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미숙 고전평론가, <연구공간 수유+너머> 연구원

9월이 되면서 마침내(!) 자전거를 타기 시작했다. 작년 이맘때쯤 연구실(연구공간 수유+너머)을 용산으로 옮기면서 작심한 일인데, 무려 1년이나 걸려서야 겨우 행동으로 옮긴 것이다. 내가 매일 자전거로 이동하는 거리는 종로 3가에서 남산 중턱까지, 솔찮이 긴 거리에 해당한다. 게다가 종로와 광화문, 시청으로 이어지는 도심을 관통해야 할 뿐더러, 남대문 시장을 지나 남산 소월길까지는 오르막이 많아 나름 만만치가 않다. 그런데도 굳이 자전거를 타겠다는 꿈을 버리지 않은 것은 한 살이라도 더 먹기 전에 ‘몸에 대한 자율권’을 되찾기 위해서다.

뜬금없는 소리같지만, 내 몸의 주인은 내가 아니다! 나를 포함하여 대부분의 사람들은 생노병사의 전권을 병원에 맡기고 산다. 산부인과에서 태어나 장례식장에서 마무리하는 게 현대인의 일생 아니던가. 어디 그뿐인가. 도시인들은 일상의 모든 것을 자동차에 의탁하여 살아가고 있다.

도로사정과 주차사항 등이 하루의 동선을 결정하는 가장 중요한 척도가 되어 버렸고, 어느덧 차를 구입하는 것이 가정경제의 핵심을 차지하기에 이르렀다. 물론 나는 자가용이 없고, 앞으로도 자가용을 가질 생각이 없다. 하지만, 이것만으론 뭔가 미흡하다. 걸어다닐 생각도 해보았지만, 시간과 노동의 측면에서 지속성을 유지하기가 쉽지 않았다. 그러나 자전거는 이 모든 걸 단박에 해결해준다. 걷는 것보다는 빠르고, 자동차나 오토바이보다는 안전하고, 동시에 버스나 지하철보다는 몸의 자율권을 확보하게 해준다는 점에서. 그럼, 대체 몸의 자율권이 왜 그토록 중요한가?

흔해빠진 말이지만, 누구나 행복을 원한다. ‘행복하거나 존재하지 않거나!’ -이 경구가 말해주듯이, 행복은 존재 자체의 소명이자 지상명령이다. 문제는 행복의 기준이다. 다양한 기준이 있을 수 있지만, 내가 보기엔 자신의 삶을 능동적으로 구성할 수 있는가 여부에 달려있다. 그래야만 자신의 존재와 운명을 긍정할 수 있으므로. 몸의 자율성은 그것을 위한 원초적 토대에 해당한다. 많은 사람들이 믿고 있듯이, 돈과 권력이 그것을 가능하게 해줄 수도 있고, 거꾸로 그것을 가로막을 수도 있다.

분명한 건 사회가 아무리 발전을 해도 이런 점이 해결되지 않으면 개별 주체들의 행복지수는 결코 높아지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국가경쟁력이 높아지고, GDP가 올라간다고 해서 개별주체들이 느끼는 삶의 충만감이 절로 높아지는가? 결코 그렇지 않다! 멕시코의 교육학자 이반 일리히가 말했듯이, 서비스제도는 사람들을 “지속적으로 일생동안 노예화한다.” 예컨대, 교육제도가 복잡해질수록 청소년들의 사고는 예속화되고, 의료시설이 많아지면 오히려 ‘병원이 병을 만드는’ 역설이 자행된다.

교통수단도 마찬가지다. 사람들은 도로시설이 좋아지고, 차의 성능이 좋아지면 생활의 흐름이 훨씬 매끄러워질 것이라 기대하지만, 그건 실로 큰 오산이다. 도로가 넓어지면 그만큼 더 많은 차가 보급되기 때문에 도시 전체의 평균속도는 제자리걸음에 머물고 만다. 또 불행하게도(!) 성능 좋고 값비싼 차를 사기 위해 더 많은 돈을 벌어야 하기 때문에 일생 전체의 속도는 오히려 뒤처지게 된다. 결국 이 과정에서 몸의 자율권은 더더욱 박탈되어 버린다. 일상의 동선도 전적으로 자동차에 의지하게 되고, 인생 계획 또한 자동차의 소유가 결정하게 되는 식으로.

이런 조건은 특히 여성들에게 치명적이다. 여성들은 체질적으로 몸을 움직이길 좋아하지 않는다. 중고등학교 과정에도 여학생체육은 거의 없는 거나 마찬가지고, 집에서도 부모들이 딸에게 운동을 권유하지는 않는다. 그러다보니 성형수술을 하거나 몸매를 관리할 때 말고는 여성들은 평생 동안 자신의 몸을 스스로 조절한다는 생각조차 하지 못한다. 몸을 자율적으로 조절할 수 없는데 삶을 역동적으로 꾸려간다는 건 불가능하다. 이런 실정에서 자가용에 대한 의존도가 높아진다는 건 몸의 소외를 한층 심화시키는 결과를 낳을 것이다.

물론 자전거가 이 모든 상황을 한꺼번에 타파해준다고 보기는 어렵다. 하지만, 아주 썩 괜찮은 대안인 건 틀림없다. 도로정체나 주차전쟁으로 이어지는 일상적 예속에서 벗어나는 좋은 방편이기도 하고, 무엇보다 몸에 대한 자신감을 확보하는 데는 그만이기 때문이다. 헌데, 막상 타기 시작하자 이 정도가 아니었다. 그 이상이었다.

