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일 강제병합 100년의 기억을 중심으로

1.

제국주의는 제나라 세력을 바깥으로 넓히기 위해 다른 민족이나 다른 나라를 상대로 한 정복 활동으로 간추릴 수 있다. 제국주의 국가의 영토 확장은 지난 19세기와 20세기 초에 걸쳐 절정을 이루었다. 영국을 비롯하여 프랑스, 러시아, 독일, 이탈리아, 미국 등 이른바 구미 열강은 물론 후발 제국주의 일본까지도 뛰어들었다. 이들 국가에서는 19세기 들어 고도로 성장한 자본주의가 대외 팽창을 부추겼다는 것이다. 제국주의는 제 나라의 우월성을 강조할 요량으로 다른 민족의 전통문화마저 종속시키기를 주저하지 않았다. 이를테면 피지배 국가의 문화유산 약탈이 대표적 사례다.

이는 다른 민족의 역사와 내면적 정신세계까지 소유하겠다는 악랄한 문화식민주의 사고가 영토제국주의와 맞물려 돌아간 징표일 수도 있다. 유럽을 여행하노라면, 곳곳에서 만난 약탈 문화재의 위용에 깜짝깜짝 놀라기가 일쑤다. 아무런 일이 아니라는 듯 천연덕스럽게 내놓은 약탈 문화재에서는 정복자의 부도덕한 야만성과 빼앗긴 이의 슬픔이 함께 묻어난다. “역사는 문명을 만들어 냈지만, 정복자는 문화를 약탈했다.”는 토머스 칼라일의 말을 상기시키는 서글픈 풍경이 아닌가 한다.

세계 어디에서도 해가 지지 않는 나라를 자부했던 영국의 제국주의를 상징한 대영박물관에서 쉽게 만나는 ‘파르테논 마블스’에는 안하무인(眼下無人)의 오만(傲慢)이 겹친다. 1810년 당시 터키에 주재한 영국 대사 토마스 부르스는 그리스 파르테논 신전의 대리석 벽체(壁體)를 몽땅 떼어 영국으로 실어가겠다는 배포가 큰 약탈 계획을 세웠다.

그리고 10여 년에 걸쳐 디오니소스상을 비롯한 250점에 이르는 신전의 석조물을 영국으로 빼돌려 자신의 저택을 치장했다. 그는 가세가 기울자, 영국 정부에다 3만 5,000파운드에 이를 팔아넘기겠다는 제안을 내놓는다. 이때 국내 여론이 들끓었기 때문에 의회 표결을 거쳐 결국 영국 정부가 사들였으니, 국가가 전적으로 개입했다는 오명을 여태 지우지 못하고 있다.

지금 대영박물관이 소장한 또 다른 세기적 보물 ‘로제타스톤’에는 빼앗고 나서 다시 빼앗기는 제국주의 국가 사이에 되풀이된 추잡스러운 권력이 점철되었다. 이 돌덩이는 본래 프랑스의 나폴레옹이 이집트에서 약탈한 것이었다.

그러나 영국에 밀린 프랑스가 1801년에 이집트를 떠나면서, 협상 대가로 영국에 넘기고 말았다. 마치 도둑이 도둑질한 물건을 다른 도둑이 등을 쳐서 빼앗는 꼴을 보는 것처럼 뒷맛이 개운하지 않다. 이쯤에 이르면, 프랑스 역시 자유로울 수가 없다. 아직도 파리의 콩코드광장에 우뚝한 ‘오벨리스크’는 프랑스가 이집트에서 약탈한 문화재다.

 ‘클레오파트라의 바늘’이라는 닉네임이 붙은 오벨리스크에는 프톨레마이오스 9세와 왕비 클레오파트라가 여신(女神) 이시스에게 바친 것이라는 새김글씨가 들어가 있다. 그래서 제자리를 차지했어야 마땅한 이집트의 문화재이다.

2.

아프리카 세렝게티 평원에서 일어나는 약육강식의 야성(野性) 세계를 TV 화면으로 더러 보았을 것이다. 힘이 다 빠져 쇠약한 동물을 용케 골라 해코지하는 육식동물의 포악성에 몸서리를 치면서……. 세계의 정치 질서도 야생과 크게 다르지 않거니와, 여기에는 반드시 문화재 약탈이라는 제국주의 국가의 문화우월주의가 따라붙었다. 이 같은 대표적 사례의 하나가 중국 청조(淸朝)의 운명이 다했을 무렵, 둔황(敦皇)을 약탈한 제국주의 지식인 그룹의 발길이다.

이들은 탐험대라는 이름표를 달고, 지난 20세기 초엽에 둔황을 찾았다. 마치 사냥감을 노린 육식동물 모양으로 서역의 사막을 어슬렁대기 시작했다. 1905년 러시아에 이어 영국과 프랑스가 차례로 둔황에 들어와 엄청난 분량의 불교 유물을 자국으로 실어 날랐다. 1908년 둔황에 들어온 프랑스의 폴 펠리오가 간추린 불전 5,000여 점 속에는 유명한 저 신라 혜초(慧超)의 《왕오천축국전(往五天竺國傳)》이 포함되었다는 사실을 뒷날에 밝혀졌다. 오호통재(嗚呼痛哉)를 읊조리지 않을 수 없다.

