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외불교 논단 - 단절과 소통 그리고 단절

1 미국의 불교학, 불교학 방법론

전통의 부재는 역사의 빈곤에서 불가피하게 드러나는 부작용이다. 동시에 그것은 새로운 시각을 쉽게 도출할 수 있는 긍정적인 요소를 내포한다. 굳이 미국 역사의 짧음을 지적하지 않더라도, 미국에서 불교학 연구의 역사가 미천함은 새삼스럽게 언급할 필요가 없다. 1893년 시카고에서 열린 세계종교회의에 인도의 스와미 비베카난다 (Swami Vivekananda)가 등장하기 이전까지 오직 기독교 유일신의 믿음과 해석만이 존재했던 그들의 종교학의 역사는, 1960년대 이후에나 대학에서 불교학을 논의할 수 있는 환경을 형성하게 된다.

이러한 환경을 긍정적으로 표현하면 문화의 다양성만큼이나 다양한 불교학 연구 방법론이 끊임없이 시도되는 곳이 미국이라고 할 수 있다. 문헌학에 기초하여 불교학을 논의하는 독일과 프랑스로 대표되는 유럽이나, 일본의 불교학계와는 전혀 다른 방법으로 불교를 접근하는 곳이 미국이다. 전자는 불교 원전을 중심으로 해석과 재해석을 통한 불교 자체의 이해가 주류라고 할 수 있다. 이와 대조적으로 미국 불교학은 원전에 대단 중요성을 상대적으로 경시하면서, 다양한 학문 분과에서 그들의 시각에서 불교를 접근하고, 그들에게 필요한 연구 방법론들을 끊임없이 제시할 수 있는 환경이다.

미국의 불교학계는 불교학을 논의한다기보다는 불교학을 위한 방법론을 논하는 것이 마치 중심인 것처럼 보인다. 이러한 경향은 불교학 내부에서 자체적으로 제기되는 문제의식에서 출발한 것은 아니다.

광범위하게는 에드워드 사이드(Edward W. Said) 대표되는 오리엔탈리즘에 대한 반성으로서의 인문학 전반에 형성된 동양에 대한 재이해의 흐름이 불교학에도 영향을 미친 측면이 있다. 보다 직접적으로는 미국 종교학이 직면하고 현실에서 기인한다. 비록 청교도로 대표되는 신학 연구가 미국 대학의 기원한다고 할지라도, 지금 세속의 대학에서 신학을 가르칠 필요가 있는가라는 물음에 직면한다.

그리고 이미 성서 연구에 대한 문헌 교정과 번역이나 해석은 일정정도 완결형으로 더 이상 논의가 지속될 필요성이 없다는 암묵적인 동의이다. 다시 말하면, 종교학이 독립된 학문 분과로서 지속할 필요성을 증명해야 하는 것이 현실이다. 이러한 실존적인 고민은 필연적으로 학문 방법론에 대한 재논의라는 새로운 담론을 형성하고 있다. 따라서 종교학은 철학뿐만 아니라, 인류학이나 사회학, 고고학, 여성학 등에서 다양한 요소들을 차용내지 융합하기 시작하였으며, 이는 역으로 이들 학문에서 종교학을 논의할 수 있는 계기를 제공한다.

짧은 불교학 연구 역사는 이러한 외부적인 환경에서 결코 자유로울 수 없다. 즉 불교학은 미국에서 불교학에 대한 이해나, 논의를 시작하기도 전에, 외부적 요청에 화답해야 하는 상황에 직면하게 되었던 것이다. 미국에서 불교학이 어느 학문 분과에서 연구되는 것이 가장 바람직한지는 아직도 해결되지 않는 논의 주제이다.

불교학은 지역학, 종교학, 철학, 인류학, 사회학, 고고학 등 거의 모든 분과나 학과에서 다루어지고 있다. 즉 하나의 독립된 학문이나 통일된 체계를 구성하는 것이 아니라, 학자 개개인의 역량에 따라서 다양한 결과물이 생산되는 구조를 형성하고 있다.

이러한 환경에서, 불교학은 다른 주류 학문과 어떻게 소통할 수 있을까. 누구도 거부할 수 없는 세계를 지배하는 강한 나라 미국은 불교학을 어떻게 받아들이는가. 이 두 가지 질문의 교차점에 미국학계에서 선불교 연구의 대표자로 칭송되고 있는 프랑스 출신의 베르나르 포르(Bernard Faure)교수가 있다.

