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기독교, 배타성이 문제다

박광서
서강대 교수

한국사회에서 종교문제는 뜨거운 감자다. 세계적인 종교들이 균형을 이루고 있으면서  비교적 종교적 갈등 없이 평화롭게 공존하는 것이 특이하다고 생각해 왔지만, 그것은 잠복해 있던 종교문제에 대해 알아차리지 못했거나, 아니면 무의식적 또는 의도적으로 피하고 싶은 바람에 불과했는지도 모른다.

최근 수년간 사회적 이슈로 떠올랐던 종교 파동을 되돌아보면 논란의 대상과 범위가 점점 더 확대되고 있다. 지난해만 해도 개신교인들의 ‘봉은사 땅 밟기’ 황우여 의원의 ‘기독교인 대법관’ 발언, 학교에서의 강제 예배가 학생의 기본권을 침해한다는 ‘대광고 강의석군 사건’의 대법원 판결, 개신교의 ‘템플스테이’ 국고지원 반대운동 등, 우리 사회의 종교 갈등이 상징적으로 노출된 한 해였다.

무종교 또는 타 종교인들에게 무례를 넘어 공격적일 수 있다는 사실을 단순히 개인적인 성향으로 돌려 버릴 수는 없다. 다수가 자주 그런다면 종교 집단 전체에 문제가 있다고 보아야 한다. 개신교의 배타적이고 공격적인 선교행위와 정치세력화에 대한 원인과 배경을 정확하게 이해하지 않고 대응 방안을 찾는 것은 불가능하다. 개신교의 근본주의와 성장 과정을 재점검하는 것이 중요한 이유다.

한국이 반세기라는 짧은 기간 내에 지구 역사상 유례없는 기독교 성장 국가가 된 것은 사실이다. 세계 10대 대형 교회 중 5개가 한국교회이며, 머지않아 세계 제일의 선교사 파견국이 될 것으로 예상되기도 한다. 6·25 전쟁과 사회적 격변 속에서 힘 숭배의 종교인 기독교가 성장할 토양이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세계 지배권을 확보하고자 동양을 압박해 온 서구문명에 대해 일본이나 중국이 스스로의 정체성을 크게 흐리지 않고 소화하는 과정을 보면서, 한국의 졸속한 기독교화가 자랑스럽지만은 않은 게 솔직한 심정이다. 게다가 개신교는 최근 한국사회에서 갈등의 중심에 서면서 부정적 측면이 많이 부각되고 있다. 지나칠 정도의 친미반공과 전통문화의 배격, 이분법적 선악놀이, 물량화·기복화 등 성공지상주의, 승리·지배주의로 인한 공격성과 권력지향성 등이 그것이다. 물론 기독교 내부에서 자성과 자조의 목소리가 없는 것은 아니지만, 대세를 바꿀 만한 큰 목소리는 아니다.

한국 개신교가 어떻게 권력지향적 종교로 성장할 수 있었으며 그 비대한 몸집과 열정에 비해 왜 사회갈등의 핵으로 작용할 수밖에 없을까. 두 가지로 요약된다.

첫째, 미국에서 이식된 기독교 근본주의다. 19세기 자유주의 신학의 태동과 현대과학의 발전으로 인해 기독교의 전통 교리가 심각한 도전을 받으면서 이에 대항하기 위해 미국의 보수적 개신교인들에 의해 생겨난 종교운동이 ‘성서(聖書) 무오류설(無誤謬說)’을 핵심 교리로 삼는 소위 근본주의다.

근본주의자들은 자신들의 정의로움을 너무나 확신하는 나머지 세상의 사악한 세력을 응징하는 도덕적 힘이 자신들에 있다고 믿는다. 나와 다른 것을 악으로 규정하고 그 대상을 공격하는 것은 근본주의 존립의 근거이며, 교회 밖의 사람들은 물론 기독교 중에서도 신앙 노선이 다른 종파, 예를 들면 교황청이나 가톨릭에 대해서도 적대적이다. 1990년 현대사회연구소가 종교지도자들을 대상으로 조사한 결과, “타 종교는 인류사회를 위해 공존해야 할 대상인가?”에 대해서 승려와 신부의 경우 각각 81.7%와 85.7%가 긍정적으로 답한 데 반해 목사는 29.9%밖에 되지 않았다는 사실은 한국 개신교의 폐쇄성과 배타성을 잘 나타내고 있다.

근본주의 운동은 1920년대에 절정을 이룬 후 반지성주의라는 지탄을 받고 급격히 세력이 약화되었다가 1970년대 후반 복음주의로 재포장되어 정치세력화하기 시작했다. 그 후, 미국은 1981년 로널드 레이건의 당선과 함께 2001년 조지 부시 대통령으로 상징되는 기독교 국가의 냄새를 물씬 풍기며 세계 경찰국가 행세를 하게 된다.

한국에서 벌어진 김영삼, 이명박 ‘장로 대통령’ 만들기 역시 미국 따라 하기에 불과하다. 우리나라 개신교 신자들 중 ‘성경은 글자 하나하나가 하나님의 말씀이다’라고 믿는 사람들이 목회자 중 84.9%, 평신도는 92.3%나 된다고 한다. 근본주의의 원산지 격인 미국의 경우도 개신교인들의 3분의 1 수준밖에 안 된다는 점을 생각하면 한국 개신교의 근본주의 성향이 세계 제일이란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한국 개신교가 특이한 변종이란 점을 빼놓고 논의하는 것이 무의미한 이유다.

