몇 해 전 필자가 재직하고 있는 미국 대학의 학장이 공개강좌를 부탁해 왔다. 그래서 불교의 무아론(無我論)을 서양철학적 관점에서 접근해 보는 것이 어떻겠냐고 제안했더니 기꺼이 동의해 주었다.

그런데 가르치고 있는 대학이 미국에서도 기독교 전통이 가장 강한 지역에 있어서, 과연 불교를 주제로 한 강연을 듣겠다고 올 학생과 교직원이 얼마나 있을까 염려했다.

그러나 뜻밖에도 많은 청중이 몰려 강당의 계단과 복도에까지 빈틈없이 자리를 잡아야 했다. 교육 수준이 높은 미국인들이 불교를 얼마나 매력적으로 받아들이고 있는가를 피부로 느낄 수 있는 기회였다. 그날 이후 여러 달 동안 교수들과 학생들이 꾸준히 논평을 보내왔고 또 학장이 직접 친필로 감사 편지까지 보낸 것을 보면 강연은 성공적이었던 것 같다.

불교의 무아론을 영미(英美) 계통의 현대철학으로 풀어 그 옳음을 증명해 보이려는 강연이었는데, 기독교인이 대부분인 사람들이 마음을 열고 받아들여 주어 반갑고 고마웠다.

강연은 두 쪽으로 된 간단한 노트를 토대로 진행했는데, 나중에 혹시 관심 가진 분들께 도움이 될까 하여 읽기 편한 에세이 형태로도 만들어 놓았다. 실은 기회가 되면 내 강의 교재로 사용하려는 뜻도 없지 않았다. 그런데 지난여름 잠시 귀국했을 때 지인의 도움으로 《불교평론》을 몇 권 읽을 기회가 있어서 《불교평론》의 독자들과 나의 강연 경험을 함께 나누고 싶은 마음이 들게 되었다.

그래서 원래 영어로 된 논문을 우리말로 번역해 본 것이 다음의 글이다. 번역의 어려움이야 원래 잘 알고 있었지만, 내가 쓴 글을 우리말로 번역하는 일도 만만치 않은 일임을 새삼 깨닫게 되었다.

*  *  *  *

서구에 사는 우리에게 영혼이라는 말은 무척 친숙하다. 우리는 영혼이 우리가 항상 접하는 친숙한 어떤 것이라고 믿고 있다. 그래서 영혼의 존재를 당연한 것으로 여기고 있다. 누가 영혼의 존재를 부정하거나 의심한다면, 그는 도덕적으로 좋지 못한 사람으로 간주되기 일쑤다.

영혼에 대한 믿음이 서양 종교의 본질을 구성해 왔음은 재론의 여지가 없으며, 영혼의 개념에 대한 이해 없이는 서양 문화를 제대로 이해할 수도 없다. 그러나 이토록 친숙한 개념이라도 그것을 철학적으로 검토해 보면 영혼의 존재 자체에 대해 다소 당혹스런 의문점들이 드러나게 된다. 우리는 21세기에 살고 있고, 과학자들은 우리가 살고 있는 세계가 근본적으로 물질로 되어 있다고 가르치고 있다.

그래서 자연스럽게 영혼의 본성과 그 존재 방식이 궁금해진다. 영혼이 있다면 완전히 비물질적인 존재일 텐데, 물리학이 설명하는 대로 이렇게 철저히 물질로만 구성된 우주의 어디에 그리고 어떻게 영혼이 존재할까? 역사상 서구식 영혼의 개념이 없었던 동아시아 사람들에게 영혼은 종종 실재하기에는 너무도 아름다운 동화 속 이야기처럼 들리기도 한다. 

고대 그리스 이후 서구인들에게 영혼은 파괴되지 않고 변치 않으며 영원히 존재하는 무엇이다. 그래서 영혼은 그것이 잠시 깃들어 지내는 몸과는 별개로, 독립적으로 존재할 수 있다고 믿어 왔다. 몸이란 파괴되고 변하며 결코 영원하지 못하지만 영혼은 정반대의 속성을 지녔으니까.

 대부분의 서양철학과 종교는 영혼을 이렇게 신비하고 멋진, 놀라운 그 무엇으로 가르쳐 왔다. 현재도 많은 사람들이 영혼은 이렇게 특별한 본성을 지니고 있다고 그냥 관성적으로 받아들인다. 필자는 서구인들이 비판적 사고 없이 영혼을 지나치게 특별하고 예외적인 존재로 믿는다고 생각한다.

이 세계에 실재하는 것들 가운데 절대 파괴되지 않는 것이 있는가? 근본적으로 이 세계에 물질의 형태로 실재하는 것은 모두 예외 없이 파괴되고 만다. 실재하지만 파괴될 수 없는 것을 단 하나라도 생각해 내려 애써 본들 이 세상에 그런 것은 없다. 그렇다면 실재하는 것 가운데 영원토록 변치 않는 것은 있을까? 실재하는 것으로 영원히 존재하는 것이 있는가? 우리가 직접 경험하거나 책을 통해 읽은 바를 통틀어 오랫동안 철저하게 사색한다 해도 일말의 긍정적인 답변도 찾을 수 없다.

파괴되지 않으며 변함없이 영원히 존재하는 것은 어느 누구도 경험하지 못했다. 그런데 어찌 된 일인지 사람들은 영혼은 물리세계의 모든 사실과 원리로부터 예외적이며 이 세상의 것이 아닌 놀라운 속성을 지녔다고 믿게 되었다. 존재세계에서 영혼만을 이렇게 극히 예외적으로 간주하는 것은 철학적으로 심각한 문제점들을 야기할 수밖에 없다.

왜 우리는 영혼이 그토록 멋진 것이라고 믿고 있을까? 또 무엇이 영혼을 그토록 특별한 것으로 만들까? 이 세상의 모든 다른 것들은 근처에도 못 미칠 정도로 신비한 속성을 가졌다는 이것을 어떤 경로로 믿게 되었을까? 실제로 우리는 파괴되지 않으며 영원불변한 것이 과연 어떤 것일까에 대해 티끌만큼의 이해나 느낌도 없다. 만약 우리 모두가 영혼을 가지고 있다면, 왜 또 어떻게 해서 우리는 영혼에 대해 명쾌하게 알지 못할까? 영혼의 개념은 철학 공부를 많이 하지 않고서는 파악하기 어려운 꽤 세련된 형이상학적 개념이다.

