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머리말

최근 인도 뭄바이에서 있었던 ‘Buddhist Meditation: Texts, Tradition and Practice’를 주제로 한 학회에서 영국 런던대학 SOAS(School of Oriental and Asain Studies)의 구스타프 하우트만(Gustaaf Houtman)은 위빠사나(vipassanā)와 사마타(samatha)를 주어진 문헌들만을 통해서 연구하는 것과 직접 현장에서 문화적 종교적 체험을 통해 경험하는 것 사이의 엄청난 차이가 있다는 점을 일종의 ‘문화적 충격(cultural shock)’이라고 강조하면서 큰 반향을 일으켰다.  
최근 국내에서는 간화선으로 대표되는 한국불교의 수행법이 남방불교의 위빠사나 수행법의 강력한 도전에 직면해 있다. 미얀마에서 남방불교 위빠사나 수행을 체험한 학자들과 승려들을 중심으로, 남방불교의 위빠사나 수행법이야말로 테라와다(Theravāda) 교단의 대표적인 수행법이며 초기불교의 또는 역사적으로 실재했던 붓다의 근본적인 수행법이라고 주저 없이 말하고 있다.
하지만 이러한 이야기들에는 많은 문제점들이 내포되어 있다. 많은 부분에서 이들은 초기불교, 테라와다 교단 그리고 남방불교를 혼동해서 사용하고 있기 때문이다. 테라와다 교단의 몇몇 주장들이 아무런 비판 없이 초기불교의 근본교리로 받아들여지는가 하면, 스리랑카 미얀마 태국 등 남방불교 국가에서 새롭게 발전된 수행전통이 테라와다 교단의 또는 초기불교의 근본 수행법으로 받아들여지기도 한다.


2. 위빠사나와 미얀마

사실 미얀마에서 일반 신도들에게 미얀마어로 위빠사나 수행을 설명하기 시작한 것은 18세기 이후로서, 특히 3차에 걸친 영국과의 전쟁에서 패배하여 미얀마가 영국의 식민지로 편입되던 무렵이었다. 1853년부터 1878년까지 미얀마의 왕으로 있었던 민돈(Mindon) 왕이 왕실에 공식적으로 위빠사나 수행을 도입했다. 하지만 민돈 왕의 주도하에 1850년대에 있었던 위빠사나 수행 운동은 일종의 미얀마 귀족들과 일부 승려들 중심의 수행 운동으로서 일반 신도들에게까지 미치지는 못했다.
일반인들에게 위빠사나 수행을 전하기 시작한 것은 1911년 민군사야도(Min-gun-Hsa-ya-daw)가 최초로 미요흘라(Myo Hla)에 위빳타나(wi-pat-tha-na) 수행센터를 설립하면서 부터이다. 사실상 불교의 위빠사나 수행을 통해 민족적인 자긍심을 회복하려는 의도가 식민지 미얀마에서 명상수행이 대중화되는 계기를 만든 것이었다.
그리고 위빠사나 수행이 불교라는 테두리를 넘어서서 국가적인 후원을 받으면서 발전하기 시작한 것은 미얀마에 군사정권이 들어선 이후였다. 우누(U Nu)를 중심으로 한 미얀마 군부는 마하시 사야도를 중심으로 몇몇 승려들을 성인화하고 그들의 위빠사나 수행을 국가적인 차원에서 장려하면서 자신들은 그들의 그림자 뒤에 숨어 버렸다. 이 당시 재무장관을 지냈던 우바킨(U Ba Khin)을 비롯한 몇몇 정부의 관료들이 사실상 위빠사나 수행의 대가들이였으며 국제적으로 위빠사나 수행을 전하기 위해 노력했다. 이들은 국내 정치에서 군부의 입김이 강해지자 미얀마의 국민들에게 위빠사나 수행을 권유하여 나와 주변과 세계가 무상하며 공하고 자아가 아니란 것(無我)을 끊임없이 알아차릴 것을 강조했다. 그렇게 해서 국민이 세속적 정치적 문제에 무관심해지도록 유도하였고 심지어는 교도소에서까지도 위빠사나 수행을 적극적으로 권장하고 있다.
반면 사마타(samatha) 수행은 군부정권하에서 일반 대중에게 권장되지 않았다. 남방불교에서 사마타 수행은 기본적으로 마음을 정화하는 것으로서 일반적으로 신비력과 연결되며 자비심의 토대로서 이야기되고 있다. 1930년대 반식민지 혁명운동의 지도자였던 사야산(Saya San)이 대표적인 사마타 명상 수행자였다. 그는 팔정도의 바른 명상의 힘으로 영국을 물리치고 미얀마의 독립을 이루겠다고 했다. 따라서 사마타 수행을 통해서 마음을 정화하려는 노력이 국가를 정화하려는 차원으로 확대되고 사마타 수행을 통해서 생겨난 신비력과 고통받고 있는 사람들에 대한 자비심을 바탕으로 미얀마 군부를 축출하려는 움직임이 생겨나는 것을 이들은 철저하게 경계하고 있기 때문이다.