둘째, 기독교의 힘 숭배 성향이다. 시민사회가 충분히 발달하지 못한 상태에서는 국가의 종교시장 개입이 종교지형 변화에 결정적인 영향을 주게 된다. 미군정과 건국 과정에서 개신교에 대한 특혜, 그리고 역대 ‘장로 대통령’과 정치인들의 종교편향성이 문제였다.

우리나라는 총인구의 53%에 해당하는 사람들이 종교를 갖고 있는 반면, 18대 국회의원 중 종교인이 81%나 된다고 하니, 국민 전체 종교 비율의 1.5배 수준이다. 특히 개신교와 천주교 등 기독교인 국회의원이 차지하는 비율은 전 인구의 기독교인 비율의 2배 이상이다. 정치인이 더 도덕적이고 종교적이어서가 아니라 미국이나 교황청 같은 국제적 권력과 연관된 기독교의 힘에 기대고 싶은 심리 탓이라고 보는 게 타당할 것이다.
미군정 초기 김성수, 김활란, 백낙준, 오천석, 유억겸 등 친미 유학파 기독교인 5인방이 속한 ‘한국교육위원회’가 대한민국의 교육·문화·종교 관련 정책을 좌지우지하게 되면서, 미션스쿨은 종교를 강요하고 공직사회는 종교와 밀착하며 성직자들은 세금 한 푼 내지 않는 등 무소불위의 초법적 관행이 뿌리내리게 되었다.

기독교 국가를 꿈꾸던 이승만 정권에서 설립·제정된 군목(1948년), 크리스마스 공휴일(1949년), 기독교방송(1954년)에 비해 군승제도 도입(1968년), 부처님오신날 공휴일 제정(1975년), 불교방송 개국(1990년)이 각각 20년, 26년, 36년이나 뒤처진 것도, 형목 제도를 만들어 형무소 교화 사업을 전담케 하고 YMCA와 같은 단체에 막대한 후원을 한 것도 건국 초기부터 기독교에 특혜를 준 파행적 정책 때문이었음은 두말할 나위 없다. 한마디로 단독정부 수립 과정은 한국의 문화와 역사 등 복합적인 현실을 무시한 채 이데올로기를 기준으로 특정종교를 지원하거나 배제하는 과정이나 다름이 없었다. 기독교 편향 정책으로 해방 직후 남한 전체 인구의 2∼3%에 불과했던 기독교 인구가 1960년에는 7.5%에 달하는 등 비약적인 성장을 이룩하며 기형적인 종교지형이 만들어지게 된 것이다.

선교 도구로 전락한 김영삼 정권에서도 임기 내내 각종 종교편향 사건으로 시끄러웠다. 코드를 맞출 수 없었던 김대중, 노무현 두 정권의 소위 ‘잃어버린 10년’을 지나면서 보수 개신교계가 불안해하기 시작했다. 자유권·행복권 등 시민의 권리 찾기 분위기에 고유 영역을 뺏긴다는 조바심이 생겼고, 이 시기 신도 수가 14만 명이나 준 사실과 국민들 사이에 팽배해진 반기독교 정서도 충격이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한국의 개신교는 시대 변화를 읽으며 국민과 함께하는 종교로 거듭나기보다 기득권을 지키기 위해 권력화의 길을 선택했다. 이명박 ‘장로 대통령’ 만들기도 그 결과 중 하나다.

2. 공격적인 선교행위

우리 사회의 종교적 병리 현상, 특히 사회갈등을 증폭시키는 공격적인 종교 행위들을 유형별로 살펴보고, 어떻게 대처할 것인지, 특히 불교계의 대응 방안에 대한 가닥을 잡아보고자 한다.

1) 종교자유·정교분리 다시 묻다

건국 초기의 국가 개입이 기독교의 기형적인 성장 배경이지만, 개신교가 노골적으로 공격적인 선교행위를 하고 집단권력화를 시도하기 시작한 것은 김영삼 ‘장로 대통령’ 때부터라고 할 수 있다. 1980년대까지 국민의 박수를 받으며 자유와 인권을 위해 싸워주던 진보 기독교와는 달리 민주화가 한고비 넘긴 1990년대부터, 그동안 정교분리를 근거로 교회의 정치적 참여를 비판하며 사회 돌풍을 피해 몸집을 불리고 체력강화를 해 오던 주류 보수 기독교로 ‘선수교체’ 되면서 스스로 정치권력으로 변신하기 시작한 것이다.

한국사회는 민주화, 산업화라는 두 가지 급한 화두로 지난 수십 년을 보내는 사이, 종교자유나 정교분리 등 종교 관련한 기본권이나 헌법정신을 따질 만큼 한가롭지 못했다. 그러나 국민의 기본권에 대한 인식 수준이 높아짐에 따라 헌법정신과 실제 현실과의 괴리에 대해 근본적인 문제 제기가 되면서 종교인권 문제도 사회적 이슈로 전면 등장하게 되었다. 한편 의식화된 대중들 중 기독교 인사들이 많았지만, 스스로의 문제에 소극적일 수밖에 없어 종교문제는 외면하였다.