본 글은 다양한 불교학 연구 방법 중에서, 현재 미국에서 가장 각광받고 있는 학자 중의 한 사람인 베르나르 포르를 선불교 연구와 불교학 연구를 대표 저작들을 중심으로 살펴보고자 한다. 지금까지 출판된 포르의 대표적인 저작들을 중심으로 그가 어떻게 불교 이해하고 서양의 지적 흐름에 불교를 등장시켜 조화시키려고 노력하였는지를 살펴본다. 그의 연구가 특이하게도 미국학계에서만 특별하게 조명되고 있는지를 고찰하고자 한다.

2. 포르의 선불교

베르나르 포르(Bernard Faure)는 프랑스 파리 대학에서 박사학위를 받고 미국 스탠포드 대학 종교학과 교수를 지냈다. 현재는 콜롬비아 대학 종교학과에서 일본 종교 전공 교수로 재직 중이다. 그는 스스로 동아시아 불교 중에서 선과 탄트리즘 불교의 다양한 측면들을 인류학적 역사학과 문화 이론의 관점에서 연구하고 있다고 설명한다. 이른바 전통과 이단, 불교 유물, 불교 도상들 그리고 성과 여성문제 등의 다양한 주제들을 불교라는 범위에서 연구하고 있다고 밝힌다.

그러나 미국 불교학계에서 포르의 학문적 성취를 일컬을 수 있는 핵심 키워드는 프랑스 ‘후기 구조주의’와 ‘선불교’이다. 그는 미국 불교학계에서 선불교 연구의 방법론이나 담론에 새로운 지평을 연 것으로 평가받고 있다. 보다 폭넓게는 불교학이 인접학문들과 소통할 수 있는 가능성을 제시하고 있다고 일컬어진다.

한때 유행처럼 만연하였던, 후기구조주의 프레임을 통한 선불교의 이해는, 불교학 내부에서 자체적으로 생산된 담론이 아니다. 현대 프랑스 철학으로 대표되는 외부의 서양철학 전공자들에게서 그 시초를 찾아볼 수 있다. 이러한 현상은 우리 학계에서도 프랑스 현대 철학 전공자들이 불교를 접근하고, 선불교 연구 성과물을 제출하는 특이한 현상을 초래하기도 하였으며, 지금도 일정 부분 지속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마치 후기 구조주의자의 대표로 칭송되는 데리다가 자국 프랑스에서보다 미국에서, 철학에서가 아니라 영문학과를 중심으로 더 각광받는 학자로 평가되어 온 사실로 미루어 보아, 미국에서 포르가 광범위하게 환영받는 것은 지극히 자연스러운 현상이라고 할 수도 있다.

1) 《전통을 향한 의지: 북종 선에 대한 비판적 계보》
영어로는 뒤늦게 번역된 《전통을 향한 의지:북종 선에 대한 비판적 계보(The Will to Orthodoxy: A Critical Genealogy of Northern Chan Buddhism》(1997)는 1984년 파리대학에 제출한 그의 박사학위 논문을 교정, 보완한 저작이다. 이 책은 포르의 학문적 훈련과정과 출발점을 잘 보여주고 있다. 실제로 이 책에서는 선불교와 구조주의를 결합한 학자로서의 포르의 모습은 찾아볼 수 없다.

정통적인 선불교 연구에서 익숙한 역사학적 연구방법으로 바탕하고 있다. 즉 선불교 역사에서 전통적으로 평가되어 오고 있는 북종선의 교학에 대한 이해와 그 역할을 비판적인 시각에서 재조명하고 재평가하고 있다. 대표적인 일본의 선불교학자 야나기다 세이잔(柳田聖山)의 학문적 계승자로서, 오랫동안 일본에서 수학한 포르의 학문적 여정을 드러내고 있다.

크게 세 부분으로 구성되어 있는 이 책은 우선 북종선에 대한 포르의 전체적인 이해과정을 보여주고 있다. 신수의 생애와 사상을 서술하고, 이에 바탕한 정치적 지성사적 조망을 보여주고 있다. 문헌에 바탕하여 문헌 이해를 돕기 위한 시대적 상황을 함께 논의하고 있다.

그리고 신수 이후의 북종선이 어떻게 다른 불교학파들과 절충하고 융화되었는지를 논의한다. 마지막 부분은 능가경계통의 조사들의 어록을 다루고 있다. 즉 북종선의 어록들을 경전의 위치로, 즉 정통성을 지닌 경전으로 자리매김을 시도한다. 이 과정에서 필요한 선불교와 다른 학파들과의 상호의존적인 복잡성 속에서 필요한 역사적인 맥락들을 위해 포르는 나름대로 그 근거를 제공하고 있다. 전체적으로 지와 관, 돈과 점의 수행, 성과 속의 구분 등에서 필연적으로 발생하는 긴장관계를 해소하기 위한 북종선의 절충주의적 성격을 강조한다.

