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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아를 설명하는 몇 가지 방법* / 마크 시데리츠
―서양철학의 관점에서
[47호] 2011년 06월 01일 (수) 마크 시데리츠 조은수 역

리버훔 재단(Leverhulme Trust)이 마련해 준 이 자리에서 강의하게 되어 영광입니다. 이번에 강의하고자 하는 바는 여러 인도철학 전통 중 불교철학에 관한 것입니다. 특히 제가 다룰 주제는 우리가 소중히 여기는 가치를 어떻게 정초(定礎)할 것인가 하는 문제입니다.

사람들은 다른 사람의 복지를 염두에 두어야 한다는 것에 동의합니다. 또한 인간은 삶에서 더 많은 자유를 가져야 한다고도 믿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것을 믿어야 할 이유는 과연 무엇인가 하는 질문이 일어날 수 있습니다. 이 문제를 천착하기 전에 불교에 대한 몇 가지 오해를 지우는 일부터 하겠습니다.

불교는 보통 종교라 여겨집니다. 종교란 일반적으로 자신이 믿는 교리적 입장이 있고 그 입장이란 믿음, 또는 윤리규범에 기반을 둔 것입니다. 그래서 제가 지금 불교와 가치에 대해 말을 하고 있어 혹시나 불교 입장에서 전도하는 것이 아닌가 생각하실 수도 있지만 이 강연 전체에서 어떠한 것도 진리를 벗어난 것이 없다는 것을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첫 번째로 제가 말씀드리고자 하는 것은 불교철학입니다.

불교철학자들은 다른 철학자들과 마찬가지로 이성적 방법을 쓰는 사람들입니다. 붓다가 어떤 주장을 했다고 해서 그 자체로 그 주장을 받아들이는 것은 아닙니다. 그 주장에 좋은 이유가 있고, 그 이유가 누구나 불교의 중심 교리를 다 받아들이는 데 충분히 이성적이기 때문에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두 번째로 여기서 말씀드리고자 하는 것은 불교철학의 전통에는 불교도가 아닌 사람의 삶에서도 유용한 통찰을 담고 있다는 점입니다.

불교에서는 철학적 논변을 통하여 구원에까지 이를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 말은 철학적 탐구를 수행하는 것이 다른 전통에도 유용하다는 가능성을 뜻하기도 합니다.

1.
불교철학자들은 고통에 대해 주목하라고 가르칩니다. 자유 또한 아주 중요한 가치라고 합니다. 보살핌과 자유의 가치는 사람의 특성에 대한 사실에서 찾아질 수 있습니다. 이 강연에서는 불교 윤리학의 기본을 이루는 자아에 대한 관점을 논의하고자 합니다.

두 번째, 세 번째 강연에서는 불교의 보살핌과 자유에 대한 견해를 살펴보겠습니다. 불교에서 보는 인간에 대한 가장 기본적 사실은 인간에게 자아가 없다는 점입니다. 나에게는 자아가 없기 때문에 다른 사람의 복지에 대해서 평등하게 관심을 가져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인간에게 자아가 없다는 점은 또한 인간은 자율적 존재라는 점도 설명해 줍니다. 우리가 이러한 주장을 검토하기에 앞서 자아란 무엇이고, 왜 자아가 존재한다는 것을 부정해야 하는지 그 이유를 살펴봐야겠습니다.

붓다와 같은 인도의 철학자들이 말하는 자아란 인간의 한 부분으로서 필수불가결한 부분이며 자아 없이 한 인간이 존재할 수 없다는 것을 말합니다. 그래서 정신·신체적 혼합체―나의 신체나 나의 마음의 일부분― 속에 자아라고 할 무언가가 있다면 그 부분이 존재하는 한에서 나는 존재할 것입니다. 만일 내가 존재하기를 그친다면―그것과 같은 다른 부분에 의해 즉각 대체된다 하더라도― 그렇다면 나도 존재하기를 그칠 것입니다. 그 이후에 존재하는 사람은 내가 될 수 없고 다른 어떤 사람일 것입니다.

불교에서는 인간의 어떤 부분도 인간이 존재하는 만큼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자아는 없다고 말합니다. 인간의 존재는 여러 무상한 사태들의 연속적인 흐름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먼저 경험이 있고 생각이 있고 욕망이 있고 그리고 행동 등이 있습니다. 이것들의 존재를 부정하는 것은 아닙니다. 경험도 생각도 욕망도 행동도 있습니다. 불교에서 자아가 없다고 하는 것은 경험을 하고 욕망을 갖는 그 무엇이 있다는 것을 부정하는 것이고 그 생각을 생각하는 자 또는 그 행동을 행동하는 자가 있다는 것을 부정하는 것입니다.

