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특집 : 불교와 욕망

1. 바람난 공화국과 고개 숙인 남자들

얼마 전에 4대강 공사 현장을 답사하였다. 어느 정도 예상은 했지만 그를 넘어서는 충격을 받았다. 기껏해야 500여 호 남짓의 마을인데, 중심가를 형성하고 있는 도로변의 100미터 안의 공간에 티켓다방이 자그마치 여섯 개나 있었다. 수백만 원에서 수억 원에 이르기까지 보상금이 풀렸다고 한다.

 물론 모두가 그 후 생긴 것만은 아니라지만, 그를 기점으로 지역공동체는 해체 위기에 놓이고, 건전하게 농사를 짓던 농부들의 영혼은 타락으로 물들기 시작한 것이다. 어찌 MB만을 탓하랴. 저 아름다운 강에 저리 깊이 쇠기둥을 박고 콘크리트 장벽을 쌓은 것은 ‘우리 안의 MB’다. 남보다 더 많이 벌어서 잘 먹고 잘 살려는 탐욕이 그를 대통령으로 만들고 4대강 공사에 내심 환호작약(歡呼雀躍)하고 있는 것이다.

4대강만이 아니다. 대한민국 전체에 탐욕이 넘쳐난다. 멀쩡한 부인네들이 유행처럼, 일상처럼 애인과 연애를 하고, 적지 않은 여대생들이 명품을 사기 위해 술집 아르바이트를 마다하지 않는다. 여유 있는 중년 남성들은 원조교제를 즐기고, 젊은이들도 인터넷에서 열심히 취향에 맞는 ‘섹파(섹스파트너)’를 서핑한다. ‘묻지마 관광’에 ‘원 나잇 스탠드’가 유행이고, 어느 도시를 가든 모텔 간판의 불빛이 불야성을 이룬다. 지금 대한민국은 말 그대로 ‘바람난 공화국’이다.

성욕만이 아니다. 모두가 더 너른 아파트, 더 높은 지위, 더 강한 권력, 더 많은 연봉을 열망한다. 이에 이르려 자신의 몸을 혹사하고 타인을 끌어내린다. 고급 백화점은 수백 만 원짜리 속옷을 없어서 못 판다 아우성이고, 세계 어디를 가나 공항엔 한국 관광객이 넘쳐난다.

국가도 마찬가지다. 2009년 기준 국가채무로 측정된 360조 원과 공공기관 경영정보 공개 시스템에 공시된 297개 공공기관의 부채 377조원을 더하면 부채총액이 700조 원을 넘는다. 올해 지방자치단체의 부채는 100조 원을 넘을 것으로 예상된다. 이의 주원인은 무분별한 토목사업, 또 그로 이득을 보려는 공무원과 자치단체장을 비롯한 토건카르텔 때문이다.

‘진리욕의 실천 도량’인 대학조차 시장의 욕망에 포섭되었다. 대학은 기업연수원으로 전락하여 진리 대신 기업이 요구하는 가치와 기술을 전수한다. 학교 안에 마트가 버젓이 들어와 성업 중이다. 대학의 최대 목표는 진리의 창달이나 인재의 육성이 아니라 대학발전기금의 확보다.

학생들은 취업과 욕망과 관련된 강의에 몰리고 이론 강의는 속속 폐강된다. 용산참사, 4대강, 천안함, FTA 재협상 등 정부의 실정이 거듭되고 있는데도 대학생은 꿈쩍하지 않는다. 교수는 돈이 되는 프로젝트에 매달리고 승진에 관련된, 학문적으로 사회적으로 거의 의미를 갖지 못하는 논문을 양산하는 데 몰두한다. “논문 쓰느라 연구하지 못한다.”라는 역설적인 말이 회자될 정도다. 

욕망이 이리 넘쳐나는 과잉욕망의 한편에는 과잉억압이 공존한다. 욕망을 너무도 발산하여 사회가 해체될 지경인데 내면을 들여다보면 욕망이 과도하게 억압되어 진정 자유로운 주체는 없다. 한 개인으로 국한해 보더라도 수많은 이성들과 사랑 없는 성행위를 하는 것을 보면 욕망의 과잉발산인데, 그 사람의 내면을 들여다보면 이것이 실은 자본주의 체제, 국가, 이데올로기, 대중문화 상품의 조작에 의해 욕망이 과도하게 억압되어 생긴 일탈행위다.

촛불시위의 열기는 꺼지고 네티즌은 금세 주눅이 들어 비판적인 댓글을 삼간다. 동성애자와 좌파는 배제되고 추방되어야 할 이방인이다. 세계 10위권의 무역대국이지만, 남근의 억압은 압도적이어서 세계경제포럼(www.weforum.org)이 지난 10월 12일에 발표한 조사에 따르면, 한국의 남녀 평등지수는 조사대상 134개국 가운데 104위였다. 그런 반면에 저층에서는 ‘고개 숙인 남성’들이 양산되고 있다.

부인네들은 백화점과 시청이나 구청이 운영하는 각종 문화센터에 가서 교양을 쌓고 취미생활을 하고, 가장들은 직장에서 쫓겨날까 전전긍긍하다가 집으로 달려와서는 아내 눈치를 보며 텔레비전을 시청하다가 잠드는 다람쥐 쳇바퀴 같은 삶을 반복한다. 중년 남성이 아침 먹고 다닌다 하면 ‘센 사람’으로 통한다.

