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깨달음 지상주의의 현주소

1,600년 역사의 한국불교에서 신라 말 고려 초, 선종의 유입으로 이 땅에서 구산선문이 세워진 지도 1,000여 년이 넘게 지났다. 활발발지(活潑潑地)한 선기(禪機)를 드날리던 중국 당송 시대의 뛰어난 선사들의 목소리는 역사 속으로 사라진 지 오래이나 유일하게 한국 선종이 법맥을 이어 그 진가를 발휘해 왔다. 임제종의 맥을 잇는다는 자부심은 결제 때마다 전국 사찰의 선방을 채우는 수좌들에 의해 한껏 빛을 발했다. 이런 이유로 선방이야말로 사찰 내에서도 최고의 공간이며 선승은 최상의 대우와 최고의 존경을 한 몸에 받고 있다. 대부분 선방 선승들을 간화선 참선 수행을 한다. 왜냐하면 이 수행법이야말로 한국불교가 자랑하는 지상 최고의 이상이자 목표인 ‘깨달음’으로 가는 길이라 확신하기 때문이다.

수행자도 아닌 일개의 범부로 ‘깨달음’을 말하기는 벅차지만 이것이 그간의 화두였던 만큼 문제제기를 할 수밖에 없는 계기가 있다. 우선 1990년대 중반, 송광사로 돌아가 당시 해제를 맞아 앞서거니 뒤서거니 산문을 나서는 대여섯 명의 선방 스님들과 대화할 기회가 있었다. 그때 수행이란 것이 정진하는 만큼의 효력이 없다는 인상을 강하게 받았다. 두 스님은 상기(上氣) 병을 얻어 고생하고 있다고 했고, 출가해 이십 년간 줄곧 선방만 다녔지만 깨달음이 갈수록 막연하고 묘원하다고 말하는 스님, 화두 챙김이 안 돼 아예 다른 길을 모색하려 한다는 스님도 있었다. 스님들 대다수가 수행에 따른 진척이 없어 갑갑하고 답답해하는 모습이었다. 그들 가운데 간화선 참선 수행은 상근기만이 가능하며 오로지 이 수행법만이 깨달음을 보장한다고 말하는 스님도 있었다. 당시 그 스님과의 대화에서 불교에 막 입문해 무식했던 내가 한 질문은 이거였다. “스님, 부처님도 스님처럼 화두 잡다 깨치신 건가요?” 

대체로 간화선 참선 수행은 오로지 상근기만이 할 수 있다는 소리를 여러 번 들었다. 재가불자 가운데도 상근기가 아니면 감히 접근도 못 하는 영역이라 선방 스님들의 독점 전유물이 되어 있음을 보았다. 이것은 수행 자체뿐만 아니라 수행이 추구하는 ‘깨달음’이란 것이 거대하고 거창해 범부는 감히 근접할 수 없는 ‘그 무엇’으로 여기는 듯한 인상도 받았다. 어쩌면 이런 이유로 인해 불자들에게 주어진 수행으로 기도와 염불, 108배가 되지 않았나 싶다. 그러니 불자들이 기복으로 흐르는 것은 당연하지 않은가 하는 생각도 들었다.
이것은 옛이야기라 치지만 지금 이 21세기에도 깨달음은 여전히 한국불교 최고의 상위 자리를 지키며 모든 수행자와 학도(學徒)들의 과제이자 목표가 되어 있다. 법문을 들어도 고승들의 단골 용어가 된 ‘깨달음’은 자주 듣지만 그 어디서도 깨달음이 구체적으로 무엇인가에 대한 명확한 기준도, 정의도 발견할 수 없었다. 그러면서도 무척 신비한 ‘그 무엇’으로 포장되어 있다. 깨달음은 ‘신비’라는 구름 속의 무지개로 포장되어 저 드높은 곳에 모셔진 추상적인 것으로 전락해 있다.