불교계는 1954년 정화 문제로 야기된 내부 문제에 발목이 잡혀 정치사회적 대응을 할 여유가 없었고 2000년대 들어와서야 겨우 안정을 찾으면서 기독교 국가가 된 현실을 직시하기 시작했다. 민주화와 산업화를 통해 정치경제적 안정이 이루어짐에 따라, ‘종교의 자유’와 ‘정교분리’라는 헌법에 보장된 국민의 권리에 눈을 뜨기 시작한 것이다. 

우리 사회에서 있어 왔던 종교 갈등, 특히 이명박 정권 탄생 전후의 불교 또는 무종교인에 대한 개신교의 공격적인 종교 행위 중심으로, 그리고 사적인 행위부터 공적인 행위 순서로 사례들을 살펴보면서 어떻게 대처하는 것이 좋을지 생각해 보자.

2) 사적인 종교 표현, 타인 배려해야

종교 선택의 자유, 무신앙의 자유, 종교 공개 거부의 자유 등 내면의 소극적 종교의 자유는 인간의 기본권이므로 외부 행위로 나타나기 전에는 누구로부터도 자신의 종교를 강제로 말하게 하거나 특정종교를 강요받지 않을 절대적인 권리다. 반면에 신앙 실행의 자유, 즉 대상이 있는 선·포교 행위와 같은 적극적 종교의 자유는 타인의 양심과 종교적 신념을 침해하면서까지 누릴 수 있는 무제한적인 권리일 수 없고, 타인의 기본권인 종교자유와 부딪치는 경계선, 바로 그 지점에서 멈춰서야 한다.

개인의 공격적인 종교 행위 중 국가가 즉각 나서야 하는 불상 파괴, 사찰 방화, 개종 목적의 납치 감금과 같은 명백한 불법 행위들은 아예 논외로 하겠다. 다만 극소수 광신자들의 일탈 행위라고 짐짓 모른 척하기엔 종교 혐오증을 유발하여 사회 통합을 심각히 저해하는 야만적 행위이므로, 공권력은 신속하게 대응해야 한다.

먼저 타인을 불편하게 할 수 있는 사적인 종교 행위를 생각해 보자. 아무 때나 아무 데서나 하나님을 찾거나 기도하기, 특정종교에 대해 호불호를 가볍게 말하기, 명함이나 홍보물 또는 가정통신문에 특정종교 상징 또는 교리 써넣어 배포하기, 종교 시설 아닌 곳에서의 결혼식 중 특정종교 기도 및 찬송 제의, 강의 중 과목과 무관하게 자신의 종교 설명에 많은 시간 할애하기 등 무의식적이고 습관적 언행들. 큰 십자가나 염주 일부러 드러내기, ‘교인(개신교인)이라 거짓말 못 한다’는 묘한 뉘앙스 풍기는 말, “요즘도 불교 믿는 사람 있나요?” 등 황당한 말, 일요일을 굳이 ‘주일’이라 표현하는 등 우월감을 표현하는 듯한 언행들. 장례 또는 제사 때 ‘절 못하겠다’라거나 심지어 아예 제사 자체를 거부해 이혼에까지 이르기, 불상에 절했다는 이유로 해직당하는 대학교수 등 심한 문화적 편견. 초등학생 일기 조사 후 교회 다녀온 아이들에게만 ‘칭찬 스티커’ 주기, 교수 연구실에서 지도 학생들과 성경 공부하기, 개신교인들끼리만 어울리는 듯한 분위기 만들기, 교회에 다니지 않으면 사업도 못하고 농사도 못 짓게 하는 노골적인 왕따 등의 편애와 패거리 문화. 이 모든 행위가 타 종교인들은 물론 무종교인들을 당황스럽게 한다.

개인의 종교 표현과 행위는 타자에 대한 배려가 기본이다. 종교에 심취할수록 자신이 무심코 하는 말이나 행동이 타인에게 상처를 줄 수도 있다는 점을 쉽게 잊게 된다. 적절한 때 적절한 수준으로 불쾌감을 알려 경솔함을 일깨워주는 것이 필요하다.

3) 과도한 종교 언행, 사회문제화해야

집을 방문하거나 학교 내에서 스토커 수준의 도를 넘는 무례한 선교, 상급자의 세례원서 배포나 비신자 차별, 교사의 ‘사탄, 마귀의 종교’ 등 협박성 전도와 믿지 않는 학생 왕따 등의 고압적 전도 행위, ‘예수천국 불신지옥’ 같은 협박 조의 선교행위, 타 종교에 대한 노골적인 비하나 조롱, 봉은사 ‘땅 밟기’ ‘사찰 무너지라’는 기도 스님에게 침 뱉기 등 저주 또는 적대감을 나타내는 광신 행위는 우리나라에서만 볼 수 있는 개신교인들의 행패다.