그리고 후발 제국주의 국가의 뼈대를 막 갖춘 일본의 오타니(大谷光瑞) 탐험대가 1912년 둔황에 도착했다. 이때 오타니가 손에 넣은 걸작의 불교미술품이 오늘날 우리네 국립중앙박물관에 소장되었다는 사실은 참으로 아이러니하다.

오타니는 당시 조선총독부에 이권을 청탁하기 위해 총독부박물관에 기증한 것이라고 한다. 이들 제국주의 국가가 둔황의 보물을 빼앗은 이면을 돌아보면 애잔하기 짝이 없다. 중국에서 신해혁명(辛亥革命)이 태동하는 폭풍전야의 시기가 도사렸던 터라, 중국은 머나먼 변방 둔황을 건사할 겨를이 없었을 것이다. 이에 앞선 아편전쟁의 후유증까지 겹쳤던 중국은 이미 자본주의 열강의 반식민지(半植民地)로 전락한 상태였다.

그러니까 국력은 자국의 문화유산을 보호하는 불가결의 기본적 원동력이라는 사실은 우리네 역사에서도 몇 차례나 거듭되었다. 미증유의 국란 임진왜란은 접어두더라도, 1866년 병인양요(丙寅洋擾) 때 로스가 이끈 프랑스 극동함대의 수병부대에게 강화도 외규장각(外奎章閣)의 많은 전적을 빼앗기는 수모를 겪었다. 더구나 1875년 운양호사건(雲揚號事件)을 계기로 조선이 쇄국의 빗장을 풀자, 일본을 비롯한 제국주의 열강의 발길이 더욱 잦았다. 운양호사건 이후인 1882년 조선 정부 통리교섭통상사무아문(統理交涉通商事務衙門)의 협판(協辦) 겸 총세무사로 초빙된 독일인 묄렌도르프(穆隣德)는 조선의 민속품을 미국, 독일, 러시아 등지로 내보내는 데 일조했다.

일제는 한술 더 떠서 당시 조선 영토 바깥인 만주 지안현(集安縣) 고구려 유적에도 손을 댔다. 1882년 만주로 몰래 스며든 일본군 참모본부 스파이였던 사카와(酒匂景信) 중위는 지안현 외딴 들판에 자리한 고구려 광개토왕릉비(廣開土王陵碑)의 비문 내용을 변조하기에 이른다.

 석회를 덧발라 내용을 바꿔치기한 이른바 일제의 석회도부작전(石灰塗付作戰)은 일본 관학(官學)이 주도한 임나일본부(任羅日本付)라는 역사의 픽션을 합리화하는 간악하기 짝이 없는 고도의 침략 야욕을 드러낸 것이다. 이 사카와의 변조 작업을 기초로 비문을 탁본한 이른바 쌍구가묵본(雙鉤加墨本)은 왜(倭)가 고대로부터 한반도 남부를 지배했다는 조선 침략의 당위성을 정당화한 자료로 오랫동안 활용되었다.

미국도 1884년 버나드라는 해병 대위에게 조선 문화재 수집 임무를 맡겨 조선에 보냈다고 한다.

오늘날 미국 스미소니언이 소장한 우리 문화재 가운데 일부는 이때 미국 해병 장교가 수집한 조선의 문화재였던 것이다. 이 무렵부터 서울에 주재한 외교관을 비롯한 선교사와 학자들이 우리네 문화재를 마음먹고 거두어 자국으로 빼돌렸다. 지금 런던의 대영박물관이 소장한 조선시대 초상화 ‘수각수로도(水閣壽老圖)’는 영국인 윌리엄 앤더슨이 가져간 것이다.

또 대영박물관의 고려시대 은입사향로(銀入絲香爐)에는 인버네인이 소장했다가 1945년에 기증한 것이라는 딱지를 붙였다. 미국 보스턴미술관은 1910년대 찰스 B 호일드가 수집한 고려자기 컬렉션을 소장했는데, 그가 세상을 떠난 다음 기증되었다. 그리고 독일 쾰른 동양미술관에는 아돌프 피셔가 1910년 조선에서 출토되었다는 도자기를 제1차 세계대전 직후에 손에 넣었다는 기록이 보인다.

또 보스턴미술관은 같은 시기에 일본인 오카쿠라(岡倉一雄)가 미국인 에드워드 J. 흄즈에게 팔아넘긴 신라시대 ‘금동약사여래입상(金銅藥師如來立像)’을 소장했다. 런던 빅토리아앤드앨버트미술관은 1910년대의 르 브롱드의 도자기 컬렉션을 기증받았고, 덴마크 국립박물관은 구한말에 건너간 신라의 청동불 2구를 비롯한 고려 말의 목불과 민속자료를 지금도 전시 중이다. 파리 기메미술관은 도굴한 것으로 보이는 신라 금동관을 일본인으로부터 입수한 적이 있다.