3. 초기불교, 테라와다 그리고 남방불교

최근 한국에서 생겨나는 초기불교, 테라와다 교단, 그리고 남방불교 개념에 대한 많은 혼란의 배후에는 이러한 사회적 문화적 배경에 대한 이해의 결여가 중요한 요소로 자리 잡고 있다. 몇몇 경전과 논서류만을 바탕으로 위빠사나와 사마타를 비교하거나, 미얀마에서의 명상 체험을 통해서 위빠사나만을 중심으로 초기불교의 명상을 논의하는 것에는 분명한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2008년 미국 애틀란타 에모리 대학에서 있었던 제15회 IABS(Inter-national Association of Buddhist Studies) 학회에서 남방불교의 대표적인 학자인 피터 스킬링(Peter Skilling)의 주도로 ‘How Theravāda is Theravāda?’란 패널이 결성되었다. 이 패널에서는 테라와다 교단을 어떻게 볼 것인가에 대한 격렬한 토론이 벌어졌다. 빨리경전협회(Pali Text Society) 회장인 루퍼드 괴틴(Rupert Gethin)과 부파불교 전문가인 막스 디그(Max Deeg) 등이 발표자로 참여하고, 오스카 본 히누버(Oskar von Hinüber) 등의 대표적인 초기불교 학자들이 토론에 참여했다. 하지만 누구도 테라와다 교단에 대한 명확한 정의를 내릴 수 없었다.
초기불교와 테라와다 교단과의 관계는 고사하고, 근본분열을 통해서 상좌부(Sthaviras)와 대중부(Mahāsaṅghikas)가 형성되었을 때 이 상좌부와 테라와다(Theravāda) 교단이 어떻게 관련될 것인가조차도 명확한 결론을 내릴 수 없었다. 국내에서는 범어 Sthaviravāda에 해당되는 빨리어 Theravāda란 용어를 어떻게 번역할 것인가 조차도 확정짓지 못하고 있다. 상좌부, 남전상좌부, 테라바다, 테라와-다, 테라와다 등으로 각각의 기호에 따라서 번역되고 있을 뿐이다.
사실상 이 문제에 있어서 남방불교 국가들이 가지고 있는 각각의 견해를 살펴보는 것은 흥미롭다. 물론 여기에는 학문적이고 문헌학적인 요소 보다는 국가적 민족적 자긍심과 같은 문화적 요소들이 더욱 깊이 개입되어 있다.
미얀마의 경우 테라와다 교단은 의심의 여지 없이 근본분열을 통해서 형성된 상좌부(Sthaviras)와 동일한 교단이다. 그리고 미얀마의 명상수행 전통은 마우리야 왕조의 아소카 왕 시대에 불교가 스리랑카로 전해질 때와 거의 동일한 시기에 미얀마에 전파되었다고 믿고 있다.
스리랑카의 경우 문헌 전통의 전승이 주를 이루었다면, 미얀마의 경우 명상수행 전통의 전승이 주를 이루었다는 주장이다. 따라서 테라와다는 스리랑카 불교만의 전유물이 아니라 미얀마불교와도 깊은 관련성을 가지는 것으로 받아들여진다. 
