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마모토 슈이치 / 빅터 구와하라

1. 머리말

현재 세상에는 환경과 관련된 많은 문제가 있다. 전 지구적 환경문제로는 지구온난화, 오존층 파괴, 산림 파괴, 생물다양성 감소, 사막화, 산성비, 해양오염 등을 들 수 있으며 실생활과 관련된 문제에는 환경호르몬, 농약, 식품 첨가제 등이 있다.

이러한 문제들은 현재 또는 가까운 미래에 인류의 삶의 터전이 붕괴되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에 세계가 직면한 가장 중요한 일이 되었으며, 다양한 대응수단이 환경문제에 대해서 취해졌다. 기본적으로 이 대응수단들은 그 원인과는 별도로 기술의 진보와 인간 활동의 관리, 이렇게 두 가지로 나눌 수 있다. 그러나 종교가 과학 및 기술과 동일한 관점에서 이러한 문제들에 직접적으로 기여할 것으로 기대할 수는 없다. 만약 종교가 기여할 수 있다면 그것은 아마도 생활방식과 가치관을 변화시키고, 환경윤리를 고찰하며, 윤리적 인식을 형성하고, 문명에 대한 검토와 그것을 전 지구적 차원에서 변화시키는 등 인간의 행동을 관리할 수 있는 수단에 대한 고찰일 것이다. 이들에 대해서는 종교가 긍정적으로 참여할 수 있다.

우리는 이제까지 불교가 어떻게 환경문제에 기여하는지에 대해, 모든 생명체에 육체적 정신적 고통을 일으키는 환경문제에서 불교의 임무는 그들의 고통을 줄이고 제거하는 것이라는 기본적 관점에서 고찰해 왔다. 구체적으로는 불교의 관점에서 살펴본 자연과 환경, 환경문제의 원인과 속성, 불교 계율의 의미, 문명의 이상적인 방향, 환경교육과 환경윤리의 이상적인 방향 등에 대한 것들이다. 이 글에서는 환경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세 가지 초점, 즉 환경문제의 인식, 생활방식의 재검토,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실행과 활동에 대해서 기술하고자 한다.

2. 환경문제의 인식

많은 사람들이 환경문제에 대한 문제의식을 공유해야만 한다. 이를 위해서 우선 이러한 문제들의 현재 상황과 원인을 심도 있게 인식하는 것이 필요하다. 문제의 실시간적 인식은 과학을 통한 조사를 제외하고는 이루어질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문제의 원인을 단지 과학의 관점에 한정하여 인간 활동에 의한 물질의 이동과 순환에서뿐만 아니라 사회와 인간의 요소에서도 또한 고찰해야만 한다.

후자의 경우에 불교를 통해 문제의 원인을 고찰할 수 있다. 더욱이 불교는 또한 개개인의 깊은 관점에서 그것을 인식할 수 있으며 인간과 환경의 전개 원리를 보여줄 수 있다. 환경문제의 의미와 역할에 대해 인식하는 것 또한 환경과 자연을 본래대로 유지하기 위해서도 중요하다.

1) 생명체에 대한 근본적인 생태계적 평등주의와 공생적 사고

인간과 생명체와 비생명체를 어떻게 인식하는가는 환경윤리에 있어서 중요한 측면이다. 불교는 근본적으로 인간과 생명체와 비생명체를 동일한 삶의 단계에 있는 것으로 생각한다. ‘삶의 단계’라는 말은 ‘삶’의 일반적 의미를 가리키지 않고 생명체를 유지하는 삶의 에너지와 같은 근본적인 힘을 가리킨다. 불교는 ‘삶’이라고 부를 수 있는 이 근본적인 힘이 잠재적으로는 비생명체에도 존재한다고 가르친다.

생명체와 자연 등 모든 현상의 발생을 인식하는 데 있어서 불교의 독특한 개념 하나는 연기(緣起)의 개념에서 찾아볼 수 있다. 이 개념은 어떠한 개체도 독립적으로 존재하거나 발생하지 않으며 모든 개체는 다른 개체와 관계를 맺거나 조건이 지워져야만 존재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모든 현상의 근본적인 상의상관(相依相關) 때문에 어떠한 개체도 독립적으로 존재할 수 없다고 불교는 가르친다. 존재론적 관계(공간적 관계)와 생성론적 관계(시간적 관계)는 이 개념에 포함된다. 연기의 개념에서 볼 수 있는 자연과 환경에 대한 개념은 생태학의 개념과 비슷하다. 모든 것은 어떤 방식으로든지 연결되어 있다. 그러므로 자연과 생명체의 공생과 생물학적 다양성의 원칙이야말로 우리의 세계를 유지시키는 데에 가장 근본적인 것이다. 연기의 이 개념은 불교에서 모든 것의 기초가 된다.