이러한 문제는 모두 한국 선종의 현주소가 ‘깨달음 지상주의’에 젖어 있어 일어나는 현상이라 단언한다. 상구보리(上求菩提)라는 기치하에 깨달음을 추구한다지만 이것 역시 이름만 거창하다. 상구보리하화중생(上求菩提下化衆生)은 동시적이자 수평적인 것임에도 우선 깨달음만을 구하나, 그것이 정확히 무엇인지 모르며 그것을 정답이라 여길 때 참된 불법으로부터 너무 멀리 와 있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 하나의 종교가 2,500년 넘는 세월의 과정에서 교리에 질적인 변화 내지 변질을 겪게 마련이라지만 깨달음에 대한 오해로 인해 열반마저 그 위치가 불명확하게 된 것이 아닌가 한다. 그렇다. 열반은 오래전 이미 깨달음에 자리를 내주고 말았다. 늘 상구보리에만 집중된 구도가 되어 열반은 완전히 밀려나 그것의 역사적 의미도, 핵심 불법으로서의 존재감도 상실되어 있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

2. 수단과 목적의 전도

우리 불교가 불음(佛音)의 핵심을 놓치고 있다고 보는 것은 깨달음으로 인해 수단과 목적이 전도(顚倒)된 채 수행의 핀트가 잘못 맞춰져 있기 때문이다. 이것은 수단과 목적으로서의 깨달음과 열반의 자리가 뒤바뀐 혼란에서 오는 문제이다. 여기서 둘의 상관관계를 말하는 것은 바로 둘의 원위치를 회복시키기 위함이다. 결론적으로 보자면 깨달음은 수단이고 열반은 목적이다. 그런데 우리 불교는 수단이어야 할 깨달음을 목적이라고 하고 있으며 목적인 열반은 설 자리조차 없다. 게다가 간혹 깨달음과 열반을 대등한 것이나 동의어라 하여 “열반이 깨달음이다.” “깨달음이 열반이다.”라고도 한다.

이러한 문제를 대할 때 반드시 물어야 할 것이 있다. 경전에서 열반은 탐진치(貪瞋癡) 삼독(三毒)의 완전한 소멸이라고 한다. 이 삼독은 독(毒)일 뿐만 아니라 불(火)로도 비유되는데 그렇다면 깨달음으로 삼독의 불이 완전히 꺼지는가. 즉, 깨달음으로 일체의 괴로움을 모두 종식시켰다고 할 수 있는가. 또한 사성제에 의하면 분명 열반에 이르는 길로 팔정도가 제시되어 있다. 그렇다면 간화선 참선 수행이 곧 팔정도 전체를 대신하고 있다는 말인가. 과연 정견(正見), 정사유(正思惟), 정어(正語), 정업(正業), 정명(正命), 정정진(正精進), 정념(正念), 정정(正定), 이 여덟 가지를 응축시켜 놓은 것이 간화선 참선 수행이라는 말인가. 적어도 이렇게 묻는 것이 마땅한 일일 것이다.

깨달음과 열반, 우선 이 둘의 차이와 이것에 문제를 제기한 몇몇 견해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 열반과 깨달음이라는 보리(菩提), 이 둘의 상호관계와 차이에 대해 처음 문제 삼은 사람은 일본의 불교학자인 다카사키 지키도(高崎直道)이다. 그는 깨달음이 열반에 이르는 수단이라 말한다.  

부처님이 처음부터 추구했던 것은 깨달음이 아니고 불사의 경지이며 열반이었던 점이 분명히 드러난다. ……보리(菩提), 깨달음은 열반에 이르는 수단이라고 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러나 불교의 특색이 깨달음에서 발견되었기 때문에 마치 보리(菩提)가 최종 목적으로 생각되는 것이다. 특히 깨달음의 강조는 대승불교에서 깨달음의 보편화에 영향받고 있는 듯하다.

한국불교계에서 처음으로 깨달음과 열반의 문제를 거론한 사람은 홍사성과 윤호진 등이다. 홍사성은 2004년 《불교평론》에 〈깨달음이 불교의 목적인가〉라는 제목의 소논문을 발표한 이후 다시 2008년 《대각사상》에 기고한 〈깨달음에 대한 몇 가지 오해, 그리고 진실〉이라는 글에서 거듭 강조해 다루었다. 깨달음과 열반의 차이에 대해 깨달음을 통해 열반이라는 목적지에 가는 것이므로 최종의 목적은 열반이어야 한다는 점을 누차 역설하고 있다. 그의 논지는 아래와 같다.

깨달음 자체가 불교 수행의 최종적 귀착인지에 대해 다시 생각해 보아야 한다. 불교 수행의 목적은 놀랍게도 ‘깨달음’이 아니라 ‘열반’이기 때문이다. 여기서 깨달음이 불교의 목적이 아니라고 하는 것은 수행의 목적이 ‘깨달음을 성취하기 위한 방법’이 아니라 ‘깨달음의 삶을 실천하는 방법’이라는 것을 지적하기 위한 것이다.

