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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禪)의 구름에서 내려오기* / 스튜어트 라크스
―미국 선의 현황에 대한 비판
[45호] 2010년 12월 05일 (일) 스튜어트 라크스 장은화 역

선불교는 D.T. 스즈키의 저술을 통해서 미국에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그는 자신의 저술에서 선에 대해 종래와 다른 현대적 해석을 고취했다. 스즈키는 재가자로서 선수행을 해 왔던 일본의 저술가이자 지식인이었으며, 20세기 초 일본의 국가주의적 지적 풍토 속에서 글을 쓰면서 선이 대승불교의 맥락에서 벗어나 있고, 특별한 종류의 ‘순수’ 체험에 중점을 두며, 계율에 대한 전통불교의 관심을 탈피했음을 강조했다. 오늘날 아베 마사오(阿部正雄)와 ‘교토학파’로 대표되는 이런 견해는 서양의 전통과 가장 다르면서도 또한 일본 색채가 가장 두드러진 그런 불교를 강조했다. 이런 견해로 인하여 서구에서는 선불교가 오로지 인식적 의미가 있는 전통으로서 널리 이해되었다. 즉 공(空), 불이(不異), 절대 무(無) 사상에는 과다하게 몰두하지만 업(業), 도제(道諦, Ma-rga), 자비 혹은 심지어 불성의 ‘묘덕(妙德)’에 대해서는 거의 논의가 없었기 때문이다. 이와 같은 관점으로는 불자들의 실제 삶을 이루고 있는 지계(持戒)와 같은 긍정적인 규율에 적절한 관심을 두게 하지 못하고, 불자들은 일상적인 세상을 진지하게 받아들이지 못한다는 생각을 초래하기 쉽다. 이런 관점으로 인하여 돈오(頓悟)가 지나치게 강조되면서, 아울러 ‘정견(正見)’을 함양하는 것은 (깨달음이 아닌) 자기계발로, 다시 말해서 점수(漸修)로 간주된다는 생각도 나오게 되었다.
선불교는 서구에서 주로 스즈키의 모더니즘적인 견해를 대체로 무비판적으로 수용했던 대졸자 계층 위주로 수용되었다. 이 시기(제2차 세계대전 이후)의 미국인들이 선에 가장 매료되었던 까닭은 인식적으로 확실하다는 기대감을 가지고, 체계적인 명상수련을 통해서 순수한 깨달음의 체험을 얻을 수 있다는 생각 때문이었을 것이다. 심리학에 기반을 둔 심성변화 프로그램에서는 그 지도자들도 (프로그램 참여자들과 마찬가지로) 동일한 탐구자인 것으로 보이지만, 선불교에서는 가르치는 사람이 깨달음이라는 불교의 목적을 실제로 실현해서 일상생활에서 그 깨달음을 지속적으로 보여주는 스승임을 보증해 주었다.
미국의 선 학도들은 이런 스승의 모든 행동을 순수하고 사심 없다고 간주할 정도로 경외감을 품는 경향이 있다. 스승을 이런 식으로 이상화하는 경향은 어떤 면에서는 제자들이 미숙하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선 단체와 스승 자신들이 강력히 권장하기 때문이기도 하다. 최근 필자는 미국 로쉬(老師)가 자신의 책을 홍보하는 것을 라디오에서 들었다. 그는 선이 석가모니로부터 현재까지 ‘이심전심’ 되어 온 독특한 계보를 가지고 있는 점과 로쉬는 어떻게 붓다를 대신해서 말하거나 서 있는지를 강조했다. ‘깨달은 자’의 존재 때문에 선불교에 매료되었던 학생들은 스승의 행동이 비난의 대상이 되지 않는다고 생각하게 되었지만, 이것은 불행한 결과를 초래한 비현실적인 태도였다.