우리는 서구 종교의 사제들로부터 모두가 영혼을 가지고 있다고 수없이 들어왔다. 만약 그러지 않았다면 우리 존재의 본질을 부여하는 영혼이라는, 존재론적으로 너무도 예외적인 대상을 우리가 모두 각각 소유하고 있다고 스스로 믿을 사람은 거의 없을 것이다. 그러기에는 ‘영혼’이 지극히 세련되고 추상적인 개념이기 때문이다.

이 문제와 관련해 문화적 상대성을 찾아볼 수 있는 이야기를 하나 예로 들겠다. 중국인들은 서구 종교와 철학에 그다지 친숙하지 않다. 그래서 지금 중국에 가 보면, 파괴되지 않고 변함없이 영원하다는 영혼의 개념을 전혀 갖고 있지 않은 13억 이상의 사람들을 만날 수 있다. 이것을 보면 영혼의 개념은 결코 우리에게 자연적으로 주어지지 않는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것은 단지 반복된 학습에 의해 얻어졌을 뿐이다.

불교는 자아 또는 영혼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믿는다. 세계 주요 종교의 하나인 불교가 자아(self) 또는 영혼(soul)의 존재를 인정하지 않음은 대다수 서구인에게 충격적인 뉴스가 아닐 수 없다. 일부 근본주의자들은 모든 불교도들이 이미 사탄에게 영혼을 팔아버려서 그렇다고 주장할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불교는 처음부터 자아나 영혼 같은 것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불교도들은 ‘자아’라는 개념이 어떤 사람의 본질 즉 그 사람을 그 사람이게끔 해 주는 어떤 부분을 의미한다고 생각한다. 인도 전통에서도 자아란 파괴되지 않고 변함없이 영원하다고 믿어 왔다. 필자는 불교에서 자아의 개념이 서양철학의 영혼 개념과 동일하다고 본다. 영혼이 어떤 속성과 기능이 있든지 우리는 그것이 어떤 사람을 그 사람이게끔 해 주는 무엇이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위에서 살펴보았듯이 영혼은 파괴되지 않고 변함없이 영원하다고 믿어 왔다. 이런 영혼의 기능과 속성은 인도 전통에서 불교가 자아의 존재를 부정했을 때 자아의 개념으로 이해한 것들과 정확히 일치한다. 물론 모든 불교도들이 자아의 개념을 서구의 영혼 개념과 동일시하지는 않는다는 점을 잘 알고 있다. 그러나 이 글에서는 자아와 영혼의 개념 사이에 있을 수도 있는 다소의 차이점에 주목하기보다는 좀 더 단순화되고 직접적인 논의를 위해 이 두 개념을 서로 같은 것으로 바꾸어 써도 무방하다고 보기로 한다. 실제로 필자가 선택하는 이 방식은 최근 서구의 불교학자들 사이에서도 폭넓게 받아들여지고 있다. 이 글은 불교의 무아론−자아 또는 영혼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불교의 주장−을 현대 분석철학으로 조명하여 논의하는 것을 목표로 한다.

가장 영향력 있는 주류 서양철학에서 잘 알려지고 널리 받아들여지고 있는 논증들이 실제로는 서구인들에게 ‘급진적’으로 생각될 불교의 무아론을 입증하는 것을 목도한다면 무척 흥미진진할 것이다.

이제 현대 서양철학에서 많이 주목받는 사고실험(thought experi-ment)을 몇 가지 같이 해 보자. 이 재미난 시나리오들은 여러분이 자신의 의지와 다르게 실은 영혼의 존재를 믿지 않는다고 생각할 수도 있도록 고안되었다. 그래서 이 첫째 사고실험에 여러분이 빠지기 쉬운 함정이 있음을 미리 경고한다. 그러니 영혼의 존재에 대한 굳은 믿음이 있다면 이 함정에 빠지지 않도록 조심하기 바란다.

그러지 않으면 확고한 신념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실제로는 영혼을 믿지 않는다고 인정해야 할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지금이 24세기이고 우주여행이 누구에게나 가능하다고 가정해 보자. 그리고 얼마 전 화성에 살고 있는 언니 또는 누이가 아들을 낳아 가서 만나보고 싶다고 해 보자. 빨리 가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다. 이 미래 세계에서 많이 이용하는 교통수단이 두 가지 있다. 하나는 전통적으로 사용되어 온 로켓이고, 다른 하나는 최근에 개발된 첨단의 트랜스포터(transporter)이다. 로켓 요금은 왕복할 경우 최소 일억 원으로 무척 비싸고, 화성까지 도달하는 데 한 달이나 걸린다. 돌아오는 데도 물론 한 달이 걸린다. 오랫동안 이용되어 온 이 교통수단은 돈도 시간도 많이 든다. 더욱이 왕복을 위해 두 달이나 작은 공간에 갇혀 지내야 한다는 문제도 있다. 일반석 티켓을 산다면 사정은 더 어렵다.

이에 비해 새 트랜스포터 시스템을 운영하는 회사는 왕복 요금으로 단지 백만 원만 받으며 불과 몇 분만에 승객을 화성까지 데려다준다. 이 회사는 최첨단의 기기들을 언제나 철저히 점검하고 운영한다. 트랜스포터는 여러분의 몸을 분자 하나하나까지 철저히 투시(scan)해서 몸의 구조에 관한 모든 정보를 화성에 전파로 송신한다. 그러면 관련 법규에 따라 지구에 있는 여러분의 몸은 즉시 분자 형태로 분해되고 흩어져 없어지게 된다.

이 과정에서 여러분은 통증은 물론 아무런 의식도 없어서 결코 악몽 같은 것으로 기억에 남는 일은 없다. 한편 화성에서는 잘 훈련된 운영요원들이 수신된 정보로 화성에 있는 물질들을 이용해 여러분의 몸을 분자 하나하나까지 원래의 몸과 동일하게 재구성한다. 이 과정 또한 순간적으로 완성되는 것이어서 여러분은 아무것도 느끼지 못하게 된다. 여러분의 몸은 지구에 있던 것과 완벽히 동일하게 재구성된다.