데카르트가 한 유명한 말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여기에서 ‘나’라는 것은 그 생각을 사고하는 자, 그리고 그 경험을 갖는 사람을 말하는 것입니다. 불교에서는 그러한 것은 없다고 말합니다. 데카르트는 대신 ‘생각이 일어난다’라고 했어야 합니다. 불교는 이러한 입장에서 나아가 생각을 한다고 해서 사고하는 어떤 것이 있다고 결론 낼 수 없다고 말합니다.

하나의 사건이 발생하고 생각이 일어납니다. 그러나 거기에 생각하는 사람을 추가할 필요는 없습니다. 데카르트가 말하는 생각하는 사람이란 처음의 것을 경험하고 그리고 또 다음 것을 경험하는, 지속하는 어떤 것을 말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불교에서 모든 증거를 볼 때 지속하는 자아가 없다고 주장합니다. 자아란 영원한 것이어야 할 텐데 인간의 어떤 부분[즉 색·수·상·행·식의 오온을 말함−옮긴이]도 영원하지 않습니다.

여기에서 여러분은 아마 데카르트의 편을 들고 싶은 마음이 생길지도 모르겠습니다. 인도에 많은 철학자들은 자아가 있다는 입장을 견지했습니다. 여러분은 지속적으로 경험하는 자아가 있다고 생각할지 모르겠습니다. 불교에서는 사람들이 이와 같이 믿는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왜 이렇게 믿을까요? 감각을 느끼고 생각하고 욕망하고 계획을 만드는 어떤 것이 있다고 느꼈기 때문에? 우리는 그런 것을 실제로 느끼는가요? 아니면 단지 느낌, 생각, 욕구만 느끼는 걸까요. 불교에서는 증거를 자세히 살펴본다면 떠도는 사건의 경험만 있을 뿐이지 다른 어떤 걸 느끼지는 않는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라고 합니다. 생각과 느낌 뒤에 무엇인가 항상 존재한다고 느끼실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우리가 경험 속에서 그것을 잡아 보려고 하면 마치 영원히 포착할 수 없는 것처럼 교묘하게 요리조리 빠져 나갑니다. 아마도 연속하여 존재하는 생각하는 사람에 대한 느낌을 가지는 것은 마치 우리가 영화를 볼 때 주인공이 한 곳에서 다른 곳으로 움직이는 것을 보는 것과 같은 느낌일지 모릅니다. 화면 속에서 우리는 움직이는 연속적 인물을 봅니다.

그러나 실제로 보는 것은 화면의 이곳저곳에서 나타나는 각각 독립적인 영상의 연속을 보는 것입니다. 한 곳에서 다른 곳으로 움직이는 연속하는 사람이라는 관념을 제공하는 것은 바로 우리입니다. 영화란 실제로 한 순간에 24컷의 사진이 빠르게 돌려져서 화면에 비치는 것일 뿐입니다.

실제로 우리는 자아를 느끼는 것은 아닐지 모릅니다. 그러면 여기에 대해 반론이 나오겠지요. 왜 우리는 자아가 있다고 가정해서는 안 되느냐는 것이지요. 그렇지 않고서야 우리 삶의 연속성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겠는가는 것이지요.

예를 들어 보지요. 저는 지난달 처음으로 베니스를 갔던 경험을 기억합니다. 제가 공항으로 가는 수상선을 놓쳐서 그 배에 대고 손을 냅다 흔들며 선착장을 미친 듯 뛰어가던 일을 기억합니다. 만일 지속하는 자아는 없고 비연속적인 사건의 흐름밖에 없다면 이런 과거의 경험을 기억하는 자는 과연 누구란 말입니까.

나는 남의 과거 경험을 기억할 수 없고 남은 나의 경험을 기억할 수 없다는 것을 우리는 잘 알지요. 그렇다면 경험하는 것은 한 가지고 또 기억하는 것은 다른 한 가지라면, 경험도 하고 그것을 기억도 하는 공통된 사람이 없다면 내가 다른 사람의 경험을 기억하는 것이 되는 것 아니겠습니까? 이것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우리는 다 알지 않나요?

