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릭 쥐르허 저, 최연식 역 《불교의 중국 정복》

최연식 선생님께

《불교의 중국 정복》
씨아이알 간, 2010. 9.
736쪽, 값 38,000원
번역하신 책, 《불교의 중국 정복−중국에서 불교의 수용과 변용》을 이번에 보았습니다.  

위대한 저작이지요. 불교가 처음 중국으로 전래된 한(漢)대부터 시작해서 동진시대(東晋時代)에 이르는 초기 중국불교사에 대해 이 책만큼 여러 가지 문제를 제기하고 꼼꼼한 자료를 제시하는 고전적 연구서도 드물 것 같습니다.

저자인 에릭 쥐르허가 초판 서문을 쓴 것이 1959년이니, 간행된 지 50년이 더 지난 저작인데, 2007년에 제3판이 다시 간행되었다는 점만 보아도 이 책이 지닌 가치를 엿볼 수 있겠지요. 제3판의 해제를 쓴 프린스턴대학의 스티븐 타이저 교수는 이 고전적 저술의 재간행이 초기 중국불교에 관한 학술적 연구의 이정표를 세우는 작업이라고 밝히고 있습니다. 단순히 1950년대 중국학과 불교학 분야의 연구 상황을 알기 위해서가 아니라, 이 책의 주장 자체를 이해하기 위해 《불교의 중국 정복》을 새롭게 읽어야 한다는 스티븐 타이저의 지적은, 한국 땅에서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가 이 책을 대할 때 반드시 마음에 담아 두어야 할 점인 것 같습니다.

그렇다면 이 책의 주장 자체라는 것은 과연 무엇일까요? 타이저는 《불교의 중국 정복》의 가장 중요한 주장은 초기 중국 불교를 어떻게 연구해야 하는가 하는 방법론에 관한 것이라고 명시하고 있습니다. 저 역시 이 점이 책을 읽는 내내 가장 흥미로웠습니다.

“초기 중국불교는 독자적인 체계를 갖고 독립적으로 발전되어 온 결과물로서, 그것이 발전되어 온 문화적 환경과 여기에서 검토하려는 시기의 중국인들의 지배적 세계관과 관련하여 연구되고 이해되어야 한다”는 점을 쥐르허는 그의 책에서 가장 먼저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그렇기에 믿음의 순수한 교리적 측면에 대한 설명에 앞서 그 시기 중국 사회에서 불교의 형성과 확산을 촉진하였던 다양한 문화적, 사회적 요소들에 대해 관심을 가져야 한다는 거지요.

어떠한 종교 운동도, 설령 그것이 세속의 영역을 완전히 떠날 것을 주장하고 있다 하더라도 단순한 ‘사상의 역사’로만 연구될 수는 없다는 것이 자신의 신념이라고 쥐르허는 분명하게 밝히고 있습니다. 게다가 불교 자체의 성격도 단순히 우주를 설명하는 ‘이론’으로 존재해 왔던 것이 아니었지요. 쥐르허가 보기에 불교는 “오히려 구원과 생활양식에 관한 것”이었고, “불교의 중국 전래는 단순히 특정한 종교적 관념만이 아니라 사원 공동체인 승가라고 하는 새로운 형태의 사회 조직의 확산”이기도 했습니다.

저는 쥐르허의 이러한 연구 태도에 참으로 공감하게 됩니다. 불교는 우주와 인간에 대한 추상적인 이론이기보다는, 불안정하고 부조리한 현실 삶을 이어나가야 하는 사람들에게 구원의 길을 보여주는 종교적 실천이었고,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에 대한 구체적인 방법입니다. 추상적 개념사, 사상사의 궤적을 실제로 만들어 나간 것은 생생한 현실을 살아나가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종교 연구가 사람에 대한 관심을 놓친다면, 그것처럼 공허한 것이 또 있을까요? 사람이 그려온 무늬들을 보며, 생생하게 살아 숨 쉬는 사람들에 대해 관심 가지고 그들에 공감하고, 그 공감으로 인해 나 자신의 삶에 대해 새로운 안목을 얻게 되는 것이 인문학일 테니까요.

사실 쥐르허가 제기하는 문제는 단순히 중국 불교에 관한 것만이 아니라, 넓은 범위에서 종교를 연구하는 방법과 문화들 사이의 상호작용을 분석하는 방법에 대한 중요한 내용들을 담고 있습니다. 사람, 사람들의 삶, 사람들의 공동체, 사람들의 관계 양상에 대한 관심은 초기 중국불교사 연구의 방향에 어떻게 드러나고 있을까요? 쥐르허는 외국에서 태어난 포교자들과 문헌 번역자들이 완전히 이질적이었던 인도의 불교 사상을 중국의 토양에 옮겨 심는 과정에서 중국의 청중을 위해 문헌을 골라서 번역했으며, 중국 지식인들은 기존의 지적 맥락에서 익숙한 범주로 불교를 이야기하고 있음을 주목합니다.

