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집 | 불교적 가치의 사회적 구현

1. 들어가는 말

‘역사관과 불교’라는 주제의 원고를 청탁받고 다소 망설였다. 역사학의 고유한 연구 영역으로 알려진 ‘역사관’이란 개념을 사회학 전공자인 필자가 다루어야 한다는 부담감 때문이었다. 그럼에도 청탁을 수락한 이유는 두 가지다.

첫째, 이 글이 속한 특집의 대주제가 ‘불교와 사회적 가치’라는 점을 고려할 때 ‘역사관과 불교’라는 필자의 주제 속에는 이미 역사를 보는 관점을 사회적 가치라는 차원에서 논의하라는 주문이 내포되어 있다고 판단되었기 때문이다. 만약 필자의 판단이 정확하다면 역사학에서 논의하는 역사관 즉 통시적 역사관을 논의하기보다는 현대사회에서 공시적 가치를 지닌 역사관을 논의해야 마땅하다. 그리고 탈발전(脫發展)의 시대로 진입한 오늘날 우리가 그 사회적 가치를 비판적으로 검토하지 않을 수 없을 만큼 중요한 역사관은 두말할 나위도 없이 환경위기, 불평등, 소외 등 현대사회의 불치병을 야기한 근대적 역사관과 그 산물인 발전사관이다. 그래서 공시적 의미를 지닌 근대적 역사관을 연구의 대상으로 설정할 경우 ‘근대적 역사관’의 초석을 놓은 콩트(A.Comte), 베버(M.Weber), 뒤르켐(E.Durkheim), 마르크스(K.Marx) 같은 19세기 고전사회학자를 비롯하여 이를 철저히 계승하는 최근의 발전론자들에 이르기까지 대다수 사회학자가 비판적 검토의 대상이 될 수밖에 없다. 이러한 식의 논리 전개를 따라와 보니, 편집진에서 제안한 주제는 사회학자의 본업, 즉 필자의 전공에 정확하게 해당하였다. 결과적으로 탈발전 시대를 염두에 두고 ‘근대적 역사관’의 사회적 가치를 비판적으로 검토한다는 전제하에 원고청탁을 수락한 셈이다.   

둘째, ‘단선적 발전’을 전제하는 ‘근대적 역사관’을 불교와 비교하는 작업에 대한 필자의 인식관심 때문이다. 좀 더 분명하게 말하면 필자는 근대적 역사관에 대한 대안을 불교의 역사관에서 찾는 작업에 학문적 흥미를 갖고 있다. 앞서 언급한 현대사회의 불치병을 고치기 위해서는 인간사회의 발전을 단선적 발전 혹은 진보로 전제하기보다는 성주괴공의 반복 혹은 흥망성쇠의 과정으로 보는 불교적 역사관이 필요하다는 것이 필자의 판단이다. 물론 저명한 사회학자이자 문명사가인 소로킨(P. Sorokin)이 이미 사회변동을 흥망성쇠의 과정으로 해석한 바 있지만, 소로킨의 주장마저도 불교사상이나 불교적 시간관(역사관)과도 무관하지 않다고 판단된다. 실제로 소로킨은 흥망성쇠론의 관점에 입각하여 20세기의 감성문화가 한계에 다다르면 21세기 인류문명은 그 정반대의 이성문화를 지향할 수밖에 없는데 그 정점에 불교가 있다고 주장한 바 있다. 이는 소로킨이 불교를 잘 이해하고 있었음을 암시하기도 하지만 불교가 21세기 대안문명을 이끌어 갈 사상임을 전망한 것이기도 하다. 그러나 발전의 시대를 살다간 소로킨과는 달리 탈발전의 시대로 접어든 우리에게는 전망이 아니라 대안에 대한 실증과 그 실증에 기초한 또 다른 실천이 필요하다. 이는 이 글의 실천적 문제의식이자 청탁을 수락한 보다 본질적 이유이다.     

이 글은 이상의 두 가지 인식관심에서 출발한다. 그러나 이 두 가지는 상호 내적 연관성을 지닌 하나의 가설로 통합할 수 있다. 가설은 이렇다 근대적 역사관은 인간사회를 파국으로 몰고 가는 근원적인 한계를 내포하고 있는 반면에 불교적 역사관은 그러한 한계로부터 빠져나올 수 있는 가능성을 지니고 있다.       

이 글의 목적은 이 가설을 검증하는 데 있다. 그런데 이 글의 가설이 탈발전의 시대를 맞아 근대적 발전론의 한계라는 맥락에서 불교의 역사관에 주목하는 것이기 때문에, 이 가설을 검증하기 위해서는 최소한 연속적인 세 단계의 작업이 불가피하다. 첫 번째 단계로는 탈발전의 입장에서 기존의 발전 이론을 비판적으로 검토하고 그 한계가 선형적 역사관과 무관하지 않음을 밝힐 것이다. 두 번째 단계는 근대적 역사관과 그 사회적 가치를 논의하는 단계로서 ‘근대적 역사관이 어디에서 유래하여 어떻게 근대적 발전 개념으로 귀결되었는지 그리고 그 결과가 경험적인 차원에서 어떤 한계를 가지는가?’를 밝혀 볼 것이다. 세 번째 단계는 불교의 역사관과 그 사회적 가치를 논의하는 단계로서, 이 과정을 통하여 우리는 ‘불교적 역사관이 서구 근대적 발전 개념의 한계를 극복하는 데 어느 정도 기여하고 나아가 현대사회 문제를 해결하는 데 어느 정도 기여할 수 있을 것인가?’를 가늠해 보고자 한다.  