이러한 절충주의는 북종선이 신회로 대비되는 남종선과 달리 독립된 《단경》을 남기지 않았다는 점에서도 그 특징이 드러난다고 할 수 있다. 일본에서 수학한 대표적인 미국 선불교학자 존 맥크레이(John McRae)의 연구 성과물인 <북종선과 초기 선불교 전통의 형성(The Northern School and the Formation of early Chan’s Tradition>(1986)과는 시기적으로나 연구 결과적으로도 동일선상에 있다고 할 수 있다.

2)《즉각성의 수사학: 선불교 대한 문화적 비평》
미국 학계에 포르라는 학자의 이름을 각인시킨 계기는 《즉각성의 수사학: 선불교 대한 문화적 비평(The Rhetoric of Immediacy: A Cultural Critique of Chan/Zen Buddhism)》(1991)과 뒤이어 출판된 《선, 예지와 둔지: 선불교 전통에 대한 인식론적 비평(Chan Insights and Oversight: An Epistemological Critique of the Chan Tradition》(1993)이다. 이 두 책은 오늘의 포르를 있게 한 명실상부한 그의 대표작이다. 연이어 출간된 두 책은 미국 선불교 연구자들로 하여금 지금까지의 연구방법론를 긍정적으로든 부정적으로든 반성하게 하는 계기를 제공하였다고 평가된다. 이후 선불교 연구에서의 담론은 포르의 연구에 대한 찬성과 반대로 구분지어진다고 할 만큼 그 영향력은 대단하다.

《즉각성의 수사학》에서 포르는 해석학과 수사학, 구조주의와 역사적 분석, 선불교 교리와 문화나 이념적 대립 등의 다양한 연구 접근 방식을 시도하고 있다. 이 책은 크게 두 부분으로 분류할 수 있다.

하나는 불교사에서 남겨진 다양한 유물이나 의례 등을 각각의 주제를 상정하여, 역사적 선상에서 인류 문화학적 시각에서 논의하고 있다. 가령, 불교의 다양한 도상들이 왕권과 세속적 기준, 교학적 관심이 결합된 구조로서의 역할을 한다고 분석한다. 이러한 구분을 포르는 다시 다른 세상의 마술가와, 이 세상의 책략가 내지 협잡꾼, 그리고 사회적 보살이라는 이념적으로 구분된 개념들과 대비시킨다.

다시 책략가는 마술가로서의 역할과 교차되면서, 중국 당 왕조 말기에 형성된 보수적인 사회를 구성한다고 해석한다. 선수행을 강조하는 전통적 선불교에서 배제되어 왔던 다양한 측면들 즉 불교 유물이나, 도상 의례나 문화사적인 여러 측면들을 즉각성의 중요성이라는 측면에서 주목한다.

다른 한편으로는 선불교 전통에 내재되어져 온 철학적 주제들을 포르는 과감하게 해제한다. 전통적으로 분류하는 남종선과 북종선의 구별은 다분히 전략적이며, 이념적 구분이라는 데서 출발한다. 한발 더 나아가 ‘초기선’이라고 일컬어지는 것은 일련의 위계적 전통에서 기인한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이것은 개인의 해탈을 중시하는 종교적 관점에서 용납될 수 없으며, 단지 선을 다른 이에게 가르치기 위해 스스로에게 부여한 권위에 지나지 않는다고 주장한다. 그러므로 ‘순수 선’ 라고 일컬어지는 초기의 형태는 후대에 지속될 수 없으며, 해체가 불가피하다는 결론에 도달한다. 해체와 선의 결합은 ‘기원’에 대한 가르침의 문제뿐만 아니라 ‘기원’에 대한 경험을 이념적으로 구축하였다는 점을 지적한다.

3) 《선, 예지와 둔지: 선불교 전통에 대한 인식론적 비평》
《선, 예지와 둔지》는 《즉각성의 수사학》의 확대 연장선에 있으며, 진정한 포르의 대표작으로 여겨진다. 그가 서문에서 밝히고 있듯이 선불교를 다른 학문들과 함께 논의할 수 있는 가능성을 제시한다. 즉 서구의 주류 사상에 선불교를 가까이 다가갈 수 있게 하려는 노력이다. 서양의 합리론의 전통, 주류 학문들과 대비시키려는 방법론적인 수정주의를 보여주고 있다.