아내에게 대접을 받지 못하고 자식들에게 무시당하면서 가장들은 돈 벌어다 주는 기계로 전락하였다. 필자가 매일 아침 지하철을 타면서 느끼는 것은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모두 심각하거나 삶에 찌든 얼굴을 하고 있다는 점이다. 다소 미소를 띠거나 평안한 표정을 짓고 있는 자는 좀체 만나기 어렵다. 출산율은 세계 최하이고, 이혼율과 자살률은 세계 최고다. 이렇게 과잉억압된 자아들이 이의 일탈로 과잉욕망을 추구하게 된 원인은 과연 무엇이고 대안은 무엇일까.


2. 욕망을 욕망하는 사회

찬 서리
나무 끝을 날으는 까치를 위해
홍시 하나 남겨 둘 줄 아는
조선의 마음이여

김남주 시인의 〈옛 마을을 지나며〉란 시다. 굶주리는 와중에도 우리 민족은 까치와 새들을 위해 나무 끝에 열린 열매를 남겨 두었다. 이를 ‘까치밥’이라 한다. 1970년대까지만 해도 배를 곯는 생활 중에도 대문과 가장 가까운 벽에 개다리소반을 걸어두었다가 거지가 오면 한 상을 차려주는 풍습을 지키는 집도 많았다.
안분지족(安分知足)은 중요한 덕목이었다. 사치를 하거나 탐욕을 부리는 이들, 분수를 모르고 날뛰는 이들은 공동체에서 추방되거나 왕따를 당하였다.

몇 년 전만 해도 양말은 당연히 기워서 신고 다니는 것이었는데, 요새는 그런 양말을 만나기 어렵다. 1970년대만 해도 껌도 벽에 붙이고 잤다가 아침에 떼어서 먹을 정도였는데, 이제 산해진미를 가득 쌓아놓고 반 조금 넘겨 먹은 다음에 쓰레기로 버린다. 10년 이상 써서 수시로 꺼지는 라디오를 손으로 때려서 청취하기도 했는데, 새로운 모델이 나올 때마다 3년도 안 쓴 가전제품이나 휴대전화를 새것으로 교체하는 이들이 많다.

필자에게 까치밥과 개다리소반이 한국인의 풍속 가운데 가장 아름다운 장면이라면, “여러분! 부자 되세요.” 하고 외치는 광고와 4대강 공사는 가장 부끄러운 장면이다. 그런 광고가 만들어지는 것은 몰라도, 어찌 그런 광고가 히트하고 유행어가 되고, 대중의 환호를 받는가. 무엇이 우리를 탐욕에 몰두하게 하였고 그것은 어떻게 생성되고 증폭되는가.

라캉에 따르면, 태어나서 대략 6개월 이전의 아기는 자신을 어머니의 한 부분이라 생각한다. 6개월을 넘어서면서 아이는 거울을 통해 자신의 모습을 보면서, ‘아버지의 이름(the-name-of-the-father)’을 비롯한 상징을 받아들이면서 주체를 형성한다. 대상과 타자가 주체를 형성하는 역설과 주체와 타자가 양립하는 모순이 내재하는 것이다. 자아는 내면세계와 주위 세계와의 관계를 정립하여 자기 동일화를 이룬다.

자아는 주체를 형성하면서 어머니로부터 떨어져 나오고, 조각난 몸의 고뇌를 통해 하나의 전체성으로 통일된다. 하지만, 떨어져 나온 결핍이 욕망을 형성한다. 주체는 다시 돌아가려 하지만, 아무도 다시 그 자리로 돌아갈 수 없기에, 언어란 사물의 살해이기에 언어기호를 사용하는 한 존재결여에서 벗어날 수 없기에, 욕망은 도(道)나 차연(differance)처럼 이르려 해도 이를 수 없다. 그러기에 상징과 도덕이 있는 곳에 욕구불만은 숙명적이니, 인간은 욕망을 욕망하는 존재이다.

인간이 욕망을 욕망하는 존재라면 왜 사회가 욕망이 들끓는 화탕지옥으로 전락하지 않았는가. 중세 시대엔 신이라는 강력한 초자아가 욕망을 억압하였다. 기독교든 불교든 욕망을 절제하거나 소멸시킬 것을 요구하였고, 당시 지배층은 민중을 통제하기 위하여 교리 이상으로 욕망을 억압하였다.

신, 도덕과 윤리, 이데올로기, 공동체의 규율체계, 이에 기반으로 두고 만들어진 기표들이 모두 나서서 욕망을 제한하고 억압하였다.

여기에 혁명이 일어났다. 신의 죽음을 선언하자, 인간은 가장 강력한 초자아인 신에게서 탈출하여 욕망을 발산하기 시작한다. 산업혁명과 이로 인한 테크놀로지의 비약적인 발전으로 인간은 물질적 욕망을 한껏 추구하게 된다. 이는 60억 명을 먹여 살릴 수 있는 물질적 풍요를 가져다준다.

대신 테크놀로지는 인간의 생체가 알게 모르게 억압을 수용하도록 하였다. “기계 노동은 신경계통을 극도로 피곤하게 만들며 동시에 근육의 다면적인 운동을 억압하고 몸과 마음 일체의 자유로운 활동을 막아버린다. 노동의 완화마저도 고문의 수단이 된다. 기계는 노동자를 노동으로부터 해방시켜 주는 것이 아니라 그의 노동을 내용으로부터 해방시킬 뿐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흔히 “나는 오늘 종일 일하였다.”라고 말한다. 인간이 24시간 쉬지 않고 일할 수 없다. 그럼에도 이런 말을 하는 것은 노동 자체가 현실 원리가 되었기 때문이다. 이 사회 자체가 억압에 기반을 둔 노동을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이도록 강요하고 조작하였기 때문이다. 테크놀로지는 인간을 중노동과 빈곤으로부터 해방시켜 주었지만, 대신 인간 스스로 자발적으로 자신을 통제하고 억압하도록 강요하는 메커니즘이 되었다.

