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경국 교수의 반론에 대한 재반론

1. 이 논쟁의 과정과 의미

논쟁은 특정한 주제와 함께 논쟁의 상대방을 전제로 한다는 점에서 관계적 속성을 지닌다. 논쟁을 통해 형성되는 관계는 한편으로 논리적인 맥락을 지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한 인격체와 다른 인격체 사이의 만남을 전제로 하는 대화의 맥락을 지니면서 여러 가지 감정과 숙고의 과정을 동반한다. 이 논쟁의 경우도 예외가 아니다.

자유주의 경제학자인 민경국 교수의 불교 사회철학 전반에 대한 비판으로 시작된 우리의 논쟁은 논자(박병기)의 첫 번째 반론인 〈자유주의 경제학의 치명적 낙관〉(《불교평론》 43호, 2010년 여름호)로 이어졌고, 다시 민경국 교수는 〈자유주의에 대한 비관과 그 치명적 결과〉(《불교평론》 44호, 2010년 가을호)라는 제목으로 반론을 펼쳤다. 이 글은 바로 그 반론에 대한 재반론이다.

건강한 논쟁의 장이 드문 우리 학계의 풍토 속에서 민경국 교수의 반론은 논자에게 이 주제에 대한 자신의 생각을 다시 정리해 볼 수 있는 계기를 제공해 주었을 뿐만 아니라, 이 주제의 외연(外延)이 이론적 차원에 그치지 않고 그 결과가 우리의 정치경제적 상황 전반에 미치는 실천적 의미까지 담보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는 희망을 품게 해 주었다. 20세기 후반을 지나면서 이른바 ‘이데올로기를 넘어 문화의 시대로’라는 기치가 과도하게 확산되는 과정에서 상당 부분 실종해 버린 우리 사회의 이념적 지향에 대한 새롭고 진지한 성찰이 요구되는 시점이라는 판단에 따른 기대이다.

문화에 대한 정의를 어떻게 내리는가에 따라 이념이 포함될 수 있는 여지가 없는 것은 아니지만, 문화 자체의 초점에서 이념이 지닐 수 있는 위상 자체의 한계가 뚜렷해 보이고 그 결과에 따라 사회가 어떻게 움직이고 있고 또 움직여야 하는지에 대한 이념적 논의는 필연적으로 약화될 수밖에 없는 시대를 우리는 살아내고 있다. 물론 구제금융 사태를 맞으면서 확산된 신자유주의 논쟁이 잠시 그러한 요구를 충족시켜준 적도 있다. 하지만, 그 논의가 지나치게 투쟁과 과도한 방어의 양상으로 치달았을 뿐만 아니라 이명박 정권의 등장으로 상징되는 신자유주의의 일방적인 승리로 싱겁게 끝나고 만 한계를 지닌 채 현재의 우리에게 이어지고 있음을 확인한 필요를 느낀다.

이런 상황 속에서 우리나라 자유주의 경제학을 대표하는 학자 중 한 사람으로 평가받는 민경국 교수(이하로 민경국으로 약칭함)의 논자에 대한 지속적인 비판과 반론 제시는 ‘연기적 독존주의(緣起的 獨尊主義)’로 개념화한 논자의 불교 사회철학 내지 사회윤리에 대한 이론적·실천적 검증을 할 기회를 제공해 준다고 생각한다. 그뿐만 아니라, 우리 사회 전반의 이념적 지향을 둘러싼 불명료함을 덜어낼 수 있는 담론의 장을 제공하는 역할도 해내고 있다고 판단된다.

논자에 대한 민경국의 반론은 다음과 같은 두 가지 초점을 지닌다. 첫째는 논자의 자유주의에 대한 비판이 ‘가짜 자유주의’인 프랑스 계몽주의 전통에 뿌리를 둔 존 스튜어트 밀과 존 롤스의 자유주의에 초점을 맞추고 있기 때문에 민경국의 스코틀랜드 계몽주의 전통의 자유주의에 대한 비판에는 해당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둘째는 논자의 대안을 연기적 독존주의에 기반한 배려의 윤리로 단정하고 그런 윤리는 자유사회를 치장하는 하나의 장식품에 불과할 뿐 자유주의를 움직이는 중심 윤리는 될 수 없다는 비판이다. 이런 두 가지 비판점에 근거해서 결과적으로 자유사회의 보이지 않는 손에 대한 비관은 끔찍한 결과를 가져오게 될 것이라는 결론을 덧붙이고 있다.

논자의 반론을 비교적 정확하게 이해한 바탕 위에서 전개된 수준 있는 반론임을 인정하면서 다음과 같은 재반론을 펼치고자 한다. 첫째는 민경국의 자유주의 경제학이 과연 존 롤스와 같은 현대를 대표하는 자유주의자들의 논의를 가짜로 몰아붙일 수 있을 정도의 차별성을 갖고 있는가 하는 의문이다. 결론적으로 그런 차별성을 확보하는 일은 불가능할 뿐만 아니라, 더욱이 그것을 ‘가짜’로 몰아붙이고 자신의 것만을 ‘진짜’라고 주장하는 것은 논쟁의 기본을 망각한 오만임을 강조하고자 한다.