 물론 똑같이 생겼고, 여러분 스스로를 같은 사람이라고 느끼며 동일한 심적 상태를 갖게 된다―똑같은 기억과 똑같은 감정, 똑같은 기질 등등. 다시 말해 스스로에 대해 아무런 차이점을 느낄 수 없고, 다른 사람들도 화성에서 재구성된 여러분에 대해 아무 다른 점도 발견할 수 없다. 자, 이제 질문을 하겠다. 여러분이라면 로켓과 트랜스포터 가운데 어느 것을 선택하겠는가?  

대부분의 사람은 로켓보다는 빠르고 저렴한 첨단의 트랜스포터를 택할 것이다. 로켓은 너무 비싸고 느리며, 또 그렇게 좁은 공간에서 몇 달씩 지내야 한다면, 멀미를 하지 않더라도 결코 유쾌하지 않다. 트랜스포터는 사고가 발생하지만 로켓의 사고율보다 그리 높지 않다. 지난 몇 년 동안 수백 명의 학생들에게 둘 중 무엇을 택하겠느냐는 질문을 해 왔는데, 언제나 4분의 3 이상의 학생들이 트랜스포터 시스템을 선택했다.

실은 이것이 내가 놓은 덫이었다. 4분의 3 이상의 학생들이 모두 이 덫에 걸린 것이다. 비록 함정에 빠지지 말라고 경고하긴 했지만 내가 학생들에게 말하지 않은 것이 있다. 그것은 트랜스포터 시스템의 스캐너(scanner)가 영혼을 스캔해서 그에 관한 정보를 수집할 수 없고 또 화성에 있는 기계가 육체는 재구성해도 영혼을 재생할 수는 없다는 점이다.

대다수의 서구인들이 믿는 것처럼 영혼이 존재한다면 오직 신(God)만이 영혼을 창조하거나 파괴할 수 있다. 기계는 영혼을 창조할 수도 파괴할 수도 없다. 그래서 지구의 트랜스포터에서 몸이 분해되어 없어질 때 영혼은 안주할 몸이 사라져 홀로 떠돌게 될 것이다.

화성에서 기계에 의해 몸이 재구성될 때 기계는 그 몸에 들어갈 영혼을 재창조할 수 없기 때문에 그 몸은 영혼을 가질 수 없다. 그러나 우리는 질적으로 동일한 두뇌와 몸을 가져서 마음도 당연히 같을 것이라고 믿어 사람들은 이런 트랜스포터 서비스에 만족하는 것 같다. 몸과 마음이 같다면 무엇이 문제이겠는가. 내가 가르친 학생들 거의 모두가 영혼의 존재를 믿는 기독교인들이었지만, 그들 중 대다수가 영혼을 잃게 되는 트랜스포터 시스템을 선택했다.

이 사고실험이 현대에 살고 있는 사람들이 마음속 깊은 곳에서는 실제로 영혼의 존재를 믿지 않을지도 모른다는 점을 암시하는 것은 아닐까. 위에서 논의한 바와 같이, 영혼은 대부분의 사람들이 이해하고 받아들이기에는 너무 세련되고 어려운 개념이다―물론 사제들로부터 영혼이 있다고 수백만 번 귀가 따갑게 들어 세뇌(?)되지 않았다면 그렇다는 것이다.

교통수단 선택과 그것이 함축하는 형이상학적 의미가 여러분에게 당황스러울 수도 있겠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이 사고실험을 쉽사리 잊어버리면 안 된다. 이 시나리오가 진지한 철학적 사색을 요구하고 있지 않은가. 어쩌면 정말 영혼이 존재하지 않거나, 아니면 최소한 여러분이 실제로는 영혼의 존재를 믿지 않고 있는지도 모른다.

영혼의 개념이 역사상 어떻게 변화해 왔는가를 살펴보면, 모든 서구인들이 영혼을 언제나 파괴되지 않으며 영원불변의 존재로 받아들여 온 것은 아니라는 점을 쉽게 알 수 있다. 고대 그리스어에서 ‘psyche’는 영혼을 의미했다. ‘psyche’는 심적 현상에 대한 연구 분야들에 관련된 많은 영어 단어들의 어원이다. 예를 들어 심리학(psychology), 정신의학(psychiatry), 정신병리학(psychopathology) 등이 있다.

 ‘psyche’는 원래 ‘생명의 숨결’을 의미했다. 그리스어에서 ‘psyche’는 “프-쉬-케”라고 발음된다. 짐작건대 이 단어는 사람들이 숨을 거둘 때 내던 소리를 표현한 의성어(擬聲語)일 것이다. 사람들은 세상을 떠나며 마지막 숨을 내쉴 때 종종 이런 소리를 낸다. 사람의 마지막 숨결이 떠나면 그 몸에는 더 이상 생명이 남아 있지 않다. 그래서 옛사람들은 마지막 숨결이 그때까지 그 사람의 생명을 지탱해 주던 바로 그 어떤 것이라고 생각했는지도 모른다.

이렇게 ‘생명의 숨결’을 의미하던 말이 여러 세기가 지나면서 파괴될 수 없고 변치 않으며 영원하면서 신성하고 아름다운 ‘영혼’이라는, 무척 다른 것을 의미하게 되었다는 사실이 흥미롭다. 고대 그리스의 피타고라스학파 사람들은 영혼의 윤회를 믿었다. 소크라테스와 플라톤은 이들로부터 영향받아 영혼이 파괴되지 않고 변치 않으며 아름답고 경이로운 속성들을 가지고 있다고 주장했다. ‘psyche’는 이들 이전 호머의 《일리아드》와 《오디세이》의 시대에는 ‘(생명의) 숨결’을 의미했는데, 몇 세기가 지난 후에는 위대한 철학자들의 섬세한 상상력과 논증을 통해 그토록 멋진 존재를 의미하게 되었다. 고대 그리스에서 ‘psyche’라는 말의 의미는 극적인 변화를 겪은 것이다. 

