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폴 윌리엄스•앤서니 트라이브 저, 안성두 역 《인도불교사상》

《인도불교사상》
씨아이알 간, 2011. 3.
410쪽, 값 20,000원
어느 신문에선가 아날로그 시대는 노하우(know-how)의 시대이고, 디지털 시대는 노웨어(know-where)의 시대라고 하는 기사를 보면서 나도 모르게 고개를 끄떡인 적이 있다. 노웨어는 자기에게 유용한 정보가 어디에 있는지를 명확하게 알고, 그 정보를 적절하게 활용한다는 의미이다.

 전공 서적과 관련된 수많은 책 중 어떤 것을 고를 것인가로 골머리를 썩인 경험이 있을 것이다. 혹은 누군가가 좋은 책을 소개해 달라고 했을 때, 무수한 책 중 맞춤형 서적이 없어서 아쉬움을 내뱉은 적도 있을 것이다. 이제는 불교라는 전공 영역에서도 더 이상 노하우의 전수가 아니라 맞춤형 노웨어(know-where)가 필요한 것이 아닐까.

 만일 수준급 이상의 내용을 파악하고 싶은 불교학도나 인문학도 가운데 누군가가 인도불교사상 관련 전공 서적 중 추천할 만한 책을 소개해 달라고 한다면, 주저하지 않고 이 책을 소개해 주고 싶다. 그렇다고 해서 이 책이 불교 입문서는 아니다. 오히려 인도불교와 관련한 전문적인 내용을 녹여 대중에게 소개하고자 한 책이다. 이 책은 1장에서 6장까지는 영국 브리스톨대학교의 폴 윌리엄스 교수가, 제7장은 인도 딴뜨릭 불교와 관련해서 앤서니 트라이브가 집필하였다. 그리고 이 책을 읽으면, 역자 안성두의 정밀한 어휘 선택을 느낄 수 있을 것이다.

이 책의 제1장 붓다의 실천적인 교학적 입장에서 저자는 붓다와 불교, 그리고 불교도에 대한 정의로 시작해서 붓다의 가르침이 해탈도를 향한 실용적인 진리라는 사실로 논지를 전개하고 있다. 저자는 불교에서 창조주(God)의 존재를 명백하게 부정하지만, 힌두신(혹은 창조주를 제외한 여타의 신)은 부정하지 않는다고 말한다. 결국 힌두신은 세간적인 조력자일뿐 출세간적인 귀의의 대상이 아니라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들은 붓다와 같은 여실지견을 갖추지 못하였으며, 그들은 윤회하는 세간적인 존재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여기에서 불교가 인도 및 동아시아의 다양한 신들을 포용하였다는 역사적 사실을 기억해야만 할 것이다. 결국 그들도 호법신(護法神)의 위치로 격하되었다는 사실을 우리는 다시금 확인할 수 있다.

그리고 붓다 당시의 두 가지 수행자 그룹, 즉 사회적 의무를 수행하면서 제사 행위를 중시하는 바라문 그룹과 출가자로서 해탈의 진리를 구현하려는 사문 그룹을 소개하면서 붓다를 ‘힌두 개혁자’로 언급하고 있는 부분에 대해 비판하고 있다. 그리고 붓다는 자유와 해탈을 추구하는 사문 집단의 일원이라는 사실을 다시 한 번 상기시킨다.

제2장 주류 불교-붓다의 근본사상에서는 붓다 최초의 가르침으로 평가받고 있는 사성제를 시작으로 주류 불교(Mainstream Buddhism)의 내용을 설명하고 있다. 모든 갈애와 집착이 수행자 자신의 마음의 문제에서 비롯되는 것이기 때문에 몸을 괴롭히는 극심한 고행으로 갈애가 제거되는 것이 아니라 선정을 통한 마음의 변화에 의해 끊을 수 있다는 사실을 언급하고 있다. 결국 해탈은 올바른 이해를 바탕으로 선정을 통해 마음을 변화시키는 것이라는 것이다. 이를 통해 붓다는 실천적 중도의 마지막 퍼즐을 완성하게 된다.

