승이시다. 2005년 4월 낙산사 큰불 직후 중국 방문길에 큰스님께 전화를 올렸다. “스님 걱정 많으시죠? 여기서도 걱정이 됩니다.” 하자, “이 회장, 걱정은 무슨? 사람들이 자기 가슴속이 불타는 건 모르고, 절간에 불난 것 같고 그렇게 호들갑이야, 걱정 말아요.” 큰스님은 직전인 2004년 말 내가 《요즘 한국기자들》을 내며 추천 글을 부탁드리자 이렇게 적어 주셨다.

“이상기는 선승이 칠십 평생 살아오면서 만난 사람 중에 가장 슬픈 얼굴을 하고 글을 쓰는 기자다.” 부끄럽다. 스승님의 반어법을 아직도 제대로 못 깨우치고 있음이. 올가을이면 큰스님을 처음 뵌 지 10년이 된다. 앞으로 10년, 제자 노릇 제대로 하고 싶다.

현직 예산 군수인 최승우 장군은 내게 친형님 같다. 만일 최 장군을 몰랐다면, 나는 내게 잘못하거나 나를 속상하게 한 사람, 내 편이 되어 주지 않은 사람들에 대한 원망과 불만으로 가득 찼을 게 분명하다. 그는 자신을 모함해 궁지에 빠뜨린 사람들도 용서할 줄 아는 분이다. 분노와 적개심은 결국 자신을 멸망시키는 것임을 잘 아는 지혜로운 분이기 때문이다.

젊은 장교들과 군청 직원들이 일흔이 넘은 최 장군을 존경하는 것은 그의 이런 생각 때문일 것이다. “위기 때 단합된 힘을 발휘하려면 평소 부드럽고 합리적으로 조직을 이끌어야 한다.” 군 지휘관 시절 그는 전입사병과 제대 장병들을 일일이 직접 면담하고 격려하며 축하했다. 또 그가 부대 부임 후 가장 먼저 찾는 곳은 관내 초등학교 교장실이었다. 장군이 정중하게 교장 선생께 거수경례를 부친다. 투스타 성판을 단 차량이 학교로 들어오기 무섭게 고사리들은 시선을 최 장군에게 집중한다. 그런데 그 높은 ‘장군님’이 ‘우리 학교 교장’한테 경례를 올리는 게 아닌가? 이 광경을 본 아이들 입에선 더 이상 ‘교장’은 없다. ‘교장 선생님’이 어느새 그 자리를 대신했다.

산악인 엄홍길 대장과 올림픽축구팀 홍명보 감독도 내겐 종종 스승이 된다. 이들에겐 여러 차례 ‘좌절할 위기’와 ‘포기할 기회’가 있었다. 하지만 결코 무릎 꿇지 않는 투지가 남다르다. 이들은 스타에 가깝다. 하지만 이들이 대중의 바람과 거스르는 걸 아직 못 봤다.

나는 지난 4월 중순 엄 대장과 부처님이 나신 고장 룸비니를 다녀왔다. 필자가 감사로 있는 엄홍길휴먼재단이 네팔에서 세 번째로 세우는 학교 기공식에 참석하기 위해서다. 인천공항이나 카트만두공항에서 그를 알아본 이들이 사진 찍자고 정말 막무가내로 밀고 들어와도 그는 웃으며 포즈를 취해 준다. 스타면서도 잘난 척하지 않아 나는 엄홍길 대장이 존경스럽다.

홍명보 감독에 관한 에피소드를 끝으로 글을 마친다. 작년 어느 날 도예가 한 분이 전화를 해 왔다. “아들이 D고교 축구선수인데, 학교도 그만두고 집에 틀어박혀 신경질 내고 집안이 우환 중입니다.” 감독과 관계가 안 좋아서 그랬다는 사실은 내가 여러 차례 신문하다시피 물은 뒤에야 알았다. 홍 감독한테 전화했다. “학생 하나 살려야겠어. 학생 이름과 홍 감독 격려 글 축구공에 써서 보내 주기 바라오.”

두어 달 뒤 학생 부친에게서 전화가 왔다. “아이 학교 복학했습니다. 홍 감독께 감사 인사 전해 주세요. 부처님 은혜입니다.” 자신을 낮추고 어린 학생을 배려하는 홍 감독 마음이 통한 것이다.

스승은 곳곳에, 언제나 계시다는 걸 요즘 자주 경험한다. 스승의 날은 5월치 달력에 있지만, 우리 맘속엔 1년 열두 달 간직돼야 하는 날이다. 부처님오신날은 음력 4월 초파일이지만, 부처님 은혜는 연중 내내, 꿈속에서조차 바라고 또한 이뤄지는 것처럼 말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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