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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용성의 생애와 불교개혁론 / 김정희
근현대 불교인물 탐구 ② 백용성
[45호] 2010년 12월 05일 (일) 김정희 calmmind@hanmail.net

1. 들어가는 말

   

백용성 스님

필자가 대학에서 불교를 철학으로서 공부할 때, 그 대상으로서 불교는 지역적으로 인도불교, 중국불교, 한국불교이거나, 시기적으로는 대개 초기불교부터 고려시대 불교였다. 여기서 불교는 문자로 전해진 경전 속의 불교로서, 시간과 공간을 넘어선 보편적 진리였지만 필자에게는 그만큼 추상적인 진리이기도 했다. 학위를 마친 뒤 우연히 다른 전공 분야의 연구자와 함께 ‘근대 동아시아 사회의 이상사회론’이라는 주제하에 한국 근대불교를 처음으로 접하게 되었다.

그 당시 필자는 신선한 충격과 흥분을 느꼈다. 오늘날 현대 한국 사회를 살아가는 불교도들이 고민하는 문제를 그들 또한 똑같이 고민하고, 답을 찾고 이를 실현하기 위해 노력하는 모습이 너무나 구체적이고 생생하게 느껴졌기 때문이다.

이들은 기독교로 대표되는 서구문명의 전래와 더불어 야기된 동양종교로서 불교의 지위, 산업사회와 자본주의로 대표되는 세속적이고 합리적인 근대사회에서 출세간을 지향하고 권력에 의존적인 전통종교로서 불교의 의미, 일본 식민지 정책에 대한 극복으로서 민족의 정체성 확립을 위한 한국불교의 자각, 산중에 은둔하면서 개인의 깨달음만을 추구하던 불교에서 중생의 교화와 도시 포교에 대한 방법론 등과 같이 다양한 문제를 두고 고민하고 이를 극복하고자 했다.

한마디로 이들은 ‘일본 제국주의와 그 대응으로서 민족의 주체성 확립’ ‘전통과 근대의 만남과 그 대응’이라는 근대 한국사회가 직면한 커다란 파도에 직면하여 불교도로서 이에 대응하고 극복하고자 했던 것이다. 

이러한 문제의식 속에서 필자가 근대 한국불교사에서 주목한 근대 불교사상가가 백용성이었다. 백용성(1864~1940)은 기미독립선언의 민족대표 33인 중 한 사람으로서 만해 한용운과 더불어 불교계를 대표했던 독립운동가이자, 불교개혁을 통해 불교 근대화와 대중화의 기틀을 확립한 근대의 승려이다.

그는 그 당시 불교계의 여러 폐단이 근대조선에 맞지 않음을 자각함으로써 불교개혁의 필요성을 역설했다. 그러나 불교가 단지 동양의 전통종교이기 때문에 합리적인 근대사회에 어울리지 않는 종교라는 당시 종교인이나 개혁론자들의 비판에 대해서는 불제자로서 당당한 자의식을 가지고 대응했다. 그 결정체가 대각교운동이라고 할 수 있다.

용성에 따르면, 불교는 스스로 자기의 본성을 깨닫는 “깨달음의 종교[대각교(大覺敎)]”이다. 나아가 용성은 이에 근거해서 당시 불교가 갖고 있던 제도적 모순이나 폐단을 ①한국 선불교 전통의 확립 ②선의 대중화 ③저술과 역경사업 ④교단의 정화운동 ⑤사원경제의 자립과 중생 구제 ⑥포교의 근대화를 통해 개혁하고자 했다.

백용성이 근대 한국사회에서 불교도로서 직면했던 문제들을 자각하고 해결하기 위한 방법론들은 오늘날의 한국 불교도뿐만 아니라 한국민들에게도 많은 시사점을 제공한다. 그의 불교개혁론은 역사를 통해 자기의 정체성을 분명히 자각하고 이에 근거해서 불교가 처한 시대적 상황에 따른 개혁을 주장하고 있다. 이러한 그의 방법론은 다종교, 세계화 속에서 민족의 정체성 확립과 함께 타 종교, 타 문화와의 조화라는 문제를 어떻게 현대 한국사회가 해결해야 하는지를 제시하는 하나의 지침으로 평가할 수 있기 때문이다.  

2. 생애와 저술

1) 생애

그의 생애는 한용운이 지은 《용성대선사 사리탑비명병서》와 용성 스님 어록인 《평상심이 도라 이르지 말라》(동산 찬집, 동봉 풀이, 불광출판부)를 통해 살펴볼 수 있다. 이 글의 내용은 약간씩 차이가 있지만 대체로 다음과 같이 요약할 수 있다.