반면 스리랑카는 테라와다 교단의 형성을 위대한 학승 붓다고사(Buddhaghosa)와 관련해서 보고 있다. 붓다고사에 의해서 기원후 5세기 경에 스리랑카 불교가 정비되면서 오늘날 소위 테라와다 교단이라고 일반적으로 받아들여지는 불교 교단의 형태가 만들어지게 되었다는 것이다. 비록 스리랑카의 경우 10~12세기경 미얀마와 태국 등지로 전파되었던 불교가 식민지 시대를 거치면서 15~17세기경 스리랑카 불교가 철저히 파괴된 후 미얀마와 태국으로부터 역수입되었다는 점은 받아들이고 있다. 하지만 이러한 주장을 통해 스리랑카 불교는 테라와다 교단의 고유한 형태가 붓다고사 시대에 자신들에 의해서 만들어졌음을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한편 태국은 테라와다 교단과 관련된 스리랑카와 미얀마의 치열한 논쟁에서 한발 멀어져 있다. 하지만 몇몇 태국 학자들은 태국불교의 기원을 붓다의 직계제자 시대인 기원전 4~5세기경까지 올리고 있다. 이들은 초기경전에서 붓다의 직계 제자들이 파견된 것으로 나타난 황금의 땅(suvarṇa-bhūmi)을 사실상 태국의 일부로 보고 있다. 비록 많은 인도와 서구의 학자들에 의해서 초기경전에서 지칭한 황금의 땅이 인도 중남부 지역 또는 미얀마의 남부 지역이었을 가능성이 높다는 점은 간과되고 있다.
사실상 지금의 차오프라야 강 유역을 중심으로 하는 태국 중남부 지방의 드와라와띠(Dvārāvatī) 문화의 불교가 어떤 성격을 가졌는지는 쉽게 이야기하기 어렵다. 인도와 스리랑카를 통한 무역 루트를 통해 인도 중남부 또는 스리랑카의 불교가 이 지역에 점차적으로 전래된 것만은 확실한 것 같다. 하지만 말레이시아의 스리비자야(Śrīvijaya) 왕국과 캄보디아의 앙코르 왕국의 불교를 바탕으로 보았을 때 이 지역이 일정 기간 앙코르 왕국의 영향권 아래 있었다는 점을 고려하면 이 불교가 대승불교의 영향을 많이 받았음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는 듯하다.
최초로 지금과 유사한 형태의 남방불교가 꽃피기 시작한 곳은 아마도 미얀마 남부의 퓨(Pyu) 또는 몬(Mon) 지역이었던 것 같다. 미얀마의 경우 북부 파간의 아니룻다(Aniruddha) 왕이 남부 지역을 정복하고 이 지역의 불교를 받아들이면서 본격적으로 스리랑카와의 교류가 이루어지기 시작했다. 태국의 경우 스리랑카와 직접적인 교류를 가지면서 테라와다 불교를 받아들 지역은 수코타이를 중심으로 하는 태국 중북부 지역있고 그 주류도 타이 족이 아니라 근대 민족국가 형성에 실패하고 미얀마 태국 라오스 등지에 흩어져 사는 몬(Mon) 족이었다. 하지만 많은 태국의 불교인들은 스리랑카에서 테라와다 불교가 태국 북부로 전파되기 이전에 이미 붓다와 붓다의 직제자를 중심으로 하는 초기불교가 인도에서 태국으로 직접 전해졌다고 믿고 싶은 것이다. 최근 수와나붐(Suwannaboom)이란 태국어 이름으로 새롭게 개장한 태국 국제공항은 태국불교의 이러한 정서를 반영하고 있다.
여기에서 우리가 주목해야 할 점은 남방의 대표적 불교국가들 사이에서 일종의 불교와 관련된 전통성 논쟁이 벌어지고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이러한 국가적이고 문화적인 부분에 대한 이해가 결여된 상태에서 각각의 주장들을 부분적으로 받아들일 경우 역사적 사실 등이 왜곡될 가능성이 클 수밖에 없다.  