이런 여러 가지 의문에 대해서, 불교에서는 우리는 지금 ‘추론’을 하고 있다는 점을 지적할 것입니다. 더 이상 우리는 자신의 내부를 들여다봤을 때 자아를 볼 수 있기 때문에 자아가 존재한다고 말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 대신, 자아가 없다면 기억이란 현상을 설명할 수 없기 때문에 자아는 꼭 존재해야 한다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러한 추론이 어떻게 이루어지는지 한번 알아볼 필요가 있겠습니다. 현상을 설명하기 위해서는, 우리가 실제로 지각할 수 없는 것을 상정하는 그런 방법 말고도 다른 방법도 가능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사실 우리가 지각하는 것을 설명할 수 있는 다른 아무런 길이 없는 것이 아니라면, 우리가 볼 수 없는 어떤 것을 가정하는 일은 피하는 것이 좋습니다. 우리 조상은 식물에 영혼이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지각되는 것이 아닌데도 불구하고요. 그렇지 않고서는 해가 떴을 때 왜 식물의 이파리가 해 쪽으로 기울어지는지를 설명해 낼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요즘은 식물에 영혼이 있다고 상정하지 않고서도, 식물이 왜 해를 쳐다보는지 과학을 통해서 설명을 제시할 수 있게 되었지요.

자아가 있다고 추론을 하게 되는 것은 과거 경험의 기억이라는 현상에서부터 시작한 것입니다. 그러니 기억이라는 현상을 한번 주의 깊게 살펴보도록 하지요. 저의 경우 베니스에서의 경험을 떠올릴 때마다 제 마음속에는 수상선이 운하를 벗어 나오는 영상이 떠오르고, 늦게 도착한 자신의 실수에 대해 화가 다시 나는 등, 마치 이전에 일어났던 사태가 다시 재현되는 것처럼 느끼게 됩니다.

왜 이것으로 자아가 지속적으로 존재한다는 증거로 삼아야 하는가요? 그러한 이유로는 두 가지 경우의 수가 있겠습니다. 첫 번째 가능성은 지난달에 일어났던 경험의 순간부터 지금 다시 재현하기까지의 기억의 자취를 담지 하는 어떤 것이 있다고 우리가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경험을 마치 사진 촬영과 같은 것으로, 그리고 기억이라는 것은 영상의 재현과 같은 것으로 생각하여, 그때 찍은 장면이 사진으로 구현되기 위해서는 그때 찍어서 얻은 데이터 정보를 그때부터 지금까지 저장한 어떤 지속적인 것이 내 속에 있다고 가정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아닙니다. 디지털카메라로 찍은 사진의 파일을 하나의 저장장치에서 다른 장치로 전송시킬 수 있다는 것을 우리는 압니다. 그래서 사진을 컴퓨터에서 볼 수 있는 것입니다. 내 컴퓨터 속의 JPG 사진파일과 베니스에서 찍은 카메라에 들어 있는 메모리칩에 저장된 데이터가 올바른 인과관계로 연결된다면 컴퓨터 모니터에 나타나는 그 영상은 베니스에서 겪었던 모험을 담고 있는 사진과 같은 것입니다.

사람의 기억이 왜 이와 같이 될 수 없겠습니까? 사람의 경우도 기억의 자취가 하나의 저장매체, 즉 우리의 뇌에서 다른 매체로 전달된다고 생각할 수는 없을까요? 그 복사하는 과정이 충분히 정확하다면, 경험하는 순간에서 기억하는 순간까지 지속하는 어떤 것이 있다고 가정하지 않고서도 그것을 기억해 내는 과정이 일어날 수 있습니다.

두 번째 이유는, ‘내’가 경험한 것을 ‘내’가 기억한다고 우리가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곧 기억이 발생하기 위해서는 먼저 경험을 하고 후에 그것을 기억해 내는 그 경험자가 있어야 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경험하는 자와 그것을 기억하는 그 동일한 것이 있어야 기억이 가능하다는 가정에 기반을 두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경험이란 경험하는 자를 필요로 한다는 가정에 기반하는 것입니다.

만일 매번 의식하는 순간에 그것을 의식하는 어떤 것이 있다고 가정한다면, 그럴 때만 우리는 베니스에서 경험을 한 자가 있고, 그것을 지금 기억해 내는 경험자가 있고, 그것이 하나의 같은 경험자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그러나 모든 경험은 경험하는 자를 필요로 한다는 가정을 무엇이 정당화해 줄 수 있을까요? 지금 우리가 찾는 것은 경험 외에 그것을 경험하는 자아가 있다는 증거를 찾으려고 했던 것입니다. 만일 이것이 우리가 증명하려는 것이었다면, 단순히 그렇게 가정할 수는 없습니다.