이들 성보(聖寶)뿐이 아니라, 미국 호놀룰루미술관은 걸작의 불교미술 계통의 민예품을 소장했다. 이 미술관이 소장한 18세기쯤의 조선시대 목각동자상(木刻童子像)은 불교미술품이 분명하다. 자세가 앙증맞거니와 표정이 아주 천진한 동자상은 절집 부엌에서 일하는 공양주 보살이 땋아 주었을 법한 쌍뿔머리가 함함하다. 국내 전시공간에서 지금 만났다면 한껏 사랑을 받아야 마땅할 민예품이다. 그래서 더욱 애착이 간다.

지난 2001년 유네스코 세계기록문화유산 반열에 오른 《직지심체요절(直指心體要節)》은 구한말 서울 주재 프랑스 공사를 지낸 콜랭 드 플랑시가 사들인 고서(古書)의 하나다. 동양학을 전공한 모리스 쿠랑의 도움으로 서울에서 고서를 무더기로 모은 그는 1930년 세상을 떠났는데, 《직지심체요절》은 여러 사람의 손을 거쳐 뒷날 파리국립도서관으로 들어갔다. 우리네 곁을 떠난 지가 이미 오래되었지만, 세계 최고(最古)의 금속활자본 불서라는 점에서 다시 돌아볼 수밖에 없는 민족문화유산이다.

그러나 이를 너무 오랫동안 모르고 살아온 우리 처지가 딱하다. 이 불서가 바깥세상에 처음 얼굴을 드러낸 것은 1900년 파리 만국박람회 때 일이고, 지난 1972년 유네스코 ‘세계 도서의 해’ 특별전을 계기로 가장 오래된 금속활자본으로 밝혀졌다. 세계문명의 역동적 회오리가 분명한 《직지심체요절》에는 고려 우왕 3년인 1377년 청주 교외 흥덕사(興德寺)에서 금속활자로 책을 찍었다는 간기(刊記)를 붙였다. 흥덕사는 한동안 잃어버린 절이었으나, 지난 1984년 충북 청주시 운천동 택지개발지구에서 흥덕사라는 새김글씨가 들어간 쇠북이 출토되어 《직지심체요절》의 산실을 확인했던 것이다.

우리는 날로 변화하는 세계 속의 문물을 몰라도, 너무 몰랐던 것 같다. 콜렝 드 플랑시가 고서를 사는 일을 도왔던 모리스 쿠랑이 쓴 《한국서지(韓國書誌)》를 보면, 플랑시 공사가 1894년부터 1901년까지 사들인 고서는 자그마치 3,821종에 이른다. 쿠랑은 이 책의 머리말에다 “책을 팔기 위해 공사관으로 몰려드는 사람들이 늘 문전성시를 이루었다.”고 썼다.

우리의 소중한 문화를 까맣게 모르는 민중이 그만큼이나 많았다는 이야기다. 말이 나온 김에 성보로 받들어야 할 불교문화재가 세계 곳곳에 흩어졌다는 사실을 덧붙이고 싶다. 더구나 국내에서 좀처럼 만나기 어려운 고려시대 불화가 미국 메트로폴리탄미술관을 비롯한 프리어미술관, 클리블랜드미술관, 필라델피아미술관 등에 소장되어 있다. 그리고 영국 대영박물관과 빅토리아앤드앨버트미술관, 독일의 베를린미술관, 벨기에의 브뤼셀미술관에도 있다.

이들 불교미술품은 거의가 고려시대 불화의 백미(白眉)로 꼽히는 ‘관음보살좌상(觀音菩薩坐像)’이다. 그림 속으로 물과 달을 끌어들여 ‘수월관음도(水月觀音圖)’라고도 일컬었던 불화이고 보면, 분위기가 사뭇 낭만적이다. 볼이 둥글고, 턱이 모나지 않은 이 보살은 원융(圓融)의 경지에 든 모양이다. 보살이 앉은 바위 아래로는 기화요초(琪花瑤草)가 자라는 바닷물이다. 그런데 선재 동자가 나타나 먼발치에서 보살에게 무엇인가 간절하게 묻는다. 불교의 심오한 이치를 그림으로 풀어 설명한 불화가 분명하거니와, 누가 보아도 탐낼 만큼 필치가 유려한 명작이다.

모두가 구한말에 사라진 문화재로 추정할 수 있다. 일제의 침략 야욕이 징후를 드러낸 풍운의 시절부터 일본 무법자들이 설치고 다니는 북새통 속에 가치를 미처 알아차리지 못한 절집에서 얼결에 내주었는지도 모를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종교미술품이고 보면, 더욱 애석하다. 이 가운데 일부는 일본을 거쳐 구미로 전매(轉賣)되어 돌아오지 못하는 길을 떠났을 것이라는 짐작이 어렵지 않다.