포르는 선불교 연구의 방법론을 제시하기 위한 출발점을 종교나 영성적인 범위에서 논의하였던 스즈끼 다이세쯔(鈴木大拙)의 신비주의적 해석의 반론에서 시작한다. 그는 선불교의 정신이나 물질의 실재에 대한 논의는 수사학의 구조에서 반감되고 있음을 보여준다. 동시에 오리엔탈리즘의 시각을 비판하면서 역사적으로 퇴보한 담론의 모순성을 극복하고자 한다. 기존 선불교 연구에 대한 포르의 비판은 선 그 자체에 대해서 회의적인 서구 합리론자들의 견해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선불교의 논의 기준으로 이성, 정신적인 해탈, 그리고 진리라는 세 가지 범주를 제시한다.

포르는 중국과 일본의 선의 연속성을 주목하면서 동시에 역사적 문화적, 교리적 차이도 주목한다. 이러한 차이는 단순히 표면적인 차이에 머물지 않고 선의 본질에도 영향을 미친다고 주장한다. 전통은 단순히 정의될 수 없는 초역사적인 하나의 정체성으로서 지속되는 과정으로서 관계의 구조라고 분석하는 시각과 동일하게 선문화와 선언어의 다양성을 강조한다.

포르는 허구적인 구성에 불과한 ‘선 전통’이라는 개념 그 자체는 스스로에게 부여한 환영에 지나지 않는다고 한다. ‘선 전통’이라는 관념은 하나의 방편에 불과한 속제적 시각에서의 진리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므로 ‘선 전통’이라는 이념이 내재된 모든 담론은 해체할 필요성이 있음을 역설한다.

다시 말하면, 선 전통은 본질적으로 실존하지 않는, 이념적인 허구에 지나지 않으며, 스즈끼의 신비주의적인 선 이념은 그 자체로서 왜곡된 실재의 한부분이며, 전통 그 자체가 이전의 왜곡에 의해 반복적으로 재생되는 왜곡일 뿐이다. 따라서 포르는 스즈끼가 제시한 ‘지평의 융합’은 허상일 뿐이며, 서구의 오리엔탈리즘 시각에서 발생한 담론에 지나지 않는다고 비판한다. 또 스즈끼의 선의 대한 생득설(生得說)적인 견해는 단순히 또 다른 오리엔탈리즘일 뿐이며, 스즈끼가 선불교에 연구에 기여한 유일한 점은 오직 근대적 담론에 선을 초대한 것뿐이라고 포르는 주장한다.

포르는 미국 학계에 광범위하게 퍼져 있는 ‘스즈끼 효과(영향)’을 포르는 사회학적인 관점에서 설명한다. 곧 서양에서 스즈끼 선불교의 성공은 그의 문헌이나, 철학적인 연구 역량과 관련 있는 것이 아니라, 동양학자로서 서구의 담론에 참여한 긍정적인 모델로서, 서구 사회가 조성한 하나의 결과물이라는 것이다. 즉 스즈끼의 선불교는 그의 사회적 문화적 지위와 세속적인 힘의 동맹에 의해 형성된 하나의 이념적인 흐름이나 경향으로 파악한다.

스즈끼의 선의 본질로서 ‘순수한 전통’에 대한 호소는 역설적이게도 지극히 세속적인 이념적 전략이다. 그리고 불교의 정수는 오직 권위있는 선사들만이 접근 가능하다는 가정 등이 내포된 이념적인 토대위에 구축된, 당연히 거부되어야 할 명분에 지나지 않는다고 한다.

이러한 해체 작업은 선불교 전통에서 깨달음의 문제 또한 아무런 신뢰할 근거를 제시하지 못한다는 주장으로 이어진다. 포르에게 있어서 유일한 깨달음의 문제는 이성적인 예지뿐이다. 즉 이것의 반대는 오직 비이성일 뿐이라는 해석이 가능하게 한다. 선불교 저술들은 일종의 전시효과를 내포하는 한편, 전통에 대한 규범화를 초래한다고 포르는 비판한다. 포르는 선불교 연구에 필요한 자세는 ‘행위의 학문(performative scholarship)’이라고 이름하며, 기존의 선불교 연구의 담론들과 대조한다.

많은 선불교 저작들이 여전히 근원적인 진리나, 적절하게 선택하여 조합한 영원한 법에 대해서 언급하고 있으나, 선불교에서 이성 중심주의와 차이에 대한 구분은 선 전통 자체 내에 은폐된 선의 본질성을 해석학으로 재발견할 수 있게 한다고 역설한다. 최고의 선 연구 방법은 진리에 대한 행위적인 개념(performative conception)의 탐구로 옮겨가야 한다는 것이다. 따라서 포르는 선의 근원적인 정신성 대한 연구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후기 구조주의에서 제시하는 개별 존재에 유쾌한 감정이나, 가벼움을 언급하면서, 선불교의 학문적 전통에서 이에 대한 논의가 없었음을 비판한다.