자아가 존재한다고 증명하는 것은 이제 불가능하게 보이지만 아직도 많은 사람은 그 말에 수긍하지 못합니다. 증거가 없음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우리 각자 속에 진정한 나, 내 생각을 생각하고 내 행동을 옮기는 그러한 영속적 실체가 있다고 굳게 믿고 있습니다. 인간이란 경험의 연속이 아니고, 그러한 경험들을 가지는 주체라고 생각합니다.

대부분의 사람은 경험하는 자 없이 경험이 있다고 생각하는 것 자체가 말이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따라서 불교에서는 자아를 증명하는 증거는 없다고 부정적으로 말하는 것 외에 뭔가 다른 설명을 해주어야 합니다. 자아가 정말 없다면 왜 대부분의 사람은 그것이 있다고 보는지 설명해주어야 하는 것이지요. 불교에서는 이것을 다음과 같이 설명합니다.

우리의 신념이란 우리가 말하는 법에서부터 나온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평소 말하는 방법은 실제로 존재하는 것에 대해 항상 믿을 만한 지침을 주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는 ‘비가 온다(It is raining)’라고 말할 때 거기서 it은 아무것도 지시하는 것이 없고 다만 문법적 목적을 가지고 말에 들어간 가상주어에 불과합니다.

‘나는 기억한다(I remember)’는 문장에서 ‘나’의 의미론적 역할에 대한 불교의 설명은 그 같은 경우보다는 좀 더 복잡합니다. 그렇지만 기본적 이론은 같습니다. 즉 우리의 일상적 언어에서 영속적 주체라는 생각이 나온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모두 어떠한 방식으로 말하고 생각하는 것을 배워 왔기 때문에 경험하는 자 없이 경험하고 생각하는 자 없이 행동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다고 당연시하는 것입니다.

2.

지금까지 살펴본 자아에 대한 불교의 가르침은 이미 서양철학에서도 다뤄진 바 있습니다. 데이비드 흄은 우리가 내면을 들여다볼 때 자아를 절대 찾을 수 없다는 점을 지적하였습니다. 최근 서양철학자 데릭 파핏은 자아의 존재에 대한 일반적 논변이 가지는 오류를 증명해 보인 바 있습니다.

그런데 불교에서는 더욱 흥미 있고 멋있는 설명을 제공합니다. 만일 자아라는 것이 없다면 우리는 왜 자아가 있다는 식으로 언어를 사용하는지 질문해 볼 수 있을 것입니다. 만일 이렇게 이야기하는 방식이 보편적인 것이라면 아마 그러한 데에는 이유가 있을지 모릅니다.

아마도 자아가 존재하기 때문에 그럴지도 모른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에 대한 불교의 대답은, ‘숲’이란 단어가 여러 그루의 나무를 설명할 때 유용한 방식인 것과 마찬가지로 ‘나’라는 단어도 신체적 그리고 정신적인 요소의 인과적 연속체를 지칭하는 데 유용한 방법은 될 수 있겠다는 것입니다.

 단도직입적으로 말하면 숲이라는 것은 없고 있는 것은 단지 나무들뿐이지만 이러한 식으로 말하는 것이 유용하기 때문에 마치 숲이 나무와 별개로 존재하는 어떠한 것이라고 믿는다는 것이지요. 마찬가지로, 존재하는 것은 단지 정신·신체적인 요소들과 그것들 간의 인과적 연관뿐임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나’라는 표현을 씀으로써 신체적이고 정신적인 구성물인 자아가 지속하는 것으로 존재한다고 가정하는 것입니다.

불교에서는, 숲은 실재하지 않는다고 말합니다. 왜냐하면 숲과 그것의 구성물 간의 관계를 타당하게 설명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나무가 실재한다고 해 봅시다. 나무가 실재하는 방식과 같이 숲도 실재한다고 가정한다면 숲과 나무는 같은지 아니면 다른지 물을 것입니다. 그러나 숲은 나무와 같을 수 없습니다. 숲에는 나무에 없는 속성이 있기 때문입니다. 즉 숲이라는 것은 하나이지만 나무는 여럿입니다.

한편 숲이 나무와 다르다면, 나무와 별개로 존재하는 어떤 것이라고 한다면, 숲이란 자율적인 인과의 힘을 가져야 할 것입니다. 즉 나무에 대해서는 설명할 수 없는 어떤 사실이 숲에 관해서는 존재해야 합니다. 그런데 불교에서는 그런 것은 없다고 부정합니다.