용성은 조계의 직하 제35대 법손으로 환성지안의 후예다. 속명은 상규, 법명은 진종, 용성은 법호다. 수원 백씨의 후손으로 전라도 남원 죽림촌에서 조선 말 고종 갑자년(1864) 5월 8일에 태어났다. 부친은 백남현, 어머니는 밀양 손씨이다. 어머니가 한 기이한 스님이 법의를 입고 방에 들어오는 것을 꿈을 꾸고 그로부터 임신하여 용성을 낳았다고 한다.

9세에 서당에 입학하여 한학을 배웠는데 한시를 지을 정도로 총명했다. 14세 때 남원군 덕밀암에서 출가하였으나 부모의 강압으로 집으로 돌아왔다가 16세(비명에는 19세) 때 해인사 극락암에서 화월 화상을 은사로 혜조 율사를 계사로 하여 사미계를 받고 출가했다. 21세 때 통도사 금강계단에서 선곡율사에게서 비구계와 보살계를 받았다. 이는 칠불암 대은율사의 정맥을 이은 것이다.

출가 이후의 삶은 크게 수행의 시기와 대중포교의 시기, 두 시기로 나누어 볼 수 있다. 수행의 시기 또한 16세에서 23세까지의 오도수행기와 23세부터 47세까지의 오후수행기로 나눌 수 있다. 먼저 오도수행기에 용성은 크게 세 번에 걸쳐 깨달음을 경험했다. 첫째는 다라니 염송을 통한 업장 소멸과 깨달음의 체험이다. 용성은 고운사 수월 화상으로부터 지성으로 삼보에 예배하고 천수주와 육자대명왕주를 외우도록 권고받고 이를 실천하여 하나의 의단을 풀어 깨달음을 체험했다.

두 번째는 화두 참구를 통한 깨달음이다. 용성은 금강산 표훈사 무융 선사에게서 무자화두를 받아 참구하다가 양주 보광사에 돌아와 정진한 지 하루 만에 깨달음을 경험했다고 한다. 세 번째는 경전 열람으로 깨달음에 도달한 것이다. 용성은 참선수행을 계속하는 가운데 경전과 어록을 열람했는데 그 가운데에서도 20세 때 《육조단경》과 22세 때 송광사 삼일암의 하안거 동안 《전등록》의 열람을 통해 깨달음에 이르렀다.

23세부터 47세까지의 오후수행기에 용성은 지리산, 조계산, 가야산 등을 두루 행각하면서 참선과 간경에 심혈을 기울여 《전등록》 염송, 화엄, 기신론 등 경, 율, 논에 두루 통달하였다. 나아가 혜월, 만공 등 선지식과의 선문답을 통해 깨달음을 재확인하고 상비로암, 보개산 성주암, 덕유산 호국사 등에서 선회를 개설하는 등 선수행 전통의 중흥을 위해 노력했다.

1911년 48세 되던 해 용성은 처음으로 서울에 올라와 봉익동에 대각사를 건립하는 등 본격적으로 불교 포교와 참선 대중화를 실천하기 시작했다. 이에 앞서 용성은 1907년 44세 되던 해에 만주와 중국 등 각지를 순례하면서 한국불교를 전하는 동시에 중국의 불교를 견학하고 4년 뒤에 귀국하였다. 귀국 이후 대각교 운동을 시작하여 서울 대사동에 조선임제종 중앙종교당(49세)을 건립함으로써 도시에 시민선방을 개설하였다. 용성의 이러한 노력으로 비로소 서울에 ‘참선’이라는 말이 생기기 시작했다고 한다. 53세부터 55세의 3년 동안 북청에 금광을 경영하여 불교사원의 경제적 자립을 도모했다.

그리고 56세 되던 1919년 3월 1일 독립운동의 민족대표 33인 중 불교대표로 활약하여 서대문형무소에서 1년 6개월의 형을 언도받아 옥고를 치렀다. 58세(1921)에 출옥 후 삼장역회를 조직하여 한문경전을 한글로 번역하여 보다 많은 대중이 쉽게 불교경전을 접하도록 함으로써 포교에 힘썼다.

봉익동 3번지에 대각교를 창립하고, 59세(1922) 때에는 만주 연길, 명월촌, 영봉촌에 70정보의 대지를 확보하고 대각교당을 건립하여 교당을 중심으로 한 생산소비 조합운동을 전개했다. 61세(1924) 때에는 박한영과 함께 《불일》지를 창간하였고, 62세(1925)에 도봉산 망월사에서 만일참선결사회를 조직하여 간화선 전통의 확립과 실천에 힘썼다. 특히 결사의 참석자를 청정비구에 한정하여 수행자에게 엄격한 계율 준수를 요구했다.

