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어시그 지음, 장경렬 옮김 《선(禪)과 모터사이클 관리술》

김상환
서울대 철학과 교수
피어시그 지음, 장경렬 옮김 《선(禪)과 모터사이클 관리술》
어원적 의미의 인문(人文)이 인간적 삶의 무늬라면, 그 무늬는 어떤 경계들이 만드는 무늬이다. 선과 악, 정상과 비정상, 이전과 이후 등을 가르는 경계. 또는 예술, 역사, 철학, 종교 등을 나누는 선. 그런 선들이 모여 인문의 세계를 이룬다. 그러므로 사유한다는 것, 인문적으로 사유한다는 것은 경계와 씨름한다는 것과 같다. 어떤 정해진 한계 안에 머물러 있는 사유는 아직 인문적 사유가 아니다. 경계를 설정하거나 다시 설정해야 할 때, 경계를 재배치하거나 넘어서야 할 때 인문적 사유가 시작된다.  

그렇다면 인문적 사유가 부딪히는 최대의 경계는? 이는 각자 서 있는 영역, 시대, 상황마다 달라질 수 있는 문제이다. 예술가, 철학자, 종교인은 저마다 다른 경계를 숭배한다. 한때 기적을 가져온 탈주선이라 할망정 시간이 지나면서 어떤 예속의 선으로 굳어질 수 있다. 분명한 것은 역동적인 변화 속에 놓일수록 역사적 현실은 기존 삶의 무늬를 흩뜨려놓는다는 사실이다. 가령 가속화되고 있는 테크놀로지의 발전은 인간과 기계, 자연과 인공의 경계를 다시 그릴 과제를 제기한다. 자본주의가 심화됨에 따라 국가, 계급, 인종 등을 가르던 경계들이 점점 뒤엉키거나 무력해지고 있다. 세계화 시대란 기존의 현실을 규정하던 수많은 구별의 선들이 자본과 테크놀로지의 보편성 안에서 추상화되는 시대이다.

이때 추상화된다는 것은 소멸한다는 것을 말하지 않는다. 다만 새롭게 그려지기 위해 보류 상태에 놓인다는 것뿐이다. 모든 경계가 사라진 문화, 모든 구별이 제거된 문화란 생각할 수 없다. 문화는 인문의 세계, 무늬의 세계, 어떤 경계들에 의해 조형되는 세계이다. 세계화가 어떤 추상화라면, 그 추상화는 새로운 조형화를 외치는 백색의 아우성을 낳는다. 어떤 엉클어짐, 유례를 찾기 힘든 엉클어짐에서 비롯되는 아우성. 이 소리 없는 아우성은 오늘의 인문학에 대하여 위기이자 또한 기회가 될 수 있다. 어떤 침묵이, 무엇인가 거부할 수 없는 것을 요구하는 침묵이 인문학의 과거와 미래를 가르고 있다.
 
1.
나는 최근 우리말로 번역된 피어시그의 《선(禪)과 모터사이클 관리술: 가치에 대한 탐구》를 이런 문맥에서 언급하고 싶다. 1974년 미국에서 출간된 이래 23개의 언어로 번역되어 최대 600만 권이 팔린 책. 소설이면서 동시에 철학서인 이 책의 경이적인 성공을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출간 이후 30년이 훨씬 지난 이 오래된 책이 아직도 매력을 잃지 않는 이유는? 그것은 무엇보다 어떤 아득한 이념을 일상적인 경험의 사례들 속에서 포착할 수 있게 만드는 놀라운 서사의 전략에 있는지 모른다. 그러나 여기서 평범한 독자가 드디어 손에 쥐고 들여다볼 수 있게 된 그 이념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결국 현대 문화의 기본 문양을 처음부터 다시 그릴 가능성과 관련된 이념일 것이다.