둘째는 좀 더 적극적인 반론으로 논자의 연기적 독존주의를 바탕으로 하는 윤리는 단지 배려윤리를 의미하는 수준을 넘어서서 ‘독존(獨尊)’ 즉 ‘홀로 존귀함’이라는 기본적 자유와 권리를 바탕으로 삼아 자신의 삶을 가능하게 하는 연기성 또는 관계성을 동시에 자각하는 유기적 관계성의 윤리임을 주장함으로써 민경국의 반론이 지니는 한계를 드러내는 방식을 택하고자 한다. 이러한 두 단계의 반론 과정을 통해서 민경국식의 자유주의 경제학에 근거한 무모한 미래에 대한 낙관이 가져올 ‘치명적인 결과’에 대한 경각심을 자연스럽게 불러일으킬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하면서 본격적인 반론을 펼치고자 한다.

2. ‘진짜’ 자유주의의 정체성은 무엇인가?

민경국은 자신의 자유주의가 ‘진짜’ 자유주의라고 주장한다. 민경국의 자유주의는 사회적이고 진화적인 인간관을 전제로 해서 진화적 합리주의를 채택함으로써 인간관계를 떠나서는 자유를 생각할 수 없다는 입장을 택하는 스코틀랜드 계몽주의 전통을 잇는 자유주의이고, 이것은 고립되고 이기적이며 합리적인 인간관을 전제로 하여 구성적 합리주의를 추구하는 프랑스 계몽주의 전통의 롤스(John Rawls)식 ‘가짜’ 자유주의와 비교할 수 있는 진짜라는 것이다.

1) ‘진짜’ 자유주의는 과연 무엇인가?

민경국이 제시하는 진짜 자유주의 판별의 준거는 스코틀랜드 계몽주의 전통의 진짜 자유주의가 생각하는 지적 활동의 자유와 함께 행동하는 실제 활동의 자유도 동시에 존중하는 데 비해, 프랑스 계몽주의 전통의 가짜 자유주의는 사상과 양심의 자유 같은 지적 활동의 자유만을 중시하고 행동의 자유는 경시한다고 구별하는 데서 찾아볼 수 있다. 그런 기준을 가지고 경제적 자유의 제한을 당연시하는 사회민주주의나 롤스의 정치철학은 가짜 자유주의라고 규정짓고 있다.

민경국의 이러한 자유주의에서 유추해 볼 수 있는 판별의 준거는 자유의 범위를 제한하는가 여부인 것으로 보인다. 프랑스 계몽주의 전통의 구성적 자유주의는 생각의 자유에만 관심을 가질 뿐 행동의 자유는 보장할 수 없다고 보는 데 비해, 하이에크와 그 하이에크의 전폭적인 지지자를 자처하는 민경국의 자유주의는 생각의 자유와 함께 행동의 자유도 보장하고 그 결과 기본적으로는 경제활동의 무한정한 자유를 보장하고자 한다는 점에서 진짜 자유주의라는 것이다.

민경국의 이 논의에서 흥미로운 지점은 자유가 인간관계를 전제로 해서만 비로소 성립될 수 있다고 주장하고 있는 점이다. 이런 강조는 물론 논자가 자유주의의 인간관이 고립성과 이기성을 전제로 하고 있다고 비판한 것에 대한 반론을 펼치기 위해 마련된 것이지만, 문제는 그런 주장이 가져올 수 있는 자체 충돌의 가능성에서 생긴다.

인간관계를 전제로 해서만 자유가 성립될 수 있다고 주장하면서 생각의 자유뿐만 아니라 행동의 자유까지 제한 없이 보장할 수 있을 때에야 비로소 ‘진짜’ 자유주의일 수 있다고 강변함으로써 그런 자유들이 가져올 인간관계의 근원적 훼손과 자유 자체의 위협에 대해서는 시장 질서에 근거한 무모한 낙관으로 대신하는 논리적·실제적 흠결을 드러내고 있다는 것이다.

민경국은 하이에크(Friedrich A. von Hayek)라는 냉전기 자유주의자의 충실한 후계자를 자처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하이에크식 자유주의가 관심을 끌 수 있었던 배경에는 제2차 세계대전을 전후해서 형성된 자유주의를 근간으로 하는 자본주의와 당 중심의 국가체제를 전제로 하는 사회주의 사이의 대립이 극단화된 국제질서가 자리 잡고 있었고, 그 상황 속에서 그는 계획경제가 경쟁을 넘어설 수 없다는 테제를 정당화해야 한다는 압박감에 충실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좌파―및 우파―사회주의자들을 실제로 단결시키는 것은 경쟁에 대한 공통된 혐오감과 이를 지시경제(directed economy)로 대체시키는 공통된 소망이다. 아직도 사회주의와 자본주의라는 용어가 과거와 미래의 사회 형태를 묘사하는 것으로 일반적으로 사용되고 있지만, 이 용어들은 우리가 지금 통과하는 전환기적 성격을 밝히기보다는 오히려 감추게 한다.