63세(1926)에는 총독부에 1차와 2차에 걸쳐 건백서를 제출하여 청정한 계율을 지키고 깨달음을 위한 수행을 하는 것이 승려의 본분임을 밝혔다. 64세(1927)에는 경남 함양군 백운산에 화과원을 건립하여 자본주의사회에서 승려 또한 노동을 통해 경제적 자립을 이루어야 한다는 자신의 선농일치불교를 실천했다. 69세(1932)에 《불교》지에 정치권력으로부터 불교의 종교적 독립과 승려로서 계율 엄수와 수행을 강조하는 〈중앙행정에 대한 희망〉을 실었다. 71세(1934)에 일제의 압력으로 대각교 재산을 신탁하였고, 73세(1936)에는 강제적으로 대각사를 대본산 범어사 경성포교당으로 개명하였다. 그리고 1938년 대각사는 결국 창설 18년 만에 일제의 탄압에 의해 해산되었다.

용성 사후 1953년 신탁한 재산을 20년 만에 문도들이 인수하여 대각교회로 대각사를 부흥했다. 그리고 1969년 대각사는 재단법인 대각회로 문화공보부에 등록·인가되어 현재에 이르며, 용성의 유지를 이어받아 포교활동을 전개하고 있다. 백용성은 77세(1940)에 입적하니 법랍은 61세였다. 

2) 저술

용성은 1919년 3월 1일 민족대표 33인 중 불교 대표로서 독립운동에 참여하였다. 이로 인해 1년 6개월간 서대문 형무소에서 복역하였는데, 이때 다른 사람들이 자신들이 믿는 종교의 서적들을 신청해서 보는 것을 보고 충격을 받았다. 불교의 경전들이 대부분 한문으로 되어 있어 일반 대중이 쉽게 접근하기 어려웠던 반면, 이들 대부분은 한글로 쓰여 있어 누구나 쉽게 읽을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는 이를 계기로 출소하면 어려운 한문이 대부분인 불경을 한글로 번역하고, 나아가 보다 많은 이들에게 불교를 알리기 위해 직접 한글로 불교서적을 저술하겠다는 결심을 했다. 그리고 출소 후 ‘삼장역회’를 조직하여 불경을 번역하고 저서를 출판하는 등 활발한 저술활동을 전개했다. 그의 저술은 크게 저서와 한역경전으로 나눌 수 있다. 주요 저서는 대체로 다음과 같다. 

《귀원정종》 2권, 《심조만유론》 《수심정로》 《팔상록》 《대각교의식》 《각해일륜》 《청공원일》 《수심론》 《석가사》 《임종결》 《오도의 진리》 《오도는 각》 등이다. 이들의 내용은 크게 불교가 대각(大覺)인 붓다의 가르침을 따르는 종교라는 것, 대각은 자신의 본성이자 모든 우주의 근원인 ‘대원각성(大圓覺性)’을 자각(自覺)하는 것이자 모든 중생 또한 깨달음에 이르도록 하는 타각(他覺)이라는 것, 이를 실천하기 위한 수행법은 간화선이라는 것으로 구성된다. 나아가 용성은 대원각성에 근거해서 불교를 자각과 타각, 다시 말해 상구보리 하화중생을 이상으로 하는 궁극적 가르침임을 주장하고, 이를 통해 불교는 기복적이고 우상숭배의 비합리적 종교라는 당시의 타 종교나 사상가들의 비판에 대해 반박했다. 이러한 저서에서 우리는 그가 근대한국의 다원화된 종교사회에서 어떻게 불교의 정체성을 확립하고 나아가 보편종교로서 불교의 생명력을 회복하기 위해 고심했는가를 볼 수 있다. 

역서로는 《신역대장경》 《수능엄경선한연의》 《만금비라경》 《각정심관음정타총지경》 《대방광원각경》 《상역과해금강경》 《팔양경》 《조선글화엄경》 12권, 《백용성국역한글화엄경》 4권, 《조선어능엄경》 《대승기신론》 《관정복마경》 《각설범망경》 3권, 《선한역대방광불화엄경》 《육자영감대명왕경》 《천수경》 《지장보살본원경》 《능엄신주경》 《금강경주해》 《각정심다라니경》 《선문촬요》 《금비라동자경》 등이 있다. 그는 대중의 교화 지침으로서 불교의 생활화, 불교의 대중화, 불교의 지성화를 주장했는데 불교의 지성화를 위해 참선, 염불, 간경, 주력의 사대수행(四大修行)을 강조했다. 이러한 그의 정신은 그가 한글로 번역했던 여러 경전들의 모습에서 볼 수 있다. 

 그 외 저술로는 《용성선사어록》 《용성선사법어집》 《불교창가》 《입교문답》 《대각원류》 《교리대전》 《대각교아동교과서》 〈만일참선결사회창립기〉(《불일》) 〈활구참선만일결사발원문〉 〈범계생활에 대한 건백서 2차〉 〈변종록〉 〈인총독부문조선종파구변론〉 〈선화누설〉 외 다수가 있다. 이러한 저술들을 통해 용성이 급변하는 근대 한국사회를 살아가면서 불교의 대중화, 지성화를 위해 한국불교의 전통을 지키면서도 동시에 시대의 변화에 맞춰 일요법회나, 찬불가와 같은 근대적인 방법을 포교에 도입했던 선구적인 모습 등을 볼 수 있다. 