산업혁명과 함께 이루어진 자본주의 체제도 이중적이다. 들뢰즈의 지적대로, 자본주의 체제는 중세 전제 왕권에 억압되어 있던 욕망을 혁신적으로 탈영토화, 탈코드화하는 반면에,  탈코드화하고 탈영토화한 욕망의 흐름을 교환가치라는 등가성의 논리에 재코드화하고 국가, 법, 종교, 교육, 특히 오이디푸스화 기능을 수행하는 가족 등을 통하여 재영토화하였다.

자본주의는 잉여착취를 기반으로 한 착취체제다. 자본가를 제외한 모든 이들이 착취를 당한다. 사용가치보다 교환가치를 우선으로 하기에 사물과 인간의 본원적인 가치를 교환가치, 곧 화폐가 대신한다. 자연히 사람들은 사물들로부터, 노동과 생산으로부터, 타인으로부터, 결국 자기 자신으로부터 소외된다. 그리하여 불안과 고독, 소외가 현대인의 표상이 되었다.

자본주의 체제는 확대재생산의 메커니즘을 동력으로 한다. 더 많이 욕망하고 더 많이 소비해야만 이 체제는 존속할 수 있다. 국가에서 매스미디어에 이르기까지 이 체제를 지탱하는 모든 제도가 법과 윤리, 도덕의 규제는 제한하고 욕망을 부추긴다.

여기에 더 불을 놓은 것이 바로 신자유주의다. 신자유주의로 인하여 자본의 욕망은 더욱 자유로워졌고 세계화하였으며 전 세계 차원에서 더욱 강한 강도로 타자를 착취하고 폭력을 행하고 있다. 신자유주의는 모든 상품을 욕망의 대상으로 만든다. 물과 같은 공공재를 팔아먹은 그들은 이제 자본의 마지막 꿈을 달성하는 데 총력을 기울이고 있다.

그 꿈이란 자본이 무의식과 상상의 영역까지 스며들어 가 상품화하는 것이다. 벌써 행복, 섹스의 쾌락만이 아니라 고통과 죽음도 상품이 되었다. 우리는 이제 그들이 설정한 대로 상품을 생산하고 임금을 받고 소비하는 데 그치지 않고 그들의 의도대로 꿈을 꾸고 행복하다고 말해야 할 것이다.

이럼에도 이 체제가 별로 저항과 도전을 받지 않는 것은 이 체제의 최대의 피해자인 노동자마저 화폐증식의 욕망, 곧 더 많은 돈을 벌려는 욕망을 추구하기 때문이다. 그 결과 자본주의와 신자유주의는 지구촌을 거대한 쇼핑센터로 만들었다. 누구든 안방에 앉아 뉴욕의 증시에 상장할 수도, 자바 커피를 주문할 수도 있다. 하지만. 욕망은 신기루이기에 상품소비는 욕망의 완성에 이르지 못한다. 그것과 상품 사이에는 늘 ‘벌어진 틈’이 있기에 대중은 끊임없이 소비를 하면서도 허기진다.

대다수가 취업과 출세, 그리고 개인의 욕망을 위해 매진하고 한 목표에 다다르면 다음 목표를 향해 또 온몸을 던진다. 일반 시민과 노동자들은 앉으면 부동산과 증권, 불륜 등 물질적 욕구와 욕망에 관련된 것만을 화제로 삼는다. 된장녀를 욕하면서도 끊임없이 더 좋은 상품 소비를 향해 부나방처럼 달려든다.

신자유주의로 사회 구성이 바뀐 것도 한 요인이다. 양극화가 심화하자 사회 구성은 가운데가 볼록한 열기구형 사회에서 가운데가 거의 사라진 모래시계형 사회로 이전하였다. 여기에 복지책은 거의 사라지고 사회적 안전망은 해체되었다. 상위의 기득권만 제하고는 모두가 생존의 위기에 직면한 것이다.

 이에 사회윤리와 도덕, 공동체의 미덕은 차츰 사라지고 약육강식과 적자생존의 논리가 지배하게 된다. 그들은 주변에서 기업이 도산하고 동료들이 퇴출당하는 것을 겪으면서 노동자의 조직보다 기업 경쟁력을 더 중시하게 되었고, 고용 안정성과 기업 경쟁력을 동일시하게 된다.

노조는 노동운동에 의해 자기 권리를 주장하는 것이 아니라 경제성장과 기업발전을 통해 자기들의 생활을 개선하려는 경향으로 기울어진다. 이런 상황에서 대중은 능력주의와 경쟁제일주의를 시나브로 수용하게 된다. 특히, 이는 구조조정을 겪은 사업장이나 개인에게서 더욱 강하게 나타난다. 고용 불안정의 구조적 항존성이라는 여건 속에서 ‘잘리기 전에 실컷 벌어놓자.’라는 도구주의적 태도가 강화되었고, 그 결과 임금과 고용 이외의 다른 문제에 대한 노동자의 관심과 문제의식은 크게 하락했다.