지구상에서 사회주의 국가가 거의 사라지고 단지 사회민주주의나 중국식 사회주의 정도의 계획경제가 남아 있는 현재 상황을 염두에 둔다면, 우선 하이에크식 자유주의를 고집하는 일이 시대착오적 한계를 지니는 것이 아닌지 되돌아볼 필요성을 느끼게 된다. 자유민주주의를 표방하는 지구상 대부분의 정부는 기본적으로 국민의 정치적 자유와 사유재산권을 보장하는 것을 목표로 삼으면서도 그러한 자유와 권리를 보다 실질적으로 보장하기 위한 조치로 규제와 계획을 도입하고 있을 뿐이다. 어떤 자유주의 사회가 시장의 기본적인 자유를 보장하고 있지 않은가? 그런데 이미 이렇게 확보된 자유를 더 확보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은 최소한의 공동체적 유대조차 깨뜨릴 수 있는 자유지상주의일 뿐이다.

최근 우리 사회에서 문제 되고 있는 재벌그룹 산하의 대형마트들이 소형의 지점을 만들어 마을 곳곳에 파고들고 있는 상황에 대해서 민경국 같은 자유지상주의자는 당연히 그들의 권리와 자유를 보장해주어야 한다고 주장할 것이다. 경쟁이 최선의 가치이고 그 경쟁을 통해서 모든 문제가 해결될 수 있다고 보는 관점에서 보면, 거대한 자본을 밑천 삼아 마을의 작은 구멍가게들을 흡수하는 일은 그 경쟁의 당연하고 바람직한 과정일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정말 그러한가?

그 결과는 수많은 소규모 자영업자들을 파산으로 몰고 갈 것이고, 기껏해야 대형마트에 파트타임 일자리를 확보해서 불안정한 생활을 영위하는 사람들을 획기적으로 늘리는 결과로 나타날 것이 뻔하다. 경쟁을 기치로 내세우는 현재의 이명박 정권이 가져온 성과가 과연 무엇인가? 물론 민경국 같은 자유주의자는 이명박식 자유주의도 가짜 자유주의라고 규정지으면서 피해 가고자 할 것이다. 그들은 이명박 정권이 좀 더 철저하고 완벽한 경쟁을 보장한다면 취업률과 불안정한 삶의 문제는 자연스럽게 해결될 것이라는 근거 없는 낙관을 펼치는 방식의 논의를 전개할 것이라고 예상해볼 수 있다.

‘진짜 자유주의’라는 개념이 성립 가능하다면, 이상적으로는 모든 사람의 기본적 자유와 권리를 실질적으로 보장하는 것을 목표로 삼아야 한다. 그렇게 하는 과정에서 시장을 전제로 하는 경쟁이 필요함을 부정하지 않지만, 한 번도 확인된 적이 없는 ‘보이지 않는 손’에 근거한 무한정한 경쟁을 강요하는 일은 이미 기득권을 확보한 소수자들의 독재일 뿐이다. 그리고 그런 독재는 이미 우리 사회현실 속에서 상당 부분 확인할 수 있는 것임을 고려해 본다면 냉전기를 대표하는 자유지상주의자인 하이에크식 자유주의는 그야말로 ‘가짜’ 자유주의일 가능성이 크다.                 

 2) ‘진짜’와 ‘가짜’ 자유주의의 구별은 견지될 수 있는가?

학문적 논의의 과정에서 ‘진짜’라든지 ‘가짜’라든지 하는 개념은 쉽게 동원되어서는 안 될 금기어에 가깝다. 왜냐하면 어느 누구도 학문적 진리를 온전히 관조할 수 있을 정도의 능력을 갖추는 일이 불가능할 뿐만 아니라, 더 나아가 ‘진짜’라는 말이 함축하고 있는 진리의 독점 주장은 그야말로 어불성설의 폭력일 뿐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하이에크와 민경국 같은 자유주의자는 그런 말을 너무 쉽게 독점하고자 한다.

물론 자유의 적용 범위나 인간관 등을 전제로 하여 자유주의라는 본래의 개념에 더 가까울 가능성을 주장할 수는 있다. 그렇지만 그럴 경우라도 ‘진짜’라는 말을 사용하는 것은 삼가는 것이 학자적 태도이다. 정통과 이단의 구분을 자의적이고 협소하게 하는 경향이 강한 우리 개신교 중심의 종교문화 속에서도 그런 개념을 자제하는 일이 절실하게 요구되는 상황임을 감안해 본다면, 자유주의에 대한 신앙 수준의 옹호를 감안한다고 해도 쉽게 받아들이기 어려운 일이다.