이것이 당시 자이나교를 포함한 사문 전통과 다른 붓다만의 심리학적 고찰이다. 그리고 사성제에서 언급되고 있는 재생의 일차적 원인인 갈애(tṛṣṇā/taṇhā)와 십이연기의 일차적 원인인 무명(avidyā/avijjā), 즉 사성제와 십이연기의 설명에서 두 가지 이질적인 원인을 설정하고 있는 이유에 대해 에릭 프라우발너(Erich Frauwallner)의 설을 들며 저자 나름대로 설명하고 있다. 아울러 갈애와 무명으로 나뉘는 이유에 대해서는 학자 간의 논란이 있다고 저자는 언급하고 있다. 그러나 우리는 붓다의 가르침 중 고통의 일차적 원인에 대한 상이한 기술에 대한 의문을 여기서 멈출 수는 없다.

붓다의 첫 번째 설법인 《전법륜경(Dharmacakrapravartanasūtra)》과 《무아상경(Anattapariyāya)》 등을 세밀하게 분석한 슈미트하우젠과 페터의 논의를 참조한다면 붓다의 최초 가르침이 어떤 이유로 ‘갈애’에서 ‘무명’으로 발전되었는지를 문헌학적 분석에 의거해서 어느 정도 추적해 볼 수 있다. 이에 대해서는 슈미트하우젠(1981)의 “On Some Aspects of Descriptions or Theories of ‘Liberating Insight’ and ‘Enlightenment’ in Early Buddhism”, in Studien zum Jainismus und Buddhismus(Wiesbaden: Franz Steiner Verlag), 199-250쪽과 틸만 페터 저, 김성철 역 《초기불교의 이념과 명상》(서울: 씨아이알, 2009)을 참조하기 바란다. 만일 다르마(法)에 대한 무지인 무명(avidyā)이 윤회의 원인이라면, 안다는 것(vidyā)이 세간의 격류를 벗어난 열반의 조건이 되기 때문에 인도의 지적 체계로서의 특징을 보여주는 것이라고 저자는 강조하고 있다. 붓다가 색계 사정려(四靜慮) 중 제4정려에서 정각을 얻었으며, 이 정려에서는 ‘심일경성(心一境性)’과 ‘평정심’만 지닌다고 설명한다. 사성제 중 ‘도성제’의 정점은 붓다의 깨달음과 직결된 제4정려와 연계된 ‘사정려’로 이루어진 ‘정정(正定)’이라는 사실을 충분히 유추해 볼 수 있다.

그리고 이미 몇몇 서구학자들이 지적한 것처럼, ‘선(善, kuśala)’이 윤리적이거나 선하기 때문에 ‘선한’ 행위라고 불리는 것이 아니라 깨달음에 이르는 길로 나아가는 데 이바지하므로 ‘선’이라고 불린다는 사실을 그 또한 강조하고 있다. 왜냐하면 선한 행위 자체가 깨달음으로 인도하지 않기 때문이다.

저자가 누누이 강조하지만 깨달음은 올바른 인식의 결과이다. 이것이 바로 인도불교사상의 핵심일 것이다. 업이 의도(cetanā, 意思)라고 선언한 이가 바로 붓다이며, 이러한 업의 이해는 바라문사상과 자이나교의 입장과 완전히 차이가 난다라고 정의하고 있다.

즉, 기존의 업의 이해가 신체적인 행위로 한정되었음에 반해, 붓다가 업을 의도에 의한 ‘내적 청정’으로 바라보았다는 점은 인류 문명사의 코페르니쿠스적 전회라는 것이다. 그리고 아비다르마(Abhidharma)가 지적 관심에 근거한 철학이 아니라, 해탈도와 직접적으로 관련된 가르침이라는 사실을 강조하고 있다.