선과 모터사이클은 이 소설에서 서양적 인문의 세계를 구획하는 여러 가지 경계선의 양편을 상징한다. 먼저 모터사이클은 과학적 실증주의, 로고스, 논리, 이성, 이론, 진리 등을 가리킨다. 반면 선은 종교적 신비주의, 뮈토스, 직관, 감성, 미학, 선(善) 등을 지시한다. 하지만 선과 모터사이클은 궁극적으로 동양적 사유와 서양적 사유를 각각 대표한다. 동양철학과 서양철학의 대립. 이것이 이 책에서 극복의 대상으로서 가시화되는 마지막 문제이다. 저자는 동서의 분계선으로 향하기 위해 먼저 서양적 사유를 특징짓는 다양한 이항대립의 짝들을 정거장처럼 머물다 지나간다. 이 희대의 베스트셀러는 미국의 소도시들, 그 사이로 펼쳐진 광활한 자연을 통과하는 어떤 모터사이클 여행담이다. 하지만 이 여행담은 모터사이클이 멈추는 곳마다 어떤 회상과 야외 강연으로 이어지고, 그때마다 자연적 지형 위에 구축된 인문적 지형에 대한 탐사로 뒤바뀐다.

지형의 탐사는 지도를 남기고 거기에는 어떤 등고선과 산맥, 어떤 물줄기와 평야가 나타난다. 피어시그는 서양적 인문의 지형을 구조화하는 두 개의 거대한 산맥을 먼저 표시한다. 그리고 거기에 고전주의와 낭만주의라는 이름을 붙인다. 고전주의는 사물의 배후에 놓인 본질적 형상이나 법칙을 추구하는 태도이다. 반면 낭만주의는 어떤 질적 탁월성이나 미적 조화를 추구한다. 고전주의가 이성적 합리성을 옹호한다면, 낭만주의는 감성적 직관이나 창조적 개방성을 중시한다. 객관적 실재를 숭배하는 것이 고전주의라면, 낭만주의는 인격적 변화나 해탈에 이르고자 한다. 창조, 사랑, 마음의 평화는 낭만주의의 가치 목록이다. 고전주의자가 모터사이클을 설계한다면, 낭만주의자는 선적 명상을 수행 중이다.

현대 학문이 노정하는 위험한 경향으로 C. P. 스노우는 ‘두 문화’의 불화를 지적한 바 있다. 인문학과 자연과학 사이의 괴리가 점차 깊어져 더 이상 건널 수 없는 심연으로 분리된 두 문화. 피어시그는 단지 학문의 차원이 아니라 보다 근본적인 차원에서 대립하는 두 문화, 고전주의와 낭만주의라는 두 문화를 가리킨다. 그리고 고대 그리스에서 20세기 후반의 미국에 이르는 역사를 이 두 가지 거대한 흐름이 상호 갈등해 온 과정으로 풀이한다. 이런 설명은 서양의 문화적 질병에 대한 진단으로 이어진다. 그 질병은 그 두 흐름이 마침내 빠져든 상호 몰이해, 반감, 적대시에 있다. 그런 적대시를 넘어 어떤 화해와 통합으로 가는 제3의 길은 없는가? 피어시그의 작품은 이런 물음에 대한 해답을 찾는 자전적 형식의 철학적 소설이다.

이른바 포스트모더니즘의 세례를 통과한 요즘의 독자들에게 이런 이야기는 어디서 들어본 가락이라는 느낌을 줄 수 있다. 미국에서는 적어도 1970년대 말부터, 우리나라는 1980년대 말부터 광풍처럼 휘몰아쳤던 포스트모더니즘은 단순히 탈근대의 지향에서 시작된 것이 아니다. 그것의 출발점은 오히려 서양적 사유 전체의 역사적 유래와 논리적 구조를 해체, 극복하고자 하는 탈서양의 지향에 있다. 이 사조의 이론적 초석에 해당하는 철학자들, 가령 니체와 하이데거, 또는 푸코, 데리다, 들뢰즈 등과 같은 철학자를 포스트모더니즘이라는 협소한 범주에 가두기 어려운 이유가 여기에 있다. 이들은 기존의 서양적 인문의 지형도 전체를 뒤바꿀 가능성과 씨름한다는 점에서 하나의 동일한 전선을 형성한다. 21세기의 시대정신은 20세기 말에 형성된 이 강렬한 전선에 의해 압축적으로 표현되고 있다.