이 문제를 롤스식 자유주의를 주제로 삼아 더 심화시켜 보기로 하자. 무지의 베일에 싸인 무연고적 자아를 기본 인간관으로 삼는 롤스의 자유주의는 자유를 보장하는 것을 첫 번째 원칙으로 설정한다. 그러면서도 공정한 접근의 기회와 함께 최소 수혜자에게 최대의 혜택이 돌아간다는 전제를 바탕으로 하는 차등의 원칙을 제시한다는 점에서 현대적 자유주의의 전형적인 사례로 평가받고 있다.

민경국의 구별에 따르면, 이러한 롤스의 자유주의는 우선 자유의 원칙을 무연고적 자아관에서 이끌어낸다는 점에서, 그리고 다음으로 차등의 원칙이라는 부당한 자유에의 간섭을 허용할 수 있는 여지를 열어 준다는 점에서 ‘가짜’ 자유주의이다.

그러면서 그가 ‘진짜’ 자유주의로 대비시키고 있는 애덤 스미스와 하이에크로 이어지는 스코틀랜드 계몽주의 전통의 자유주의는 우선 인간관계 속에서 자유가 성립될 수 있다고 본다는 점에서, 더 나아가 경쟁을 촉진하는 간섭을 제외하고는 그 어떤 사고와 행동의 자유도 제약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진짜’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롤스의 자유주의가 출발하는 지점인 ‘원초적 입장(the original position)’이라는 개념도 그가 찾아내고자 하는 정의의 원칙에 도달하고자 하는 과정에서 ‘반성적 평형(reflective equilibrium)’이라는 일종의 사유실험을 하기 위한 조작적 개념일 뿐이다. 바로 그 점이 롤스가 갖고 있는 약점의 중심을 이루기도 하지만, 그것만으로 가짜라고 치부될 수 있는 근거는 어디에도 없다.

오히려 이른바 ‘진짜’ 자유주의자들이 말하는 ‘인간관계를 전제로 해서만 성립하는 자유의 무제한성’ 테제가 공격받을 요소가 더 많다. 존 로크와 존 스튜어트 밀을 통해서 확고하게 정립된 자유주의의 로크적 단서(Lockean Proviso)는 단순명료하게 자유주의의 성립 근거를 밝혀 주고 있다. ‘허공에 팔을 휘두르는 것은 나의 자유이지만, 그 팔이 일으키는 바람이 다른 사람의 코끝에 닿는 순간부터는 더 이상 자유가 아니다.’라는 명제로 요약되는 이 단서는 자유가 기본권이면서도 다른 사람과의 관계 속에서 제약될 수밖에 없는 한계를 지니고 있음을 충분히 정당화해 줄 수 있는 근거가 된다.

그런데 민경국은 자유가 인간관계를 전제로 해서만 성립된다고 말하면서도 그러한 자유의 원천적인 제한에 대해서는 단지 경쟁을 촉진할 수 있는 국가의 역할 정도와 관련지어서만 말하는 모순을 범하고 있다. 우리는 자유인임과 동시에 누구나 일정한 공동체의 구성원이다.

그 공동체 속에는 가족 공동체와 같은 혈연 공동체와 국가나 시장과 같은 정치경제 공동체, 인터넷망을 통해 형성되는 사이버 공동체 등이 포함되고, 각각의 공동체의 연대성 정도는 그 필요와 위상에 따라 달리 설정될 수 있지만 어느 누구도 그런 공동체에 전혀 속하지 않고 생존하는 일은 거의 불가능하다. 그런 점에서 인간은 자유인이면서 동시에 공동체적 존재이다. 만약 이 공동체라는 개념이 수직적인 억압의 이미지를 일정 부분 담고 있다면, 연기적 또는 관계적 존재라는 말로 대체할 수 있다.

우리 사회의 또 다른 자유주의자인 박세일의 경우에는 이러한 공동체성 또는 관계성에 대해서 충분히 유념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그는 ‘인간 존재의 생생한 실재의 모습’을 출발점으로 삼아 논의를 전개해야 한다고 말하면서 인간은 본래가 관계적이고 공동체적인 모습을 지니고 있다고 주장한다. 그러면서 그는 이러한 실재성과 함께 당위성의 영역에서도 개인 자유의 완성을 위해서는 반드시 공동체적 가치의 존중이 요구된다는 주장을 덧붙이고 있다. ‘건강하고 유덕한 공동체가 없으면 개인의 자유는 완성될 수 없다.’는 것이 그의 주장의 핵심으로 보인다.