한편 불교는 ‘삶’이 윤회전생(輪迴轉生)할 수 있으며 인간과 생명체에게 ‘삶’의 이상적인 방식은 성불(成佛)이라고 생각한다. 여기에서 성불은 ‘삶’의 가장 이상적인 상태를 의미하고 ‘삶’에 있어서 ‘붓다’의 경계를 나타낸다. 이러한 인식은 모든 생명체가 인간과 마찬가지로 똑같은 ‘삶’을 지니고 있다는 것에서 비롯된다. 그러므로 불교에서 모든 생명체는 근본적으로 동일하다.

2) 삶과 환경의 비이중성과 진화의 원칙

‘환경’은 그것에 상응하는 주체가 있을 때에만 정의될 수 있다. 불교의 환경에 대한 관점은 모든 생명체와 생태계와 같은 비생명체의 관계뿐만 아니라 ‘삶’의 더욱 깊은 층위까지도 고려한다. 이는 업(業)의 관점으로 주체와 환경은 업의 표현이다.

불교는 생명체와 그것의 환경이 둘이 아니라고 생각하는데(依正不二), 이것은 주체와 환경 간의 관계를 설명해 준다. ‘의정(依正)’은 ‘의보(依報)’와 ‘정보(正報)’의 줄임말이다. 여기에서 ‘보(報)’는 업의 드러난 영향 또는 결과를 의미한다. ‘정보’는 생명체 또는 주관적인 세계를 나타내며, ‘의보’는 비생명체 또는 객관적인 세계를 가리킨다. 개개 생명체의 과거의 업으로 인한 과보는 주관적인 삶과 객관적인 환경 모두에 나타난다. ‘불이’가 ‘현상적으로는 둘이지만 실제로는 둘이 아님’을 의미하기 때문에 ‘의정불이’는 ‘삶과 그것의 환경이 별개의 두 현상이지만 근본적인 실제에서는 둘이 아님’을 의미한다. 업의 과보인 상황에서 주체와 그것의 환경 모두 공존하거나 둘이 아니다.

업에 대한 불교적 개념의 관점에서 보면, 특히 불교심리학이라고 할 수 있는 유식학파에서, 환경은 알라야식에 각인되어 있는 업종자(業種子)로부터 생겨난 것으로 생각된다. 업종자는 공업(共業)과 별업(別業)의 두 종류로 이루어진다. 공업이 다른 개체와 공유하는 업인 반면에 별업은 그렇지 않다. 공업과 별업에 대한 이러한 개념은 상대적인 것으로 공유된 공업은 관련된 주체에 따라서 변화된다.

《아비달마순정리론(阿毘達磨順正理論, Abhidharmanyāyānusāra)》에서는 산과 강과 대지 등이 공업에서 생겨나며 생명체는 별업에 의해 태어난다고 설하고 있다. 그러므로 개개의 인간은 별업에 의해 태어나며 산과 강과 대지 등의 자연환경은 인류의 공업에 의해 이루어진다. 결과적으로 인간의 심층심리 세계는 알라야식에서 물리적인 세계와 연결되어 있다. 인간이 업을 정화시켜 나간다면 공업의 결과인 환경도 정화될 것이다. 그러므로 생명체와 환경의 불이적 관점(依正不二)에서 환경(의보)은 공업에 의해 이루어지며 생명체(정보)는 별업에서 생겨난다. 즉 불교에서는 주체와 환경이 모두 필수불가결하며 둘이 아니다.

이러한 원리는 주체와 환경이 변화되고 정화될 수 있으며 또한 삶의 깊은 층위에서 업에 의해 발생된 환경문제 또한 개선될 수 있음을 보여준다. 그러므로 주체의 업이 변화하면 주체인 인간만이 아니라 그 환경 또한 변화시킬 수 있다.

지구과학은 최근에 생명체와 환경이 서로 상호작용하면서 관련되어 있음을 밝혀냈다. 이것은 생명체와 환경 간에 일어나는 상호변화의 개념이다. 과학의 개념은 단지 물질적인 측면만을 포섭하는 반면에 불교는 단지 물질적인 측면뿐만 아니라 ‘삶’의 근본적 차원에서 ‘상호변화’ 또한 포섭한다.