영혼은 우리의 정신 현상을 주관하는 어떤 것으로 종종 생각되어 왔다. 기원전 5세기에 살았던 소크라테스와 플라톤의 영혼에 관한 견해는 그들의 윤회론을 제외하면 기독교의 영혼불멸설과 일맥상통한다. 그리하여 불멸의 영혼에 대한 믿음은 서구인들의 사고체계를 수천 년간 지배했다.

영혼의 개념에 아주 작은 변화라도 일어나는 것을 보기 위해 역사는 데카르트가 영혼의 개념을 세속화하려 시도하는 17세기까지 기다려야 했다. 데카르트는 그의 저서 《성찰(Meditations)》에서 ‘마음’과 ‘영혼’ 두 단어를 서로 바꾸어 가며 사용했다. 영혼과 마음이 동일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일 것이다. 데카르트에게 있어서 마음은 생각하는 실체다.

마음의 본질은 생각함이고, 생각하지 않는 것은 마음이 아니다. 실은 생각함 그 자체가 마음이다. 영혼의 본성에 대한 초점이, 파괴되지 않으며 변치 않고 불멸이라는 속성들로부터 생각함이라는 본질로 옮겨갔다. 그러나 데카르트의 철학에서 마음은 아직도 실체로서 두뇌와 몸으로부터 독립해서 스스로 존재할 수 있다.

21세기에 사는 우리가 이렇게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마음에 대한 견해를 쉽게 받아들여 소화하기는 어렵다. 19세기와 20세기 이래 두뇌의 구조와 기능 방식에 대해 점점 더 많은 정보와 지식을 얻게 되면서 ‘마음’의 개념은 지속적으로 변형을 거듭했다. 그래서 마음은 마침내 두뇌가 제대로 기능할 때 그 표면에서 생겨나는 의식 또는 의식의 흐름으로 이해되기 시작했다.

의식 또는 의식의 흐름으로 이해된 마음은 그것의 물리적 기반인 두뇌와 두뇌의 기능 없이는 존재할 수 없다. 우리 대부분은 이제 마음이 몸(두뇌)에 그 존재를 의존한다고 믿는다. 우리가 영혼을 서술하기 위해 사용했던 그 멋진 형용사들−파괴되지 않고 변함없으며 영원히 아름답고 신성하다는−은 더 이상 마음 또는 의식을 기술하는 데 적용될 수 없다. 

우리는 위에서 영혼의 개념이 극적인 변화를 거치며 거듭해서 철저히 변형되어 왔음을 살펴보았다. 영혼의 개념이 겪은 흥미진진한 여행 이야기는 다음과 같이 요약될 수 있겠다: (생명의) 숨결→(영원토록 무수히 다른 삶을 윤회하는) 영혼→(스스로 독립해서 존재하는 실체로서의) 마음→(두뇌와 그 기능에 존재를 의존하는) 의식 또는 의식의 흐름. 파괴되지 않으며 영원불변하는 존재로서 영혼의 개념은 ‘psyche’라는 말의 의미가 변형되어 온 시리즈의 단지 두 번째 단계에만 해당된다.

이제 역사 이야기는 그 정도 했으면 충분하다. 지금은 내가 여러분을 영혼 개념이 겪은 역사상의 변화에 주목하게 한 이유를 물어야 할 때다: 영혼의 본성을 이해하기 위해 우리는 왜 ‘psyche’의 의미에서 다른 단계들은 안 되고 오직 두 번째 단계의 의미만을 받아들여야 하는가?

왜 고대 그리스의 두 철학자들−소크라테스와 플라톤−과 기독교의 견해만 받아들여야 하고 그보다 단순하고 군더더기 없는 ‘솔직한’ 삶을 살았던 그 이전 고대의 견해나 우리 시대 가장 명민한 지성들인 신경과학자들의 견해를 받아들여서는 안 되는가? 이들을 모두 고려하면 개인의 본질을 구성하며 그에게 동일성을 부여한다는 불멸의 존재로서 영혼은 ‘psyche’라는 단어를 이해하기 위해 가능한 여러 해석의 하나일 뿐이라고 믿지 않을 수 없다.

기분 전환과 논의의 진전을 위해 사고실험을 하나 더 소개하겠다. 이 시나리오는 우리가 잘 알고 있는 공상과학 이야기로부터 나왔다. 일군의 과학자들이 오바마 대통령을 복제한 안드로이드를 만들었다고 가정해 보자. 이 안드로이드는 실리콘을 물질적 토대로 하여 만들어진 기계지만, 그 몸의 모든 부분은 하나하나 오바마의 유기질 몸의 부분과 상응한다.

그래서 각각의 실리콘 부품이 오바마의 상응하는 몸 부분과 정확히 동일한 기능을 수행하도록 만들어졌다. 이 안드로이드는 오바마와 똑같이 생겼고 똑같이 말하고 걸어 다닌다. 이는 물론 형이상학적으로 가능한 시나리오다. 그러나 이 안드로이드가 영혼이 없다는 점 또한 분명하다. 영혼이란 설령 그것이 존재한다고 해도, 과학자들이 실험실에서 만들어 안드로이드의 몸속에 설치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렇다고 해서 영혼이 실리콘으로 만들어진 안드로이드의 ‘두뇌’로부터 자연적으로 탄생하는 것 또한 아니다. 

그러면 이제 오바마가 가벼운 사고를 당해 손가락 끝의 아주 작은 부분을 잃게 되는 상황을 상상해 보자. 영화 〈스타워즈(Star Wars)〉의 한 장면처럼 의사들은 그가 잃은 손가락 끝 부분과 완전히 동일한 인과적 기능을 수행하는 실리콘으로 만든 물질로 그 부분을 대체한다. 오바마는 새로 대체된 부분에 전적으로 만족하며 그 부분은 그가 잃은 예전의 손가락 끝 부분이 하던 일을 모두 제대로 해낸다. 오바마를 비롯해 누구도 차이를 발견하지 못한다. 이 시나리오 또한 형이상학적으로 충분히 가능하다.