폴리스라는 공동체를 전제로 해야만 인간 기능의 완성으로서 덕이 비로소 가능하다고 주장한 아리스토텔레스의 주장과도 상통하는 이러한 입장에 대해서는, 과연 이 시대에 그런 요구를 충족시킬 수 있는 공동체가 어떻게 가능한가와 같은 추가적인 질문을 던질 수 있는 여지가 충분히 있기는 하다. 하지만, 개인의 자유가 인간관계와 밀접한 친화력을 갖고 그 친화성에 근거한 제약의 불가피성을 설명할 수 있는 중요한 토대가 될 수 있다.

박세일의 논의는 자유의 질을 문제 삼으면서 좋은 자유가 되려면 공정한 행위 준칙으로서의 법치가 이루어져야 하고 더 나아가 선한 행위 준칙으로서의 도덕이 건재하여야 한다는 지점에까지 이른다. 그런데 민경국의 분류에 따른다면 이러한 박세일의 자유주의도 ‘가짜’일 가능성이 높다. 왜냐하면 선한 행위의 준칙으로서의 도덕은 필연적으로 일정한 영역에서 한 개인이 누릴 수 있는 무한정한 자유를 제약할 가능성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런 자유주의가 정말 가짜인가?

이 질문은 진짜와 가짜를 구별해 준다는 민경국식의 준거에 대한 의구심을 심각하게 증폭시킨다. 다른 말로 표현한다면, 자유주의의 진짜와 가짜를 구별할 수 있는 엄밀한 의미의 준거는 성립 불가능할 뿐만 아니라, 양보해서 부분적으로 인정한다고 하더라도 끝까지 일관되게 견지될 수 있는 자유주의는 없다는 것이다. 

 3 .자유주의의 자기파괴성과    연기적 독존주의(緣起的 獨尊主義)의 도덕성

민경국의 반론은 논자의 연기적 독존주의에 기반한 배려의 윤리가 자유주의의 대들보 역할을 하는 정의의 윤리에 비하면 장식품에 지나지 않는다는 비판으로 이어진다. 애덤 스미스의 주장을 토대로 삼아 사회질서의 유지를 위해 중요한 것은 정의의 규칙이기 때문에 ‘진정한 도덕은 정의’일 뿐이고, 인간들 사이의 연기성을 토대로 삼는 배려의 도덕은 장식품에 불과하다는 것이 핵심 반론으로 읽힌다.

이러한 반론에 대해 논자는 연기적 독존주의의 이념과 도덕적 지향을 다음과 같이 구체화함으로써 보다 적극적인 의미의 반론을 펼쳐 보고자 한다. 먼저 연기적 독존주의의 이념은 인간 존재의 본질에 대한 객관적인 성찰에 토대를 두고 연기성(緣起性) 또는 관계성과 개별 인격체의 고유성인 독존성(獨尊性)을 동시에 존중하고자 하는 이념성을 지닌다는 주장을 펴고자 한다. 또한 그것에 기반한 도덕적 지향은 단순한 서양윤리학의 최근 흐름인 배려윤리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공정성의 규칙과 배려의 윤리를 포괄하는 걸림없음[無碍]의 지향이라는 주장을 펼치고자 한다.

1) 자유주의의 자기파괴성 문제

자유(自由, freedom 또는 liberty)란 무엇일까? 20세기 이후 사상사 속에서 이 질문에 대해 주로 고민한 것은 이사야 벌린(I. Berlin)이나 밀턴 프리드먼(M. Friedman)과 같은 서양학자들이었기 때문에 우리는 논의의 상당 부분을 그들의 선행 논의에 기댈 수밖에 없는 한계를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물론 그들의 논의가 우리가 오랜 시간 관심을 가져왔던 삶의 의미와 가치 문제를 주체적 맥락에서 해소할 수 있는 계기를 직접적으로 주지는 못한다. 하지만, 우리 삶의 맥락이 그들과 상당 부분 겹치게 된 20세기 이후의 정치경제적 상황을 고려하면 최소한 간접적인 계기를 마련해 줄 수는 있을 것이라는 기대를 버릴 수 없다.

벌린은 자유의 정수가 ‘언제나 각자 선택하고 싶은 대로 선택하는 능력’에 있다고 보면서도 인간 삶의 상호의존적 맥락 때문에 근원적으로 제약을 지닐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다음과 같이 상술하고 있다.

인간 생활의 대부분은 상호의존의 맥락 안에서 이루어지기 때문에, 다른 사람의 삶에 어떤 식으로든 방해가 되지 않을 정도로 사적 영역에 완전히 국한된 인간의 행동은 있을 수 없다. ‘곤들매기의 자유가 붕어에게는 죽음’이라는 말과 같이 이편 사람의 자유는 저편 사람의 자유를 제한하는 토대 위에서 가능하다. 어느 상황에서도 실제적 타협이 이루어져야 한다.  