예를 들어, 숲이 가지는 서늘함이라는 것은 각각의 나무가 주는 그늘로도 설명이 되고 또 나무의 호흡으로 발생하는 효과로도 설명이 됩니다. 이러한 서늘한 현상을 설명하기 위해 숲이 실재한다고 가정할 필요는 없습니다. 따라서 이것은 언어적으로 유추된 허구입니다.

숲을 오랫동안 지속하게 해 주는 조건들이 무엇인지 생각해 보아도 같은 결과가 나옵니다. 숲이란 각각의 나무보다 훨씬 더 오래 지속합니다. 숲이라는 말은 개개의 나무가 죽고 또 다른 것들이 그 자리에 새로 자라나는 과정을 포함합니다. 여기서 이런 경우를 생각해 봅시다.

 [경우 1]:

너도밤나무를 자르고 대신 소나무를 심는다. 이러한 우리의 행동으로 인하여 원래의 숲이 깡그리 없어지고 대신 완전한 새로운 숲이 생긴 것은 아니라는 점에는 동의하시겠지요. 또한 이 숲은 너도밤나무를 자르기 전의 원래의 숲과 같은 숲이라고 동의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경우 2]:

숲을 몽땅 밀어서 목재로 만든 후에 거기에 소나무를 가득 심는다. 그렇다면 이 경우 우리의 행동 때문에 원래 있던 숲이 없애졌다는 데에 동의하시겠지요. 지금 자라나는 소나무 숲은 벌목도구를 가지고 들어오기 전에 거기에 존재했던 숲은 아닐 겁니다. 경우 1에서 원래의 숲은 지속하지만 경우 2는 숲은 없습니다.

그러나 이 두 가지 경우 사이에는 여러 가지 중간 단계들이 있습니다. 나무를 몇 그루나 베어야 숲의 존재가 계속된다고 하고, 아니면 숲이 완전히 없어지고 새로 탄생했다고 할 수 있을까요? 우리는 나무 몇 그루를 베었을 때 최초로 예전에 있던 숲이 없어졌다고 말할 수 있을까요?

생각건대 그러한 순간이란 있을 수 없습니다. 숲의 지속성과 원래의 숲이 없어지고 다른 새로운 숲으로 대체되는 이 두 가지 경우를 구별할 수 있는 분명한 경계선은 없습니다. 만일 숲 그 자체가 실체라면 그것의 존재가 계속되는 조건에 대해서 불확실성이 있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그러나 앞에서 본 것과 같은 애매한 경우를 충분히 상상할 수 있기에, 숲이란 이 나무들 모두를 지시하는 간편한 방법으로 즉 소통의 편의를 위해 만들어낸 허구라고 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숲에 대한 믿음은 요정에 대한 믿음과는 다릅니다. 둘 다 허구지만 요정은 환상 속 존재이고 숲은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는 숲에서 길을 잃을 수 있지만 요정의 나라에서는 길을 잃는 것이 불가능합니다. 이러한 차이점을 일컬어 숲을 ‘유용한 허구’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숲이 마치 존재하는 것처럼 행동하는 것은 일반적으로 우리에게 유용하기 때문입니다. 나무 한 그루 한 그루의 이름을 부르는 것이 거의 불가능하기 때문에 우리는 그것을 일러 한마디로 숲이라 하고 숲이 가지는 구체적 상황을 그 속에 포함시킵니다. 우리가 그러한 단어를 쓰기 때문에 숲이라는 어떤 존재가 있는 것 같은, 그리 무해한 허구를 낳습니다.

물론 이와 비슷한 사유를 숲을 이루고 있는 나무에도 적용할 수 있습니다. 나무란 결국 뿌리, 등걸, 가지, 이파리 등의 부분으로 이루어진 전체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나무 또한 유용한 허구일 것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분석적 과정을 계속하다 보면 더 이상 분리되지 않는 존재가 있을 것입니다.

불교철학에서는 나무나 마차 아니면 사람의 몸과 같이 일상적이고 물리적인 대상을 이루는 더 이상 나누어지지 않는 요소의 성질에 대해서 여러 가지 다른 의견을 내놓았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마음이라고 생각하는 것을 이루는 더 이상 나누어지지 않는 정신적 요소들이 무엇인지에 대해서는 다들 동의합니다.