남을 의식하지 않는 광신적 전도 행위는 부지불식간에 증오심을 자극하고 적개심을 부추긴다. 심지어 타 종교인 성직자에게까지 스토커 수준의 무례하고 집요한 선교행위를 하는 것은 선진사회에서는 상상할 수 없는 사회질서 파괴 행위다. 개인적 종교 행위라도 그 정도가 지나칠 정도로 집요하다면 당당하게 사회문제화하여 일반 국민의 상식과 인터넷 같은 대중 소통을 통해 저절로 걸러져 수그러들게 하는 것이 상책이다.
저주성 발언이나 행위는 개인의 순간적 행위라기보다 개신교의 지속적인 세뇌에 따른 반사작용 또는 의도된 행위라고 보는 것이 옳다. 따라서 대수롭지 않은 개인 행위라고 넘기는 것은 위험하다. 더 큰 공격성을 준비하도록 방치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불교를 정조준하여 왜곡·비방하는 몰상식한 언행에 대해서는 창피해하거나 감추기보다, 사회 통합을 거스르는 반지성적 행위라는 점을 부각시켜 항의하고 언론에 띄워 종교의 역기능, 특히 개신교의 저질성을 상기시키는 계기로 활용하는 것이 효율적일 것이다.

오랫동안 불자들은 지독한 불교 폄훼 행위를 그저 마음속에만 담아 삭이고 심지어는 수행의 과정으로 삼는 호기를 부리는 것이 불교적인 것처럼 착각해 왔다. 개인적 해프닝일 경우는 그럴 수 있다 해도, 온 국민이 불편해하고 불자들의 마음에 상처가 클 경우라면 그런 태도는 관용이 아니라 오히려 자기합리화나 자기기만일 가능성이 더 크다. 개신교의 공격성이 더 커진 배경에는 사회문제를 공적으로 풀기보다 사적으로 새기고 마는 불교 지도자들의 관행이 한몫해 온 측면이 없지 않다. 어느 유치원생이 스님에게 침을 뱉은 행위로 그 스님은 ‘충격’을 받았으나 수년이 지나서야 사실을 ‘실토’했다는 것은 결코 장한 일이 아니다. 개인적으로는 마음속에 녹여 낼 수 있더라도, 불교계 차원에서 심각하게 논의했어야 하는 사회적 문제라는 점을 정확히 인식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4) 공공영역의 종교 중립, 사회법에 호소해야

개인적인 종교 언행에서 타인에 대한 배려가 없는 것도 문제지만, 공공 영역에서마저 종교가 없거나 어떤 종교를 믿느냐에 따라 삶이 알게 모르게 불편하고 피곤한 사회는 후진 사회다. 공직사회, 국가기관, 학교, 공공장소 등 공공 영역만이라도 종교 색깔을 지워 종교와 무관한 국민 모두의 것으로 되돌려 놓는 것이야말로 사회통합의 첫걸음일 것이다.

국민으로부터 위임받은 공직 신분을 이용한 종교 활동은 공권력의 사적 도용이며, ‘세속적 권력’과 ‘종교적 권위’를 함께 이용하는, 정교분리라는 사회합의를 정면으로 거스르는 위헌적 행위다. 자신의 종교 신념 때문에 타 종교인이나 무종교인들을 불편하게 하거나 소외감과 박탈감을 느낄 정도로 종교차별까지 한다면 공직자로서는 치명적인 결격사유가 되므로 처벌하거나 퇴출하는 것이 마땅하다.

한편 공직자도 종교의 자유가 있는 것 아니냐고 못마땅해하기도 한다. 물론 공직자도 자신의 종교를 신봉할 자유가 있다. 그러나 공직자는 모든 정책의 공평무사한 집행과 함께 종교자유 등 국민의 기본권 침해에 대한 관리감독의 책임이 있다. 게다가 일반인들과 달리 유무형의 권력을 행사할 수 있는 위치에 있다는 점에서 그 존재 자체가 ‘움직이는 권력’으로 간주된다. 따라서 고위 행정직이나 선출직 자치단체장의 공적 영역의 공개적인 종교 행위를 단순히 사적인 종교 생활로 믿어 달라는 주문은 억지일 수밖에 없다. ‘무지’이든 ‘의도적’이든 공직의 신분을 망각한 채 특정종교 편향적 발언이나 행정 행위를 하는 것은 사회분열을 조장하는 위험천만한 일이다. 공인의 신앙생활은 ‘골방에서 기도하듯’ 아니 ‘숨 쉬듯’ 해야 하는 까닭이다.
공공장소나 행정시스템도 특정종교가 차지하거나 돈으로 살 수 없는 국민 모두의 공동자산이므로 누구나 종교적 부담 없이 공평하게 누릴 수 있어야 한다.

종교로부터 자유로운 세상 만들기는 공공 영역에서부터 시작되어야 한다. 공공 영역에서 종교 중립 훼손 사례들 중 위헌 소지가 큰 유형별 순서로 생각해 보자. 공직자의 과도한 종교 언행의 예들은 다음과 같다. 특히 이명박 대통령 취임 전후로 정치인들의 종교편향적 언행과 종교인들의 지나친 정치 행위, 그리고 국가사업의 종교 색깔 띠기가 눈길을 끈다.