2. 기존의 발전이론에 대한 비판적 검토  

근대 이후 사회발전에 관한 논의는 주로 사회학자들에 의해 주도되어 왔다. 그런데 사회학은 유럽사회가 ‘전통’에서 ‘근대성’으로 전환되는 역사적 도정에서 탄생했다. 이러한 역사적 배경은 ‘전통에서 근대로의 변화’라는 19세기 사회학의 독특한 인식관심을 형성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다. 그리고 20세기 산업 체제가 공고화되면서 사회의 균형과 통합을 강조하는 기능주의적 시각이 맹위를 떨치게 되었고 서구 근대의 발전관은 오히려 강화되었다. 파슨스(T. Parsons)의 구조기능주의와 그 후학들의 발전론은 그 대표적인 이론적 성과였다. 

그러나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20세기 중반 이후 식민지 상태에 있던 비서구 사회들이 독립국가를 형성하면서 비서구 사회의 발전 문제가 제기되기 시작하였다. 물론 비서구 사회의 발전 문제를 보는 주류의 시각은 여전히 진화론적 진보관과 기능주의적 발전관의 유산을 그대로 물려받은 근대화론이었다. 2차 세계대전 직후 미국의 투르먼 대통령이 비서구 지역을 ‘저발전 지역’을 명명함으로써 비서구 지역은 후진국이자 미개한 문명권으로 낙인찍은 것은 그러한 진보사관의 자연스러운 산물이다. 게다가 근대화론의 발전관은 인간의 창의성, 성취동기 그리고 신념체계나 가치체계(종교윤리)와 자본주의적 발전의 문제를 연관시켜 논의하거나 사회구조적 조건과 자본주의 발전의 관련성을 논의해 왔다. 그럼으로써 그러한 특성을 갖고 있지 못한 것으로 간주된 비서구사회의 전통문화나 그러한 문화에 익숙한 인간형이나 그들의 사회구조를 발전의 장애물로 간주하도록 은연중에 강요하는 효과를 지니고 있었다.

이러한 주류 발전이론은 1970년대 후반 등장하기 시작한 종속이론에 의해 심각한 도전을 받게 된다. 남미의 지역주의와 네오마르크스주의를 기반으로 하는 종속이론은 제삼세계의 발전 문제를 ‘전통에서 근대로의 진화’가 아닌 중심−주변부 모형으로 설명할 뿐만 아니라 저발전의 원인을 내적 요인(internal factors)이 아닌 외적 요인(external factors)에서 찾음으로써 진화론에 입각한 근대화론을 전면적으로 부정하였다. 이는 단선적 진화로서 발전 개념이 그 설득력을 상실하였음을 의미했다. 나아가 종속이론은 제삼세계의 경우 서구의 발전 경험이나 경로와는 다른 새로운 발전 전략이 필요함을 역설함으로써 새로운 발전 개념의 모색을 촉발하는 계기를 마련해 주었다. 이러한 정당한 문제 제기에도 불구하고 종속이론은 이론 내적 한계, 즉 동어반복, 발전의 의미의 혼란, 정책적·실천적 효과의 부족, 착취 대상의 혼란 등으로 인하여 더 이상 설득력 있는 대안적 발전이론을 지속적으로 생산해내지 못하고 말았다.

근대화론과 종속이론의 설득력 상실은 특정한 사회의 발전 문제를 단선적 진화론이나 단일한 인과론에 입각한 경제발전론만으로는 더 이상 설득력 있는 설명을 제공할 수 없음을 의미한다. 뒤집어서 말하면 이제 발전은 세계 체제 속의 각 국가나 처한 다양한 위상 및 조건과 각 사회 내부의 다양한 요인에 의해 설명되지 않을 수 없음을 의미한다. 게다가 1980년대 후반에 접어들면서 이른바 제2 세계가 붕괴하면서 마르크스주의의 입지마저도 매우 줄어들었다. 바로 이즈음 이른바 ‘네 마리 용’으로 불리는 국가들이 비약적인 경제발전을 이룩하였고 그러한 맥락 속에서 등장한 발전이론이 이른바 ‘아시아적 가치론’ 혹은 ‘아시아적 경제발전 모델’이다.  