신자유주의 사회에서는 상위 1%만이 진정한 자유와 행복을 누릴 수 있다. 이에 오르지 못하는 모든 이들이 ‘루저’이다. 예전에는 가난한 학생이 상층으로 이동할 수 있는 통로가 교육이었다. 하지만, 신자유주의 체제에서 이는 거의 불가능해졌다. 상위 1%란 목표는 그들 수준의 자본력과 정보력이 있어야만 도달할 수 있다. 교육은 빈민으로 전락하지 않기 위해 필사적으로 벌이는 생존경쟁의 도구이지만, 그 생존경쟁은 이미 승자와 패자가 정해진 게임이다.

근원적으로 모두가 패자이고, 패자로서 상처를 받고 소외와 박탈감을 겪을 수밖에 없다. 그럼에도, 상위 1%에 오를 수 있다고 사이비 희망을 심어 주고, 그에 오르지 못하면 개인의 능력과 재주가 모자라서 그런 것이라며 부조리한 체제 자체를 합리화한다. 이런 과정에서 개인은 경쟁제일주의와 능력주의를 내면화한다.

여기에 더하여 MB정권은 신자유주의에서 탈피하려는 세계적 추세와 달리 그 극단을 향해 치닫고 있다. 정권 출범 한 달 만에 수도권규제 완화, 출자총액 제한제 폐지, 금산분리완화, 특별소비세 폐지, 토지거래허가제 폐지 등 온갖 규제를 풀어버리고, 88개 공기업을 민영화하였으며, 교육의 상당 부분을 사기업의 손에 넘겼고, 광우병 우려가 있는 쇠고기의 전면 수입을 도모하였다.

 CEO MB는 국가 자체를 기업화하였다. 그는 노골적으로 친기업 노선을 외치면서 20조 원이나 부자 감세를 단행하고 법인세를 인하하였으며, 4대강과 같은 토건사업에 드라이브를 걸고 있다. 이런 분위기에서 국민 대다수가 타인과 경쟁하여 살아남고 돈 버는 일에만 몰두하고 물적인 욕망만을 추구하며 물신(物神)의 노예로 전락하고 있다.

디지털 사회의 가상성과 영상시대의 이미지, 재현의 위기(the crisis of representation)도 이를 부추겼다. 대중매체는 현실과 아무런 관계없이 이미지를 만들어 현실을 조작하며, 대중은 현실을 그대로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대중매체가 만들어 주는 이미지에 따라 바라보고 행위를 한다. 고급 차, ‘럭셔리한’ 인테리어를 한 아파트, 감미로운 음악 등으로 중산층의 이미지를 창출한다.

대중은 광고 텍스트의 이미지를 환상적으로 받아들인다. 그들은 이 이미지 조작에 현혹되어 중산층이 되고자 여건이 허락하는 대로 멀쩡한 냉장고나 자동차를 고급의 것으로 대체한다. 더구나 그들의 삶이 실제로 중산층으로 변한 것이 아니라 소비양식만 그런 것인데, 럭셔리한 가전제품을 사용하고 있는 한 그들은 이미 중산층이다.

계급적 현실은 노동자이면서도 문화양식은 중산층이라 착각한다. 이런 ‘자동인형적 동조’ 속에서 그는 노동자라는 자신의 존재를 상실하고 중산층이 됐다는 환상에 젖는다. 이런 ‘사이비 행복의식’을 갖게 된 이들은 자기 삶의 조건 이상의 과잉소비를 하게 된다.

이처럼 이미지는 현실을 왜곡하고 사람들의 감각을 자극하여 이미지를 만든 자가 의도하는 행동을 이끌어낸다. 그리고 이는 다시 의도된 현실을 형성한다. 이미지는 이미지를 만든 자가 디자인한 현실을 만든다. 그러기에 21세기의 영토는 치열한 이미지 전쟁의 터로 변하고 있고 이 속에서 대중은 과잉억압 당하면서도 이를 인식하지 못한 채, 그의 극복이 아니라 일탈의 방편으로 과잉욕망을 배설하고 있다.

3. 대타자의 욕망과 폭력

흔히 인간의 악한 욕망이 타인에 대한 폭력을 낳는다고 생각한다. 과연 그런가. 틱낫한의 말처럼 인간에게 악의 씨앗도 있고 선의 씨앗도 있다. 프로이트는 에로스의 본능과 죽음의 본능인 타나토스 본능이 공존한다고 본다. 틱낫한이 볼 때, 악의 폭력이 나타나는 것은 선의 씨앗에 물주기를 게을리하여 선의 꽃밭에 꽃이 피지 않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악과 폭력은 개인의 문제가 아니다. 로빈슨 크루소는 소설에서나 가능하다. 인간이 행하는 모든 일상에 권력이 스며 있기에, 정치성을 제거하고 순수하게 처리하자고 하는 말과 행위 자체가 정치적이다. 사회 안에서 삶을 사는 한 인간은 사회의 원리와 구조와 제도, 권력 관계를 떠나서 존재할 수 없다. 선의 씨앗을 틔우지 못하게 하고 악의 꽃을 만발하게 하는 것은 사람이 아니라 제도와 구조이다.