3. 용성의 대각사상과 불교개혁

1) 대각사상

용성은 1911년 처음으로 서울에 올라와 기독교가 날로 번성하는 데 비해 불교는 침체해 가는 모습에 커다란 충격을 받았다. 기독교는 1886년 조선이 프랑스와 체결한 한·불조약에서 ‘종교의 자유’를 허용하면서 들어왔다. 이들은 불교를 정치권력에 종속된 종교이자 우상을 숭배하는 비합리적인 전근대적 종교라고 비판했다. 이러한 비판은 1920년대부터 전개된 사회주의 계열의 반종교운동에서 더욱 강하게 제기되었다. 반종교운동은 3·1운동 직후 도입된 사회주의 계열에서 1920년부터 1930년대 초반까지 진행한 종교비판운동으로서, 초기에는 기독교에 대한 비판에서 시작하였지만 신간회의 활동이 해체된 1930년대 초반부터는 기독교, 불교를 망라한 전 종교를 대상으로 했다.

용성은 다음 두 가지 이유로 불교에 대한 이들의 비판으로부터 불교가 자유롭지 못하다는 사실을 인정했다. 하나는 실제로 그가 활약하던 당시 불교가 조선의 숭유억불 정책으로 인해 제도적 종교의 기능을 상실하고 산중에 은둔하거나 기복적인 불교를 통해 민중 속에서 주변적 종교로 겨우 명맥을 유지하는 상태로 전락했기 때문이다.

다른 하나는 불교를 비판했던 기독교와 사회주의가 조선의 근대화 과정에서 근대조선이 지향했던 근대성을 상징했기 때문이다. 조선은 1876년 개항을 통해 서구문명과 만나면서 봉건사회에서 근대사회로의 전환, 즉 근대화의 과정을 밟기 시작했다. 근대조선에서 이 과정은 민족의 독립을 위협하는 일본의 식민지화와 함께 전개되었다. 그 결과 근대조선의 지식인들은 근대화를 민족의 독립과 자존을 위한 길로서 인식하고 근대 서구문명을 추구해야 할 가치로서, 이에 반해 전통은 반성과 극복의 대상으로 인식했다.

이러한 시대적 상황 속에서 제기된 기독교와 사회주의의 불교 비판에 직면하여 백용성은 과연 불교가 ‘흡혈적, 사기적 종교이며 기생적 종교로서 아편 독’과 다름없는 그리하여 근대화의 과정에서 사라져야 할 가르침인가를 고민했다. 그는 조선불교가 이들의 비판으로부터 자유롭지 않다는 것을 인정하면서도 조선불교의 타락된 모습이 곧 불교의 본래 모습이라는 비판에 대해서는 불교도로서 강한 의문을 제기했다. 그에 따르면 조선불교의 타락된 모습은 불교도의 타락 때문이지 불교의 본래 모습은 아니다.

기독교와 반종교운동의 불교 비판에 대해 조선불교와 불교의 본래 모습을 구분하려는 용성의 시각은 당시의 불교도들의 공통된 인식이기도 했다. 이들은 조선불교의 모습이 불교의 종교적 특성 때문이 아니라 유교 이데올로기에 근거했던 조선왕조가 500여 년 동안 실시했던 억불정책 때문이라고 보았던 것이다.

이러한 인식에 근거해서 백용성은 조선불교의 타락된 모습을 조선의 억불정책에 따른 역사적 산물로서, 나아가 근대 이전의 연장선 위에 있는 전근대적 전통으로 이해함으로써 불교 본래의 모습과 조선불교를 분리했다. 이는 불교의 정체성과 관련해서 기독교와 반종교운동의 불교 비판으로부터 자유로운 불교 본래 모습의 확보를 의미한다.

용성은 이렇게 확보한 불교의 본래 모습을 붓다의 가르침, 즉 근본불교로 주장했다. 그리고 이를 조선불교와 구분하여 대각교라고 새롭게 이름 했다. 그에 따르면 대각교는 “당시의 사조와 민중의 지혜 개발이 옛날과 다름에도 구습을 고수하여 스스로 멸망하는 것이 옳은가? 그리하여 불교를 번역하여 대각교라고 하니…… 또 천하 민중의 사조를 관찰하는 불타[覺]의 지혜로 시대에 적합하도록 교리를 선전……” 하기 위해 반성적으로 확립한 불교이다. 

용성은 대각교를 자각과 각타(覺他)의 종교로 정의했다. 그에 따르면 ‘대각교는 천당에 가려고 하는 교가 아니다. 나의 대원각성을 깨쳐 영원히 생사고해를 해탈하고 모든 중생을 깨닫게 하는 것이 목적인’ 종교이다.
먼저 자각에 대해 살펴보면, 자각이란 본래 대원각성[本覺]인 중생이 이를 알지 못하다가 비로소 깨달아[始覺] 점차 수행을 통해 시각과 본각이 합일함으로써 궁극적인 깨달음[구경각(究竟覺)]에 이르는 것이다. 용성은 불교를 자각의 종교로 정의함으로써, 불교가 우상숭배의 종교라는 기독교의 비판을 반박했다.