오늘날 세계 각국의 박물관이나 미술관이 소장한 고려불화는 약 160여 점에 이른다. 이 가운데 일본이 130여 점을 소장했고, 나머지는 한국을 비롯한 미국과 유럽에 흩어졌다고 한다. 국립중앙박물관이 지난 10월 12일부터 11월 29일까지 열었던 ‘고려불화대전(高麗佛畵大展)’에 내놓은 작품 67점 가운데 일본이 소장한 걸작 명품이 27점이나 되었다. 그들이 고려불화에 쏟은 집념을 헤아릴 수 있다.

3.  

일제의 조선 침략에 따른 폭력적 야만성은 서구 열강의 제국주의보다 훨씬 잔혹했다. 그래서 일제의 조선 침략은 서구 제국주의 역사에서 가장 큰 오점으로 남은 프랑스의 알제리 탄압을 뛰어넘었다고 평가한다. 1894년 청일전쟁에 이어 1904년 러일전쟁을 승리로 이끈 일제는 1905년 대한제국과 강제로 보호조약을 체결하기에 이른다.

이 불평등한 조약을 마음대로 주물렀던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는 조약을 맺고 일본으로 떠난 지 꼭 93일 만인 1906년 3월, 조선통감 자리를 꿰차고 다시 서울로 돌아온다. 그는 메이지(明治)의 천황제(天皇制) 제국주의 국가 기틀을 다진 인물이었기 때문에 천황 직속 통감이라는 막강한 권력을 거머쥐었다.

이토가 총감 자리에 앉기가 무섭게 일확천금을 꿈꾸었던 일제의 골동상 패거리가 부산과 인천을 거쳐 몰려들었다. 이들에게 이토의 조선 통감 부임은 임진왜란에 버금가는 문화재 약탈의 기회가 되었다. 지난 16세기 일본이 일으킨 임진왜란의 주역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는 조선의 선진문물 약탈을 위해 사무라이와 승려까지 출병하는 왜군 틈새에 끼워 넣었다. 그리고 조선의 사찰과 관아의 책과 활자는 물론 불화와 불상을 약탈하고, 도공과 공예인 같은 장인(匠人) 그룹을 포로로 잡아갔다.

 이때 조선에서는 막사발 정도로 여긴 도자기를 일본은 보물로 받아들였으니, 그들이 조선문화를 동경한 집념은 대단한 것이었다. 이토 역시 예외는 아니었다. 1868년 메이지유신(明治維新) 이후 근대 일본의 정권을 번갈아 쥐었던 조슈(長州) 번벌(藩閥)이 그의 고향이었다.

다이묘(大名)와 그 가신(家臣)으로 이루어진 일본의 전통 지배구조가 번이었던 터라, 옛날 임진왜란 때 침략의 추억을 문득문득 떠올렸을 것이다. 더구나 메이지유신이라는, 일본의 근대화 과정에서 정적을 닥치는 대로 단칼에 베기를 주저하지 않았던 피의 쿠데타를 관행처럼 일삼았던 그들은 1895년 대한제국의 명성황후(明成皇后)를 시해하는 비극을 저지를 만큼 만행에 익숙한 집단이었다.

그래서 이토를 따른 침략자들의 문화재 약탈쯤은 양심에 거리낄 문제가 아닌 듯했다. 이를 실제 부추긴 통감부 관리들은 일본인 골동상과 이른바 호리라고 부른 도굴꾼들을 끌어들였다. 그리하여 1905년부터 경기도 개성 일대의 왕릉을 비롯한 무덤을 파헤쳐 부장품(副葬品)으로 묻은 고려자기를 쓸어 담았다. 이미 서울에는 고려자기를 대량으로 사들이는 골동품 중개상인 이유가이(鮎貝房之雄)와 아가와(阿川童郞)가 자리를 잡았다.

그리고 개성 일대에서 일본인 패거리가 도굴한 고려청자를 무더기로 사들여 일본에까지 내다 파는 곤도(近藤)라는 일본인 거상(巨商)이 지금의 서울 충무로 입구에 생겨났다. 1906년 당시 서울에 머물렀던 일본인 변호사 미야케(三宅長策)는 뒷날 〈그때의 기억−고려고분 발굴(도굴) 시대〉라는 글에서 “곤도의 상점에서는 고려청자를 내놓기가 무섭게 팔려나갔다.”라고 썼다.