따라서 포르는 전통적으로 불교 내지 선불교에서 논의되어온 진리의 문제에 대해서 거의 언급할 필요성을 느끼지 않는다. 후기 구조주의자들이 의지하는 니체 (Nietzsche)의 견해, 곧 “진리는 서정적· 수사적으로 고양되고, 부여되고, 채색되어져 인간에게 오랫동안 고착되어진 인간 행위의 부여된 총체에 지나지 않는다”는 이해가 포르에게도 그대로 적용된다. 따라서 선불교에서 진리에 대한 담론은 무의미하며, 심지어 이념적으로 구성된 허구에 지나지 않는다. 따라서 선불교의 담론은 단순히 실재를 반영하거나, 진리를 표현하는 것들에 대해서 논의할 것이 아니라 실질적으로 그것들을 생산하는 행위의 학문으로 나아가야 한다고 주장한다.

선에 대한 포르의 이러한 예지는 결국 선불교 연구에 대한 재정비와 재논의의 필요성을 역설하며, 선수행도 보다 효과적인 측면에서 논의되어야 할 필요성을 야기한다. 즉 전통을 유지해온 모든 기본 골격들도 무용함을 드러내면서, 후기 구조주의에 바탕한 해체를 주장하는 포르의 지적인 민첩함이 유감없이 발휘되고 있다.

후반부는 ‘시간’ ‘공간’ ‘언어’ ‘저술’ 그리고 ‘자아’라는 범주에서 선불교를 재기술하고 있다. 포르는 선불교의 담론은 구전과 문헌의 변증법, 시각적 이미지를 형성하는 시간과 공간의 균질성, 그리고 교리적 해석을 극복하는 수사학의 우위에 바탕하여 새로운 인식론적 논의를 시도한다.

예를 들면, 선불교에서 공간의 대한 논의를 뉴튼의 공간과 비교하면서, 선사들에 의해서 이념화된 공간을 대비한다. 즉 진리의 단층 없이, 어떤 깊이와 잠재성 관점을 넘어서는 이념화된 공간으로 명상에 대한 갈망을 목표로 선의 공간을 도출한다. 하이데거(Heidegger)가 일본 선불교를 ‘실존주의’로 대치한 것과 같이 포르는 선사들의 사유 구조를 파르메니데스(Parmenides)의 사유와 동일선상에 위치시킨다.

즉 변화를 다양성 속의 제일성(齊一性)으로 설명하려는 시도를 거부하면서 동시에 사물의 기원에 대한 담론을 철저히 배격한다. ‘지금, 현재, 여기’가 모든 것을 포함하며, 각각의 존재의 시간은 예외없이 전체의 시간이다. 전체로서의 존재, 전체로서의 세상은 각각의 시간 현재 지금에 존재한다. 포르는 우리를 둘러싼 변화는 본질적인 비역동성의 가면이라고 한다. 즉 찰나를 위한 영속으로서 현재 지금을 강조하며, 시간을 극복하는 공간은 언어의 산물이라고 한다.

선불교와 언어의 관계에 대해서 포르는 선은 수행을 위한 논의와 담론을 위한 수행을 구분한다. 그리고 이러한 담론은 선 정신에 대한 실재에 대한 정당선과 연관되어 논의되어 왔던 것이 아니라 정치적인 하나의 전략이라고 분석한다. 언어의 대한 부정적인 시각과과 심리 치료를 위한 전략으로서 세속적인 관점에서 애매하고 모호하기 그지없는 역할을 하기 위해서 고안된 것일 뿐이라는 것이다. 즉 모든 담론은 불교 교리를 주장하기 위한 하나의 방편에 불과할 뿐이다.

더 나아가 포르는 공안이나 화두도 초심자들에게 심리적으로 권위를 부여하기 위한 전시효과의 일종으로서 일반적인 언어행위에 지나지 않는다고 주장한다. 결국 푸코(Foucault)가 주장하는 힘의 권력에 종속되는 개인주의가, 선불교내에서도 표출되었음을 주장한다. 이러한 시각에서 승가 공동체도, 결국 푸코가 주장하는 감시와 처벌의 포괄적인 감옥의 하나로서, 지속적으로 승려들에게 계율의 파괴에 대한 경각심을 유발하고 개인주의를 악화시킨다고 주장한다. 결국 승가공동체의 삶도 일종의 파시스트적인 규율에 지나지 않는다고 주장할 만큼 파격적인 논의를 전개하고 있다.