그러나 불행히도 오바마는 그의 몸을 부분적으로 조금씩 계속 잃어가고 그때마다 의사들은 동일한 기능을 수행하는 실리콘으로 만들어진 부품으로 잃은 부분을 즉시 교체한다. 오바마는 몸의 부분을 한 번에 아주 조금씩만 잃고 또 항상 잃는 것이 아니라 어쩌다가 한 번씩만 잃으며, 교체된 몸의 부분들에 대해 아무런 차이도 느끼지 못한다. 그리고 오랜 기간 자신의 일상을 아무런 문제 없이 잘 처리해 나간다. 이렇게 20년 동안 그의 실리콘화가 아무 눈에도 띄지 않고 철저히 그리고 완벽히 진행되었다고 가정하자. 두뇌의 모든 세포를 포함해 그의 몸의 모든 부분이 실리콘으로 된 물질로 교체되었다.

오바마는 여전히 일상의 기능을 똑같이 잘 수행하고, 우리는 그가 같은 사람이라고−같은 영혼을 가졌다고− 믿는다. 그렇지만 20년이 지난 후 그의 몸에 탄소로 된 유기물 세포는 단 하나도 남아 있지 않다. 그의 몸은 구석구석 모두 기계 부품들로 대체되었다. 물질적 토대에 관한 한 이제 오바마는 안드로이드와 전혀 다를 바가 없다. 다시 말해, 오바마는 몸의 모든 부분이 철저하게 안드로이드다.

그러나 잠깐 우리가 기억해야 할 것이 있다. 앞의 논의에서 우리는 어떤 안드로이드도 영혼을 가질 수 없음을 알았다. 그렇다면 우리는 현재 시점의 오바마가 안드로이드인 이상 영혼을 가지고 있지 않다는 결론을 내려야 한다. 우리는 이 안드로이드 오바마로부터 이상하다거나 결함이 있을 법한 점은 전혀 발견하지 못했다−그의 직무 수행 능력과 다른 사람들과의 일상적 교류, 그리고 감정 표현 등등 모두 아무 이상이 없다. 그러나 알고 보니 그는 영혼을 가지고 있지 않은 것이었다.

우리는 여기서 어려운 딜레마에 직면한다. 20년 동안 몸의 모든 부분이 교체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우리의 직관으로는 이 안드로이드 오바마가 20년 전 ‘피와 살’로 되어 있던 오바마와 인과적·역사적으로 연결되어 있기 때문에 아직도 ‘같은 영혼’이어야 한다고 본다. 그러나 우리는 위에서 아무리 잘 만들어진 복제품이라도 어떤 기계도 영혼을 가질 수 없다고 동의한 바 있다. 이것이 우리의 딜레마다.

20년 동안의 부품 교체를 통해 완성된 이 실리콘으로 된 오바마가 영혼을 가지고 있다면, 20년 전에 만들어져 오바마와 전적으로 동일한 기능을 수행하는 완벽한 복제 안드로이드도 영혼을 가지고 있다고 인정해야 한다. 그러나 만약 20년 후 이 실리콘으로 된 오바마가 영혼을 가지고 있지 않다면, 왜 20년 전 탄소유기물로 된 오바마는 영혼을 가지고 있다고 인정해야만 했는지 이해하기 어렵다. 생각해 보면 탄소유기물이 뭐가 그리 대단해서 그것으로 된 몸은 영혼을 가질 수 있고 실리콘으로 된 몸은 안 된다는지 그 이유가 불분명하다. 

불교가 가르치듯이 우리에게 자아 또는 영혼이 없다면 이 사고실험이 보여주는 것 같은 당혹스러운 논리적 문제가 처음부터 발생하지도 않는다. 불교에 따르면 20년 전 오바마나 그의 안드로이드 복제물이나 둘 다 자아나 영혼이 없고, 20년이 지나 안드로이드가 된 지금의 오바마 역시 자아나 영혼이 없다.

 불교의 무아론을 따르면 어떤 곤란한 논리적 형이상학적 문제도 전혀 마주치지 않는다. 그러나 우리가 오바마가 20년 전에도 또 안드로이드가 된 지금도 영혼을 가진다고 믿는다면 위에서 보았듯이 어려운 딜레마에 빠지게 된다. 이러한 논리적 문제가 주는 곤란함이 영혼이나 자아가 있다는 믿음을 의심하게 할 동기를 부여하고 있지는 않을까.

18세기 스코틀랜드의 철학자 데이비드 흄은 놀랍도록 단순한 질문을 던져 자아의 존재를 부정하는 직접적인 방법을 보여주었다. 만약 자아가 있다면 몸에 있는 것이 아니라 마음에 있을 것이다. 그러면 두 눈을 감고 당신의 자아를 찾으려 마음의 구석구석을 모조리 훑어보자. 당신은 당신의 자아와 만날 수 있는가. 아무리 철저하게 이 내성(內省, introspection)을 계속해도 어떤 긍정적인 결과도 나오지 않는다. 마음속에서 자아 자체와 조우하기는 경험적으로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자신의 감정이나 생각, 거울에 비친 자신의 몸의 생김새 등에 관한 특정한 기억들과 마주칠 수 있을지 모르나 우리는 우리의 자아 자체와는 결코 만날 수 없다. 이렇게 철저한 경험주의적 관점에서 보면 자아 또는 영혼의 존재를 인정한다는 것은 분명히 어렵다. 21세기에 사는 우리 대부분이 그렇듯이 여러분도 경험주의자라면 자아나 영혼의 존재를 경험적으로 검증하는 것이 원칙적으로 불가능한 이상, 영혼의 존재를 합리적으로 받아들이기는 어려울 것이다.

두어 개의 예를 포함한 사고실험 하나를 더 소개하겠다. 이 시나리오가 불교의 무아론을 입증하는 또 다른 관점을 제시할 것이다. 여러분이 입학허가서를 받은 후 마음을 정하기 전에 대학 캠퍼스를 둘러보고 있다고 가정해 보자. 안내원과 다른 학생들과 함께 여러분은 여러 건물과 도서관, 실험실, 본부 건물, 그리고 스포츠 시설 등을 둘러본다. 그리고 교수와 교직원 또 학생들과 만나 대화도 나눈다.