3. 생활방식의 재검토

다음으로 환경문제를 해결하는 데 어떤 생활방식이 적절한지 고찰해 보자. 말하자면 생활방식의 재검토이다. 불교의 관점에서 인류의 생활방식을 고찰하기 위해서는 이 세계와 미래 세대의 인류와 다른 생명체를 모두 포괄하는 윤리적 고려의 개선과 자기 욕구의 이상적인 방식에 대한 고찰이 필요하다.

1) 생명체에 대한 윤리와 지구윤리

불교에서 타인이나 다른 생명체에 대한 윤리에 대해 고찰할 때 ‘연기’와 ‘중도(中道)’의 두 철학적 개념이 중요하다. 두 개념 모두 환경문제를 해결하는 데 기여하는 중요한 관점을 제공한다. 위에서 언급하였듯이, 연기의 교설은 공간적, 시간적 관계를 나타낸다. 자연에 대한 인간의 윤리는 ‘연기’의 관점에서 고찰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연기적 관계를 해치는 교란은 불교의 지혜에 반하는 것이다. 따라서 생물 다양성을 지닌 균형 잡힌 생태계를 유지하는 것은 불교의 연기적 관점에서 볼 때 매우 중요하다. 모든 생명체는 다른 생명체와 비생명체와의 관계에 의해서만 살아갈 수 있기 때문에 불교는 이러한 관계를 단절하는 인간의 행동을 거부하여야만 한다.

생물 다양성을 유지하는 데 있어서 반드시 고려되어야 할 것은 개별 생명체의 유지에 대해 생각하는가 아니면 종(種) 또는 생태계의 차원에서의 유지에 대해 생각하는가의 경우이다. 달리 말하자면 앨버트 슈바이처(Albert Schweitzer)의 ‘삶에 대한 경의’와 같이 개개의 삶이 존중되는 경우와 알도 레오폴드(Aldo Leopold)의 ‘대지(大地) 윤리’처럼 생태계의 안정성을 보장하는 것이 평가받는 경우의 두 관점이 있다. 이 문제는 환경윤리의 ‘삶-중도주의’에서의 문제와 비슷하다. 불교가 ‘삶-중도주의’일지라도 이것을 고찰하기 위해서는 불교의 ‘중도’의 지혜에 대해 살펴볼 필요가 있다.

불교의 ‘중도’에 대한 전형적인 사고방식은 ‘고락중도(苦樂中道)’에서 잘 볼 수 있다. ‘고락중도’는 석가모니 부처님의 수행에서 비롯된 것이다. 이것은 고행주의와 쾌락주의를 일방적으로 부정하거나 수용하는 관점이 아니다. 즉 두 원칙 또는 극단의 가치를 받아들이면서도 ‘중도’는 둘 사이의 조화를 요구하며 어느 한쪽으로도 기울어지지 않는다. 중도에서는 양 측면을 조화롭게 포용하는 것이 중요하다. 불교의 ‘중도’와 ‘연기’의 개념에 바탕하여 윤리를 고찰할 때 그 윤리는 상황윤리가 될 것이다. 여기에서 불교는 ‘자비(慈悲)’와 ‘불살생(不殺生, ahimsa)’을 강조한다. 모든 생명체의 평등과 그에 따라 자연스럽게 ‘자비’와 ‘불살생’을 주장하는 불교는 모든 생명체를 포괄한다.

그런데 불교는 그때그때의 상황을 고려하면서 ‘연기’ ‘중도’ ‘자비’ ‘불살생’의 관점에서 생명체에 대한 윤리를 고찰한다. 따라서 불교도가 파손된 탱크에서 유출된 오일로 뒤덮인 바닷새를 버리지 않고, 죽어가는 동물을 구하기 위하여 노력할 것이라는 결론은 자연스러울 것이다.

그러나 불교도는 예를 들어 영양(羚羊)이 그 상황에 비추어 볼 때 과도하게 증식했다면 그 개체 수를 조절할 것이다. 불교는 기본적으로 모든 생명체를 존중한다. 그러나 어떤 종이 과도하게 증식하여 다른 종들이 멸종 위기에 처했을 경우 불교는 생태계 전체의 조화와 다른 종들의 보존을 위하여 그 종의 개체 수를 조절하는 것을 거부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조절의 방법으로는 ‘자비’와 ‘불살생’에 근거하여 가능한 한 살생하지 않는 방법이 적용될 것이다. 구체적으로는 암수를 격리하여 출산을 조절하는 방식 등의 예를 들 수 있다. 개발과 같은 대부분의 인간 활동은 거부되어야 하는데 왜냐하면 그러한 활동은 생물의 총량을 감소시키고 생물을 멸종시켜서 생태계의 안정성을 파괴하고 다른 종들에게도 영향을 미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생물 다양성과 전 지구적 생태계의 안정성 유지는 지구윤리의 관점에서 평가될 수 있을 것이다.