결국 한국에서 번쇄한 소승철학으로 폄하당하고 있는 이러한 아비다르마 교의는 위빠사나(觀, vipaśyanā) 수행의 구체적인 내용에 해당하며, 분석적 통찰인 혜(慧, prajñā)의 수습과 밀접하게 연결된다고 할 수 있다. 이 책 2장 및 여러 군데에서 ‘바이바시까(Vaibhāṣika)’를 《대비바사론(Mahāvibhāṣā)》의 교의를 따르는 이인 ‘비바사사(毘婆沙師, Vaibhāṣika)’와 대척점에 위치한 남방 상좌부의 ‘분별론자(分別論者, Vibhajyavādin)’로 번역하고 있는데, 이는 ‘비바사사’로 정정해서 읽어야 할 것이다.

제3장 대승불교의 성격과 기원에서 이 책의 저자는 경멸적인 ‘소승(Hīnayāna)’이라는 표현보다 ‘비대승’ 혹은 폴 해리슨이 사용한 ‘주류 불교’라는 용어가 적절하다는 사실을 언급하고 있다. 그리고 대승과 비대승이 실질적인 대립을 하고 있었다는 추정에 대한 위험성을 지적한다. 이러한 지적은 중국 구법승들이 같은 사원에서 비대승 비구들과 대승 비구들이 거주했다는 사실을 기록하고 있음에 주목한 결과이다. 아울러 불교의 ‘교단 분열’은 교리적 불일치 때문이 아니라, 사원의 계율 준수에 대한 이해의 차이에 의해 비롯되었다고 소개한다. 결국 이러한 인식의 차이가 승단 분열(破僧, saṃghabheda)을 이끌었다는 것이다.

 하지만 대승불교는 교단의 분열 속에서 기원할 수 없음을 적시하고 있다. 왜냐하면 대승의 율장과 같은 그러한 것이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저자는 인도에 어떤 대승불교 승려들도 존재하지 않았다고 언급한다. 결국 저자는 대승이란 철학 학파가 아니라, 해탈도를 향한 실천적인 목적과 연계된 궁극적인 의도가 무엇인지에 대한 내적 동기나 통찰이라고 이야기한다. 저자의 이러한 관점은 아띠사(Atiśa)의 《보리도등론》에 나타나는 대승에 대한 규정에 의거한 것이다.

아울러 그의 관점은 고고학적 방법론을 바탕으로 논지를 전개하는 그레고리 쇼펜(Gregory Schopen)과 초기 대승경전을 연구하고 있는 폴 해리슨(Paul Harrison)의 주장과 어느 정도 일치한다. 저자는 대승불교가 교단적인 정체성을 가지고 있지 않으며, 범불교운동(pan-Buddhist movement)이 바로 대승이라는 사실을 지적하고 있는 것이다. 아울러 히라카와 아키라(平川 彰)와 틸만 페터의 불탑(佛塔)과 연결된 ‘대승불교 재가 기원설’을 강력하게 부정한다. 대승불교의 기원과 관련한 그의 예리한 지적은 결국 경전 신앙, 출가 집단 중심, 엄격한 수행전통으로 회귀, 불신관(佛身觀)의 변천이라는 네 가지 관점으로 요약할 수 있을 것이다.

제4장 주요한 불교사상 학파에서 설일체유부, 경량부, 상좌부, 개아론, 대중부의 교의를 상호 비교하면서 간략하게 잘 소개하고 있다.

제5장 대승불교 철학에서 반야의 궁극적인 완성인 반야바라밀, 초기 및 후대 반야경전의 사상을 소개하고 있다. 아울러 국내외의 많은 학자들이 보살은 위대한 연민(大悲) 때문에 깨달음을 연기한다고 수사학적 기법을 사용하면서 언급하고 있는 부분에 대해 날카롭게 비판한다. 이는 문자 그대로의 ‘무주처열반에 대한 오해’로 인한 것이라고 해석하고 있다. 결국 무주처열반을 지향하는 이들은 보다 신속하게 깨달음을 얻게 된다는 사실을 저자가 강조하고 있음을 쉽게 간파할 수 있다. 이러한 저자의 태도야말로 윤회와 열반의 이원성을 초월한 무주처열반의 의미를 제대로 소개하는 것이 아닐까 싶다.