 몇 시간 후 방문 일정이 끝난다. 그런데 모든 일정이 끝난 다음 여러분이 대학 자체의 위치에 대해 궁금해졌다고 해 보자. 스스로 자문하기를 ‘지금껏 많은 건물과 학생 그리고 교직원들을 보았다. 그런데 아직 대학 자체는 보지 못했다. 도대체 대학은 어디에 있는가?’ 이 다소 엉뚱한 ‘철학적’ 질문에 어떻게 답해야 할까. 

대학이란 그 모든 건물과 그 안에서 일하는 사람들과 독립해서 따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고 답변해야 옳다. 존재의 실상은 우리 생각과는 많이 다르다. 그 모든 건물과 사람들이 바로 대학이다. 다시 말해 대학이란 그것의 건물과 소속된 사람들 이상의 아무것도 아니다. 대학은 그 부속 건물과 사람들과 별개로 어떤 특별한 형이상학적 공간에 따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만약 누군가 대학 자체가 어떤 별도의 존재론적 범주에 속하는 일종의 형이상학적 대상이라고 믿는다면, 그는 범주 오류를 범하게 된다. 범주 오류의 문제점을 보여줄 또 하나의 좋은 예는 군대의 조직, 가령 사단 같은 것이다. 사단은 모든 사병과 장교, 무기와 장비, 그리고 건물 등과 별도로 따로 존재하는 어떤 것이 아니다. 모든 인원과 장비 등 자체가 바로 그 사단이다.

사단은 그것을 구성하는 모든 것들과 별개로 따로 존재하지 않는다. 다시 말해 사단이 그것의 구성요소들과 다른 존재론적 범주에 속하는 것이 아니다. 만약 여러분이 사단이 독립적인 대상이라고 생각한다면, 여러분은 범주 오류를 범하게 된다. 우리는 주위에서 이런 철학적 통찰을 보여주는 많은 예를 쉽게 찾을 수 있다. 도시, 농구팀, 2011년 졸업반 등.

위에서 열거한 대학과 사단의 예는 자아 또는 영혼과 개인의 모든 구성요소에 대해서도 우리가 같은 통찰을 해야 한다는 점을 알려 준다. 한 개인은 몸과 여러 다양한 심적 상태들을 가지고 있다. 그러면 그 사람을 그 사람이게끔 해 주는 것이 무엇인가? 다시 말해, 무엇이 이 사람의 자아 또는 영혼이고, 그가 그것을 가지고 있다면 도대체 어디에 있는가?  몸의 어떤 부분도 자아 또는 영혼이 아니라는 점은 분명하다.

또 데이비드 흄의 논의에서 알 수 있듯, 우리는 어떤 개개의 심적 상태도 자아 또는 영혼이 아니라는 점도 알고 있다. 그리고 위에서 대학이나 사단이 그것들의 구성요소와 별도로 어떤 특별한 형이상학적 공간에 존재하지 않음도 알게 되었다. 그렇다면 개인의 몸과 다양한 심적 상태들로부터 독립해서 별도로 존재하는 자아 또는 영혼이 없다는 점 또한 분명하다.

몸과 모든 심리적 상태들 자체가 바로 개인 자신이라고 할 만하다. 영혼이나 자아를 별도의 존재론적 범주에 속하는 대상으로 생각함은 범주 오류를 범하는 것이다. 그런 별도의 대상은 존재하지 않는다. 개인에게 존재하는 것은 몸과 심적 상태들일 뿐이다.

지금까지 필자는 불교의 무아론을 입증하는 현대 서양 분석철학의 일련의 사고실험들을 제시했다. 놀라운 사실은 석가모니 부처 자신이 이미 2,500년 전에 기본적으로 동일한 노선의 논증들을 제시했다는 점이다. 그래서 이 글의 주된 목표는 서양 분석철학에서 발전된 사고실험들을 빌려 고대 불교의 무아론 논증들을 다시 도입해 소개하는 것이었다.

불교의 무아론을 뒷받침하는 자신들의 현대철학 논증에 서구인들이 어떻게 반응하는지를 관찰하는 일은 흥미진진할 것이다. 지금까지는 무아론을 위해 서양철학에서 유명한 논증들을 많이 사용했으니, 이제는 무아론을 위한 불교의 대표적 논증을 하나라도 소개하는 것이 공정하겠다.

의심의 여지 없이, 지난 2,500년간 불교에서는 무아론을 증명하고자 다양한 논증들이 만들어지고 세련되게 다듬어졌다. 필자는 이 글의 마지막 논의로 불교의 많은 논증들 중에서 인기 있고 중요한 연기론(緣起論)을 소개하고, 연기론에 비추어 볼 때 무아론이 어떻게 이해되는가를 살펴보려 한다.

연기란 사물이 그들의 원인과 조건들에 의해 생겨난다는(생겨나고 지속되며 또 사라진다는) 불교의 논제다. 아무것도 그 스스로 생겨날 수 없다. 연기는 부처의 가장 기본적인 가르침의 하나인데, 이 세계가 근본적으로 물리적이며 인과가 바로 이 물리계를 받쳐주는 존재론적 관계라고 믿는 21세기의 우리에게 직관적으로 옳다고 느껴진다.

불교의 주장대로 모든 것이 그 원인과 조건들에 의해 생겨난다면 다음 결론이 따라오게 된다: 그 어떤 것도 스스로 그것을 그것이게끔 해 주는 영원불변의 본성 즉 본질을 가질 수 없다. 어느 순간의 어떤 사물에도 그 원인과 조건들  중 최소한 하나 이상이 변하기 마련이며, 이 변화가 주어진 사물의 변화를 가져온다. 이것이 바로 불교가 모든 것은 끊임없이 변하며 결코 그대로 머물러 있지 않는다고 믿는 이유다.

그리고 모든 것이 연기에 의해 생겨난다면 모든 것이 그 본성을 원인과 조건들로부터 빌려 왔으므로 궁극적인 관점에서 보면 실은 그 어떤 것도 스스로의 본성을 가졌다고 볼 수 없다. 모든 것이 그 어떤 순간에도 본질적 속성을 가질 수 없어 본질을 결여하고 있다. 몇 가지 예들 들어 이 점을 더 설명해 보겠다.