기독교는 유일신에 대한 신앙을 근대적 종교의 본질로서 이해했던 자신들의 종교관에 근거해서 불교를 우상을 숭배하는 전근대적 종교, 혹은 무신론을 주장하는 비종교로 비판했다. 이에 대해 용성은 오히려 이들이야말로 자기 밖에 있는 절대자에 대한 신앙을 통해 구원을 추구하는 내세 지향적인 종교라고 반박했다. 용성은 불교를 자각의 종교로 정의함으로써 기독교보다 우월하거나 혹은 기독교와는 다른 유형의 근대적 종교로서 자리매김했다.

다음은 각타의 의미이다. 용성은 《대승기신론》이 설명했던 구경각의 의미에 새로운 의미를 부여함으로써 불교의 깨달음에서 각타의 중요성을 되살리고자 했다. 《대승기신론》에서 구경각은 무명에 물든 마음이 수행을 통해 깨달음[覺]의 단계가 점차 깊어지면서 최종적으로 본각과 합일하는 경지이다. 다시 말해 구경각은 시각이 본각을 향해 나아가는 여러 단계 중 본각과 시각이 합일하는 궁극적 단계를 가리킨다. 이러한 구경각을 용성은 자각과 관련해서 설명했다.

용성은 구경각에 자각의 의미 외에 새로운 의미를 부여했다. 우선 《대승기신론》이 각을 시각과 본각의 두 가지 의미로 설명했던 것에 대해, 대각교에서의 각을 시각, 본각, 구경각의 세 가지로 주장했다. 다시 말해 용성은 《대승기신론》에서 구경각이 시각의 궁극적인 단계로서 그리하여 시각에 부속하는 개념이었던 것에 반해, 대각교에서 구경각은 시각과 본각에 대해 독립적인 의미를 갖는 것으로 재해석했다. 그에 따르면 구경각은 “대원각성의 근본적인 심성을 깨치는 ‘자각’과, 또 다른 사람을 깨치게 하는 ‘각타’가 둘이 아니어서 원만한” 것이다.

구경각을 자각과 각타의 불이(不二)로 설명하는 백용성의 주장은 불교의 근본적 가르침이기도 하다. 그러나 이러한 가르침은 자각을 강조하는 선불교 전통에서 제대로 보이지 않는다. 이는 각타를 의미하는 자비정신이 중국, 한국의 중요한 선적(禪籍)들에서 거의 언급되지 않는 것에서 볼 수 있다. 중국·한국불교 사상사에서 선불교는 자기 몸을 버리고 죽을 각오로 수행하는 엄격한 수행자의 모습만으로 나타날 뿐이다. 이는 조선의 불교가 초세속적인 영역에서 오직 자기만의 깨달음을 추구할 뿐 현상의 중생 구제에는 무관심한 산중불교, 은둔의 종교라는 기독교나 사회주의자들의 비판에서 자유로울 수 없는 것에서도 알 수 있다.

용성은 구경각을 설명하면서 시각과 본각의 합일이라는 의미 외에 자각과 각타의 불이라는 불교의 근본적 가르침을 재확인했다. 이를 통해 그는 불교의 정체성을 자기만의 깨달음을 추구하는 독선주의가 아니라 모든 중생의 깨달음을 함께 추구하는 겸선주의로 확립했다. 대각교로서 불교는 ‘평등을 주장하고 차별을 주장하지는 않으며, 세상을 제도하기 위한 가르침이지 세상을 싫어하는 가르침이 아니다.’
 
2) 상구보리―불교교단의 개혁

(1) 청정비구로서의 승려

용성은 불교를 자각과 각타를 지향하는 대각교로 확립하고 이에 근거해서 그가 활약하던 당시의 불교를 개혁하고자 했다. 그는 무엇보다도 승려의 자기인식과 교육이 시급하다고 보았다. 승려는 불·법·승 삼보 가운데 하나로서 부처의 가르침을 수행을 통해 깨닫고 이를 중생에게 가르쳐 중생을 깨달음으로 이끄는 존재로서 불(佛)과 법(法)을 매개하는 자이다. 용성에 따르면, 승려는 스스로 올바른 수행을 닦고 또 남에게도 바른 수행을 닦도록 권하는 자이기 때문에 먼저 자기 스스로 바른 수행을 닦아야 하는 자이다.