소극적 자유와 적극적 자유의 구분을 통해 우리에게 현대 자유주의의 흐름을 파악하는 데 큰 도움을 준 벌린의 이러한 자유 개념은 새로운 것이라기보다는 자유주의의 로크적 단서를 재확인하는 현재적 계기를 만들어준다는 점에서 의미를 지닌다. “이편 사람의 자유는 저편 사람의 자유를 제한하는 토대 위에서 가능하다.”는 그의 자유론적 테제는 상호의존의 맥락이라는 관계성 또는 연기성을 전제로 한다는 점에서 우리의 전통적 자유 개념과도 일정 부분 맞닿아 있음을 알 수 있다.

이러한 논의의 맥락은 경제학에서 자유주의를 대표하는 학자 중 하나로 평가받는 프리드먼에게서도 그다지 달라지지 않는다.

정부가 필요한 것은 절대적 자유가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무정부주의가 하나의 철학으로서는 제아무리 매력적일지 몰라도 불완전한 인간들의 세상에서는 실현 가능하지 않다. 사람들의 자유는 서로 저촉될 수 있으며, 그럴 때는 “내 주먹을 움직일 수 있는 나의 자유는 당신 턱의 근접성에 의해 제한되어야 한다.”라고 한 어느 대법관의 말마따나, 어느 사람의 자유는 다른 사람의 자유를 지키기 위해 제한되어야 한다.
 
다른 점이 있다면 프리드먼의 경우, 그 정부의 역할을 시장이 자력으로 할 수 없는 일을 수행하는 것으로 강하게 제한하고자 하는 점이다. 그런 일들에는 경쟁의 규칙을 정하고 그 규칙이 준수될 수 있도록 하는 일과 젊은이들을 시민으로서, 그리고 공동체의 지도자로서 자질을 갖추게 하기 위해 고등교육에 대한 공공지출을 책임지는 일 등이 속한다. 문제는 그러한 일의 명확한 경계를 짓는 일이 현실적으로 가능한가 하는 데서 생긴다.

이미 앞에서 우리가 논의한 주제이기도 하지만, 재벌그룹의 대형마트들이 동네 곳곳에 들어오는 일을 막는 것은 정부의 고유한 역할 속에 포함될 수 있을까? 아마도 민경국이나 프리드먼 같은 자유주의자들은 그것은 정부의 역할이 아닌 시장의 역할이라고 말할 것이다. 그러나 과연 그럴까? 경쟁은 공정성을 전제로 할 때에만 정당화될 수 있는데, 이미 재벌그룹의 거대한 자본력은 독점으로 치달을 수 있는 요건으로 작동하고 있고 그 결과는 당연히 작은 마트들의 패배일 수밖에 없다.

자유주의 원칙이란 이처럼 한편으로 자유의 성립 근거인 타자에 대한 최소한의 배려를 스스로 무너뜨릴 수 있는 자기파괴적 속성을 내포하고 있다는 점에서, 또 그 결과로 ‘곤들매기의 자유가 붕어의 죽음을’ 야기할 수밖에 없다는 점에서 쉽게 받아들일 수 없는 한계를 지닌 이데올로기이다.

2) 자유와 연기성의 불이적(不二的) 관계

그러나 자유주의가 지닌 이러한 결정적인 한계는 자유주의의 한계일 뿐 자유 그 자체의 한계는 아니다. 자유의 기본적 속성, 즉 한 인격체의 고유성에 관한 존중은 포기할 수 없는 우리의 지향이어야 한다. 그런 점에서 본다면 본질적인 상호의존에도 불구하고 개별 인격체의 고유성을 존중해야 한다는 당위적 명령이 포함되어 있다고 말할 수 있다.

 그 고유성을 바라보는 관점이 그리스도교적 배경 속에서는 ‘신 앞에 선 단독자’의 개념이거나 롤스적 자유주의 맥락에서 ‘무지의 베일에 둘러싸인 무연고적 자아’라는 방식으로 해석되거나 가정될 수 있겠지만, 더 근원적인 차원은 그 고유성이 상호의존성 또는 연기성과 어떤 관계를 설정할 수 있을 것인가 하는 문제이다.

자유주의자들의 실패는 이러한 관계 설정의 문제에서 고유성 자체를 부정하는 데서 비롯된 것이라기보다 의존성 또는 연기성의 맥락을 소홀히 한 데서 온 것으로 보인다. 다시 말해 자유주의자들도 한 개인의 자유가 구체화되는 과정에서 타자의 자유를 침해할 가능성을 인식하고는 있었지만, 그 가능성을 단지 경쟁의 형식적인 규칙 준수 같은 최소한의 영역으로 축소시킴으로써 결과적으로는 강자의 이익에 봉사하는 이데올로기로 전락하거나 자유의 기반을 스스로 무너뜨리는 자기파괴성을 보일 수밖에 없게 되었다는 것이다.

연기적 독존주의는 이 딜레마 상황을 자유의 무애성(無碍性)에 근거해서 극복하는 방안을 내재하고 있다. 자유는 한 개인의 고유성에 기반한 것이지만, 이 고유성은 곧 타자와의 연기적 의존성과 다르지 않은 공성(空性)이기도 하다. 타자와의 의존 속에서만 비로소 내가 존재할 수 있다는 자각은 그런 점에서 자신의 공성에 대한 자각과 동일한 의미를 지니게 된다.

