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뗏목을 이고 가는 사람들 / 김상현
김상현 동국대 교수
[32호] 2007년 09월 10일 (월) 김상현 동국대 교수
어디로 갈 것인가? 그리고 어떻게 갈 수 있을 것인가? 세상은 넓고 길은 많아도, 막상 바람 부는 거리에 서면, 갈 곳은 막막하다. 그 길 아무도 가르쳐주지 않는다면, 그래서 누구로부터도 안내 받을 수 없다면, 인생의 길은 아득할 수밖에 없다.

그래도 인생의 길을 안내하는 종교가 있기에 사람들은 안심한다. 종교는 분명 강을 건너 주는 뗏목이자 질병을 치료하는 양약이다. 그러나 뗏목을 이고 가려는 사람들이나 약을 먹고 도리어 병을 일으킨 사람들에게 그 종교는 도리어 감옥이 되고 만다. 세상의 어떤 가르침도 교조적으로 맹신해서는 안 된다. 화석화된 교훈은 이미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기에.

어느 날 붓다는 제자들에게 뗏목의 비유를 들어서 자신의 가르침에도 집착하지 말 것을 당부했다. 어떤 여행자가 큰 강변에 이르렀다. 위험한 이쪽 강변에서 안전한 저쪽 강변으로 건너갈 다리나 배도 없었다. 그 사람은 스스로 만든 뗏목을 저어서 저쪽 강변에 도착했다. 강을 건넌 그 사람은 고마운 그 뗏목을 머리에 이고 가려는 생각을 했다. 붓다는 이 사람의 처사가 적절하지 않음을 지적하면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비구들이여, 내가 가르쳐온 법은 뗏목과 같으니라. 뗏목은 강을 건너는 데 필요한 것이지, 들고 다닐 것은 못되느니라. 비구들이여 가르침이 뗏목과 같음을 이해한다면 법조차 버려야 하느니라. 하물며 그것이 비법(非法)일진대 더욱 버려야 하지 않겠느냐?”

종교라는 뗏목에 의지하여 우리는 탈출한다. 세속과 현실의 울타리로부터. 그리하여 사람들은 일상의 긴장된 삶으로부터 해방되어 마음 놓고 살게 된다. 마음을 들고 마음조리면서 사는 것은 언제나 불안하다. 그리고 초조하다. 스스로 만든 감옥을 탈출할 필요가 있다. 탐욕적인 여러 욕구를 충족시키고자 하는 노력으로부터도 해방될 필요가 있다. 붓다는 말했다. “집착하지 않음으로써 초월하게 되며, 초월함으로써 해방되는 것이다.”모든 조직화로부터의 해방되어야 한다. 어떤 일에도 걸림이 없으므로 무애라 하고, 걸림이 없음으로 해탈이라고 하는 것이다.

인간은 온갖 사슬과 속박으로부터 마땅히 해방되어야 한다. 허구의 자아로부터 해방되고 놓여나는, 그리하여 자유로워져야 할 것을 붓다는 강조한다. 신라의 원효도 일정한 범위나 틀 속에 안주하기를 거부했다. 그가 ‘유방외(遊方外)’, ‘초출방외(超出方外)’ 등의 표현을 즐겨 썼던 것도, 무애의 자유인으로 행동했던 것도 이 때문이었다. “일체에 걸림이 없는 사람은 한 길로 생사를 벗어나리(一切無碍人 一道出生死).” ??화엄경??의 이 게송을 원효는 재발견했고, 이로부터 무애라는 용어를 취했었다. 원효에게는 굴레가 없었다. 그는 해방자였고 자유인이었다.

불교로부터도, 승려라는 형색으로부터도, 지식으로부터도, 명예로부터도, 계율로부터도 그는 언제나 자유로웠다. 그물에 걸리지 않는 바람처럼. 그는 인간의 진정한 자유를 이론적으로 규명했을 뿐만 아니라, 자신의 삶으로 이를 구현했다. 원효는 혼란의 시대를 열심히 살았지만, 그 현실 속에 함몰하지는 않았다. 그는 언제나 방외(方外)로의 초월을 꿈꾸었고, 실제로 흥겹고 신나는 삶을 살았다.