‘아시아적 가치(Asian value)’라는 개념은 말 그대로 ‘아시아’ 문화권이 간직하고 있는 ‘가치의 체계’를 말한다. 그러나 여기에서 ‘아시아’란 아시아대륙 전체를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주로 유교문화권 국가를 의미하기 때문에, 아시아적 가치란 유교적 가치체계를 말한다. 아시아적 가치란 개념이 유교자본주의와 혼용되어 사용되는 것도 이러한 이유 때문이다. 그리고 유교적 가치가 주목의 대상이 된 것은 이 문화권 국가들이 비약적인 경제발전을 이룩하였다는 사실과 관련되어 있기 때문인데, 그렇다면 아시아적 가치는 한마디로 유교가 자본주의적 발전과 친화성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함의하고 있다.

물론 유교적 가치 중에서도 정실주의, 연고주의, 권위주의 등과 같은 부정적 가치가 아니라 국민의 높은 성취의욕과 노동윤리, 교육열, 공동체 의식, 위민사상과 민본주의, 그리고 경제개발에서 국가의 선도적인 역할 등이 아시아의 경제발전을 설명하기 위한 아시아적 가치이다. 이렇듯 아시아적 가치는 아시아의 경제발전을 설명하기 위해 선택되고 조작적으로 정의된 가치이다. 그렇기 때문에, 1997년 아시아가 경제위기에 처하자 아시아적 가치는 더 이상 설득력을 잃었고 오히려 유교적 가치들 가운데 부정적인 가치들이 부각되는 것을 지켜봐야만 했다.

요컨대 아시아적 가치론이란 지난 30년간 동아시아가 경험한 경이적인 경제발전의 근본요인을 아시아적 가치(좀 더 정확하게는 유교적 가치)에서 찾는 이론으로 주로 국가주도형 경제발전 모델이 여기에 속한다.
그러나 혹은 바로 그렇기 때문에 아시아적 가치론도 ‘국가주도의 근대화론’이라는 또 다른 근대화론에 불과하며, 그러한 점에서 근대화론이 지닌 한계를 그대로 간직하고 있다. 특히 기존의 발전이론은 관심의 초점을 경제의 발전에 둠으로써 경제발전의 결과, 그중에서도 특히 어두운 그림자에 대해서는 거의 주목하지 않았다.

탈발전의 시대는 바로 이 어둠에 초점을 맞추지 않을 수 없는 시대다. 이제 우리는 ‘누구를 위한 발전이며 무엇을 위한 진보인가?’라는 반성적 질문을 하지 않을 수 없다. 

3. 근대적 역사관과 그 사회적 가치

1) 근대적 역사관의 결정판으로서 발전사관

앞 장에서 우리는 기존의 진보이론이 오로지 경제발전에만 관심을 쏟고 있을 뿐 그 부정적인 그림자에 대해서는 거의 주목하지 않았다고 비판한 바 있으며, 그 가장 근본적인 원인이 단선적 진화론이나 단일한 인과론에 있음을 언급하였다. 그러나 그 근저에는 더 근원적인 원인 즉 선형적 시간관(및 역사관)이 놓여 있으며 그러한 점에서 발전론은 결국 역사를 보는 관점과 결코 무관하지 않다.

그렇다면 단선적 진화론이나 단일한 인과론의 기저에 깔린 선형적 시간관은 어디에서 유래하는가? 두말할 나위도 없이 기독교적 시간관이다. 신약성서에 따르면 시간은 순간의 연속이며 그 지속성을 가장 잘 설명하는 것이 선(線)이다. 그 때문에 기독교적 시간관은 통상 선형적 시간관으로 불린다.

이러한 기독교적 시간관에 따르면 과거와 현재는 항상 미래의 가능성을 약속한다. 이렇듯 시간은 엄청난 잠재력의 원천이기 때문에 기독교인들은 굳이 시간을 벗어날 필요가 없다. 그렇다 하더라도 이는 모든 사건들이 시간에 의해서 저절로 주어지는 것을 의미하는 것은 결코 아니다. 오히려 인간의 세속적 행위야말로 시간으로 하여금 그 중요성과 그 방향성을 갖도록 만들어 준다.

기원전(B.C)과 기원후(A.D) 혹은 서기(西紀)가 예수의 탄생으로 인해 각각 그 자신의 방향성을 갖게 되는 것도 이러한 이치와 동일 선상에서 이해된다. 그리고 기독교인들에게 예수의 구원 사건이란 역사적 사실은 시간에 가치를 부여해 주었을 뿐만 아니라 시간을 벗어나려는 그 어떤 노력도 배제함을 의미한다. 기독교인에게 역사는 예수의 도래와 함께 하나님의 시간표대로 흐르는 시간의 지속적 발전에 다름 아니다. 여기에는 하나님의 시간 밖의 어떤 다른 세계는 물론 신화조차도 개입될 여지가 없다.

이러한 선형적 시간관이 그리스 철인들의 시간관과 함께 서유럽 사상사에 깊은 영향을 미쳤다. 이는 19세기 사회학자들이 사회의 무한한 진화(분화를 통한 발전)를 가정하는 근대적 역사관 및 발전 사관을 갖게 된 문명사적 배경이기도 하다. 물론 그 이후의 발전 개념도 이러한 시간관 및 역사관을 고수하고 있었음을 두말할 나위가 없다. 그 대표적인 예로서 발전 개념의 발달 과정을 보자.   