선불교 연구자들에게 새로운 연구 방법과 접근 방식을 제시하는 포르의 일련의 주장들은 기존의 연구결과와 방법들에 대한 반성과 성찰을 요구하며 충분히 논의 될 가치가 있다. 그러나 오랫동안 연구되고 논의되어 왔던 선불교 연구의 핵심으로서 지혜의 증득이 논의된 다양한 문헌들에 대해서 오늘날의 언어로 번역하고 재해석하는 작업들을 포기한다면, 우리에게 남겨지는 선불교는 과연 어떤 의미가 있을까라는 필연적인 물음을 제기한다.

3. 소통을 위한 불교학

선불교 연구에서 보여주었던 포르의 후기 구조주의적 시각은 이후 불교학 전반으로 확대되고, 한층 더 나아가 다른 학문들과의 대화하고 소통하려는 시도로 이어진다. 《붉은 실, 성에 대한 불교적 접근(The red Thread: Buddhist approaches to Sexuality)》(1998)은 포르가 다루는 불교학 연구의 광범위함을 여실히 드러낸다.

이 책은 가장 광범위하면서도 세밀하게 성에 대한 불교적 담론, 특히 일본 불교의 담론과 계율에서의 성의 문제를 어떻게 보는가를 분석한 최초의 저작이라고 할 수 있다. 이 책이 출간된 다음 해인 1999년에 미국 종교학회(The American Academy of Religions) 연례 학술대회에서, 이 책에 대한 비평만으로 한 분과를 이룰 정도로 많은 논의를 생산해냈다. 비록 미국 종교학회 자체가 내포하는 어느 정도의 학문적 집단성을 감안하더라도, 미국 불교학계 내지는 인접학문들이 포르의 연구를 얼마나 주목하고 있는지를 여실히 보여준다.

데리다(Derrida)가 선불교의 기본적인 언어관과 마찬가지로, 언어는 그것이 의미하는 바를 왜곡되지 않고 진실로 표현하는 것이 불가능함을 강조하며 보여주었던 방법론을 포르는 매우 성공적으로 차용하고 있다. 다양한 논의들이 선명하고 구체적인 결론에 도달하는 것을 멈추고, 대신에 결론이라고 여겨질 수 있는 다양한 증거들을 남겨 두게 된다. 독자들로 하여금 그 증거들이 무엇을 의미하는 추리 내지 상상할 수 있는 다양한 가능성을 열어둔다. 즉 ‘부재’는 역설적으로 침묵의 중요성을 강조함을 증명하고 있다.

포르는 이 책에서 푸코의 ‘부재는 현존을 암시한다’는 이론에 의존하여, 불교에서 여성의 문제를 논의하기 위해서 무엇이 은폐되어 왔고, 무엇이 드러나 있는지의 관계와 관계의 연관성에 주목한다. 즉 포르는 불교 역사에서 여성의 부재는 역사에서 여성에 대한 서술의 실패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이것은 불교역사에서 여성의 역할 내지 모델이 간과되어도 좋을 만큼 중요하지 않았음을 의미한다고 지적한다.

포르는 예를 들어 불교 문헌에서 드러나는 욕망의 문제는 서양의 역사만큼이나 남성중심적으로 논의되었음을 지적한다. 즉 남성의 사랑은 남성을 위한 남성의 사랑이지만, 여성의 사랑은 여성을 위한 남성의 사랑이라고 파악한다. 여성은 비구니이든지 보살이든지 상관없이 단순히 비구의 욕망의 대상이었을 뿐임을 지적한다.

특히 그는 계율과 지계의 전통에 내재되어 있는 이념화된 관념의 해체를 여기서도 어김없이 시도한다. 계율에서의 성에 대한 규율, 종교적 위반, 광기, 성에 대한 반율법주의의 이념화, 불교에서 동성애 문제 등을 해체의 구조에서 다룬다. 그는 문헌과 현실사회를 동일 구조로 가정할 수 없다는 점에 주목하면서 문헌에서의 성적인 금기와 수행의 표현을 다룬다. 그리고 동시에 불교에서의 성에 대한 담론의 사회적인 실재성이 반영되어진 현실을 함께 조명한다.