프로이트가 볼 때, 에로스를 지향할수록 타나토스는 감소한다. 그런데 왜 옛날에 비하여 예술이 그리 만개하고 성과 사랑이 그리 자유로워지고 즐겁고 신나는 일들이 그렇게 많아졌는데 왜 더 폭력은 더 심화하는가. 마르쿠제가 잘 간파한 대로, 현대사회가 제도화한 탈승화(institutionalized desublimation)를 하는 데 성공하였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미국의 노동자가 흔들의자에 앉아 캔맥주를 마시며 상원의원과 비서 사이의 불륜을 다룬 드라마를 볼 때 그는 자신을 중산층으로 동일화한다. 동일화하는 순간 그는 기존 체제에 대한 반역을 상실한다. 억압을 예술과 사랑을 통해 승화하는 것이 아니라 탈승화하여 더욱 억압되는 것이다. 이런 메커니즘이 작동하는 기술사회는 이미 기술의 개념과 구조 안에서 작용하는 지배체제이다.

라캉의 말대로, 인간은 대타자를 욕망하고 대타자의 욕망을 욕망한다. 단독자로서 나는 욕망을 증대하는 것이 나를 확대하는 길이다. 조금 더 많이 소유하기 위하여, 자신의 결핍을 채워 만족의 상태에 이르기 위하여, 자신의 존재 확대를 위하여 나를 확대하는 것이다. 그런데 이는 타자의 욕망을 점유함으로써 이루어지는 것이기에 타자에 대한 폭력으로 나타난다. 죽음과 파괴의 본능도 관여하지만, 나의 욕망은 타자의 욕망을 욕망하는 것이기에, 욕망은 타자에 대한 폭력으로 표출된다.

내 안에 네가 있다. 앞 장에서 이야기했듯 자아는 거울 단계에서 타자를 통하여 주체를 형성하기에 자아는 나이면서 타인이다. 이 모순과 괴리 때문에 주체는 불안하고 자아도취에 젖어 자신의 정체성을 무엇이라 규정짓고 그에 빠져들면서도 그것이 아닌 듯하여 불안하다.

때문에 불안한 자아는 타인으로부터 끊임없이 인정받기를 욕망한다. 이 인정은 두 가지 경향으로 나타난다. 동일성의 패러다임에서 벗어나지 못할 때 인정 욕망은 타인에 대한 폭력으로 나타나며, 타자에 대한 배려를 통해 인정을 받으려 할 때 타자와 공존으로 나타난다. 

동일성이 형성되는 순간 세계는 동일성의 영토로 들어온 것과 그렇지 못한 것으로 나뉜다. 동일성은 ‘차이’를 포섭하여 이를 없애거나 없는 것처럼 꾸민다. 동일성은 다른 민족이든 반대자든 병든 자든, 동일성의 영역에 들어오지 않는 모든 것을 ‘타자’로 간주한다.

그리고 자신과 구분시키면서 ‘배제’하고 이에 ‘폭력’을 행사하면서 동일성을 강화한다. 물론 자원, 이데올로기, 시장, 종족 및 국가 사이의 갈등 등의 요인도 작용하였지만, 20세기에 자행된 전쟁과 대학살의 근저에는 동일성의 패러다임에서 비롯된 ‘배제와 폭력’의 담론이 내재한다.

루시퍼효과(Lucifer Effect)는 악의 평범성을 뜻하기도 하지만, 인간이 본래 악한 것이 아니라 어느 위상에 서서 타자를 설정하고 그들을 배제하고 폭력을 행사하면서 동일성을 강화하는 존재임을 잘 드러낸다. 스탠퍼드 대학의 필립 짐바도 박사는 1971년에 평범한 대학생들에게 교도관과 죄수 노릇을 하게 하였다. 학교 지하실에 설치한 감옥에 자원자인 대학생 24명을 교도관과 죄수로 나눠 2주간 지내게 하였다.

소위 ‘스탠퍼드 교도소 실험’은 전혀 예상하지 못한 방향으로 전개되었다. 교도관을 맡은 학생들은 죄수역을 맡은 학생들에게 가학행위를 서슴지 않으며 갈수록 악랄해졌고, 죄수를 맡은 학생들은 신경쇠약에 시달렸다. 실험은 엿새 만에 중단됐고 짐바도 박사는 이를 35년 만에 공개하고 ‘루시퍼 효과’라 명명하였다.

우리는 그 모습을 얼마 전 이라크의 아부그라이브 포로수용소에서 다시 목격하였다. 미군들은 이라크와 아프가니스탄에서 재미 삼아 민간인을 살해하기도 하였다. 오리엔탈리즘과 백인 우월주의에 젖어 있는 백인에게 유색인은 함께 대화를 나눌 사람이 아니라 타자들이다. 더 나아가 마구 때리고 가지고 놀다 버려도 되는 사물들이다. 폭력은 인간을 사물화한다,

무인항공기의 사례는 재현의 위기 시대의 폭력 실상을 소름이 끼치도록 입증한다. 국방성에 몇몇 사람이 출근을 한다. 그들은 대형 모니터를 본다. 거기엔 이라크 현장이 게임 화면처럼 나타난다. 그를 보며 그들은 버튼을 누른다. 게임하듯 버튼을 누른 것이지만, 이라크의 현장에서는 무인비행기 프레데터가 총을 쏘고 미사일을 투하하여 지상 기지를 폭파하고 이라크인을 죽인다. 버튼을 누른 국방성의 직원은 어느 정도 죄책감을 느낄 것이다. 하지만, 직접 총을 쏘고 폭탄을 누른 자의 그것에는 이르지 못하리라. 디지털 시대에 와서 폭력 또한 시뮬라시옹으로 변하는 것이다.