그러나 용성이 목도한 그 당시의 승려들은 하늘이나 귀신에게 복을 비는 것을 일로 삼아, 중생을 깨달음으로 이끌기보다 그릇된 길로 이끌거나 오히려 중생에 기생하는 자였다. 승려들의 자질 저하와 도덕적 타락은 500여 년 동안 조선이 실시했던 숭유억불 정책의 영향이 컸다. 조선은 억불정책을 통해 승려들에게 어떠한 공식적 지위도 부여하지 않음으로써 조선사회에서 불교가 어떠한 조직적인 종교단체도 구성할 수 없음은 물론, 유지할 수도 없도록 했기 때문이다.

조선시대 승려들은 왕실과 지배계급으로부터 사찰의 유지에 필요한 물질적 지원을 지속적으로 담보할 수 없었다. 그 결과 조선시대의 사찰은 수행과 신앙을 원활히 유지할 수 있도록 편제되어야 함에도 불구하고 존립 자체를 걱정하는 수준에 이르렀던 것이다. 사찰은 불교의 혜명을 잇기 위한 수행 도량이 아니라 경제적 활동을 위한 장으로 전락했으며, 이러한 상황 속에서 승려들은 자신의 본분이 ‘수행’이라는 것을 자각하기 어려웠다. 이는 결국 승려들의 자질 저하와 도덕적 타락을 초래했다. 

승려들의 도덕적 타락은 일본의 식민지 종교정책으로 더욱 심화되었다. 일본은 조선의 병합과 더불어 조선불교를 통제하고 이용하기 위해 전국의 사찰을 31개 구역으로 나누어 하나의 본사가 나머지 말사를 통제하도록 하는 31본산주지제를 실시했다. 31본산주지제에 따르면 주지는 전통적인 선출 방식인 산중공회의 대중 투표에 의하지 않고 세속권력인 총독부의 총독이 임명하거나 총독이 임명한 본사의 주지가 임의대로 임명한다.

 이는 정치권력과 결탁한 친일승려들의 양산을 낳았으며 주지로 임명된 자들은 일본불교화되어 대처식육을 행함으로써 불교의 세속화, 계율의 파괴를 가속화시켰다. 그 결과 승려의 본분인 수행을 주로 하는 청정 승려들은 터전을 잃고 방황하게 되고 이는 불교계의 계율 파괴를 더욱 심화시켰다. 백용성은 일본제국주의의 식민지 정책이 조선의 억불정책으로 침체한 전통불교의 폐단을 불교가 주체적으로 극복할 수 있는 기회를 박탈하고, 나아가 불교의 폐단을 더욱 심화시켰다고 이해했다.

승려들의 도덕적 타락이 수행단체로서 불교의 존립 기반을 흔드는 원인이라고 파악한 용성은 승려들에게 계율의 준수와 선수행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이러한 노력은 활구참선만일결사(1925)와 같은 수행운동에서 구체화되었다. 용성은 일제강점기에 진행된 불교의 세속화에 따른 승려들의 타락을 극복하고 간화선 전통을 회복하기 위해 만일결사를 추진했다. 여기서 용성은 승려들의 계율 엄수를 결사에 참여할 수 있는 조건으로 요구했다. 결사에 참여할 수 있는 승려들의 자격을 밝힌 규칙 제5조와 입회선중주의사항(入會禪衆注意事項)에 따르면, 선방에 참여할 수 있는 자는 《범망경(梵網經)》과 《사분율(四分律)》을 특히 준수하려고 결심한 승려에 한했다. 이는 처자가 있는 승려는 결사에 참여할 수 없으며, 살생, 사음 등을 금지하는 5계의 엄수를 요구하는 것이었다.

용성은 간화선 수행자에게 엄격한 계율 준수를 요구했다. 그에 따르면 승려란 출가한 비구와 비구니로서 “비구와 비구니는 법해 가운데에서 일구분(一區分) 종파를 이룸으로써 아내를 두고 고기 먹는 것을 엄금하고 오로지 도 닦는 일에 전념하여 모든 부처님의 가르치신 법을 깨달아 후세에 전함으로써 계속 이어지게 할 것이며 세상은 덧없으니 모든 것이 헛되고 꿈과 같아 즐길 것이 하나도 없음을 확실히 알아 오직 견성하여 부처가 되는 것을 근본으로 삼는……” 자이다.

용성은 승려란 청정비구로서 계율을 엄수하고 수행을 통해 스스로 깨달음을 성취하고 나아가 중생을 구제하는 자로서 그 정체성을 확립함으로써 승려들의 도덕적 타락을 개혁하고자 했다.

(2) 교단의 독립성

근대적 종교의 특징 중 하나는 세속의 정치권력으로부터 교단의 독립이다. 그러나 일본이 식민지 정책의 일환으로 실시한 31본산주지제는 불교를 정치권력에의 예속을 강화함으로써 권력에 기생하는 종교라는 비판으로부터 벗어날 수 없게 했다. 백용성은 〈중앙행정에 대한 희망〉이라는 글에서 ‘종교는 독립적이고 부속적인 것이 아님’을 밝히고 31본산주지제가 불교의 종교적 독립성을 막음으로써 불교를 더욱더 쇠퇴시키고 있다고 지적했다. 그는 이러한 문제를 극복하기 위해 불교계 스스로 통일된 종단을 만들어 정치권력으로부터 독립할 것을 요구하는 한편 승려들 스스로 경제적 활동을 통해 경제적으로도 독립할 것을 강력하게 요구했다.