이토 역시 이 곤도의 상점에서 일본 천황과 귀족들에게 선물할 고려청자 수천 점을 손에 넣었다. 이 가운데 일품(逸品) 103점을 골라 천황에게 진상하고, 나머지는 귀족들에게 돌렸다. 이렇듯 고려청자가 불티나게 일본으로 빠져나가자, 도굴은 개성으로부터 강화도와 황해도 해주 쪽으로 확대되었다. 평양박물관장을 지낸 고이즈미(小泉顯夫)는 “졸부를 꿈꾼 일본인들은 황금사발이 묻혔다든가, 초하룻날 무덤 속에서 닭이 운다는 따위의 전설이 스민 무덤은 모조리 팠다.”라는 이야기를 뒷날 총독부가 발행한 잡지 《조선》에 실은 일이 있다.

일제는 대한제국 내각 총리대신이었던 이완용을 구슬려 외로운 고종 황제를 위로한다는 명분을 붙여 이왕가박물관(李王家博物館)을 짓는다. 명분은 그럴듯했지만, 실은 일본인 무법자들이 도굴한 고려자기와 다른 부장품 유물을 비싸게 팔아주기 위한 것이었다. 어떻든 1908년 9월에 문을 연 이왕가박물관은 고려청자 따위의 유물을 시중에 거래되는 값보다 비싸게 사들였다.

소장한 고려청자 6,562점 가운데 99%가 개성 출토품이었다는 사실은 이를 증명하고도 남는다. 그리고 한일강제병합 직전인 1909년 도쿄에서 열린 ‘고려자기 경매전’ 카탈로그 《고려소(高麗燒)》에도 이 같은 사실이 그대로 반영되었다. 사학자 이홍직(李弘稙) 교수는 지난 1964년 《사학연구》에 발표한 〈재일 한국문화재 비망록〉에 일본의 민간인들이 소장한 고려자기만 2만여 점에 이를 것으로 어림잡았다.

이토가 부통감으로 데려온 그의 동향인(同鄕人) 소네 아라스케(曾禰荒助)가 2대 통감에 오르고 나서도, 문화재 약탈은 계속되었다. 불교미술품과 고서(古書)에 큰 관심을 보인 소네는 1909년 초도순시를 빌미로 경주 석굴암을 들러 11면관음보살상 앞에 자리했던 대리석 5층소탑을 손에 넣었다.

이 소형석탑의 도난 사건은 소네를 석굴암으로 안내했던 경주군 주석서기(主席書記) 기무라(木村諪雄)가 소네의 죽음 뒤에 쓴 〈조선에서 늙으며…〉라는 글에서 소상히 밝혔다. 소네가 1910년 일본으로 돌아가기까지 석굴암 소형석탑 말고도, 불국사 사리탑과 다보탑의 돌사자상 4구가 일본으로 빠져나갔다.

일제 약탈자들의 눈독은 시골 외진 구석의 절터에까지 미쳤다. 1906년 조선을 찾은 일제 궁내 대신 다나카(田中光顯)는 개성으로부터 50여 리가 떨어진 경천사(敬天寺) 절터에서 13m가 넘는 정교한 조각의 고려시대 대리석탑을 뜯어 인천을 거쳐 도쿄 자신의 저택으로 실어갔다. 마치 오늘날 대영박물관이 소장한 그리스의 ‘파르테논 마블스’처럼 한때 비운을 겪었던 문화재가 경천사탑이다. 이 대리석탑이 숱한 우여곡절 속에 만신창이(滿身瘡痍)의 몰골로 조선에 돌아오기까지는 10여 년 남짓한 세월이 걸렸다. 지금 온 국민이 애지중지하는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금동반가사유상(金銅半跏思惟像)은 일본인 고물상 가지야마(柅山義永)가 몰래 숨겼다가 되팔아 이왕가박물관으로부터 2,600원이라는 거금을 챙겼다. 이 삼국시대 걸작은 어느 해 유럽에서 열린 순회전에서 여러 미술평론가가 로댕의 ‘생각하는 사람’을 뛰어넘은 고대 미술품이라는 말로 찬탄하지 않았던가. 1907년 충남 부여에서 반가사유상과 함께 출토된 걸출한 금동불상 한 구는 여태 고향으로 돌아오지 못하고 있다.

이토와 소네로 이어진 초기 통감부 시절에 일본으로 빠져나간 조선의 서책은 ‘통감부 장서(藏書)’와 ‘소네 아라스케 헌상본(獻上本)’ 등 모두 163부 852책에 이른다. 이와 더불어 오대산 사고본(史庫本)인 《조선왕조실록》은 조선총독부가 양도 형식을 빌려 주문진을 거쳐 동경제국대학으로 몽땅 넘어갔다.

일본 교토대학 부속 도서관이 소장한 이른바 가와이문고(河合文庫)는 일본 동양전문학교 경성분교 간사 가와이(河合弘民)가 1908년 강화도 정족산성에서 빼낸 것이다. 통감부 시절 통역관이었던 마에마(前問恭作)가 수집한 막대한 분량의 전적은 도쿄의 동양문고로 들어갔다. 그리고 아시미가(淺見倫太郞)가 모은 전적은 일본 재벌 미쓰이(三井)가 인수했다가 2차대전 뒤 미국 버클리대학에 팔아넘겼다.

