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악의 폭설이다. 세상은 온통 하얀 적요에 잠겨 있다. 텔레비전에서는 기상이변을 떠들고, 모처럼 방문 예정이던 지인은 오던 길을 되돌아갔다. 대지 모신 가이아의 노함인가. 눈의 반란에 인간들은 속수무책이다. 창밖의 나무들은 참선수행을 하듯 미동도 하지 않고 온 몸으로 눈의 무게를 감당하고 서 있다.

때로 낭만적 대상이기도 했던 눈이나 비는 폭설과 폭우로 바뀌면서 생태환경의 위기와 직결되고 있다. 그렇다면 시인의 예지는 작금의 현상을 어떻게 볼까. ‘생태시 모음집’이라는 부제가 붙은 시집을 펼쳐본다. 오세영 시인의 《푸른 스커트의 지퍼》(연인M&B, 2010)이다. ‘푸른 스커트’를 입은 대지는 모성의 손길로 만물을 생육한다. 그러나 그 스커트의 ‘지퍼’ 안에 감추어진 부드러운 속살은 날로 황폐해져 간다.

“지구는 습진으로 짓물렀다./ 농경이다. 개발이다. 파헤치는 산과 들,/ 가려움 참을 수 없어 지친 몸을 뒤튼다.”(〈지진〉)

그 뒤안길에는 자연에 대한 인간의 횡포와 이성의 발자취가 있다. 우주가 여기 있구나./ 삼라만상(森羅萬象) 두두물물(頭頭物物)/없는 것 없다./ 심지어 하늘 높이 매달린 태양/ 그 휘황한 조명 아래/ 모든 사물들 각자 제자리를 지킨다./ 여기는 들인가,/ 꽃에서 곡식, 채소까지……/ 여기는 산인가,/ 나무에서부터 돌, 쇠붙이까지……/ 여기는 바단가,/ 어류에서부터 조개, 진주까지……/ 일사불란./ 그러나 아무것도 살아 있는 것은 없구나./ 어찌 그렇지 않을 수 있으랴,/ 가격에 따라/A코너, B코너, C코너……/ A좌대, B좌대, C좌대……/ 가로 세로/ 금 안의 공간에 놓인 사물들은/ 단지 하나의 숫자일 뿐./ 산을 보아라,/ 숲과 새와 짐승과 바위가 어디/금을 긋고 살던가./ 지구 최후의 날,/ 이성(理性)만 남고/인간이 죽어버린 이 세계를 나는 오늘 문득/ 여기서 본다.
― 〈슈퍼마켓〉 전문

없는 것이 없는 슈퍼마켓에서 시인은 우주를 본다. “삼라만상 두두물물” 이 세상 만물에는 도가 있고 그 하나하나는 진리를 현현한다. 식물은 식물대로, 어패류는 어패류대로, 각각의 거소에서 나름대로 존재 의미를 지니고 생명을 키운다. 그런데 그 우주적 존재들은 인간의 욕망충족을 위해 붙들려 와, 태양 대신 조명을 받으며 슈퍼마켓에 누워 있다.

 시인은 존재의 본질에 주목하지만 슈퍼마켓에서는 모든 것이 화폐로 환산되고, 사물의 자리마저도 수치화·계량화된다. 슈퍼마켓은 물질만능, 소비지향 사회의 아이콘이다. 물질에 함몰된 사회에서는 인간마저도 소유 여하에 따라 등급이 나뉜다. 결국 존재의 존귀함은 실종되고 물질의 가치만 남는다. 시인이 우려하는 것은 만물을 무생명적으로 구획하는, 이성이라는 이름으로 자행되는 ‘금 긋기’이다. 데카르트의 ‘코기토(Cogito ergo sum)’는 ‘생각하는 주체로서의 나’라는 근대적 자아의 형성에 기여했지만 이성우위의 이원론적 사고는 세계와의 연계성을 차단하고 자연의 도구화에 일조했다. 자연을 ‘조화의 힘으로 이루어진 일체의 모든 것’으로 보면 인간과 자연은 존재의 그물 안에서 동등하다.

그러나 인간이성을 우위에 놓고 자연을 열등한 비이성적 객체로서 타자화할 때 자연은 인간을 위한 도구로 전락하고 만다.

인간과 인간, 인간과 자연을 가르는 ‘금 긋기’는 오만한 인간의 전유물일 뿐이다. 시인의 말대로 “숲과 새와 짐승과 바위”는 금을 긋고 살지 않는다.