같은 논지로 윤호진 역시 《성지에서 쓴 편지》에서 아래와 같이 지적하고 있다. 

우리가 다시 한 번 분명하게 인식해야 할 것은 불교의 궁극 목적은 ‘깨달음’이 아니라 ‘열반’이라는 사실입니다. 깨달음은 수단이고 열반이 목적이라는 것입니다.

이러한 문제 제기는 흔하게 쓰이는 깨달음의 위치와 그것의 진정한 의미에 대해 재고를 시사할 만한 충분한 가치를 갖는 것이다. 깨달음을 목적으로 삼는다면 이것은 선후 관계가 뒤바뀐 채, 미완성형(型), 중도하차형(型)의 불교가 될 수밖에 없다. 깨달음은 열반으로 가는 수단일 뿐이며 열반이 목적이다. 즉 깨달음이 출발지이고 열반이 종착지라는 말이다. 그러므로 여기에는 선후 관계가 있다. 즉 깨닫고 나서부터 본격적인 수행으로 돌입해 열반이라는 목표 완성을 위해 나아가야 한다.

전도된 수단과 목적을 원위치로 돌릴 수 있는 가능성을 두고 하나의 가정을 해 보자면 잡아함의 열반 점근성(漸近性)을 언급할 필요가 있다. 붓다는 수행과 관련, 정근수습(精勤修習), 정진수도(精勤修道), 수습다수습(修習多修習)을 늘 강조하고 있다. 이렇게 닦는 수행으로 열반으로의 점근(漸近), 내지 점차(漸次), 점점장대(漸漸長大), 점점증장(漸漸增長)하여 점근열반(漸近涅槃) 하라고 하고 있다.

경전에서 열반과 관련된 하나의 특징인 이것은 수행을 단계적으로, 또 점진적으로 증장시켜 궁극적이자 최종 목적인 열반으로 ‘점차 가까이’ 나아가는 것이라고도 볼 수 있다. 그러므로 깨달음과 열반, 둘의 경지가 다르다는 점을 유추해 볼 수 있으며 여기에는 사과위(四果位)가 있다는 점으로도 미루어 추측할 수 있다.

3. 깨달음과 열반의 상관관계

한자문화권 내 경전 가운데 붓다의 육성을 들을 수 있는 경전이라면 아함경이 될 터인데 그 가운데 초기 교설이 가장 많은 잡아함만을 선택, 깨달음과 열반의 차이를 집중해 다루려 한다. 잡아함에는 분명 깨달음과 열반을 구별해 설하고 있다. 게다가 깨달음이 팔정도 수행의 궁극적인 목표로 설정되어 있지도 않다.

이 둘의 기본 차이를 보자면 첫째, 우선 둘의 어원부터 성격이 다르다. 그리고 경전은 보리와 열반을 구분해 설하고 있다. 둘째, 경전을 근거로 보리(菩提), 삼보리(三菩提), 아뇩다라삼먁삼보리(阿耨多羅三藐三菩提) 등등 깨달음으로 번역되는 용어가 무엇과 수반되는지, 또 무엇을 지시하고 있는지 살펴볼 것이다. 셋째, 네 가지의 과(果)인 사과위를 보자면 특정한 경지에 이른 자를 수다함(須陀洹)이라 하고 있다.

이와 반면 열반이나 아라한에는 대체로 삼독의 탐진치와 관련, 멸(滅), 누진(漏盡), 멸진(滅盡)이 늘 수반되고 있다. 넷째, 둘의 상관관계를 명확히 하기 위해 깨달음을 규명해 보자면 그것은 연기법에 대한 각지(覺知), 여실지(如實知) 하는 것과 통하고 있다. 다섯째, 깨달음이 무엇인지 규명된다면 열반 역시 무엇인지 알아야 하며 왜 사성제에서 팔정도가 있어야 하는지도 살펴볼 것이다.

결론적으로 이 모든 것을 정리하자면 수단과 목적이 뒤바뀐 현 수행의 문제를 짚어 낼 수 있다. 깨달음과 열반, 이 둘에 선후 관계가 있으며 깨달음에는 수행보다 지혜가 우선이다. 그러므로 ‘깨달음은 지혜로, 열반은 수행으로,’ 즉 깨달음의 획득 이후 본격적인 수행이 따라야 하는 것으로 결론지을 수 있다.