1975년부터 오늘날까지 끊이지 않고 이 선원 저 선원에서 스캔들이 차례로 터져 나왔다. 그 내용은 많은 선 스승들이 제자들을 성적으로, 금전적으로 착취해 왔다는 것이다. 연루된 인사로는 뉴욕시 선연구협회(The Zen Studies Society in New York City), 샌프란시스코 선원(The San Francisco Zen Center), 로스앤젤레스 선원(The Zen Center of Los Angeles), 로스앤젤레스 시마론 선원(The Cimarron Zen Center in Los Angeles), 지금은 없어진 메인 주 바 하버의 칸제온 선원(The Kanzeon Zen center in Bar Harbor, Maine), 메인 주 서리의 모건 배이 젠도(The Morgan Bay Zendo in Surry, Maine), 프로비던스 선원(The Providence Zen Center), 토론토 선원(The Toronto Zen center) 등의 선원장들로서 여러 차례 문제가 되었다. 이들 선원은 규모와 영향력이 가장 크다. 대부분의 경우 스캔들은 수년 동안 지속되다가, 잠잠해진 듯하다 다시 일어나곤 했다. 이를테면 한 선원에서는 한 명의 스승과 여러 여인이 연루된 섹스 스캔들이 25년여 동안 되풀이되기도 했다. 이런 스캔들이 만성적으로 끊임없이 일어나면서 미국의 거의 모든 주요 선원에 영향을 주어 왔다.
강조되어야 할 점은 문제의 근원이 성적 행동 그 자체에 있는 게 아니라 스승의 권한 남용과 이런 사건들의 기만적인(그리고 착취적이기도 한) 성격에 있다는 것이다. 이런 사건들은 은밀히 이루어졌고 심지어 공공연하게 부인되기도 했다. 연루된 학생들에게 스승들은 정사(情事)의 성격에 대해서 종종 거짓말을 했다. 어떤 경우 스승들은 성적 체험이 제자들의 정신적 발전을 증진시킬 것이라고 주장했다. 한 스승은 자신의 다중적인 정사가 발각되자 그것이 선원을 강화시키는 데 필요하기 때문이었다고 변명했다. 짐작건대, 이 말은 연루된 여성이 그의 선원의 지부(支部)를 운명하면서 스승과의 은밀한 성관계를 유지하게 되면 서로의 이해와 수행을 심화하리라는 이유 때문이었을 것이다.
이런 사람들이 저지르는 권력 남용은 거의 모든 경우 그 파급 효과가 컸다. 연루된 학생들은 철석같이 믿었던 사람에게 이용당했음을 알고 종종 엄청난 충격을 받았다. 어떤 이들은 후에 수년 동안 심리치료를 받아야만 했다. 신경쇠약과 결혼 파탄 사례도 있었다. 선원들은 스승의 행위를 개탄하는 사람들과 그런 행위를 부인하거나 변명하는 사람들로 분파가 형성되었다. 옹호자들은 이런 사건을 완강히 부인하지 못할 경우, 스승의 “성스런 광기(crazy wisdom)”라고 설명해 버리곤 했다. 아니면 스승도 완벽한 것은 아니라고 말하면서 피해자를 비난하거나 사건을 아예 무시해 버리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또 다른 구실은 학생이 아직은 스승을 진정으로 이해하지 못한다고 둘러대는 것이었다. 미국에서는 선 스승에 대한 훈육이 거의 이루어지지 않았다. 이런 부적절한 일을 반대하는 사람들은 제 발로 떠나가든지 아니면 스승에게 충성하는 사람들이나 스승 자신에 의해 선원에서 추방되었다. 떠나가는 학생 중에는 수행을 다시 시작한 사람도 있었지만, 환멸과 비탄을 크게 느낀 나머지 불교를 완전히 버린 사람들도 있었다.
권력 남용에 노출된 미국의 선 스승들이 미국이나 일본에서 다른 선 스승들에게 공개적으로 비난받는 경우는 거의 없었다. 한번은 일본의 선 조직에 소속된 사람들이 한 학생의 수련을 단절시키겠다고 협박했다. 그 학생이 권한을 남용하던 일본 승려의 추방을 원했었기 때문이다. 그러자 불평하던 그 학생은 침묵을 지켰고, 훈련을 끝마쳤으며, 오늘날엔 유명한 로쉬가 되어 있다. 문제의 그 승려는 25년 동안 자신의 직책을 이용해 왔다고 앞에서 설명했던 그 로쉬다.