(2) 영적(靈的) 문명과 적절한 욕구

지구 온난화의 해결에 가장 큰 문제는 지구의 제한된 물질 체계에서 인류가 사용하는 물질적 재화의 소비가 너무 과도하다는 것이다. 인간의 소비 속도가 너무 높기 때문에 육상식물과 해양식물 플랑크톤의 광합성이 처리하지 못한 이산화탄소가 대기 중에 남아 있게 된다. 그러므로 신기술을 통해 이산화탄소를 적게 배출시키면서 현재의 인간 활동을 유지하는 것도 하나의 방법이다. 지금까지 이러한 대응 방식을 행해왔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지만 이 방식에는 한계가 존재한다.

그러므로 인간의 소비를 줄이는 다른 방식, 즉 인간의 활동 자체를 조절하는 방안이 필요하다. 이런 경우에 문제는 인간 소비활동의 근간을 이루는 욕구를 어떻게 조절할 것인가가 된다. 그러나 지금까지는 이러한 욕구의 문제를 회피해 온 것처럼 보인다. 현재, 인간에게 부(富)란 물질적 부이고 그것을 가늠하는 지표는 경제이다. 그러므로 언제나 경제적 발전을 목적으로 삼아 왔던 인간은 경제활동을 보장하기 위하여 욕구의 문제를 회피해 왔던 것이다. 경제적 발전은 언제나 욕구를 자극시키고 소비를 증가시킴으로써 유지된다. 한편 배출되는 이산화탄소를 줄이는 기술적 발전을 위한 노력이 진행되어 왔지만, 자원의 고갈과 환경문제로 인해 실패하고 말았다.

불교는 욕구의 존재 방식이 인간이 직면한 중대한 문제들 중 하나라고 주장해 왔다. 자원 고갈을 포함하여 환경문제의 해결에 대해서 고려할 때 인간 욕구의 존재 방식에 대해서 두 가지로 고찰하는 것이 필요하다. 하나는 물질에 대한 욕구를 조절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욕구의 방향을 바꾸는 것이다.

인간의 욕구에는 생리적, 물질적, 정신적인 것이 있다. 수면욕, 식욕, 성욕과 같은 생리적 욕구가 중추 신경계와 나이 등에 의해서 조절되는 반면에 특히 물질적 욕구는 무한히 확장된다. 불교는 욕구가 생겨나는 원인을 탐구해 왔으며 욕구를 적절하게 조절하는 방법에 대해 고찰해 왔다. 고대 인도의 불교 승려인 바수반두(Vasubandhu, 世親)는 욕구가 근본 자아와 같은 말나식에서의 자아[我]에 대한 애착에 의해 생겨난다고 설한다.

무의식 내에서의 자아에 대한 집착[我執]은 인간 행동에 영향을 미친다. 즉, 결과적으로 자아는 자신이 좋아하는 것들을 갈망하고 그것들에 집착한다. 달리 말하면 좋아하는 것들에 대한 이 집착은 말나식의 표면에서 앞의 5식에 의해 인식되는 색(色), 성(聲), 향(香), 미(味), 촉(觸)과 관련된 물질에 대한 애착이다. 이 집착은 행복과 연결되어 있다고 여겨지는 고정된 생각과 그릇된 견해에 대한 애착이 되고 만다. 그러나 이 애착은 전혀 행복과 연결되어 있지 않다. 따라서 자신이 좋아하는 것들에 대한 애착이 강해진다고 더욱 많은 만족을 얻을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그리고 이것은 절대로 끝나지 않는 물질에 대한 욕구가 된다.