1) 어원과 구별

순수 우리말인 깨달음으로 번역되는 보리(菩提)는 경전에서 삼보리(三菩提), 아뇩다라삼먁삼보리(阿耨多羅三藐三菩提)라고도 쓰며 각지(覺知), 지(知), 오(悟), 정각(正覺), 성도(成道) 등과 같은 맥락으로 폭넓게 구별 없이 ‘깨달음’ 하나로 통일되어 쓰이고 있다. 이것과 열반의 기본 차이는 어원부터가 의미를 달리하고 있으며 분명 둘을 구별해 쓰고 있다는 점에서 우선 드러난다.

보리는 ‘깨닫다’ 내지 ‘알다’에서 파생된 말이라 한다. 열반은 Nir+vāna의 형태로 대부분의 사전은 ‘훅 불어서 소멸시킨다.’는 취멸(吹滅)의 뜻으로서 번뇌의 뜨거운 불길이 꺼진 고요한 상태를 가리킨다고 하는 것이 정설이다. 깨달음과 열반의 혼동을 풀 수 있는 열쇠는 우선 이 둘의 어원에서부터 출발할 필요가 있다. 이 둘의 어원에서부터 성격을 달리하는 것은 둘의 경지가 다르기 때문이라 본다. 흔히 깨달음을 영어로 번역할 때 그것은 enlightenment라 한다. 그러나 열반을 번역할 때는 글자 그대로 흔히 Nirvana로 쓰고 있다.

이 둘이 다르다는 점을 시사하는 또 하나의 특징은 낙(樂)으로 이 둘의 경지를 구분하고 있는 점이다. 붓다가 우다이에게 준 설법에 네 가지 낙을 설하고 있다. 

우다이여, 네 가지 즐거움이 있다. 무엇이 그 네 가지인가. 이른바 탐욕을 여읜 즐거움, 멀리 여읜 즐거움, 寂滅의 즐거움, 菩提의 즐거움이니라(優陀夷, 有四種樂, 何等為四, 謂離欲樂, 遠離樂, 寂滅樂菩提樂. 잡아함 17권, 485경 《우다이경優陀夷經》 124b).
 
여기서 깨달음의 낙인 보리락(菩提樂)과 열반의 동의어인 적멸(寂滅)의 적멸락(寂滅樂)을 구분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보리와 적멸은 둘 다 낙을 주는 것이지만 다른 경지의 낙이라는 점이 확인된다.
위 근거를 좀 더 확실히 하기 위해 우선 경전에서 깨달음, 열반으로 불리는 용어들과 그것에 수반되는 용어와 관련된 사과위로 이것을 정리해 보자.  

2) 보리, 삼보리, 아뇩다라삼먁삼보리

경전에서 보리(菩提)는 얻고, 이루는 ‘득(得)’ 삼보리(三菩提), ‘성(成)’ 아뇩다라삼먁삼보리(阿耨多羅三藐三菩提) 등의 용어와 같이 쓰이며 보리보다 삼보리, 아뇩다라삼먁삼보리가 많이 쓰이고 있다. 한 용례를 보자면 아뇩다라삼먁삼보리는 마음이 전도로부터 멀리한 심리전도(心離顛倒)에서 이룬다는 점, 그리고 삼보리는 깨달아 아는 각지(覺知)와 관계가 깊음을 알 수 있다. 아뇩다라삼먁삼보리에 관한 한 마음이 전도를 떠남으로써 얻는 것이다.

마음이 전도(顛倒)를 떠나면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이루어 능히 스스로 깨달아 알고 현재의 법에서 몸으로 알아 삼보리를 얻는다(為解脫為出為離 心離顛倒 成阿耨多羅三藐三菩提 能自覺知 現法身知 得三菩提. 잡아함 26권, 651경 《사문바라문경(沙門婆羅門經)》 183a).

또한 여실하게 아는 것, 여실지 하면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는다고도 한다.

비구들이여, 내가 이 5수음에 대해서 맛은 맛으로, 환을 환으로, 벗어남을 벗어남으로 여실하게 알았기에 전도에 머무르지 않았고 이로써 능히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증득할 수도 있었느니라(諸比丘 我以如實知此五受陰味是味患是患 離是離故……永不住顛倒 能自證得阿耨多羅三藐三菩提. 잡아함 1권, 14경 《미경(味經)》 2c).