이런 문제들을 곰곰이 생각해 보면서 나는 선의 역사를 보다 더 자세히 조사해 보게 되었다. 특히 선불교의 특색을 드러내 주는 특정 핵심용어에 대해서 말이다. 예를 들어, 미국의 선 학생들의 대화에 그렇게 많이 등장하고 또 스승들에게 그 많은 권위를 부여해 주는 ‘전법(傳法)’과 ‘로쉬’ 같은 용어는 무엇을 뜻할까? 전법에는 오류가 없을까? 전통적으로 승가의 행동 규제는 어떠했을까? 여러 종교 가운데 유독 선(禪)만이 다수의 수행자들이 믿고 있는 도덕적 혹은 윤리적 관점을 갖추고 있지 않단 말인가? 이런 문제들은 관용적인 미국 문화에서만 나타나는 걸까? 우리는 선의 역사에 대해 지나치게 이상화된 견해를 가지고 있을까? 선 수행의 모범이라고 할 수 있는 사람들이 주변 사람과 그 상황을 책임 있게 처리하지 못한다면, 우리 수행에서 뭔가 ‘모자란’ 것이 있는가? 선의 관점에서 볼 때 진리는 말로 표현될 수 없고 오히려 일상생활의 자발적이고 자연스러운 활동 가운데서만 암시될 수 있다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 공안 수행은 특별하게도 실제 세상에서 사람들이 살아가는 방식과 연결되지 않은 채 이루어지고 있는가? 아니면 보다 근본적인 면에서, 공안 수행 그 자체가 불도(佛道)를 완성한다고 잘못 생각되고 있는가? 그것 자체가 목적이 되어 버렸나? 선 수행과 공안 공부는 특별히 해탈을 위해서가 아니라, 본성을 되찾고 특정 양식의 행동을 익히는 독특한 수련은 아닌가? 스승/학생의 관계에서 바뀌어야 할 점이 있을까? 명예롭지 못한 스승이 법을 이어받는다면 어느 정도 신뢰할 수 있을까? ‘승려(monk)’란 용어 자체에는 어떤 의미가 있을까? 서구인이 수행하고 있는 선에서, 특별히 권위적이고도 의식화된 성격을 지닌 일본 문화의 것을 제외한다면, 과연 어느 정도가 동아시아의 것인가?
이런 의문점은 본 논문의 주제를 벗어나므로 전면적으로 다루지 않겠지만, 필자는 이런 주제를 검토하고 신중하게 토론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문제의 핵심은 이렇다. 우리가 무비판적으로 수용해 온 이상화된 견해를 바탕으로 선불교가 전개되기를 바라는 것과는 다르게, 실제 선불교라는 제도는 세상에서 어떤 식으로 전개되고 있는가?
그러면, 이런 이상화된 견해의 내용은 무엇인가? 먼저 ‘전법’이란 용어의 뜻을 고찰해 보자. 널리 인정된 견해를 따르면, 전법이란 학생이 ‘붓다의 마음[佛心]’에 도달했으며 그 깨달은 바가 스승과 동등하다는 것을 그 스승이 인가하는 것이다. 선에만 있고 또 역사적인 붓다에게로 거슬러간다고 하는 이 면면부절(綿綿不絶)의 깨친 마음이 바로 현재 스승이 가지는 상당한 권위의 개념적 바탕이 된다. 선 전통의 관점에서 본다면, 전법이야말로 스승을 붓다로 여기도록 정당화해 주는 것이다. 이것은 당나라 때부터 지속되어 온 중국 선의 전통이다. 선종과 당시의 다른 중국불교 종파가 다른 점이 있다면, 그것은 선종이 신뢰성의 기반으로서 특정한 텍스트가 아니라 이러한 정신적 계보−즉, 교외별전(敎外別傳)−를 이용하는 것이다. 이런 식의 해석에 의하면 전법이 오로지 학생의 정신적인 성취를 기반으로 이루어지는 것으로 생각될 수 있다. 조사해 보면 ‘전법’이란 용어는 우리 서양에서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더 불명확하고 애매한 용어임이 밝혀진다.