그는 승려 스스로가 노동하지 않고 탁발이나 중생의 시주에 의지해서 살아가는 전통적 생활방식이 자본주의 경제 아래의 근대사회와 양립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반종교운동에 비판의 빌미를 제공한다고 보았다. 용성은 “대각[부처님]께서는 농사나 장사하는 것을 금하였으나 오늘날에는 도저히 빌어먹을 수도 없게 되었다. 아, 우리는 괭이를 들고 호미를 가지고 힘써 일하고 농사를 지어 다른 사람을 의지하지 말고 살아가도록 하자. ……우리 불교의 교리와 세간의 상식을 아울러 갖추게 하여 유심 유물이 둘이 아닌 진리를 실행하며 스스로의 힘으로 먹고 살아갈 수 있음으로써 반종교자를 방어하자.”고 주장했다.

교단의 경제적 활동을 통해 불교 교단의 독립성을 확립하자는 용성의 주장은 단순한 구호에 머물지 않았다. 그는 실제로 이를 위해 다양한 시도를 했다. 그는 53세부터 55세까지 3년 동안 북청에서 금광을 경영하고, 64세(1927)에는 경남 함양군 백운산에 화과원을 건립하기도 하였는데, 이는 자본주의 사회에서 승려 또한 노동을 통해 경제적 자립을 이루어야 한다는 자신의 선농일치 불교를 실천한 예이다.

3) 하화중생―중생구제를 위한 불교의 개혁

(1) 역경사업

중생은 자기의 본성이 대원각성으로서 모든 존재의 본성과 동일함을 모른 채 나와 너, 나와 세계를 구분한다. 그 결과 남과 나를 비교하고 대상에 집착함으로써 끊임없는 괴로움에 빠져 생사를 윤회한다. 따라서 중생이 해탈에 이르기 위해서는 먼저 대원각성으로서 자기 본성에 대해 알아야 한다. 이를 위해 중생구제를 위한 방법으로 불교경전의 간행과 설법과 같은 법보시를 강조했다.

백용성의 역경사업은 이러한 법보시의 전통에 충실한 예라고 할 수 있다. 그는 불교경전의 간행을 통해 중생이 무명에서 벗어나 올바른 진리로 나아가기를 도모했다. 이와 관련해서 주목해야 할 점은 그가 한문으로 된 기존의 불교경전을 한글로 번역해서 간행했다는 것이다. 그는 시대의 변화와 한글의 대중성에 주목하고, 역경사업의 중요성을 일찍이 깨달았다.

앞에서도 지적했듯이 그는 3·1 독립운동에서 민족대표 33인 가운데 만해와 함께 불교대표로 참여했고 이로 인해 1년 6개월간 옥중 생활을 경험했다. 이때 타 종교 사람들이 한글로 된 종교서적을 쉽게 읽는 것을 보고, 한문으로 된 불교경전을 한글로 번역하는 일의 중요성을 알았다.

그는 〈저술과 번역에 대한 연기〉에서 생존경쟁이 치열해지고 경제의 파탄이 심각해지는 근대사회에서 어려운 한문을 배우기 위해 수십 년간 공부하는 것은 무의미하며, 한문을 다 알기는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강조했다. 또한, 오늘날 근대학문에서 한문이 무용한 데다, 중국 글이라는 점 등을 들어서 한문 경전이 대중 포교와 근대 신학문을 배우는 데 방해가 됨을 지적했다. 그리고 조선 사람에게는 한글이 적당하며, 한글은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쉽게 배울 수 있어서 대중에게 널리 보급할 수 있기 때문에 하루빨리 한문 경전을 한글로 번역하여 대중 교화에 힘써야 한다고 주장했다.

보다 많은 대중에게 보다 쉽게 불교를 포교하려는 그의 이러한 노력은 역경사업에만 머물지 않고 한글로 된 찬불가를 짓고, 법당에서 오르간을 치고, 일요법회를 정기적으로 개최하며, 불교의례의 간소화에 앞장서는 등의 활동에서도 엿볼 수 있다.

(2) 사회적 구제

불교를 중생구제를 지향하는 종교로 개혁하기 위한 그의 노력은 법보시라는 전통적인 방법에 머물지 않고, 사회사업과 같은 적극적인 방법으로 나아간다. 불교의 최고선인 해탈은 물질적 충족에 의해서 성립하는 것은 아니다. 해탈은 욕망으로부터의 자유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생존경쟁이 치열하고 물질이 우선시되는 자본주의사회에서, 물질적 구제 없는 중생의 구제는 단지 구호에만 머물 위험이 있다. 다시 말해 사회구조적인 모순으로 인해 중생들이 직면하는 현실의 고통에 대한 해결 없이는 진리추구나, 욕망으로부터의 자유가 공허할 수 있기 때문이다.