대승불교에서는 자아에 대한 집착을 소멸시키는 방법으로서 개인적인 소아(小我)를 우주 전체로서의 대아(大我, 제9 청정식: 根本淨識)와 통합하고, 물질에 대한 집착을 단절시키는 방법으로서 감각기관에서 획득된 능력을 정화하도록 설한다. 이것은 《불유교경(佛遺敎經)》에 설해져 있듯이 실제적으로는 가령 어느 사람이 가난할지라도 충만을 안다면 행복할 것이고, 비록 부자라고 하더라도 만족을 모르는 사람은 불행할 것이라는 가치관을 갖고 사는 것이다. 인류, 특히 선진국 사람들이 이러한 가치관을 공유하여 그것을 구체화시키는 것이 매우 필요하다. ‘충만을 아는 것’을 실천하는 것은 물질에 대한 욕구를 조절하는 윤리적 기반이 된다.

물질적 소비를 감소시키는 또 다른 방법은 욕구의 방향을 바꾸는 것이다. 즉, 욕구를 물질적 풍요를 요구하는 방향이 아니라 정신적 풍요를 요구하는 방향으로 향하게 하는 것이다. 물질에 대한 끝없는 욕구는 직접적으로 자원 고갈과 즉각적인 환경오염에 맞닿아 있다. 그러나 정신적 풍요를 요구하는 것은, 비록 그것이 무한정 계속될지라도 자원 낭비와 환경파괴를 조장하지 않는다. 이러한 의미에서 욕구가 만족되는 벡터의 방향이 물질적인 방향이 아니라 정신적인 방향으로 향해야만 한다. 불교에서 수행의 목적은 깨달음이다. 이것은 인간의 삶의 방식이 완성되는 것을 의미한다. 영적인 의미에서 인간의 완성이고 자비를 유지하는 행위의 완성이다. 그러므로 욕구를 조절하고 욕구를 정신적 풍요의 방향으로 향하게 하는 것은 환경문제를 해결하는 데에 중대한 의미를 갖는다.

4. 문제 해결을 위한 실천과 활동

마지막으로, 불교가 환경문제와 관련되었을 때의 이상적인 행동지침과 윤리적 기준에 대해서 설명해 보고자 한다. 슈뢰더 프레셰트(K.S. Schroeder-Frechette)(1981)는 인간이 비록 과학과 기술 분야에서 많은 분석적 능력을 갖고 있음에도, 의사결정과 윤리적 사고에 있어서는 비참할 정도로 무능력하다고 언급한다. 달리 말해서 지구상의 많은 사람이 환경문제를 해결해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의 행동은 선천적으로 이상적이지 않다. 우리는 환경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실천이 계속될 수 있는지 스스로 자문해야 한다. 계속하기 위해서는 동기가 필요하다. 만약 이러한 의의에 호소하는 것만으로도 계속될 수 있다면 아무런 문제가 없다. 그러나 문제 해결의 목적은 단지 자신만을 위한 것뿐만 아니라 또한 인류 전체를 위한 것이기도 하다. 하지만 실제로는 그렇게 쉽지 않다.

인류는 이상적 행동을 할 수 있는 능력과 방법을 갖추고 있는가? 우리는 몇 가지 계획이 필요할 것으로 생각한다. 인류사회는 대체로 좋은 의도를 수행하기 위해서는 적절한 이유(이익이나 인센티브)가 필요하다. 그러므로 환경문제에 관한 좋은 의도에 적합한 몇 가지 긍정적인 인센티브나 이익을 제공할 수 있도록 시스템을 설계하는 것이 중요하다. 이것은 효과적으로 유익한 시스템이 사회에 계획되어야만 가능하다. 에너지 절약 제품을 사는 것과 같이 환경을 보존하고 보호하는 데 기여했을 때 주어지는 세금 감면 인센티브나 보조금 할당이 좋은 예이다. 요컨대 환경문제 해결에 도움을 주는 사람들을 위한 눈에 보이는 구체적 결과를 갖춘 시스템 마련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이것은 정책적 고려가 필요한 주제이다.

불교적 관점에서 보면, 환경문제의 해결과 그에 대한 공헌은 그 자체로 불교 수행의 일부분이다. 달리 말해서 환경문제를 해결하는 것은 불교철학의 자연스러운 한 측면이다. 중요한 일례로서 육바라밀을 통한 보살도의 수행을 들 수 있다. 육바라밀은 보시바라밀, 지계바라밀, 인욕바라밀, 정진바라밀, 선정바라밀, 지혜바라밀로 구성된다. 보시바라밀은 재화를 주고 법을 설하거나 또는 두려움을 제거하는 것을 의미하는데, 즉 사람과 자연에게 후회 없이 좋은 일을 하는 것이다. 지계바라밀은 생명체를 상하게 하거나 죽이지 않고 도둑질하지 않는 등의 계율을 지키는 것을 의미한다. 인욕바라밀은 슬픔과 고통을 견디는 것이다. 정진바라밀은 자신의 최선을 다하고 언제나 더욱 잘하기 위해 노력하는 것을 의미한다. 선정바라밀은 모든 경우에 있어서 동요하지 않고 확고부동한 상태를 유지하는 것을 의미한다. 지혜바라밀은 ‘연기’와 ‘중도’의 개념으로부터 참된 지혜의 인식을 획득하는 것을 의미한다.