틀림없이, 전법은 학생이 스승과 마찬가지로 깊은 마음의 깨달음을 도달했음을 인정해서 주어진다. 이런 견해는, 더 정확하게 말해서 대체로 오직 이런 견해만 ‘이심전심’이라고 불린다. 이심전심은 제자의 깨달음을 논리적으로 암시해 준다. 그러나 전법은 다른 이유로도 행해졌다. 몇몇 학자들에 따르면, 전법이란 사실상 한 계보에 소속되기 위한 자격으로 이해되었으며, 언제든 다음과 같이 정당하다고 여겨지는 이유가 있을 때 행해졌다는 것이다. 즉, 사찰의 안녕에 꼭 필요한 적절한 정치적 접촉을 취할 때, 학생과 개인적인 유대감을 확고히 할 때, 외국에 법을 전파할 전법자의 권위를 높일 때, 혹은 죽은 수령자(受領者)를 붓다의 ‘혈연’에 합류시켜서 구제할 때(사후 전법, 중세 일본의 경우) 전법되었다는 것이다. 적어도 중국 송나라(AD 960~1280) 말경에는 고위 직책의 승려들에게 의례적으로 전법이 이루어졌다. 아마도 그들의 주지 소임에 장애를 없애기 위해서였을 것이다. 분명히 말해서 깨달음은 전법에 꼭 필요한 것으로 간주되지 않았다. 조동종 개혁자인 만잔 도하쿠(卍山道白, 1636~1714)는 일본선의 대가인 도겐(道元, 1200~1253)을 전거로 인용하면서 이 마지막 견해를 뒷받침했다. 이것은 조동종의 공식적인 견해가 되어 오늘날까지 계속되고 있다. 
필립 카플로(Philip Kapleau)는 이런 이야기를 들려준다. 즉, 일본 임제종의 나카가와 소엔(中川宋淵, 1907~1984) 로쉬는 갬포(慧開, 1866~1961) 로쉬가 자신(소엔 로쉬)을 후계자로 지명했을 당시, 견성(見性)하지 못한 상태였다고 말했다는 것이다. 한 학자의 해석에 따르면, 공식적인 전법식이란 실제로 학생을 제도적으로 인정된 계보에 편입시키는 수여 의식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제도적 역사의 중요성에 대한 교훈으로서 현재 일본 조동종을 살펴보자. 조동종은 모든 조동종 사찰에는 주지가 있어야 하고 또 모든 주지는 전법자여야 한다는 도겐 시대의 제도에 부합하기 위해 힘쓰고 있다. 1984년 일본에는 조동종 사찰이 14,178개, 조동종 승려 수가 15,528명이었다. 모든 주지는 승려이어야만 하기 때문에 결과적으로 거의 모든 조동종 승려(95%)는 전법을 받은 게 된다. 주목할 점은 이런 승려의 대다수가 사찰에서 보내는 기간이 3년 이하라는 것이다. 가장 흥미로운 점은 조동종의 텍스트에 전법 의식에 대해서는 많은 내용이 있지만 전법의 자격에 대해서는 거의 찾아보기 힘들다는 것이다.
‘로쉬’라는 용어 역시 다양한 방식으로 사용되어 왔다. 여기서 또다시 선 학도들 사이에서는 ‘로쉬’가 ‘스승(master)’, 즉 완전한 깨달음을 얻어서 모든 몸짓이 진리를 그대로 드러내는 경지에 도달한 사람을 의미한다는 다소 이상화된 해석이 만연해 있다. 역사적으로 볼 때, 일본에서 ‘로쉬’는 정말 가끔씩 정신적 발전에 근거한 높은 지위를 가리키기도 했지만, 그 외에는 단지 존경을 표시하는 호칭으로 사용되고 있다. 일본어(특히 조동종)의 용례에서 이 말은 단지 어떤 관리직을 지칭하는 경우가 있는 것 같다. 중국이나 일본 혹은 다른 어떤 곳에서도 그 어떤 기준을 근거로 두고 로쉬가 되는 자격을 증명해 주는 권위자는 없다. 확실히 정신적인 성취에 근거를 두지도 않았다. (임제종) 하나조노(花園)대학교의 전임 총장인 소코 모리나가(盛永 宗興, 1925~1995) 로쉬도 한때 언급한 바 있듯이 “로쉬란 스스로 그런 호칭을 붙인 사람들이고 또 다른 사람들에게도 그렇게 하도록 해 줄 수 있는 사람들을 말한다.”라는 말은 틀린 게 아니다.