《선과 모터사이클 관리술》이 베스트셀러가 될 수 있었던 것은 아마 당시 막 태어나던 새로운 시대정신에 부합했기 때문일 것이다. 이 책은 포스트모더니즘을 낳은 사상사적 계보와 무관하게, 이 계보에 속하는 철학자들에 빚지지 않으면서 저자 자신의 고유한 경험과 사색을 통해 도래하고 있는 시대정신을 평이한 언어로 표현하는 데 성공했다. 이때 정신이란 해결되기를 요구하는 문제, 한 시대의 흐름을 규정하는 최대의 문제를 말한다. 내용상 그 문제는 서양적 사유의 정체성과 관련된 마지막 테두리를 다시 그리는 데 있다. 그런데 이 문제와 씨름하는 대부분의 철학은 서양적 사유의 경계를 두 가지 방향에서 추적한다. 탈근대의 방향과 탈서양의 방향이 그것이다.

먼저 탈근대 방향의 경계. 이 책의 용어법을 따르자면 그것은 고전주의와 낭만주의의 대립이 근대문화 속에 만드는 무늬이다. 여기서 문제는 고전주의의 패권적 우위와 낭만주의의 일방적 소외에 따른 불균형에 있다. 탈근대 논쟁은 계몽주의 시대 이래 더욱 심화, 고착되어온 이런 불균형 관계를 비판하고 두 세계관 사이의 관계를 다시 설정해야 할 필요성에서 비롯된다.

다른 한편 탈서양 방향의 경계. 그것은 동양과 서양의 대립이 일으키는 무늬이다. 여기서 문제는 이른바 오리엔탈리즘이란 말로 집약되는 동양에 대한 편견과 그 편견과 맞물려 맺힌 서양적 인문의 이미지에 있다. 서양적 사유는 열등한 형태의 동양적 이미지를 조성하고 그 대척점에서 자신의 이미지를 이상화해 왔다. 탈서양 논쟁은 그렇게 이상화된 이미지가 마치 지평선 너머로 지고 있는 해처럼 일정한 주기의 끝에 도달했다는 의식에서 시작되었다.

탈근대의 방향에서 그려지는 경계. 그것은 서양적 인문의 내면을 조직하면서 그 바깥을 형성한다. 그것은 안에서 시작되어 바깥으로 확장되는 무늬이다. 반면 탈서양의 방향으로 그려지는 경계는 서양적 인문의 바깥을 형성하면서 그 내면을 구조화한다. 그것은 바깥에서 시작하여 안쪽으로 이르는 분절화의 무늬이다. 이 두 가지 무늬, 그 무늬를 조직하는 리듬은 서로 꼬리를 물며 이어진다. 포스트모더니즘은 탈근대의 지향이면서 탈서양의 지향이고, 탈서양의 운동인 동시에 탈근대의 운동이다. 이런 순환은 《선과 모터사이클 관리술》에도 똑같이 일어난다. 여기서 선과 모터사이클의 대립은 고전주의와 낭만주의의 대립을 상징하는가 하면 동시에 동양과 서양의 대립을 상징한다. 마찬가지로 고전주의와 낭만주의의 관계를 수정하는 작업은 동양과 서양의 관계를 다시 설정하는 작업에서 완성된다.
 