타자와의 연기적 의존을 통해 현재의 내가 존재할 수 있고, 바로 그 공성 때문에 고정된 채 존재하는 나의 고유성은 없다. 이러한 공성을 인식할 경우에 자신과 타자를 하나의 커다란 몸으로 인식할 수 있는 동체의식(同體意識)이 가능해지고, 동체의식은 곧 자비(慈悲)의 윤리로 이어질 수밖에 없는 구조이다.

민경국은 이러한 연기적 독존주의에 기반한 사회가 경쟁 없는 정태적 사회일 뿐이고, 보이는 손이 필요한 사회이기 때문에 가족 집단이나 친구 그룹과 같은 소규모 집단에나 적합한 개념이라고 비판한다. 언뜻 보기에 그런 진단이 가능할 수 있겠지만, 이런 비판은 연기적 독존주의에 대한 부정확한 인식의 결과물일 뿐이다.

공성에 대한 자각을 전제로 하는 개별 인격체의 독존성을 출발점으로 삼으면서도 그 개별 인격체들은 물론 비인격체들과의 연기성에도 동일한 비중을 두는 연기적 독존주의에 기반한 사회는 그 연기성을 구현할 수 있는 장치 중의 하나로 시장과 경쟁을 부정하지 않는다.

시장은 각 주체가 생산한 물건을 교환하는 장소일 뿐만 아니라, 그 주체들이 만나서 삶의 의미를 공유하는 연기성의 공간이기도 하다. 그 소통의 매개물로 가격을 중심에 두어야 하겠지만, 그 가격도 소위 정찰가격이라는 이름으로 강요되는 대기업이 일방적으로 정한 가격만이 아니라 생산자와 소비자 사이의 협상 결과물로서의 가격도 포함된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독점구조가 형성되어 공정한 가격이 통용되지 않을 때에는 국가로 상징되는 공동체의 적극적인 개입을 당연하다고 생각하는 것이 연기적 독존주의의 기본 관점이다. 왜냐하면 그런 독점성은 곧 인간과 사회의 연기성에 대한 공격 자체이기 때문이다. 그 공격을 막아낼 수 있는 또 하나의 중요한 보완책으로 생산자와 소비자를 직접적으로 연결하는 직거래 장터나 생협 활동을 자본주의 시장의 보완책으로 제시할 수도 있다. 이는 실제로 우리 사회에서도 상당 부분 정착되는 중이기도 하다.

경쟁의 경우도 마찬가지이다. 연기성을 전제로 하는 상호의존은 긍정적 의미의 협력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생멸계의 인간은 다른 존재자들을 먹이로 섭취해야만 비로소 생존할 수 있는 속성을 지니고 있고, 그 과정에서 경쟁은 피할 수 없는 기제가 된다.

그렇지만 진여(眞如)의 차원을 동시에 지닌 존재자로서 인간은 그러한 경쟁을 무모하고 무한정한 경쟁으로 몰아가지 않는 지혜를 가진 존재임을 망각하지 않는 것일 뿐이다. 우선 경쟁 과정에서는 출발점의 공정한 기회와 함께 진행 중의 공정성을 중심에 두고, 경쟁이 끝난 후에는 승자에 대한 정당한 축복과 함께 패자에 대해서도 최소한의 독존성이 위협받지 않을 정도의 내적·외적 복지를 확보해 주는 장치를 잊지 않는다.

그러한 최소한의 배려는 한편으로 그 패배자와 나 사이의 연기성을 인식하는 행위이다. 그런 점에서 연기적 독존주의를 주장하는 논자가 ‘경쟁에 대해 비관적이다.’라는 민경국의 비판 역시 부정확한 이해의 산물일 뿐이다.

신자유주의를 옹호하는 듯한 민경국의 입장이야말로 경쟁이 왜 필요한지에 대한 자각 없이 단지 경쟁 자체만을 지상의 가치로 신봉하는 무모한 경쟁지상주의일 뿐이다. 경쟁이 왜 필요한지에 대한 자각과 함께 그 경쟁이 공정하게 진행될 수 있도록 국가와 같은 공동체가 적극적인 역할을 해야 하는데, 결과적으로 패배한 사람들이 다음 기회를 확보할 수 있을 정도의 보완책을 마련하는 일을 포기하는 경쟁지상주의는 이미 경쟁에서 우위를 선점한 기득권자들을 옹호하는 편협한 이데올로기로 작동할 가능성이 농후하다. 아마도 민경국은 그런 모든 문제들이 자유경쟁의 시장을 통해 해결될 수 있다고 주장하고 싶겠지만, 장하준의 적절한 지적과 같이 그런 자유시장은 이전 역사에서도 없었고, 앞으로도 실현 불가능한 개념상의 존재일 뿐이다.