“누에는 자신이 토해낸 실로 자신을 묶어 마침내 고치 속에서 꼼짝 못하게 되지만, 거미는 자신이 뽑아낸 거미줄을 둘러치고 그 위를 자유롭게 다닌다.” ??입능가경?? 중의 한 비유다. 스스로를 구속할 수도 있는 실, 그러나 그 실을 자유로운 활동의 무대로 만드는 지혜, 그것은 보살의 지혜다.

그러나 자신이 토해낸 실로 자신을 묶어버리는 종교도 있고 사람들도 있다. 세상에는 신을 믿는 종교가 한둘이 아니다. ‘만들어진 신’을 믿으면서도 신을 믿지 않는 종교를 향해서 종교가 아니라고 나무란다. 그들은 종교를 신이나 절대자에 대한 신앙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또 어떤 경우는 다신교에서 일신교로의 변화를 진보라고 주장하는 경우도 있지만, 일신교에서 신이 하나 더 삭제되면 무신론이 될 것이 아니겠느냐고 익살을 부리는 이도 있다. 그러나 불교는 처음부터 신의 존재를 인정하지 않았다.

붓다는 자아나 영혼은 어디에서도 발견되지 않으며, 그러한 실체가 있다고 믿는 것은 어리석다고 명백하게 말한 바 있다. 원효도 분명한 어조로 말했다. “오온법(五蘊法)을 떠난 이외에 신아(神我)는 없다.(離蘊法外 無神我)”불교는 모든 법은 인연으로 말미암아 발생할 뿐이라고 가르친다. 신이나 자아로부터의 해방은 진정 우리를 자유롭게 한다.

험한 세상을 헤쳐가야 하는 사람들에게 종교는 분명 좋은 약이다. 그러나 그 약은 잘 복용해야 하고 잘 소화시켜야 한다. 이 약에 취할 수도 있고, 이 약에 중독될 수도 있다. 특히 품성이 편협한 사람이나 식견이 낮은 하근기의 사람들의 경우, 흔히 이 약에 취해 버린다. 성품이 편협하여 자기의 견해만을 내세우고 다른 사람의 말을 받아들이려 하지 않는 사람들이 있다.

어리석은 사람 중에는 자신의 낮은 식견을 높은 것으로 착각하는 경우가 있다. 원효는 이런 사람을 비유하여 아주 좋은 약을 먹고 도리어 중병을 얻게 된 경우와 같다고 했다. 그런대 이 큰 병의 증상은 마치 병이 없는 것과 매우 흡사하여 이 병을 능히 고칠 만한 의술이 없고 이 질환의 증상을 자각하는 사람도 적다고 한다. 증세를 자각할 수 없는 암 같은 병은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심각한 상황에 이른다.

진단이 어려운 병은 그것을 고칠 방법 또한 없는 법이다. 증상을 자각하는 일은 중요하다. 그러기에 원효는 말했다. “스스로 자기가 미혹되어 있음을 깨닫는 자는 크게 미혹되어 있는 것이 아니며, 스스로 자신이 어둠 속에 있음을 아는 자는 극심한 어두움에 있는 것이 아니다.(覺自迷者 非大迷矣 知自闇者 非極闇矣)”라고. 그러나 종교라는 좋은 약을 먹고 도리어 이 약에 취해 버린 사람들이 그 꿈에서 깨어나기란 어려운 법이다.

신을 믿는 사람들이 신의 품으로부터 해방되기란 어렵다. 그리고 자아나 영혼에 집착하는 사람들이 그 영혼으로부터 해탈하기란 또한 쉽지 않다. 종교에 의한 해탈과 해방이 중요한 만큼 종교로부터의 자유도 마땅히 필요하다. 종교에 의한 구원이 중요하지만, 맹목적인 신앙으로부터의 구출 또한 절실하게 요구된다.

그러나 맹신이라는 중병은 자각하기 어렵고, 치료하기 어려운 것이 문제다. 선교도 봉사도 좋지만, 제발 많은 사람에게 심려나 끼치지 않았으면 좋겠다. 영혼의 윤회설로 어리석은 중생들을 더 묶어놓지 않았으면 좋겠다. 종교라는 뗏목은 강을 건너 주되 생색내지 않았으면 좋겠다. 아니 올바른 가르침일지라도 강을 건너고 나면 과감히 버려야 하거늘, 옳지 못한 가르침에 매달려가지 않았으면 좋겠다. 뗏목을 이고 가는 이들, 그 무거운 짐 내려놓고 가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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