2.
포스트모더니즘 이전, 그리고 피어시그의 책 이전에 서양의 합리주의 문화를 부정하는 대대적인 흐름이 있었다. 그것이 1960년대 미국의 물질적 풍요에 냉소를 보내던 비트족과 히피족이다. 하지만 주류 문화에 대한 이들의 거부는 맹목적인 성격이 강했다. 어떤 대책 없는 부정은 기존의 경계를 보류시키기는커녕 오히려 강화하는 효과만을 가져올 뿐이다.

피어시그는 포스트모더니즘 계열의 철학자들과 마찬가지로 이런 일면적 부정의 오류를 명확히 의식하고 있다. 이들은 탈근대를 지향하되 근대성을 무조건 부정하지 않는다. 오히려 근대성의 뿌리로 파고 들어가 탈근대의 가능성을 추구한다. 마찬가지로 그들은 탈서양을 가리키되 서양이 지닌 자기갱생의 힘 안에서 탈서양의 길을 모색한다. 서양의 역사가 잘못 가고 있다면, 이제 문제는 서양의 문화적 잠재력 안에서 자기혁신의 가능성을 찾는 데 있다. 

이런 변증법적 성격은 어떤 위대한 화해에 이르고자 하는 《선과 모터사이클 관리술》에서 훨씬 강하게 드러난다. 이 책은 ‘가치에 대한 탐구’라는 부제가 말하는 것처럼 서양의 이성 중심주의가 망각해 온 가치, 저자가 질(質)이라 부르는 낭만주의적 가치, 그러나 동양의 종교 속에는 아직도 살아 있다고 간주되는 그런 가치에 대한 탐구이다. 이 탐구의 과정은 그 가치가 현실 속에 살아 있던 서양의 과거(호메로스 시대), 그 가치를 옹호하고 전파하던 위대한 선구자(소피스트), 그 가치의 몰락과 배제의 국면 뒤에 숨은 권력관계(소크라테스, 플라톤의 등장) 등에 대한 회상을 담고 있다.

하지만 이 책의 매력은 이런 계보학적 분석을 모터사이클 분해와 함께 끌고 간다는 데 있다. 모터사이클을 분해하면 과학과 기술의 힘이 나온다. 과학과 기술을 분석하면 이성적 사고의 특성과 한계가 나타난다. 모터사이클을 수리하는 정비사에게서는 예술적 경지에 오른 장인 정신을 찾을 수 있다. 그런가 하면 일상의 모터사이클 관리술을 분석하면 마음의 평화에 이르는 길까지 나온다.

마음의 평화에 이르는 길. 저자에 따르면 그것은 낭만주의적 질에 이르는 길 자체와 다르지 않다. 선(禪)에 이르는 길은 기계 안에, 모터사이클 안에 있다. “신성한 부처님은 산 위에서나 연꽃잎 위에서와 마찬가지로 아주 편안하게 디지털 컴퓨터의 회로 안에, 그리고 모터사이클의 변속기 안에 정좌하고 있다.”(47쪽) 마음에 평화를 가져다주는 것. 그것이 부처님이다. 저자가 탐구하는 가치, 그 낭만주의적 질이란 것은 그런 부처님을 만나게 해주는 어떤 것이다. 그러나 질이 선물하는 것은 부처님과의 만남으로 그치지 않는다.

질은 또한 어떤 무한한 예술적 창조성을 촉발하고 시적 탁월성에 가득한 어떤 조화를 허락한다. 이때 탁월성이란 말할 수 없는 것, 예(긍정)와 아니오(부정)로 답할 수 없는 것, 따라서 정의할 수 없는 것, 그러나 숭고한 질서를 약속하는 어떤 것이다. 어떤 불가능자로서의 질. 그런 질은 이 책에서 《도덕경》의 도(道)나 선불교의 무(無)로 암시되는 사태와 동일시된다. 그러므로 모터사이클을 분석하면 서양 정신의 핵심만을 추출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거기서 동양 정신의 정수까지 만날 수 있다.