4. 소수민족과 동남아시아불교

사실상 한국불교는 스리랑카, 태국, 미얀마 등을 포함하는 남방불교에 대해서 너무도 모르고 있다. 특히 남아시아에서 각각의 고유성을 지닌 민족들을 중심으로 발전한 다양하고 역동적인 불교전통에 관해서 연구하는 국내 전문가는 거의 전무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우리는 일반적으로 태국불교 미얀마불교 라오스불교 캄보디아불교 등 근대 민족국가 차원에서 동남아시아 불교를 다루고 있다. 하지만 그 내면을 살펴보면 몬(Mon), 란나(LanNa), 샨(Shan), 아라칸(Arakan), 라오(Lao), 타이(Thai), 버마(Burma), 크메르(Khmer) 등 독자성을 갖춘 수많은 민족들이 이 지역에서 다양한 활동을 했음을 알 수 있다. 일반적으로 10~12세기경 스리랑카불교가 미얀마와 태국으로 전해졌다고 우리들이 이야기하고 있지만, 사실 이들 지역에서 그 당시 스리랑카 불교를 받아들인 민족은 타이(Thai)와 버마(Burma) 민족이 아니라 크메르계의 몬(Mon)이었다.
태국 북부 란푼(Lamphun) 지역의 하리푼차이(Hariphunchai) 유적에 남아 있는 7~9세기 불교 전탑의 형태와 모양을 통해 유추하자면 몬(Mon) 족 또한 원래부터 스리랑카불교를 받아들였던 것은 아니었다. 말레이시아와 인도네시아 지역을 중심으로 5~10세기경 번영했던 스리비자야(Sri Vijaya) 왕국과 12~13세기경 번영했던 캄보디아 크메르 왕국의 불교가 밀교 계열의 딴뜨라(tantra) 불교였음을 고려한다면, 현재 태국 남부 지역의 불교는 북인도 팔라 왕국을 중심으로 번영했던 딴뜨라 계열의 대승불교였을 가능성이 크다.
타이(Thai)와 미얀마(Burma) 민족은 그 이후에 몬으로부터 스리랑카 불교를 받아들이게 된다. 몬은 동남아시아의 불교화에 깊은 공헌을 했지만 근대 민족국가 건설에 실패한 채 미얀마와 태국의 여러 지역에 흩어져서 소수민족으로 명맥을 이어오고 있을 뿐이다.몬(Mon)과 같이 태국 미얀마 중국 라오스 캄보디아 등에 흩어져 있는 수많은 소수민족들은 각기 특색 있는 자신들만의 불교를 발전시켰고, 불교 설화(narratives)와 벽화(murals) 및 독특한 축제(festivals) 등을 통해서 자신들의 불교가 지니는 독자성을 확보해 나갔다.
남방불교는 이러한 소수 민족들의 역할을 통해서 역동적이고 다양한 모습을 갖추면서 발전하여 오늘날에 이르게 된 것이다. 사실상 태국 미얀마 등에서는 각각의 민족들이 발전시킨 불교의 고유성을 인정하는 방향으로 나가고 있으며 몬불교, 란나불교, 샨불교 등 각각의 지역에서 활동했던 민족 개념을 통해서 지역의 불교를 이야기하고 있다.