원래 발전의 원어인 development는 한 물체나 유기체의 잠재력이 발산되어 종국적으로 난숙한 형태에 도달하는 과정을 의미했고, 그러한 점에서 식물이나 동물의 자연스러운 생장 즉 생명체가 자신의 염색체에 따라 성장해 나가는 과정을 가리키는 말로 사용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생물학적 발전 개념은 서구 근대를 특징짓는 계몽주의 시대를 거쳐 과학사상이나 사회진화론의 영향을 받으면서 사회적 영역에도 적용되기 시작하였다.

더 나아가 19세기에 이르면 발전 개념은 재귀동사로 사용되기 시작하면서 자기발전의 개념이 유행하기 시작한다. 이러한 변화는 한편으로는 인간사회의 발전은 마치 자연법칙과 같이 필연적으로 전개되는 역사적 과정을 겪는 것으로 간주되었음을 의미한다.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사람이 하늘의 섭리로부터 해방되어 주체로 설정되었음을 의미한다. 근대인에 의한 ‘계급투쟁의 역사’가 시작된 것이다.

이러한 19세기 발전 개념은 고전사회학자들이 사회를 발견한 계기이자 발전사관과 진화론적 인식 틀에 입각하여 사회변동, 즉 역사를 이해하는 지성사적 맥락이었다. 사회학의 경우 콩트(A. Comte)의 3단계설과 스펜서(H. Spencer)의 ‘군사형 사회에서 산업형 사회로의 진화’를 필두로 에밀 뒤르켐(E. Durkheim)의 ‘기계적 연대에서 유기적 연대’, 베버의 탈주술화=합리화 개념, 마르크스의 발전단계설, 퇴니스(F. Tönnies)의 ‘공동사회에서 이익사회로의 변화’ 등에 이르기까지, 거의 모든 고전이론가가 ‘전근대사회에서 근대사회로의 진화’라는 진화론적 시각을 별다른 의문 없이 공유하고 있었다. 그리고 이러한 인식 틀은 서구의 제국주의적 팽창과 함께 비서구사회의 지식인들에게도 적지 않은 영향을 미쳤다. 설상가상으로 서구와 비서구를 막론하고 당시 지식인들 대부분이 이러한 발전의 방향을 역사발전의 보편적인 길로 간주하기에 이르렀다.     

이러한 발전 개념은 20세기 중반을 거치면서 문명사적 의미를 내포하기 시작한다. 그 역사적 계기는 1949년 1월 20일 미 대통령 투르먼이 ‘저발전 지역’을 명명하면서 시작되었다. 이는 20세기 중반 이후부터 발전 개념에 또 다른 의미 즉 ‘몽매한 것’에서 ‘깨어난 것’으로, ‘단순한 것’에서 ‘복잡한 것’으로, ‘열등한 것’에서 ‘우월한 것’으로, ‘나쁜 것’에서 ‘좋은 것’으로의 변화를 함의하기 시작하였다.

그렇다면 이러한 변화 즉 발전은 어떻게 가능한가? 유일한 정답은 경제발전이다. 그런데 문제는 경제발전의 척도가 GNP, 즉 국민총생산이었을 뿐만 아니라 여기에서 생산은 시장을 전제로 한 상품생산이었다는 점이다. 그렇기 때문에 한 사회의 경제발전을 위해서는 경제외적 요소가 철저히 제거되어야 할 뿐만 아니라 국가의 개입조차도 최소화되어야 한다. 그리고 그럴 때 경제발전 혹은 발전은 무한히 지속될 수 있다. 심지어 자연은 전근대인에게는 거친 환경이자 제약조건이었지만 최신 과학기술을 활용하면서 살아가는 현대인에게는 오히려 문명의 이기를 가능하게 하는 무궁무진한(?) ‘자원’일 뿐이다.

그렇기 때문에 현대인들은 과학기술만 끊임없이 발전시키면 인류문명의 무한한 진보는 보장되는 것으로 인식한다. 게다가, 여기에 전지전능한 하나님께서 자신을 닮은 인간으로 하여금 이러한 발전의 특권을 향유하도록 보증하고 있다는 성경적 지지가 수반되는 순간, 근대인이 이 땅에 유토피아를 건설할 수도 있다는 확신을 갖게 되는 것은 어쩌면 당연하다. 이러한 과정을 거치면서 근대적 발전 개념은 완성되었고 그것이 바로 발전의 시대와 상응하는 근대적 역사관이다. 그렇다면 이러한 근대적 역사관은 오늘날과 같은 탈발전의 시대에는 과연 어떠한 사회적 가치(?)를 갖고 있는 것일까?

2) 근대적 역사관의 사회적 가치(?)