그렇다면 이 모터사이클 분석에서 이어지는 두 길, 서양 정신의 길과 동양 정신의 길을 가르는 분기점은 어디에? 모터사이클 여행자는 어디서부터 서양적 인문에서 벗어나 동양적 인문 속에 다시 태어날 수 있는가? 그 경계는 정확히 주체(사람)와 객체(모터사이클)를 분리하는 거리가 소멸하는 지점에 있다. 그 변곡점 이전까지의 여정은 고전주의적 사이클 속에 갇혀 있다.

여기서 얻는 것은 과학기술 문명의 이기이고 잃는 것은 마음의 평정이다. 마음의 평정은 그 변곡점을 지나 성립하는 물아일체(物我一體)의 상태에서만 향유될 수 있다. 충만한 고요는 그 임계점에서 시작되는 낭만주의적 사이클의 선물이다. 주체와 객체의 대립이 사라지는 이 사이클에서 나타나는 것은 시적 창조성이며 그것의 상관항인 질적 가치이다. 질적 가치에 의해 추동된다는 점에서 낭만주의적 사이클은 선으로 대표되는 동양적 지혜의 세계로 이어진다.

그러나 우리는 과연 하나의 동일한 모터사이클을 타고 그 두 사이클을 모두 통과할 수 있을까? 과학기술 문명의 이기와 시적 창조성, 나아가 선적인 지혜를 어느 하나 놓치는 일 없이 모두 누리는 그런 모터사이클 관리술, 그런 테크놀로지 관리술, 합리주의를 낭만주의적 질과 동양적 깨달음 속에서 완성할 그런 이성의 관리술은 어떻게 가능한가? 모든 문제의 핵심은 고전주의를 구조화하는 주체와 객체의 대립을 넘어서는 데 있다. 주객일체의 상태로 가는 길. 그것이 낭만주의적 질을 경험할 뿐만 아니라 부처님을 만나는 길, 그리고 동양적 사유와 화해하는 길이다.

그러나 이러한 기적이 저자가 자신 있게 제시하는 개인적 차원의 어떤 태도 변화나 명상의 기술로 일어날 수 있는 것일까? 이는 그야말로 소설이나 영화에서만 가능한 일이 아닐까?

주객의 분리와 대립을 극복하는 과제, 이를 통해 서양적 사유의 근본적 변혁과 새로운 시작의 가능성을 모색하는 과제를 가장 첨예하게 제기했던 것은 독일 낭만주의 시대의 시인 횔덜린이었다. 횔덜린이 어떤 책의 양쪽 날개에 남긴 두 쪽 분량의 〈판단과 존재〉에 따르면, 이성적 판단(Urteilen)은 존재의 근원적 분할(Ur-teilen)을 가져오는 어떤 폭력이다. 하지만 이 존재론적 폭력은 양가적이다.

먼저 판단이 일으키는 분할의 선은 주체와 객체의 대립을 가져온다. 그 주객 대립의 구도는 사물이 현상하는 개방성의 공간이다. 반면 그 공간은 동시에 존재의 원래 상태를 파괴, 왜곡하는 은폐의 공간이다. 따라서 판단이 전개될수록 의식은 시원의 존재로부터 소외된다. 건드리는 사물마다 황금으로 바꾸는 미다스의 손은 축복인가 하면 저주였다. 마찬가지로 합리적 질서를 열어놓는 판단은 과학기술 문명의 이기를 선사하되 필연적으로 어떤 존재론적 파국을 수반한다. 따라서 어떻게 판단이 초래하는 존재론적 재난을 이겨낼 것인가? 어떻게 판단 이전의 존재론적 통일성, 주객 분리 이전의 단순함으로 돌아갈 것인가?