즉 특정한 고통의 감각, 배고픔이나 목마름이나 욕구의 발생, 파란색 헝겊 조각을 인식하는 것 등이 그러한 것입니다. 이것은 곧 더 이상 나누어지지 않는 물질적인 것과 더해져 사람의 정신·신체적 요소를 이루게 됩니다. 불교의 설명에 따르면 ‘사람’이라는 단어는 이러한 정신·신체적 요소의 커다란 집합을 편의상 부르는 것입니다.

우리는 앞에서 정신·신체적 요소의 어떠한 것도 영원히 존재하는 것은 없다는 것을 살펴보았습니다. 그래서 자아라고 부를 만한 것은 없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사람이 일생을 지속하는데 어떻게 이것이 가능한 것일까요? 숲과 마찬가지로 사람도 각 부분이 교체되면서 지속합니다.

그러나 그 교체에는 특정한 방식이 있습니다. 즉 새로운 정신·신체적 요소들은 그 이전에 있던 것들에 인과적으로 의존하여 존재하게 됩니다. 이것이 우리 몸의 세포가 교체되는 방식입니다. 영원히 지속하지 않는 모든 정신·신체적 요소는 유사한 과정을 거칩니다. 어느 한순간 우리가 사람이라 부르는 것은 엄청난 수의 정신·신체적 요소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시간이 지속되면서 그러한 요소들의 세트가 존재하는데 하나의 세트의 구성물들은 앞에 존재했던 세트 구성물들의 결과물입니다.

우리가 사람이라고 부르는 것은 사실은 이러한 정신·신체적 요소들의 복잡한 인과적 연속체를 말합니다. 우리는 모든 정신·신체적 요소와 요소 간 인과관계를 열거하는 대신 그 전체 연속체를 지칭하여 하나의 단어로 표현하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사람이라는 것이 있다는, 즉 인과관계를 통해 각각의 다른 상태의 주체가 되는 어떠한 것이 있다는 허구의 관념이 발생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내면을 들여다볼 때 경험하는 자를 절대로 찾을 수 없음에도 불구하고 경험이 발생할 때마다 경험자가 있다고 믿게 되고 그 허구를 고집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마치 영국 노동자들의 평균수입이 얼마인지를 들으면 그 사람들이 무슨 회사에서 일하는 지 물어보는 것과 같습니다.

3.

이 문제는 다음과 같은 이유에서 중요합니다. 앞에서 자아라는 것은 사람의 어떤 실체적 부분을 지칭하는 개념이라는 것을 설명한 바 있습니다. 지속적으로 존재하는 자아가 지속하는 사람의 존재 속에 있다는 의미라고 설명했습니다.

만일 제게 자아가 있다면, 그 자아가 어떤 아기 속에 있어서, 많은 면에서 현재 나와 같지는 않지만 그 아기가 왜 지금의 저인지를 설명하는 이유가 될 수 있습니다. 이러한 이유로 자아를 부정하는 것은 마치 어떤 사람이 지속한다는 것을 부정하는 뜻으로 생각하기 쉽습니다. 불교에서 자아의 존재를 부정한다고 말하는 것은, 인과관계의 연속체 속에서 과거와 미래의 요소를 동일화해서는 안 된다는 말로 이해되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래서 불교가 마치 현재 순간에 살아야 한다고 가르치는 것처럼 생각하기도 합니다.

한때 탐 틸레만은 불교의 무아설을 가지고 이러한 결론을 내린 적이 있습니다. 틸레만은 자아가 없다고 믿는다는 것이 무엇과 같은 것인지에 대한 대답으로, 아주 특이한 형태의 투렛 증후군을 앓고 있는 환자를 소개한 신경학자 올리버 색스(Oliver Sacks)의 경우를 들었습니다.

투렛 증후군을 앓는 사람들은 자신의 행동이 가져올 결과에 대해 인식하지 못합니다. 즉 자신의 과거 선택이 현재의 상태를 결정하고 현재의 행동이 미래에 대한 함축을 한다는 것을 인지하지 못하고, 대신 완전히 현재 속에 살고 내일 무엇이 올지를 생각하지 못합니다.

실제로 그들은 내일이 있다는 것을 인식하지 못합니다. 이것을 자신에게 자아가 없다고 믿는 것과 같은 어떤 것이라고 틸레만이 생각했던 이유는, 일생을 통하여 모든 신체와 정신적 부분들은 없어지고 계속 새로운 것으로 교체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러한 모든 부분을 한데 모으는 자아라는 것이 없다면 내일 내가 다른 생각을 하고 또 머리카락이 얼마 더 작아졌을 때 그것은 내가 아닌 다른 사람이라고 생각할 것입니다.