그렇기에 쥐르허가 중시하는 1차 자료는 중국인들이 생산한 토착 문헌들입니다. 중국어로 번역된 수백 권의 불교 경전들은 그 자체로 인도 불교사의 주요 자료이지만, 중국의 불교신자들이 그 내용을 어떻게 이해했는지에 대해서는 아무런 내용도 알려주지 않는다고 쥐르허는 지적합니다. 오히려 그는 중국의 지식인들이 낯선 종교인 불교를 이해해 가는 과정을 보여주는 저작들을 통해 인도와 중국의 종교문화가 상호작용하고 변용하는 구체적인 모습에 주목합니다. 특히 불교 교단과 그 교리가 중세 중국 사회의 상층부 및 최상층부에 침투되어 가는 과정에 주목하며, 초기 중국불교는 불교 지식인들의 신앙이라는 고유한 형태를 띠게 되었다고 봅니다.

그는 ‘사족(gentry, 士族) 불교’라는 용어를 사용해서 이 신앙의 형태를 표현하고 있습니다. 중국의 불교 지식인 계층이 어떤 계층적 특성이 있는지, 그들이 몸담고 있었던 당시의 사회문화적 특성은 어떠했는지, 그들이 공유하는 중국의 전통적인 지적 맥락의 구체적 내용은 어떠했는지, 그 맥락 속에서 이해한 불교는 어떤 모습이었는지, 거기서 드러나는 인도와 중국의 종교문화의 차이는 무엇인지, 사원이라는 새로운 형태의 사회 조직은 그들에게 무엇을 제공했는지, 당시의 사회 속에서 종교 공동체의 위상이 어떠했는지, 불교에 비판적이었던 전통적 지식인들의 문제 제기와 그에 대한 중국 불교인의 대응은 어떠했는지, 그 모든 문제의 바탕에 깔려 있는 인도와 중국 종교문화의 상호작용은 어떤 모습이었는지에 대해 질문을 던지고 답을 찾아나가는 과정이 이 책의 전반에 이르고 있습니다.

그의 이후 저작들 속에서도 이런 관심이 지속되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예컨대 중국과 서양문화의 만남도 쥐르허의 중요한 연구분야였지요.

“개인들 사이에서와 마찬가지로 문화들도 교류와 갈등을 통해서 참된 모습이 드러난다.”고 그는 말했습니다. 사람에 대한 관심은 우리를 사람들의 구체적인 삶의 결집체인 문화에 대한 관심으로 이끌어 가고, 사람들의 삶, 사람들의 관계 맺음의 양상에 대한 관심은 우리를 문화적 교류와 갈등이라는 주제로 이끌어갑니다.

우리는 타자와의 관계를 통해 자기를 들여다보고 이해합니다. 자기 정체성은 결국 원래 가지고 있던 고유한 특성이 아니라 관계 속에서 형성되고 드러나며 규정되는 것이겠지요. 쥐르허가 말하는 ‘교류와 갈등을 통해서 드러나는 참된 모습’ 역시 타자와의 관계 속에서 발견되고 만들어지는 주체의 모습을 말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그것을 굳이 ‘참된’ 모습이라고 표현하는 것을 보면 그가 가진 문제의식의 한 자락을 공유할 수 있을 것도 같습니다.

제 식으로 표현해 보자면, 사람은 내 옆에 자리 잡은 너를 통해 나를 보게 되고, 너에게 다가가며 서로의 차이에 대해 의식하게 되고, 내가 완전히 너의 자리에 겹쳐지지는 못하지만, 그 거리를 유지하며 공감함으로써 우리는 새로운 관계를 만들 수 있으며, 그 관계 속에서 나는 나 자신을 새롭게 이해하게 된다는 거지요.
이렇게 볼 때 이 책의 제목 속에 등장하는 ‘정복’이라는 표현은 결국 ‘상호작용’ ‘상호변용’을 뜻하고 있습니다. 타이저 역시 이 책은 제목에 나타나 있는 ‘정복’이 아니라 이미 중국화된 용어들을 매개로 한 인도 사상과 중국 사상의 상호작용을 보여주고 있다고 말합니다.

 ‘인도’를 통해 ‘중국’이라는 문화적 정체성을 드러내고, 그렇게 드러난 중국적 정체성의 맥락에서 ‘불교’를 해석하고, 불교와 중국 전통의 관계를 재구성하는 과정을 통해 ‘불교’의 특성과 ‘전통’의 특성을 재규정하는 끊임없는 작업들이 《불교의 중국 정복》에 드러나 있습니다.