4. 대안의 길

그럼 지금 여기에서 대안은 무엇인가. 욕망은 끊임없이 변신을 하고 위장을 한다. 내가 아버지를 죽이는 꿈을 꾸었다고 죄책감을 가질 필요가 없다. 아버지는 나의 그림자, 곧 나의 자아 가운데 내가 싫어하는 인격의 환유다. 나는 그런 자아에서 벗어나고 싶은 것이다. 한 청년이 꿈속에서 매일 백합꽃을 꺾는 꿈을 꾸었다. 청년은 실제로는 백합꽃의 은유를 형성하는 마을의 귀족 부인과 성행위를 하고픈 욕망을 갖고 있었기 때문이다. 욕망의 변신과 위장을 걷고 욕망을 직시하는 것이 가장 먼저 행하여야 할 작업이다.

스님이 아닌 재가불자조차 욕망의 지멸을 모색할 필요는 없다. 삶의 차원에서는 욕망이 없으면 창조도 진보도 없다. 욕망은 모든 창조와 진보의 원동력이다. 에로스의 욕망이 사라지면 그만큼 타나토스의 욕망이 증대한다. 현대 사회에서 억압의 탈승화는 경계해야 하지만, 에로스의 욕망을 버릴 필요는 없다. 에로스의 욕망마저 사라지면, 그곳엔 폭력과 파괴와 죽음만이 난무할 것이다.

경험을 통해서든 정신적 자각을 하든, 아니면 양자가 종합적으로 작용하든, 무명을 소멸시키는 계기만 마련되면 깨달음은 저절로, 안으로부터 생긴다. 마치 임계치 이상의 물리적 충격을 받은 물질이 배열구조가 바뀌어 화학변화를 일으키는 것처럼, 깨달음이란 원래 깨달을 수 있는 바탕을 지니고 있는 인간이 어떤 계기를 통하여 연기와 무아에 대하여 새롭게 인식하고 자신의 정신과 몸 안에 간직된 온갖 경험과 기억과 의식을 찰나적으로 재배열하여 자신의 존재를 전혀 다른 존재로 거듭나게 한다. 그래서 이 존재가 새로운 지평에서 진여실제에 다가가는 것으로, 말로는 표현할 수 없는 자유롭고 평안한 상태에 이른 경지다. 이때 금욕은 깨달음의 지붕에 이르는 사다리다.

하지만, 보살행은 윤리적 당위일 뿐 아니라 연기의 지혜에서 비롯된다. 소승적 깨달음이 철저한 금욕으로 귀결되었다면, 대승적 깨달음은 보살행을 낳는다. 욕망에 물든 중생을 구제하려면 그들의 욕망과 함께해야 한다. 욕망 속에 있으면서 탐진치에 물들지 않고 이에서 벗어나 깨달음에 이르는 것이다. 나는 우선 지혜로써 모든 경계를 파악하여 온갖 사념과 망상을 떨쳐버리고 금욕을 하고 지행(止行)과 관행(觀行)을 쌍으로 부려 깨달음에 이른다.

중생이 고통 속에 있는 한, 설령 깨달았더라도 나는 아직 부처가 아니니, 먼저 깨달은 자는 항상 큰 자비로써 고통의 바다에서 허우적거리는 중생들의 의혹을 제거하고 삿된 집착을 버리게 하여 그들을 깨달음에 이르도록 한다. 그럴 때 나 또한 진정한 깨달음의 세계에 이를 수 있다. 이럴 때 욕망은 깨달음으로 가는 길이니, 번뇌가 곧 열반이다.

하지만, 문제는 사회 속에서 홀로 존재하는 개인은 없다는 점이다. 우리는 인드라망처럼 무수히 연관되고 조건이 되는 사회 관계망 속의 개인이다. 라캉의 인정 욕망과 불교가 만나는 접점이 연기론이다. 인간이 모두 이기적인 욕망을 추구하는데 세상이 지옥으로 변하지 않은 것은 인정 욕망을 추구하기 때문이다.

나의 실존을 추구하는 내 존재가 타인과 공존할 수 있는 것은 타인의 시선을 의식하고 타인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기 때문이다. 모든 것이 서로 관련을 맺고 있고 인과관계에 의한 것이기에, 공한 것을 알면 자성(自性)을 부정하게 된다.

자성을 부정하면 자성에 대한 집착에서 벗어난다. 무의식은 우리 사이에 존재하기에 나는 타인의 인정을 받기 위하여 이기적 욕망을 유보하고 타인을 먼저 배려할 수 있다. 이 순간 나는 욕망의 자발적 절제를 할 수 있다.

욕망이란 나를 채우려는 것인데 욕망할수록 나에게서 멀어지며 욕망은 만족인데 만족을 느끼는 순간 사라져버리는 역설을 자각하는 것, 나의 삶이 다른 타자들, 나아가 모든 생명들과 긴밀하게 연관되어 있음을 깨닫고 그를 위하여 나의 욕망을 자발적으로 절제하는 것, 욕망을 과잉 억압하는 것에 저항하여 서로가 선한 욕망이 샘솟도록 하는 것―이것은 선이 아니라 지혜다.

본래 이기적인 욕망으로 들끓고 있는 인간이 당위적인 차원을 넘어 구체적으로 어떻게 타인을 만나 이기적 욕망을 절제하고 갈등을 말끔히 해소할 수 있을까. 이에 대한 답을 업(karma), 원효의 삼공(三空)을 통한 화쟁에서 찾는다.

① 만남
: 화해와 상생은 타인과 ‘만남’에서 시작한다. 레비나스(E. Levinas)의 표현대로 인간이란 만날 때마다 이 만남 자체를 상대방에게 늘 표현하는 유일한 존재다. 서로를 적으로 볼 것이 아니라 나를 부처로 만들 수 있는 이로 여기며 만남을 갖는다.