인간은 누구나 기본적인 의식주를 해결해야 할 뿐만 아니라 안정의 욕구를 충족시키고자 한다. 그리고 이를 위해서는 식량과 에너지와 같은 이른바 생활필수품을 생산해야 한다. 모든 인간은 태어나서 성인으로 성장해야 할 뿐만 아니라 그 과정에서 죽음에 이르기까지 생명을 유지해 나가야 하기 때문이다.

문제는 오늘날의 생산 활동을 이렇듯 소박한 차원에서 논의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생산 자체가 이미 상품생산이기 때문이다. 자본주의적 원리로 말미암아 끝없이 점점 더 많은 생산물을 생산해야 할 뿐만 아니라 근대적 발전관을 유지하는 한 그러한 생산 경쟁을 막을 방법은 없다. 오히려 찬양 일변도만 존재한다.

그러나 이제 이 일변도가 막다른 골목에 다다랐다. 근대적 역사관에 입각한 자본주의적 발전이 인류의 근간을 위협하는 본질적인 위기를 야기하고 있기 때문이다.

첫째, 근대적 역사관은 환경위기를 야기한다. 세계적인 환경운동가인 러미스(C. Douglas Lummis)가 ‘제로성장을 환영한다’고 주장하고 있는데, 이는 경제성장과 환경보전은 반비례관계에 놓여 있기 때문이다. 실제로 자본주의에 의해 생산된 욕망과 그 새롭게 생성된 욕망을 충족시키기 위한 생산의 순환, 잉여가치의 창출을 위한 지속적인 생산과 그 생산의 지속을 담보해 주는 소비, 그리고 욕망의 순환이야말로 오늘날 경제성장의 원동력이자 환경파괴의 원흉이다.

둘째, 근대적 역사관은 사회 불평등을 심화시키고 있다. 오늘날 사회 불평등은 크게 두 가지 차원에서 심각한 문제를 야기하고 있다. 그 하나는 남북 사이의 불평등이고 다른 하나는 남북 모두에서의 국내 불평등이다. 산업화 이후 지금까지의 사회발전 모델은 백인−남성−청장년−정상인 중심 모델이었고, 특정한 사회의 가치도 이들에게 유리하게 구성되었다. 그 결과 이 모델에서 배제된 자들, 곧 외국인을 비롯한 소수자, 여성, 노인과 어린이, 그리고 장애인은 상대적으로 불평등을 겪고 있다.

셋째, 그럼에도 소유권과 통제권이 결합함에 따라 경제활동의 자유와 팽창을 억제할 수 있는 국가는 점점 더 야경국가로 전락하고 있을 뿐이다. 게다가 세계화 이후에는 자본과 정보가 자유롭게 국경을 넘나들고 있음에도, 국민국가는 이를 더 이상 통제할 수 없다.

영국의 저명한 여성 정치경제학자인 스트레인지(S.Strange)는 이를 일러 ‘국가의 퇴각’이라 명명한 바 있다. 설상가상으로, 교토의정서가 미국 기업들을 포함한 자본의 경제적 이해관계 때문에 사문화된 사례에서 똑똑히 볼 수 있듯이, 지구적 차원의 거버넌스도 존재하지 않음은 두말할 나위도 없다.

그 결과, 이제 점점 더 많은 사람들은 발전의 가치를 다시 묻는다. 무엇보다도 무엇을 위한 발전인지 묻고 있다. 발전 하면 곧바로 경제발전이 떠오를 정도로 발전, 빈곤, 진보 등의 문제를 모두 경제적 차원으로 환원하여 이해하는 것이 다양한 문화를 파괴하고 나아가서는 인간 자신마저 소외시키는 등 우리를 행복하게 하지 않기 때문이다. 또한 탈발전의 가치를 추구하는 우리는 누구를 위한 발전인지도 묻지 않을 수 없다. 자본주의적 발전이 궁극적으로는 자본가나 부자와 같은 지배계층을 위한 발전으로 귀착됨으로써 국내적 불평등은 물론 지구적 불평등을 가중시키고 있을 뿐만 아니라 설상가상으로 자본주의적 발전의 비용은 모두 제삼세계의 저발전 국가로 떠넘겨지고 있기 때문이다.

근대적 역사관을 유지하는 한 이러한 문제 제기에 만족할 만한 대답을 하기란 낙타가 바늘구멍에 들어가기만큼이나 어렵다. 이런 상황에서 대안(Alternative)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는 것은 당연하고 자연스럽다. 탈발전의 시대가 개막하기 시작한 이유다.

문제는 대안 부재다. 일찍이 마르크스를 비롯한 많은 사람들이 이러한 위기의 일차적 원인을 자본주의적 사회관계에서 찾고 그 사회주의적 대안을 제시한 바 있지만, 현실 사회주의권의 붕괴가 상징하듯이 이 대안은 설득력을 상실한 지 오래다. 게다가 자본주의든 사회주의든 모두 근대적 역사관이라는 공통점을 지니고 있다. 자본주의적 발전론자는 물론 마르크스조차도 바로 이러한 근대적 역사관에 사로잡혀 있었기 때문에 경제적 생산이나 생산력의 발전이 가져올 발전적 측면만 부각시켰을 뿐 그 파괴적인 효과에 대해서는 거의 관심을 두지 않았다. 이 글에서 우리가 근대적 역사관과는 다른 ‘또 하나의’ 역사관, 즉 불교적 역사관에 주목하려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4. 불교의 역사관, 그 사회적 가치는 무엇인가?