이것은 붓다의 자증적인 선언으로 여실하게 알아 마음이 전도를 떠나면 아뇩다라삼보리를 얻는다는 점을 확인시켜 준다.이와 반면 삼보리에 대해서는 각지하여 얻는다고 한다.

너희를 위해 설명하자면 여래·응공·등정각은 일찍이 들어보지 못했던 법을 능히 스스로 깨달아 알았고, 현법의 몸으로 알아 삼보리를 얻었다(當為汝說 如來應等正覺者 先未聞法 能自覺知 現法身知, 得三菩提. 잡아함 26권, 684경 《십력경(十力經)》 186c).

위 구절에서 주목할 것은 마음이 여실하게 알거나 깨달아 알면 삼보리,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는다는 점이다. 이로써 하나의 가설을 전개하자면 깨달음은 각지, 여실지에서처럼 유난히 지(知)와 관계가 깊다. 그렇다면 알아야 하는 대상을 무엇인가. 이것은 뒷장에서 다루는 깨달음은 무엇인가에서 살펴 볼 것이다. 열반과 비교할 때 깨달음이 분명 그 경지에 차원에 있어 다르다고 볼 수 있는 또 다른 점은 사과위에서 드러나고 있다.  

3) 사과위와의 관계

깨달음과 열반의 경지가 다르다는 또 하나의 근거를 찾자면 깨달음은 사과위에서 아라한과 상관없다는 점이다. 경전에서 열반의 성취가 아라한과인 반면 깨달음은 수다함과(須陀洹果)로 볼 수 있는 구절을 자주 접할 수 있다. 우선 오하분결(五下分結) 가운데 삼결(三結)을 끊은 수다함에서 삼보리로 향한다고 한다.  

만일 비구가 오근(五根)을 여실하게 관찰하고 나면, 삼결(三結)이 끊어진 줄을 알 것이다. 삼결인 신견, 계취견, 의견을 끊으면 수다원이라 한다. 그는 악취에 떨어지지 않고 결정코 삼보리(三菩提)로 향한다(若比丘於此五根如實觀察已於三結斷知 何等為三 謂身見戒取疑是名須陀洹 不墮惡趣 決定正向三菩提. 잡아함 26권, 648경 《약설경(略說經)》 182c).

위의 구절 이외에도 삼결의 끊음과 수다원과 관련 무수히 많은 설법에서 이 점을 강조하고 있는데 삼보리는 사과위 가운데 수다함과 수반되는 것임을 경전을 통해 알 수 있다. 깨달음이 이러하다면 열반과 아라한에 수반되는 용어들은 어떤 것들과 같이 하는가 볼 필요가 있다.

경전에서 열반에 직접적으로 수반되는 특징적인 용어의 한 예를 들자면 대부분 탐진치 삼독심, 내지 타오르는 번뇌를 상징하는 불(火)과 관련되어 ‘불 끄는 것’ ‘불을 꺼지게 하는 것’ ‘불이 꺼진 상태’를 나타내는 멸(滅)과 관련이 깊다. 주로 소멸(消滅), 화멸(火滅), 멸화(滅火), 멸진(滅盡), 고멸(苦滅)이라고도 하고 있다. 경전은 무언가 꺼야 할 대상을 부정적인 것으로 보고 멸 이외에도 진(盡), 이(離), 제(除), 단(斷), 조복(調伏), 누진(漏盡), 혹은 진루(盡漏)해야만 하는 것으로 설하고 있다. 이것을 성취하면 그를 명아라한(名阿羅漢), 성아라한(成阿羅漢), 득아라한도(得阿羅漢道)로 연결되는 점도 특징적이다. 대표적으로 아라한을 설하는 용례를 보자면 ‘진제유루 득아라한(盡諸有漏 得阿羅漢)’ ‘단제번뇌 득아라한(斷諸煩惱 得阿羅漢)’ ‘제루이진 명아라한(諸漏已盡名阿羅漢)’이다.

적어도 잡아함경에 근거했을 때 사다함은 보리, 삼보리, 아뇩다라삼먁삼보리, 각지, 여실지와 상관있으며 아라한은 누진(漏盡)과 관련이 깊다는 점이 확인된다. 그렇다면 여기서 깨달음이 무엇인지, 즉 무엇을 깨달아야 하는지에 대한 정의가 필요하다.

4) 깨달음이란 무엇인가.