그리고 이 책을 읽는 오늘의 우리가 ‘인도의 종교문화’와 ‘중국의 종교문화’ 그리고 ‘한국의 종교문화’의 관계에 대해 고민하고, 그 관계 속에서 드러나는 우리의 정체성에 대해, 한국불교의 정체성에 대해 예리하게 더듬어 보기를, 최연식 선생님께서도 바라고 계시리라 생각합니다. 특히 쥐르허가 서론 첫머리에서도 언급한 것처럼, 불교는 ‘이론’으로 존재하지 않았고, 오히려 ‘생활양식’에 관한 것이었음을, 그래서 사람의 삶의 다양한 문화적, 사회적 요소들에 관심을 가져야 함을 잊지 말아야겠지요.

《불교의 중국 정복》의 일본어 번역본이 1995년에, 중국어 번역본이 1998년에 나온 것에 비해 한국어 번역본이 작년에 나온 것은 좀 늦은 감이 있습니다. 중국 불교를 공부하는 제 입장에서 ‘좀 늦은 감이 있다’느니 하는 표현을 쓴다는 것 자체가 낯뜨거운 일입니다. 그렇지만 좀 늦은 덕분에 생긴 좋은 점도 있지요. 2007년에 나온 제3판을 대본으로 하여 스티븐 타이저 교수의 꼼꼼하고 도전적인 해제를 실을 수 있었던 것은 참으로 큰 성과입니다.

게다가 동진 불교를 다룬 3장, 남조의 불교 중심지와 북조 불교의 영향을 다룬 4장, 4세기에서 5세기 초의 반(反)승려주의와 그에 맞선 불교옹호론을 다룬 5장의 부록을 온전하게 번역해 주셔서 정말이지 큰 도움이 됩니다. 각 장의 핵심 자료가 되는 한문 원전을 영어로 번역해서 수록한 부록을 통해, 쥐르허가 초기 중국불교사를 서술하기 위해 중시했던 자료의 성격을 실제로 검토할 수 있기에 큰 의미가 있습니다. 부록을 생략한 일본어판이나, 고전 한문 자료를 현대중국어로 번역하지 않고 그대로 실은 중국어판에 비해, 매끄러운 우리말 번역을 해 주신 최 선생님 덕분에 쥐르허 저작이 가진 힘이 훨씬 더 생생하게 전달되는 것 같습니다.

몇 가지 남는 문제들을 정리해 보자니 가장 걸리는 것이 민중불교의 자료가 거의 없다는 쥐르허의 지적입니다. 민중불교의 직접적인 모습을 드러내는 문헌 자료가 거의 없다는 점에서는 분명히 한계를 느낍니다. 그렇지만 연구 자료가 없다는 말은 달리 표현하자면 기존의 연구 자료의 범주에 포함되는 자료가 없었다는 말이지요. 자료 범주를 구획하는 시각이 달라진다면 또 다른 자료들이 그제야 눈에 띄게 될 수도 있다고 봅니다. 예컨대 무덤의 부장품, 조각, 벽화와 같은 자료들이나, 사원경제와 관련된 문서, 문학작품, 비문 같은 것들이 초기 중국불교의 다양한 모습을 보여주는 중요한 자료이기도 합니다.

한편으로는 지식인의 불교와 일반 백성의 불교를 구분하기보다는 엘리트 종교문화와 민중 종교문화를 포괄하는 그 시대의 감수성, 그 시대 사람들의 총체적인 문제의식은 무엇이었을까, 뭐 이런 것을 고민하다보면 종교문화 서술의 양식이 좀 더 다양해 질 수 있을 거라고 기대해 봅니다.

아, 그리고, 어찌 보면 별것 아닌 작은 문제이지만, 책 27쪽에 언급된 《봉법요》의 저자는 극초(郄超)가 아니라 치초(郗超)인 걸로 알고 있습니다.
 
공부를 처음 시작하던 시절에는, 두드러진 업적을 남긴 위대한 학자의 글을 읽을 때 그가 언제 첫 성과를 이루어냈는지에 가장 관심을 가졌지요. 그런데 지금은 그 학자가 언제까지 끊임없는 열정을 가지고 연구했는지에 더 관심을 가지게 됩니다. 제가 나이가 들어서일까요? 아, 그런데 쥐르허는 두 가지 점에서 다 저를 흥분되게 하고 부끄럽게 합니다. 그는 31살에 《불교의 중국 정복》을 출판했고, 세상을 떠나기 2년 전인 2006년 78세에도 글을 발표했더군요. 천천히 조금씩 따라가는 것 말고는 길이 없는 걸까요?
2011년 5월 차은정 드림 ■

 

차은정
서울대, 한림대 강사. 이화여대 기독교학과를 졸업하고 서울대 종교학과에서 석사·박사과정을 수료하였다. 주 관심 분야는 종교의례와 불교였다. 이후 중국 인민대학교에서 초기 중국불교를 공부하였다. 박사논문은 〈불교와 위진남북조인의 사망관(佛教与魏晋南北朝人的死亡观)〉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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