갑자기 정전이 되었다고 가정해 보자. 여러분은 독서를 계속하기 위해 불을 켜고 싶다. 그래서 창문이 닫힌 바람 없는 방에서 마룻바닥에 성냥을 그어 본다. 성냥에 불이 붙어 그것으로 촛불을 켠다. 불빛이 방에 가득 차고 여러분은 책을 읽을 수 있다.

한 시간이 지나 전기가 다시 들어오면 여러분은 촛불을 끈다. 이 모두가 우리가 가끔 겪는 일이다. 그러면 이제 여러분이 불교 연기론의 요점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될 만한 철학적 질문을 하나 던지겠다. 그 촛불을 촛불 자체로 만들어 주는 것은 무엇인가? 다시 말해, 촛불의 본질은 무엇인가?

질문에 답하기 위해 이 촛불을 만들어낸 일련의 사건들을 되짚어 보자. 그 촛불은 불이 붙은 성냥으로 불이 붙게 되었다. 그런데 성냥에 불이 붙기 위해서는 원인과 많은 조건이 필요하다. 예를 들어 여러분이 손 근육을 사용하여 적절한 힘으로 성냥을 마른 마룻바닥에 그어야 하고, 바람이 없어야 하며, 산소가 충분히 있어야 하고, 또 창문으로 비가 들이치지 말아야 한다는 등등 수많은 조건이 있다.

이렇게 셀 수 없이 많은 조건 가운데 하나라도 충족되지 않으면 성냥에 불이 붙지 않을 것이다. 이미 불이 붙은 성냥을 가지고 있다고 하더라도 독서용 초에 불을 붙이려면 성냥이 다 타기 전에 초에 가까이 가져가야 하고, 산소가 충분하고 바람이 없으며 창문을 통해 비가 들이치지 말아야 하며, 또 초 심지에 불이 붙을 때까지 여러분은 차분히 기다려야 한다.

촛불이 성공적으로 켜지더라도 한동안 지속시키려면 충분한 산소가 계속 공급되어야 한다. 또한 초의 심지가 너무 짧으면 안 되고 바람이나 들이치는 비가 없어야 하며, 다른 사람이 그 촛불을 빨리 꺼버리면 안 된다는 등등의 조건들이 있다. 한편 이제 그만 촛불을 끄려면 여러분이 입으로 불어 끄든지 아니면 다른 방법을 사용해야 한다.

지금까지 촛불이라는 단순한 예로 살펴보더라도, 그것이 생겨나고 지속되며 꺼져 없어지기까지는 무수히 많은 물리적 의도적 원인들과 조건들이 얽혀 있다. 촛불의 속성 중 다른 것들로부터 비롯되지 않은 것은 하나도 없다. 다시 말해 촛불은 그 스스로의 내적 본성 또는 본질을 가지고 있지 않다.

그리고 이와 같은 논증과 통찰이 존재 세계의 모든 다른 것들에도 적용됨이 논리적으로 분명하다. 존재 영역에 있는 어떤 것도 다른 것들로부터 독립적으로 생겨나고 지속되거나 사라질 수 없다. 아무것도 스스로의 본질을 가질 수 없다.

여러분은 혹시 비록 촛불이 조명을 위해 다른 것들로부터−가령, 산소, 초의 바탕인 화학물질, 심지의 재료, 건조한 공기 등등−모든 속성을 빌려오기는 하지만 그래도 ‘조명’이라는 스스로의 유일한 본성은 가지고 있다고 볼 수도 있지 않으냐고 물을 수 있을 것이다. 조명의 본성은 산소나 심지 등의 본성과는 전혀 다르다. 따라서 이런 의미에서 조명은 이 모든 것들로부터 신비롭게 발생하는 전혀 새로운 속성으로 간주될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 문제를 더 자세히 살펴보면 그렇게 빌려 온 속성들이 조명의 본질을 새로이 창조할 수 없다는 점이 분명하게 밝혀진다.

예를 들어 설명해 보겠다.

여러분이 열 개의 은행에서 돈을 빌려 아주 큰 집을 샀다고 가정하자. 여러분은 그 집을 무척 좋아하고 그 안에서 행복감을 느낀다. 그 집은 여러분이 은행에서 빌린 많은 양의 돈과는 전혀 다른 속성을 가지고 있다. 그리고 여러분은 그 집이 여러분의 소유여서 대단히 기쁘다.

그러나 잠깐만! 그 집은 단지 어떤 한 가지 의미에서만 여러분의 것이다. 실제로 그 집은 여러분의 소유가 아니다. 여러분이 아니라 은행이 그 집의 진짜 주인이다. 은행으로부터 빌린 돈으로 그 집을 구입한 이상 여러분이 그 집을 소유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이제 우리의 촛불의 예로 돌아가 보자.

촛불이 ‘조명’의 속성을 그것의 원인과 무수히 많은 조건들로부터 빌려 왔다면 ‘조명’은 촛불 스스로 가지고 있는 본성일 수 없다. ‘조명’의 속성은 그것의 원인과 조건들로부터 왔으니 그 원인과 조건들이 조명을 소유한 것이지 촛불이 조명을 소유한 것이 아니다. 촛불은 그 스스로의 내적 본성 즉 본질을 가지고 있지 않다. 그리고 다시금 같은 구조의 논증이 존재세계의 모든 것에 적용된다. 그 어느 것에도 스스로의 본질은 없다. 

위에서 논의한 연기론을 통해서 우리는 왜 어떤 개인에게도 자아 또는 영혼이 없는가를 쉽게 알 수 있다. 자아나 영혼이란 한 개인을 그 사람이게끔 해 주는 어떤 무엇이다. 다시 말해, 자아나 영혼은 그 사람의 내적 본성 또는 본질로 기능한다.

그러나 우리는 위에서 이미 이 세상의 어느 것도 스스로의 내적 본성 또는 본질을 가지고 있지 않음을 살펴보았다. 개인들이라고 해서 예외일 수는 없다. 어떤 개인도 그의 본질이 되어야 하는 자아 또는 영혼을 가지고 있지 않다. 다른 존재와 마찬가지로 개인도 내적 본성이 없다. 어떤 개인에게도 자아 또는 영혼이 존재하지 않는다. 