그런데 색스가 말하는 투렛 증후군 환자는 병리학적인 것입니다. 만일 자아가 없다는 것을 믿는 것이 이와 같다면 무아설을 믿는 사람은 병리학적 상태에 있는 것일 겁니다. 붓다는 자아라는 허구를 버려야 우리는 열반을 얻을 수 있다고 강조하셨습니다. 더구나 열반이라는 것은 물론 병리적 현상이 아니지요. 그러니 여기에 뭔가 잘못된 것이 있습니다. 이렇게 생각하는 것은 불교에서는 자아의 존재는 부정하지만 한편 자아란 유용한 허구라고도 말하고 있다는 것을 망각하고 있는 것입니다.

즉 우리가 인과적 연속체를 이루는 각각의 상태를 모두 하나로 뭉뚱그려 마치 그것이 하나의 개체처럼 생각하는 것은 유용하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나’가 있다는 식으로 얘기하므로 ‘나’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한 방식은 유용하지만, 요정이 있다는 것은 일반적으로 유용하지 않습니다. 요정이 있다고 믿는 사람은 실제와 아무런 관련성이 없는 담화의 방식에 의해 스스로 기만당하고 있습니다. 숲이 있다고 믿는 사람도 또한 그런 담화의 방식 때문에 착각을 품게 되는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그러한 방식의 담화는 실제로 존재하는 것들에 기초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유용합니다. 불교에서는 사람이 존재한다고 생각하는 것도 이와 같다고 주장합니다.

붓다는 자신의 입장을 두 가지 극단 사이에 중도를 취하는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불교의 자아부정을 투렛 증후군의 병리와 동일화하는 것은 두 가지 극단 중의 하나를 택하는 것입니다. 자아의 존재와 관련해서 중도가 있을 수 있다는 것을 보지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여기서 이 경우들을 좀 더 천착하여 보면 다음과 같은 세 가지 입장이 가능합니다.

(1)비환원주의: 사람은 궁극적으로 실재한다. 그것은 왜냐하면 자아가 있거나 또는 자아는 비환원적으로 정신·신체적 요소에 비환원적으로 수반하기 것이기 때문에 그렇다.

(2)환원주의: 사람이라는 것은 개념적 허구이다. 사람은 정신·신체적 요소와 관련된 연속체로 이루어져 있다.

(3)제거주의: 사람은 절대적으로 비실재적이다. 사람이 존재한다고 생각하는 믿음은 잘못된 이론을 받아들여 생긴 결과이다.

만일 우리가 오로지 취할 수 있는 선택이 비환원주의와 제거주의밖에 없다면 우리는 당연히 불교의 무아설을 제거주의의 한 형태로 볼 것입니다. 그러나 불교의 관점은 일종의 환원주의로 생각하는 것이 더 타당할 듯합니다. 이것은 자아에 대한 논쟁이 하나의 조건만 다루고 있는 것이 아니라 두 가지 차원을 다루고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즉 형이상학 관점과 언어적 관점입니다. 사람에 대한 형이상학적 논쟁은 궁극적으로 존재하는 것이 무엇인가와 관련되는데 여기에서 환원주의와 제거주의는 비환원주의에 대하여 볼 때 사람이란 궁극적으로 실재하는 것이 아니라는 데에는 동의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왜 사람이 존재한다고 믿는지에 대한 질문이 여기서 또 나올 수 있습니다. 환원주의와 제거주의는 이 점에 대해서도 같은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어떤 이론을 받아들이기 때문에 사람이 존재한다고 생각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 두 입장은 그 이론이 과연 무엇인지에 대해서는 서로 반대 입장을 취합니다. 환원주의는 사람이란 궁극적으로 참이 아니지만 그럼에도 유용하다고 생각합니다.

 이에 반해 제거주의에서는 이것을 부정하는데, 마치 병이 난 것을 귀신이 들었다고 생각했던 선사시대 사람의 생각과 다르지 않다고 봅니다. 이 점에서 환원주의는 제거주의에 반대하며 비환원주의자의 편과 같은 입장을 취합니다. 우리가 어떤 이론을 받아들여야 하는지에 관한 의미론적 질문에 대해서는, 환원론자와 비환원론자 모두, 우리는 자신을 사람이라고 생각해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그들이 서로 일치하지 않는 점은 왜 그렇게 생각해야 하는지에 대한 점입니다.