4.

일본 제국주의가 마침내 실현한 1910년 8월의 조선 강제합병은 보다 가혹한 무단통치를 예고했다. 3대 통감으로 임명되어 곧바로 초대 조선 총독 자리에 오른 데라우치 마사타케(寺內正毅)는 근대국가에서 유례를 찾아볼 수 없는 헌병경찰제도(憲兵警察制度)를 통치 수단으로 끌어들였다. 육군 대신을 겸임한 군부의 실력자였던 데라우치는 메이지유신 이후 일본이 내세운 이른바 정한론(征韓論)을 완성한 인물이기도 했다.

그는 조선 침략을 위한 방편의 하나로 식민지의 모든 사회 풍속과 제도는 물론 문화까지를 일본과 똑같이 아우르는 동화주의(同化主義)를 들고 나왔다. 이에 따라 사회 교화(敎化)라는 명분을 앞세워 동경제국대학의 인류학자와 건축학자 등을 조선으로 불러 고적을 조사하고, 또 발굴하는 사업을 맡겼다. 이에 앞서 1909년 대한제국이 요청한 것처럼 서울로 불러들인 세키노(關野貞)를 근간으로 1910년에는 조선고적조사위원회를 만들었다.

조선의 유적과 유물을 보호한다는 명목으로 출범한 이 관변단체는 조선의 문화와 역사를 자신들 나름대로 정립한 서구학문의 프리즘을 빌려 재해석하는 방향으로 운영되었다. 그러니까 동 회의 당위성을 강조하는 데 지나지 않았다. 일제는 1912년부터 조선의 대표적 궁궐인 경복궁에 조선총독부를 신축하기 위한 조사에 들어가는 한편 조선 강점 5개년의 성과를 홍보할 목적의 조선물산공진회(朝鮮物産共進會)라는 박람회를 경복궁 전각을 허문 자리에서 열었다.

 이는 일본과 조선 사이를 지배자와 피지배자 관계로 설명하는 시각적 이데올로기를 부각시키려는 문화식민주의적 자기 과시가 분명했다.

조선에 먼저 온 세키노는 일본인 두 사람을 더 끌어들여 1911년부터 황해도 사리원 지역에서 낙랑(樂浪)고분 발굴을 이어갔다. 1913년 9월에는 평남 진남포 부근과 황해도 봉산군 일원의 유적을 뒤져 중국 한대(漢代)의 유물을 무더기로 거두었다. 이때 발굴한 석관을 비롯한 묘지석(墓誌石), 동경(銅鏡), 나전칠기(螺鈿漆器) 등의 유물은 1912년 4월 동경제국대학 공학부 건축학과가 마련한 전시회에 내놓았다. 이 전시회에는 경북 고령에서 발굴한 대가야(大伽倻) 유물과 경북 경주 서악동에서 나온 불상과 기와도 출품되었다.

이들 유물 가운데 1916년 조선총독부가 간행한 《조선고적도보(朝鮮古蹟圖譜)》 제1권에 실린 몇 점이 도판으로 확인되었을 뿐이다. 그리고 평양 근교 대동강 변에서 발굴한 10기의 낙랑고분군에서는 오늘날 국립중앙박물관이 소장한 국보 제89호인 금제 버클이 출토되었다.

순금을 세공한 버클에 비취를 박은 세기의 걸작이 나왔다는 소문은 낙랑고분에 순금 보화가 잔뜩 묻혔다는 이야기로 번져 도굴꾼들이 개성에서 대동강 변으로 눈을 돌렸다. 1925년 가을 총독부 요청으로 평양에 온 후지타(藤田亮茦)는 평양 근교 낙랑고분에서 ‘거섭(居攝) 3년(서기 8년)’이라는 연호(年號)가 들어간 칠기를 발굴했다. 세키노는 이 무렵 극성을 부렸던 도굴 실상을 “무기, 동기, 도기류 따위가 다수 나왔지만, 이는 모두 평양에 사는 일본인 호사가들 손에 들어갔다.”고 회고한 적이 있다.

이 같은 무법한 도굴은 경남·북 일대 고대 가야의 고토(故土)도 예외가 아니었다. 1919년 총독부 고적조사위원이었던 이마니시(今西龍)는 “경북 선산군에 남은 1,000여 기의 가야 고분은 2~3년 전부터 도굴장이 되었다.”는 말로 피해의 참상을 보고서에 썼다.

그리고 경남 함안과 창녕에서도 여러 군데 가야고분이 도굴되었다는 사실을 덧붙였다. 고적 조사에 참여했던 후지타도 “조선에서 나온 신라와 가야시대 유물인 순금 귀고리를 도쿄의 네즈(根津嘉一)를 비롯 교토의 기요마치(淸町謙次)와 모리야(守屋孝藏)가 소장했다.”고 털어놓았다.