백용성이 살았던 당시의 근대조선은 일본의 식민지국으로서 끊임없는 수탈 속에서 농촌의 생활은 피폐해질 대로 피폐해진 상황이었다. 백용성은 자본주의사회에서 경제적 자립의 중요성을 일찍부터 자각하여, 승려의 수행과 노동의 병행을 통해 불교사찰의 경제적 자립을 주장했다.

이러한 그의 주장은 단순히 교단의 경제적 자립에 머물지 않고, 중생의 물질적 안정, 구제라는 사회적 영역으로 확대되었다. 그리하여 “각 도시에 실업공장을 건설하고 불자들의 생활을 구제하여 주며 포교사를 두어 저들에게 포교하고, 각 농촌을 건설하고 각 지방기관을 설립하여 생산소비 조합들을 실시하며 농촌 교당을 건설하고 농촌순회 포교사를 두어 소작인의 전 가족이 신앙하게 하며 각 사원산림제도에는 밤나무 감나무 등을 종식하여 식품 생산을 넉넉하게 할 것”을 주장했다.

실제로 용성은 중국 길림성 옹성랍자 용산동에 많은 토지를 사서 불교도들로 하여금 손수 농사지어 먹고살 수 있도록 했으며, 사찰에 대대로 내려오는 사원토지와 사유재산을 이용하여 농사에 힘씀으로써 불교도들의 생활 안정을 도모할 것을 주장하기도 했다.  

4. 나오는 말

백용성은 대각교 운동을 통해 불교를 개혁함으로써 근대 조선불교가 안고 있던 모순과 폐단을 극복하고자 했다. 이러한 그의 개혁사상을 두고 학자들은 일본제국주의의 식민지정책에 대항해 민족문화 전통을 지키고자 했던 민족독립운동으로 평가하거나, 화두참구만을 제일로 하는 간화선 사상과 실천 형태를 불교 종단 내부에서 복구하고자 하는 보수적 개혁운동으로 평가하거나, 혹은 전통적인 불교에서 근대적인 불교로 나아가기 위한 가교로 평가했다.

이러한 평가들의 차이는 용성의 불교개혁론이 전개된 시대적 배경에 대한 이해와 밀접히 관련된다. 개혁론은 그 이론이 주장되는 시대적 상황과 밀접히 관련해서 성립한다는 사실을 고려할 때 백용성의 개혁론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가 살았던 당시 근대조선의 시대적 상황을 제대로 이해하는 것은 필수적이다.

근대조선의 시대적 상황과 관련해서 가장 중요한 사실은 일본제국주의의 침략에 따른 식민지화이다. 그리고 일본의 식민지 정책은 조선인들에게 한민족으로서 민족의식을 각성하게 하는 계기로 작동했기 때문에 백용성의 개혁사상에서 민족의식을 전제로 한 독립운동의 성격을 배제할 수 없다.

그러나 백용성이 살았던 근대조선의 시대적 상황은 일본제국주의의 저항만으로 설명하기에는 너무나 복잡하고 다양한 측면을 갖고 있었다. 대표적 예가 1876년 외세의 강압에 의해 전개된 개항으로 인한 서구 근대문명과 전통적인 조선사회의 만남과 충돌이다. 실제로 백용성은 불교개혁의 필요성을 31본산주지제로 대표되는 일본의 식민지 정책의 폐단 철폐뿐만 아니라 기독교나 사회주의의 반종교운동의 비판에 대응하기 위해서도 주장했다.

백용성의 불교개혁론은 일본제국주의, 전통과 근대의 만남, 서양과 동양의 만남과 같이 다양한 사상과 종교, 문화의 충돌 속에서 성립했다. 이러한 사실을 고려하면서, 근대조선에서 백용성의 개혁사상이 갖는 의미를 반성한다면, 우리는 그 안에서 훨씬 다양하고 풍부한 의의와 나아가 현대 한국불교에 미친 영향력의 크기를 발견할 수 있으리라 생각한다. 이러한 다양한 시각 속에서 백용성의 생애와 사상은 오늘날에도 여전히 살아 있는 진행형으로서 작동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

 

 

김정희
서울대학교 BK21철학교육사업단 연수연구원. 서울대학교 철학과 졸업, 동 대학원 석사, 박사(박사학위 논문 〈천태지의의 불교수행론 연구-불이론을 통해 본 원돈지관의 의미〉). 주요 논문으로 〈불교의 방편사상과 다원주의-천태지의의 방편사상을 통해〉 〈백용성의 대각교의 근대성에 대한 소고-마음[覺]을 중심으로〉 〈종단설립운동과 조계종의 근대적 의미〉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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