아울러 중관사상에서 마드야마까(Madhyamaka)는 ‘학파(school)’, 마드야미까(Mādhyamika)는 ‘중관을 따르는 자(a follower)’나 ‘문헌(a text)’을 지칭한다고 저자는 언급하고 있다. 하지만 평자가 이해하는 한, 비록 후대의 분류법이기는 하지만 마드야마까(Madhyamaka, dbu ma)는 문헌의 명칭 속에서 발견되는 《근본중송》(Mūlamadhyamakakārikā)의 의미를 지니는 ‘중론(근본중송)학파/전통(school/tradition)’으로, 마드야미까(Mādhyamika, dbu ma pa)는 ‘중론의 가르침을 따르는 이(a follower)’로 이해해야 하지 않을까 싶다.

저자는 중관사상에 이어서 유가행파에 대해 《해심밀경》을 필두로 유가행파의 논사와 문헌들, 마음과 삼성(三性)의 관계를 설명한다. 그는 진제가 ‘9식설’을 주창하고 있다고 언급하지만, 사실 이러한 견해-티베트에서도 진제가 9식설의 지지자로 소개되고 있다-는 진제의 견해가 아닌 ‘섭론학파’의 견해라는 사실을 저자가 미처 간파하고 있지 못하는 듯하다.

저자는 제6장 대승불교의 붓다에서 법신(法身, dharmakāya)의 복합어 해석에 대한 폴 해리슨의 탁월한 지적을 소개하고 있다. ‘법신’은 ‘붓다의 가르침이나 요소들의 신체’로 이해해야 하며, 그러므로 붓다의 가르침을 올바르게 이해함으로써 붓다의 진정한 신체를 보게 된다고 언급한다. 이러한 그의 지적은 초기 대승경전이나 가르침의 산출과 관련한 ‘불수념(佛隨念, buddhānusmṛti)’과 ‘관상’ 등의 묘사와 관련한 대승경전 기원의 실마리를 어느 정도 제공하고 있다. 결국 법신(Teaching-body)은 형이상학적이거나 우주적인 절대자의 관념이 아닌 것이다. 만일 누군가가 법신의 개념을 절대적이고 유일한 것으로 언급한다면, 아마도 그는 자기도 모르게 비불교적인 베단따의 사상에 함몰될 것이다.

제7장 진언이취/금강승―인도의 딴뜨릭 불교에서 그동안 오해받거나 부적절하게 이해된 다양한 딴뜨릭 불교의 주제들을 앤서니 트라이브는 균형 잡힌 시각으로 명쾌하게 소개하고 있다. 딴뜨릭 불교에 대한 마지막 장은 원문과 대비하면서 몇 번씩 곱씹어야지만, 온전하게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이상으로 이 책의 내용을 간략하게 소개하였다. 지면상의 이유로 각 장의 중요한 내용을 골고루 소개하지 못하였다는 점, 평자의 이해와 배치되는 내용들을 밝히지 못하였다는 점, 그리고 무엇보다 저자들의 의도를 깊이 있게 헤아리지 못한 평자의 미숙함과 과문함이 아쉬움으로 남는다. 이 책의 저자들은 1차 원전 자료와 최신의 2차 자료까지 폭넓게 인용하면서도 빈틈이 거의 보이지 않는 논리 체계를 구사하고 있다. 앞으로 한국에서도 역서가 아닌 저서로 인도불교사상에 대한 맞춤형 노웨어(know-where) 책을 만날 수 있기를 희망하면서 이 책에 대한 서평을 갈무리하고자 한다. ■

 

차상엽
금강대학교 HK연구교수. 동국대학교 경주캠퍼스 불교학과 졸업. 동국대 대학원 불교학과에서 박사학위 취득. 저서 및 역서로 《대승불교의 보살》(공저), 《무성석 섭대승론 소지의분 역주》(공역), 《티베트문화입문》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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