1) 순환론적 시간관과 불교의 역사관

근대적 시간 개념이 도입되기 이전 인도인들은 인간과 사회의 역사가 시간과 업(행위)의 지배를 받는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이른바 하나님의 시간표로 인식되는 서양의 절대적 시간관과는 반대로, 시간은 업과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다고 생각했고 그렇기 때문에 시간과 역사조차도 업의 법칙에 지배를 받는다고 생각했다. 기독교의 선형적 시간관과 대비되는 순환적 시간관이 탄생한 이유다.

물론 시간을 자연의 변화와 연관시켜 이해하는 중국인의 시간관이나 시간의 존재를 사건의 발생과 연관시켜 이해하는(그래서 미래는 존재하지 않는 것으로 간주하고 과거를 매우 중시하는) 아프리카 수단 사람들의 시간관도 순환적 성격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업(카르마)의 법칙으로 알려진 ‘보편적 인과율’은 우주 속의 모든 관계를 설명하는 것이며, 여기에는 인격적 요인과 비인격적 요인의 결합도 포함된다. 따라서 카르마의 주체는 개인이 아니다. 근대 서구사회에서는 특정한 개인들을 주체 혹은 역사의 주체로 간주하는 반면에, 인도에서는 환상적인 에고(illusory Ego)가 카르마의 주체를 형성할 수 없다. 오히려 카르마는 시간과 밀접하게 결부되어 있다. 오직 열반에 도달한 사람만이 그의 업(카르마)으로부터 해방될 수는 있지만 그 경우에도 전체의 카르마 그 자체는 지속된다.

카르마와 시간의 관계는 두 가지이다. 첫째, 시간의 존재 이유는 바로 카르마의 존재에 달려 있다. 카르마가 세상에 존재하는 한, 시간은 불가피하다. 이렇듯 카르마는 시간의 본질, 즉 시간에 실제적 의미를 제공하는 본질이다. 둘째, 동시에 시간이 없다면 카르마는 실현될 수 없고 잠재 상태로 남아 있게 될 것이다. 다시 말하면 시간의 공조가 없다면, 카르마도 윤회의 과정을 따라 움직일 수 없을 것이다. 이는 시간과 카르마가 상호 불가분의 관계를 갖고 있음을 의미할 뿐만 아니라 시간이 카르마의 윤회에 따라 순환하는 것임을 의미한다.

만약 그렇다면 과거는 현재 속에 통합된다. 과거가 사라지지 않고 살아서 현재와 통합되는 것이라고 인식할 때, 과거의 사건이나 신화는 오늘의 삶에 실재로 반복된다. 신화가 역사가 되는 이유이다. 실제로, 서구적 역사관에서 생각하면 황당하기 짝이 없겠지만, 인도에는 역사와 신화를 구분하는 기준도 없다고 한다. 신화학자인 조르주 뒤메질(Georges Dumézil)은 인도에 있어서는 신화야말로 근대 서구적 의미의 역사의 위상을 점하고 있다고 주장한다. 다시 말하면 서구인이 서구에서 역사라고 간주되는 것이 인도인에게는 신화로 경험되는 반면, 인도에서 인도인들이 역사라고 부르는 것이 서구인들에게는 신화로 경험된다. 이렇게 볼 때, 인도인의 마음에 큰 비중을 차지하는 것은 역사가 아니다. 그 사람의 역사적 의식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정확히 신화적인 것이다.

이러한 역사의식은 불교의 역사관과도 밀접하게 결부된다. 무엇보다도 시간관의 측면에서 보면, 윤회의 개념이 시사하듯이 불교의 시간관 속에도 순환적 시간관과 그것을 규정하는 인과응보라는 업의 법칙이 잘 녹아들어 있다. 그리고 윤회의 세계를 고해의 바다에 비유한 데서 잘 알 수 있듯이, 이러한 윤회로부터 벗어나는 것이 불교의 궁극적 목적 곧 열반이다. 그리고 혹은 그렇기 때문에 업의 법칙으로부터 벗어나는 유일한 길은 열반에 도달하는 길밖에 없는바, 바로 여기에서 수행과 선행의 축적이란 윤리가 요청된다. 이는 선악의 이항대립 구조를 형성하는 불교신화로 나타나기도 하는데, 그것이 곧 불교적 의미의 역사이다.

이러한 불교적 역사관이 가장 잘 나타나 있는 전형적인 역사서가 바로 불교국가인 고려시대의 출가수행자인 일연 스님이 쓴 한국의 대표적인 역사서 《삼국유사》이다. 물론 지금까지 《삼국유사》의 역사관에 대한 연구 성과는 많이 축적되어 왔고 그 과정에서 많은 논란이 제기되어 왔다. 그러나 스리랑카의 불교역사서인 《마하완사》와 《삼국유사》에 나타난 신화를 비교함으로써 《삼국유사》에 나타난 불교의 역사관을 잘 드러내고 있는 다음의 연구야말로 이 글의 취지와 정확하게 부합한다.