비환원론자들은 우리는 사람이기 때문에 우리 자신을 사람이라고 생각해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이러한 의미론적 논쟁에 관한 비환원론자들의 입장은 형이상학에서 취하는 입장에서 끌어온 것입니다. 반면에 환원론자들은 자아설은 유용한 허구라 합니다.

궁극적으로는 복잡한 인과관계가 있는 정신·신체적 요소들의 연속체일 뿐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자아설은 한편 유용하다는 것입니다. 즉 그러한 연속체가 자신을 사람이라고 생각한다면 일반적으로 고통이 덜 초래되기 때문입니다. 현재의 연속체들이 자신과 그 연속체의 과거와 미래 요소들을 동일시하거나 그것들을 제 것으로 생각하려는 경향이 있다는 점 때문에, 모든 여러 경우를 생각할 때 이것이 더 나은 입장이라는 것입니다.

환원론자들이 왜 이렇게 주장하는지 알기 위해서, 왜 사람들은 치실을 쓰고 독감 주사를 맞는지 생각해 보십시오. 주사 맞는 것은 불쾌한 경험으로 현재의 연속체를 이루는 요소들은 그러한 행위를 함으로써 아무런 좋은 보상을 얻지 못합니다. 하지만 그렇게 하지 않는다면 충분히 막을 수도 있었을 고통을 결국 겪게 될 것입니다. 이 고통을 막는 최선의 길은 이 연속체의 요소들이 그 연속체의 과거와 미래의 요소들과 자신들을 동일하고 자기 것처럼 생각하는 것입니다.

만일 지금 내가 치실을 써서 이를 닦지 않으면 잇몸 질환이라는 미래의 고통이 ‘나’에게 일어날 것이기 때문에 그 고통을 예방하기 위해 지금 치실을 써야겠다는 생각, 그것이 내가 지금 치실을 쓸 때 일어나는 생각입니다. 고통이라는 것은 나쁜 것이고 예방되어야 하기에 만일 각각의 연속체가 과거와 미래의 각 단계의 자신과 동일화하는 법을 배운다면, 즉 자신을 나라는 사람이라고 생각하는 법을 배운다면 고통은 대체로 적어질 것입니다.

불교에 따르면, 우리가 자신을 무상한 하나의 연속체로 생각지 않고 ‘나’라고 하는 존재가 있다는 생각을 고집하게 되면 이러한 어려움이 발생된다고 합니다. 즉 우리는 자기도 모르게 자신을 남보다 앞세우게 되고, 앞으로의 ‘나’에게 무엇이 일어날까 전전긍긍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붓다가 말하는 고통의 근원입니다. 이러한 문제를 해결하는 방법은, 궁극적으로는 이러한 ‘나’라는 것은 존재하지 않지만, 그렇지만 동시에 마치 내가 존재하는 듯이 행동하는 것이 상당히 유용하다고 이해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균형을 잡는 것이 붓다가 말하는 중도입니다. 어떤 사람은 진정한 ‘나’는 영원하며, 이러한 영원한 존재의 진정한 본성을 흠뻑 드러내는 인생을 살아야겠다고 생각하기도 합니다. 또 어떤 사람은 우리는 이 생의 마지막, 또는 어떤 생의 어떤 상태의 마지막에 존재하기를 그친다고 믿어서, 그러니까 지금 우리가 얻을 수 있는 만큼 최대의 쾌락을 취해야 한다고 말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이 두 가지 입장은 같은 전제를 공유하고 있습니다. 즉 자아라는 것이 존재하고 그것의 존재는 어떤 의미나 목적을 가지고 있을 것이라는 전제입니다. 그러나 붓다는 중도를 제시함으로써 그러한 전제를 부정합니다. ‘나’라는 생각은 불필요한 고통이나 좌절을 방지할 수 있는 유용한 장치입니다. 그러나 이 ‘나’라는 관념은 단지 유용한 도구일 뿐이라는 것을 만일 잊어버린다면, 인생이란 무엇인가 하는 답 없는 질문을 찾아 나서는 스스로의 덫에 걸린다고 말할 수 있겠습니다. 대단히 감사합니다. ■

 

조은수 
서울대 철학과 교수(불교철학). 서울대 철학과 졸업, 미국 버클리대학교에서 박사학위 취득. 미시간대학교 아시아 언어문화학과 조교수, 서울대학교 규장각 국제한국학센터 초대 소장 등 역임. 〈원효에 있어서 진리의 존재론적 지위〉 〈통불교 담론을 통해 본 한국불교사 인식〉 등의 논문을 발표하고, John Jorgensen과 함께 《직지심경》을 영역. 본지 편집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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