그는 불교 승가의 계율이나 규율은 전체적으로 선불교 계보에 내재되어진 집단적인 전략적 목표를 위한 하나의 일련의 과정으로 간주한다. 포르에게 성을 금지시하는 계율의 다양한 규율은 방편적으로 개인의 해탈을 위한 것이 아니라, 전체 공동체 사회를 위해 규범지워진 사회적 실용성이라고 주장한다. 즉 계율을 욕망과 처벌을 위한 도구로서 사회적 도구로 간주하는 후기구조주의 사상이 어김없이 잘 드러난다.

《이중 노출, 불교와 서양 담론의 가로지르기(Double Exposure: Cutting Across Buddhist and Western Discourses)》(2004)는 포르의 가장 최근 저작이다. 불교학을 공부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나가 한 번쯤은 꿈꾸는 비교 종교학이나 비교 철학의 가능성을 포르의 시각에서 풀어내고 있다.

이 책은 여러 가지 면에서 기존의 포르의 저작들과는 구분된다. 서문에서 스스로 밝히고 있듯이 불교학자들을 위한 책이 아니라, 프랑스 지성인들과 보다 광범위하게는 일반 대중 독자들을 대상으로 하고 있다. 좀더 구체적으로 서양 이원론에 바탕한 대륙철학에 익숙한 일반 사람들에게 이원론과의 거리 두기와 용수로 대표되는 불교 공사사상에 바탕한 비이원론적 사유에 다가가기를 목표로 하고 있다.

비교철학적 논의라는 그의 목표만큼이나 논의의 범주가 광범위하고 다양하다. 서양 철학사에서 플라톤부터 현대 프랑스 구조주의 사상가들을 모두 다루고 있으며, 동시에 불교에 대한 논의도 초기부터 시작해서 탄트리즘 선불교에 이르기까지 전체에 걸쳐있다. 기본 골격은 후기 구조주의 사상사가들이 이해하고 받아들인 불교의 핵심 요소들을 채택함으로써, 서양의 지성사의 주류에서 논의 가능한 불교를 서술하고 있다.

책의 제목에서 내포하고 있듯이 ‘이중’은 양면적인 의미뿐만 아니라, ‘두 범주’로의 구분으로도 해석 가능하다. 포르의 논의의 핵심은 불교 사상뿐만 아니라 불교를 해석하기 위한 방법론적 논의까지도 모두 의미한다. 불교에서 주관과 객관의 이원적 구분을 근본적으로 부정하는 비이원론에 기초하여, 다양하게 논의될 수 있는 모든 불교 개념들을 등장 시킨다.

열반과 윤회, 업의 인과와 업의 초월, 진제와 속제, 돈과 점의 깨달음의 역설 속에서 나타나는 끝없는 대척점 속의 비이원론적인 실재를 노출시키고 있다. 그는 불교가 베르그송(Bergson)이 말하는 이분법적인 구분이 하나로 융합내지 조화될 수 있는 학문임을 역설한다.

플라톤 이후로 서양 지성사의 중심을 형성한 실재와 현상에 대한 이원론적 구분, 선과 악의 이분법, 기독교 지성사에 내재한 진리와 거짓의 이분법 등을 끊임없이 대비시켜 내면서, 불교와 차이성을 서술한다. 또한 인류학과 대조되는 심리학적 방법론, 은폐나 노출의 효과, 오리엔탈리즘과 반(反)오리엔탈리즘적 시각, 신화에 반하는 이성주의, 초월주의와 대조되는 실용주의, 신비주의에 반하는 추상적 불가지론 등의 논의를 불교에서 도출하여 논의한다.

포르의 주된 목적은 이원론적 구분에 바탕한 서양 합리론의 전통에서 필연적으로 도출되는 간극과 불일치, 부조화의 노출시키는 것이다. 그리고 그러한 전통이 무엇을 말하고 있고, 무엇을 말하지 않는지에 대해서 불교적 시각에서 대안을 제시하고 있다.

끝없이 반복되는 이러한 논의의 과정에서 지속적으로 이중적으로 함의를 표출하기 위한 시각의 전환, 발상의 전환을 제공한다. 끊임없이 반복되고 지속되어진 일련의 모순의 과정을 드러내는 것은 마치 만다라의 마술적인 타원형과도 같으며, 또한 칸트(Kant)가 규율을 증명하기 위해한 지속적으로 순환하는 형태의 방법론을 취하는 것과 동일선상에서 논의될 수 있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프랑스 후기 구조주의 관점에서 불교의 비교철학 가능성을 제시한 것으로서 의미를 부여할 수 있는 ‘이중 노출’은 그 가능성만큼이나, 많은 한계를 노출하기도 한다. 광범위한 범주에서 논의되는 담론이 필연적으로 초래하는 표상적인 논의의 한계도 그대로 드러낸다. 이미 서양 철학 내부에서도 충분히 논의되었던 서양 대륙 철학의 한계점을 재거론하는 것은 철 지난 서양 철학사의 한 부분을 불교학이라는 영역에 재출현시킨 것에 지나지 않는 지난 역사의 반복일 뿐이며, 선불교 전공자로서 초기 불교에서부터 탄트리즘, 일본 선불교까지 불교의 모든 영역을 다루면서 전체적으로 불교 교학 특히 인도불교에 대한 자의적인 이해와 해석의 한계 역시, 포르는 여지없이 드러내고 있다.