《마하완사》에는 불교 내의 이질적 요소의 축출과 승가 정화사업, 타밀과의 싸움 등이, 《삼국유사》에는 불교와 무교의 주도권 싸움, 삼국 간의 투쟁 등이 주요 내용을 이루고 있다. 악은 《마하완사》에서는 약카(Yakkha) 등으로 《삼국유사》에서는 독룡 등으로 상징되고 악의 극복은 《마하완사》에서는 부처의 이적(異蹟)으로 《삼국유사》에서는 불교의 삼보로 이루어지며 선을 보호하는 자로는 각각 나가와 용이 그 역할을 하니 모두 동일한 성격을 지닌 존재가 문화권에 따라 달리 표현된 것일 뿐이다. 이러한 불교적 역사관은 현재를 과거, 미래와 연결시키는 확고한 종교적 진보 개념에서 설정된 것이다. 그들은 이 세계가 ‘태초의 시작→난관→영웅의 도래’ 3단계 플롯으로 구성되어 있다는 신화적 신념을 현실 역사 속에서 구체화했다. 이는 초기불교의 정법→상법→말법의 현실적 시간 개념이 ‘전륜성왕의 도래’라는 이상적인 시간 개념으로 전환된 것이다. ……이러한 구조 안에서 특정한 역사적 연대는 신화 속에 나타난 영웅의 시간과 관련하여 형성된다. 《마하완사》에서는…… 《삼국유사》에 진흥왕을 아소카와 동시대로 놓고 그로부터 사신(私信)을 받는다거나, 부처 사후 100년 만에 아소카가 재위에 올랐다거나, 원종흥법(原宗興法) 시기를 눌지왕 때로부터 100년이 된다고 하는 따위도 바로 이러한 영웅과의 시간 일치 작업의 일환이다. ……이러한 것은 시간은 영웅을 중심으로만 전개되고 그 원초적 시간으로 회귀하는 행위만이 역사적 의미를 지닌다는 영웅신화의 전형적 표현이다.

—이광수 《인도사에서 종교와 역사만들기》(2006; 88-90)  

이 인용문에 나타난 것처럼, 이광수는 《삼국유사》를 불교적 역사관에 입각하여 해석함으로써 한편으로는 순수 역사학적 시각에서 《삼국유사》를 ‘비합리주의를 정면으로 표방하고 나선 역사서’라고 규정한 이기백의 주장을 수정하는 학문적 의의를 지니게 되었을 뿐만 아니라 다른 한편으로는 신화가 어떻게 역사가 되는지를 잘 보여주고 있다.

이상으로 우리는 불교의 순환적 시간관과 선악의 이항대립 구조에 바탕을 둔 불교적 신화를 역사화하는 불교적 역사관을 살펴보았다. 그렇다면 이러한 불교적 역사관은 탈발전의 시대에 어떠한 사회적 가치를 갖는가?

2) 불교적 역사관의 사회적 가치

앞에서 우리는 불교의 시간관은 업을 매개로 한 순환적 특성을 지니고 있다는 점뿐만 아니라 역사보다는 신화가 더 생생한 역사의 위치를 점하고 있다는 사실도 알 수 있었다. 그렇다면 혹은 그렇기 때문에 불교적 역사관이 가지는 사회적 가치를 논의하기 위해서는 그 구성요소의 결합이 지니는 사회적 가치를 논의할 수밖에 없다.

무엇보다도 시간의 순환성이란 점에서 보면 현재까지 지속되어 온 발전의 시대는 탈발전의 시대로 넘어갈 수밖에 없다. 또한 서구적 의미의 역사보다는 신화가 더 생생한 역사적 의미가 있다는 사실, 즉 도덕의 선악이란 이항대립 구조로 구조화된 신화가 정치권력의 흥망과 결부될 때 신화는 문자화된 역사가 아니라 생생히 살아 있는 역사가 된다는 사실을 고려해 보자. 그리고 오늘날의 발전이 경제발전(혹은 자본주의 발전)이며 앞 장에서 언급한 바와 같은 위기를 내포하고 있기 때문에 지금까지의 인식과는 달리 더 이상 선(善)이 아니라 악(惡)이라고 판단된다면, 이러한 발전이 더 이상 흥성하기보다는 쇠망해져야 할 것이다. 다시 말하면 불교적 선악이란 이항대립으로 구조화된 신화가 탈발전의 시대에 역사가 되는 순간(그런데 이는 순환적 시간성의 자연스러운 귀결이다), 기존의 자본주의적 발전 경로는 더 이상 선이 아니라 악으로 인식되어 억제의 대상으로 전락할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이는 발상의 전환을 의미하며, 그러한 점에서 탈발전의 시대에 주목을 요한다. 탈발전의 시대에는 자연과 인간의 공존이나 불평등이 없는 공동체와 같은 가치가 선으로 부상할 가능성이 높아지고 있기 때문이다. 결국 탈발전의 시대에는 불교적 역사관이 매우 큰 사회적 가치를 가질 것이며 더불어 불교의 실천적 요구도 점점 증가할 것이다.   