5. 초기불교의 명상

그렇다면 초기불교의 명상을 근대 남아시아와 동남아시아에서 발달한 요소들을 모두 제거하고 살펴보면 어떻게 될까? 남방불교의 위빠사나 수행을 중시하는 사람들은 지혜(paññā)의 중요성을 강조해서 말하고 있다. 하지만 초기경전은 무실라(Musīla)와 나라다(Nārada)의 이야기를 통해 지혜만으로 깨달음이 가능하다는 점에 강한 의문을 표시하고 있다.
힌두 전통의 《바가바드기따(Bhagavadgītā)》에 나타나는 상키야(Sāṃ-khya)와 요가(Yoga)를 연상시키는 것으로도 언급된 이 이야기에서, 무실라와 나라다는 동일하게 해탈에 이르는 지혜를 가지고 있는 것으로 나타난다. 하지만 전자는 자신이 아라한임을 침묵으로 받아들이는 반면, 후자는 자신이 아라한임을 받아들이지 않는다. 나라다는 마치 사막에서 물이 있는 깊은 샘물을 발견했지만 그 물에 도달할 방법이 없는 사람을 예로 들면서, 자신은 비록 지혜는 갖추었지만 아직까지 모든 번뇌가 파괴되지 않았음으로 깨달음에 이르지 못했다는 것을 인정하고 있다. 즉 모든 번뇌가 파괴되었다는 깨달음에 도달하려면 지적인 노력만으로는 부족하다는 것을 인정하고 있는 셈이다.
초기경전은 붓다가 자신의 극단적인 고행의 체험을 담담하게 회상한 후, 유년 시절 쟁기축제에서 조용히 잠부나무 그늘에 앉아 자연스럽게 기쁨과 즐거움이 동반하는 초선에 들어갔던 경험을 회상하는 이야기를 전하고 있다. 붓다는 이 명상의 기억을 바탕으로 색계 사선이란 형태로 정형화된 명상의 단계들을 차례로 거치면서 해탈적 통찰에 이를 수 있는 굳건한 토대를 이룰 수 있었던 것으로 보고 있다.
많은 서구의 학자들은 초기불교의 가장 일반적이고 특징적인 수행의 방법으로 색계 사선을 지적하고 있다. 색계 사선은 기쁨(pīti)과 즐거움(sukha) 그리고 평정(upekṣaka)과 같은 느낌이 함께하는 명상으로서, 고행을 통해 이전의 행위를 소멸시킨다고 하는 초기 자이나의 괴로움을 동반하는 수행과 대비된다. 초기불교의 수행자들은 단식을 하거나 마음을 억제하거나 호흡을 중단하려는 대신, 모든 감각적인 경험들 앞에서 평정을 유지하려 했다. 초선에서 사선에 도달하는 과정은 다음과 같이 요약될 수 있다.

수행자는 감각적 대상에 무관심하게 되고 다섯 장애를 떨쳐 버리면서 심사(vitarka)와 숙고(vicāra)를 동반한 기쁨(pīti)과 즐거움(sukha)의 상태인 초선에 도달하고 그곳에 머문다. 심사와 숙고가 사라지면서 내적 고요와 마음의 집중이 일어나고 기쁨(pīti)과 즐거움(sukha)의 상태인 이선에 도달하고 그곳에 머문다. 기쁨(pīti)이 사라지면서 평정하며(upekkhaka) 주의집중하고(sata) 두루 지각하고(sampajāna) 신체를 통해 즐거움을 경험하는 삼선에 도달하고 그곳에 머문다. 이미 기쁨과 고통이 없는 상태에서 즐거움과 괴로움이 사라지면서 완전한 평정과 주의집중의 상태인 사선에 도달하게 된다.        