② 대화
: 만남은 감성의 소통과 대화를 부른다. 우리는 타인을 만나 타인을 바라보고 타인의 시선을 느낀다. 타인이 웃고 있으면 내 얼굴의 근육도 긴장을 풀고 미소 짓는다. 타인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이에 대답한다. 타인의 향기에 매혹되어 그를 몸 깊숙이 끌어들여 내 몸의 일부를 만든다. 또 악수와 포옹을 하며 서로 따스한 온기를 주고받는다. 이어 입을 열어 말을 한다. 말은 두 가지다. 하나는 내 세계를 드러내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타인의 세계에 대한 관심이다. 긍정과 부정, 질문과 답이 이어지면서 차츰 우리는 자기 세계 안에 타인의 세계를 설정하고, 자신의 몸 안에 타인을 담는다.

대화는 변증법적이며, 대대적(對待的)인 동시에 화쟁적이다. 대화란 코드와 세계관이 같은 자가 아니라 다른 자 사이의 소통이다. 나와 전혀 다른 세계에서 다른 세계관과 문화 양식을 가지고 생활하던 이들이 마주쳐 다른 세계와 사람을 느끼고 이해하고 서로 다른 코드를 맞추려 노력하며 그 세계와 타인을 자기 안에 담기 위하여 소통하는 것이다.

③ 공정한 중재와 변증법적 종합
: 내가 전혀 다른 세계와 몸을 가진 타인과 만났을 때, 서로 대립되는 것들이 지양을 통해 종합을 이룬다. 국가와 시민이든, 자본가와 노동자든, 이해관계가 마주치는 사람이든, 서로의 욕망이 부딪혀 갈등을 일으키고 폭력이 행사되려는 상황을 생각해 보자. 이때 공정한 중재와 변증법적 종합을 이루려면 먼저 진실이 낱낱이 투명하게 공개되어야 한다.

또한, 단순히 형식적으로 민주적일 뿐만 아니라 당사자들 모두의 권력이 대칭적이어야 한다. 중재를 맡은 사람이나 기관은 단순히 중재하는 데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공정하고 합리적인 중재자로서 갈등에 관련된 모든 진실을 낱낱이 투명하게 공개해야 하고, 당사자 사이에 권력이 똑같이 작용하도록 조정해야 한다. 권력이 비대칭이면 대화도 비대칭이며, 완전한 화해가 아니라 권력에 의한 강제로 귀결된다. 다른 것이 있더라도 서로 인내심을 가지고 만나고 또 만나고, 대화하고 또 대화하면서 서로 같은 것에 맞추어 다른 것을 버려야 한다.

④ 일심이문(一心二門)의 화쟁
: 당위적인 화쟁이 아니라 생멸문(生滅門)에서는 둘로 갈라진 현상을 조사하여 갈등을 일으키고 있는 구조적, 제도적 원인을 분석하고, 모든 결정은 갈등 당사자들의 합의를 통해서 하되 결정과정 또한 투명해야 한다. 여기서 화쟁으로 가는 데 방해하는 것이 사람이라면 합의를 통해 내쳐야 하며, 제도라면 제도개혁도 함께 해야 한다. 변증법적 종합으로 다룰 수 없는 사항은 종합될 수 없는 차이로 간주하고 서로 인정해야 한다. 이 과정에서 필요한 것이 다른 것을 인정하는 차이의 정신, 인내심, 같은 것에 맞추어 다름을 포용하는 회통(會通)의 태도다.

⑤ 아우름
: 양자의 대화가 더 높은 차원에 이르면, 자신의 세계를 말하려 하기보다 타인의 세계를 알려 하고, 또 닮으려 한다. 대대(對待)란 기다리면서 자기를 비우고 그 비운 곳에 타인을 채우는 것이다. 나를 주장하고 같음을 요구하는 것을 멈추고, 타인의 세계로 들어가서 그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다름을 포용하면서 차츰 그와 닮아가는 과정이다. 진정으로 사랑하는 자를 보면, 고등어를 먹지 못하던 이가 사랑하는 이가 먹는다니 먹어 보고 이주노동자를 혐오하던 이가 사랑하는 이가 그런다니 포용한다.

그러니, 오랫동안 진정으로 사랑하는 부부를 보면, 먹는 것에서 시작하여 입는 것은 물론, 얼굴마저 비슷해진다. 그러기에 진정한 대화란 서로 다른 둘이 만나 소통을 통해 완전한 하나가 되는 동시에 하나이면서도 너와 내가 각각의 주체로 존재하는 경지이다.

⑤-① 업의 받아들임
: 시간이 업과 얽히면서 업은 시간에 따른 존재의 변이가 정의롭게 일어나도록 통제하는 원리가 된다. 짧고 직선적인 시간관만으로 보면, 착한 자가 고통을 받고 선한 일을 하면 손해 보는 부조리로 만연한 곳이 이 세상이다.

그러나 길고 둥그런 시간관으로 보면, 선한 자가 고통을 당하는 것은 전생의 죄업을 씻는 과정이다. 곧 선한 자가 고통을 받는 것은 전생에서 죄업을 지었기 때문에 그 원인으로 고통을 받는 것이다. 또한 지금의 고통은 고통이라기보다 선업을 쌓는 과정이요, 다시 이 선업이 원인이 되어 나의 후생은 행복한 삶이 될 수 있다. 인도에 가면 거지가 당당하게 구걸을 한다. 구걸이 상대방의 죄업을 씻어주는 행위이기 때문이다. 업의 원리를 받아들이면, 윤회가 신화든 아니든, 우리는 자신의 이기심과 욕망을 버리고 타자와 상생하여 선업을 쌓으려 한다. 