독일 관념론이라 통칭되는 셸링과 헤겔의 철학은 횔덜린이 제기한 이런 물음에 대한 서로 다른 해법에 불과하다. 탈근대의 전환점이라 평가되는 니체의 철학과 하이데거의 존재사유, 그 뒤로 이어지는 데리다, 들뢰즈의 철학도 역시 유사한 위상에 있다. 피어시그의 작품은 낭만주의적 질을 추구하고 이를 통해 서양적 사유의 새로운 시작을 모색한다는 점에서 이런 계열의 철학적 전통과 닿아 있다. 이 작품은 서양적 사유의 자기변형이라는 과제와 씨름해온 눈부신 전통의 유산을 대중이 서 있는 일상의 차원, 모터사이클 관리의 차원으로 옮기고 있다. 이것은 그 어떤 시인이나 철학자도 이루지 못한 위대한 성취이다. 그러나 그 업적은 어떤 상실의 대가일 수 있다. 왜냐하면 거기서 원래의 문제가 거느리던 수많은 역설이나 아포리아들은 자기계발적인 극기 기술의 차원으로 해소되고 있기 때문이다.
 
3.
마지막으로 이 책에 자주 등장하는 “한국의 성벽”(220, 516, 526쪽 등)에 대해 언급하지 않을 수 없다.

저자는 남보다 이른 나이에 대학에 들어가 화학실험실에서 고투하다 우울증에 빠져 정신병원에 끌려갔다. 이후 대학에서 이공계 학생들을 위한 작문 강의와 병행하여 서양철학을 공부했다. 하지만 대학의 보수화된 분위기와 불화를 빚어 인도로 떠나 동양철학을 공부한 후 이 책을 썼다. 이런 복잡한 이력에서 가장 중요한 전환점은 정신병원에서 나와 다시 대학 생활을 시작하기 전에 군대에 입대하여 한국에서 근무하던 시절이다. 이때 그는 어느 바닷가에 있던 성벽을 보면서 그의 인생 전체를 뒤바꿀 영감에 휩싸였다. 바로 거기서 자신이 평생 설명해야 할 그 무엇을 본 것이다.

낭만주의적 질, 도(道), 선(禪), 무(無), 장인에 의해 물질 속에 구현되는 침묵 등과 같이 이 책에 등장하는 수많은 용어들은 그 한국의 성벽이 주던 영감을 번역하는 여러 가지 다른 말들에 불과하다. 저자에게 한국의 성벽은 어떤 위대한 기념비, 서양에서 망각되어 가는, 그러나 동양에서는 여전히 살아 있는 어떤 위대한 가치의 기념비로서 경험되었다.

 이 책의 부제가 ‘가치의 탐구’라면, 그 탐구는 한국의 성벽에 구현된 가치 또는 어떤 가치를 담고 있는 한국의 성벽에 대한 탐구에서 시작되었다. 한국의 전통적 건축물, 그리고 거기서 실현된 한국적 가치에 대해 이보다 더 큰 찬사가 있을 수 있을까? 그러나 이 소설에서 한국적인 것은 동양적인 것 일반 속으로 희석된다. 한국 문화의 독특한 성격은 여기서 중국 문화와 인도 문화의 차이 또는 불가와 도가의 차이와 마찬가지로 특별한 주목의 대상이 되지 못하고 있다.

서양적 사유의 자기갱생이나 자기극복의 가능성을 묻는 위치에서는 이런 추상성은 대수롭지 않을 수 있다. 이런 관점에서는 동양적 사유가 그 자체로 탐구해야 할 대상이 아니기 때문이다. 여기서 동양적 사유는 서양적 사유의 타자이되 이 타자는 어떤 거울의 역할에 머물러 있다. 어떤 거울인가? 그것은 서양적 사유가 어쩌다 잃어버린, 그러나 새로운 차원으로 진화하기 위해서 되찾아야 할 어떤 분신을 비추는 거울이다. 하지만 이 소설에서 한국의 성벽이 동양적 인문의 세계 전체로 들어가는 입구로서 등장할 때, 우리는 이렇게 물을 수 있다.