4. 맺으며

포르의 학문의 가장 특징은 프랑스 후기 구조주의 사상에서 불교를 읽어내는 그의 예지이다. 이것은 한편으로는 불교학에서는 새로운 방법론이나 사유의 지평을 제시하는 역할을 하고 있으며, 다른 한편으로는 프랑스 현대 지성사에 대한 하나의 반론이나 혹은 보조 수단으로서 불교를 차용함을 의미한다. 이러한 양면은 포르 학문에서 가장 큰 장점이자, 약점이라고 볼 수 있다.

포르의 학문은 전통적인 동양학자들이 오랫동안 연구하여 왔던 기존의 모든 담론들에 대한 해체와 도전으로 평가받고 있다. 오랜 기간 동안 서양의 철학계와 동양의 불교학이 간과하고 있는 부분들을 그는 이원론의 해체, 지역적 경계와 역사적, 이념적 구분의 가로지르기를 통하여 잘 드러내고 있다.

불교학에서 유럽을 중심으로 형성된 오랫동안 지속되어 왔던 문헌연구에서 초래한 원전에 대한 무거움에서 벗어나는 방법을 포르는 잘 보여주고 있다. 오랜 불교 역사 속에 내재된 중심적 사상에 대한 과감한 거부, 역사적 시각의 거부 가능성을 포르는 미국 불교학계에 제시한다. 즉 문헌에 대한 해석과 재해석의 연구방법을 거부하고, 결과가 직접적으로 드러나는 연구 방법들을 보여준다. 즉 그의 이런 연구 방법은 학자들로 하여금 선불교, 혹은 불교학이 타학문과의 우호적인 관계를 형성하고 지속할 수 있음을 증명하면서, 미국 종교학계가 요구하는 실질적인 해답들을 보여주고 있다.

그러나 베르나르 포르는 역설적이게도 불교 원전 연구가 주류를 형성하는 유럽, 프랑스 출신이다. 또한 그는 선불교 연구에서 역사적 방법론이 무엇보다도 중요시되는 일본에서 오랫동안 학문적 훈련을 받았다. 그리고 이제 그의 학문은 미국에서 불교학뿐만 아니라, 타 학문들과 소통하고 있다.

짧은 역사에서 미처 독립된 학문으로 형성되지도 못한 미국의 불교학이 종교학의 범주 내에서 미국불교학자들이 미국의 종교학계에 현실적으로 제시하여야 하는 여러 답들을 포르는 충실하게 잘 제시하고 있다. 포르는 불교학자로서 불교학 내부에 존재하지만, 실질적으로는 외부자들이 무엇을 필요로 하고, 그들에게 어떻게 불교가 화답하여야 하는지를 잘 알고 있는 학자이다.

역설적이게도 미국에서 각광 받는 만큼이나, 포르 개인은 유럽으로 삶과 학문적 터전을 옮기고자 부단히 노력하는 것으로도 잘 알려져 있다. 그러나 유럽학계는 현재까지도 포르에 대한 차가운 시선을 거두지 않고 있다. 즉 유럽에서 훈련한 포르 자신의 학문적 역량은 미국 학계와는 소통 가능하지만, 유럽과는 단절된 상황이다. 매 학기마다 베르나르 포르가 유럽의 대학으로 옮겨갈 수 있는가가 호사가들의 관심사인 것은 그의 학문적 여정만큼이나 역설적이다. 이러한 현상들은 우리에게 불교학 연구가 누구를 위한 것인지, 어떤 불교학 연구가 필요한지를 되돌아볼 수 있게 하는 하나의 타산지석이 될 수 있을 것이다.


성청환
동국대학교 인도철학과 및 동 대학원 석사과정을 졸업하고, 현재 미국 플로리다 대학 종교학과 박사과정에 재학 중이다. 최근에는 본지를 통하여 미국불교학계의 대표적인 연구 성과물들을 지속적으로 소개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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