잡아함에서 읽을 수 있는 깨달음은 무엇인가를 ‘지(知)’ ‘각지(覺知)’ ‘여실지(如實知)’ ‘지견(知見)’ 하는, 즉 ‘아는 것’과 상관 있음을 짚어 낼 수 있다. 경전을 근거로 하자면 여기서 아는 것의 대상은 연기의 원리와 수반됨을 상관 지어도 무리는 아니다. 모든 존재의 실상, 인연에 따라 생멸하는 이치, 즉 이것이 있으므로 저것이 있는 “차유고피유 차무고피무 차기고피기 차멸고피멸(此有故彼有, 此無故彼無, 此起故彼起, 此滅故彼滅)”에서 인연하여 생멸하는 원리를 깨달아 아는 것, 여실하게 아는 것이 깨달음이라 가정해 볼 수 있다.
앞서 마음이 전도를 떠나 여실하게 알아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이룬다든가, 깨달아 알아 삼보리를 얻었다는 것과 연결 짓자면 이것은 곧 연기의 원리를 ‘알았다’ 내지 ‘깨달았다’는 이치가 될 것이다. 경전에서 붓다는 성제자(聖弟子)들에게 육식(六識)의 무상을 여실지하라고도 하고 연기를 여실지견하라고 한다(何等為聖道如實知見, 謂十二支緣起如實知見. 잡아함 30권, 846경 《공포경(恐怖經)》 216a). 이것은 붓다의 성도 이후 다섯 비구를 향한 첫 설법을 마치고 그들이 법을 깨쳤다고 했던 것과 관련지어 다섯 비구가 연기법을 여실하게 알았다는 것이라고도 짐작할 수 있다.

그런데 연기의 법칙을 여실하게 알고 깨달아 알았다면 자연히 인식의 전환이 이루어진다. 그런데 여기에는 통찰의 지혜가 필요하다. 모든 존재의 생멸하는 연기에 대한 바른 인식이기에 반드시 지혜가 따라야 하는 것이다. 이것은 계·정·혜 삼학(三學)의 혜의 단계이자 견도(見道) 단계로 진입이다. 또 하나의 가정을 하자면 깨달음은 곧 팔정도의 첫 번째인 정견 단계로 진입이라고도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이것을 좀 더 확장시키면 정견은 여실하게 존재의 실상을 알게 될 때 인식의 전환으로 인해 삿된 견해는 자연히 사라져 지혜로 모든 존재를 관하는 눈이 생기는 건 당연한 이치일 것이다.  

윤호진은 이것을 이해의 영역이라 말하고 있다.

연기법은 싯다르타가 성취한 깨달음의 내용이고 열반은 연기법을 응용해서 고의 문제를 해결한 결과입니다. 깨달음은 이해의 영역이고 열반은 체험의 영역입니다.

깨달음은 이해의 영역이고 열반이 체험의 영역이기에 이해에서는 지혜의 힘이, 체험에는 수행의 힘이 필요하다. 이것 역시 앞서 거론한 선후의 관계와 관련짓자면 우선 이해하고 난 이후 체험을 위한 수행으로 나아가야 한다. 여기서 깨달음을 모든 수행의 출발점으로 보는 선후 관계가 반드시 적용되는 것은 순서상 깨달은 이후 본격적인 수행으로 돌입하는 것이며 열반에 이 깨달음이 기본으로 요청되는 것이기도 하기 때문이라 본다.
홍사성은 이렇게 말한다.

깨달음이란 현실을 바르게 인식하고 해탈의 방법을 아는 것을 말한다. 불교에서 실천 수행을 강조하는 이유는 깨달음을 얻기 위해서가 아니라 열반을 얻기 위해 하는 수행이라는 점이다…… 불교는 깨닫기 위해 수행하는 종교가 아니라 깨달음의 삶을 완성하기 위해, 열반을 성취하기 위해 수행을 요구하는 종교라는 점이다.

윤호진은 다시 이렇게 말하고 있다.
우리는 수행의 목적이 깨달음을 이루기 위한 것, 즉 성불하기 위한 것이라고 확신하다시피 하고 있지 않습니까. 그러나 싯다르타 제자들의 경우를 보면 ‘깨닫기 위해서’, 즉 ‘연기법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수행이 필요하지 않았습니다. 모두 싯다르타의 법문을 듣고 그 자리에서 모두 깨달았지 않습니까. 그러나 깨달음은 끝이 아니라 시작이었습니다. 그들은 깨달음을 성취한 뒤에, 즉 연기법을 이해한 뒤에 수행을 시작했습니다.

