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차석 불교학자

몇 년 전 스티븐 베철러 의 <<붓다는 없다>>는 책을 읽은 적이 있다. 영국 사람인 작가는 인도와 스위스에서 공부했으며, 한국의 송광사에서 수행생활을 직접 체험하기도 한 실천가이자 불교학자라 말할 수 있다. 핵심은 붓다의 가르침은 존재하지만 집단 이기주의화된 교단처럼 붓다의 본질을 호도하는 불교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한국불교의 현실을 감안하면 너무나 쉽게 다가오는 책이라서 기억에 남아 있다.

새삼 책 이야기를 꺼낸 것은 작금의 불교, 특히 조계종단의 안팎이 너무 어수선하기 때문이다. 종립 동국대학은 가짜 박사를 교수로 채용해 세간의 이목을 집중시키더니, 연이어 제주도 관음사 사건, 인제 백담사 사건 등 크고 작은 일들이 봇물 터지듯 이어지고 있다. 이러한 사건이 매스컴을 장악하고도 종교로 살아남아 있다는 사실이 신기할 뿐이다.

사람 사는 곳에는 늘 다툼이 존재할 수 있다. 초기불교시대 역시 많은 다툼이 있었기에 사안에 따라 많은 계율이 시설되었다고 한다. 그렇지만 현재 붓다의 참 정신이 살아 있다면 세상을 놀라게 하는 사건들이 발생할 수 있을까 하는 의문은 감출 수 없다. 출가정신을 떠나 편의주의, 집단이기주의 등이 교단에 만연되어 붓다의 정신을 가리고 있는 것은 아닐까?

인간이 지니는 허위의식을 버릴 때 참다운 정신적 자유를 구가할 수 있다고 가르친 붓다의 외침은 어디로 사라지고 보이지 않는다는 점에 문제가 있다. 필자를 더욱 슬프게 하는 일은 지면이나 방송을 통해 알게 되는 일이지만 다툼 당사자들의 정당성을 확인하기 위해 율장 보다는 세속법에 고발한다는 점이다. 해방 이후 비구대처의 분규 속에서 자행되었던 구태들이 반성 없이 여전히 판을 치고 있다. 그러면서 그것이 불교라 말한다는 점에 아연실색하지 않을 수 없다.

과연 현재 붓다는 살아 있는가? 붓다가 살아 있는데도 저토록 아귀다툼을 벌이고 있는가? 和諍과 相生의 모습을 대신해 이기고 지는 모습을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것이 살아 있는 붓다의 모습일까? 아니라면 붓다는 스티븐 베철러의 말처럼 사라진 것인가? 사라진 붓다를 끌어않고 그토록 많은 사람들이 다투고 있는 것인가? 여전히 회의 속에 남아 있는 것은 붓다는 지금 살아 있는 것인가? 하는 점이다. 살아 있다고 가정할 때 그 붓다는 어떠한 모습으로 어디에 존재하는가?

붓다의 존재 유무에 대한 회의는 사실 어제 오늘의 문제는 아니다. 필자가 불교에 귀의하여 불교라는 종교를 신앙하는 신도가 된 이후 줄기차게 따라다니는 문제 중의 하나다. 필자가 아둔하기에 여전히 그 문제를 정리하지 못하고 이곳저곳을 기웃거리고 있는 것은 차치하고라도 보다 분명한 것은 붓다는 존재한다는 점이다. 다만 그가 어떠한 형태로 어디에 있는지 알고 있더라도 용기가 없어서 그것을 확인하지 못할 뿐이다.

어느 쪽이든 현재 전개되고 있는 조계종의 권력 암투나 크고 작은 사건들의 이면에 있는 요인들은 붓다께서 그토록 경계한 욕망의 표현에 다름 아니란 점이다. 진실한 사람들의 눈을 가리고, 진정으로 붓다를 찾고자 하는 사람들을 속이는 것은 ‘붓다를 몰라서, 그의 존재를 부정’해서 생긴 일이라 생각하지 않는다. 붓다가 누누이 강조했던 욕망의 포로가 된 것이며, 이 세상에는 나의 소유라 생각할 것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무아 무상의 법칙을 깨우치지 못한 것이 원인일 것이다. 그런 사람들에게 붓다가 존재할리 만무하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붓다는 존재하며, 반드시 존재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욕망의 포로가 된 사람은 붓다가 없다고 생각하더라도 그것이 ‘붓다가 존재하지 않는 이유’는 될 수 없다. 붓다는 여전히 존재하지만 붓다를 믿고 따르지 않은 것은 붓다의 허물이 될 수 없기 때문이다. 만일 그러한 것까지 붓다의 허물이 되어야 한다면 중생이 존재한다는 사실 자체는 희망이 없다. 길고 긴 어둠 속에서 빛의 고마움을 느끼지 못하는 존재와 다를 바가 없을 것이다.