또한 불교적 역사관에 따라 순환적인 시간관과 반복적인 역사인 신화를 중시할 때, 인간의 삶의 궁극적 의미는 반시간적(反時間的) 혹은 초시간적(超時間的)이고 어떤 의미에서는 비역사적(非歷史的)인 것으로 간주된다. 여기에서는 시간적 집착보다는 역사적 가치의 초탈과 포기가 더 강조될 것이다. 그러나 시간의 순환성과 역사의 반복성은 시간이 무한하거나 역사가 무제한적임을 의미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 반대다. 순환성은 시간의 임시성, 존재론적 한계성을 상징할 뿐만 아니라 역사의 한계성과 사건의 임시성을 상징한다. 때문에 우리는 앞으로 향해 있는 미래를 행해 달리는 것이 아니라 그 굴레(윤회의 서클)로부터 벗어남으로써 시간의 지배에서 벗어나야 한다.

그렇다면 이러한 시간관은 또한 어떤 실천적 함의를 지니는가? 무엇보다도 이러한 불교적 시간관에 따르면 물리적 시간은 물리적 시간 밖의 어떤 세계와 공존하며, 따라서 업의 작주인 인간이 고해의 바다로 알려진 소외의 시간을 벗어나기 위해서는 수행을 통해 열반의 세계, 즉 대자유의 세계이자 고통이 소멸된 행복의 나라로 가야 한다. 이는 물리적 시간을 수단으로 간주하고 그 수단과는 다른 차원의 또 다른 목적이 존재함을 의미한다. 그렇기 때문에 이러한 시간관은, 시간의 노예가 되어 시간의 명령대로 살아가고 있을 뿐만 아니라 물질문명의 소외를 겪으면서 살아가는 발전 시대의 아이들에게, 수단과 목적의 전도, 즉 소외를 극복할 수 있는 주체적 가능성을 제공해 준다.  

요컨대 탈발전의 시대에는 불교적 역사관과 시간관이 오히려 인류사회의 위기를 극복할 수 있는 사회적 가치, 즉 자연환경을 살리는 생태적 가치(혹은 생존의 가치), 공동체적 가치인 공존의 가치, 그리고 소외를 극복할 수 있는 자존의 가치를 제공해 줄 것이다.
 
5. 나오는 말
 
오늘날 자본주의 사회에서 살아가는 현대인은 모두 장돌뱅이다. 그런 장돌뱅이들이, 특히 서구의 장돌뱅이들이 요즈음 참선에 관심을 갖기 시작한다. 그렇다면 왜 새삼 장돌뱅이는 시장을 벗어나 시장 밖에 있는 법당을 찾는가? “마지막 나무를 쓰러뜨리고 마지막 물고기를 잡고 강을 모조리 더럽힌 다음에야 비로소 그는 돈을 먹을 수가 없음을 깨닫는다.”라는 어느 아메리칸인디언의 말처럼, 인간은 결코 돈만으로는 살 수 없기 때문이다.

돈이면 뭐든지 할 수 있다고 생각하며 돈을 버는 것을 인생의 유일한 목표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서구 근대’라는 시공간의 좌표축 위에서 살아가는 발전시대의 아이들이라면, 아메리칸인디언은 그 시간을 벗어난 사람이다. 그리고 그러한 점에서 아메리칸인디언의 역사관은 불교적 역사관과 유사하며, 인디언의 삶이나 불교인의 삶은 탈발전의 시대와 더 친화력을 갖는다.

탈발전의 시대에 진입한 오늘날, 생존의 가치, 공존의 가치, 그리고 자존의 가치를 함축한 불교적 역사관에 따른 삶만이 현대사회의 위기를 극복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일 수밖에 없다는 경험적 증거가 점점 늘어나고 있는 반면에 그것을 부정하는 사람은 점점 더 줄어들고 있고 심지어는 문화지체자로 조롱당한다. 따라서 시간이 흐를수록 이 글의 가설을 입증하는 증거는 점점 더 풍부해질 것이다. ■

 

유승무 / 중앙승가대 포교사회학과 교수. 한양대학교 사회학과 졸업, 한국정신문화연구원 한국학대학원 석사, 한양대학교 대학원 박사학위 취득. 중앙승가대학교 사회복지학과 교수를 역임하였으며 현재 불교사회과학연구소 소장으로 재임 중. 저서로 《불교복지, 행복을 만나다》(공저), 《유교적 사회질서와 문화, 민주주의》(공저) 등과, 〈불교사회학의 성립 조건〉 〈베버의 대승불교 해석에 대한 비판적 이해〉 등 논문 다수가 있다.

저작권자 © 불교평론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