1923~1924년의 조선총독부 《고적조사보고》는 대구의 일본인 기업가 오쿠라(小倉武之助)가 거두어들인 유물에 주목했다. 이 오쿠라 컬렉션에는 그 유명한 은제투조패식금구(銀製透彫佩飾金具)를 비롯하여 물고기를 문 조형토기(鳥形土器), 마형토기(馬形土器), 쌍배차륜토기(雙盃車輪土器) 등이 포함되었다. 이 무렵 백제의 옛 땅이었던 충남 공주와 부여에서도 도굴이 기승을 부리기는 마찬가지였다. 세키노가 1915년 공산성 이웃 고분에서 문양을 새긴 백제와당을 발굴하자, 이는 도굴꾼들에게 더없는 정보가 되었다.

이어 1923년 6월 공주고보 동쪽 배수로 공사에서 문양전(文樣塼)이 나왔는데, 구라모토라는 일본인 골동상이 냉큼 가로챘다. 그가 공주에서 거두어들인 100여 장의 전돌 가운데 장식문양과 글씨가 들어간 10여 점의 걸작품은 서울의 골동상으로 넘어갔고, 곧바로 총독부박물관에 팔렸다.

이 무렵 공주고보에서 교편을 잡았던 일본인 가루베(輕邊慈恩)는 백제고분을 연구한답시고, 껴묻거리를 야금야금 파먹었다. 그는 1945년 제2차 세계대전에서 일본이 패망한 다음 귀국하는 길에 한 트럭 분량의 백제 유물을 챙겨 달아났다. 일제 강점기의 조선은 마치 미국 서부 개척시대의 골드러시를 방불할 만큼 문화재 도굴이 판을 친 무법천지였던 것이다.

 5.

일제는 제9대 총독 아베 노부유키(阿部信行)를 마지막으로 1945년 8월 15일 조선 침략시대를 마감한다. 1905년 통감시대를 시작한 일본의 조선 식민지 통치는 자그마치 40년을 끌었다.

임진왜란과 정유재란을 거쳐 대한제국 말의 병인양요 등으로 이어진 외세(外勢)의 침입과 일제가 눌러앉은 강점기까지 많은 문화재가 빼앗기거나 유실되었다. 올해 들어 국립문화재연구소가 2009년 12월 말을 기준으로 발표한 ‘해외 유출 문화재 현황’에 따르면, 세계 18개국이 우리 문화재 10만 7,857점을 소장한 것으로 집계되었다. 일본이 61,000여 점으로 가장 많고, 다음은 미국(2만 7,000여 점), 중국(3,981), 영국(3,628) 순이었다. 그리고 독일, 러시아, 프랑스는 2,000여 점 이상을 소장한 것으로 밝혀졌다.

이 같은 통계 수치는 일본이 조선의 문화재를 가장 많이 약탈한 사실을 극명하게 증거한다. 조선의 숱한 문화재가 수난을 겪어야 했던 일제의 식민통치는 일단 마감되었지만, 이 땅의 사람들이 그토록 기다린 환희의 신천지는 좀처럼 열릴 기미가 없었다. 그리고 미처 서울을 뜨지 못한 일인들은 조선의 문화재를 움켜쥔 채 내놓지 않았다. 경성제국대학 의학부 교수 시노자비(蓧崎)도 그런 부류였는데, 그가 소장했던 부여 규암리 출토 금동관음보살입상(金銅觀音菩薩立像)은 미군 헌병에게 압수되었다.

이화여대 박물관 소장 철사포도문항아리(鐵砂葡萄紋壼) 역시 총독부 철도국에 근무한 일본인 시즈미(淸水幸次)가 해방 이후 한때 잔뜩 그러안았던 유물이다. 남북 분단의 해방 공간 남쪽을 차지한 미군정(美軍政)과 1948년 대한민국 정부 수립 이후 곧바로 일어난 한국전쟁을 치르는 동안에도 문화재 유출은 계속되었다. 이 무렵 문화재를 빼돌린 대표적 인물은 1948~1950년까지 주한 미국대사관 서기관에 이어 문정관을 지낸 그레고리 핸더슨이다. 그는 1969년 미국 오하이오주립대학에서 143점의 명품 도자기를 출품한 전시회를 열고, 《한국의 도자기−그 예술의 다양성》이라는 도록을 낼 만큼 한국 문화재를 헐값에 무더기로 사들였다.

한국전쟁 전후의 불확실한 정치 상황은 우리 스스로가 문화재를 방치한 혼돈의 시대일 수도 있다. 전쟁이 한창이었던 1951년 테일리라는 미군 상사가 창덕궁 앞 노점상에서 20달러에 산 고종 황제의 옥새는 미국으로 흘러갔다.

