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해 벽두부터 먼 길을 다녀왔다. 부처님 발자취를 찾아 나선 인도 성지순례였다. 살다 보면 줄곧 무언가를 갖겠다고 집착을 부리다가도 버리고 싶을 때가 있다. 오십 줄 문턱에 서고 보니 이렁저렁 모든 것을 떨쳐버리고 싶었다. 그동안 해 놓은 것은 없고, 앞으로 어떻게 살까 하는 고민을 하다 보면 누구나 한 번쯤 갖는 생각이다. 이럴 때 가장 좋은 해결책은 무작정 떠나는 것이다. 몸이 떠나면 마음 찌꺼기도 떨쳐 나갈지 모르기 때문이다.

되돌아 보니 18년 전에도 그랬다. 직장에서 사주와 직원들 간에 기나긴 다툼이 있었다. 시간은 흐르는데 상생보다 불신과 갈등만 커졌다. 풀리지 않는 실타래를 칼로 자르듯이 사표를 던졌다. 그래도 거치적거리는 것이 있어 멀리멀리 떠났다. 그때 찾은 곳이 인간 싯다르타가 깨달음을 이룬 땅, 인도였다.  

20년 가까운 시차를 두고 찾았건만 순례길에서 만난 이들의 삶은 별반 달라지지 않아 보였다. 여전히 인간을 비롯해 소, 말, 개, 염소 등등 모두가 주인 되어 더불어 살아가는 거대한 공동체였다. 이 무대에 오토바이와 트랙터가 새로운 배우로 등장했을 뿐이다.

사실 인도 성지순례는 수천 킬로미터를 달리는 울트라마라톤이다. 부처님이 45년간 걸었던 길을 열흘 만에 주파하다 보니 웬만한 체력과 정신력으로는 버거운 여정이다. 그러기에 성지순례는 부처님을 닮아가고자 하는 또 다른 수행이다.  

수행길에 좋은 도반을 만나는 것은 큰 복이다. 이번 순례에서 가장 인상에 남는 것은 맑은 영혼을 지닌 갈맥 씨를 만난 것이다. 그는 인도인 현지 가이드였다. ‘부산’이라는 그의 이름보다 ‘부산 갈매기’에서 따온 ‘갈매기’란 애칭을 더 친근하게 불렀고, 존칭어 씨를 뒤에 붙이다 보니 갈맥 씨가 되었다.

그의 말 한 마디 한 마디는 그대로가 한 편의 시(詩)였다. 동방의 순례객들은 철학적 상상에 빠지게 하는 그의 멘트에 푹 빠져들고 말았다.

“여러분은 맑은 영혼을 가지고 있습니다.”
“인도에는 신(神)이 3억이 넘습니다. 인구보다 더 많아요.”
“국경선을 빨리 넘으려면 뇌물신을 찾아야 합니다.”
“앞에 걸어가는 저 맑은 영혼의 소가 지나가야 차가 갈 수 있습니다.”
“술을 파는 저 상점의 주인은 영혼이 맑지 않습니다.”

수많은 그의 이야기 가운데 ‘맑은 영혼’은 자주 등장하는 단어의 하나였다.

인도의 수행자들을 소개하는 영상물을 설명하면서도 수행자마다 맑은 영혼을 접두어로 붙였다. 그렇다고 수행자의 영혼이 모두 맑은 것은 아니었다. 그들 중에는 갈맥 씨가 직접 만난 수행자도 있었다. 돈을 밝히거나 명예를 좋아하는 수행자에게는 여지없이 영혼이 맑지 않다고 소개했다.  

갈맥 씨로부터 ‘맑은 영혼’을 반복해 듣다 보니 성지순례가 무르익으면서 화두가 되어 버렸다. 도대체 맑은 영혼은 어떤 것일까? 단지 ‘착한 마음’을 ‘맑은 영혼’으로 이해하기에는 왠지 부족해 보였다.

성지순례가 끝나갈 무렵, 버스에 오르는데 어린아이를 안고 있는 여인과 눈이 마주쳤다. 흔히 불가촉천민으로 불리는 걸인이었다. 그 눈빛은 참으로 간절했다. 도저히 외면할 수 없어 지폐 한 장을 손에 쥐여줬다. 그러자 여기저기 아이를 안고 있는 여인들이 손을 내밀었다. 젖먹이 아이를 가진 걸인이 왜 그리도 많은지…… 모두를 감당할 수 없어 고개를 돌려 애써 외면하고 말았다.

구걸에 관한 한 그들은 프로였다. 꾀죄죄한 외모, 이 세상에서 가장 가엾어 보이는 표정은 누구든 지갑을 열게 하기에 충분했다. 그중에 지나치기 어려운 것은 눈길이다. 눈이 서로 마주치면 어지간히 독한 마음을 내지 않고서는 피해 갈 수 없다. 

곧바로 버스가 출발했다. 마이크를 잡은 갈맥 씨가 낮은 목소리로 읊조렸다.

“세상에는 힌두 거지도 있고 이슬람 거지도 있습니다. 가난한 거지도 있을 뿐 아니라 부자 거지도 있습니다”
‘가난한 이를 거지라고 하는 것 아닌가?’ 
마음속으로 고개를 갸우뚱거리고 있는데 갈맥 씨의 이야기가 계속됐다.

“가끔 인도에는 젖먹이 아이가 사라졌다는 뉴스가 있습니다. 영혼이 맑지 않은 이들이 아이를 훔쳐 부자 거지에게 팝니다. 이렇게 훔친 아이 중에는 더욱 측은하게 보이게 하기 위해 눈에 독약을 넣어 장님이 되게 한 아이도 있습니다. 그런 아이는 더 비싼 값에 팔린답니다. 여러분이 저들에게 돈을 주면 더 많은 아이들이 사라지게 되는 것입니다.”

좋은 마음으로 착한 일을 하려고 했는데 도리어 나쁜 일에 도움을 주었을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부처님 성지마다 유독 젖먹이 아이를 안고 있는 걸인이 많은 이유를 알 것도 같았다. 갑자기 등골이 오싹했다.  
걸인이라고 해서 모두 가난한 것이 아니라 부자도 있다는 것이다. 흔히 사람들은 모르고 행한 잘못은 너그럽게 이해해 주곤 한다. 그러나 불교에서는 모르고 짓는 업의 과보가 알고 짓는 과보보다 더 크다고 한다.
알고 짓는 악업은 자신이 잘못하고 있음을 알기에 악행을 멈출 수 있다. 그렇지만 모르고 짓는 악업은 잘못하고 있는 것을 알지 못하기 때문에 업장을 키우는 것이다. 이렇듯 보시도 잘못하면 남을 도와주는 것이 아니라 도리어 자신도 모르게 죄업을 짓고 만다.

이처럼 지혜가 없는 착한 일은 재앙이 될 수 있다. 옹달샘은 물이 솟을수록 더 맑아지기 마련이다. 갈맥 씨가 그토록 들려주고자 했던 ‘맑은 영혼’은 끊이지 않고 솟아나는 지혜의 샘을 말하는 것은 아니었을까.
부처님 발자취를 따라가면서 마르지 않는 지혜의 샘을 파야겠다고 다짐해 본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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