이것을 개인의 견해로 확장시켜 보자. 만약 그 누구라도 모든 존재의 실상인 연기의 생멸법을 여실히 알거나 깨달아 알았다면 우리 같은 범부도 깨달음을 이룰 수 있다고 감히 말할 수 있다. 모든 실상이 차유고피유 차무고피무(此有故彼有 此無故彼無)라는 이 원리로 우리 자신과 세상을 인식한다면 그 누구라도 충분히 깨달을 수 있는 것이다. 깨달음은 멀리 있지 않으며 이미 그 열쇠는 우리에게 쥐어져 있다. 그러므로 연기법의 원리를 여실하게 깨달았다면 열반을 목적으로 삼아 본격적인 수행에 매진하는 것이 불법의 바른 이치라 말할 수 있다.

5) 열반이란 무엇인가

불교 역사에서 비록 열반에 여러 해석이 난무한 적도 있으나 시대를 막론하고 열반이라는 단어는 불교에서 최종적이자 궁극적인 목표로서 그 위치를 잃지 않았다. 붓다가 45년간 주신 설법의 원음(原音)은 모두 깨침의 소리 그 자체였으며 이것은 오로지 하나의 목표만을 염두에 둔 것이었다. 그것이 열반이다. 모든 경전을 총망라해 한 단어로 집약시키자면 궁극적인 열반으로 가자는 가르침 하나만으로 귀결되어 있다.

열반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대답은 “탐욕영진무여(貪欲永盡無餘)”가 가장 잘 말해 주고 있다. 즉 열반에 관한 한 그것은 탐진치 삼독의 소멸, 내지 멸진이라 명확히 하고 있다. 경전은 분명 독이나 불로 비유되는 이러한 것들이 소멸하였을 때 행복이라는 낙(樂)이 있다고 단언한다. 이것이 열반락(涅槃樂)이다. 《법구경》에서 “탐욕보다 더한 불길이 없고, 성냄보다 더한 독이 없으며 오온(五蘊)보다 더한 고(苦)가 없으니 적정보다 더한 행복은 없다.”라고 했다. 적정은 열반이다. 인간이라면 누구나 행복을 추구하고 행복을 느끼기도 하지만 문제는 그 행복이 오래가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러나 경전에서 설하는 붓다의 열반락은 유일하게 무상하지 않은 상락(常樂)이며 흔들림 없는 부동락(不動樂)이자 최상, 최승의 제일락(第一樂)이다. 그 어디에도 비길 데 없는 열반이라는 행복을 보장하는데 왜 우리는 이것을 간과하는 것인가.

지극한 행복을 약속하는 열반을 무시한다면 궁극적 목적도 없는 종교가 되고 불법의 핵심마저 상실된다고 보는 것은 우리 불교에서 고집멸도, 사성제를 등한시하기 때문이다. 아무리 2,500년의 세월이 흘렀다 해도 사성제를 떠나 불법은 존재 가치가 없을 것이다. 이미 우리에겐 붓다가 모든 이들의 열반의 행복을 위해 제시한 길이 있다. 그것이 팔정도이다. 그러기에 고집멸(苦集滅) 삼성제(三聖諦)가 아니고 고집멸도(苦集滅道) 사성제(四聖諦)인 것이다. 팔정도는 왜 필요했을까. 그것은 여덟 가지의 길을 통해 행복으로 가자는 것이지 않은가. 그리하여 누구나 세상에서 맛볼 수 없는 진정한 행복을 누리라고 하는 것이지 않은가. 열반으로 가는 이 도(道)의 길은 인간의 욕망이 변하지 않는 한 유효하며 붓다는 그 어떤 누구보다 모두의 행복을 중시했었다. 이 열반의 행복은 나만의 행복을 추구하는 것이 아니며 너와 나의 행복이다.

열반은 시공간을 초월해 실현 가능한 것이다. 왜냐하면 팔정도는 지극히 구체적으로 우리의 삶과 직접 연관이 있으며 일상의 삶 속에서 충분히 전개될 만한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우선 정견, 정사유, 정어, 정업, 정명, 정정진, 정념, 정정 가운데 우선 한 가지부터라도 바로 수행으로 옮겨 시작할 수 있다. 이것이 붓다가 설한 정근수습(精勤修習), 정진수도(精勤修道) 해야 할 것이다. 필자 개인은 무상하지 않고, 흔들림 없는 행복인 붓다의 열반락을 맛보고 싶어 정견에서부터 열반을 향해 나아가고 있다. 이 수행은 이미 한 개인의 삶과 주변을 서서히 변화시켜 나가고 있음을 고백한다.