흥미로운 사례를 필립 카플로라는 사람에게서 볼 수 있다. 카플로는 ‘로쉬’라는 칭호를 사용하고 그의 학생들도 대다수의 선 학생들이 그렇듯 그를 그렇게 호칭한다. 카플로는 직접 가르치기도 하고 또 책과 글을 쓰기도 하면서 미국과 해외에 선을 전파하는 데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적어도 그는 오랜 세월 선을 가르치면서 스캔들에 연루되지 않고 지내왔다. 이 스캔들 문제의 경우 공식적으로 전법 인가와 로쉬 칭호를 받은 다른 많은 사람들이 뭐라고 말할 수 없는 부분이다. 그러나 카플로는 자신이 스승 야스타니(安谷白雲, 1885~1973) 로쉬로부터 법을 이어받지 못했으며, 스승이나 다른 누구로부터도 로쉬라는 칭호를 받은 적이 없다고 분명하게 말했다. 본질적으로 볼 때, 그 칭호는 그가 스스로 취한 것이다. 이 말은 그가 다른 사람보다도 더 자격이 있느니 없느니 하는 그런 의미가 아니다. 흥미롭게도 카플로는 몇몇 제자들에게 법을 ‘전해’ 주었다. 이 계보는 근본적으로 그 자신으로부터 시작된 것으로서 다른 모든 선의 계보와 상반된다. 선의 계보는 석가모니 붓다까지 거슬러 가는 면면부절의 신화를 적어도 수사적으로라도 유지하고 있으니 말이다.
“한국선에서 로쉬/선사와 상응하는 방장(方丈)은 놀랍게도 선출직으로 최초 10년의 임기가 주어진다…… 방장이 일을 제대로 못 해낼 경우 50명의 승려가 탄원하면, 해임 투표를 할 수 있다…… 승려는 특정한 스승보다는 동료 선승과 더 밀접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다.” 이것은 미국인들이 유일하게 정통이라고 일반적으로 여기고 있는 일본의 모델과는 완전히 다르다.
‘승려(monk)’라는 용어 또한 면밀히 살펴봐야 할 말이다. 이 한자 용어는 ‘출가자’를 의미하며, 가족을 떠나서 승려의 규범을 따르는 사람들에게만 적용된다. 이 규범에는 무엇보다도 독신이 포함된다. 일본인들은 ‘승려’와 ‘성직자’라는 말 둘 다에 대해서 동일한 단어(오보산, お坊さん)을 사용하며 한국의 몇몇 종단처럼 결혼을 허용한다. 미국에서 ‘승려’는 일본 계통의 선가(禪家)에서 사용될 때 명확히 규정된 의미가 없다. 이 말이 미국에서 사용될 때 독신이란 의미는 거의 함의되지 않는다. 스스로를 승려라고 부는 사람은 기혼자, 동거자 혹은 데이트 중인 사람일 수도 있다. 여승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다. 심지어 ‘남자 승려’가 ‘여승’과 데이트하는 경우도 있을 수 있다. 스스로를 남자 승려 혹은 여승이라고 지칭하는 사람 중에는 사실상 독신자가 있을 수도 있지만, 미국 선 단체에서 이런 사람들은 소수일 것이다. 미국 선승들은 승려가 지켜야 할 다른 규범, 이를테면 오락, 음주, 이성 교제를 멀리하기 등도 역시 지키지 않는 것 같다. 미국의 한 선 단체는 스스로 독신이라고 여기는 멤버들 간의 성관계를 인정하고 합법화하기 위해 ‘정신적 결합(spiritual union)’이라는 새로운 의식을 만들기까지 했다.
