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석심 조계종 문화사업단 차장

며칠 전 회의를 마치고 자리로 돌아와 보니, 제 책상위에 이름과 연락처가 쓰여진 메모 1장이 얌전히 자리를 잡고 앉아 있었습니다.

결재를 빨리하고 다른 일을 해야 한다는 급한 마음이 들어서인지 메모지 위의 이름이 너무나 생소하게 다가와, 모르는 사람이라고 판단해 남겨진 전화번호를 결국 돌리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2시간여가 지난 후 제 잔영 속에 남아 있던 그 이름이 불현 듯 선명하게 저에게 다가오기 시작했습니다. 하얀 피부와 맑은 웃음을 지녔고 영화를 함께 보러 가곤 했던 고등학교 2학년 때 친구 강 0 0!

너무도 반가우면서도 미안한 마음에 바로 수화기를 들어 그 친구와 20여년이 지난 얘기 속에서 당시 기억을 조금씩 복구해 보았습니다. 그리고 며칠 후에 그 친구 근무지가 있는 여의도에서 만날 약속까지 하고는 수화기를 내려놓았습니다.

저뿐 아니라 많은 분들이 아름답고 소중한 인연을 맺으며 중중무진(重重無盡)의 연기(緣起) 속에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특히 학교 동창이나 불교 동아리 활동 속에서 만난 선후배, 각종 시민단체 활동 속에서 만난 사람들의 인연은 참으로 소중한 인연인 경우가 많습니다.

하지만 우리의 삶이라는 것이 이처럼 좋은 인연만을 허락하지는 않는 것 같습니다. 얼마전 신문에 난 ‘사내정치는 필요악’이라는 기사에 나타난, 서로의 이익과 필요를 위해 인연을 만들어 가면서 살아가야 하는 직장인들의 모습을 보면 말입니다.

이 기사에 따르면 직장인 2108명을 상대로 사내정치 실태를 조사한 결과 조사대상자의 73.8%가 자신이 다니는 직장에서 대립과 줄서기 등 사내정치가 행해지고 있다고 답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가장 흔한 사내정치의 유형으로는 ‘승진 및 자리 쟁탈전’업무 및 의사결정의 주도권 다툼’ ‘줄서기’같은 편 밀어주기와 상대편 배제’‘목적 달성을 위해 회사 고위층과 직접 접촉’ 등을 들고 있습니다. 또한 사내정치에 대한 인식과 관련해서는 ‘개인적으로 필요 없고 조직에도 도움이 안된다’는 응답이 많아 부정적인 것을 알면서도 살아남기 위해 사내정치를 해야 하는 직장인들의 서글픈 자화상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저는 이 기사를 전철 안에서 읽으면서 제가 신앙생활을 하면서 월급을 받고 살아가고 있는 불교집안에 대해 생각해 보았습니다.

승·속을 불문하고 부처님의 말씀과 사상이 세상에서 가장 수승한 가르침이라는 것을 믿고, 세속의 정신적 모범이 되어 살아가야 하는 우리 불교집안의 모습은 지금 어떠한지?

정치인을 비롯한 많은 대중들에게 상생과 화합의 필요성을 강조하는 만큼, 우리는 상생과 화합을 불교집안 내부에서 그리고 우리의 생활 속에서 실천하고 있는지?

심지어 직장인들과 마찬가지로 불교집안의 구성원들도 살아남기 위해 특정 스님이나 문중, 계파에 기대어 살아가고 있는 것은 아닌지?

수행, 진리, 깨달음, 청정함 등으로 상징되는 불교와 불자들의 모습은 일반 사회에서 존중할만한 모습을 갖고 살아가는 것이 중요합니다.

불교집안에서도 구성원간 갈등과 대립이 있을 수 있으나, 그 회향은 바름(正)에 근거하여 자비롭게 이루어져야 합니다. 갈등과 대립의 실체적 사실과 원인에 접근하기보다 자신과 자신이 속한 모임의 입장에서만 행동한다면, 그것은 곧 ‘인연의 덫’에 빠져 바름을 저버린 결과라 할 것입니다.

우리가 살아가면서 접하게 되는 크고 작은 부정과 비리 또한 쌍방간 금전 거래나 권력 배분 등의 상호 이권 거래 속에서 발생하기도 하지만, 이권 거래가 없이도 각자 맺고 있던 다양한 인연의 덫’에 따라 발생하기도 합니다. 그리고 ‘모임(회)’을 만들어 옳고 그름의 상식적인 가치관을 배제한 채 그 집단과 구성원의 이권을 위해 매진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이처럼 바른 생각과 행동을 하지 못하도록 우리를 얽매는 것이 바로 “인연의 덫”이 아닌가 합니다. 자신의 맺고 있는 인연이 자신을 향상시키지 못하고, 오히려 바른 생각과 행동을 마비시키니 그 인연은 덫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부처님이 말씀하신 정신(正信)과 정견(正見)이 ‘인연의 덫’에 가리워지는 것이 아니라, 정신(正信)과 정견(正見)으로 인연의 덫’을 거두어 내는 것이 그래서 중요한 일이 아닌가 합니다.

조계종 총무원에 들어와 종무원이라는 신분을 가지고 살아온 것 벌써 10년이 넘어 갑니다. 세월이 흐르다 보니 많은 스님과 재가자들과의 인연이 자연스럽게 생겼습니다. 이런 인연이 개인의 향상에 도움이 되기도 하고 업무 처리에 도움도 되었지만, 어떤 경우에는 바른 생각과 행동을 취하지 못하게 하는 원인이 되기도 한다는 것을 느끼기도 합니다.

그물에 걸리지 않는 바람처럼 걸림없이 자유롭게 살아가야 하는 것이 부처님의 가르침이건만, 게으름에 따른 수행의 힘이 부족하여 인연의 덫에 갇혀 사는 저 자신을 보게 됩니다. 대학시절 불교공부도 하고 스님들 법문을 들으면서 출가하고 싶은 강한 원력이 생기던 때의 그 마음이 그리워집니다.

제가 대학교 2학년 여름방학을 마치고 와서 불교학생회에 함께 몸담고 있던 동기들에게, “ 내가 방학 동안에 깨달음을 얻었으니 너희들은 삼배를 하라”는 농반 진반의 우수개 소리를 한 적이 있습니다.

경제라는 것이 호황과 불황의 사이클이 반복되듯이, 인생이라는 것도 어려운 시기와 좋은 시기가 반복되는 것이니, 지금이 좋다고 너무 들뜨지도 말고 또한 지금이 나쁘다고 너무 절망할 필요도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고 하면서 말입니다.

불교와 깨달음에 대해서 아무 것도 모르는 철부지였기에 가능한 행동이었지만, 당시의 기쁨은 이루 말할 수 없었습니다.

이제 40대 중반에 이르러서야 수행의 공덕과 힘을 조금이나마 느끼면서 살아가고 있는 지금, 다시 한번 제 수준에서 실천해야 할 내용을 마음속에 그리며 다짐해 봅니다.

“인연의 덫에 끄달리지 말고 자유롭게 생활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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