서양적 사유의 문법과 구별될 뿐만 아니라 동양 문화의 패권을 다투던 사유, 가령 중국적 사유의 문법과 구별되는 그런 한국적 사유의 문법은 찾을 수 없는가? 왜냐하면 그 성벽은 분명 서양적이 아닌 것처럼 중국적인 것이 아닐 것이기 때문이다. 그 성벽은 동서 주류 문화의 주변부에서 어렵게 연명해 온 가치, 그 주변부의 열악한 환경에 편안하게 거주하는 사유, 그러나 동서 중심부의 문법으로는 옮기기 어려운 어떤 특이한 논리의 기념비가 될 수는 없을까?(은둔의 철학자 박동환의 3표론이 지닌 의미는 이런 물음의 가능성을 천착하는 데 있다.)

1950년대의 한국을 경험했던 저자에게 이런 물음의 생략을 결코 질책할 수는 없다. 당시에는 한국이 서구인의 눈에 있으나 마나 한 나라에 가까웠다. 한국만이 아니라 일본을 제외한 아시아 대부분의 나라가 거의 명목상으로만 존재했다. 서양철학에 대해 동양의 문화적 구별이 추상적으로 존재하던 그때에 비하면 지금은 상전벽해(桑田碧海)의 세상이 되었다. 중국을 비롯한 동아시아의 국가들이 서양의 역사와 고립되었던 시절은 지나갔다. 동아시아 인문의 변화는 세계의 인문적 지형에, 또 세계 인문의 변화는 이 지역의 인문적 지형에 직접 영향을 미치는 시대, 세계화의 시대, 게다가 동아시아 중심의 세계질서 재편이 예견되기까지 하는 시대가 되었다.

이 시대에 이르러 기존의 모든 탈근대 및 탈서양의 담론은 수정되어야 할 것이다. 왜냐하면 정치경제학적 차원에서 동양이 서양에 종속되어 있거나 분리되어 있다는 암묵적 전제, 따라서 동양적 인문에 의해 서양적 인문이 결정적으로 변할 가능성이 완전히 배제된 상황에서 출발하기 때문이다. 기존의 탈근대 및 탈서양의 담론에서 동쪽은 어떤 유례없는 패러다임 전환이 일어날 미래의 땅이지만, 그 대륙의 주인공은 여전히 서양적 로고스나 뮈토스의 후예로 설정된다.

그러나 역사의 수레바퀴는 점점 더 이와는 다른 종류의 설정이 필요한 지점으로 굴러가고 있다. 철학의 동쪽이 이제 더 이상 과거처럼 어떤 주인 없는 땅처럼 표상될 수 없는 이 지점에서 인문적 사유에게 요구되는 궁극적 과제는 무엇인가? 그것은 아마 동양적 사유와 서양적 사유가 동등한 자격에서 서로 문제를 제기할 가능성, 그런 가능성 안에서 상호 교차, 변형, 순화될 가능성, 그리고 마침내 자본과 테크놀로지에 버금가는 보편적 인문의 무늬를 직조할 가능성에 있을 것이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선과 모터사이클 관리술》은 기존의 탈근대 및 탈서양의 담론과 마찬가지로 과거에 속하는 책인지 모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책에서 연출된 영화적 가능성, 다시 말해서 하나의 모터사이클로 동양적 인문의 사이클과 서양적 인문의 사이클을 단숨에 질주할 가능성은 여전히 미래 인문학의 이상으로 남을 것이다. 특히 동서고금의 사상이 끊임없이 교차하는 한반도의 독자에게 저자가 각별한 의미를 부여했던 한국의 성벽은 그런 아득한 이상으로 향한 다짐의 장소가 될 수 있을 것이다. ■

 

김상환 / 서울대 철학과 교수. 연세대 철학과 졸업. 프랑스 파리 소르본 대학 철학박사(1991). 저서로 《해체론 시대의 철학》 《예술가를 위한 형이상학》 《니체, 프로이트, 맑스 이후》 등과 역서로 들뢰즈의 《차이와 반복》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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