‘전법’ ‘로쉬’ 그리고 ‘승려’라는 용어에 내재한 이상화가 미국 선에서 나타나는 문제의 한 원인이 되었다. 학생들은 칭호에 부여된 역할의 성격상 다른 어떤 사람에게도 보여주지 않을 신뢰를 그 스승에게 정례적으로 보여준다. 이것은 종종 아주 완전하면서도 자연스러운 신뢰다. 왜냐하면 법복을 착용한다는 것은 전통적으로 이기적인 동기를 등지면서, 중생을 구제하고 해악을 가하지 않겠다는 서원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이런 식의 종교 관행에 친숙하지 않은 사람들에게는, 학생이 그 정도로 복종하는 게 놀라울 것이다.
많은 사람들은 정신수행에서 스승에 대한 이런 식의 신뢰를 인정하지만, 스승이 학생지도의 책임을 맡을 수 있을 만큼 정서적인 성숙이나 수행력이 갖추어지지 않을 경우 문제가 발생한다. 스승이 비록 일정 수준의 깨달음에 도달했다 할지라도, 그것은 학생들이 가지고 있는 이상화된 스승상이나 선 단체에서 홍보하는 그 모습에는 미치지 못하는 경우가 매우 빈번하다. “선의 전통에서 언설로는 전법이 이루어질 경우 매번 완벽하기 때문에, 법을 받은 사람과 전해준 사람은 동등한 정신적 수준을 가진다고 주장한다…… 전법의 주요한 특징은 그 참여적 성격이다. 스승으로부터 인가를 받게 되면 조사의 반열에 들어서 고대의 현자들과 역동적으로 교류하게 된다. 수행자는 깨달은 스승의 계보 안에 드느냐 못 드느냐일 뿐, ‘거의 깨달았다’든지 ‘스승과 다소 비슷하다’ 같은 중간은 없다.”
선에서는 들여다보기와 내다보기라는 두 과정을 확인할 수 있다. 들여다보기는 명상의 과정이고, 내다보기는 스승을 삶의 본보기로, 수행의 자극제로 삼는 것이다. 그노시스파의 종교 관습에서 흔히 보이는 것처럼, 선 스승은 실재를 최종적으로 결정하는 사람이다. 스승은 학생의 통찰력/지혜의 수준을 판단할 뿐 아니라, 적어도 더 가까운 학생들에 대해서는 제자의 일거수일투족에 대해서 종종 의견을 제시하고 판단을 한다. 그러나 우리가 보았듯이 학생이 스승을 보는 관점과 스승의 실제 삶은 종종 심각한 괴리가 있다. 학생들은 스승을 그 어떤 행동 규범으로도 판단하지 않는다. 단지 학생 스스로가 스승에 대해서 그런 판단을 내릴 만한 권위를 가지고 있지 못하다고 느끼기 때문이다. 스승의 권위를 손상시키는 비판이 일게 되면, 학생들은 또한 그 스승 아래서 수년 동안 해 온 자신들의 수행의 신뢰성에도 의혹이 제기될까 봐 우려하기도 한다. 어떤 이들은 아직 미숙한 단계에 있는 미국의 선 단체를 보호하고 싶기도 하고 또 대중 스캔들의 폐해에 일조할까 봐 망설이기도 한다. 또 어떤 이들은 스승으로 승진하는 것이 위태로워질까 봐 우려한다.