그는 국내에서 처음 발견된 함북 종성 동관진 구석기 유적에서 나온 유물 몇 점을 덤으로 더 받았다고 한다. 이들 문화재는 지난 1990년에 어렵사리 한국으로 돌아왔지만, 빙산의 일각에 지나지 않는다. 1972~1975년까지 한국에 머문 미군 예비역 중령 윌리엄은 자그마치 10만여 점에 이르는 유물을 미국으로 내보냈다. 비록 국보급 문화재는 없었지만 깜짝 놀랐던 사건의 하나로 꼽힌다.

미군의 법적 지위를 규정한 한미행정협정의 허점을 드러낸 이와 비슷한 사건은 미 국무성 문서인 ‘아델리아 홀 레코드’에서도 잘 드러난다. 아델리아 홀 이라는 국무성 관리가 1950년대에 꾸민 이 문서에는 한국전쟁 당시 덕수궁 등 조선시대 궁궐에서 유출된 귀중한 문화재 목록이 기록되었다.

더구나 이들 유출 문화재는 ‘미군이 저지른 약탈’이라는 명시적 설명을 덧붙였다. 얼마 전에는 조선왕실 소장품으로 추정되는 유물 130여 점이 미국의 한 고미술품 경매에 한꺼번에 나왔다. 그리고 경매사 사이트에는 미군 해병대 장교가 북한군을 격퇴한 다음 덕수궁 경내에서 가지고 온 것이라는 설명까지 곁들였다.

우리가 해방을 맞은 이후 소용돌이치는 바람의 계절을 살아가는 동안 머나먼 유럽에서는 2차대전 당시 문화재 약탈 국가를 응징하는 전범재판이 열렸다. 유럽의 뉘른베르크 전범재판소는 구체적인 사례를 들어 전시 문화재 보호의 필요성을 제시했다.

그러나 아시아의 도쿄 전범재판소는 일본이 약탈한 문화재를 딛고 넘어가지 못했다. 지난 2002년 2월 4일 자 《타임》은 일본이 한국에서 저지른 최악의 문화재 약탈 문제를 서방과 견주어 제대로 부각시키지 않았다고 썼다. 그리고 《타임》은 미 국립문서보관소의 극비문서를 들추어 “일본이 식민지배 기간에 한국에서 약탈한 문화재를 돌려주자는 의견에 동의할 수 없다.”는 더글러스 맥아더 장군의 방송 내용을 보도했다. 더구나 1965년 한일기본조약 체결에 앞선 한일회담에서도 일본의 약탈 문화재 반환 문제를 소극적으로 다루어 큰 실효를 거두지 못했다.

한국이 요구한 문화재는 조선총독부가 내보낸 고분 출토품과 통감과 총독이 빼돌린 유물 2,060점 등 모두 4,479점이었으나, 일본이 내놓은 목록대로 1,432점이 돌아왔을 뿐이다. 그리고 사유 문화재는 한일기본조약에서 합의한 의사록에 따라 자발적 반환으로 느슨하게 풀어놓아 여태 해결하지 못한 현안(懸案)으로 남았다.

지난 1960년대 이후는 제국주의 식민지배를 벗어난 신생 독립국가 그룹이 약소국가이기를 거부한 저항의 시대였다. 그래서 약탈 문화재 반환 운동이 서서히 머리를 들었다. 이 운동의 불을 붙인 인물은 4세기 동안에 걸친 오스만 튀르크의 지배로부터 1830년에 독립한 그리스의 문화부 장관 메르쿠리다. 은막의 여왕으로 이름을 날렸던 그녀는 1981년부터 숨을 거둘 때까지 영국이 약탈한 문화재 ‘파르테논 마블스’ 반환 운동에 평생을 매달렸다.

그녀의 투쟁은 약탈 문화재 반환 운동을 국제 운동으로 승화시켰다. 어떻든 지난 1970년 11월 유네스코는 46개국이 참가한 가운데 문화재 불법 반출 및 소유권 양도 금지와 예방 수단에 관한 협약을 채택하기에 이른다. 그러나 기대했던 성과를 거두었다고 말할 수는 없다. 더구나 올해 들어 지난 4월 이집트 카이로에서 열린 ‘문화재 보호 및 반환을 위한 국제회의’에는 약탈 국가인 영국, 프랑스, 일본, 독일 등이 불참했다. 문화재 반환의 길은 아직 먼 듯하다.

누가 뭐래도 일본과 프랑스는 한국의 문화재를 가장 많이 약탈한 국가가 틀림없다. 조선 강제병합 100주년이 되는 지금, 일본은 패권주의를 청산하기 위해서라도 약탈 문화재를 돌려주어야 한다. 프랑스 국립도서관이 소장한 규장각 도서도 대여가 아닌 반환 형식을 이끌어 조속히 되돌려주는 것이 문화대국의 도리일 것이다. ■

황규호
문화평론가. 〈서울신문〉 문화부장과 문화담당 대기자에 이어 교양시사 잡지 계간 《다리》와 계간 《한국의 고고학》 상임편집위원 등을 역임했다. 《한국인 얼굴 이야기》와 《전문기자의 세계》 등의 저술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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