⑤-② 아공(我空)
: 아공은 ‘자기애’ ‘자기의 버림’ ‘자기의 거듭남’의 3단계를 거친다. 아(我)란 오온(五蘊)의 가합(假合)으로 허상이지만 연기적 관계 속에서 가유(假有)로서 내가 생성하는 것은 사실이다. 자신을 철저히 사랑하는 자만이 타인을 진정으로 사랑할 수 있다. 지극히 아름다운 산이 눈앞에 펼쳐져 있을 때 그것을 자신의 재산과 집과 바꾸자고 하면 많은 이들이 응하겠지만, 설사 그 산이 온통 다이아몬드로 이루어져 있다 할지라도 자신의 목숨과 바꿀 사람은 없을 것이다.

불교의 불살생(不殺生)과 동체대비(同體大悲)는 자기애(自己愛)와 연기적 깨달음에서 비롯된다. 내 목숨이 소중한 만큼 타인의 생명이 소중하다는 깨달음에 이르고, 타인의 고통과 절망을 나의 고통과 절망처럼 아프게 공감할 때 동체대비의 자비심이 일어난다.

다음은 자기를 버리는 것이다. 나는 오온의 가합으로 본래 허상이다. 나는 홀로 존재하지 못하며 무수한 연관관계와 조건 속에서 관계하고 생성하는 자일 뿐이다. 그러니, 자기의 본성이 무엇이라는 생각, 자신의 정체성을 유지하려는 태도, 자신의 행복과 욕망을 추구하려는 마음과 행위를 버리지 못하는 한 나는 타인과 상생할 수 없다. 인간의 욕망이란 것 자체가 타인의 욕망을 빼앗음으로써 충족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자기의 버림은 연기에 대한 인식에서 비롯된다. 각 존재자는 우리의 범주에 들어온 타자를 위해 자신의 욕망을 자발적으로 절제하거나 포기한다. 타인과 나와의 관계를 깨달아 나를 온전히 버릴 때, 그 비움 속에서 상대방을 섬길 수 있는 틈이 생기는 것이다. 버려야 비워지고 비워줘야 채워지니, 버림과 비움과 섬김은 하나다.

⑤-③ 법공(法空)
: 갈등이 이는 것은 갈등을 일으키는 생각이 있기 때문이다. 법공은 모든 이데올로기나 편견뿐만이 아니라 교리와 진리 자체에서도 벗어나는 것이다. 어떤 성스런 교리나 진리도 인간을 넘어서지 못한다. 종교 이름으로 빚어진 숱한 학살과 전쟁에서 보듯, 이를 해체하지 못하고 추종할 때 다른 종교나 진리를 배제하고 폭력을 가하게 되고, 스스로는 도그마에 빠진다. 교조는 지성의 무덤이다. 이데올로기나 교리, 진리 자체를 부숴 버리고 사람 그 자체가 만나 사건을 그 자체로 놓고 여여(如如)하게 인식하고 대화할 때 갈등은 진정으로 해소된다.

⑥ 공공(空空)의 상생
: 공공, 혹은 눈부처의 상생은 내 안의 타자, 타자 안의 내가 대화를 하여 하나로 어우러지는 것이다. 이는 두 사람이 서로 감성에 의해 차이를 긍정하고 몸으로 상대방을 수용하고 섞이면서 생성된다. 나와 타자 사이의 진정한 차이와 내 안의 타자를 찾아내고서 자신의 동일성을 버리고 타자 안에서 부처를 발견하고서 나 또한 부처가 되는 길이다.

이런 모든 것보다 중요한 것은 서로를 먼저 배려하여, 타자의 고통에 공감하여, 욕망을 자발적으로 절제하면서 타자를 자유롭게 하여 자신의 자유를 실현하는 공동체를 만드는 것이다. 1970년대까지만 하더라도 공동체를 이루고 있는 마을에서는 범죄도, 타인의 재물이나 여인을 탐하는 자도 극히 드물었다. 광주민중항쟁으로 그 며칠 동안 절대 공동체를 이룬 때, 모두가 하나가 되어 일하고 놀고 싸웠다.

대의와 새로운 사회와 신명이 나는 빛고을을 이루려는 에로스의 욕망만 있었을 뿐, 개인의 이기적 욕망은 없었다. 모든 재물을 공유하였고, 소매치기도 도둑도 없었다. 그런 공동체를 만들 일이다. 단, 대의만으로는 언제든 무너질 수 있고, 그것이 초자아가 되어 억압할 수 있기에 공감의 연대, 에로스의 욕망을 구현하는 신명이 나는 예술과 놀이마당이 함께 이루어져야 한다.

현실이 없는 유토피아가 공화(空華)처럼 공허하다면, 유토피아의 꿈이 없는 현실은 사막처럼 삭막하다. ■

 

이도흠
한양대 국어국문학과 교수. 한양대 국문과 및 동 대학원 졸업. 의상·만해연구원 연학실장, 한국학연구소 소장, 《문학과 경계》 주간 등 역임. 현재 실상사 화엄학림 외래강사, 대한불교 조계종 포교원 통일법요집편찬 연구위원.저서로 《화쟁기호학, 이론과 실제》 《신라인의 마음으로 삼국유사를 읽는다》 등 다수. 본지 편집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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