이·취임식, 개원식, 입학식, 졸업식, 출정식 등의 공식 행사에서 기도나 예배 등 종교 행위가 공공연하게 이어졌다. 이명박 서울시장의 ‘서울시 하나님께 봉헌’ 발언, 청계천 준공 예배에서 하나님 역사 운운으로 비기독교인 납세자 우롱, 부산 ‘사찰 무너져라’ 부흥회 축하 동영상 등과, 개신교 공직자 기도 모임 ‘홀리클럽’ 및 ‘성시화 운동’ 등으로 사회적 파문을 일으켰다. 이 외에도 문봉주 뉴욕총영사의 교민 상대 공개 성경 강좌, 서찬교 성북구청장의 ‘교동협의회’ 추진 및 선교행위 등이 있었다. 특히 이명박 대통령이 취임한 2008년은, 주대준 청와대 경호처 차장의 “정부 부처 복음화가 나의 꿈” 발언, 어청수 경찰청장의 ‘경찰 복음화’ 광고 포스터에 조용기 목사와 함께 찍은 사진 게재, 오현섭 여수시장의 “복음박람회, 하나님 선물” 언급, 박승숙 인천 중구청장의 거듭된 종교편향 발언 등이 계속되었다. 또한, 공정택 교육감의 교육청 전자문서 시스템을 이용한 기도회 홍보 및 참석, 검찰 수사관의 불자 고소인에 대한 기도 강요, 종교편향적 인사와 목사 정치, 김성이, 김하중 등 공직자의 부적절한 종교 언급이 이어진 한 해였다.

2007년 대선 직전 기독교는 ‘장로 대통령’ 만들기에 노골적으로 앞장섰다. 이슬람채권 발행을 위한 ‘수쿠크 법안’을 통과시키지 못하도록 교회의 목사와 장로들이 압력을 넣는 등 경제 문제에도 직접 개입했다.(2010년 12월 7일) 바로 전날 황우여 한나라당 의원은 “모든 대법관이 하나님 앞에 기도하는 이들이길 바란다”며, 국가기관의 기독교화 의지를 노골적으로 드러내 사회적 파문이 일었다.(2010년 12월 6일) 국회의원이 대법원장의 인사에 가이드라인을 정하는 듯한, 그것도 종교차별적인 인사 주문으로 압박한 것이다. 국회의원인지 종교 지도자인지 헷갈릴 정도로 정치를 노골적으로 선교의 도구로 이용하는, 헌법을 상습적으로 위배하는 일부 개신교 정치인들을 보는 시민들은 괴롭고 피곤하다. 투표권이 있는 불자들과 국민의 각성이 필요한 대목이다.

국가사업의 종교적 이용도 우려된다. 그런 점에서 2006년 중앙인사위원회가 공직자 공개채용 시 이력서에서 종교란을 없앤 것은 종교차별을 근원적으로 제거한 진일보라고 할 수 있다. 정장식 전 포항시장(현 중앙공무원교육원장)의 시 예산 1% 성시화운동 사용 계획, 국제협력단(KOICA)의 해외봉사단 선발 시 종교 제한, 국고 지원을 받는 복지시설의 직원 채용 시 종교차별 및 수용자에 특정종교 강요, 송파구의 교회 중심 대학생 멘토링단 모집과 운영, 공기업인 서울메트로의 청소 용역회사 유니폼에 십자가, 수협(장병구 대표)의 “주님의 사랑을 키우는 은행” 광고, 수도권 대중교통 정보시스템 ‘알고가’의 사찰 누락, 종교 시설 투표소 설치, 종교인 소득세 납부 거부 및 국세청의 직무유기, 종교 행사를 이유로 한 국가시험 일요일 배제(성수주일) 입법 추진 등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종교차별 혹은 정교분리 위배 사례들은 우리 사회를 불공정하고 불안하게 만들었다.

국가가 책임져야 할 교육 현장에서도 종교차별 등 기본권 침해가 사라지지 않고 있다. 종교사학의 학생 선발 시 특정종교인을 위한 특별전형, 감독이나 코치의 지시로 운동부 학생 유니폼에 십자가 표시, 종교사학의 예배 강요와 종교교육 필수 부과나 성경 구입 대금 임의 인출 등 종교인권 침해, 국고지원을 받는 어린이집이나 유치원 직원 채용 시 종교 제한과 특정종교 교육, 종교사학(대학 포함)의 특정종교인 교직원 임용, 국·공립학교(서울대, KAIST) 내에 교회, 교육관, 창조관 등 특정종교 공간 설치, 교회를 이용한 입학식이나 졸업식 등 공식 행사, 관리감독 소홀로 인한 학생 인권의 유린과 교육청의 직무유기 등이 바로 그것들이다.
특히 2004년 대광고등학교 학생 강의석 군이 헌법에 보장된 종교의 자유, 즉 ‘예배선택권’을 달라며 1인시위를 했던 사건은 우리 사회에 종교인권의 중요성을 크게 인식시킨 역사적 사건이었다. 2010년 4월 22일 대법원의 최종 판결은 수십 년간 국민의 기본권을 무시해 온 종교사학들의 무지와 횡포에 마침표를 찍고 상식적인 사회로 돌아가자는 국민의 목소리였다.

방송을 비롯한 언론매체나 공공장소 등 공공자산의 종교적인 사적 이용도 문제다. MBC의 13년간(1980~1993) 선교용 비디오 방송, 공영방송에서 특정종교 언어(주일 등) 사용, 방송연예인의 의도적이고 과도한 종교 표현, 공영방송을 통한 국가대표 선수 골 세리머니, 길거리, 지하철, 경찰서, 청사 등 공공장소에서의 기도, 예배, 선교행위 및 종교 문화 행사, 공공시설에 종교 선전 문구 및 종교 상징물 부착(강의실의 십자가, 엘리베이터, 버스정거장, 고속도로 등 옥외광고의 선교문구 등), 옥상 네온사인 광고(불법이었던 교회 십자가 최근 합법화), 천 원짜리 지폐 ‘예수천국 불신지옥’(국가자산 훼손) 등이 대표적인 것들이다.