환경문제 해결을 위해 실천의 관점에서 육바라밀을 구체적으로 생각해 보자. 보시바라밀은 환경운동에 기부하고, 개발도상국의 교육 개선을 위해 학교를 세우며, 환경문제의 행방과 그 해결 방법을 가르친다. 또 오염 감소를 위한 기술적 협력과 개선에 기여하며, 문제에 대해 무익한 공포를 주지 않으면서 정확한 지식과 안전에 대한 이해를 주고, 게다가 야생생물에게 적절한 삶의 터전을 제공하는 것이다. 불교에서 지계바라밀은 ‘죽이지 않는 계[不殺生戒]’와 ‘도둑질하지 않는 계[不偸盜戒]’ 등의 계율을 지키는 것을 의미한다. 앞서 고찰하였듯이, 의도적으로 생명체를 죽이는 것은 ‘불살생계’를 범하는 것이고 자연의 개발과 파괴를 통해서 야생 식물군과 동물군의 터전을 무너뜨리는 것은 ‘불투도계’를 어기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러한 행위들을 억제하는 것이 필요하다. 인욕바라밀, 정진바라밀, 선정바라밀은 문제 해결을 위한 행동으로 인해 생겨난 많은 어려움을 혼란 없이 참고 극복하는 것을 의미한다. 반야바라밀은 ‘연기’와 ‘중도’의 개념으로부터 지혜를 배우고 자연과 환경의 정확한 관점에서 참된 인식을 얻거나 문제 해결을 위한 방법을 고안하고 실천하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환경문제 해결을 위한 행동과 인내는 보살도와 매우 잘 일치한다. 불교 수행의 직관적인 부분으로서 육바라밀의 참된 의미를 수립하는 것은 더욱 중요하다. 그런데 이는 환경을 보호하고 보전하는 것과 분리된 것이 아니다. 달리 말하자면 육바라밀을 실천하는 보살은 환경을 보호하고 환경문제를 줄이는 데에 상응하여 행동하는 사람이다. 이러한 행동 지침과 윤리 기준이 불교 수행에서 유지된다면 불교도들은 더욱 긍정적으로 환경문제 해결에 기여할 수 있을 것이다.■

 

야마모토 슈이치(山本修一, Shuichi Yamamoto)
일본 소카대학(創価大学) 환경공생공학과(環境共生工學科) 교수. 1954년 오카야마(岡山) 현 출생. 일본 요코하마국립대학 공학부를 졸업하고 도쿄도립대학 이학연구과(理學硏究科)에서 화학을 전공, 1979년 석사, 1984년 박사학위를 취득하였다. 유기지구화학과 고환경(古環境)을 전공하면서 불교적 방법론을 통한 환경윤리에 대해서도 꾸준히 연구를 진행하고 있다. 논문으로는 藤獄暢英, 山本修一 〈腐植物質の分析手法と構造特性の解析〉 水環境学会誌, 27, 2004와 Yamamoto S., “Environmental ethics in Mahayana Buddhism: The Significance of Keeping Precepts(sila-paramita) and Wisdom(prajna-paramita),” The Journal of Oriental Studies, 12, 2002 등이 있다.

빅터 구와하라(桑原ビクタ一伸一, Victor S. Kuwahara) 
일본 소카대학(創価大学) 아동교육학과(兒童敎育學科) 준교수. 미국 로스앤젤레스 출생. 2000년 일본 소카대학에서 생물해양학으로 박사학위를 취득하였다. 해양생태계에 대한 연구와 환경과학의 교육에 대해서 연구를 진행하고 있다.

박보람 
2011년 2월 동국대학교 불교학과에서 화엄학을 전공으로 박사학위를 취득하였다. 박사학위 논문 〈華嚴敎의 一切智 硏究〉와, 〈義湘 華嚴의 시간관 연구〉 《九山論集》 9집(2004) 등의 논문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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