연기적 독존주의는 이와 같은 문제를 인격체의 침해할 수 없는 독존성과 그 인격체의 또 다른 본성을 이루는 연기성 사이의 관계를 불이적 관계로 설정함으로써 해소할 수 있는 기반을 갖고 있다.

여기서 독존성이 서구적 맥락의 자유와 일치하는 개념은 아니지만, 상식을 가진 자유주의자들이 공통적으로 전제하는 상호의존적 맥락, 또는 관계를 보다 심화시켜 그런 상호의존성을 통해야만 비로소 존재가 가능하다는 적극적인 공성 또는 연기성을 전제로 하면서도 그 개인 삶의 의미와 가치의 차원은 누구도 침해할 수 없다는 전제를 구성한다는 점에서 서로 통할 수 있는 개념이다. 이 둘 사이의 관계는 형식논리적 틀 속에서는 설명될 수 없겠지만, 불이적 관계라는 불교 논리학의 맥락 속에서는 충분히 설명되고 이해될 수 있다.

실제의 삶 속에서 우리는 독존성의 요구를 강하게 느끼면서도 동시에 관계와 의존을 갈망하는 이중적 욕구를 동시에 느끼곤 한다. 이 두 욕구는 둘이면서도 하나라고 설명될 수도 있고, 둘도 아니고 그렇다고 해서 하나도 아니라는 방식으로 설명될 수도 있다. 마명과 원효에 의해 전개된 ‘기신론적 사유(起信論的 思惟)’에서 유래하여 우리의 전통적 사유방식으로 정착한 이 논리는 성리학의 이기론(理氣論)으로 이어지면서 심화되었지만, 서양논리학이 지배하는 현재 한국의 학계에서는 제대로 이해하고 받아들이는 사람이 드문 논리이기도 하다.

그렇지만 실제의 삶 속에서 작동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삶의 의미 구현을 위해서 진여(眞如)와 생멸(生滅) 사이의 불이적 관계를 인식하고 수용해야 한다는 당위적 요구를 받아들일 수 있다면, 독존성과 연기성 사이의 불이적 관계에 대해서도 보다 쉽게 인식하고 받아들일 수 있을 것이다. 그것은 곧 넓은 의미의 자유와 연기성 사이를 걸림 없이 넘나드는 불이적 관계를 수용하는 것으로 해석될 수 있다.

4. 맺음말

학문적 논쟁은 상대방을 인정한다는 전제 위에서 이론과 현실의 두 차원을 모두 포용하면서 전개되는 것이 바람직하다. 특히 우리의 주제와 같이 사회이념과 도덕의 차원을 함께 지닌 주제를 다루고자 할 때에는 더욱 그러하다. 그렇게 될 때에야 비로소 생산성 있는 대안을 마련하는 방향으로의 진전을 기대할 수 있을 것이다.

우리 사회는 논자가 보기에 이미 민경국이 말하는 ‘진짜’ 자유주의 또는 하이에크식 자유주의의 광풍 속으로 빠져들고 있는 중이다. 이명박 정권의 등장과 함께 ‘공정한 기회’에 대한 최소한의 배려도 없이 목적 없는 경쟁의 칼날 위로 전 국민을 몰아세우고 있는 중이기도 하고, 그 과정에서 빈부격차의 확대는 물론 패배자에게 주어져야 할 다음 경쟁 참여 기회조차 원천적으로 박탈되는 일마저 빈번하게 일어나고 있다.

최소 수혜자에게 최대의 혜택이 돌아가는 전제 위에서 차등이 허용되어야 한다는 존 롤스식 자유주의조차 가짜 또는 사이비로 몰아가는 민경국의 논리는 그런 점에서 비정함을 넘어 절망감을 느끼게 한다. 도대체 무엇을 위한 자유이고 누구를 위한 경쟁인가?

결국 우리에게 요구되는 것은 전 지구적 범위의 인간과 환경공동체를 전제로 하면서 각각의 존재자들이 자신의 독존성을 보장받으며 연기성을 바탕으로 삼아, 공정성을 전제로 하는 인간적인 경쟁을 하면서도 궁극적으로는 함께 살아갈 수 있는 길을 모색하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연기적 독존주의는 과거에 집착하는 망상이 아니라, 우리의 오래된 진정한 미래임을 다시 한 번 강조하고자 한다. ■

 

박병기 
한국교원대학교 윤리교육과 교수. 서울대 윤리교육과 졸업, 동 대학원 석사, 박사. 불교원전전문학림 삼학원 수료. 전주교대 교수 역임. 현재 국가생명윤리위원회 전문위원, 가산불교문화연구원 전문위원. 저서로 《우리 시대의 문화와 사회윤리》 《동양 도덕교육론의 현대적 해석》 등이 있음. 본지 편집위원.

저작권자 © 불교평론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