5) 종교 평화를 위한 제안들

국민의 시민의식은 높아지는 데 반해, 종교계의 변화는 시대의 흐름을 따라가지 못하고 있다. 익숙하던 것을 버리기가 쉽지 않기 때문일 것이다. 성직자나 수행자에 대한 신뢰도도 높지 않다. “대한민국은 종교의 자유가 보장되는 나라다. 이 말은 누구라도 ‘종교’라는 이름만 걸면 그 안에서 무슨 짓을 해도 별로 사회적 제재를 받지 않는다는 말이다.”라는 지적은 종교권력화에 대한 염증을 나타내고 있다.

국민의 사랑을 받는 종교로 살아남으려면 종교의 본질에서 벗어난 부적절한 관행과 위헌적 기득권을 포기하고 다시 시작하는 마음으로 머리를 맞대야 한다. 종교 평화를 위한 몇 가지 방안을 제안해 본다.

첫째, 국민의 입장에서 판단하라. 종교마다 각각 진리 체계가 있고 선·포교의 전략이 있겠지만, 그 전파 방법은 국민의 행복에 초점이 맞춰지고 헌법정신에 충실하도록 조율되어야 한다. 첫 단추를 잘못 끼우면 내내 불편하게 마련이다. 알아차린 순간 국민의 입장에서 바로 끼울 용기가 있어야 한다.

특히 국가 예산이 지원되는 종교 관련 사업에 대한 논란이 심화될 가능성이 커지고 있다. 문화와 종교 사이의 경계선을 국민이 동의할 수 있도록 정하고, 투명한 예산 집행이 보장되도록 감사 기능도 보강해야 한다. 원만한 합의를 이끌어낼 때까지 갈등의 양축인 개신교와 불교는 물론, 직접적 이해관계에서 비켜서 있는 가톨릭, 중립적으로 지켜보는 다수의 무종교인, 경계선에서 중재할 의무가 있는 정부 등 5자 간 대화의 장이 지속적으로 마련되어야 한다. 특히 종교가 없이 완충지대를 형성하고 있는 일반 국민이 절반 가까이 되는 지금이 대타협의 기회일 수 있다. 만일 종교 인구가 계속 증가해 모든 국민이 종교별로 나뉘어 거칠게 싸운다는 가정을 하면 그 흉흉함을 상상하기조차 싫다.

둘째, 종교인권과 관련 있는 헌법조항을 손질할 필요가 있다. 우리나라 헌법은 ‘종교자유’와 ‘정교분리’를 상징적으로만 표현하고 있다는 느낌이 든다. 헌법 제20조를 보자. “1. 모든 국민은 종교의 자유를 가진다. 2. 국교는 인정되지 아니하며, 종교와 정치는 분리된다.” 언뜻 보면 다 말하고 있는 것 같이 보이지만, 자세히 보면 아무것도 말하고 있지 않은 것 같기도 하다. 선언에 그친다는 느낌이 드는 것이다.

일본 헌법 제20조는 어떨까. “1.종교의 자유는 누구에 대해서도 이를 보장한다. 어떠한 종교단체도 국가로부터 특권을 받거나 정치상의 권력을 행사해서는 안 된다. 2.누구든지 종교상의 행위, 축전, 의식 또는 행사에 참가하는 것을 강제 당하지 않는다. 3.국가 및 어떤 국가기관도, 종교교육 기타 어떠한 종교적 활동도 해서는 안 된다.” 두루뭉술한 우리의 헌법보다 일본 헌법은 훨씬 더 구체적이고 분명한 느낌이 들게 한다. 일본이 먼저 서구 종교를 받아들이고 여러 종교가 섞여 있어도 종교적 갈등은 우리보다 훨씬 적다는 사실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

법률도 종교와 관련한 법은 체계적으로 마련되어 있지 못해 종교 갈등을 방치하고 있다. 2년 전 국가공무원법에 ‘공무원의 종교 중립’ 조항을 추가했으나, 처벌조항이 없어 경고에 머무를 가능성이 크다. 특히 ‘장로 대통령’이 버티고 있는 현 정권 아래서는 개신교 고위 공직자들의 종교 행보가 줄어들 것 같지 않다. 그 이유는 종교행위로 인한 사회적 비난이나 불이익보다 그것이 가져다주는 사회·경제적 기대치가 크다고 판단되는 순간 종교 충성을 서슴지 않기 때문이다.

셋째, ‘종교법인법’을 제정하라. 일본강점기의 ‘종교단체법’이 폐지된 후, 다분히 개신교 육성을 목표로 국가가 종교를 간섭하면 안 된다는 명분하에 대체입법이 이루어지지 않은 것이 종교의 권력화를 허용하게 된 비극적인 단초라는 주장에 일리가 있다. 종교 관련 법이 모든 나라에 있는 것은 아니지만, 종교 간 갈등이 첨예하고 종교와 정치가 야합할 위험이 높은 우리나라의 현실을 감안하면 종교법인법의 제정을 긍정적으로 받아들이려는 노력이 필요하다.