필자는 붓다가 존재한다고 본다. 매일 나와 호흡을 함께 하고 있다. 형체는 없지만 늘 나와 이야기를 나누고 있으며, 때론 나를 슬프게 바라본다. 붓다가 나를 슬프게 바라볼 때는 내 생각이 욕망이란 전차에 몸을 실어보고 싶어 할 때다. 살아 있다는 사실을 욕망이란 전차에 몸을 맡겨보는 것에서 느끼고 싶어질 때가 종종 들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필자는 늘 붓다의 슬픈 눈매를 생각하면 욕망이란 전차에 타고 싶은 마음이 사라진다.

세상은 다양한 군상들이 존재하기에 나와 동일하기를 바라선 안 될 것이다. 다양한 만큼 다양한 업력이 파생되어 존재의 세계를 장식하고 있다. 붓다는 그 속에서 촛불로 존재하며 어둠을 밝히기도 한다. 때론 고단한 사람들의 동무가 되기도 하며, 때론 이교도의 모습으로 우리의 옹졸함을 꾸짖기도 한다. 처처에 붓다는 존재하며 우리와 함께 하지만 지금 한국불교는 그것을 부정하려는데 문제가 있는 것이다.

필자는 붓다가 존재한다고 믿고 있지만 그것이 어떠한 형태로 있는가에 대해선 한마디로 확답할 수 없다. 존재의 다양성만큼 붓다가 존재하는 모습도 다양하다고 생각할 뿐이다. 다만 생각은 고독한 사람, 힘없는 사람, 그늘 진 곳, 어두운 곳, 낮은 곳에 붓다가 있길 소망할 뿐이다. 예수를 믿지 않았던 어느 목사님의 아들이 데모로 잡혀 간 경찰서 유치장에서 예수를 발견하곤 울었다는 이야기는 그래서 필자를 감동시킨다.

그런 점에서 스티븐 베철러가 ‘붓다는 없다’고 한 말은 사실 붓다를 찾아야 한다는 점을 우리에게 강조하는 것이라 생각한다. 애초에 스티븐 베철러가 말한 것과 같은 붓다는 없다. 역사적으로 실존했던 고타마 싣달타는 이미 죽은 지 3천년에 가깝다. 그런 붓다가 없다고 말하는 것은 너무나 당연하기에 이상할 것이 없다. 이상하다면 그렇게 말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사실일 것이다. 아직도 여전히 불교라는 종교가 존재하는 데 붓다를 찾을 수 없다는 것은 이 시대의 불교도들이 허위의식에 사로잡혀 있거나 본질을 호도하고 있다고 밖에 말할 수 없다. 붓다가 없다는 것은 불교에 희망이 없다는 말과 다르지 않다.

붓다가 어디에 있어야 하는가의 문제는 오늘을 사는 필자의 문제만은 아니었다. 많은 불교 사상가, 내지 의식 있는 불교도들의 문제였다. 그런 사실을 필자는 <<법화경>> 방편품에서 발견한다. 사리불이 부처님에게 고백하는 장면이 있는데 그는 ‘저는 옛날 부처님께서 오랜 시간을 공, 무상, 무원을 가르쳤기에 다 깨달은 줄 알았는데 이제 보니 그것은 착각이었습니다. 오늘 법화경의 설법을 듣고 비로소 깨달았습니다.’하는 구절이다.

공, 무상, 무원은 초기불교 이래 수행자들이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가르침이었다. 대승불교 역시 이러한 사상의 연장선상에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공, 무상, 무원이 전부가 아니라 말하고 있는 점이다. 교조적 관념에 사로잡혔기 때문에, 모든 것이 공인데 구태여 몸을 수고롭게 할 일이 무엇인가 하는 점 등 염세주의 내지 안일주의 혹은 방관주의에 빠졌기 때문이다. <<법화경>>을 편집한 불교운동가들은 그러한 점을 방지하기 위해 ‘부처님의 지혜를 개시오입’하기 위해 부처님께서 이 세상에 오셨다고 선언했던 것이다. 중생의 아픔을 함께 하고 그들에게 부처님의 길을 갈 수 있도록 하고 있다는 점에서 사라져 가고 있던 붓다를 다시 찾아 살리고 있다고 생각한다.

우리는 지금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가? 어디서 서성거리고 있는가? 붓다를 찾는 것인가 아니면 욕망을 추구하고 있는가? 이 문제에 대한 해답은 개개인들 자신은 잘 알고 있을 것이다. 다만 필자는 이 시대의 불교도로서 우리 모두 나의 붓다를 찾아 나서야 한다고 말하고 싶다. 책 속에서든 아니면 거리에서든 내 부처를 찾지 않으면 내일의 붓다는 존재할 수 없다고 본다. 마침 종단의 다툼이 우리를 슬프게 하지만 그러한 것은 허상이요 순간에 불과한 것이니 ‘나의 붓다는 우리를 기쁘게 할 것’이란 성찰 속에서 붓다가 존재한다는 사실을 확인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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