또한 “자연은 진실한 개구리와 거짓 개구리를 키우지 않을뿐더러, 도덕적인 나무와 부도덕한 나무, 옳은 바다와 잘못된 바다 같은 것도 만들어내지 않는다. 자연 속에서는 윤리적인 산과 비윤리적인 산 같은 것은 흔적조차 찾아볼 수 없다.”(켄 윌버 《무경계》 무우수, 2005. p.42) 그들은 경계가 없는 우주의 이치를 따를 뿐이다. 
 
나무가 항상 한곳에만 서 있다고 해서/ 갇혀 있다고 생각지 마라./ 움직이는 인간은 담을 쌓지만/ 서 있는 나무는 담을 허문다./날라온 오동(梧桐)씨 하나/ 자라서 제 선 돌담을 부수고/ 담쟁이 칡넝쿨 또한 담을 넘는다./ 인간은 다투어 담을 쌓아/ 그 안을 삶, 밖을 죽음이라 이르건만,/ 그 안을 선, 그 밖을 또/ 악이라 이르건만/ 모두는 원래가 한가지로 흙,/인간의 분별은/ 담과 담 사이에 길을 내서/ 길이 아니면 가지를 마라고 하나/ 나무에게/ 이 세상 모든 곳이 또한 길이다.
―〈담〉 전문

시인이 보는 나무와 인간의 양태는 대립적이다. 나무에게는 앉은 자리가 꽃자리다. 주어진 자리에서 묵묵히 땅 속 어두운 곳에 길을 내고 위로는 가지와 열매를 키움으로써 지평을 넓힌다. 그러나 인간은 늘 분주하게 이동하면서 스스로를 가둔다. 자신들이 정해 놓은 길을 최선이라 여기고, 너와 나, 안팎, 생사, 선악을 가른다. 나무는 담을 허물고 인간은 담을 쌓는다. 무위는 생명을 흐르게 하고 인위는 경계를 짓는다.

시인은 다시 ‘인간의 분별’로부터 비롯되는 ‘담 쌓기’를 성찰한다. 그런데 분별을 우려하면서도 대립구조로 분별을 말해야 한다. 이는 들뢰즈가 ‘유목성’을 이야기하기 위해 ‘정주성’을 말해야 하는 것과 같다. 그만큼 우리는 대립 속에서 많은 것을 이해해 왔다.

너와 나, 주체와 객체를 견고하게 가르는 분별은 차별과 단절과 갈등을 낳는다. 조주 선사는 ‘지극한 도는 어렵지 않다. 다만 분별심이 없어야 한다’고 했거니와 분별심을 놓고 캐묻는 한 중에게 “분별심이 어디 있느냐”(《벽암록》57칙)고 꾸짖지 않았던가. 불교에서는 영생과 죽음, 존재와 부재의 구별은 사물의 본질적 실상이 아니고, 사람의 미혹한 눈으로 본 모양일 뿐이라고 한다. 또한 장자는 “모장(毛嬙)과 여희(麗姬)는 모든 사람들이 미녀라고 하지만, 그들을 보면 물고기는 두려워서 물속으로 숨고, 새는 하늘로 날아오르며, 사슴은 달아난다.”(〈설결·왕예 문답〉 《장자》 내편)고 했다. 선악, 미추, 피차, 진위는 자연의 성질이 아니라 인간의 편견에서 비롯된 것이므로 편협함에서 해방되어 자연과 하나가 될 때 절대자유를 누릴 수 있다고 보는 것이다. 

우리에게 요구되는 것은 ‘모두는 원래가 한가지로 흙’에서 태어났다는 생명공동체적인 의식의 각성과 공생과 조화다. 존재의 실상에 대한 엄숙한 통찰과 애정이 전제되지 않는 이성과 분별은 모두를 피폐하게 만든다. 무위에 따른 무경계 미학이 실천되어야 할 이유다.

이미 지상의 눈들은 오염되었다. 그러나 어두운 밤이 지나면 눈은 소신공양하듯 제 몸을 녹여 나무들의 수액을 채울 것이고, 인간들이 영악하게 금 긋기와 담 쌓기를 하는 동안에도 나무들은 땅 속 깊은 곳에서 새로운 생명의 길을 만들며 봄의 환희를 준비하리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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