넷째, ‘종교평화헌장’을 공포하라. ‘세계 인권 선언’의 제18조(1948년), ‘종교와 사상에 대한 모든 형태의 불관용과 차별 금지에 관한 유엔 선언’(1981년), ‘종교와 사상의 자유에 관한 오슬로 선언’(1999년), ‘유네스코의 문화다양성 선언’(2001년)에서 보듯이, 인류는 종교와 사상의 자유를 위해 부단히 다짐해 오고 있다. 다종교사회인 우리나라에서 꼭 필요한 사회적 약속이다. 종교계, 종교학계, 인권단체 등이 중심이 되어 의견을 수렴, 상호존중의 계기를 마련하는 것이 필요하다.

다섯째, 보편적 종교교육을 강화하라. 국민이 동의한 바 없는 종교사학의 강제 종교교육, 이젠 사라져야 한다. 초·중등, 대학 과정에서 대체과목 실시가 실효성 있게 이루어지도록 하려면 단순한 행정지도만으로는 안 된다. 대법원 판결 이후에도 학교 현장에서 별로 달라진 게 없다는 것은 처벌조항 없는 행정지침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종교사학의 경우 건학이념에 따른 ‘특정종교의 경험과 신앙심 키우는 교육’에 일정 시간 할애하는 정도는 용인해야 하겠지만, 지금처럼 개별 종교단체별로 오로지 자신의 종교만 가르치면 오해와 편협, 나아가 타 종교에 대한 혐오나 폄하 등을 심어줄 위험이 크다. 존중과 이해를 바탕으로 한 종교 간 공존과 평화를 위해 교양교육으로서의 보편적 종교교육을 국·공립학교 포함하여 전면 실시하는 것도 적극 검토해 볼 만하다.

3. 불교, 바로 서야 한다

우리나라가 정치사회적 격변기를 지나오는 동안 종교갈등에 대한 대비는 미흡했다. 이제는 불편한 짐을 내려놓고 처음부터 차분하게 다시 짚어봐야 할 시점이다.

우선 개신교 입장에서 보면, ‘이젠 예전 같지 않다’는 초조감이 공격적인 행동의 원인일 듯싶다. 인권의식이 높아진 일반 국민은 물론, 정신 차린 불교계가 정식 대응하기 시작하면서 개신교의 무례함, 오만과 독선이 노출되고, 개신교 인구는 감소세로 돌아서 불안해졌다. 게다가 ‘장로 대통령’ 임기 내 분위기를 역전시키지 않으면 어려울 것이라는 조바심이 전방위적 공격의 형태로 나타날 수밖에 없는 배경이 아닐까.

한편 불교는 불과 10여 년 전인 1990년대까지만 해도 종단 자체의 내부 문제에 매달려 외부, 특히 기독교의 성장과 독점에 대해 의식하고 대응할 여유가 없었다. 2천 년대 들어와서야 비로소 종단이 어느 정도 안정되고 보니 기독교 과잉 사회를 피부로 느끼기 시작해 위기감을 의식하고 공식 대응하기 시작한 것이다.
지난 10년은 종교인권, 종교권력이 국민의 뇌리에 자리 잡으면서 몇 가지 중요한 사회적 합의도 이끌어 낸 의미 있는 시기였다. 그러나 앞으로 갈 길은 멀다. 종교문제가 그것 자체보다 정치사회적으로 너무 깊게 얽혀 있기 때문이다. 세금을 내는 국민의 입장이 지금보다 더 비판적이 될 것은 당연하다. 특히 교육, 복지, 문화 등 국가가 감당해야 할 사업영역에서 종교계의 참여와 역할 문제로 오히려 더 미묘하고 집요한 논란이 예상된다. 종교세력이 대등한 한국에서 정교분리의 헌법정신은 지속적으로 치열하게 시험대에 오르게 되어 있기 때문이다.

개신교의 공격적인 선교행위에 당당하게 대처하기 위해 불교의 입장 정리와 역할이 그 어느 때보다도 중요해진 이 시점에 불교계에 몇 가지 주문하고 싶다.

첫째, 국민의 입장에 서라. 일반 국민의 시각으로 진실을 터놓고 말해야 한다. 뭔가 숨기는 게 있다는 인상을 주면 신뢰를 잃게 된다. 진실이 드러나서 두려운 쪽은 언제나 놓아야 할 기득권이 많은 쪽인 법이다. 새로운 틀이 버거운 것이다. 그러나 이 말은 불교도 비켜가지 않는 엄중한 국민의 소리라는 점을 명심해야 할 것이다.

둘째, 무종교인들이 차별받고 있다는 점을 부각시켜라. 불교와 개신교의 싸움으로 비치는 한 승산이 없다. 종교가 없다는 이유만으로 차별받고 있다는 사실을 일깨워 주어야 한다. 종교지도자들에게 왜 세금을 면제해주며, 학교, 복지기관, 문화사업 등 국가 예산이 집행되는 공공사업에서 무종교인들이 왜 불이익을 당해야 하는지 스스로 되묻게 해야 한다.