불교는 세계 주요 종교의 하나로 훌륭한 도덕적 가르침의 체계를 갖추고 있다고 여겨져 왔다. 그러나 불교도들이 자아 또는 영혼의 존재 자체를 믿지 않는다면, 그들이 어떻게 사회에 도덕적 규율과 규범을 가르치고 사람들을 자비심에 가득 찬 이타적(利他的) 삶으로 이끌 수 있을까?

여러분은 무아론이 어떤 도덕적 결론을 이끌어낼지 다소 의아해할 것이다. 그러나 불교는 외견상 혼란스러운 이 문제를 아주 쉽고 단순하게 해결한다. 불교도에게는 자아나 영혼이 존재하지 않는다. 자아의 존재를 믿지 않으므로, 그것에 집착하지도 않게 된다. 처음부터 그 스스로가 존재하지도 않으므로 스스로의 안녕과 이익에 매달릴 필요가 없다.

다시 말해 그는 이기적(self-fish)이지 않게 된다−그는 전적으로 공평하고 비이기적(unselfish)으로 될 것이다! 그러면 그는 다른 사람들의 이익과 안녕에 주의를 기울이고 남을 도와주기 위해 더 많은 시간과 마음의 여유를 가지기 시작한다. 그가 자신의 삶에 어떤 고통을 가지고 있다면 물론 그것은 좋지 않은 일이다. 그는 그 고통을 처리하고 제거해야 한다. 누군가 다른 사람이 고통을 가지고 있어도 그것 또한 마찬가지로 나쁜 일이다.

그에게 자아가 없으므로, 고통이란 그의 것이든 다른 사람의 것이든 상관없이 제거되어야 한다. 이 세계에는 고통을 받는 자아 또는 영혼이 없이 오직 고통 자체만이 홀로 존재한다. 그런데 고통이란 부정적인 결과를 초래하는 것이기 때문에, 우리는 자연스럽게 그것이 ‘나’라고 불리는 이것과 함께 여기 있든지 아니면 다른 사람과 함께 저기 있든지 모두 없애려고 노력하게 된다.

이 점을 이제 다소 다른 각도에서 다시 설명해 보겠다. 자아가 없음을 깨닫는 순간부터 우리는 스스로에 대해 덜 염려하고 덜 걱정하기 시작한다−우리의 미래, 돈 문제, 다른 사람들이 우리를 어떻게 생각할까 하는 염려, 그리고 어떻게 체면을 유지할까 등등의 염려가 줄기 시작한다. 우리 삶의 얼마나 많은 부분이 우리 자신들(자아들)을 위한 이런 걱정거리들을 처리하기 위해 소모되는가?

아마도 우리 삶 대부분이 그렇게 쓰여 없어지고 있는 것은 아닐까. 그러나 부처가 가르치듯이 일단 스스로 자아를 버리고 떠나보내면 대신 우리는 다른 이들의 고통과 안녕을 생각하고 살필 수 있는 시간과 마음의 여유를 훨씬 더 많이 갖게 될 것이다. 이것이 불교의 무아론이 이타적인 도덕적 삶을 권장하고 증진시키는 이유다.

마지막으로 오해를 피하기 위해 짚고 넘어가야 할 점이 있다. 필자는 이 글에서 무아론을 주장하는 도덕체계가 자아 또는 영혼의 존재를 전제하는 다른 체계들보다 더 우월하다고 주장하는 것은 아니다. 무아론을 근간으로 하는 도덕체계가 사람들을 비이기적(un-selfish)이 되게 가르치고 다른 체계들은 이기적(self-fish)인 도덕체계를 가르친다는 농담 같은 생각을 펴고 있는 것이 아니다. 물론 우리는 ‘비이기적인(unselfish)’ ‘사심없는(selfless)’ ‘이기적인(selfish)’ ‘자기중심적인(self-centered)’ 같은 단어들이 만들어진 방식 때문에 현혹되지는 않을 것이다.

전자의 도덕체계는 진정으로 이타적이 되기 위해서는 스스로의 자아를 버리고 떠나보내야 함을 강조한다. 이타적인 도덕적 삶을 사는 최선의 방법은 스스로의 자아를 떠나보내는 것 즉 자아가 처음부터 존재하지 않음을 진정으로 깨닫는 것이다.

한편 자아나 영혼의 존재에 대한 가르침을 기본으로 하는 후자의 도덕체계에 영향받은 많은 선량한 사람들은 고통받는 다른 사람들을 보살피는 이타적 행위들을 끊임없이 하는 도덕적 삶을 사는 것이 스스로의 영혼을 보살피는 최선의 방법 중의 하나라고 믿어 왔다. 그래서 실제로 실천적인 관점에서 보면 두 개의 다른 도덕체계가 실은 하나의 가르침을 주고 있다. 그것은 여러분이 자아나 영혼의 존재를 믿든지 믿지 않든지, 이타적으로 도덕적인 삶이 좋은 삶이라는 것이다.

이 두 도덕체계의 차이는 단지 형이상학적인 문제일 뿐이다. 현실 세계를 실제로 살아가고 있는 우리에게 이런 형이상학적 차이는 부질없고 사소한 이슈다. 다급히 돌보고 처리해야 할 많은 실제적인 문제들에 직면하고 있는 우리가 형이상학적 문제들과 씨름하느라고 시간을 낭비해서는 안 된다는 석가모니 부처의 가르침도 있지 않은가.

필자도 자아나 영혼의 존재 여부가 매일매일을 살아가고 있는 우리에게 언제나 그다지 중요한 이슈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우리에게는 처리해야 할 더 급하고 중요한, 실제적인 도덕적 문제들이 있기 때문이다. 영혼의 존재 여부와 관련 없이 두 도덕체계 모두 우리가 이타적인 삶을 살 것을 요구한다. 이것이 가장 중요한 것이 아닐까. ■

 

홍창성
미국 미네소타주립대학 철학과 교수. 서울대학 철학과 및 동 대학원 졸업. 미국 브라운 대학 대학원 철학과 졸업. 철학박사. 미국철학회 아시아철학위원회장 역임(2005~2008). 저술로는 “Natural Kinds and the Identity of Property” “Jaegwon Kim: Conscience of Physicalism” “How to Teach Zen in a College Classroom” 그리고 〈유형물리주의와 기능주의 환원론의 만남〉 등의 논문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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