초기경전은 붓다가 깨달음을 얻을 때 저녁 무렵에 전생에 대한 인식(宿命通)을 얻고, 한밤중에 행위(karman, 業)에 의해 앞으로 일어날 일에 대한 인식(天眼通)을 얻고, 새벽에 모든 번뇌가 제거되었다는 인식(漏盡通)을 얻었다고 이야기하고 있다. 물론 이러한 인식이 전혀 불가능하다고 말할 수는 없지만, 이러한 부분들은 교주로서 붓다의 깨달음의 체험을 극대화하고 일반인들과는 다른 붓다의 초인적인 능력을 보여주려는 차원에서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색계 사선은 사성제의 가르침과 어떤 관련이 있는가? 초기경전에서 사성제는 단순히 고집멸도로 나열해서 아는 것이 아니라 삼전십이행상(三轉十二行相)으로 알려진 세 가지 단계(parivarta)의 열두 가지 측면(ākāra)을 통해 인식하고 실천하여 아는 것으로 설명된다. 사성제를 단순히 아는 것만으로는 모든 염오된 것(漏)으로부터 벗어나 윤회와 괴로움에서 자유로워질 수 없다.
이때 괴로움의 소멸로 이끄는 길인 팔정도가 바른 명상(sammā-samādhi)이란 이름으로 색계 사선을 이미 포함하고 있다. 즉 깨달음은 사성제와 색계 사선을 정점으로 팔정도를 실천함을 통해서 가능한 것이 된다. 따라서 사성제를 단순히 인식하는 것만으로 깨달음으로 가는 길은 열리지 않는다. 사성제를 통해 깨달음에 이르기 위해서는 첫 번째 진리를 잘 알고, 두 번째 진리인 욕망을 파괴하며, 세 번째 진리를 실현하고, 네 번째 진리를 실천해야만 한다. 마치 한쪽 발을 계단에 올리고 다른 발을 힘껏 내디디면서 계단을 올라가듯이, 우리의 마음이 완전히 평정하고 주의집중하게 되어 올바른 지혜가 생겨날 수 있는 토대가 색계 사선을 통해서 만들어 진다면 사성제를 위와 같이 알고 실천하는 것을 통해서 모든 염오된 것(漏)으로부터 벗어나 깨달음을 얻게 된다고 설명하는 것이다.


6. 맺음말

사실상 색계 사선의 과정들을 찬찬히 살펴보면 심사(vitarka), 숙고(vicāra), 기쁨(pīti), 즐거움(sukha) 등 다양한 마음의 작용을 단계적으로 정지시켜 가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비록 색계 사선의 마지막 단계에서 완전한 평정(upekkhaka)과 주의집중(sata)이 나타난다고 하지만, 전체적인 맥락은 거대한 마음의 작용으로부터 시작하여 점차적으로 미세한 마음의 작용들까지를 단계적으로 정지시켜 가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또한 색계 사선은 위빠사나와 같이 인간존재를 구성하고 있는 오온을 개별적으로 직관하면서 각각이 무상하고 괴로우며 자아가 아니란 점을 알아차리고 있는 것도 아니다. 따라서 초기경전 자체만을 놓고 보자면 초기경전에 묘사된 붓다의 명상에는 위빠사나적 요소보다는 사마타적 요소가 더욱 많다고 할 수 있다.
물론 초기경전은 다양한 이야기들을 전하고 있다. 《대념처경》 등을 통해서 위빠사나적 요소들에 대해서 이야기하기도 한다. 사실 깨달음이란 목표를 정하고 종교적인 신앙과 수행으로 접근하는 사람들에게 있어서 초기경전의 깨달음에 이르는 방법이 가지는 다양성은 큰 문제가 되지 않는다. 다만 확실한 것은 위빠사나만이 초기불교의 명상은 아니라는 점이다. 앞에서도 이야기했지만 위빠사나가 남방불교에서 중요시된 것은 어디까지나 근대 이후이며 그나마도 미얀마 군부의 입김이 강하게 작용한 결과라는 점을 간과해서는 안 될 것이다. ■

 

황순일 /  동국대학교 인도철학과 교수. 동국대 인도철학과(학사, 석사), 영국 옥스포드대(박사) 졸업. 충북대학교 인문학연구소 전임연구원 등을 역임했다. 저서로 Metaphor and Literalism in Buddhism(Routledge-Curzon)과 Sermon of One Hundred days(Equinox)가 있고, 주요 논문으로 〈설일체유부(Sarvāstivāda)에서 개념과 명칭〉과 〈비구(比丘)와 필추(苾芻)를 둘러싼 빨리어와 범어의 다양한 뉘앙스〉 등이 있다. 2008년 불교 연구 부문 불이상 수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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