셋째, 민족종교를 껴안고 천주교와 연대하라. 천주교 역시 역사적으로는 정치적 종교 집단이기는 하지만, 1962~65년의 2차 바티칸 공의회를 통해 과학과의 화해, 종교다원성 인정, 토착화 등 유연하게 변화해 왔고, 우리나라의 3대 종교 중 사회적 신뢰도도 제일 높다. 가능한 한 온건한 개신교도들 포함한 상식적인 모든 집단을 극단적인 개신교와 분리시키는 것이 필요하다.

넷째, 정부기관과 공직자의 종교 중립성을 엄중히 요구하라. 상식이 통하지 않으면 법적 제도화까지 요구해야 한다. 그러나 사안에 따라 종단이 직접 나서야 할 일인지를 잘 헤아려야 한다. 국민은 종교 과잉에 피로감을 느끼고 있다. 많은 경우 신도 단체에서 대응하든지, 아니면 종교 관련 시민단체가 나서는 것이 훨씬 더 효과적일 수도 있다. 인권의식과 종교적 균형감각이 있으며, ‘민족문화 창달’을 입으로가 아닌 가슴으로 선서할 수 있는 대통령을 뽑는 것은 국민의 몫이다.

다섯째, 권력과는 거리를 유지하라. 불교의 건강성을 위해서다. 정부와 불필요하게 대립할 이유는 없다. 그러나 권력과 가까운 것은 단기적으로는 득이고 약일 듯싶지만, 장기적으로는 실이고 독이 되기 쉽다. 꿀맛에 취해 뱀이 득시글거리는 구덩이에서 나올 생각을 잊은 어리석음이나 다름없다. 템플스테이 파동에서 기왕 호기롭게 ‘권력으로부터의 탈출’ 방침을 정했으면 소기의 성과를 낼 때까지 뚝심 있게 밀고 나가야 불교인들은 물론 사회적으로도 신뢰를 얻을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까지의 선례로 보아 조계종이 그 긴장을 언제까지 유지할 수 있을지 불안한 것이 사실이다. 떳떳하고 당당한 행보만이 불자들을 단합시키고 불교를 자랑스럽게 만드는 지름길이다.

여섯째, 통 크게 버려야 통 크게 살 수 있다. 익숙한, 그러나 위헌적인 관행은 없는지, 박탈감과 피해의식에만 사로잡혀 있는 것은 아닌지 되돌아 보아야 한다. 스스로를 점검하는 것이 그 어떤 공격보다도 더 효과적일 수 있다. 예를 들면 동국대에서 먼저 교직원 임용 시 수계증을 요구하는 관행을 포기하고 기독교계 사립대학교에도 세례증 요구를 함께 포기하자고 하면 어떨까? 또 부처님오신날 공휴일을 반납하면서 동시에 크리스마스도 공휴일에서 제외하자고 파격적인 제안을 할 수는 없을까. 템플스테이나 역경·역주 사업은 물론, 문화재 관람료나 국립공원 입장료 등 국민 생활과 밀접한 사업들에 대해서 설득력 있는 논리와 투명하고 적절한 집행을 위해 철저하게 점검하지 않으면 역풍에 시달릴 수도 있다.

일곱째, 감동을 주는 불사를 하라. “한국불교에는 감동이 없다.”는 어느 교수의 지적이 가슴 아프다. 지혜와 자비 쌍수를 얘기하지만, 한국불교는 소수 수행자의 지혜에 목을 매고 있다. 그나마 바다 같은 지혜를 얻어 뭇 중생들에게 나눠 줄 가능성은 얼마나 있을까. 사랑받는 종교로 질적인 변화를 이루어야 한다. 불교를 체계 있게 가르치고, 교육받은 다수 불자들의 자비신행으로 국민을 감동시킬 때 불교의 사회적 사명을 다할 뿐 아니라 불교 중흥도 기대할 수 있다. 그나마 최근 조계종의 수행·문화·생명·나눔·평화 등 5대 자정쇄신결사는 불자들뿐 아니라 일반 시민들에게까지 기대감을 주는 행보여서 다행스럽다.

여덟째, 불교의 미래를 책임질 인재 육성에 매진하라. ‘기성세대가 해 준 게 없다’는 불교 활동가들의 불만을 뼈아프게 새겨야 한다. 사회적으로 성공한 불자들을 사적으로, 소모적으로 이용하기만 했지, 불교와 사회를 떠받칠 씨앗을 심고 키워내는 데는 소홀했다. 그 결과 그나마 있던 저력마저 소진해 버려, 불교의 미래가 힘겹게 보인다. 진리나 법은 선각자가 제시하지만, 현실적으로 종교나 종교단체의 부침은 결국 종교인들의 손에 달렸다. 출재가 지도자들은 미래의 불교 인재를 육성하는 데 모든 역량을 기울여 전력투구해 줄 것을 기대한다. ■
 

박광서 / 서강대학교 물리학과 교수. 서울대학교 물리학과 졸업, 미국 브라운대학교에서 박사학위 취득. 미국 MIT 연구원을 역임했으며 불교의 사회참여운동에 적극 나서 (사)우리는선우(재가신행결사단체) 이사장, (사)생명나눔실천회 이사, 참여불교 재가연대 상임대표 등을 거쳐 현재 참여불교 재가연대 공동대표와 종교자유정책연구원 공동대표를 맡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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