이미 언급한 대로, D.T. 스즈키 및 몇몇 사람들로 인해서 선에 규정된 도덕성이란 없다는 믿음이 제기되었지만, 선의 역사적인 시초를 살펴보면 상황은 다르다. 선이 시작된 중국에서 선찰은 백장(百丈, 749~814)의 청규 때문에 다른 사찰과 구별되었다. 백장은 승가공동체의 구성원들에게 엄격한 행동규범을 내리고 그에 어긋나는 행위를 저지를 때는 혹독한 처벌을 가했던 것으로 생각된다. 밝혀진 바에 따르면, 백장이 독립적인 선원수행 제도를 세운 고전적인 이야기는 A.D. 960년경에 쓰인 《선문규식(禪門規式)》이라는 한 권의 책에서 유래한다. 이 텍스트에 의하면 “청규를 크게 어긴 자는 자신의 방망이로 맞았다. 그의 승복, 발우 그리고 승려의 기물들은 대중 앞에서 불태워졌으며 승적은 박탈당했다. 그런 다음 불명예의 징표로서 쪽문을 통해서 (사찰 밖으로) 쫓겨났다. 이 청규는 모두에게 적용되었다.” 백장은 이어서 “식견을 갖추고 계율을 잘 지키는 사람이 주지가 되어야 한다.”라고 권고했다. 이것은 선 생활에 대한 도덕적, 사회적 측면을 명백히 암시하고 있다. 이것이 독특한 불교종파로서 최초 형성기부터 전해 내려온 선의 논리다. 학생들이 스승에게 과다한 권한을 부여했다 해도, 그것이 그 많은 선 스승들이 권력을 남용해 온 이유를 말해 주지는 않는다. 모든 스승들이 다 그런 일을 저질렀던 것은 아니니까 말이다.
미국 선에서 자주 제기되지 않는 질문이 있는데 그것은 이런 것들이다. 정신적 성취와 행동 사이에는 어떤 연관이 있는가? 제도적인 인가를 받아서, 즉 법을 이어받아서 깊은 통찰력을 갖추었다고 하지만 행동은 무책임한 경우 이런 명백한 불일치는 어떻게 생각해야 하는가? 숭고한 칭호와 오랜 명상 수행을 겸비해 온 스승들이 왜 이렇게 이기적이고, 자기 잇속만 챙기고, 부정직하고, 파괴적으로 행동하는지는 이해하기가 어렵다. 《육조단경》에는 “그것(지혜)은 실천하지 않으면 망상과 허깨비와 같다.”고 쓰여 있다. 이에 대해서 천태종을 창시하고 중국선의 가장 포괄적인 지침을 저술했던 지의(天台智顗, 531~597)가 어느 정도 해명을 해 주고 있다. 그는 깊이 집중하려고 노력하면 번뇌가 조장되고 평상시에 안 보이는 다양한 느낌과 욕망이 일어나면서 수행자의 수행을 방해할 수 있음을 알았기 때문이다. 어떤 경우에도, 스승의 깨달음 경지를 의심하는 경우는 드물다.
깨달음을 정적인 것으로 묘사하고 간주하는 데 문제가 있는 것일까? 작용하는 것도 포함하는, 보다 더 역동적이 관점이 아니라 오직 있는 것만을 바라본다는 의미에서 말이다. 체험을 객관화하기보다는 작용에 초점을 맞추기도 하는 불교의 깨달음도 역시 상황 및 연관성, 즉 타인과의 관계 그리고 사회 전반과의 관계를 우선적으로 강조한다.
깨달음과 수행의 관계에 대한 문제는 8세기 말부터 줄곧 선의 전통 속에서 지속되었다. 이런 맥락에서 깨달음이란 실재의 본성에 대한 깊은 통찰의 체험을 가리킨다. 수행이란 깨달은 관점, 즉 타인들도 완전한 인간성을 가지고 있으며 우리도 그들과 서로 연관되어 있다는 각성에서 하루하루를 살아가는 것으로 볼 수도 있다.