우선, 자전거를 타게 되자 세상을 보는 상식적 틀이 바뀌었다. 예를 들면, 위험하게 느껴지는 곳이 안전하고, 쾌적해 보이는 곳이 위험하다. 오거리나 시장통처럼 사람과 차가 뒤엉키는 곳은 절대 위험하지 않다. 왜냐면 거기서는 절대 속도를 낼 염려가 없기 때문이다. 반면, 오히려 길이 툭 트여있고, 교통체계가 잘 정비되어 있는 곳은 위험하다. 그야말로 모든 차량이 오직 앞만 보고 최고의 속도로 질주하기 때문이다. 거기서는 단 한순간의 실수로도 목숨이 위태롭다. 그럼 신나게 달리지도 못하고 북새통 속을 헤쳐 나와야 한다면 뭔 재미로 자전거를 타냐고 물을 지도 모르겠다. 모르는 말씀! 바로 그 혼돈 속에 깊은 묘미가 있다!

자동차가 균질화된 공간을 따라 이동한다면, 자전거는 인도와 차도뿐 아니라, 골목이나 샛길 등 이질적인 것들이 뒤섞인 공간들을 자유롭게 이동할 수 있다. 여기서 중요한 건 그것들과 더불어 리듬을 만드는 일이다. 제각기 다른 방향으로 움직이는 타자들의 속도를 거스르지도 않고, 그렇다고 내가 갈 길을 멈추지도 않는 것. 그것이 바로 리듬이다. 그러기 위해선 속도가 아니라 멈추는 능력이 필요하다.

속도를 내는 건 사실 쉽다. 페달을 세게 밟기만 하면 되니까. 하지만 멈추는 건 고도의 긴장과 절제력이 요구된다. 그렇기 때문에 자전거 실력은 속도에 있는 것이 아니고, 잘 멈추는(止) 것에 있다. 언제, 어디서건 '즉각, 단호하게' 멈출 수 있다면, 그 사람은 진정 ‘선수’라 할 만하다. 그리고 선수들은 안다. 북적대는 도심의 한가운데를 미꾸라지처럼 요리조리 빠져나올 때의 묘미가 사방이 뻥 뚤린 도로를 질주할 때 못지않게 짜릿하다는 것을.

무릇 인생 또한 이렇지 아니한가. 누구나 알고 있듯이, 삶에도 속도가 있다. 앞길이 훤히 뚫려있을 땐 누구나 정신없이 달린다. 이대로 계속 갈 수 있을 것같은 착각이 들기 때문이다. 그래서 멈춰야할 때를 놓치고 만다. 그리고 타이밍을 놓치는 순간, 바로 사고가 난다.

그런 점에서 삶의 진경은 단 하나의 척도만이 작동하는 ‘홈파인 공간’에서 탈주하여 이질적인 것들이 공존하는 ‘매끄러운 공간’을 향해 나아가는데 있는 것이 아닐까. 모두가 같은 길을 일사분란하게 간다면 거기에는 오직 속도만이 지배하게 된다. 누가 더 빠른가 외에는 어떤 기준도 필요치 않은 속도! 그것이 바로 속도의 파시즘이다. 반면, 서로 다른 존재들이 각자의 길을 가되 거대한 순환의 흐름을 만들어낸다면, 거기에는 동일한 목적과 위계가 작동할 여지가 없다. 다른 사람 때문에 나의 길을 멈출 필요도 없고, 다른 사람들을 막아서서 나와 같은 길을 가자고 재촉할 필요도 없다. 그저 각자의 길을 ‘함께’ 가면 그것으로 충분하다. 이것이 자전거가 내게 일깨워준 삶의 집합적 리듬이다.

덧붙이자면, 여기에는 자연과의 교감도 빼놓을 수 없다. 도심 속에서 살아간다는 것은 자연의 거대한 리듬을 망각한다는 뜻이기도 하다. 도시인들은 계절이 가고 오는 것을 오직 에어컨과 난방기로만 확인한다. 하지만, 자전거를 타면 계절이 ‘보인다’. 지금은 초가을이다. 버스로 이동할 때는 창밖으로 낙엽이 보여야 비로소 ‘아, 가을인가’ 하는 게 고작이었다. 하지만, 자전거를 타고 가노라면 바람의 촉감으로 가을을 느낄 수 있다. 그것은 온도로는 환원되지 않는, 대기의 전혀 다른 속성이자 질감이었다. 아마도 이 바람의 세례를 받고 나서야 나무들은 잎을 초록에서 빨강, 노랑으로 물들일 것이리라.

하기야 이 정도는 서곡에 지나지 않는다. 앞으로 자전거와 교감할 수 있는 몸의 능력이 커질수록 내 앞에는 이전에는 전혀 경험하지 못했던 ‘자유의 새로운 공간’이 파노라마처럼 펼쳐질 터이다. 자전거를 탈 때마다 매번 알 수 없는 설레임을 느끼는 건 그때문이리라. 조주 스님은 “개에게도 불성이 있습니까?” 하는 질문에 “없다!”고 답했다. 이게 그 유명한 무자(無字) 화두다. 장난삼아 이 화두를 이렇게 바꾸어보면 어떨까. “자전거에도 불성이 있습니까?”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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