4. 결론

필자는 오늘 한국불교의 문제점 하나를 끄집어 들었다. 우리 불교는 깨달음과 이것에 기인한 수행 풍토로 인해 정도(正道)의 길을 잃었다. 한국불교는 깨달음이라는 묘원한 환상에서 벗어날 때도 되었다. 앞서 논한 모든 차이를 한마디로 하자면 깨달음 대신 열반이 모든 수행의 목적이 되어야 한다는 점이다. 깨달음에는 연기법에 대한 통찰이 요구되는 반면 열반은 팔정도 수행이 필요하다. 깨달음은 단지 열반의 선행 조건일 뿐이며 깨달음의 단계부터 시작, 이것을 기반으로 최종의 궁극적 목표인 열반으로 나아가는 구도가 되어야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수행을 한다면 그 수행이 목표로 하는 것이 무엇인지 확실히 하고 목표 설정을 다시 해야 한다. 열반이 수행의 최종적이자 궁극적인 목적이다. 깨달음만을 수행의 목적으로 삼는 한, 수단과 목적이 전도된 채 삼독에 물든 중생으로 남을 것이다.

그것이 무엇이든 불법에 합당한가의 잣대가 되는 것이라면 붓다의 성스러운 네 가지의 진리인 사성제를 떠나 있을 수 없다. 사성제를 등한시한다면 불교의 존재 의미가 없으며 알맹이 없는 포장으로 가득 찬 불교일 것이다. 이 시점에서 붓다의 원음으로 돌아가 사성제의 의미를 다시 새겨 원위치로 복귀할 필요가 있다. 우리 불교의 깨달음 지상주의 수행 풍토에서 붓다 법문의 핵심 요지인 사성제, 그리고 가장 소중한 열반을 놓치고 있는 점은 참으로 안타깝다.

우선 깨달음으로 모든 존재의 실상이 연기의 원리 위에 펼쳐지는 것을 알았다면, 이미 너와 나는 둘이 아니다. 여기에서 깨달음은 자연히 자비심을 발동시키는 것이 아닌가. 그물망의 네트워크로 하나가 되었다면 네가 아플 때 내가 아프다. 네가 아픈데 내가 아프다면 우리는 이미 깨달은 자이다. 너와 내가 하나일 때 자연히 자비심이 발동되어 이타행(利他行)을 할 수밖에 없으며 여기서부터 자신과 남의 삼독을 조금이라도 덜어내는 수행 실천이 요구되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깨달음처럼 열반 역시 우리의 일상 삶과 결코 동떨어져 있지 않다. 열반은 막연한 것이 아니라 지극히 구체적이다. 왜냐하면 우리에겐 팔정도라는 정답이 있기 때문이다. 누구에게나 여덟 가지 가운데 단 하나만이라도 실천으로 옮길 수 있는 것이 아닌가. 실현 가능한 열반을 향해 단계적으로, 점진적으로 팔정도의 길을 간다면 언젠가 열반이 우리에게 손짓하지 않을까. 그것으로 일상의 탐욕과 성냄, 어리석음의 무게가 줄어들도록 하는 것, 이것으로 본격적인 수행의 시작이 되도록 하는 것이다.

아제 아제 닐바나 아제
우리 같이 열반으로 갑시다. ■


김나미 / 가톨릭 출신의 불교 신자로 종교 간 화합을 모색하는 불교학자.연세대학교 국제학대학원 동아시아학과, 동국대학교 선학과 대학원, 연세대학교 철학과 박사과정 등 수료. 미 스탠포드대학 불교연구소 연구원을 지냈으며 한국학중앙연구원에서 《초기불교의 열반관 연구》로 박사학위. 주요 저서로 《그림으로 만나는 달마》 《환속》 《이름이 다른 그들의 신을 만나다》 《탐욕도 벗어놓고 성냄도 벗어놓고 물같이 바람같이 살다가라 하네》 등과 어린이와 청소년을 위한 종교 서적을 출간해 왔다. 현재 한신대 신학대학원 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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