중요하고도 영향력 있는 선 스승인 마조(馬祖道一, 709-788)는 돈오(頓悟) 체험이 내재적으로 아주 철저해서 모든 불도(佛道)가 그 체험에서 실현되고 완성된다고 주장했다. 이런 견해는 “돈오돈수”로 알려지게 되었다. 또 다른 중요 선사들, 이를 테면 종밀(圭峰宗密, 780-841), 연수(永明延壽, 901~975), 그리고 한국의 지눌(知訥, 1158~1210) 등은 돈오가 완전한 깨달음을 줄지 모르지만 그것은 아마도 특출한 근기를 가졌던 육조혜능과 마조 같은 사람들에게만 해당될 것이라는 견해를 폈다. 이들보다 근기가 하열한 평범한 사람들은 깨달음의 체험을 통해서 사실상 자기 본성의 진짜 모습을 볼 수 있다고 해도 이기심은 없어지지 않는다. 존재의 혼란과 같은 망상들은 깊은 체험에 의해 극복될지 모른다. 그런데 탐진치(貪瞋癡)같이 더 뿌리 깊은 망상들은 “우리가 본 것을 생생한 체험으로 만들고 또 우리의 삶을 거기에 맞게 살아감으로써 극복될 수 있을 뿐이다.” 윤리적 삶에 대한 불교의 계율은 절제와 자제뿐 아니라 타인에게 적극적으로 자비를 베푸는 것도 포함한다. 연수 선사는 이 문제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했다.  

현전(現前)하는 상(相)이 아직 끊어지지 않고 번뇌와 습기가 잔존하거나, 눈에 보이는 것마다 정(情)이 일어나며 마주치는 것마다 장애가 발생한다면, 비록 무생법(無生法)을 알았다고 해도 그 힘은 아직 부족하다. 그런 알음알이에 집착해서 “나는 이미 번뇌의 성품이 공(空)하다는 사실을 깨달았다.”고 말해서는 안 된다. 나중에 마음을 닦아가기로 결심할 때 수행이 그와는 반대로 전도될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만일 어떤 사람의 말과 행동이 모순된다면 그의 수행이 옳은지 그른지 입증될 수 있다는 것은 명백해진다. 그대의 능력이 얼마나 강한지 측정해 보라. 스스로를 속여서는 안 된다.
역사적으로 볼 때, 마조계는 살아남아서 송대(960~1280)로부터 현재까지 선의 전통을 지배해 왔지만 종밀계는 사라져 버렸다. 그 결과 돈오는 돈수를 수반한다는 견해가 선불교의 공식적인 수사법이 되고 말았다. 이와 상반되지만 정통적인 선의 견해, 즉 돈오 이후에 점수가 뒤따라야만 한다는 견해는 대체로 경시되었다. 종밀은 “망념으로부터 깨어남은 몰록 있을 수 있지만 범부가 성인으로 변화되는 것은 점차적이다.”라고 말했다. 대다수의 스승들은 확철대오한 붓다가 아니고 수행이 더 필요한 사람들이다. 우리는 그들을 대할 때 이 점을 명심해야 한다. 선 수행에서 우리는 자신의 부족한 점에 집중해야 하지만, 타인의 행위(심지어 스승의 행위까지 포함해서)를 볼 때는 분별력이 필요하다. 달라이 라마는 학생의 스승관(觀)에 관해서 이렇게 쓰고 있다.
 “……지나친 신뢰와 깨달음의 순수성에 대한 집착은 아주 쉽게 부패할 수 있습니다.” ■

 

스튜어트 라크스(Stuart Lachs: 1940~ ) 
미국의 선 수행자. 브루클린 대학 수학과 학사, 석사. 1967년 뉴욕시에서 선수행 시작. 이후 일본선, 중국선, 한국선을 두루 수행함. 1980년대 초 송광사에서 3개월 동안 수행하기도 했음. 1990년대 초 일본선의 학술적인 면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고, 그 후 종교사회학도 연구 중임. 이후에도 “Means of Authorization: Establishing Hierarchy in Ch’an/ Zen Buddhism in America”(1999); “Richard Baker and the Myth of the Zen Roshi”(2002); “The Zen Master in America: Dressing the Donkey with Bells and Scarves”(2006); “The Aitken-Shimano Letters”(2010) 등의 글을 통해서 비슷한 논지의 주장을 펴고 있다. 위의 글은 인터넷 주소 http://www.terebess.hu/english/lachs.html#baker에 가면 확인할 수 있다.

 

장은화 
경희대 대학원(영문학 전공) 졸업. 동국대 대학원 선학과 박사과정 재학 중. 불교번역가. 저서로 Journey to Korean Temples and Templestay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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